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돼지불백
<8>
스무 살 1월부터 스물다섯 살 12월까지.
뼈 빠지게 공장에서 일하면서 벌어들인 돈.
거의 쓰지 않고 악착같이 저축했다.
대략 6년간 모은 돈은 겨우 1억 원 남짓.
고졸 사원으로서 작은 공장에서 일하며.
그때 첫 3년은 거의 수습 기간이나 다름없었고, 월급은 박봉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런 힘든 생활 덕분에 지금의 투자금이라도 모았다.
또한, 그런 과거 덕분에 더 악착같은 집념도 생겼다.
억울했으니까.
날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 억울함을 느꼈으니까.
난 절대 그렇게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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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
저번에 샀던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내 방에서 나왔다.
새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며 발자국 소리가 살짝 나자, 이때 조심해서 걸었는데.
옆 방에서 갑자기 문이 열렸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런닝구 차림의 중년 아저씨.
그가 수건 하나를 들고나오다가 잠시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안경알 너머로 눈이 약간 커졌고 이내 시선을 회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여전한 모습이다.
한쪽 머리가 짓눌려 있고, 두 눈은 언제나 피곤한 듯 충혈되어 있다.
나는 바로 목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뒤쪽에서 강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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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잠시 후, 나는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잠깐 두리번거렸다.
여의도 증권가.
한때 이 근방의 빌딩 한곳에서 사무실을 오픈한 뒤, 정신없이 일한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다 지나간 일이며, 회귀 전 과거의 일이다.
“야! 도대체 넌 그때 왜 안 나왔어?”
찬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대는 거리.
직장인들은 일하느라 바빠, 거리가 무척 한산한데.
아직 점심 시각까지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한적한 거리를 터벅터벅 걷던 중.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들 중의 한 명인 유강석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사실, 저번 주, 술 마실 때 약속을 깨고 나타나지 않았던 녀석.
한동안 전화도 되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전화를 준 것이다.
“도대체 넌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돼? 휴대폰에 무슨 문제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그렇게 먼저 쏟아낸 뒤 조금 기다리자.
드디어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일이 좀 있어.”
무척 저음이다.
그리고 언제 들어도 무미건조한 유강석의 목소리.
“무슨 일인데?”
“···너랑 상관없어.”
조용하게 질문을 잘라 버리는 녀석.
“혹시! 너 문제 생겼어?”
불안한 듯 물어보자,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공장 그만뒀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태원이가···.”
“혹시 태원이 만났어?”
“좀 전에 전화했어···.”
“야, 전화 말고 얼굴 좀 보자.”
그러자 이번에도 녀석은 내 말을 씹어버렸다.
“···전업 투자일 시작한다며?”
그렇게 말하던 녀석.
녀석은 이내 짧은 한숨 소리를 냈고.
곧이어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버는 게 쉽지 않아.”
“야. 무슨 힘든 일 있어?”
“힘든 일? 흥! 한수야, 너 혹시 돈 필요해?”
“돈?”
“친구니까 일수 0.5로 끊어 줄 수 있어.”
“뭐? 그게 무슨 말인데?”
그러자 다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 이자율 0.5%.”
일 이자율 0.5%?
이때, 나는 의도를 깨닫고 바로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었다.
1년 단위로 한다면 연 이자율이 무려 182.5%에 달한다.
그 순간, 나는 잊혀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교 때 전교 회장이었던 유강석.
집안이 무너진 뒤 그도 망가졌고.
아마 지금 그는 사채업자 밑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채권추심 같은 일을 말이다.
“···많이 받을 땐 일수 4퍼까지 받아. 보통 2퍼 수준인데. 넌 0.5퍼로 해줄게.”
나름 선심을 쓴다는 의미인데.
나는 답답해졌다.
“야! 유강석!!”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0.5퍼 밑으론 나도 힘들어. 최대 2,000만 원까지 해 줄게.”
하! 그만하자. 그만해.
나는 더는 듣기가 싫었다.
“나, 사채 쓸 생각 없어. 돈 안 빌려줘도 돼. 그리고 너무 내가 신경을 못 썼는데, 넌 그런 일 하면 많이 위험하지 않아?”
그러자 조용히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강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끊자.”
그 순간, 나는 다급히 외쳤다.
“강석아! 우리 한번 보자! 부탁 좀 하자! 너 언제 시간 돼? 아니, 혹시 지금 시간 돼?”
“······.”
“야! 유강석!!”
그러자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지금?”
“어! 지금도 괜찮아.”
“···어디로 갈까?”
“지금 내가 여의도에 있는데.”
