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0)

17.

우웨엑.

재영은 주저앉아 속을 게워 냈다. 그러고도 한번 뒤집힌 속은 나아지질 않았다. 승차감이 좋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시간에 몇 층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느낌이다.

재영의 손목을 잡은 정체불명의 에스퍼는 짧은 순간이동을 몇 번 반복했다. 재효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자 같지.’

그 증거로 재효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먼 거리를 가도 약한 멀미만 느껴질 뿐이었다. 재영은 젖은 입가를 훔치려고 손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등 뒤에 있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재영은 젖은 눈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어질어질해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그와는 다르게 멀쩡하게 선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 아마 셋 다 에스퍼일 테니 완력은 저보다 나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 공포 영화에서 본 것처럼 눈만 보이고 얼굴 전체가 덮인 새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납치 대상이 저 사람이었어요?”

경악한 여자에게서 생각보다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납치인 건 확실한 모양이네.’

어쨌든 여자의 말로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다시 쓴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으려고 했는데, 몸만 들썩여질 뿐이었다.

‘묶인 건가?’

재영은 등 뒤로 신경을 집중하며 손을 바르작거렸다.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대체 어느 틈에…….’

곤란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영은 우선 제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로 했다.

“그래. 무슨 문제 있나?”

남자 하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 그게…… S급 에스퍼의 가이드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면 너머로도 여자가 당황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이 누구를 납치해야 하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재, 영 군. 괜찮아요?”

그때 등 뒤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다른 이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재영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흐린 시야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준오 형?”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헌이 형이랑 같이 간 게 아니었나?’

상상하지도 못한 존재의 등장에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손만 묶인 저와는 달리 준오는 아예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아마 그가 에스퍼라서인듯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뭐야?”

재영을 납치한 사람들이 마침 준오의 존재를 언급했다.

“이상한 게 따라붙었잖아요!”

절대 달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이상한 거라니. 좀 상처지 말입니다.”

준오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한 상황에 비해서는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준오의 얼굴도 창백했다. 재영과 함께 순간이동을 당한 거라면 이해가 된다.

“진짜로 어떡해요?”

여자가 준오를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영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준오가 당혹스러운 존재였는지 다시 저들끼리 머리를 맞댔다. 숙련된 납치범이라기엔 어딘가 어설픔이 느껴졌다.

‘잘하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재영은 그들을 지켜보던 것을 멈추고 다시 주변을 돌아봤다. 넓은 평야는 관리가 되지 않은 듯 마구잡이로 자란 잡초로 무성했다. 그 외에 인가나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준오 형이 있으니까 땅속으로 도망칠 수 있을 수도…….’

결연한 눈빛으로 준오에게 말을 걸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저들 중 둘이 A급이지 말입니다.”

준오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재영에게도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였다. 재영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준오의 실제 등급은 B. B급 에스퍼와 A급 에스퍼의 마력차는 상당하다. 수적으로도 열세인데 등급까지 차이가 있으니 그야말로 막막했다. 땅속으로 도망칠 여유조차 없을지 모른다.

“아마 재영 군 몸에 대장이 붙여 둔 추적기가 있을 겁니다.”

준오가 확신하는 말투로 내뱉었다. 재영은 납치범들을 힐끔힐끔 살피면서 조심히 몸을 더듬었다. 스마트폰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목걸이의 차가운 온도는 그대로 느껴졌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준오를 향해 가슴팍을 내밀었다.

“머리로 제 가슴팍 좀 박아 주실래요?”

뜻밖의 제안에 준오가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손이 묶인 탓에 방법이 없었다. 머뭇거리던 준오가 작게 사죄의 말을 읊으며 머리를 쾅 박았다.

생각한 것보다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재영은 뒤로 한차례 굴렀다. 계속해서 이쪽을 경계하던 납치범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하지만 여전히 묶여 있는 꼴을 보고 시선을 거뒀다.

“그런데 던전에서는 기운을 느낄 수 없을 텐데…….”

겨우 다시 몸을 일으킨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목걸이의 존재를 깨닫고 반사적으로 누르기는 했지만, 사헌은 기기가 작동되지 않는 던전 안에 있다.

게다가 던전은 언제 브레이크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납치됐어도 몸은 멀쩡한 자신보다 촛불 앞에 등불처럼 아슬아슬한 나래시민의 목숨이 중요한 건 당연하다.

‘형이라면 나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했겠지.’

재영은 사헌의 대답을 예상해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최대한 도망가십시오.”

납치범들을 빤히 쳐다보던 준오가 나직이 말했다. 휘말린 거면서 저를 대신해 납치범들의 발을 묶겠다고 말한 것이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회의적으로 말했다. 어느 쪽이냐면 그는 준오와 함께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휘말린 게 분명한 그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다.

사헌이 제때 와 준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던전에서는 외부와 어떤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던전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가니 얼마나 지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평범한 몸뚱이로, 아니, 묶이기까지 한 몸으로 에스퍼 하나라도 제대로 따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단 추적기를 발동해 놨으니까 저 사람들이 어쩌는지 지켜보는 게 어때요?”

자신은 어떻게 도망친다쳐도 시선을 끄느라 남아 있는 준오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제 걱정은 안 해도 되지 말입니다. 오늘 제 임무는 대장의 가이드를 지키는 것입니다.”

망설이는 재영의 속내를 읽은 준오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형이?”

“예. 그러니 제대로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준오가 듬직한 얼굴로 말했다.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라 목소리는 꺼질 듯 가늘었지만.

“어스퀘이크.”

재영의 눈빛이 단단해진 것을 확인한 준오가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영창했다. 동시에 재영은 준오의 등 뒤로 뛰었다.

“표적이 도망친다!”

준오의 손 아래서부터 땅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재영을 쫓으려던 에스퍼들의 몸이 휘청였다.

“B급 따위가…….”

납치범들이 이를 아득 물며 준오의 공격을 피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계속 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디딘 땅이 파도처럼 일렁여서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

“B! 너는 표적을 쫓아!”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알겠다!”

덕분에 재영의 마음은 급해졌다.

“C와 나는 땅개를 구속한다.”

“땅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등 뒤에서 그런 소리들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하지만 재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무작정 달렸다. 길게 자란 풀이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헉, 헉.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거칠어졌다. 긴장감 때문이다. 재영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애써 무시하며 구르듯 앞으로 나아갔다.

“잡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몸뚱이가 뒤로 쏠렸다. 추락하는 놀이기구의 맨꼭대기에서 떨어진 것처럼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 이거 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탓에 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만히 안 있어? 이걸 확 그냥……!”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우리 일은 목표물을 제대로 인계하는 거라는 걸 잊었어요?”

낯익은 목소리의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남자가 위협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다시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참는 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재영은 끊임없이 버둥거리며 남자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사실 반항하면서 몇 대쯤 맞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손만 자유로워도…….’

재영은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손이 자유로워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을 거다. 남자는 에스퍼고, 자신은 평범한 가이드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재영의 눈빛이 빛났다. 머릿속으로 무기점에서 본 단검을 떠올리려고 했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그런데 그 순간 재영의 몸이 휙 날아갔다.

“윽!”

납치범이 던져지다시피 해서 재영의 몸이 풀밭을 뒹굴었다. 팔이 돌부리에라도 부딪친 듯 아팠다. 도망을 쳤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듯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준오가 뛰듯이 다가와 재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재영은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의 꼴은 저와 비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제압하려다가 휩쓸려 다친 건지, 상대가 아예 작정하고 팬 것인지 얼굴이 엉망이다. 눈이 붓고, 볼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쥐어 터진 입술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

“죄송해요. 기껏 시간을 벌어줬는데 제대로 도망도 못 치고…….”

재영은 미안함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준오가 이런 일에 휘말린 것도 저 때문이다.

“얼른 약 가져와!”

두 사람이 대화하는 틈도 주기 싫다는 듯, 재영을 잡아온 남자가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거칠게 당겼다. 조금만 더 힘을 줬으면 목이 졸렸을 것이다.

“……!”

“조심해요! 우리 고객께서는 절대 이런 상황을 원치 않을 거예요.”

준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서기도 전이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재영을 막아서며 남자를 향해 외쳤다.

‘고객?’

재영은 속으로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의뢰로 자신을 잡아 온 것이다. 대체 누구일까. 왜, 무슨 짓을 하려고 자신을 납치해 온 걸까. 재영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재워서 올 걸 그랬어. 괜히 성가셔졌잖아.”

주머니를 뒤적이는 여자를 보면서 남자가 투덜거렸다.

“그럴 틈이 없었잖아.”

그들의 대화에서 여자의 손에 들린 약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건 먹으면 안 돼.’

재영은 약을 들고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고 사납게 눈을 치떴다. 여자가 재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역시 에스퍼라서 힘이 세다. 고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흠칫 놀란 여자가 손에서 힘을 뺐다.

“가만히 있어요, 제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여자가 재영의 귓가에 대고 우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릿속에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재영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가면을 보며 제가 아는 얼굴을 덧대 보았다.

“세라?”

꺼지는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자 여자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기억 속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훈의 손에 끌려간 고아원에서 폭주 직전에 구했던 그 소녀였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재영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준오가 재영을 놓아달라 악을 썼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재영은 나머지 에스퍼에게 결박당한 준오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가면에 가려 유일하게 드러난 세라의 눈은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 있었다.

“잠깐. 네가 날 납치한 거야? 왜?”

뒤늦게 세라가 쓴 가면이 납치범과 한패라는 걸 의미한다는 걸 떠올렸다. 재영은 혼란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려고 했다.

“나중에요.”

거칠어진 음성에 놀란 세라가 다급하게 내뱉으며 곁눈질했다. 그녀의 동료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재영은 일단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수면제예요.”

짧게 내뱉은 세라가 재영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생수를 재영에게 들이댔다.

“그런 걸 왜……!”

세라가 저에게 먹이려는 것이 뭔지 알게 된 재영이 버둥거려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물리계 에스퍼인 세라에게는 미약한 날갯짓일 뿐이다. 재영은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눈가를 찌푸렸다.

“진사헌 에스퍼에게는 제가 연락할게요.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요.”

세라가 재영의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하고 생수병 주둥이를 물렸다. 재영은 울컥 밀려드는 물을 삼키지 않으려고 혀로 입구를 막았다.

거부해봤지만, 밀고 들어오는 물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재영이 뱉어낸 물이 턱을 타고 흘러 셔츠 앞면을 적셨다.

재영은 배신감에 찬 눈으로 세라를 노려봤다. 곧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 * *

기계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재영은 곧장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뇌가 통째로 물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으윽.”

억지로 눈을 뜨려고 하니 끔찍한 두통이 일었다. 재영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묶여 있었지.’

그제야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이 났다. 사헌이 던전에 입장한 틈에 납치를 당했고, 범인 중 아는 사람이 있었다. 세라. 폭주 직전에 재영이 가이딩을 했었다.

‘그때 형한테 엄청 혼났었지.’

자연스럽게 생각이 사헌에게로 흘렀다. 그를 떠올리자 조금 차분해졌다. 재영은 무거운 눈을 끔뻑였다. 낯선 천장이다. 소설에서 흔히 보던 표현을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재영은 일단 일어나려고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만 묶여 있던 것과는 달랐다. 턱을 당겨 내려보자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끈이 보였다.

‘얌전히 있어요.’

