36화 아홉 번째 투자 02
<31>
아니, 근데 저 여자는 박소희인데.
편의점 앞.
편의점 간이테이블들.
여름철이라 편의점은 간이테이블 숫자를 늘려놨고.
깊어지는 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컵라면 등을 먹고 있었다.
한편, 입구에서 가장 먼, 구석진 곳.
그곳엔 화학 공장 경리과 직원 박소희가 앉아 있었고.
저번에 한번 봤던 여자친구들과 어울려,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근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지?’
현재, 박소희의 표정은 생각보다 좋지 못한 듯 보였고.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다소 심각해 보였다.
특히, 그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술을 마신 지 이미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모른 척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
띡! 띡! 띡!
“···다 합쳐서, 7,500원입니다.”
“네. 여기요.”
신용카드를 즉시 건네주자, 바로 계산이 되었다.
계산된 물품은 손에 이리저리 들고서 한쪽으로 이동했고.
컵라면 뚜껑을 연 뒤.
온수기 밸브를 열어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소시지 등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살짝 돌린 뒤 바로 꺼냈다.
그렇듯 준비를 마쳤으나 이때 문제가 있었다.
지금 앉을 자리가 없다.
편의점 바깥 테이블도 인산인해.
편의점 안쪽 창가 자리도 상황이 비슷했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앉을 자리가 꽉 차 버렸다.
오늘 밤은 워낙 선선하면서도.
또한, 시원시원한 바람이 불다 보니.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나온 것 같았다.
본격적인 장마가 곧 시작된다고 하더니.
벌써부터 기후 변화가 이렇게 생긴 모양이었다.
앗! 비웠다! 저기!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일어섰고.
재빨리 뛰어가 휴지통 옆자리를 간신히 차지했다.
바로 옆에는 대형 휴지통이 있긴 하지만.
우선, 자리를 얻는 게 중요했고.
그래서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소시지 등과 맥주 캔을 먼저 그 자리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온수기 옆에 잠시 놔뒀던 내 컵라면을 가져왔다.
오케이! 자리도 잡았으니까.
그리고 어느덧 시간도 흐른 터라.
바로 컵라면 뚜껑을 제거했고.
잠시 후, 볶음 김치를 곁들이며.
후루룩!
라면을 연신 먹으며 허기를 지워나갔다.
#
근데, 왜 저럴까?
저 여자는?
박소희 말이다.
편의점 앞에 놓여 있는 총 4개의 테이블들.
다행히 바로 옆으로 환한 야간 조명이 있어.
편의점 바깥 모습은 편의점 안에서도 잘 보이는데.
테이블 가장 우측 끝자리에 앉아 있는 박소희는 평상시의 웃는 모습이 아니라.
무척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친구들과 대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박소희는 연신 소주잔을 비우고 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친구.
그 친구는 계속 박소희의 소주잔을 채워주고 있는데.
박소희는 안주도 없이 계속 소주를 연달아 마셨다.
한편, 취기가 올라온 듯,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이때, 뭔가에 이끌리듯.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쳐다보고 있던 나.
순간, 심장이 덜컥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훔쳐보다가 걸린 것 같은 마음.
그래서 고개를 바로 숙인 채 컵라면 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웬걸, 박소희가 보이지 않는다.
‘어? 대체 어디 갔지?’
의아해하며 주위를 계속 살피던 중.
그때, 갑자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같이 대화하던 여자들.
그 여자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박소희만 없다는 것은···.
앗!
그때였다.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혀가 약간 꼬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가 바로 내 귀에 들려왔다.
#
“한수씨, 맞죠?”
에휴, 박소희, 그 여자다.
뭔가 알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여자.
그러나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선 횡령범인 박소희.
어쨌든 나는 짐짓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돌렸다.
얼굴엔 취기가 달아올라, 안색이 붉게 변한 박소희가 바로 뒤에 서 있었고.
좀 전까지 무척 굳어있던 그녀는 지금 어색한 표정을 하고서 웃고 있었다.
“아, 저는 라면 좀 먹으려고 나왔는데.”
한편,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더 어색해졌다.
지금 나는 라면을 먹고 있는 중이다.
그걸 반복하듯 말한 격이어서.
어감상 확실히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취기가 많이 오른 듯 그녀는 내 말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한수씨, 저기 제가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네?”
그러나 박소희는 그렇게 말을 한 걸 금방 취소해 버렸다.
“아! 아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괜한 말을 했네.”
“아뇨. 괜찮습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아, 아뇨. 아니에요. 저는 그냥 한수씨가 보이길래··· 인사나 드리려··· 아, 제가 많이 취했어요··· 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박소희는 휘청! 비틀거리다가.
다시 자세를 잡았고.
날 쳐다보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이때, 어쩔 수 없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그러자 박소희는 등을 돌려 나갔고.
비틀비틀 걸으며.
잠시 후, 자신의 테이블 자리로 가서 앉고 있었다.
#
아아, 진짜 괜히 신경이 쓰이네.
내가 다녔던 회사.
그 회사를 도산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여자.