“그럼, 마포 서울기사식당. 거기서 보자.”
그러고는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바로 멈춰섰다.
사실, 내가 여의도 증권가를 이렇게 찾은 것은 지난 기억들을 되새기며, 지난 투자 성공으로 인해 흐트러질 수 있는 의지를 다시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택시를 잡아탔고.
잠시 뒤.
마포대교 위를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저 멀리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어느덧 점점 가까워지는 그곳.
내가 권총으로 날 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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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씁쓸하네.
그때, 옵션이 두 가지였는데.
총이 있었고.
마포대교 아래 한강이 있었다.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그때 내 감정이 이끌리는 대로 권총을 선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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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서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잠시 후 녀석이 들어오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짙은 외투에 외투 옷깃을 날카롭게 세운 채 나타난 녀석.
무척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늘씬한 체격.
손발이 무척 길고.
또한, 동작이 무척 날렵한 녀석.
강석은 농구도 잘 했고 축구도 잘 했고, 싸움도 아주 잘했던 녀석이다.
저번에 봤던 강태원이 고등학교 시절 또래들 중에서 싸움 탑이었다고 한다면, 유강석은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그런 놈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 역시 잠시 비뚤어져 있었고.
내가 아는 이 녀석들만큼이나 거친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강석은 뚫어지라 날 쳐다보며 다가와 앉았고.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얼굴 좋네.”
“근데, 넌 왜 그렇게 삭았냐?”
내가 즉시 묻자, 강석은 흠칫하더니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곧이어 씩 웃다가,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묘한 뼈 소리를 내기도 했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알았어. 뭘 먹을래? 내가 살게.”
“돼지불백.”
“사장님! 여기 돼지불백 2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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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돼지불백 2개가 나왔다.
반찬, 생선구이 등이 같이 세팅됐고.
곧바로 우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서 그 일은 언제부터 한 건데?”
입에 가득 음식을 넣고 씹던 중, 나는 중간중간 물어봤고.
고개를 숙인 채 정신없이 먹던 강석은 슬쩍 고개를 들고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다시 숙였다.
저 녀석은 차가운 인상만 아니었어도 사채 일이 아니라 모델 일을 해도 될 녀석이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니가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럼 보수는 얼마나 받아?”
나는 수다스럽게 계속 질문했다.
무뚝뚝한 강석.
그는 다시 날 쳐다본 뒤, 짧게 대답했다.
“건수에 따라.”
“건수? 수익이 들쑥날쑥한 거네?”
“······.”
“그럼 한 번에 얼마나 받아?”
갑자기 강석은 미간을 찌푸렸고.
들고 있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잘 먹었다. 담에 내가 살게.”
그 말에 나는 흠칫하며 재빨리 말했다.
“혹시 너, 나랑 같이 일해볼래?”
“······.”
“조만간 사무실도 낼 생각인데.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고.”
“······.”
“친구들끼리 서로 돕고 살자.”
“······.”
“괜히 채권추심 같은 건 하지 말고.”
아마 내가 공장 취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런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녀석 성향을 보면, 공장 같은 곳을 다닐 수가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한다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정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들을 계속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런 제안을 한 뒤, 강석의 표정을 계속 살펴봤다.
이때, 다른 곳을 쳐다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강석.
그러나 다시 날 쳐다보더니,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마.”
“뭘?”
“나도 곧 스카웃돼.”
그러고는 녀석은 바로 일어섰다.
“스카웃? 그게 무슨 말인데?”
그 순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던 녀석.
“곧 달라질 거야. 아, 돈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그런 뒤 녀석은 등을 돌렸고.
“나 먼저 간다. 사장님 심부름할 게 있거든.”
녀석은 가볍게 손을 흔든 뒤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얼른 뒤쫓아가려다가.
얼른 밥값 계산부터 마쳤다.
그런 뒤, 뒤쫓아갔으나.
녀석은 이미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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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참나.
그래도 뭐, 얼굴은 봤으니까.
그러고 보면, 저 녀석도 참 기구한 녀석이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 녀석의 아버지 회사는 부도났고.
집안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버지는 결국 자살했고.
이후, 녀석은 점점 이상해졌다.
근데 스카웃이라?
도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 생겼을까.
회귀 전, 갑자기 연락이 끊겼던 녀석.
다른 친구들도 녀석의 행방을 알지 못했는데···.
그런데 그 스카웃이란 게 설마 내가 아는···.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발길을 옮겼다.
그래도 저 녀석은 나보다 낫지 않을까.
권총자살과 비교한다면.
여하튼 다음날.
영하권의 날씨가 된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이제 네 번째 투자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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