그 결과가 이런 결박이라니. 재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그 말을 듣지 않고 버둥거렸던 건 어느새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삐, 삐.

축 늘어진 재영의 귓가에 기계음이 들렸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애를 믿을 수 있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재영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각을 되찾았다. 둔하기는 해도 멀쩡했다. 손가락끼리 비벼지자 뭔가가 느껴졌다. 사헌이 사준 호신용 반지를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다행이다.’

슬쩍 웃은 재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기척을 살폈다. 일단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스퍼였으면 좋았을걸.’

먼 거리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이라면 지금 꽤 도움이 됐을 텐데. 재영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방심한 에스퍼를 상대로 한 번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검의 이미지를 떠올리자 가죽 손잡이가 잡혔다. 재영은 손목을 꺾어 검날로 줄을 살살 긁었다. 꺾인 손목이 아프고, 효과가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지난한 시간이 흘렀다.

뚝.

마침내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재영의 눈이 희열로 반짝였다. 재영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허리, 팔, 양다리에 묶어놓은 끈을 전부 잘라냈다.

“많이도 묶어놨네.”

재영은 끝으로 발목을 묶은 줄을 끊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뻐근한 팔을 붕붕 돌려 몸을 풀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지?”

재영은 눕혀져 있던 곳에서 내려오며 두리번거렸다. 그는 지금 온갖 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투명한 원통 안에 푸른색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안에 어떤 형체가 있었다. 설마, 싶은 마음에 재영은 서둘러 통에 다가갔다.

재영의 머리카락보다도 긴 털로 뒤덮인 것은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사람은 아니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실험실 같은데…….”

그리고 한가지 생각에 신경이 미쳤다. 기계 주변의 테이블 위에는 무슨 설계도 같은 것이 잔뜩 보였다. 사람의 실루엣을 그려놓고, 알 수 없는 문자를 많이도 휘갈겨 놨다.

“설마 내가 실험체…….”

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덕분에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나중에 형하고 와서 더 살펴보자.’

이곳을 아예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가정은 없었다. 재영은 숨을 멈추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살피자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재영은 서두르지 않았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걸음을 옮기다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면 구석에 숨어 숨을 죽였다.

‘대체 출구가 어디야.’

그렇게 미로처럼 엉킨 복도를 지나던 재영은 어떤 사람들을 보고 황급히 기둥 뒤로 숨었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과는 다른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그분께서 일정을 앞당기라고 하셔요.”

세미 정장을 입은 여자가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했다.

‘그분이 누구지?’

누구인지 몰라도 이 일을 벌인 흑막이 분명했다. 같은 직원들끼리도 언급하기 어려워하는 걸 보면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아주 유명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알아내면 좋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무사히 탈출하는 것이다.

재영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은 저기가 아니어도 많았고, 혹시라도 숨어있다가 걸리면 그것이 낭패다.

“거기, 누구시죠?”

살금살금 발을 딛던 재영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움찔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간을 끌수록 더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새로 온 잡부입니다. 길을 잃었어요.”

재영은 상대를 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상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김재영 가이드?”

곧장 저를 부르는 말에 재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른 사람인 척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알려졌다는 걸 깜빡했다.

‘어쩔 수 없지.’

재영은 날래게 남자의 뒤로 가 결박하면서 목에 단검을 댔다. 180센티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재영에 비해 남자는 너무나 왜소했다. 에스퍼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일반인을 상대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소리 지르면 찌릅니다.”

움칫대는 움직임을 느낀 재영은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이 건물 안 경비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이, 이런 짓을 하면…….”

연구원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인상을 찌푸린 재영은 어이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당신들이야말로 이런 짓을 하면 사헌이 형이 가만둘 것 같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연구원이 헛숨을 삼켰다. 분노한 S급 에스퍼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사법기관에 기대는 게 나을 거다.

“벼, 별일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돼요.”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재영을 설득하려 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려다가 단검의 존재를 다시금 깨달았는지 빳빳하게 굳었다.

“그렇게 별거 아니면 본인이 하시지. 왜 가만있는 사람을 납치하고 그래요.”

“하, 하지만 저는 가이드가 아니라서……!”

힐난하는 재영의 말에 저도 모르게 대꾸하던 남자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머릿속에 불이 번뜩인 것 같다.

“아무나가 아니라 가이드가 필요한 거였다?”

확인차 되묻자 남자의 얼굴에는 아예 핏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제, 제가 나, 나가는 길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재영이 뭔가 알아차렸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단박에 태도를 달리했다. 그에게 자신들이나 진행하는 실험의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재영을 얌전히 보내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마 뒤에 있는 사헌도 한몫 단단히 했다고 봐야겠지.

‘이게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건가.’

같이 있지 않아도 든든한 사헌의 존재감에 마음이 놓였다. 그것도 재영이 실험실에서 도망치고, 이렇게 위협을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재영은 그렇게 남자를 인질 삼아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갔을까 바로 벽 너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남자의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며 모퉁이 끝에 딱 달라붙었다.

“쉬-”

남자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을 느낀 재영은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리고 빼꼼 눈을 내밀어 벽 뒤를 살폈다.

‘응?’

이번에도 예상에 없는,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절대 좋은 쪽은 아니다.

“내 지역구까지 걸고 잡은 기회네. 반드시 큰 성과를 이뤄야 할 거야.”

한 연구원을 향한 학성길 의원의 말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역구……라면, 나래시인데, 나래시를 걸었다?’

나래시를 걸었다는 게 그곳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걸 뜻한다면, 떠오르는 건 던전 브레이크뿐이다.

‘나를 잡아 오려고 일부러 사헌이 형을 던전에 끌어들였다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 일로 센터의 많은 에스퍼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 납치의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그게 애먼 에스퍼의 안위보다 중요할 리 없다. 그런데 재영의 중얼거림에 잡힌 남자의 숨소리가 달라진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무려 S급 가이드인데 더는 가이드의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핑계는 댈 수 없을 거야.”

S급 가이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 가이드의 기운이 필요한 실험. 가이드의 기운을 양분 삼아 만든 크리처. 그렇게 하나씩 되새겨 보니 실마리가 잡히는 것도 같았다.

“제가 묶여 있던 곳에서 크리처를 봤어요.”

재영은 제게 잡혀있는 연구원을 떠보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변이 던전…….”

추측만 가지고 내뱉은 말에 남자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 상대가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재영이 놀랐다.

“당신들, 여기서 변이 던전을 만드는 거였어요?”

재영은 마침내 도달한 답에 경악해서 외쳤다.

지금까지 들은 말을 종합해 보면 변이 던전을 만드는데 어떤 이유인지 가이드가 필요한 것 같다. 수급은 용병인 자유 에스퍼들을 이용해 수급하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훑었다.

“혹시 뉴스에 나온 가이드 사망…… 그것도 관련 있어요?”

“아, 아닙니다. 그, 그건 자유 에스퍼의 학대로 인한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나요? 아닌가? 폭주 에스퍼의 짓이었나?”

화가 나 일그러진 얼굴을 본 연구원이 손을 흔들며 횡설수설했다.

“호, 혹시 우리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건 진짜 아닙니다.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데 가이드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정색하며 말했다. 물론 재영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연구원이 실험체가 된 재영에게 직접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납치한 일당의 말을 믿는다는 게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최악의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납치를 합니까?”

“대대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재영이 쏘아붙이자 연구원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는 거다.

“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데요?”

재영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인류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발명해 왔어요. 미지의 것을 관찰하고, 발전시키면서…….”

연구원이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영의 머릿속으로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 학성길 의원과 나래시의 합작일까, 아니면……. 다른 가능성은 상상도 하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우선 여기서 나가는 것부터 하죠.”

재영은 보란 듯 단검을 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위협적인 모습에 힉, 숨을 집어삼킨 연구원이 발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았다. 마침내 연구원이 복도의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4단짜리 선반이 가득했다. 선반은 상자며 파일로 채워져 있었다. 재영은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다른 문은 보이지 않았다. 출구가 있을 분위기도 아니다.

“여기는 출구가 아니잖아요.”

‘함정?’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구원을 노려봤다.

“아, 아니에요! 우리 연구원도 여기에서 함부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 그래서…….”

아마 보완의 문제이거나 그럴 것 같다. 재영의 얼굴이 참담함에 일그러졌다.

“아, 아니, 아예 못 나가는 건 아니에요, 네.”

절망감에 젖은 재영의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는 듯 연구원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이상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약한 사람 같다.

“김재영 가이드님이 잘못 알고 계신 게 있습니다.”

연구원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재영은 연구원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희는 던전 자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마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존재하는 던전에 변화를 일으키는 거예요.”

“최종 목표는 던전 생성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요.”

재영의 반박에 연구원이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우리 같은 연구원이 직접 던전에 탐사 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연구원이 종이 뭉치를 뒤적이며 말했다.

“물론 에스퍼에 의해 통제가 끝난 후지만요.”

그리고 서류철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며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우리는 던전에 탐사 간다고 하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갈 겁니다.”

재영은 자신이 협박한 것 이상으로 열심히,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연구원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갑자기 왜 도와주시려는 거예요?”

재영은 연구원을 수상하게 여기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연구원이 미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억지로 잡아다가 실험체로 쓴다는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옅은 죄책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재영은 단검을 반지로 되돌리지 않았다. 협조를 하든 안 하든 그가 멀쩡한 가이드를 잡아다가 이상한 실험을 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자료는 어떤 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

재영이 자료에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연구원이 경고조로 입을 열었다. 재영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헌이 화가 났을 때를 따라한 것인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연구원이 뜨끔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여기 워터마크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은 연구원이 자료 하단을 가리켰다. 종이에 하늘색? 회색? 잘 보이지 않는 색의 문양이 보였다.

“들고 이 문을 나가려고만 해도 경보가 울릴 거예요. 그러면 경비원들이 올 거고요.”

여기서 하는 연구나 이곳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종이 하나를 슬쩍 챙기던 재영은 다시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대신 눈에 새겼다. 계속 보고 있어서인가. 표식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폰이라도 있으면 찍어갈 텐데…….’

재영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세라 일당에게 잡힌 순간부터 스마트폰은 보이질 않았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 안 될 것이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로 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입이 썼다.

“여기 있다.”

서류철을 든 연구원이 화색을 띠며 외쳤다. 재영은 어깨 너머로 그 종이를 훔쳐봤다. 던전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있고, 그 아래에 관한 정보가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전부 재영은 알지 못하는 던전들이었다.

“뭐예요, 그건?”

“아, 보류 건이에요.”

보류?

“던전을 보류한다고요?”

재영은 경악했다. 발생한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는다는 말 같았다.

“던전 브레이크가 당장 발생하는 건 아니니까요.”

연구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정말 괜찮다고?’

재영은 오묘한 표정으로 보류건이라는 서류들을 바라봤다. 연락을 받으면 지체하지 않으려고 바로 움직이는 사헌을 떠올리면 절대 괜찮을 것 같지가 않았다.

“왜 미뤄 두는데요? 센터에 사람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어, 글쎄요.”

재영이 묻자 연구원이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어리버리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자기 일 아니고는 관심이 없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재영은 워터마크가 찍힌 종이 한 장을 구겼다.

“어어?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바스락 소리에 돌아본 연구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내뱉었다.

“이쪽으로 와요.”

재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연구원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얌전히 있어요. 소리 지르면 재미없을 거예요.”

