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각인
* “()”는 외국어 표시입니다.
짐을 챙긴 재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저 분인가 봐요!”
그리고 누군가 발견하고 손에 손을 포개서 양손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진사헌 에스퍼님, 김재영 가이드님 환영합니다.’라고 삐뚤빼뚤한 한국어로 적힌 피켓을 든 사람이었다. 재영의 걸음이 바빠지자 사헌도 그에 맞춰 보폭을 늘였다.
다가갈수록 낯선 언어가 귀를 때렸다. 두 사람은 일본의 요청으로 현지 출장을 온 참이다. 정확히는 에스퍼인 사헌의 일이고, 재영은 따라온 것뿐이지만.
“일본이 그렇게 오고 싶었어?”
사헌이 입꼬리를 씰룩이는 재영을 귀엽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를 향한 미소가 달콤해서 입이 말랐다.
“형이랑 단둘이 여행은 처음이잖아요.”
재영은 혀로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출장이라고는 해도 사헌과 함께라서 여행을 온 것처럼 들뜨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좋으면 일주일 더 연장할까?”
사헌이 재영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재영은 뒷목까지 내려오는 간지러운 손길에 히죽대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일본 측에서 요청한 기한에서 3박 4일을 연장한 상태다.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따로 와요.”
“지금도 바쁠 건 없는데.”
일본에서 참고용으로 보내준 공략 영상을 보고도 시큰둥했다. 하긴, 영상을 찍은 일본팀이 보스몹 근처에도 가지 못했으니 미리 방법을 모색할 수도 없고, 할 일이 없는 게 사실이다.
“형은 일본에 많이 와 봤어요?”
사헌의 말에 납득한 재영은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물었다.
“여기는 S급 에스퍼가 없으니까.”
높이 든 손을 끌어다가 잡은 사헌이 상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 손을 봤다가 깍지를 끼며 생글거렸다.
‘던전의 측정치보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한 명 이상 동행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법에 따른 것으로, 일본은 그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지만 S급 던전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것도 한 번 말아먹어서 그렇지만…….’
이 나라와 감정으로 얽힌 일본이 처음부터 순순히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일본 정부는 A급과 B급의 에스퍼를 끌어 모아 진입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나?’
중계 영상을 보던 사헌은 동료의 시신조차 챙기지 못한 채 도망쳐 나온 일본 에스퍼들을 보며 조소했다. 그 결과 일본은 고위 능력자의 반 이상을 잃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사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나마 그가 센터 소속이 아닌 것에 위안을 얻었을 터다. 그렇게 자존심은 챙겼는지 몰라도 철저한 기업적 마인드인 길드에 의해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하게 됐다고 들었다.
‘남은 기간 유류비도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던전 공략 후에 마음도 편하고, 지갑도 편한 휴가가 약속되었으니 재영에겐 나쁠 게 없다.
그때 갑자기 사헌이 꼭 맞잡고 있던 손을 풀고, 어깨를 감싸 당겨 안았다. 갑자기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치게 된 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잃어버리니까 딱 붙어 있어.”
“사람도 얼마 없는데요?”
사헌의 당부에 재영은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웃었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입국 심사도 대기 없이 순식간에 끝나지 않았던가. 하지만 팻말을 든 남자에게 거의 다가섰을 때 재영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금세 흔적을 감췄다.
“저 사람들은 다 뭐예요?”
경악한 재영은 사헌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수많은 카메라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진사헌 에스퍼! 각오 한마디만 해 주세요!)”
“(던전 진입을 위해 한국에서 따로 준비해 온 게 있습니까?)”
재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셔터가 연예인 출근길을 방불케 했다. 안 그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가 빠르게, 한꺼번에 쏟아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헌이 어깨를 감싼 손으로 재영의 옆통수를 덮고, 제 가슴 쪽으로 당겼다. 약간 드라마에서 사고 친 연예인 보호하고 갈 때, 그 모습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나카 씨와 상의한 작전이 있습니까?)”
“다나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사람 이름으로 생각되는 것이 들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사헌을 올려다봤다.
“모르는 사람이야.”
어깨를 으쓱한 사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나카 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까?)”
이름을 언급한 것이 실수였다. 기자들은 다나카라는 이름을 사헌의 귀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그 이름만 연호했다. 거의 ‘다나카’ 팬클럽 현장 같았다. 사헌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일본에서 인지도 높은 사람인가 보네.’
언급하는 목소리가 하나 같이 들떠 있었다. 해외여행을 하다가 신X면을 먹는 사람을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재영은 국뽕은 어느 나라나 똑같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사헌 에스퍼 외에 다른 도전자는 없는 겁니까?)”
‘다나카’ 향연에서 다시 사헌의 이름이 들리자 재영의 귀가 쫑긋 섰다.
‘일본어 공부 좀 하고 올걸.’
속성으로 공부해 봐야 얼마 알아듣지도 못했을 테지만, 괜히 아쉬웠다. 사헌이 필요 없다고 했어도 통역사 정도는 동행할 것을 그랬다.
“일본 정부가 지원을 요청한 게 나 하나인 걸 어쩌라는 건지?”
그런데 사헌이 시큰둥하게 내뱉은 말에 재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국인인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현지 일본어로 말을 건넸는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것이다. 사헌이 알아듣는 것 같자 질문이 더 쇄도했다. 저들이 한국말을 알아들었는지는 글쎄. 솔직히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것 같다.
“(B급 이상 에스퍼 100명이 진입하고도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입니다. 그보다 훨씬 적은 20명으로 가능하겠습니까?)”
한 기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기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어감으로 충분한 것이 있어서 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꼭 던전이 클리어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다.
“숫자만 많다고 해결되는 거였으면 타국까지 도움 요청을 하지도 않았겠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은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온 게 마음에 안 들면 능력 없는 이 나라 에스퍼들을 욕해.”
명백한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다. 일본의 기자들이 불쾌한 낯을 했다. 애초에 도움을 요청하는 쪽에서 지원 온 사람을 배려하지 않았으니 저런 대우도 날 선 대꾸도 별수 없지 않나. 재영은 눈을 부릅뜨고, 사헌을 노려보는 기자들을 노려봤다.
“그냥 갈까?”
이내 사헌이 고개를 돌려 재영을 향해 내뱉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은 몇몇 사람들이 그 말에 괜히 찔렸는지 몸을 움찔했다.
“그래도 돼요?”
“당연히 되지.”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재영이 당황했다.
“아니, 위약금이라던가, 형의 명예에 누가 된다거나.”
무려 S급 던전이다. 이미 일본의 에스퍼 여럿의 희생이 있는 만큼 욕도 엄청 먹을 거다. 재영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부터 참담한 기분이 들어 울상을 지었다.
“처음에야 나를 욕한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원망이 누구를 향할 거라고 생각해?”
사헌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순간 주변이 환하게 밝혀지는 듯한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재영은 상황도 잊고 감탄을 흘렸다. 다행인 건 그렇게 반응한 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거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조금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러면서도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아는 듯 기자들이 재영의 입만 바라봤다. 오롯한 시선이 불편해진 재영은 눈동자를 굴렸다.
