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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이 되어버린 투자자-14화 (14/138)

14화 경리과 여직원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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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한수 형!!”

밤 8시 15분.

약속 시각보다 조금 늦어진 시간.

시커먼 인영들이 공장부지를 환히 밝히고 있는 조명등 불빛을 받으며 나타났고.

이때, 누군가가 소리를 치며 뛰어왔다.

같은 라인에 속해 있어,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최정덕.

바로 그 녀석이었다.

작업복 차림에 그 위에 잠바를 입고 있는 녀석.

그는 뛰어오자마자 내 어깨를 잡으며 가볍게 포옹했다.

“야, 어떻게 지냈어? 많이 바쁘다며?”

“형! 와아, 진짜! 형이 없으니까 죽겠더라.”

“그래? 내 빈자리가 좀 느껴지나 보지?”

“저번주 주말, 라인 터졌잖아!”

“어?”

“반장님한테서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어.”

“불량 때문에 그때 죽는 줄 알았어. 집에도 못 갔고. 2교대 전원이 중간중간 계속 투입됐다니까···.”

정덕은 그때 있었던 불량 상황을 정신없이 이야기했고.

다른 선후배 직원들과 인사한 뒤, 삼겹살집으로 가는 와중에도.

녀석은 옆에서 계속 떠들어댔다.

그러던 중, 김창식 반장이 슬쩍 나섰다.

“야, 최정덕!”

“네? 반장님?”

김창식 반장이 그렇게 부르며 손짓하자, 그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인마! 뭣 하고 있냐? 빨리 가서 자리 좀 잡아! 장 사장한테 말해둔 그 술도 좀 꺼내놓으라고 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정덕은 얼른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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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수야.”

한편, 정덕이 저 멀리 앞서가자, 이때 슬그머니 내 옆으로 붙는 김창식 반장.

그는 내 옆얼굴을 계속 쳐다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낮에 내가 준 거, 잘 갖고 있지?”

이때, 나는 반사적으로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기서 만져지는 10원짜리 동전 하나.

1977년도에 발행된 동전이다.

유통이 많이 되지 않아 제법 귀한 동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10원짜리 동전이다 보니, 나는 크게 신경 쓰지 못했고.

동전 모으는 취미도 없다 보니.

퇴사 당시, 서랍을 정리할 때 그냥 두고 나왔던 물건이었다.

“10원짜리도 귀할 때가 있다. 알지?”

“네.”

“물론, 10원 갖고서 뭘 할 수 있겠냐만은, 10원이 모이고 모여 100원이 되는 거다. 사람도 마찬가지야. 각자 할 일이 있고, 쓰잘데기 없어 보여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10원짜리 동전도 겨우 10원짜리인데도 때로는 귀한 놈이 그렇게 나올 수가 있어.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네. 반장님.”

“어디에 있든, 항상 최선을 다해! 괜한 엄살 같은 건 부리지도 말고. 너도 열심히 하면, 앞으로 귀한 10원이 될 수 있어. 알겠냐?”

“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 경리과 박 양이 오기로 했어. 퇴직금 정산, 중간 월급 정산 같은 거. 그거 어떻게 됐는지 직접 들어봐.”

“네? 경리과에서 사람이 옵니까?”

“박 양 알지?”

“네? 누구···?”

“박 양 몰라?”

“반장님! 저는 최선희씨랑 퇴직 정리를 했는데.”

“아, 최 주임한테?”

“네? 최 주임??”

“아차차! 요즘 하루가 한 달 같아서 미치겠어. 이틀 전에 경리과 인사이동이 있었어. 최선희가 최 주임이 됐고.”

“아! 잘 됐군요. 그럼 지금 오는 사람이···?”

“맞다! 그래서 모르겠군. 너 퇴사하고 나서 들어왔나 보다. 아무튼, 보면 알겠지만, 아주 똑똑해. 성격도 좋고. 그래서 내가 특별히 불렀어. 그리고 상고를 나온 게 아니라 대학까지 나왔다고 하더라. 암튼, 괜찮으니까 좀 이따가 봐.”

“근데 구태여 이런 식사 시각에 부를 필요가···.”

“야! 니가 번거롭잖아! 인마! 또 여기 오려고? 니가 그렇게 시간이 많냐?”

“아, 아닙니다. 반장님.”

“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네.”

“퇴직금 못 받고 질질 끌었던 케이스가 한두 건이 아냐! 노무사 찾아가서 상담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시간만 걸려. 뭐, 결국 받긴 받는데, 지독하게 못 받아. 너도 알지? 우리 사장님, 지독한 구두쇠인 거. 사무실 커피믹스 값도 칼같이 아끼잖아. 여기가 북한이야? 커피믹스 배급까지 하고.”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자자, 다 왔다. 어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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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작은 원형의 양철 테이블 세 개를 좀 더 가까이 붙여 한 자리로 만들었고.

일곱 명이 서로 둘러앉았다.

한편, 가운데 자리에 앉은 김창식 반장.

그리고 바로 그 앞자리에 내가 앉았다.

그때부터 잠시 한담이 오가다가.

삼겹살은 각 불판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소주잔은 쉴 새 없이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현재 밤이 깊어지는 도심 거리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점령한 크리스마스이브의 풍경일 테지만.

공장 옆,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나는 공장 선후배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이브의 화려함보다는 이런 술자리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자, 자, 잔들 다 채웠지?”

“네! 반장님!”

“오늘 회식은 내가 살 거니까 먹고 싶은 만큼 무진장 먹어!”

“와아, 감사합니다. 반장님!”

