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18화 (18/138)

18화 여섯 번째 투자(초대형 투자)

<14>

어릴 적 나는 문제지를 살 돈이 없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까진 워낙 공부가 쉬워 반에서 늘 1등을 도맡아 했고.

중학교 땐 친구들한테서 문제지를 빌려 풀어가며 전교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 땐, 일부러 공고를 택했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고.

잘만 하면 대기업 임원도 가능하다는 어느 선생의 말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물리적으로 가난했는데.

그럼에도 자신감은 무척 충만했고.

일부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렸으나 끝끝내 공고를 택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진짜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회가 이런 모습인데···.

철저한 학벌 중심의 사회인데.

공장 노동자로서의 김한수.

소박한 노동만으로는 내가 도저히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이제 나한테 대략 19억 원의 돈이 생겼다.

얼추 20억 원에 가까운 돈.

앞서, 1억 원의 현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훨훨 날아올랐고.

투자자로서, 이제야 진짜 바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편,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전철 창문을 통해 가만히 쳐다보며.

아침 8시.

대치동 학원으로 향하고 있는 내 발걸음은 그래서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후 1시가 막 지난 1시 03분.

밤새 하얀 눈이 내렸으나 현재 학원가 주변 도로는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인데.

부분부분 하얀 눈의 흔적이 남아있으나.

학원가의 모습은 여느 때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학원으로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들.

쉴 새 없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렇듯 점심때가 되자, 나는 학원 건물 밖으로 잠시 걸어 나왔다.

중간에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다.

서둘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섰고.

컵라면 하나와 참치 캔 하나를 손에 들고 즉시 카운터로 걸어가는데.

이때 갑자기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

“···아아, 여, 여보세요?”

사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으나.

찝찝함이 싫어 그냥 받은 건데.

내 귀에 목소리 톤이 좋은 남자 목소리가 즉시 들려왔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김한수 고객님 맞으시죠?”

김한수 고객?

대체 누구지?

“전화 주신 분, 누구신 데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미래증권 김성민 차장이라고 합니다.”

“네?”

순간 나는 의아해했다.

미래증권 김성민 차장.

혹시 보이스피싱 같은 건가.

“무슨 일로 저한테?”

“아, 다름이 아니라, 우리 미래증권을 이용해주시는 고객님께 안내해 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고객님은 주로 해외선물거래를 하시는 것 같은데, 혹시 거래와 관련하여 특별한 애로 사항이 혹시 있습니까?”

“애로 사항요?”

“네! 이를테면, 중요한 주문이 갑자기 튕겨 나가거나, 혹은 서버 문제로 주문이 지연되는 경우. 혹시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까?”

“아뇨. 다행히 아직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요. 혹시 다른 불편 사항은 없습니까?”

“아뇨. 딱히 없습니다만.”

“그럼 고객님! 우리 회사에서 운영 중인 해외선물상담사 상담. 이 상담을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네? 그게 어떤 겁니까?”

“선물 투자 전문가의 의견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투자 리스크를 확실히 줄이고, 좀 더 나은 헷지 전략을 짤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스케쥴을 한번 잡아드릴까요?”

그 순간, 나는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보이스피싱은 아니었지만.

그냥 광고 전화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

그러고는 즉시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이때 상대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고객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네?”

“진짜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그러면서 그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정형화된 말투에서 벗어나.

조금 더 목소리에 힘을 주고 있었고.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고객님! 저희 증권사는 고객님들에게 항상 도움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적이 우수하신 고객님들에 대해선 특별한 혜택을 드리고 있죠. 물론, 이런 혜택은 차등적인 혜택이지만, 특별한 혜택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혜택?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계속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을 들어봤다.

“···최근 투자수익률 부문에서, 고객님께선 0.1% 최상위 수익 군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0.1%??

하긴, 1억 원이 어느새 19억 원이 되었다.