“기껏 왔는데 바로 가면 좀 그렇잖아요.”
마침내 부담감을 이겨 낸 재영이 뒷목을 긁으며 말했다. 일본에도 저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피해 입는 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일 테니까.
“온 김에 여행이라도 하지, 뭐.”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귓가에 속닥거리는 말이 악마의 속삭임 같다.
“여행은 던전 클리어하고 즐겨도 되잖아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사헌이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거 봐.”
그러고는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헌이 재영의 볼을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네가 나를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든다니까.”
그러면서 바라보는 눈동자가 녹을 듯 따뜻했다. 재영은 긁으려는 것처럼 옷 위로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께가 근질근질했다.
“이래서 사람은 짝을 잘 만나야 한다는 건가?”
재영의 손등 위로 손을 겹친 사헌이 눈을 번뜩였다. 이질적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꼭 돌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사헌과 닿은 손등이 끓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재영은 움찔했다.
그 반응을 기꺼운 미소로 바라보던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내 찹쌀떡이 그렇다는데, 형편에도 없는 봉사나 하러 가야지.”
한숨과 함께 내뱉는 말에 재영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봉사라니. 일본 정부가 들으면 속 터질 소리다. 봉사치고는 대가로 받아낸 현금이며, 현물이 상당했다. 길드 식구들은 그걸로 한우가 맛있는 식당까지 예약했다.
그동안에도 일본 기자들은 바짝 굳어서 사헌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스미마셍, 스미마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사람들 틈에서 양복을 입은 30대 초반의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까 피켓을 들고 있던 사람이다.
“카메라 당장 치우지 않으면 이대로 일본을 떠나겠습니다.”
사헌이 남자를 향해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하얗게 질린 양복남이 기자들을 향해 뭐라뭐라 떠들자 그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몰래 온다고 했는데…….)”
양복을 입은, 아마도 일본 협회의 직원일 남자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굽신거렸다. 말 몇 마디로 쫓아낼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 그렇게 해 주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신경 써 봐야 심기만 불편하니까 자신은 모르는 거래가 오갔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정말 몰래 올 거였으면 그 피켓도 안 만들었겠죠.”
허를 찌르는 사헌의 말에 양복남이 움찔했다. 그리고 이미 축축하게 젖은 천으로 다시 이마를 훔쳤다.
“(혹시 이쪽 분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직원이 재영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탐욕에 찬 눈빛이 부담스럽다. 일본에 없는 것은 S급 에스퍼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활동 중인 S급 가이드가 없다는 것이다.
“됐으니까 안내나 해.”
재영을 품 안으로 숨긴 사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한층 싸늘해진 반응에 직원이 어쩔 줄을 모르고 굽신거렸다.
“(그, 그럼 바, 바로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던전이 아니라?”
직원의 말에 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두 사람은 당연히 짐만 차에 실어 놓고, 곧장 던전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급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혹시나의 경우가 있지 않은가. 사헌과 재영도 일을 먼저 해결해 놓고 남은 일정을 즐기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그게……이미 저녁이고, 이왕이면 밝을 때에 움직이는 것이…….)”
직원이 이 말, 저 말 주워섬기며 쩔쩔맸다. 그 결정이 이 직원의 의지가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비행으로 지쳤을까 봐 배려했을지도……?’
하지만 한국에서 일본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 데다가 던전에 진입할 사헌은 S급 에스퍼다. 몇 날 며칠 잠도 안 자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해도 멀쩡한. 그건 온몸으로 직접 확인한 재영이 보장할 수 있다.
“어차피 던전에 들어갈 건데, 밤낮이 중요한가?”
“(함께 던전에 진입할 팀원의 명단도 준비했으니까 천천히 보시면서 공략을 고민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직원이 변명하듯 말해도 사헌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일은 얼른 해치워 버리고 재영과 놀 생각이었으니 당연하다.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숙소로 가서 쉬어요. 초밥도 먹고.”
사헌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하자 일본 협회 직원이 구세주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사헌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일본에서 가장 좋은 호텔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물론 그곳의 식사는 최고의 셰프가 담당하죠.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협회 직원은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재영을 향해 비굴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재영의 목 뒤를 그러쥔 사헌이 그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았다. 재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사헌의 혀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재영의 혀를 휘감았다. 두 개의 살덩이가 젖은 소리를 내며 뒤엉켰다.
커다란 손은 유카타 사이로 드러난 다리를 끈적하게 훑어 올라갔다. 허벅지 깊은 곳까지 들어온 온기에 재영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하, 으, 형…….”
사헌이 재영의 허벅지를 더듬던 손을 빼내 그의 입가를 문질렀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그걸로도 부족해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어 점막을 훑었다.
“얼른 적셔 봐.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제대로 충전해야지.”
재영은 혀로 그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사헌이 자못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근데 자세가 왜 이래요.”
재영은 사헌의 위에 올라탄 채로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사헌보다 시야가 높은 것도 어색하고, 아무튼 이상했다.
“오늘은 네가 해 줘.”
사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재영의 엉덩이 사이를 벌려 꽉 다물린 입구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말 잘 들었잖아.”
달래듯 내뱉은 말에 재영은 꼴딱 침을 삼켰다. 공항에서도 소란 일으키지 않고, 제 뜻대로 순순히 따라 준 것은 사실이었다.
“푸는 건 내가 해 줄 테니까, 응?”
흔들림을 느낀 사헌이 나직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밤낮없이 사헌에게 길들여진 뒷구멍은 이미 키스만으로도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재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헌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뛰었다. 그리고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손가락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읏!”
침입자에 놀란 내벽이 확 조여들며 손가락을 가뒀다.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던 사헌이 뻑뻑한 움직임에 미간을 좁혔다.
“빼기만 하면 좁아지네.”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면서도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내 모양대로 벌어져서 안 다물어지면 귀여울 텐데.”
그리고는 재영이 경악할 말을 내뱉었다.
“그, 그건 안 돼요!”
“안 돼?”
사헌이 기겁하는 재영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내벽을 꾹꾹 누르며 자극했다.
“아, 하아…….”
재영은 가만가만 숨을 내뱉었다. 간질간질한 쾌감이 피어올라 뱃속이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들썩거리는 몸 때문에 샤워 후 걸친 유카타가 흐트러졌다.
“벌써 우네, 귀엽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훤히 벌어진 옷 틈을 향해 있었다. 재영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렸다. 뒤를 건드리는 것으로 자극을 받은 성기 끝이 쿠퍼액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사헌이 남은 손으로 재영의 자지를 주물렀다. 이미 반쯤 서 있던 성기는 꼿꼿해졌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은 손가락을 세 개째 집어삼켰다. 앞뒤로 쏟아지는 쾌락에 재영은 우는 듯 헐떡였다.
“하아, 형!”
재영은 애원하듯 사헌을 바라봤다. 기분이 좋은데 뭔가 부족했다. 사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채운 손가락을 빼냈다.