이어 재영은 영화에서 본 악당 흉내를 내며 단검을 살살 흔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을 구석에 내버려 두고 온 재영은 문을 활짝 열고 종이 뭉치를 집어 던졌다. 동시에 연구원의 옆으로 가 몸을 감췄다.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겨, 경비원들이 올 거예요.”

연구원이 걱정된다는 듯 재영을 쳐다봤다.

“바깥부터 뒤질 거예요.”

재영은 제발 그래야 한다는 소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일부러 눈에 잘 보이는 자료들만 가져다 숨겼다. 비어 있는 선반을 보고, 경고를 들었으니 누군가 침입해 훔쳐 도망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행히 경비원들은 재영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문가의 선반을 확인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란을 일으켰으니 그 틈을 노려야 한다. 재영은 숨었던 곳에서 나오며 연구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운 좀 벗어 주세요.”

연구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얌전히 가운을 벗어 넘겼다. 재영은 그것을 몸에 걸쳤다. 때로는 차림새가 신분을 대신 증명해 주기도 한다. 덩치 차이가 있어서 어깨가 조금 끼기는 했지만, 대충 걸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연구원에게는 사진이 박힌 신분증이 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너는 저쪽으로. 너는 나랑 이쪽으로 간다.”

재영을 따라나선 연구원이 복도를 수색하는 경비원을 보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쁜 짓을 대놓고는 못할 사람이다.

“태연하게 굴어요. 저들이 찾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

한숨을 내쉰 재영은 연구원의 뒤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쫓는 건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지만. 재영은 쿵쾅대는 심장을 감춘 채 경비원의 옆을 지날 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힐끗 쳐다본 경비원이 연구원 옷을 입은 재영과 그 곁에 신분증을 달고 있는 연구원을 보고 스치듯 지나쳤다. 소란 때문에 바빠서 수상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제대로 확인할 여유도 없는 듯했다.

하나를 넘기자 자신이 생겼는지 연구원도 더는 움찔하지 않았다.

“저기가 출구예요.”

마침내 연구원이 모퉁이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복도 끝의 문을 확인한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경비원이 둘이나 있었다.

“가요.”

재영은 단검을 감추며 연구원을 재촉했다.

“그쪽 분은 누구십니까?”

연구원의 신분증을 눈으로 훑은 경비원이 이번에는 재영을 향해 관심을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더 수상히 여기는 것 같았다.

“예? 제 동료, 동료인데요.”

연구원이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벌벌 떨며 말했다.

“신분증은 어디 있습니까?”

경비원이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재영을 압박했다.

“고개 들고 신분증 주십시오.”

콰앙!

그때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재영과 연구원이 서로를 쳐다봤다.

치직-

경비의 허리에 매달린 무전기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B동 서쪽에 다수의 에스퍼 출현.

무전기가 다급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다수의…… 에스퍼?’

에스퍼라는 말에 재영의 머릿속에는 사헌이 떠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는 않지만, 그가 못내 그리웠다.

“테, 테러범인가요?”

함께 무전기 내용을 들은 겁많은 연구원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B동이면 수용소 아니야?”

경비원들은 그의 말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저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수용소라는 단어에 연구원의 얼굴에서는 아예 핏기가 보이지 않았다.

-전대원 B동으로 집합!

무전기가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가자!”

그리고는 경비원들이 두 사람의 존재를 잊은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다행이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절대 다행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재영의 관심은 당연하게도 ‘수용소’라는 단어에 쏠렸다.

“수용소에 뭐가 있는데요?”

그러자 연구원이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나쁜 일을 하고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크리, 크리처가 있습니다. 그, 우리가 실험 중인…….”

답을 들은 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가이드를 실험체를 쓰는데 크리처라고 잡아 두지 않을 리 없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재영의 재촉에 안도한 연구원이 구석의 기계에 신분증을 댔다. 삑,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한발 앞선 재영은 연구원의 어깨를 뒤로 당겼다. 연구원이 재영에 의해 바닥에 널브러진 채 벙벙한 얼굴로 쳐다봤다.

“연구원님은 여기 계셔야죠.”

재영은 연구원을 향해 처음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를 내버려 둔 채 바깥으로 달렸다.

앞으로만 쭉 내달리자 콘크리트 바닥이 흙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참을 내달린 재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지형이 높아졌는지 연구소 건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연구실이란 게 원래 이런 음험한 곳에 지어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지.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라 위화감이 없다.

콰앙. 쾅!

그러는 와중에도 연구소를 향한 누군가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불이 제대로 붙었는지 건물 구석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 곧 이 연구소의 존재가 바깥에도 알려질 터다.

“저기가 B동이었나 보네.”

경비원의 말을 떠올린 재영이 중얼거렸다. 아마도 재영이 잡혀 있던 곳도 저곳과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혀를 차며 연구소의 비극을 지켜보던 재영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근처, 하늘 위에 떠 있는 인영이 보였다.

‘형이다……!’

자신은 에스퍼가 아니라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루엣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형, 형. 들려요?”

재영은 자신이 서 있는 곳과 허공에 뜬 인영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것이 사헌이 맞다면 분명 들어 줄 거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뛰어난 청력을 갖고 있으니까.

재영은 기대와 함께 손톱의 때만 한 불안이 담긴 눈빛으로 인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부름에 이쪽을 돌아보는 것처럼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내 검은 인영이 재영의 앞으로 훅 날아들었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김재영!”

반가운 목소리가 재영의 눈을 뜨이게 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기도 전에 재영은 딱딱한 가슴팍에 파묻혔다.

“……형.”

뒤늦은 대꾸를 한 재영은 자신을 끌어안은 사람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사헌이 팔에 힘을 줘서 숨도 못 쉴 만큼 꽉 마주 안았다. 그리고 동그란 재영의 정수리에 코를 비볐다.

“내가 늦었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목구멍이 바람에 할퀴어질 정도로 날래게 달려와서인지 사헌의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가슴 한 편이 짜르르 울렸다.

“안 늦었어요.”

재영은 사헌의 품에서 살짝 몸을 뗐다. 사헌과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답했다. 반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재영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재영의 말을 들은 사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된다는 눈치다.

“형이 사 준 이 단검 덕에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요.”

재영은 손을 들어 반지로 돌아온 단검을 보여 줬다. 연구원이 의외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는 했지만, 처음에 흉기로 위협하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이럴 때 쓰라고 준 건 아니었어.”

복잡한 눈으로 재영의 손을 바라보던 사헌이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단검을 선물해 준 탓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도움이 됐으니까요.”

재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입술을 양옆으로 늘였다. 사헌의 대꾸가 없는 탓에 민망해져 입꼬리가 점점 제자리를 찾았다. 사헌은 복잡해 보이는 눈동자로 재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늦지 않게 왔잖아요.”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사헌의 등을 달래듯 토닥였다.

“다시는 내 곁에서 벗어나지 마.”

그제야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은 사헌이 말을 내뱉었다.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에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았다.

“던전은 물론이고, 학교, 화장실. 어디서도 내 눈을 벗어나면 안 돼.”

대꾸를 했는데도 사헌의 반성은 끝나지 않았다. 재영을 놓칠 수도 있었던 모든 순간을 되새기는 듯했다.

“알겠어요.”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외부 활동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좋다. 합법적으로 사헌의 껌딱지가 될 수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미소가 나왔다. 그 얼굴을 본 사헌이 긴장을 풀고 실소를 흘렸다. 사헌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렸다는 걸 느낀 재영은 그제야 그에게 기운을 흘려 넣었다.

“그런데 던전은요?”

재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헌의 얼굴을 살폈다. 던전 안에서는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보낸 신호 때문에 그가 일을 끝내지 못했을까 봐 염려됐다.

“당연히 클리어했지.”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다친 데는 없어?”

커다란 손이 재영의 몸 곳곳을 누비면서 살폈다. 멀쩡히 서서 이야기도 나눴으면서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괜찮아요.”

재영은 대충 대답하면서 바짓단으로 들어가려는 사헌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바지까지 벗으면 민망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안 걸렸네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영은 말을 돌렸다. 그러자 사헌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안에서는 한 달이 지났어.”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뚱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턱이랑 인중 부근이 거뭇한 것 같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색달라서 재영은 금방 시선을 뺏겼다.

그동안 못 만진 걸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사헌의 손은 재영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재영은 얌전히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보도된 것만큼 엄청난 곳도 아니었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헌이 돌연 눈을 번뜩였다. 차가워진 눈빛을 본 재영은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그건 형이 강하니까…….”

재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사헌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사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반박했다.

“내가 S급이라서 아니야. 변이 던전도 아니고, 수치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그냥 평범한 A급 던전이었어.”

그러면 역시 추측대로 자신을 납치하려고 일부러 사헌이 없을 때를 만들었다는 건가. 재영은 끔찍한 추측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많은 사람이 다쳤고, 죽은 사람도 둘이나 돼요.”

사망자는 중계 영상에서 몇 번이나 본 유명한 에스퍼였다. 고작 가이드를 납치하려고 국민을, 그것도 국가의 전력인 에스퍼를 사망까지 몰아갔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을 거다.”

사헌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알려지면 파장이 클 사안이라서 증거도 없이 말을 꺼낼 수는 없겠지만.

“그럴 수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침울하고 복잡한 얼굴을 한 재영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사헌이 달래듯 볼을 쓰다듬었다.

“조사하다가 보면 뭔가 알게 되겠지.”

사헌이 등 뒤를 힐끔 쳐다봤다. 더 이상 폭발음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대치하고 있는 듯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조사요?”

“건물 지하에서 다수의 가이드를 발견했다.”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이드가 갇혀 있다니. 연구에 가이드가 이용되는 건 알았지만, 아예 잡아 두고 연구하고 있다는 건 몰랐다. 자신처럼 잡아 왔다가 연구가 끝나면 돌려보내는 줄 알았다.

‘연구원도 가이드에게 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재영은 그에게 미약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과하게 헐렁해 보였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그도 몰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최악의 인간이 많다고 믿고 싶지 않다.

“뭐가 있든, 누가 연관됐든 조용히 넘어가지는 못할 거야.”

사헌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반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에 닿아있었다. 저렇게 요란하게 부숴 댔으니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조사를 할 것이다.

펑!

그때, 다시 산이 크게 울렸다. 이번에는 두 사람에게서 가장 가까운 건물에서 난 소리였다. 사헌에게 기대 진동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재영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기에 서류가 잔뜩 있어요. 이미 발생한 던전을 변이로 만들기 위해서 공개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정보도 서류철로 전부 정리되어 있어요.”

재영은 사헌의 가슴팍을 잡고 매달리며 다급히 내뱉었다. 그러자 사헌이 곧장 손을 귀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남은 한 손을 들어 재영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진정하라는 듯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2조. 방금 폭탄이 터진 곳으로 진입해. 거기에 있는 건 뭐든 남기지 말고 수거한다.”

사헌의 귀에 통신기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마음을 놓은 재영은 다시 건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 폭발은 그들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사실 조력자가 있었어요.”

복잡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재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헌이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놈이 너에게 반했어?”

“제가 미인계라도 썼다는 거예요?”

생각지 못한 반응에 재영은 황당함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단검으로 협박을 당한 연구원이 알았다면 정말 서러워서 통곡이라도 했을 거다.

“덕분에 살았다고 했잖아요.”

