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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21화 (21/138)

21화 폭설, 그리고 일곱 번째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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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뒤.

나이가 지긋한 담당 의사가 간호사 몇몇과 함께 나타났다.

할머니를 보살폈던 의사와 간호사들.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조문을 마쳤고.

그 중의 의사는 맞절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가져온 상자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이건 고인께서 상주 분한테 꼭 전해달라고 하신 건데, 맹세코 제가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고.

나는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과거에도 받았던 그 선물 상자.

이번에도 그저 담담하게 그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신문부고 기사는 곧 나갈 겁니다. 고인께서 원하신 대로 중앙 일간지 세 곳에 부고 기사를 요청했고···.”

그 부고 기사 또한 할머니가 계획한 것이다.

잠시 뒤, 의사와 간호사들은 빈소를 조용히 나갔고.

바로 옆 공간에 잠깐 앉아, 따뜻한 육개장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다시 빈소로 돌아온 나는 가만히 앉아 영정 사진을 쳐다보다가.

잠시 후, 그 상자를 열어봤다.

물론,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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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천만 원.

편지 한 통.

그리고 사진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반지, 목걸이 등의 귀금속들.

그중에서 나는 편지 한 통만 꺼낸 뒤, 그 상자를 바로 닫았다.

그러고는 그 편지 봉투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편지를 꺼내 열어봤고.

한참 편지를 읽어내리다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지난 추억들.

지난 이야기들.

나에 대한 염려.

미안함의 감정.

아쉬움의 감정.

그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할머니의 편지.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다시 떴는데.

내 두 눈은 어느새 짙게 충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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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무척 느리게 흘러갔는데.

과거의 나는 금요일, 토요일, 이틀간 공장 휴가를 낸 뒤, 이후 일요일까지 3일간 이곳에서 보냈다.

지금은 회사와 상관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건데.

그래서 특별한 조문객이 없는 빈소를 지키며.

어느덧 금요일이 지나, 토요일 자정이 되었고.

발인이 예정된 일요일의 새벽이 되자, 마음이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상길이 형이 이번에도 나타날까?

그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새벽 3시.

빈소 옆, 작은 방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나는 깨어났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얼른 방에서 걸어 나왔다.

빈소에서 들려오는, 거칠게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고.

빈소로 연결된 문을 열고 확인하던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약간 커졌다.

바닥에 엎드려 비통해하며 울고 있는 남자.

그런 남자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정옥순 할머니의 친손자.

상길이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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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번에도 똑같았다.

한쪽 옆.

바닥 쪽.

살벌한 칼 한 자루를 내려놓고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인 채 울고 있는 그의 모습.

이때, 나는 조용히 다가갔고.

내가 착용하고 있던 상주 완장을 벗은 뒤.

그의 옆에 조용히 내려놨다.

그러고는 의사한테서 받았던 그 상자를 가져와 그의 옆에 또한 내려놨다.

물론, 할머니가 날 위해 썼던 편지는 제외했다.

그 일들을 마친 뒤 나는 천천히 물러섰는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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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그는 내내 울기만 했고.

날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오로지 머리를 숙인 채 하염없이 울었고.

그러다가 새벽 5시 무렵 조용히 사라졌다.

내가 줬던 상자도 전혀 손대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사라졌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고개를 들어 날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고.

충혈됐던 두 눈이 조금씩 진정되며.

다소 눈빛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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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접니다. 한수··· 김한수.”

무척 기분이 이상해져, 이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

그는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상자를 쳐다봤고.

나는 즉시 설명했다.

“···그 상자는 할머니께서···.”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더는 상자를 쳐다보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때, 그가 일어서자, 마치 내 앞으로 시커먼 악마가 도래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정도인데.

시커먼 외투를 걸친 그의 체격이 워낙 큰 데다가.

아무래도 선입견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상길이 형은 살인자다.

그리고 그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칼을 가져왔다.

그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대체 왜 저러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분위기상,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척 침울한 목소리가 갑자기 내 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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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 가셨겠지?”

좋은 곳?

좋은 곳이라···.

“···네. 아마도···.”

“마지막을 봤나?”

“네···.”

내가 바로 긍정하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상길.

그러고는 다시 날 쳐다봤다.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게 된 김상길의 모습.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고.

체격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무척 단단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차가운 눈빛.

아무래도 지난 세월의 간극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알던 김상길과 달랐고.

무척 낯설어 보였다.

어느덧 서른 살이 된 김상길.

2010년 올해, 26살이 된 나하곤 4살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과 기도를 보이고 있었고.