“자, 이제 먹자.”
짐짓 다정한 체 말한 사헌이 재영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움찔거리는 구멍 끝에 뭉툭한 귀두가 닿았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구로 파고든 귀두가 내면을 긁으면서 안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왔다.
“아흑!”
“봐. 또 벌써 좁아졌잖아.”
사헌이 투덜대면서 엉덩이를 밀었다. 좁은 내벽이 그의 성기 모양으로 천천히 벌어졌다.
“처, 천천히……,”
“그래. 그러고 있잖아.”
재영의 몸이 아래로 푹 꺼지지 않게 버티느라 사헌의 팔뚝에 핏대가 선명해졌다. 재영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조이는 힘을 풀려고 애썼다.
“아, 아직……흣, 멀었어요?”
재영은 아득함을 느끼며 울먹였다. 얼마나 깊은지 이미 명치 바로 아래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조금만.”
사헌도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재영은 찡그려진 그의 눈가를 보며 입술을 핥았다. 괴로운 얼굴을 보고 아랫배가 저릿거리는 걸 보면 저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천천히 넓혀 봐.”
사헌이 밀어 넣는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재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에는 깊다고 힘들어하잖아.”
그러니까 너 좋을 대로만 넣으라고.
배려 아닌 배려에 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내가 리드할 수도 있는 거잖아.’
결연한 빛을 한 재영은 우둘투둘한 복근에 손바닥을 대고 천천히 앉았다.
“아, 너무 커요.”
재영은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직접 넣어서 그런지 감각이 예민해져서 성기에 불거진 혈관 모양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네 거야.”
재영의 볼을 매만진 사헌이 자랑스러워하라는 듯 말했다. 재영은 헐떡이면서도 기가 차서 밉지 않게 눈으로 흘겼다.
“어서 맛있게 먹어야지.”
사헌이 붉어진 재영의 뺨을 톡톡 치면서 재촉했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재영은 천천히 몸을 내렸다. 그러다가 덜컥, 끝이 걸린다 싶으면 다시 무릎을 폈다.
“아흐, 안 들, 안 들어가요.”
부드럽게 밀린다 싶으면 갑자기 벽에 막힌 것 같았다. 한 번 뚫렸던 길이니까 힘만 조금 주면 열리겠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재영을 가만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헌이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얼굴 곳곳에 달래는 듯한 입맞춤을 남겼다.
재영은 입을 벌려 그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가볍게 스쳐가는 감각에 못 견디게 안달이 났다. 마침내 축축한 혀에 매달려 타는 목을 축였다.
사헌이 재영의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을 그의 골반 쪽으로 내렸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압박감에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읏!”
뭐가 저 좋을 대로란 말인가. 결국 너무 깊어졌다. 재영이 눈을 치뜨려는 순간, 사헌이 불시에 허리를 쳐올렸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흣, 응!”
재영은 낯 뜨거운 교성을 지르며 사헌의 가슴 위로 무너져 내렸다. 자신은 한참을 쑤석거려도 찾지 못했던 스팟이다.
“아흑, 너무……깊어.”
재영은 우는 소리를 내며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게 했다.
“나한테, 움직이라고 했잖아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재영은 고개를 휙 들어 사헌을 노려봤다.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그의 가슴 위에서 주먹만 움켜쥐고 있었다.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고 그랬지.”
사헌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재영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러다가 치켜든 눈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자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뗐다.
“윽.”
잡아 주는 손마저 없어지자 몸이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다시 깊어진 삽입에 재영은 바르르 떨었다.
“이러다가 오늘 내로 끝나기는 하는 거야?”
약 올리듯 말한 사헌이 시들어 버린 재영의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왜? 이것도 만지지 마?”
재영과 눈을 맞추며 뿌리부터 천천히 훑어 올렸다. 무시할 수 없는 쾌감이 몸을 달궜다.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해 주, 읏, 해 주세요.”
괴로울 정도로 뒤를 가득 채운 흉기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재영이 매달리자 사헌이 흡족한 미소를 띤 채로 손을 움직였다. 쾌락으로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재영은 사헌의 복근을 짚고, 무릎을 세웠다. 눅진해진 내벽이 성기에 찰싹 달라붙어서 밖으로 따라가려고 했다.
“잘하고 있어.”
사헌이 재영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다독였다. 재영은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저와는 다르게 말끔하다. 하지만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에서 들끓는 열기가 느껴졌다.
“네가 좋아하는 데 찾아봐.”
“으읏, 으, 못 찾, 못 찾겠어요.”
재영은 시도해 보지도 않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지 못해서 괴로웠다. 사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리광 피우는 재영을 감상했다.
“도와줘?”
“응, 응. 해 주세요.”
사헌이 양손으로 재영의 엉덩이를 벌리듯 쥐었다. 감춰진 부분이 드러나면서 열이 오른 구멍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그 간극에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아응! 거기, 형……!”
“네 몸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안 그래?”
재영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번쩍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성감대를 잘도 찾아냈으니까.
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재영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리고는 단단한 성기로 쉴 새 없이 안을 쑤셨다.
“아응! 읏, 응! 형, 거기, 좋아……, 형!”
재영은 목을 꺾으며 학학, 숨을 내뱉었다. 아랫배에 바짝 붙은 성기 끝에서 푹푹 정액이 쏘아졌다. 붉은 기둥을 타고 흐른 액체는 맞닿은 사헌의 음모까지 적셨다. 점차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것이 사라졌다.
“아, 핫! 너무 빨, 라……형, 빨라요.”
“빠른 거, 후, 좋아하잖아.”
재영의 허리를 움켜쥔 사헌이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진작 절정까지 치달은 몸에 과한 쾌감이었다. 재영은 날카로운 신음을 뱉으며 사헌의 가슴 위로 무너졌다.
“흐아, 아…….”
사헌이 느리게, 하지만 더 깊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이어 뜨거운 액체가 예민한 내벽을 덮쳤다. 아직도 어색한 그 감각에 재영은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깊게 빨았다. 사헌이 붉게 올라온 살결 위로 이를 세웠다. 재영은 고개를 들어 사헌의 입술에 입술을 비볐다.
눈이 마주치자 사헌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깜빡인 재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인 됐을까요?”
“때 되면 되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얼른 각인돼야 형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재영은 괜히 속상하고, 미안하고, 또 아쉬워서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러자 사헌이 장난스럽게 입을 쪽 맞췄다.
“그런 거 신경 쓸 틈 있으면 어떻게 해야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나 고민해 봐.”
사헌이 말랑해진 재영의 성기를 주무르며 은근하게 말했다. 이미 그의 것은 부풀어 구멍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난 재영은 아침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던전으로 향했다. 안절부절못한 채 사헌을 기다리던 협회 직원이 곧장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재영을 돌아봤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는 재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재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입 실패한 던전에 다시 도전할 때 팀원끼리 작전 회의를 하곤 한다. 이번에도 아마 그런 종류의 용건일 것이다.
“누가 말 걸어도 상대해 주지 말고.”