“그래서 저희 증권사는 고객님을 우수 고객, 골드 등급으로 선정하게 됐습니다. 이 등급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우수 고객 등급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지만, 수익률 상위 5%만 지정되는 높은 등급입니다. 물론, 고객님은 장기 실적이 부족해서 골드 등급에 지정됐지만, 향후 실적이 더 쌓이게 되면 즉시 등급 상향이 가능하십니다.”

“근데 죄송한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아아, 고객님! 바로 그 혜택도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투자하시는 종목의 수수료! 최대 50%를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네? 50% 할인요?”

“네! 그렇습니다.”

50% 할인?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해외선물옵션거래에서 수수료 50% 할인은 절대 적지 않은 돈이다.

앞으로 내 투자 베팅은 커질 텐데.

50% 수수료 할인이라면 상당히 큰돈을 아낄 수 있게 된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좋은 소식이었고.

그래서 호기심도 생겼다.

사실, 과거의 나는 2010년도에 투자 행위를 하지 않은 터라, 그땐 그저 공장 노동자였고, 그래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럼 그 등급이라는 게 어떤 게 있습니까?”

“우수 고객은 골드, 프리미엄, 플래티넘, 플래티넘 다이아로 나뉘게 되며, 등급마다 그 혜택이 다릅니다.”

“그럼, 플래티넘 다이아 급이라면, 어느 정도 혜택이 있죠?”

최상위 등급에 대해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뜻밖의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수수료는 무료. 물론, 거래세는 별도입니다. 분기별로 퍼스트클래스 국제항공권 2장이 지급되고, 목적지는 해외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 외에도···.”

쭉 이어지는 설명들.

그 설명이 끝나자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혜택이 놀라운데. 그렇게 하면, 남는 게 있습니까?”

“뭐,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만큼 지정 요건도 까다롭습니다.”

그 순간, 그 말을 듣자 딱 보니 알 것 같았다.

결국, 출혈 경쟁인가.

큰손을 붙잡아 두려고.

“근데 혹시 플래티넘 다이아 등급이 있기는 합니까?”

그러자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있습니다.”

“그럼 개인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몇 분 계시긴 한데. 하하, 죄송합니다! 더는 자세한 사항을 공개할 수가 없어서.”

“아, 네.”

“그리고 바쁘실 텐데, 조금만 더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이어지는 광고성 말들.

“고객님! 저희 미래증권은 타 선물사와 타 증권사에 비해 회선 안정성도 뛰어나고, 매매 프로그램이 타사에 비해 훨씬 더 다루기 쉽습니다. 접근성 역시 아주 뛰어납니다. 또한, 투자시 애로사항이 발생하게 되면, 전문상담가가 상시 대기 중이며 언제든 투자에 쓸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 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전화해 주십시오! 제 전화번호는 문자로 따로 남기겠습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국민의 미래증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러고는 마침내 전화가 끊어졌는데.

나는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 통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이 시기, 증권사와 선물사는 고객 유치에 혈안이 되어 밥그릇 싸움을 한창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된 이후, 증권사들은 새로운 블루오션 수익원으로 떠오른 선물 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아주 커진 상태였고.

수익 창출을 위해 선물 시장의 점유율을 최대한 높이고자 노력했다.

증권사의 FX마진거래(외환 마진거래) 서비스도 최근에 시작되었는데.

지금껏 단순히 선물거래 중개업무를 도맡았던 선물사는 그 때문에 증권사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선물사의 주요 고객들을 빼 오거나.

우수 고객을 유치 혹은 유지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좀 전의 수수료 할인 같은 건, 바로 그런 출혈 경쟁의 주요 방책이기도 했다.

#

근데···.

나도 좀 더 분발해야겠는데.

플래티넘 다이아 급에 개인이 있다고 한다.

내가 이 시기에 회귀해서 투자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기이한 혜택.

어쨌든 한국에 플래티넘 다이아 급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빨리 그 정도 급으로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피식 웃었고.

잠시 후, 계산을 마친 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좀 더 고민하다가.

오늘 밤에 진행할 여섯 번째 투자 종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