“그리고 조금 이따가 3년 전에 담가놓은 칡주 꺼낼 테니까 같이 마시자고.”

“와! 칡주요? 반장님! 최고다!”

요란한 함성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이때, 나는 어색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김창식 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슬쩍 참견했다.

“근데 이 자리 고기는 제가 사고 싶은데요.”

그러자 바로 사방에서 억센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야! 니가 무슨 돈이 있냐?”

“인마! 반장님 월급이 가장 많은 거 몰라?”

“야! 환송회 대접받는 놈이 무슨 돈을 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이때, 김창식 반장은 손을 휘휘 저은 뒤 날 쳐다봤다.

“야, 한수야.”

“네.”

“니가 내고 싶은 마음은 니가 착해서 그런 거 안다. 내가 그때 화를 많이 냈지? 하지만 너도 이해해야 돼. 갑자기 퇴사한다는데 내가 얼마나 놀라냐! 에고. 그래도 우리 새끼, 환송회는 해 줘야지. 오늘 많-이 먹고 가라. 그리고 담에 보면 니가 한번 사든지.”

에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당한 경력자인 김창식 반장.

그가 다른 생산 직원들과 비교하면 월급을 좀 많이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하루 만에 버는 돈과 비교한다면.

그의 월급은 너무나도 초라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김창식 반장의 저 말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저 수긍하는 수밖에.

그사이 소주잔들은 모두 비워졌고.

불판의 고기도 그새 빠르게 사라졌다.

모두가 식성 하나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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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 주임! 근데 박 양은 왜 이렇게 안 와?”

다시 채워진 소주잔을 한큐에 비우던 김창식 반장.

그는 탁! 소리를 내며, 소주잔을 양철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그러다가 다시금 한소리를 하려던 중.

갑자기 흠칫하며 그는 고개를 돌렸다.

가게, 불투명한 유리문 쪽.

그 유리문에서 시커먼 잔영이 생기더니.

드드륵 소리가 났고.

바로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그 순간, 김창식 반장은 반색하더니 한 손을 들어 손짓했다.

“아아! 박 양! 박 양! 여기야! 여기!”

옛날 공장 사람답게, 계속해서 ‘박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김창식 반장.

경리과의 새로운 직원인 박 양(?)은 그렇게 나타났고.

그녀는 곧장 양철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이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고, 이내 미간에 깊은 골이 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찰나, 그 여자는 내 쪽을 힐끔 쳐다봤고, 놀라며 나는 얼른 그 표정을 감췄다.

세상에 이럴 수가!

저 여자는 박소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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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외모.

새하얀 피부.

크고 새카만 눈동자.

약간 염색기가 있는 긴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원피스 차림.

무척 늘씬한 체격.

다소 통통한 엉덩이.

그런 여자가 나타나자, 갑자기 주변이 아주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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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김한수씨 맞으시죠?”

“···네.”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나는 시선을 옮겼다.

사실, 과거의 나는 이 무렵 퇴사한 게 아니다.

3년 뒤, 회사가 부도나면서 쫓겨나듯이 회사를 떠났던 것이다.

그게 바로···.

저 여자 때문에.

박소희, 저 여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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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반장님, 제가 한잔 드릴게요.”

“···김 주임님, 결혼하셨다고 했죠?”

“···경철씨, 근데 왜 이렇게 안 드세요?”

“···전 안 돼요! 아시면서···. 소주 한 잔만 마셔도 기절하는데. 저 책임지실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농담도 주고받는 박소희.

나는 내내 가만히 있었다.

저 여자는 미모도 받쳐주고 사교술도 뛰어나다.

그러나 저 여자는 절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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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가 입사하기 전에 퇴사하셨다고 하던데. 한수씨! 좀 아쉽네요. 참, 그냥 신입은 아니고, 경력직입니다. 그래서 퇴직금 처리 같은 건, 제가 최대한 빨리해드릴게요. 사장님 결제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적어도 다음 달 말일까진 입금이 될 것 같은데···.”

잠시 후, 박소희는 보조개까지 보이며 나한테 집중했고.

그 설명을 같이 들으며 김창식 반장은 만족해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그 여자가 맞았고.

지난 기억들이 새록새록 내 뇌리에 떠올랐다.

회귀 전, 이 공장이 부도나기 전, 전조 사건이 있었는데.

경리과 직원 한 명이 원료 대금과 화학 반응기 대금 등의 영수증들을 조작해 10억 원을 교묘하게 횡령해서 사라진 것이다.

그 횡령 사건 때문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필, 무척 인색했던 사장의 온갖 비리가 적발되었다.

사장은 구속 수감됐고.

그 때문에 갑자기 공장의 자금 흐름이 불안정해졌다.

결국, 갑자기 나타난 20억 원짜리 어음을 처리하지 못했고.

회사는 최종 부도 처리가 되었다.

나중에 듣기론, 그때 사라졌던 횡령범 박소희는 결국 체포되었는데.

횡령한 10억 원은 의외로 즉각 반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형사 재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박소희는 1심에서 집행 유예 판결을 받은 뒤.

대법원 판결에선 무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속사정까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런 그녀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세계적인 금융재벌 로렌드 가문.

그 가문의 아시아지역 투자 이사가 되어 나타난 박소희.

그 사건 이후, 미국 유학으로 명문대 학위 취득, 글로벌 투자사에 재직했던 그녀.

그 무렵, 나는 글로벌 헷지 펀드에 맞서 싸우다가 거의 모든 자산을 잃은 상태였는데.

곧이어 권총 자살을 했기 때문에 이후의 박소희가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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