재영은 참 진사헌다운 말이라고 생각하며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어차피 일본어는 제2 외국어로도 선택하지 않아서 대화를 할 수도 없다.
이번 S급 던전은 일본의 유명한 신사 안에 만들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축제 중이 아니라 휘말린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email protected](@*$”
그렇게 던전화된 신사 주변을 눈으로 살피고 있던 중, 저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자 어제 사헌에게 굽신거리던 직원이 보였다. 오늘은 다른 남자 앞에서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극한 직업이네, 진짜.’
재영은 괜히 안된 마음이 들어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느 일이라고 안 그러겠냐마는.
그래도 조용조용했던 사헌과는 달리 앞에 있는 남자는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고성을 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는 얼굴이다. 다나카 쇼타. 일본의 A급 에스퍼였다. 배우 출신이라던가. 그래서인지 외모도 빼어난 편이고, 강한 물리계 능력자라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그래 봐야 우리 형보다는…….’
재영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사헌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모처럼 일에 집중한 옆모습이 어느 때보다 멋졌다.
뿌듯한 미소를 짓고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다나카 쇼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은 누구지?)”
건방진 손끝이 분명 재영을 향해 있었다. 사헌의 가이드인 재영을 알아본 협회 직원이 뜨악한 얼굴로 무어라 말을 했다.
‘알아서 하겠지.’
그대로 관심을 끊으려는 참이었다.
“(저, 김재영 가이드님.)”
조심스럽게 부르는 말에 재영은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직원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재영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다나카 쇼타와 눈이 마주쳤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왠지 기분 나빴다.
“(다나카 씨께 가이딩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일본어를 모른다지만,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어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직원은 재영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불안한 눈으로 사헌 쪽을 힐끔거렸다. 그가 싫어할 거라는 건 아는 모양이다. 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스미마셍. 어, 음…….”
일본어로 대답해 보려다가 금방 한계에 부딪힌 재영은 울상을 지었다.
‘뭐, 뜻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직원도 한국말로 묻지 않았다. 재영은 가슴 앞으로 팔을 교차했다.
“저는 진사헌 에스퍼 개인 가이드라서 다른 사람 가이딩을 하지 못합니다.”
X 표시에 고개까지 내저었으니 대충 뜻은 알아들었으리라.
슬금슬금 다가온 다나카 쇼타도 협상이 결렬됐다는 걸 알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존심 상하지 않은 척하려는 것 같은데 티가 다 났다.
“(다, 다나카 씨!)”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어지간히도 깡패인 모양이다. 다나카가 말없이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도 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A급 에스퍼인 자신에게 지지 않으려는 기세가 못마땅했는지 다나카가 눈썹을 쳐올렸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없이 노려보기만 한다.
‘뭐야.’
그냥 돌아서려는 때였다. 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재영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았다. 그래서 인상을 찌푸리며 다나카 쇼타를 노려봤다. 주지 않겠다고 하니 강제로라도 가져가려는 모양이다.
다나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더 강하게 재영의 기운을 빨아들이려고 했다.
‘어림없지.’
코웃음을 친 재영은 댐의 수문을 내리듯 잡아끄는 손길을 툭 끊어 냈다.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던 기운이 확 가라앉았다.
“컥!”
동시에 다나카 쇼타가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가이딩이 거부당한 부작용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피를 본 재영은 움찔했다가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게 왜 멋대로 굴어.’
가이딩을 하냐 마냐는 전적으로 가이드의 의사에 달려 있다. 초반에 사헌이 시키던 훈련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진짜 억지로 하려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재영은 사헌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그리고 다나카 쇼타는 입을 가린 채로 재영을 노려봤다.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직원이 다나카 쇼타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그대로 내쳐졌다. 그러자 재영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저는 가이딩하지 않겠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찔릴 것 없는 재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직원이 마지막까지 재영을 노려보는 다나카 쇼타를 데리고 멀어졌다.
“저게 널 성가시게 해?”
재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렸다. 저만큼 있던 사헌이 어느새 등 뒤에 바짝 서 있었다. 그의 날이 선 눈이 다나카 쇼타를 향해 있었다.
“알아서 처리했어요.”
재영은 당당하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감각이 예민한 사헌은 저 멀리서도 상황을 전부 듣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재영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든 경계했지만, 에스퍼에게는 유독 심했다. 그러니 더욱 날카롭게 감각을 세우고 지켜봤을 것이다.
재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사헌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잘했어.”
그리고는 옅은 미소를 띠며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숙소에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을래?”
그리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뭘 하든 자신이 넘치는 사헌이 재영과 관련된 일에는 조심스러워진다. 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미리 들은 이야기로 던전의 하루가 현실의 3일이라고 한다. 자료를 살핀 사헌은 당당하게 하루면 된다고 했지만, 혹시 모른다. 늦어지면 초조하게 기다리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일본 측 가이드도 동행하니까 재영이 낀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결연하기까지 한 얼굴에 사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운 모래가 발에 밟혔다. 재영은 신발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모래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원래라면 고지대 산 속에 위치한 신사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공간이다.
“그래도 덥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재영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온통 모래로 뒤덮인 풍경이지만, 쪼는 듯한 태양은 없었다.
“조심해. 조무래기들은 없어도 간간이 땅 꺼짐이 있다고 하니까.”
무거운 경고에 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래 속에 파묻히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부분이 소란이 일어난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사헌이 모래에 반쯤 파묻힌 사람의 뒷목을 잡아챘다.
모래 위로 나동그라진 사람 주변으로 가이드들이 몰려갔다. 다나카 쇼타였다. 놀라서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 때문에 반시체처럼 보였다.
‘A급 에스퍼가 저렇게 쉽게 당한다고?’
다나카 쇼타의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은 멀쩡했기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단순히 방심해서 일수도 있지만, 내상을 입게 했던 일 때문에 괜히 찝찝했다. 물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테지만.
게다가 A급 에스퍼의 자가 치유력으로 그 정도 내상은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일부러 안 한 거 아니야?’
그런 의심을 한 건 다나카가 제 주변에 몰려든 가이드들을 뿌리치는 것을 본 후였다.
“왜 가이딩을 거부하지?”
“다나카 씨, 각인한 상대가 있었어요.”
혼잣말을 하던 재영은 옆에서 들린 어색한 한국말에 움찔 놀랐다. 단발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놀란 재영의 얼굴을 보고 미안한 듯 웃었다. 재영은 여자의 몸에 웅크린 기운으로 그녀가 가이드라는 걸 알아챘다.
“한국말을 하시네요.”
재영은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으며 반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협회 직원마저 꿋꿋하게 일본어로 상대하는 마당에 한국어를 써 주는 사람이라니, 오히려 감사했다.
“한국인 친구가 있어서 조금 할 줄 압니다.”
재영의 격한 반응에 여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엄청 잘하시는데요.”
“그렇습니까?”
재영이 진심을 담아 칭찬하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던 재영은 문득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와따시, 와따시 김재영, 맞나? 맞나요?”
“모리 사키코입니다.”