재영은 다시 반지를 낀 손을 들어 보였다.

“누군데?”

사헌이 한결 진지해진 눈으로 불이 난 건물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훑었다.

“여기 연구원……인데,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진지한 눈빛에 마음을 놓고 있던 재영은 사헌의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말을 돌렸다.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연구원을 감싸는 듯한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다.

정말 조금도 찔리는 구석이 없는 재영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 의미 없는 눈싸움이 이어졌다. 눈이 시려서 눈가가 젖어갔다.

‘아, 근데 내가 왜 형하고 이러고 있는 거지?’

문득 현타가 몰려왔다. 재영은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뭐, 너에게 도움을 줬다면 내가 보상하는 게 맞지.”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사헌의 대답은 비교적 흔쾌했다. 진짜 오해를 푼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 * *

재영은 일인용 침대 위에 앉아서 입을 쩌억 벌렸다. 동준이 어미 새처럼 껍질 깐 귤을 그의 입안으로 날랐다.

“그 정도로 엄청난 일이 터졌는데 별일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먹으라며 독려할 뿐이었다.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민태도 재영의 환자복과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내일은 퇴원해야지.”

재영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다친 곳이 없어서 매시간 회진을 도는 의사한테 미안할 뿐이었다.

이렇게 환자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사헌의 과보호 때문이다. 그는 앞뒤 없이 벌인 일의 뒷정리를 하느라 바빠서 제 대신 재영의 친구들을 불러다 놓았다.

“그나저나 너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동준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세상 모든 불행이 밀려드는 거 같은데. 진사헌이라던가, 진사헌 같은.”

해운이 동준의 말에 동조하며 사헌의 이름을 일곱 번째 주워섬겼다. 재영은 미간을 좁히며 짐짓 화가 난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 형한테 이른다.”

“……시발, 진사헌 편 다 됐어.”

서러운 듯 내뱉은 해운이 사헌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관뒀다. 재영은 몸에서 힘을 빼고, 다시 동준을 향해 입을 벌렸다.

* * *

사헌의 명령과 길드원의 빠른 대처에도 선반에 있던 증거물은 반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연구소의 비인도적인 실험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언론에서 연일 때려 대는 탓에 사람들은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했다.

당연하게도 소란의 중심이 된 재영과 그를 구하러 온 하랑 길드원 전원은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재영은 피해자고, 하랑 길드원은 참고인이면서 가해자 신분이었다.

‘용병 이야기도 어쩔 수 없이 나올 텐데 세라는 괜찮을까.’

재영은 검찰의 요청에 따라 출석한 참이다. 밤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을 못 이뤄 눈 밑이 퀭했다.

“김재영 가이드님!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갑자기 저를 부르는 외침에 재영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검찰청 앞이 기자들로 북적였다. 당연히 검찰 쪽에서 정보를 흘린 걸 테지만.

“생체 실험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구속된 가이드를 두고 혼자 탈출했다는 말도 있던데요!”

어떻게 해서든 재영을 내리 깎으려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걸 말이라고.”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재영을 공격한 사람들에게 날아들었다. 재영에게 달려들 듯이 몰려들던 사람들이 사헌의 눈빛에 움찔 물러났다. 재영의 어깨를 감쌀 필요도 없이 그들의 앞길은 휑해졌다. 하지만 재영은 여전히 사헌의 품에 폭 감싸여 있었다.

건물에 들어간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내부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이쪽은 호의적인 분위기다. 재영은 웃으며 로비를 지나쳤다.

“진사헌 에스퍼님은 여기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출석을 요구한 검사의 사무실 앞에서 수사관이 사헌을 막아서며 정중하게 말했다. 사헌의 눈썹이 위로 휙 솟았다.

“김재영 가이드는 피해자입니다. 던전 대기 중 납치를 당했고, 자력으로 탈출하느라 정신적, 신체적 체력 소모가 상당한 상태고요.”

사헌이 날 선 눈으로 수사관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수사관이 눈에 띄게 몸을 움츠렸다.

“……만으로 미성년자이니 보호자 동행도 가능합니다.”

실제 그런 법이 있는 줄은 잘 모르겠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형. 사실 좀 무서웠거든요.”

그리고 사헌의 손에 깍지를 껴 잡으면서 살짝 웃었다. 가이드라는 체질 말고는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한 재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경찰 조사를 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찰이라니. 잠꼬대한 것조차 죄라고 여겨질 것처럼 과도한 불안함이 들었다.

“너 꼴리는 대로 해도 아무 문제 없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사헌이 부드러운 손길로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묘하게 어긋나는 대답이지만, 확실히 격려는 됐다. 재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재영 가이드님. 그리고…….”

검사가 사헌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수사관을 쳐다봤다. 억울해 보이는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어차피 진사헌 에스퍼님께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으니까 오히려 잘됐네요.”

검사의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수사관보다 융통성 있는 검사가 더 마음에 든 듯했다.

“사건 경위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본인이 보고, 들은 것, 스스로 취한 행동이면 됩니다.”

앳된 재영을 의식했는지 검사는 굳은 표정을 풀려고 애썼다. 재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박을 풀었고, 연구원을 위협해 출구로 도망쳤습니다.”

검사가 들고 있는 서류철을 이리저리 넘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용병 중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감췄다.

세라가 그에게 사헌에게 대신 연락해 주겠다는 말을 한 걸 보면서 자신이 한 일로 재영이 안 좋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납치부터가 나쁜 일이지만. 조사로 밝혀지면 어쩔 수 없지만, 제 입으로 그녀를 고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위협이요? 맨손으로 말입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검사가 재영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태도라 재영은 반지를 단검으로 바꿔 보였다. 검사실 내부가 작은 탄성으로 가득 찼다. 갑자기 마법사라도 된 듯한 기분에 재영은 민망한 표정으로 단검을 원래대로 돌렸다.

“그러면 진사헌 에스퍼는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된 겁니까? 발견 당시 김재영 가이드님은 스마트폰도 소지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두 사람만의 연락 수단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에게 위치 추적기가 있었습니다. 중간에 뺏겨서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전의 움직임으로 대충 예상은 가능했습니다.”

고개를 돌린 사헌이 목걸이를 잃어버려 허전해진 재영의 목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수상한 장소가 있어서 일단 덮쳤습니다.”

“예?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맞았으니 된 것 아닙니까.”

근심 어린 검사의 말에 사헌이 당당히 내뱉었다. 너무 당당한 태도라 검사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 그곳에서 반인륜, 반국가적인 실험이 벌어진다는 걸 미리 알았던 건 아니란 말이죠?”

“네.”

검사가 사헌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딱 다물린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검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피해자를 압박하시는 겁니까?”

검사의 시선이 재영에게 향하는 걸 확인한 사헌이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그는 마치 막 새끼를 깐 어미 개 같았다.

“아, 아닙니다.”

검사가 허겁지겁 고개를 흔들었다. S급 에스퍼의 위협적인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 아무 의미 없이 쳐다봤다는 겁니까?”

사헌이 날카롭게 말끝을 올렸다.

“왜요? 내 찹쌀떡한테 반하기라도 한 겁니까?”

검사가 재영을 꼬드기려고 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헌이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쏘아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미친놈 같았다. 재영은 조금 질린 듯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적당히 해요, 제발.”

재영은 창피함을 이기지 못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검사가 연민 어린 시선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사헌이 다시 눈을 부릅뜨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럼 증거물은 어떻게 확보하신 겁니까? 이것도 운이라고 하실 겁니까?”

검사가 사헌의 대답을 예상한 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사헌은 아까처럼 쉽게 말하지 않았다.

“신원 보호 확실히 해 주실 겁니까?”

신원을 감춰야 할 사람이 있다.

이 일에 깊이 연루되어 있거나 정보를 가진 이가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실마리에 검사의 눈빛이 달라졌다.

“물론입니다. 제 스마트폰을 걸고 맹세하죠.”

검사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잘 보이도록 내려놓았다. 초록색 애벌레 같은 캐릭터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최신 폰이다.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사헌이 입을 열었다.

“내부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그 연구원을 말하는 거겠지?’

짚이는 구석이 있는 재영은 사헌을 힐끗 쳐다봤다.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지고, 일전에 뉴스에 보도된 사망 가이드의 사건도 관련 있다는 게 밝혀지면서 연구원들은 사회적으로도 강한 비난을 받고 있다. 가이드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절대 아니라던 얼굴이 눈에 선해서 입이 썼다.

“물론입니다.”

사헌이 재영을 대신해 재영을 도운 연구원에 대해 말했다. 그제야 검사도 재영이 자력으로 탈출한 것에 대해 완벽하게 납득이 간 것 같았다.

“워터마크를 조사해 봤습니다.”

검사가 워터마크를 크게 확대해 놓은 두 장의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두 마크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달랐다.

“센터 표시군요.”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연구소에서 처음 워터마크를 보고 느낀 기시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챘다. 센터 측에서 재영에게 계약을 요구할 때 본 것이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난 듯 검사가 손을 내밀었다. 검사의 목소리에서 짙은 진심이 느껴졌다. 사헌이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가 놓았다.

“반드시 죄를 지은 사람 모두 죗값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재영은 검사를 향해 말을 뱉었다. 얽힌 사람들의 권력과 이익 관계 때문에 흐지부지되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고개를 끄덕인 검사가 눈을 반짝였다.

“연구소의 최종 목표는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 던전을 생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더군요.”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나치게 비밀스럽게 진행하다가 보니 고작 이 정도 성과밖에 내지 못한 것이죠.”

검사의 말대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그 실험이 성공했다면, 또는 큰 실패를 했다면……. 이 땅에 발붙인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검사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마 그처럼 이 나라에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상을 했을 것이다. 지금 재영도 그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의지가 확고한 말에 사헌이 명함을 건넸다. 검사의 마지막 말이 그의 마음을 꽤나 흡족하게 만든 모양이다. 재영은 올 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걸음으로 검찰청을 나섰다.

“납치된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어요.”

가벼운 말에 사헌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영을 노려봤다.

“아니,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정말 큰일이 생기기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네가 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네, 네.”

“너 내 말 안 듣지.”

사헌이 괘씸하다는 듯 말하며 재영의 뒤로 붙었다.

“날씨도 좋은데 저기서 커피 사서 산책 좀 할까요?”

재영이 제 말을 무시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자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헛숨을 뱉었다. 재영은 그 몰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하늘이 맑았다.

* * *

재영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쉴 새 없이 우물거렸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재영의 눈에도 익숙한 진행자와 은퇴한 가이드, 국회의원 몇이 옆으로 길쭉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단독] 인후정 前 대통령, ‘에스퍼-가이드 센터 게이트’ 연루 의혹

‘가이드 접대’센터, 에스퍼도 당했다!

배 대통령, 특수본에 ‘센터 비리 철저하게 파헤쳐라’ 당부

[속보] 현주영 에스퍼-가이드 센터장, 출국 금지 조치.

학성길 의원 뇌물수수 혐의 구속영장 발부

이들이 다루는 중요한 이슈들이 하단에 빠르게 지나갔다. 다 읽기도 힘든 속도지만, 어차피 전부 비슷한 내용이라 별 문제는 없었다.

-…많은 인적‧재산적 피해를 준 변이 던전을 센터가 만들어 냈다는 겁니다! 그것이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센터에서 할 일입니까!

진행자가 분노한 듯 벌게진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해서 내뱉었다.