외면적으로 봤을 땐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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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할머니의 임종 때의 일을 내가 잠깐 설명했는데.

그는 묵묵히 들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과거엔 없었던 행동이었고.

사실, 이런 대화 자체가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우선 명함 같은 걸 받았다.

그런데 잠시 뒤.

나는 좀 어이가 없어졌다.

제이텔레콤?

어느 휴대폰 매장의 약도가 뒷면에 그려져 있는 명함인데.

이른바 영업용 명함.

이때, 상길이 형은 슬쩍 설명을 추가했다.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전화해라. 무조건 도와줄 거다.”

무조건 도와준다? 대체 뭘?

휴대폰 개통하는 거?

휴대폰 바꾸는 거?

“상길이 형. 대체 여긴···.”

당황한 내가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고, 그러자 그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끝까지 부탁 좀 하자. 고맙다. 한수야.”

그러고는 내 어깨를 꼭 잡았고.

무척 묵직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몰라도.

상주 완장을 내 팔에 다시 채워준 뒤.

쓴 미소를 짓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이어서 바닥에 있던 칼도 회수했는데.

그런 뒤 그는 빈소를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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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다.

회귀 전의 상황과 다르게.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상길이 형은 날 쳐다봤고.

나한테 말을 걸었고.

이 이상한 영업용 명함도 나한테 건넸다.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

그리고 그때보다 그는 더 일찍 빈소를 떠났다.

도대체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상길이 형이 떠난 뒤, 나는 계속 그 생각에 빠져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고.

혹시나 빈소의 모습이 과거와 달라졌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기도 했다.

변화가 야기됐다는 것은 뭔가 인과가 있다는 말이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

원인이 변형됐으니 결과가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한참 뒤.

나는 마침내 그 원인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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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돌려 정옥순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이 초라한 빈소.

조문객도 없고 모든 게 쓸쓸한 새벽의 빈소.

항로 속, 하얗게 타버린 길쭉한 향초들.

아직도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는 몇 개의 향초들

그 향내는 조용히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그런데 하얀 국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그 사진 속, 할머니는 무척 노쇠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무척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빈소를 지키며.

저 영정 사진을 계속 쳐다보며.

때로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사진 속 할머니의 모습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정옥순 할머니의 모습은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친손자 김상길에 대한 걱정.

나에 대한 걱정.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있는데.

저 영정 사진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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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침.

화장터로 운구한 뒤, 그리고 마침내 납골당 안치까지 마친 뒤.

이제 내 일상으로 복귀하려고 할 때.

나는 요양병원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장례식장 담당자와 바로 전화가 되었고.

이때, 그 상황에 대해서 즉시 물어봤는데.

담당자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 고인께서 말씀하신 건데···.”

“네? 할머니께서요?”

“네. 작년 말인가. 영정 사진을 바꿔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다시 찍은 건가요?”

“아뇨! 영정 사진들은 고인께서 요청하신 대로 여러 종류로 찍어놨습니다. 이년 전에 찍은 건데···. 그냥 웃는 모습으로 걸어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유가 있습니까?”

“그야 제가 모르죠. 고인께서 원하시는 거니까.”

“그럼, 그때 다른 말씀은?”

“아, 그게··· 뭔가 띄엄띄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마 손자들이 있는데··· 그중의 한 녀석이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다고··· 아마 그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 녀석이요?”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선 다시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다.

오늘 일기예보에는 오후 폭설이 예고되고 있는데.

큰 눈이 내려, 이곳 납골당 공원은 아마도 온통 새하얗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크리스마스 때 요양병원을 다녀왔던 나.

그때 할머니 앞에서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작은 반응에 나는 더 크게 반응했고.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놨다.

투자를 진행했으며.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도 했었는데···.

그래, 할머니가 어쨌든 기뻐하셨다면 다행이다.

그래서 영정 사진이 갑자기 바뀐 거고.

상길이 형이 그 달라진 영정 사진을 보면서 울다가.

결국, 다르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기분이 좀 묘해지는 게 사실.

과거와 다른, 뭔가 변화가 지금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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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10년 2월의 마지막 폭설은 그날 그렇게 끝났고.

그로부터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뒤.

어느덧 봄이 무르익는 5월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정신없이 수능 공부에 매진했는데.

그사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세계 곡물 가격은 폭락하다 보니.

내 수익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그 달콤함을 잠시 맛보던 나는 어느덧 주요 시기가 오자, 이제 또 다른 풋옵션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한참 만에 진행되는 일곱 번째 투자.

그 일곱 번째 투자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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