더듬거리며 일본어를 내뱉자 모리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대꾸했다. 제가 듣기에도 형편없는 실력이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머쓱해하던 재영은 문득 그녀가 왜 저에게 말을 걸었는지 떠올렸다.
“그런데 무슨 말이에요? 각인한 상대가 있었다니…….”
재영은 다나카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었다’라는 건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격이 나빠진 건가.’
각인할 정도로 깊은 관계의 사람을 잃어 삐뚤어진 다나카 쇼타의 애잔한 스토리가 재영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말 그대로예요. 오랜 친구와 각인을 했어요.”
“친구요? 연인이었나요?”
에스퍼와 가이드가 연인이라는 건 크나큰 행운이라고들 했다. 대부분은 그냥 비즈니스 관계인 경우도 있고, 어느 한쪽의 집착으로 이뤄진 관계도 있다고 들었다.
‘그 점에서 나랑 형은 진짜 운명이지.’
재영은 뿌듯한 마음으로 사헌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아마 재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않으려고 빠져 있는 듯했다.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면 사헌은 옆에 있을 수 없으니, 같은 가이드와 안면을 트는 쪽이 재영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재영은 ‘연인’을 못 알아듣는 모리에게 뜻을 설명했다. 그러자 모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야마타 씨만요.”
야마타가 다나카의 가이드 이름인 듯했다. 재영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눈꼬리를 내렸다. 사헌이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같은 처지였을 테다.
“그런데도 각인이 돼요?”
서로 사랑하는데도 사헌과 재영은 아직 각인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은 부족하지 않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잘못됐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야마타 씨, 다른 사람을 가이딩할 수 없습니다. 다나카 씨, 가이딩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해요.”
완전한 각인이 되면 에스퍼도 자신의 파트너에게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애매한 각인이다. 하지만 재영은 그런 형태의 각인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이딩을 할 수 있으니까 다행이네요.”
좋아하는 마음이 모두 보답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재영의 말에 모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나카 씨, 가이드와 섹스 좋아해요.”
가이딩을 해서 나쁜 기분을 참을 정도로.
모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재영은 그것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야마타 씨는?”
“각인했는데 연인이 아니어서 힘들어했어요.”
모리의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야마타와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친구라고 해도 좋을 사이인 듯했다. 재영은 그녀의 말 속 야마타의 이야기가 전부 과거형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야마타 씨가 죽고도 각인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나카 씨, 가이딩 충분하지 않아요.”
“아…….”
예상대로 야마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각인한 상대가 없어져서 기분 나쁜 가이딩을 감당해야 하는 다나카도 조금 불쌍했다. 그렇다고 제가 나서 가이딩을 해 줄 생각은 없지만.
각인을 한 후에 자신이 없어지면 사헌은 어떻게 할까. 다나카처럼 불쾌감을 억누르며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게 될까? 상상일 뿐인데도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에스퍼로 더 활동하더라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다가 다나카와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안타깝다는 눈으로 쳐다본 모양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다나카가 휙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는 가이드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래도 에스퍼 하고 싶으니까, 잘할 거예요.”
재영의 시선을 따라 다나카를 본 모리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재영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 * *
던전의 대장 크리처는 커다란 영장류였다. 두 발로 선 모습이 곰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했다.
그것은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네 발로 쿵쾅대며 뛰어왔다. 그 움직임에 모래바람이 일어 날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재영은 아늑한 사헌의 품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
바람이 가라앉자 사헌이 커다란 선인장 옆에 재영을 내려놓았다. 재빠르게 대피한 몇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두꺼운 기둥이 막아 줘서인지 별다른 피해도 없어 보였다.
“살고 싶으면 이쪽으로 붙어.”
눈으로 빠르게 재영의 상태를 확인한 사헌이 주변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내뱉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저들끼리 바라보며 술렁였다. 모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사헌의 말을 통역해 줬다. 그러자 안전 구역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우르르 몰려와 재영의 옆에 섰다.
“누가 그렇게 가까이 붙으라고 했습니까?”
한 사람이 지나치게 가깝게 붙은 탓에 재영의 몸이 휘청했다. 사헌이 싸늘하게 말하며 그 사람을 밀쳤다. 누군가 옆에서 잡아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넘어졌을 거다. 재영은 사헌을 대신해 미안함을 담아 어색하게 웃었다.
“금방 끝낼게.”
재영의 주변 정리를 끝낸 사헌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에스퍼, 가이드할 것 없이 뜨거운 시선이 몰렸다. 재영은 놀람과 부러움이 섞인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한국에서야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지만, 외국은 또 모르니까.
사헌이 물러나면서 재영의 주변으로 투명하고 둥근 막이 생겼다. 몇 사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막을 두드렸다.
사헌이 다가가자 크리처의 몸이 커졌다. 아니,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선 탓에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키가 워낙 커서 목을 한껏 뒤로 꺾어도 재영은 그것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간단하네.)”
다나카가 자신을 따르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오만한 눈빛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아까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충분한 가이딩을 받은 모양이다.
“(저런 건 그냥 죽을 때까지 패면 되는 거야.)”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내뱉으며 땅을 박찼다. 하려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사헌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퍽!
단단한 것으로 밀가루 포대를 치는 듯한, 커다란 소음이 퍼졌다. 다나카의 의기양양한 얼굴과 달리 크리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작은 휘청임조차 없었다. 번질번질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리처가 자신을 공격한 무리를 내려다봤다. 모기라도 보는 듯한 감동 없는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맞잡고 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쿵!
가격당한 곳뿐 아니라 그들이 선 땅 대부분이 충격에 갈라졌다. 빠르게 바닥에 엎드리지 않았으면 볼품없이 넘어졌을 것이다.
“(딜레이가 있어. 지금이다!)”
아직 엎드린 채로 있는 크리처를 보고 다나카가 크게 외치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에스퍼 몇이 그를 따라 몸을 날렸다.
콰앙!
단단한 것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소리였다. 재영은 고막이 터질 것 같아서 귀를 틀어막은 채 몸을 웅크렸다.
공중에 휘두른 크리처의 꼬리가 사헌이 만든 벽에 부딪힌 것이다. 다나카와 함께 크리처에게 달려들려다가 꼬리에 맞을 뻔한 에스퍼들이 그 자리에서 쭉 미끄러졌다.
“적당한 패턴을 보기 전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헌이 경고조로 내뱉었다. 아마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작전 회의를 하며 내린 지시 사항인 듯했다. 그의 눈은 큰소리로 명령을 내린 다나카를 노려봤다.
다나카는 갑옷이 박살이 난 채로 볼품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사헌이 일부러 그만은 막아 주지 않은 듯했다.
‘죽지 않았으면 됐지, 뭐.’
재영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에스퍼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나카를 끌어서 구석으로 데려갔다.
다나카의 도발에 화가 났는지 크리처가 쿵쾅대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크리처의 등 뒤로 간 사헌이 크리처의 오금을 찍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길쭉한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사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다리로 머리를 후려쳤다.