“저 진행자는 볼 때마다 화를 내고 있네요.”

재영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그런데 센터가 나래시 던전을 고의로 클리어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진사헌 에스퍼를 끌어내서 김재영 가이드를 납치하려고요. 이 건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영은 제 이야기가 나오자 바쁘게 움직이던 입까지 멈추고 집중했다.

-그건 너무 비약적이라고 봅니다. 센터는 그 던전에서 몸 바쳐 싸우던 에스퍼를 잃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여당의 의원 하나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몇 명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前 가이드 등 보다 직접적인 관계자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사헌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그의 손에 들린 빈 컵과 접시를 보고 허겁지겁 따라 일어났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요리도 형이 했잖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어.”

사헌이 아예 재영이 뺏을 수 없게 그릇을 든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럼 같이 할래요? 형이 거품 내주면 제가 헹굴게요.”

재영은 포기하지 않고, 사헌의 옆에 엉겨 붙었다.

나란히 서서 설거지라니.

무심코 뱉은 말에 눈이 번뜩였다. 좁은 싱크대에 몸을 붙이고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눈이 마주치고, 찌릿하면서…….

“식기세척기 있는데 뭐 하러?”

사헌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기대감에 부푼 재영의 심장을 꺼뜨렸다.

“기술 발전이 이렇게 미운 건 처음이에요.”

재영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척기 없앨까?”

인상을 찌푸린 사헌이 진지하게 내뱉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재영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극단적이다. 같이 하는 설거지는 한 번이야 로망이지, 매일 하면 성가신 일일 테고. 싱크대 앞에서 키스 한 번 하자고 앞으로의 편리함을 포기하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일이다.

“손.”

체념해가는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헌이 툭 내뱉었다. 재영은 의아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사헌이 하얀 손에 고무장갑을 끼우고, 쓱 밀어 올렸다.

“손 상해.”

재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함께 설거지하자는 말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쪼르르 개수대에 가서 서자 사헌과 팔이 붙었다.

“형은 안 해요?”

아무것도 씌우지 않은 팔에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괜찮아.”

사헌이 맨손으로 퐁퐁 대신 사용하는 비누를 스펀지에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는 재영을 힐끔 쳐다봤다. 재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사헌의 손이 다가왔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코 끝에 뭔가 닿았다.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헌을 쳐다봤다.

“영화 보면 이렇게 거품도 묻히던데.”

사헌이 어떠냐는 듯 기대하는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눈동자를 내린 재영의 시선 끝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어, 이렇게 시작하자마자요?”

“그릇 닦다가 튄 거품은 더럽잖아.”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서 재영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뭐가 부족해?”

재영의 표정을 살피던 사헌이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거품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재영의 뺨을 잡았다.

“형, 이건…….”

미끈한 거품이 느껴져 이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참이었다.

“먹기엔 해로우니까 이걸로 참아.”

어느새 얼굴을 재영의 코앞까지 들이댄 사헌이 영문 모를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재영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제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축한 것이 입술 안으로 미끄러졌다. 재영의 입꼬리가 비죽거렸다.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드라마나 영화는 잘 보지도 않는 사람이 거품 키스는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재영은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팔로 사헌의 목을 휘감았다. 힘주어 당기는 힘에 움찔한 사헌이 몸을 낮추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재영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놀란 재영은 다리로 앞에 있는 단단한 것에 매달렸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엉덩이가 차가운 싱크대에 내려졌다.

“이거 맞지?”

사헌이 입술을 떼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주친 눈동자가 열기로 번들거렸다. 그것이 옮겨 온 것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다.

“완벽해요.”

재영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사헌의 입꼬리 끝에 입을 맞췄다. 개수대 안에는 시작도 못 한 설거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 * *

그렇게 오래 씻은 것 같지도 않은데 사헌이 먼저 나와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재영은 불이 들어온 식기 세척기를 힐끔 보고, 사헌에게 다가갔다.

“형, 오늘은 어디 안 가요?”

늦은 아침을 먹고,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벌써 하루의 반이 지났지만,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외출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비주얼이지만, 사헌은 엄연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왜 날 쫓아내려고 하는데?”

눈썹을 치켜 올린 사헌이 재영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노려봤다.

“아니, 심심하지 않을까 해서요.”

재영은 컴퓨터 방문을 힐끔거리면서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그 뜻을 알아챈 사헌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재영을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재영은 컴퓨터 방에서 게임을 하고, 사헌은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이었다.

재영은 저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목을 긁적였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거실에 혼자 있을 사헌이 너무 신경 쓰였다.

“저 하는 게임, 같이 해 보실래요?”

“그것도 네 로망이야?”

사헌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들어주겠다는 눈치다.

‘그런 것보다는 형을 혼자 두는 게 싫어서인데…….’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재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는 벽 한 면에 두 대가 나란히 붙어 있고, 그 맞은편에 또 두 대가 놓인 식이다. 재영은 자주 쓰는 메인 컴퓨터 옆자리로 사헌을 앉혔다.

“어떤 게임 좋아해요? L.O.X? 아니면 오X워치? 배X 그라운드?”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사헌이 잘할 것 같은 게임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현실에서도 팀을 구성해 전투를 주도하는 사람이 아닌가. 거기다가 에스퍼라 동체 신경 등의 신체 능력도 남다르다.

‘그런데 형이 게임을 하던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컴퓨터가 네 대나 되는데 사헌이 쓰는 모습은 못 본 것 같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치워 냈다. 노트북이 따로 있으니까 그걸로 할 수도 있고.

“너 하고 싶은 거로.”

재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헌 정도면 무슨 게임을 하든 상관없겠지.

“라이브러리 공유할 수 있는 게임이……, 데드X데이라이트 있네요.”

그건 재영이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기도 했다. 재영은 신이 나서 게임 플랫폼 로그인 창을 열었다.

“로그인 안 해요?”

재영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몇 개나 떠올랐다. 멀뚱히 모니터만 보고 있나 싶던 사헌이 마우스 커서 가입 쪽으로 움직였다. 자신이 자주 쓰는 플랫폼이라서 당연히 사헌도 그럴 줄 알았다.

“포인트 모아야 하니까 튜토리얼부터 깨야 돼요.”

회원가입을 하고 로그인을 하는 것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생존자하고 살인마도 하세요. 꽤 걸리니까 저는 혼자 먼저 돌리고 있을게요.”

재영은 사헌의 튜토리얼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회전이 빠른 살인마를 선택했다. 2명을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냈지만 게임 내용이 나쁘지 않았다.

gg(good game)

재영은 채팅창에 즐거웠다는 말을 남기고 게임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득 옆이 불안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걸 느꼈다.

사헌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자 살인마 캐릭터가 커다란 바위를 앞에 놓고 멀뚱히 서 있었다.

“형?”

바위 뒤에서 생존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 여기 있는데 안 와?’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몸짓이다. 사헌이 휘두른 칼이 허공을 갈랐다.

“뭐 하는 거예요?”

“……저게 안 맞네.”

사헌이 골치 아프다는 듯 내뱉었다. 재영은 복잡한 눈으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바위를 두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생존자 캐릭터가 엄청난 무빙을 하는 걸로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해 볼까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사헌의 살인마를 자유롭게 놓아줬다. 어쩌면 실제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라서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 해야 한다며.”

사헌이 처음 재영의 말을 언급했다.

“어차피 형이랑 저는 칼라로 연결……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하면서 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로도 괜찮을 거예요.”

사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재영은 서둘러 말을 고쳤다. 그리고 사헌의 컴퓨터로 손을 뻗어 캐릭터의 기술과 아이템을 찍는 걸 알려 주고, 가지고 있는 기본 퍽(기술)을 설정해 줬다.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졌다고 생각했을 때, 화면이 점멸했다가 대기 중인 팀원들을 보여 줬다. 재영은 괜히 키보드 위에서 긴장감에 굳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헌이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사람을 보듯 재영을 바라봤다.

“잘하고 싶어서요.”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남자인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진 모습 한 번은 보이고 싶었다. 그게 게임이라는 게 조금 그렇지만, 제가 유일하게 사헌보다 잘하는 것일 테다.

“흐응.”

사헌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채 재영을 바라봤다.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재영은 민망하게 웃었다.

“그래 봤자 금방 따라잡히겠죠.”

“글쎄.”

사헌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화면이 점멸했다. 게임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재영은 왼쪽에 사헌이 누웠다는 표시를 보고 옆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사헌의 캐릭터가 살인마에게 뒷목이 잡혔다.

“여기 고양이가 깜빡거리잖아요. 그러면 무조건 숨으세요.”

처음에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일러줬다. 그런데 몇 판을 돌려 보고는 점점 할 말을 잃었다.

“그,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바로 죽었는데 이제 판자라도 내리고 죽잖아요.”

말이 없는 사헌을 보고 재영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실 판자를 내리고 죽을 거면, 그냥 죽는 게 나았다.

그런데 사헌이 인상을 찌푸린 채 모니터 오른쪽 하단만 보고 있었다. 재영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채팅창에 알파벳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단어라기에는 문제가 있는 문자의 나열이지만, 발음 기호만 따라 읽으면 한국말이다. 게임 채팅이 영어로만 쓸 수 있게 되어 있어서다.

bung sin nun sae se ki

눈으로 빠르게 읽고선 열이 확 끼쳤다. 워낙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채팅으로 뭐라고 짖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화살이 제가 아니라 사헌에게 향하는 거라면 다르다. 가만히 두고 있는 동안 팀원이었던 그것은 어느새 패드립까지 하고 있었다.

“이걸 왜 보고 있어요?”

재영은 잇새로 욕을 읊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키보드 위로 날아다니는 손가락에 시선이 느껴졌다. 패드립을 제외하고, 제가 아는 욕이란 욕은 전부 늘어놓던 재영은 곧 옆에 사헌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아차, 하며 손을 멈췄다.

“날 위해서 싸워 줄 사람도 있고…….”

눈이 마주치자 사헌이 눈꼬리를 휘었다. 곱게 접힌 눈매에 재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재영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감각에 손바닥으로 어깨를 짚었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씻고 나온 후 머리카락 끝이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채였다.

“안 되겠어요.”

벌게진 얼굴을 감춘 재영은 결연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걸 게임을 그만한다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사헌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다시 자신의 컴퓨터로 돌아온 재영은 디스코X 채널에서 초대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띠롱. 띠롱

한가한 놈 둘이 연달아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돌아 버린 거냐?

-야. 한가하면 공주님한테나 놀아 달라고 해!

어차피 게임이나 하고 있었을 거면서 해운과 동준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아직 이 방에 있는 남은 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같은 대화방에 있는 사헌이 동준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안 그래도 그러고 있는데, 불만이라도?

왁, 하고 쏟아져 나오던 것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재영은 입술을 늘려 웃었다. 하얗게 질린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야, 차, 찹쌀떡.

-안녕하십니까, 형님!

물론 사헌은 뒤늦은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형이랑 같이 게임할 거야.”

재영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마…….

침묵을 깨고, 동준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응. 너희 둘도 같이. 선착순이었는데 운이 좋았네.”

해맑기만 한 재영의 말에 두 사람은 절망했다. 아마 속으로는 시끄러운 알림에 욕을 하러 온 자신을 욕하고 있을 거다.

“형은 저 멀리서 점 같은 게 보이기만 해도 숨어요. 어그로는 저 녀석들이 다 끌어 줄 테니까.”

