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다섯 번째 투자, 선물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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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라.”
“네.”
“건강 조심하고.”
“종종 전화 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야, 뭘 찾아와? 시간 나면 다른 일이나 챙겨!”
“네?”
“인마! 여자친구나 빨리 만들라고! 그러다가 금방 서른 넘는다.”
그러고는 이어지는 고리타분한 설교(?).
김창식 반장은 누가 봐도 꼰대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절대 비난할 수가 없다.
“···네! 알겠습니다. 반장님. 앞으로 노력해 볼게요.”
“인마! 이제야 좀 말귀를 알아듣네. 그래서 말인데, 아까 그··· 박 양! 박 양은 좀 어때?”
“네?”
“얼굴 이쁘지. 성격 좋지. 사근사근하고. 대학까지 나왔고. 그 정도면 최고 아니냐? 어때? 마음 있으면, 내가 다리 좀 놔줄까? 이제 직장도 서로 달라졌으니까, 내가 봤을 땐 괜찮은 인연이 될 것 같은데.”
“반장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소희씨랑 뭐요?”
순간, 내 목소리가 저절로 커지고 말았다.
김창식 반장이 박소희를 삼겹살집으로 부른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얼마나 간이 큰 여자인지.
김창식 반장은 감히 상상이나 할까.
박소희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될 텐데.
그런 여자를 나한테 소개해주겠다고?
훗날, 박소희는 1심에서 집행 유예까지 선고받았던 여자다.
아무리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라고 해도.
“인마! 마음에 안 들어? 하아! 이놈의 자식! 왜 그렇게 눈이 높아? 진짜 안 이뻐? 관심 없어? 대학 나온 여자야! 그런 데도 눈에 안 차?”
“반장님!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짜식! 니 얼굴 좀 봐라!”
“······?”
“마음에 안 든다, 딱! 그렇게 쓰여 있잖아! 에고. 내가 또 헛짓거리했네.”
“반장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휴, 할 수 없지 뭐. 근데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면 전화해. 알았지?”
“반장님!”
“아으씨. 알았다! 이놈아! 눈, 디럽게 높네!”
“···죄송합니다.”
“암튼, 바쁠 텐데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
한 손으로 내 손을 잡더니.
다른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잠시 토닥이던 김창식 반장.
어느새 그의 눈가는 약간 충혈되고 있다.
역시 잔정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좀 전의 해프닝을 머릿속에 지운 뒤, 그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반장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렇게 인사를 마친 뒤, 다른 선후배들한테도 인사했고.
잠시 후, 콜택시가 나타나자, 그 택시에 탔다.
버스를 타고 가면 될 텐데, 바로 택시를 타는 내 모습에 김창식 반장은 못마땅하게 쳐다봤으나.
내가 창문을 내리고 다시 머리를 숙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사이 택시는 출발했다.
<11>
200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일찍 하얀 눈송이들이 쏟아지며 사방에 흩날렸는데.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듯한 모습이었으나 화이트 크리스마스까진 쉽지 않았다.
흩날리던 눈송이는 금세 사라졌고.
건조하면서도 평범한 겨울 날씨는 그때부터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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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어떻게 푼담?
고시원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마을 도서관.
그 도서관 열람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나는 고등학교 수학 공부를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회귀 전에 이미 경험했던 공부.
그러나 그걸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쉽지 않다.
그렇다고 밀려날 수도 없다.
먼저, 간단히 개념 파악을 마친 뒤.
쉬운 문제풀이를 하되 답안 해설서를 옆에 두고 같이 봤다.
문제 푸는 요령을 답안 해설서를 통해 배우고 암기하는 과정.
긴 시간 동안 문제풀이에만 집중하는 탐구적 공부 방식은 아니었고.
순전히 수능 점수 따기를 위한 편법 같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엄청나다.
아주 빠르게 문제풀이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졌고.
그 때문에 저절로 집중력이 늘어나, 점심도 그른 채 오후 2시가 될 무렵, 챕터 두 개를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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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갑자기 공부했더니 머리가 어찔어찔하네.
자리에서 일어서던 중, 머리가 핑! 돌며 조금 비틀거렸으나.