날카로운 바위들이 옆으로 쓰러진 크리처의 몸 위로 쇄도했다. 쉴 새 없는 공격에 크리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과 함께 크리처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에스퍼들이 그 피를 전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해치웠나?)”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게 크리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가슴을 움켜쥔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벌어진 입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가만 들으니 무슨 주문 같았다. 곧 크리처의 손바닥이 덮은 부위의 상처가 아무는 것이 보였다.
“(치, 치료가……!)”
한 에스퍼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사헌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치료는 물론이고, 이속 증가, 공속 증가, 방어력 증가 등등. 스스로한테 버프를 걸 수 있는 마법 계열입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사헌의 입에서 낯선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한국어를 고집했나 싶을 정도로 유창한 수준이다.
완전히 치유된 몸을 일으킨 크리처가 가슴을 쭉 펴면서 울부짖었다. 재영은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면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못 이겨. 다 죽을 거야.)”
누군가 절망적인 어조로 내뱉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시작됐다. 크리처의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기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전투도 치르지 않은 상태다. 이런 분위기는 과했다.
“(다, 당장 도망쳐야 해!)”
재영과 함께 숨어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외쳤다. 그리고는 갑자기 보호막을 벗어나려고 했다. 재영은 황급히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여기서 벗어나면 위험해요!”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외치자 그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멍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안 좋은데…….’
재영은 움찔거리는 남자의 옷깃을 꽉 쥐면서 입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무섬증이 일었다.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드래곤 피어’처럼 사기를 낮추는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들 옆 사람 잡아요.”
또 누가, 언제 뛰쳐나가려고 할지 모른다. 모리의 통역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엉거주춤 서로를 붙잡았다.
한시름 걱정을 던 재영은 크리처와 에스퍼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사헌 혼자서 크리처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다리를 피했다 싶으면 꼬리가 날아와 사헌을 덮쳤다. 매순간이 아슬아슬했다.
탱커인 다나카가 다리든 꼬리든 하나를 견제해줘야 사헌이 크리처를 잡기에 수월해진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부상 상태였다. 아까처럼 가이딩을 받고 오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고민을 마친 재영은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다나카 쇼타를 향해 기운을 흘려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성질만큼이나 사나운 기운이 기껏 달래 주려는 가이딩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속으로 혀를 찬 재영은 제 기운으로 다나카의 힘을 억눌렀다. 갓난아기를 포대로 감싸 놓는 것처럼 넓게 펼친 기운으로 전체를 감싸자 그 성난 힘도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기운도 가랑비처럼 다나카의 내부에 스며들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다나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은 재영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나카 쇼타가 정신을 차리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다나카가 크리처의 발을 묶는 사이, 사헌과 다른 에스퍼가 핵을 찾아냈다.
사헌이 크리처의 꼬리를 꺾었다. 중심을 잃은 크리처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몸통에서 꼬리를 떼어 냈다. 고통에 찬 크리처의 신음이 들려왔다.
마침내 푸르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 * *
무사히 던전을 없앤 에스퍼들을 기다리는 건 수많은 기자들이었다. 크나큰 비극을 불러온 재앙이 사라졌으니 그 기쁨을 누릴 시간도 필요할 터다. 재영은 기뻐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사헌에게 다가갔다.
“(총리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협회 직원이 기자들을 피해 숨은 사헌을 찾아내 말했다. 재영도 일본 총리의 이름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싫습니다.”
사헌이 성가시다는 듯 그의 말을 딱 잘라 냈다. 당황한 직원이 도와 달라는 듯 재영을 바라봤다. 이제 막 던전을 닫고 나온 사람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재영은 못 본 척했다.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른 사헌이 가볍게 그를 지나쳤다.
“오늘은 온천 호텔로 가는 거죠?”
재영은 사헌의 허리에 매달려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에 왔으니 온천욕도 즐기고 싶었는데, 협회에서 마련해 준 곳은 공용 온천이라 선뜻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얀 피부를 얼룩덜룩 물들인 흔적 때문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래. 방마다 온천이 있다니까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야.”
사헌이 귀엽다는 듯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영.”
생글생글 웃던 재영은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A급 에스퍼인 다나카 쇼타였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말을 건다면 용건은 거의 하나다. 재영은 조금 피곤한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목 뒤를 문질렀다.
“무슨 일이세요?”
재영이 한국말로 한 탓에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나카 쇼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곁의 모리를 돌아봤다. 가이딩을 받으려고 옆에 둔 줄 알았는데 통역이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다나카는 모리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모리를 향해 뭐라고 말을 뱉었다. 사헌이 재영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다나카가 뭐라고 한지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김재영 가이드님, 매칭 테스트 원합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게 진사헌이라는 파트너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것도 바로 옆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못내 불쾌했다.
“계약금 10억 엔, 월급 천만 엔입니다. Z단계 가이딩하면 인센티브 있습니다. 또 도쿄 오피스텔과 차, 줍니다. 운전 못 하면 기사도 줍니다.”
줄줄 흘러나오는 일본어를 한국말로 옮기는 게 어려웠는지 모리가 중간중간 버벅대며 말을 끝냈다. 그냥 가이딩도 싫은데 Z단계라니. 사헌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스킨십은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사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다나카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재영은 그냥 제안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사헌의 팔을 붙잡고 돌아섰다.
찰싹.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에 재영은 뒤를 돌아봤다. 다나카가 한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돌아서는 재영을 붙잡으려다가 사헌에게 내쳐진 것이 분명했다.
“(뭘 원하지? 말만 해. 전부 들어줄 테니까.)”
“저는 진사헌 에스퍼의, 형의 연인이에요.”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아직 동성애가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가족들도 둘 사이를 인정한 마당에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어떤 눈으로 보든 상관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다나카 쇼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각인했나?)”
재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사헌을 올려다봤다. 대답은 충분했다. 각인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다나카의 입꼬리가 얄밉게 비틀렸다.
“(어차피 제대로 된 연인도 아니군. 나는 각인한 경험이 있다. 두 번째는 더 쉽겠지.)”
의기양양한 말에 재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을 사랑한 것도 아니면서 각인을 연인 관계의 척도로 여기는 것이 우습다.
“(어떻게 했지?)”
하지만 다나카는 사헌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뭐?)”
“(각인 말이야.)”
마음이 급해서인지, 재영을 의식해서인지 사헌이 일본어로 다나카에게 물었다. 하지만 ‘각인’이라는 단어가 한국말과 발음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한테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면서.’
재영은 불퉁하게 생각하며 미간을 모았다. 평소 각인에 대해 의연한 척한 사헌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자신만 안달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내가 말해 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자신이 유리한 입장이라고 생각했는지 다나카 쇼타가 사헌을 보며 빈정거렸다. 얄미운 태도에 사헌이 후려치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그만 가요.”
재영은 사헌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 다나카에게 내줘야 할 게 뭔지는 뻔했다. 재영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고. 뒤에서 다나카가 뭐라고 외쳤지만,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 * *
돌아오는 공항에서 두 사람은 면세점을 찾았다. 출장이라고는 해도 해외에 왔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이라도 할 셈이었다. 미리 적어 놓은 명단을 보고 골라서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친구들이야 대충 향 좋은 핸드크림만 던져 줘도 충분하다.