“그래, 든든하네.”

사헌이 재영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재영은 그 손길이 좋아서 헤헤, 웃었다.

게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올 것 같은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전방 낮은 담벼락 뒤, 토끼 가면

그리고 사헌이 짧게 내뱉었다. 같은 발전기를 돌리고 있던 재영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끼 든…….

사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게 포물선을 그린 도끼가 그의 캐릭터로 와서 박혔다. 화들짝 놀란 사헌이 키보드를 바쁘게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봤어요?”

-아니, 봤는데 왜 안 피해?

놀라는 재영의 말 뒤로 해운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할 말이 없어서인지 말할 여유가 없어서인지 사헌은 대꾸도 없었다.

-형님 어그로면 가운데 발…….

끼아악-

짐승의 울부짖음과 닮은 캐릭터의 비명과 동시에 사헌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사헌이 표적이 된 틈을 타 돌리기 어려운 발전기를 돌리자고 제안하던 동준이 말끝을 흐렸다.

-어…….

-시발, 누워도 다 돌린 발전기 옆에 눕냐.

해운이 날 선 목소리로 타박했다. 재영과 함께 돌리던 발전기 옆에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재영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견제를 당해서 돌리지 못할 테니, 지금까지 해온 것이 전부 없던 일이 된 거다.

“말 예쁘게 해라, 진해운.”

하지만 재영은 상스러운 욕을 해대는 해운만 다그쳤다.

“형은 오늘 처음 해 보는데 못할 수도 있지.”

-와씨, 김재영. 평소에는 더하는 새끼가…….

해운이 억울하다는 듯 툴툴댔다. 재영은 모니터 속 이름이 해운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김재영이 욕을 해?”

하지만 때는 늦었다. 사헌이 눈을 반짝이며 재영을 돌아봤다. 컴퓨터 방에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욕을 한 적도 많은데, 거실에 있으면서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진해운이 헛소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재영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사헌이 입꼬리를 올리며 재미있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재영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그러지 말고 나중에 침대에서 한 번 들려줘.”

사헌이 재영의 턱밑을 간질이면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참이었다.

-여기 사람 있어요

해운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재영은 반쯤 풀린 눈을 똑바로 떴다. 사헌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다시 게임이 시작됐다.

-고양이.

별 잡소리를 다 늘어놓는 아이들과 다르게 묵묵하던 사헌이 짧게 내뱉었다. 재영은 사헌의 모니터를 훔쳐봤다. 꼼짝하지 않고 발전기를 고치는 사헌의 캐릭터 바로 뒤로 다가온 듯 살인마의 붉은 안광이 드리워져 있었다.

“형, 형. 뛰어요!”

-뛰어?

재영의 말에 사헌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앞으로 달렸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바로 뒤에 있던 살인마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형 아직 어그로(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태)예요?”

-지금 내 앞에 있어.

재영의 물음에 사헌이 속삭였다. 캐릭터가 바깥의 소리를 들을 리도 없으니 굳이 목소리를 줄일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사헌보다는 그의 캐릭터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어서 들킬 것이다.

재영은 쓸데없이 진지한 사헌의 눈빛에 미소를 흘렸다. 그의 옆얼굴만 보면 영화에서 주인공이 적들을 피해 적진에 숨어드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아.

이내 단말마와 함께 사헌의 캐릭터가 죽었다.

“금방 끝낼게요.”

사헌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책상 위로 늘어졌다. 느른한 시선은 재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형. 그거 관전하기 누르면 되는데…….”

“그걸 봐서 뭐 해.”

게임하는 모습만 보는 건 좀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을 건넸더니 돌아오는 답이 심드렁했다.

“그래도 심심하잖아요.”

“네 얼굴이 더 재미있어.”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따라 왜 자꾸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어지럽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형. 실은 게임 하기 싫은 거죠.”

재영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억울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캐릭터는 빠르게 창틀을 넘어 살인마를 피하고 있었다.

“아니, 뭐, 나름 재미있네.”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사헌을 제외하고 남은 세 명이 살아 나갔다.

“다른 게임 해 볼까요?”

재영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게임 목록을 살폈다.

-그럼 우리는 가도 되냐?

“될 것 같냐?”

재영은 빠르게 받아쳤다. 당연히 없어도 되지만,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꿍얼대는 친구들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설치하는 데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는 넷X블 게임 중에서 고민했다.

“아! 이거 어때요?”

재영은 반가운 목소리로 게임 하나를 가리켰다. 이등신 캐릭터가 돌아다니면서 물폭탄을 설치하는 게임이었다. 폭탄으로 벽을 부수면 아이템이 나오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개 못하네

꺽꺽대며 웃느라 해운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사헌의 캐릭터가 벌써 몇 번째 물방울에 갇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가만 보니 사헌은 방향키를 누르는 게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사천성할까? 그건 그냥 같은 그림 찾는 거라 형도 쉽게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도 틀렸다. 사헌이 똑같은 그림을 잘 찾아내기는 하는데, 연결 시키지를 못했다. 결국 재영은 컴퓨터를 끄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없었죠? 다음부터는 같이 게임 하자고 안 할게요.”

재영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저 때문에 하지도 않는 게임을 했다가 평생 들어 본 적 없는 말이나 듣고. 사헌에게는 즐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다고 했잖아.”

사헌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 얼굴이요?”

재영은 반쯤 체념하고, 반쯤은 장난기를 섞어 물었다.

“너랑 하니까 재미있는 거야.”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툭툭 건드렸다.

“대신 다음부터 똘마니들은 끼지 마.”

그리고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덧붙였다.

“해운이 땜에 상처받았어요?”

재영은 혼내 주겠다는 뜻을 담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귀 아파.”

사헌이 진심으로 싫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알겠어요. 다음에는 형이랑 저랑 둘이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찾아볼게요.”

재영은 의지를 담아 눈을 반짝였다. 사헌이 귀엽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녁은 뭐 먹을래?”

뭔가 먹고 싶다고 말만 하면 해 줄 것 같은 기세라 재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에 재료가 없으면 사러 가야 할 거고, 그건 온종일 게임으로 진을 뺀 사헌에게 못할 짓이다.

“그냥 시켜 먹어요.”

사헌이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뭐가 먹고 싶은데?”

체념한 듯한 태도에 재영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치킨? 피자?”

“낮에도 파스타 먹었잖아. 밀가루 안 돼.”

뭐든 들어줄 것처럼 묻더니 막상 고른 메뉴는 단호하게 잘라 낸다. 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형이 해 준 거였잖아요. 집에서 해 먹은 건 건강에 좋아요.”

근거 없는 말을 뱉은 재영은 배달 어플을 뒤적였다. 예상대로 사헌은 재영을 더 말리지는 않았다.

“저번에 그걸로 시켜. 너 남은 양념으로 밥 비벼 먹던 거.”

사헌이 마지못한 말투로 제안했다. 어떻게든 밥을 먹이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콜!”

재영은 순순히 사헌과 타협했다.

* * *

강의실 저쪽에서 재영을 발견한 민태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원 플러스 원처럼 붙어 다니는 사헌의 모습을 찾는 게 분명했다.

“찹쌀떡! 우리 무용과랑 미팅…….”

그리고 옆에 사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재영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왔다.

“안 해.”

재영은 민태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툭 잘랐다. 원래도 그다지 흥미가 없는 주제지만, 사헌이 있는 지금은 호기심에도 기웃대서는 안 됐다.

“미쳤어? 너한테 하자고 안 했거든!”

민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색했다.

민태가 누가 듣고 있을까 봐 무섭다는 얼굴로 주변을 휘휘 쳐다봤다. 아까 사헌이 없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그런다.

“그러게 왜 말을 끝까지 안 해서 사람을 착각하게 해.”

재영은 놀리듯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에 의해 중간에 말이 끊겼던 민태가 억울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여튼 놀리기 좋은 애다.

“그리고 나 빼고 간다고? 좀 서운하다?”

재영은 일부러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마음이 약하고, 단순한 민태는 그 얼굴을 보고 입을 열려고 했다.

“어딜 간다고?”

재영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강의실 내부가 고요해졌다.

“미, 민태가 타과 애들이랑 미팅한대요.”

겨우 몸을 돌린 재영은 그뿐이라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벅저벅 다가온 사헌이 그의 손에 크림을 듬뿍 올린 마끼아또를 쥐여 줬다.

“누가 못 가서 서운하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사헌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의 온도가 한겨울처럼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농담.”

재영은 결백하다는 뜻으로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사헌이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숨 막힐 듯한 압박감에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재미없으니까 다음부터 그런 농담하지 마.”

사헌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고 말했다.

“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영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김재영한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사헌이 민태를 노려보며 서늘하게 내뱉었다. 민태가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부드러운 커피를 빨대로 쪽 빨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 너 무용과랑 미팅한다고?”

재영이 태연하게 묻자 민태가 눈동자를 굴리며 사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힉, 숨을 삼켰다.

“형. 눈에 힘 좀 풀어 주세요.”

재영은 사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사헌이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애들이 긴장해서 수업도 잘 못 듣잖아요.”

“안 졸면 잘된 거지.”

긴장한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돌아본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뱉었다. 하지만 사헌 때문에 긴장하는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교수들도 사헌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니면 강의 시간만이라도 어디 가 계시면 안 돼요?”

재영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동기들이 은근히 응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사헌만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재영은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송민태 안 노려볼 테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마.”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예민한 얼굴로 내뱉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재영은 졸지에 성이 바뀐 민태를 바라봤다. 그는 사헌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사헌을 힐끗 쳐다본 민태가 재영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아무튼 저번 주에 미팅을 했단 말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헌이 있으니 제게는 아예 말도 꺼내지 않은 모양이다. 재영은 제 친구 민태가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는 것에 안심했다.

“응, 그래서?”

“거기 고르곤졸라 맛있더라. 너도 형님하고 한 번 가 봐.”

민태가 들뜬 목소리로 조언했다. 옆에 사헌이 있다는 건 잊은 모양이다. 하여튼 단순한 녀석이다.

“알겠어.”

어떠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사헌은 재영의 뒤통수만 쓰다듬었다. 재영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사헌을 발견한 민태가 다시 흠칫했다.

“아, 아, 맞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민태가 본 적 없는 미소를 띤 사헌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미팅에 갔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예대 3층 복도 끝에만 가면 사람이 실종된다는 거야. 실제로 1년 전에 거기서 학생 하나가 실종됐대.”

사람이 실종된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 있나.

재영은 복잡한 눈으로 민태를 쳐다봤다.

“넌 그게 재미있어?”

사헌이 한심하다는 듯 민태를 내려다봤다.

“아니, 그게, 진짜 그렇다고는 하는데, 진짜 그런 줄은 모르겠고…….”

생각지 못한 재영의 힐난에 당황한 민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도시 괴담’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은 보통 어디에 이런 일이 있었대, 실제로 이런 당한 사람도 있대. 하고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고는 하니까.

“우리 거기 가 보자.”

마침내 민태가 흥분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재영은 침을 꼴딱 삼켰다.

“위험을 왜 굳이 찾아가는지 모르겠네.”

사헌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민태를 힐난했다.

“어디 안 가도 그 자리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릴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는데.”

“혀엉.”