나는 이내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손목시계로 시간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 2시가 거의 다 된 상태.
옆에 내려뒀던 백팩을 의자 위에 올려두고서, 내가 앉았던 자리 정리를 서둘러 마쳤다.
이때 갑자기 들려오는 아랫배 소리.
꼬르륵.
아침, 고시원 공용 주방에서 밥과 김치로 적당히 허기를 지웠으나.
이제 시간이 흘러 몸이 바로 반응하고 있다.
그래, 빨리 나가야겠다.
얼른 백팩을 등에 멘 뒤, 나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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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두 줄하고 라면요. 얼마죠? 여깄습니다.”
계산을 마친 뒤, 잠시 기다리자 김밥과 라면이 차례로 나왔다.
후루룩 면을 흡입한 뒤 라면의 따뜻한 국물을 정신없이 입으로 가져갔고.
중간중간 김밥을 먹었다.
무척 즐거운 음식 조합이었다.
그렇게 허기를 지운 뒤, 다시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4시 08분.
마을 도서관에서 나온 지 꽤 시간이 흐른 뒤다.
왜냐하면, 이후 KTX를 타고서 천안까지 내려왔기 때문이다.
역에서 내린 뒤, 길 건너편에 위치한 이곳 분식집에 들어섰고.
늦은 점심 겸 저녁을 이렇게 먹게 된 거다.
잠시 후, 물을 마신 뒤 나는 일어섰다.
다시 손목시계를 봤고.
가계 밖으로 나온 나는 택시정류장에서 택시를 탄 뒤.
한참 달린 끝에 어느 한적한 요양병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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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순 할머니! 뵈러 왔습니다.”
“잠시만요. 예약은 하셨죠?”
“네.”
“그럼 여기 신청서 적어주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로부터 30초 뒤.
“신청서 다 적었습니다.”
“네. 잠깐만요.”
그렇게 조금 기다리자, 면회 안내절차는 바로 이어졌다.
“···아시죠? 2층은 중증환자 전용 병동인 거?”
“네.”
“아시겠지만, 병동 이동시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주의사항인데 한번 보세요.”
“네.”
“방문자 명찰은 목에 거세요. 그리고 이쪽으로 오세요.”
그 행정 직원은 2층으로 가는 길을 곧이어 알려준 뒤 곧바로 옆으로 물러났다.
한편, 2층으로 가는데 구태여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가 없다.
그래서 비상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이내 중증환자 병동이 나타났다.
2106호실.
정옥순 할머니가 머무는 곳이다.
그곳은 2인실이었던 것 같던데.
아주 오래된 기억 조각.
그 조각을 다시 꺼내어 문득 떠올린 뒤, 나는 주변을 살피며 2106호실로 다가섰다.
그런데 그 2106호실에 가까워지자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은 빨라졌고.
2106호실의 활짝 열려 있는 문 때문에 곧바로 고개를 내밀며 쳐다보던 중.
나도 모르게 눈이 약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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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간호사들.
그들이 몰려와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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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시각은 오후 4시 50분입니다.”
그때 들려온 어느 의사의 목소리.
차분한 듯하면서 약간 허탈해하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간호사 한 명이 옆으로 물러나자, 안쪽 침대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끝까지 하얀 천으로 덮인 누군가의 모습.
그 순간, 바로 깨달았다.
누군가 생을 다한 것이다.
“근데 어떻게 오셨어요?”
한편, 어느 간호사가 의아해하며 날 쳐다보며 물었다.
“저는 정옥순 할머니···.”
“아, 아니시군요. 정옥순 할머닌 저쪽입니다.”
아! 아니었구나.
나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다.
정옥순 할머니는 내년 2월에 돌아가신다.
“근데 혹시 좀 놀라셨어요?”
“네? 아, 아뇨.”
나는 손을 저었다.
“너무 놀라실 거 없습니다. 편안하게 가셨거든요.”
“편안하게요?”
근데 가족도 없이?
“근데 저분 가족들은 아직 안 오셨어요?”
누군가가 죽었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들뿐이다.
“연락은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는 간호사는 등을 돌렸다.
할 수 없이 나는 이제 우측 베드, 정옥순 할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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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머리.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노쇠한 모습.