“형은 어디 있지?”
재영은 쇼핑백을 덜렁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선물을 고르는 내내 제 뒤를 쫄쫄 쫓아다닐 줄 알았는데, 입구에서부터 헤어져 만나지 못한 참이었다.
마침내 사헌을 발견한 재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있는 곳은 주얼리 코너였다. 그것도 귀걸이 쪽. 사헌이나 자신이나 귀를 뚫지 않아서 서로의 선물로 보기는 어려웠다.
‘어머니 선물인가?’
그렇다기에는 사헌이 잦은 출장에도 스스로 부모님을 챙긴 일이 없었다. 그나마 재영이 챙기는 통에 업혀 가는 수준이었다.
“그건 왜요?”
모르겠다면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다. 사헌이 옆에 달라붙은 재영을 슬쩍 쳐다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김윤서가 사다 주래서.”
잘 보니 사헌은 스마트폰으로 확대한 사진을 보면서 고르고 있었다.
“김윤서요? 그게 누구…….”
“안재효 페어.”
재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윤서예요.”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 재영의 속은 편해지지 않았다. 사헌이 누구 부탁을 들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던가. 게다가 사진을 보며 고른다는 건 둘이 따로 연락도 했다는 뜻이다.
“……근데 둘이 언제 친해졌어요?”
복잡한 눈으로 사헌의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재영이 울컥 내뱉었다. 그러자 사헌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질투해?”
떠보는 듯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사헌의 태도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네. 형 누구 챙기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재영은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부탁한 게 있어서 그래.”
그런 재영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헌이 달래듯 말을 내뱉었다.
“부탁이요? 형이 윤서 형한테 부탁할 게 뭐가 있어요?”
그게 재영을 납득시켜 주지는 못했다. 뜻밖의 날카로운 반응에 사헌은 당황한 듯했다.
“다음에. 다음에 얘기해 줄게.”
그걸로 제발 넘어가 주라는 듯 사헌이 재영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결국, 알아낸 게 선물의 주인공 말고는 없었다. 구겨진 이맛살은 펴질 줄 몰랐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사헌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 * *
한국으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다. 재영은 길드 건물 주차장에 세워진 낯익은 차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사헌의 차다.
‘오늘 훈련 없을 텐데…….’
재영이 동행하지 않는 한, 사헌은 훈련이 없는 날 출근하지 않았다.
“내가 하랑 길드에 오게 되다니……!”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동준이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른 들어가자.”
재영은 동준의 팔을 잡고 재촉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동준이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어디 보여 줄 거야? 볼 게 뭐 있지?”
재영은 동준만큼이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에스퍼들의 훈련실부터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한 PT실, 하다못해 사장실까지 돌았는데 사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냥 차만 세워 두고 근처 다른 데에 간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할 때였다.
“저기 공주님 아니냐?”
동준의 말에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 사헌과 윤서가 있었다. 재영은 나란히 나오는 두 사람을 다시 확인하고, 고개를 들여 팻말을 살폈다.
-매칭 테스트 룸-
심지어 재영과도 간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재영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를 더 예민하게 만드는 건 바람 현장이라도 들킨 것처럼 뜨끔한 표정의 윤서와 사헌이었다.
“집에 가서 이야기해.”
재영을 향해 똑바로 걸어온 사헌이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의도치 않은 헛웃음이 터졌다.
“또 미루는 거예요?”
날 선 목소리에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화가 난 건 아니고, 난처한 기색이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진짜 바람 현장이라도 목격한 기분이다.
재영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문제를 회피하는 건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신 지금 당장 가요.”
“어어, 나는 집에 갈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동준이 묻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말했다. 재영은 그제야 친구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하다. 구경은 다음에 시켜 줄게.”
“아니, 뭐, 구경은 아까 다 했는데…….”
동준이 사헌을 힐끔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사헌은 그제야 재영이 길드 사무실에 온 이유가 동준이라는 걸 알아채고 노려봤다. 재영은 동준을 막아서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사헌이 재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동준을 감싼 게 못마땅한 모양이다.
“야. 뭔지 모르겠는데, 니 옆에는 우리 뽕팸이 있다, 알지?”
눈동자를 굴리던 동준이 재영의 귓가에 대고 비밀스럽게 말했다. 뭔지 모르겠다면서 재영이 사헌과 싸울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파악한 모양이다. 저를 위해 S급 에스퍼와 싸우는 상황도 감당하겠다는 말에 재영은 든든함을 느꼈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윤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헌이 말해 주지 않은 진실을 말해 주려는 모양이다.
“형. 우리끼리 먼저 이야기할게요.”
재영은 딱 잘라 윤서의 참견을 거절했다. 이건 자신과 사헌의 일이다. 아무리 윤서의 존재가 원인이라도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원인이기에 끼우고 싶지 않았다.
“어? 어, 그래.”
차가운 반응에 윤서가 더 당황한 듯 얼굴을 어색하게 굳혔다.
동준과 윤서를 보내고, 두 사람은 사헌의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만 남은 차량 내부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말해 봐요. 테스트실에서 둘이 뭐했어요?”
흡사 바람피우는 상대를 다그치는 모양새다. 사헌을 상대로 이런 일까지 생길 줄은 몰랐던 터라 재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테스트했지.”
바닥까지 떨어진 줄 알았는데 더 바닥이 있었나 보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아서 재영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왜요?”
재영은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내뱉었다. 사헌이 평소처럼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요즘은 눈만 봐도 그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파트너라도 바꾸고 싶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재영은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바로 받아치는 말에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재영은 불투명한 행동으로 불안함을 준 사헌보다도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더 미웠다.
“그럼 왜요?”
신경질적인 물음에 사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작은 행동에도 재영은 심장이 덜컥거렸다.
‘형한테 미움받으면 어떡하지?’
재영은 사헌을 똑바로 쳐다도 보지 못한 채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스스로 듣기에도 듣기 싫은 짜증스러운 목소리 같았다.
눈치를 살피는 재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사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각인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사헌이 각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다나카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걸 왜 몰래 하는데요?”
하지만 몰래 확인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변명 같은 말에 재영의 머릿속이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형이랑 윤서 형이랑 둘이 매칭룸에서 나오는 걸 보고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재영은 거기까지 내뱉고 입술을 오므렸다. 말하는 도중에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떨리는 숨을 내뱉은 재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질렸나?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찾으려는 건가? 그게 윤서 형인가?”
공항에서 사헌이 답지 않은 행동을 한 탓에 내내 불안했다. 윤서가 사헌에게 예외의 존재가 된 건 아닐까. 사헌의 다정함이, 이제는 제 것만이 아닌 게 아닐까. 의심의 실체가 잡힌 오늘은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럴 거면, 각인, 그냥 안 할래요.”