재영은 간절한 눈으로 사헌을 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어느 쪽이냐 하면, 그는 가고 싶었다. 도시 괴담은 민태는 물론이고, 재영도 환장하는 종류였다.

“윤이, 아, 그 애 이름이 윤이야. 정윤이. 윤이가 다 같이 한 번 가보재.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좋아해?”

재영이 좋아한다는 말에 사헌이 관심을 보였다.

“얘가 겁은 많은데, 또 호러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민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이 나서 떠들었다.

“형님도 계시니까 안전하지 않겠냐?”

자연스럽게 사헌까지 끌어들이는 말에 사헌이 제법이라는 눈으로 쳐다봤다. 저를 이용해 먹겠다는 속셈이 분명히 보이는데도 재영이 좋아하는 거라고 해서인지 심기가 상한 건 아닌 듯했다.

재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민태가 그를 무서워하는 건지, 아닌지 재영도 헷갈렸다.

사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재영을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예대 같은 데에 함부로 발 들여도 되나?”

사헌에게도 허락을 받아 낸 재영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회대나 자연대는 밥 먹듯이 드나들어도 예대는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같은 학교지만, 다른 공간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서민태 님이 무용과에 친구가 생겼다는 거 아니냐.”

민태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저 꼴을 보니 기껏 미팅에 나가서 여자친구 사귀는 건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괜찮겠지만.

“이런 건 사람이 많아야 재미있으니까 다른 애들하고도 이야기 끝났어.”

민태가 강의실 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재영의 고개도 그의 손을 따라갔다. 무심코 바라보던 중에 시선이 느껴졌다. 무리의 가운데 앉은 훈이 재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놈도 가는 건가?”

사헌도 훈을 발견했는지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면서 재영의 뺨을 눌러 자신을 보게 했다.

“네! 저 녀석 단짝이 또 이런 거에 환장한다네요.”

못마땅해하는 사헌이 보이지도 않는지 민태가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재영은 민태의 입을 틀어 막을지 말지 고민했다.

* * *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 사헌이 드레스룸으로 가 야상 하나를 챙겨왔다. 그리고는 멀뚱히 선 재영의 어깨 위에 덮었다.

“밤에는 쌀쌀할 수도 있어.”

그러는 사헌은 얇은 반팔 한 장뿐이었다.

“나는 난로 있어서 괜찮아.”

입꼬리를 올린 사헌이 재영을 푹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나른한 숨을 뱉었다. 재영은 등골이 짜르르 울렸다. 춥지도 않았던 방 안 온기가 후끈해졌다.

“그런 거라면 저도 있는데요?”

재영은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계속 보고 있었는지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내리자 탐스러운 빛깔의 입술이 보였다. 재영은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입을 맞췄다.

“부족해.”

잠시 입술을 뗀 사이에 내뱉은 사헌이 아예 뒤통수를 붙잡고 눌렀다. 부족하다는 게 난로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 *

차를 포기하고 튼튼한 사헌의 두 다리로 달려온 덕에 약속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우와, 진짜 공주님이네!”

낯선 여자애가 사헌을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얘가 호박 마차 1기거든.”

민태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대신 변명하며 여자애를 잡아끌었다. ‘호박 마차’는 사헌의 팬클럽 이름이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사헌을 헐뜯으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느라 엄청난 전투 민족만 남았다고 들었다. 그들의 실체를 보는 건 처음이라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그럼 나 괜찮은 거야?”

재영이 몸을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에스퍼의 팬은 아이돌의 팬과 다를 바 없다고 들었다. 그러면 ‘오빠’의 애인인 재영이 못마땅하지 않을까.

반쯤 진심으로 걱정되어 내뱉자 옆에서 듣고 있던 여자가 재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당연히 괜찮죠! 김재영 가이드님은 우리 구원자니까.”

“아, 감사합니다.”

재영이 막 그렇게 말했을 때, 사헌이 여자의 손을 잡아 그에게서 떼어 냈다. 재영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그의 행동에 의아해졌다. 다른 때라면 찰싹, 소리가 나게 내쳤을 텐데.

‘팬이라니까 함부로 할 수 없었나?’

사헌도 이미지 관리라는 걸 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샜다.

“왜?”

재영만 지켜보고 있는 사헌이 갑작스러운 미소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 왔으면 출발하자.”

그렇게 모인 사람은 전부 열 명이었다. 그중 재영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람을 끌어들인 모양이다.

“복도 끝에만 가면 귀신을 볼 수 있어?”

“그냥 거기 앉아서 촛불 켜 놓고 무서운 이야기할 거야.”

들떠서 하는 말에 누군가 대답해 주면서 예대 계단을 올라갔다.

“근데 그거 알아? 2학년 선배가 작년에 3층으로 간 후에 실종됐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런데 막상 3층에 올라서자 윤이라는 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실제라는 말에 재영의 얼굴은 미간을 좁혔다.

“실제로? 그런데 여기를 오자고 한 거야?”

“왜? 진짜면 더 섬뜩하고 재미있는 거 아니야?”

잘 모르는 남자가 들떠서 떠들었다. 나머지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단순한 괴담을 쫓아온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 버릴까 봐 걱정됐던지 윤이가 초조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 선배가 사라진 게 이 복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소행인지는 확실하지 않잖아. 그걸 증명하려는 거야.”

윤이가 미안하다는 듯 말하며 덧붙였다.

“불확실한 소문 때문에 멀쩡한 작업실을 쓰지 못한다는 건 너무 낭비잖아.”

봐달라는 듯한 눈빛에 재영도 마음이 약해졌다.

윤이 사헌과 훈을 든든하다는 듯 쳐다봤다.

“에스퍼 님이 둘이나 와 주신 덕분에 안심했어.”

그녀를 따라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훈과 눈이 마주쳤다. 재영은 미소 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런 일에 낄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의아한 시선 끝에 훈의 곁에 들뜬 얼굴로 떠들어 대는 그의 친구, 우진이 보였다. 윤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우진의 부탁에 함께 와 준 것 같았다.

‘주말마다 전국으로 봉사도 다니는 녀석이니까.’

저와 민태만큼이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이니 친구를 위해 동행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형이 따라온 것보다야 덜 이상한 일이고.’

물론 사헌에게는 재영을 밀착 경호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런 사헌의 옆에서는 그의 팬을 자처한 수경이 지치지도 않고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기세가 대단해서 예대생이 아니라 기자에 가까워 보였다. 정말 이상한 건 꼬박꼬박 답해 주고 있는 사헌이었다.

“이따 가시기 전에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래.”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 사헌이 이내 표정을 풀고 순순하게 대꾸했다.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무슨 좋은 일 있으셨냐?”

민태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왜?”

재영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눈꼬리도 안 올라가고, 입꼬리도 안 올라가고.”

사헌의 입꼬리가 올라간다는 건 비웃는다는 소리다. 둔한 민태마저도 알아챈 사헌의 태도 변화에 재영의 표정은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재영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사인 요청에 자신이 무슨 연예인이냐며 딱 잘라 거절했기 때문이다.

“형님 정도 돼도 팬이라면 껌뻑 죽고 그런 건가?”

민태가 제가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영은 생소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거북할 정도로 찬양을 늘어놓는 수경의 앞에서 입을 다물라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집으로 돌아갈까?”

언제 왔는지 재영에게 다가온 사헌이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팬미팅은 끝났나?’

재영은 조금 뚱해진 기분으로 사헌이 서 있던 곳을 쳐다봤다. 저와 사헌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수경의 시선이 조금 불편했다.

“형이 돌아가고 싶으면요.”

재영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물었다. 사헌은 결국 돌아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 들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사헌이 이상하다는 듯 재영을 쳐다봤다.

“아, 저기 뭐 하려나 봐요.”

재영은 의도적으로 사헌의 시선을 피했다. 재영의 손끝이 향한 곳에서는 경우가 배낭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못마땅한 듯한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재영은 꿋꿋하게 눈을 고정했다.

“내가 어디서 봤는데 이렇게 상 차려 두면 귀신이 밥 먹으러 온다더라.”

경우가 어딘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등산용 배낭을 메고 왔길래 뭔가 했더니 일회용 접시에, 마른안주, 소주까지. 대충 봐도 제사상에 올리려는 차림이다.

“대충 한 바퀴 돌기만 하는데 그런 건 또 왜 챙겨 왔어?”

먼저 제안했다는 윤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간다고?”

그러자 경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충격에 젖은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담력 놀이에 진심인 건 경우뿐이었다.

“모처럼이잖아!”

관심 없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에 경우가 절박한 얼굴로 외쳤다.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방법을 바꾼 듯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혹시 알아? 귀신을 달래서 보내 버리면 이 강의실을 쓸 수 있을지.”

경우가 무용과 애들을 붙잡고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귀신의 소행이든 살인마의 소행이든, 흉흉한 소문의 진상을 밝히고 이쪽을 연습실로 쓰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윤과 수경이 그 말에 움찔했다. 저들끼리 눈을 맞추고 속닥거리는 모습에 경우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경우의 다음 목표는 재영이었다.

“그리고 너는 귀신 불러서 저주라도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쟤 진사헌 에스퍼한테 꼬리치는 거 진심 같은데.”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사포처럼 쏟아 낸 경우가 수경을 눈으로 흘겼다. 재영은 그의 입김으로 귓구멍이 축축하게 젖는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진사헌 에스퍼도 남잔데 결국 여자한테 마음이 더 가지 않겠냐? ‘오빠, 나 쟤 싫어요.’ 하면 가이드고 뭐고 가만두겠냐고.”

경우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헌을 좋아하는 재영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재영은 사헌을 힐끔 쳐다봤다. 사헌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 뛰어난 청력으로 경우의 말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재영은 순간적으로라도 유치한 질투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고 여겼다.

“무서운 말 하지 마.”

재영은 경우를 밀어냈다. 설사 사헌이 수경과 눈이 맞아 자신을 버린다고 하더라도 저주라니, 못할 짓이다. 질색하는 모습에도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재영을 쳐다보던 경우가 목표를 민태로 바꿨다. 애초에 공포 체험이 목적이었던 민태가 한결 쉬울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미안하다. 저렇게 눈치 없고, 싸가지없는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훈의 소꿉친구인 우진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사과했다. 저런 녀석을 누가 데려왔나 했더니.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재영은 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했다. 어쨌든 이 녀석은 잘못이 없으니까.

“그냥 가면 아쉬우니까 음식 대접이라도 할까.”

결국 경우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윤이 머뭇머뭇 그가 풀어놓은 짐 쪽으로 다가갔다.

‘연습실이 엄청 부족하긴 한 모양이네.’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머지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경우와 민태, 수경, 윤이 그럴듯한 상을 차려 냈다.

“이제 이 촛불 주변에 둘러앉아서 불러내 보자.”

“뭐? 제사 지냈으니까 됐잖아. 이제 그냥 가자.”

계속되는 경우의 제안에 수경이 짜증 냈다. 경우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허리를 꾸벅였다. 그쯤 되자 사헌의 눈동자는 완전히 텅 비어 버렸다.

“너 미션 몇 단계임?”

“아직 47.”

재영은 속 편하게 민태의 질문에 대답했다. 설득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성가시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뭐든 끝나 있겠지, 싶은 것이다.

“아, 난 23단계인데. 언제 거기까지 가냐.”

민태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번 주말만 해도 다 깰 것 같은데?”

“야. 내가 너 같은 폐인도 아니고.”