그래서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 내가 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졌을까.
절대 아니다.
네버(Never)!
절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횡령 사건이 발생하고.
공장이 부도처리가 된 이후.
그때서야 나는 박소희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커졌다.
그전까진, 이런 식의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고 해도.
아마 기억 속에 그걸 구태여 남겨두진 않았을 것이다.
근데 저 여자···.
오늘따라 왜 저렇게 심각할까.
따뜻한 컵라면 국물을 쭉 마시면서도.
나는 계속 바깥을 쳐다봤는데.
다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박소희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사정인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마침,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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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자리의 쓰레기들을 정리해서 옆 휴지통에 버린 뒤.
나는 담배 한 갑을 사서,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이때, 후줄근한 체육복 차림의 또 다른 고시원 사람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오늘 밤 고시원 사람들마저 편의점을 줄기차게 찾고 있다.
그런 변화와 모습들을 힐끔 쳐다보다가.
나는 저쪽 가로화단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 라이터 좀 빌려주시겠어요?”
먼저 담배를 피던 사람.
그 사람한테서 라이터를 빌렸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하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나는 맥주 캔을 땄다.
그리고 그때부터 귀를 쫑긋 세웠다.
비록 조금 떨어진 거리지만.
그나마 거리상 가까운 거리.
도대체 박소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운 끝에.
잠시 뒤, 희미하지만.
박소희가 하는 이야기들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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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미친··· 그··· 뭐라고··· 너희도··· 그래··· 하지만 그건······.”
하! 돌겠네.
띄엄띄엄 들려오는 박소희의 목소리.
그래서 더 답답해진다.
호기심 때문에 귀를 기울였으나.
대화가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그저 격앙되어 말할 때마다 한 번씩 들려올 뿐.
이래선 대화의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하긴!
아직 부도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벌써부터 무슨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경리과 직원 박소희가 아니라.
금융재벌 아시아지역 투자 이사가 되어 나타난 박소희가 훨씬 더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얼른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 입안의 담배 흔적을 희석시켰고.
쓰레기들을 편의점 휴지통에 버린 뒤.
다시 고시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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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계단을 빠르게 밟아.
고시원 3층으로 올라갔고.
발소리를 좀 더 죽인 뒤, 내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통로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는 갑자기 흠칫하며 잠시 멈춰섰다.
내 방 입구 쪽.
그 앞으로.
옆방에 살고 있는 아저씨가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쳐다보며 서 있었고.
내 방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이때, 내 인기척을 느낀 듯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움찔하더니 시선을 회피하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저런 모습인 그.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까 계단에서 요란하게 내려오다가 갑자기 2층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지금은 내 방 앞에 서서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바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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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무슨 일로?”
즉, 내 방 앞을 왜 가로막고 있냐, 그런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중년 아저씨의 눈동자.
나는 거의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를 또렷이 쳐다봤다.
핏기가 있고, 또한 무척 피로한 눈이다.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그는 무척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간··· 있나?”
“네? 시간은 왜요? 무슨 일인데요?”
내가 즉시 되묻자,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대체 뭘?
“말씀하세요.”
내가 재촉하듯 바로 대꾸하자, 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는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또 숙였다.
그리고 멍하니 바닥을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양···.”
“네?”
“···복··· 좀···”
“네??”
근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양복.”
순간, 갑자기 빨라진 그의 목소리.
그래서 나는 더 의아했다.
“양복은 왜요?”
“좀··· 빌려줄 수···?”
“양복을 빌려달라고요?”
“어···. 사, 살 돈이 없어서···.”
양복을 빌려달라.
그 부탁을 하려고 저렇게 서 있었단 말인가.
“근데 양복은 왜 필요하세요?”
“···면접.”
“네?”
“회사 면접.”
순간, 나는 깜짝 놀란 듯 그를 쳐다봤다.
설마 사법고시 시험을 포기했나.
쉴 새 없이 시험에 낙방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던 남자.
그리고 그렇게 보낸 시간만큼이나 점점 더 폐인과 다름없이 변해 버렸던 남자.
찬란해야 할 인생의 황금기를 내내 어두운 고시원에서 보내고 있었고.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져.
이젠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된 남자.
근데 그런 그가 내가 입고 다녔던 그 정장을 유심히 쳐다봤나 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내 정장을 빌려달라는 거다.
한편, 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저 아저씨는 고시원을 떠났었는데.
설마, 그 이유가 바로 취업 때문이었단 말인가.
근데 저런 말투로 취업이 가능한 것일까.
아니지.
자신감이 붙는다면 또 다르겠지.
아까 갑자기 ‘양복!’이라고 말하며 말을 빨리한 것도 있었고.
그간 고시원 공부량도 많을 테니.
가장 중요한 순간엔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네! 제가 빌려드릴게요.”
내 정장이 자신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면, 그 정도 못 빌려주랴.
내가 즉시 웃으며 대꾸하자.
그의 표정이 갑자기 확 밝아졌다.
“근데 잠시만요.”
나는 그의 체구를 대충 눈으로 확인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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