눈물이 차올라서 시야가 흐려졌다. 재영은 사헌의 반응을 보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렀다. 사헌이 처음 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재영의 손을 붙잡았다.
찰싹!
아니, 잡으려는 찰나, 재영이 그의 손을 세게 내쳤다. 큰소리에 움찔 놀랐지만, 곧 오기 어린 눈으로 사헌을 노려봤다.
“오늘은, 흡, 형 안 볼래요.”
자신이 불안해했던 것만큼은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느꼈으면 했다.
‘돌아보지 마.’
재영은 자꾸만 등 뒤로 쏠리는 신경을 애써 무시하며 컴퓨터방으로 들어갔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게 뭐라도 실컷 때려잡아야 그나마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재영은 마우스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온정신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던 만큼, 게임도 잘 풀리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전원 방생에 게임 할 맛도 나지 않았다.
똑똑.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안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놀라운 타이밍이다. 재영은 긴장한 얼굴로 돌아봤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도한 한편, 서운했다. 평소처럼 강제로 붙잡고 설득이라도 시켜 주지. 물론, 혼자서 실컷 게임을 하고 나서 가질 생각은 아니었다.
“불편하면 내가 나가 있을 테니까 나와서 밥 먹어.”
마침내 바깥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항상 저녁을 먹던 시간이다. 마음대로 대화를 끊어 버린 상황에서조차 사헌은 끼니를 챙겨 준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재영은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사헌의 얼굴이 웃는 듯 마는 듯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답지 않은 표정에 안쓰럽기도 하고, 괜히 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잠도 나가서 자라고 그러면 어쩌려구요?”
재영은 토라진 티를 내며 말했다. 이 집에는 침실이 하나니까 한 사람은 소파에서 자거나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건 안 돼.”
단호하게 말한 사헌이 재영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아파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풀렸다.
“아무리 보기 싫어도 옆에 두고 풀어. 차라리 화를 내고, 때려.”
생각지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사헌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도망치는 건 절대 안 돼.”
코앞에서 사헌이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뒤로 물러나기라도 하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미쳤나.’
재영은 아연하게 생각했다. 사헌의 이런 반응이 기쁘고, 안심됐다.
“다음부터는 나 몰래 아무것도 하지 마요.”
재영은 어쩔 수 없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인 사이라면, 그것도 평생을 함께 할 사이라면 비밀은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다시는 안 그래.”
사헌이 뼈저리게 후회했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굳어진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아, 나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조금 더 밀어 볼걸. 재영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겨우 닿은 온기에서 다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게임을 하는 동안 윤서에게서 숨겨서 미안하다고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서는 사헌의 부탁들을 받아 줬을 뿐이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윤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이 윤서 형한테 가서 사과해요.”
싫은 표정을 한 사헌이 다그치는 듯한 재영의 눈을 보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매칭 테스트까지 했어요? 각인하면 다른 사람하고 가이딩 자체가 불편하다고…….”
재영은 말하는 도중에 답을 찾았다. 하지만 사헌은 원래부터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가이딩이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래도 각인을 하면 뭔가 다르겠지.”
사헌이 관심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던 재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나랑 헤어지고 싶어지면 꼭 먼저 말해 줘요.”
그건 또 그것대로 힘들겠지만, 실체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러자 사헌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럴 일 없어.”
단호하게 내뱉은 사헌이 눈을 번뜩였다.
“네가 나랑 헤어지고 싶어지면 꽁꽁 감추는 게 좋을 거야.”
사헌이 재영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꼭 조르는 것처럼 목을 감싸 쥐었다. 섬뜩한 기분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여다본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절대 안 놓아줄 거니까.”
재영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사헌이 보이는 집착과 독점욕에 설레는 것을 보면 자신도 제대로 미친 게 분명했다.
사헌이 굳어 있는 재영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얼른 밥 먹어.”
갑작스러운 재촉에 재영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할 분위기는 아니었지 않나?’
고개를 갸웃하는 재영을 보고 사헌이 눈꼬리를 휘었다.
“섹스하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사헌의 말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각인할 때까지 하게요?”
“아니. 내가 만족할 때까지.”
재영이 아연한 얼굴로 묻자 사헌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대답을 듣고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끝나기는 해요?”
며칠 동안 먹고, 씻고, 몸을 섞는 일만 반복했어도 사헌은 세우고, 또 세웠다. 경악해서 묻자 사헌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재영은 잠자코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 태블릿과 연결된 워치가 긴급 신호를 보냈다.
“미뤄야겠는데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워치를 가리켰다.
* * *
두 사람이 도착한 현장에는 폭주 직전의 에스퍼가 있었다. 상황을 통제할 S급 에스퍼만 요청한 길드 직원은 뜻밖에 S급 가이드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사로 해.”
사헌이 당부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다. 서훈 등 먼저 도착한 에스퍼들에게 억류당한 폭주 에스퍼의 눈빛이 살벌했던 것이다.
눈을 감자 빠르게 뛰는 심장이 더 요란하게 느껴졌다. 재영은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폭주 에스퍼를 향해 제 기운을 쏘아 부었다. 점점 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가는 것보다 회복이 빠른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토할 것 같아.’
정확히는 그게 아닌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속이 미슥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그냥 기분이 나빴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길드 직원이 재영의 상태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재영은 바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가이딩을 하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이다. 심지어 다나카 쇼타에게 가이딩을 할 때도 이 정도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낯선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매칭률이 낮아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구와도 기본 50 퍼센트를 넘는 S급이라지만,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지금 진사헌 에스퍼 가이딩해 볼까?”
그런데 함께 출동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서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형이요?”
“응.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서의 의도를 알 것 같아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사헌이 갑자기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했다.
“아무래도 된 것 같지?”
그에게 방사 가이딩을 시도한 윤서가 재영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더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설마…….”
재영은 아무나 붙잡고 기운을 흘려 넣었다. 하필 잡힌 게 서훈이라서 사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미 가이딩을 해 본 서훈이라서 비교하기가 쉬웠다.
울컥 치미는 불쾌함에 재영은 서훈을 잡은 손을 뗐다. 사헌이 그 손을 끌어다가 제 손 안에 감췄다.
“됐어요!”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외치며 사헌을 끌어안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재영의 애정 표현에 길드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어디서든 내키는 대로 재영에게 질척대는 사헌과는 달랐다.
평소라면 그 시선에 부끄러워할 테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각인이 된 것이다. 안 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서로 끊을 수 없는 연결이 생겼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벅차고, 좋았다.
“이제 완전히 네 거니까, 책임져.”
사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 사헌은 정말로 재영이 아니고서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내 것. 재영은 느껴 본 적 없는 짙은 소유욕을 느꼈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요.”
재영은 사헌의 손등에 보란 듯 입을 맞췄다.
“그래.”
사헌이 환하게 웃으며 재영의 입술에 키스를 되돌렸다. 받은 것보다 훨씬 진하고, 야한 키스를. 재영도 밀어내는 대신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당겨 안았다.
“저럴 거면서 유난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세계에서 윤서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현장에 나간 파트너가 유독 보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