현재, 눈을 뜨고 있으나 눈빛은 모호하고 공허하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으나.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호할 정도로 두 눈에 전혀 힘이 없다.
그래도 내가 다가가자 약간의 변화가 있다.
흐린 동공이 움직이며 그 동공이 날 응시했다.
그리고 그 흐릿하던 시선은 조금 더 또렷해졌고.
계속 날 쳐다보던 중,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다.
“할머니, 저 왔어요.”
나는 먼저 인사했고.
바로 다가가 내 귀를 할머니의 입 근처에 가져갔다.
뭔가 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때 들려오는 소리.
흐느끼는 듯한 희미한 목소리다.
그런데 의외로 할머니는 그 목소리 속에서 내 이름을 계속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제외하곤 다른 말들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담당 간호사는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나 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 속, 그 이름이 갑자기 변했고.
할머니는 다른 이름을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
“···사···사··· 사···기··· 사··· 상··· 기··· 기··· 리···.”
하아.
순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김상길.
정옥순 할머니의 친손자 이름.
고등학교 자퇴 이후, 어느 살인 사건에 휘말린 뒤 완전히 사라져 버린 친손자.
그로부터 어느새 10년이 지났으나.
그럼에도 친손자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아마 아직도 도피 중일 텐데···.
“할머니, 상길이 형은 잘 있을 거예요. 할머니가 보고 싶을 거고, 곧 나타날 겁니다.”
나는 귀에 대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러자 정옥순 할머니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밝아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잠시 날 가만히 쳐다보는 듯하다가.
희미하지만, 입꼬리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다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래서 즉시 귀를 얼굴 쪽에 가까이 가져갔고.
희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엔 다시 내 이름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듣다가 물러섰고, 다시 할머니를 쳐다봤는데.
날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무척 인자했다.
물론, 그 눈빛은 모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짙은 끌림이 있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 끝이 찡해졌고.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특히,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마지막 순간까지 뇌리에 겹쳐지자,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았고.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내 머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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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떠세요?”
잠시 후, 나는 계속 뭔가를 말하며, 정옥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자신의 작은 집을 헐값에 정리한 뒤 이곳 요양병원에 들어온 정옥순 할머니.
외할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분이자.
내가 성장할 때, 이런저런 정을 많이 베푸신 아주 고마운 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가 확신하지만, 상길이 형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반드시 내년에 올 겁니다··· 반드시···.”
그리고 실제,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2월의 어느 날.
정옥순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시자, 그녀가 원했던 대로 신문부고 기사가 올라갔다.
한편, 소식을 들은 나는 이곳으로 달려와, 임시 상주가 됐다.
그리고 발인을 앞둔 그 새벽.
시커먼 외투에 큰 키의 그가 조용히 나타났다.
조문객이 전혀 없는 장례식장의 그 차가운 바닥을 무릎을 꿇고서 그는 기어왔고.
잠시 후, 그는 바닥에 살벌한 칼 한 자루를 내려놓더니.
그때부터 엎드린 채 한없이 흐느꼈다.
한편, 상길이 형은 어느덧 동틀 무렵 조용히 사라졌는데···.
그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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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잠시 후, 근처 도로에 택시가 정차하자, 나는 백팩을 들고서 서둘러 내렸다.
그러고는 고시원 쪽 골목길을 한번 쳐다본 뒤.
환하게 밝혀진 주변 가게의 모습들을 쳐다봤고.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새카만 하늘.
어느덧 밤 9시가 다 된 시각이다.
천안 요양병원에선 면회 시각을 조금 넘기며 정옥순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이후, 담당 간호사와 담당 의사를 만나 대화를 한 뒤, 그곳에서 나왔다.
KTX를 타고서 서울에 도착했고.
다시 여기 오기까지 시간이 걸려, 어느덧 밤이 된 상태다.
휘유, 좀 피곤하네.
어서 들어가서···.
좀 씻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고시원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한편, 그로부터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가, 수능 공부에 올인한 토요일, 일요일이 지나갔고.
어느덧 12월 28일 월요일 아침이 되자, 이제 나는 원금 더블링을 위한 다섯 번째 투자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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