모두가 관심을 잃은 사이, 은근슬쩍 라이터를 꺼낸 경우가 촛불에 불을 붙이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마지막 초에 불을 붙이려고 움직인 순간.

“실제 플레이 시간은 네가 더 많…….”

툭.

허리를 숙이고 있어서 치켜 올라간 경우의 엉덩이가 재영을 툭 쳤다. 민태와 대화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재영의 몸이 기울었다. 마주한 민태의 눈이 서서히 커지는 게 보였다.

“김재영!”

벽을 향해 휘청이는 몸을 본 사헌이 재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

벽이 있으니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재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메모리폼에 파묻히는 것처럼 푹신하면서 묵직한 감각이 등을 감쌌기 때문이다.

* * *

재영은 익숙한 품에 안긴 채로 눈만 끔뻑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재영의 눈동자에 사헌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그의 얼굴은 걱정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형, 놀랐어요?”

그럴 상황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슬며시 늘어졌다. 진지하지 않은 태도에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안 다쳤으면 됐어.”

이내 사헌이 황당하다는 듯 내뱉으며 재영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웃으면서 일어난 재영의 눈에 먼지투성이가 된 사헌의 등이 보였다. 저를 안고 뒹구느라고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찹쌀떡! 괜찮아?”

사헌의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는데 민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안민태 저거 연구소에 보내 봐야 해.”

사헌이 수상쩍다는 눈으로 민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서민태예요.”

재영은 빠르게 오류를 정정했다. 두 번째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래도 십 년 넘게 알아온 동생 친구인데 너무하다는 듯한 눈으로 사헌을 힐난했다.

“그나저나 여기…….”

재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여기는…….”

“뭐야. 복도 끝에 우리도 모르는 문이 있었나?”

나머지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둘러싼 공간은 통째로 타 버린 집처럼 온통 까맸다.

예대는 학교에서 제일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깨끗했고, 이렇게 주변이 초토화될 정도로 큰불이 났었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냥 완전히 다른 곳에 온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곳…….”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민태만이 감이 온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재영을 쳐다봤다. 제가 생각한 것이 맞냐는 듯한 눈빛에 재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민태의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근데 너희는 왜 여기 있어?”

“네가 걱정되니까.”

기대하지도 않은 훈의 대꾸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재영은 굳은 표정의 사헌을 힐끔 쳐다봤다. 심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살피는 훈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개인 경호도 있는데, 뭘.”

재영은 그렇지않느냐는 듯 사헌을 보며 웃었다. 사헌이 훈을 노려본 채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사라지니까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따라서 달려들었지, 뭐.”

민태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나머지는 그냥 우르르 따라 들어온 듯했다.

“근데 여기 진짜 뭐냐?”

우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훈에게 물었다. 사헌이 몸을 낮추고 손으로 땅을 훑었다.

“형, 조심해요.”

함부로 손을 댔다가 혹시라도 나쁜 성분이 있을까 봐 걱정됐다.

“괜찮아.”

짧게 대답한 사헌이 손에 묻은 먼지를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작은 덩어리 같은 것이 바스스 흐트러졌다.

“B급이나 C급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묵묵히 서있던 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나머지도 상황을 이해한 듯 창백해졌다.

“그럼 우리가 던전에 들어왔단 말이야?”

“미친. 여기 던전이라고? 너튜브각인가?”

겁에 질린 사람들 틈에서 경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너튜브를 찍겠다는 게 진심인지 헤벌쭉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물론 켠다고 해도 찍히지는 않을 것이다. 던전 안에서 현대의 기계는 통하지 않고, 그 안에서 나온 물질로 만든 특수한 도구만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넌 겁도 안 나? 여기에 크리처가 있다니까?”

겁에 질린 수경이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여기 우리나라 최고의 에스퍼도 계시고, 두 번째로 대단한 에스퍼도 있는데 무서워할 필요가 어디 있냐?”

경우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뻐기는 태도로 내뱉었다.

“나도 평소에 저 정도였어?”

그 모습을 본 민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면서 물었다. 재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충격으로 굳은 민태의 얼굴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저것보다는 나아.”

팔이 안으로 굽는 느낌으로 대꾸하자 민태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하여튼 단순한 녀석이다.

누구의 말처럼 갑작스레 던전에 휘말린 상황에서 숙련된 에스퍼와 함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거기다 그냥 강한 에스퍼가 아니라 대장으로 무리를 이끈 경험이 많은 사헌이다.

“내가 선두로 갈 테니 서훈 에스퍼는 무리의 끝으로 온다. 조민태, 너, 그리고 너는 두 번째 줄.”

사헌이 민태와 현덕이라는 동기, 그리고 윤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민태는 그가 제 이름을 틀렸는데도 별 상관없는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나머지는 그 뒷줄.”

사헌의 말대로 동기들을 움직여 줄을 세운 재영은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요?”

사헌이 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균형을 맞추려면 사헌의 뒷줄에 민태와 서는 게 맞긴 한데…….

“너는 당연히 내 옆이지.”

사헌이 별 이상한 말을 다 듣겠다는 눈빛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래. 넌 형님이랑 한몸이잖아.”

민태마저 재영을 타박했다. 재영은 잠자코 제자리로 이동하려 했다.

“선두는 위험하니 차라리 제 옆에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훈이 반기를 들었다. 재영의 손목을 잡은 사헌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네 자리는 일행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야. 후방의 공격에만 대비하라는 게 아니다.”

사헌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훈이 떼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도 못하는 훈의 눈앞에 사헌이 새까맣게 변한, 제 손가락을 보였다.

“이건 뭔가 타고 남은 재야. 화염 공격이나 폭발에 대비해.”

“……알겠습니다.”

훈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재영을 힐끔 쳐다봤다. 재영은 조금 곤란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률이 정말 멀쩡한 사람을 다 망쳐 놓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재영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헌의 기분이다. 재영은 그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빼내 사헌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 둘 중 어느 게 낫지?”

사헌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훈을 향해 물었다.

“네?”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빤히 보던 훈이 뒤늦게 반응했다.

“네 꼭두각시 술. 어느 쪽이 쓰기에 편하냔 말이다.”

사헌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물었다.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어 있는 쪽이 쉽지만, 의식만 잃은 상태일 때가 효율은 가장 높습니다.”

“성가시네.”

훈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사헌이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1차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긴장 늦추지 말고, 주변 잘 살피면서 걸어.”

던전이라는 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이다. 무거운 목소리로 던져진 경고에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긴장이 짙게 드리워졌다.

일행은 각자 나름의 경계를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멈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재영은 사헌의 말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제일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멈추니 뒤에서 따르는 사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검은색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영은 팔을 들어 코와 입을 막았다.

팅.

동시에 무언가 얇은 막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일행은 크리처가 떼 지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우아악!”

“꺄악!”

“저게 뭐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뒤늦은 비명을 내질렀다. 소풍에라도 온 것처럼 들떠 있던 경우는 아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걸 바로 앞에서 목격한 재영은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놀랐다.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건 제 가슴 앞으로 뻗어 있는 사헌의 팔 덕이었다. 재영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쿵덕대는 심장을 느꼈는지 사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자연스럽게 재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영이 놀라는 모습 자체가 마음에 든 건지, 아니면 제게 의지하는 게 좋은 건지. 어쨌든 지나치게 기뻐 보이는 모습에 놀라서 뛰던 심장이 단숨에 확 식어 버렸다. 재영은 감싸안고 있던 사헌의 팔을 놓았다.

사헌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노려보든 말든 재영의 관심은 크리처에게로 흘러갔다. 크리처가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려고 머리를 쾅쾅 박아 댔다. 하지만 앞을 막은 게 진짜 벽이 아니기 때문에 재영을 비롯한 일행은 흔들림조차 느낄 수 없었다.

“우와, 저게 진사헌 에스퍼의 능력인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에 재영의 입꼬리가 저절로 당겨졌다. 친구들이 경이롭다는 목소리로 사헌을 향해 탄성을 뱉는 게 뿌듯했다.

이제 재영도 크리처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크리처는 눈이 루비처럼 붉고, 털이 복슬복슬했다. 훤히 드러난 이마는 박치기를 하는 공룡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었다. 동그란 몸통에 비해 짧은 다리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붉은숭이’다.”

궁금해하는 눈빛을 읽었는지 사헌이 빠르게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크리처의 명칭에 재영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숭이’라고 하면 보통 원숭이라고 생각지 않나. 둥글게 말린 털이 복슬복슬하니 ‘털복숭이’에서 따온 걸 수도 있겠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크리처 명칭은 누가 정하는 거예요?”

“최초로 그 개체를 발견한 국가, 기관에서 정하지.”

“그럼 얘는 누가 발견한 건지 알아요?”

한국말 같으니까 여기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게 아닐까. 재영은 호기심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에 차 물었다.

“나.”

이상한 작명의 주인공이 사헌이라니.

툭 던져진 말에 재영은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크리처와 사헌을 번갈아 봤다.

“역시 털북숭이인가요?”

재영의 물음에 사헌이 왜 그런 걸 묻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이내 기억을 더듬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아마 붉은색 눈을 가진 털북숭이 같은 녀석이라고 말하려다가 중간에 귀찮아져서…….”

하마터면 엄청나게 긴 이름이 될 뻔했다. 간혹 자료를 보며 크리처에 대해 공부하던 재영은 오히려 잘됐다고 결론 내렸다.

“서훈 에스퍼. 포지션 변경한다. 민간인 보호는 내가 할 테니 전부 해치워.”

공격이나 방어, 어느 쪽이나 크게 차이 없는 사헌과 다르게 서훈의 능력은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안 그래도 답답해하던 훈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맨몸으로 싸우는 거야?”

서훈이 뻗은 다리가 크리처의 몸통을 후려치는 것을 보고 윤이 질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 녀석들인지 크리처가 양쪽에서 박치기로 훈을 뭉개려고 달려들었다. 훈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쾅!

이마끼리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큰 타격을 받았는지 크리처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저기도 괴물이었네.”

민태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으로는 훈을 쫓았다. 쓰러진 크리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훈을 에워싼 제 친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위치가 나간 것처럼 붉은 눈에는 빛이 없었다.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중간에 몇 마리가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닿지도 못하고 사헌에 의해 벽에 처박혔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크리처도 곧 훈의 손에 넘어갔다.

“‘붉은숭이’는 몇 마리까지 운용할 수 있지?”

“10마리는 가능합니다.”

사헌이 묻자 전투 중인 훈이 헐떡이며 대답했다.

“그럼 다섯 마리만 챙겨.”

거기서 사헌이 반을 뚝 잘랐다. 서훈이 미간을 좁혔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지만 사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동안 방사 가이딩해야 하는데 괜찮겠어?”

저를 향한 물음에 재영은 고민했다. 그런 질문인가.

과거 이야기 괜찮아. 나는 다 이해해.

그 말을 믿고 털어놨다가는 바로 꼬투리가 잡혀 시달리게 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형이 하라고 하면 할게요.”

고민하던 재영은 사헌에게 배턴을 넘겼다. 사헌이 제법이라는 듯 웃었다.

“그럼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부탁하지.”

그리고는 재영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선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장소부터 찾자.”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잊고 있던 피곤이 밀려들었다. 예대에서 모두와 만난 게 이미 늦은 밤이었으니, 현실 시간으로 자정을 넘겼을 것이다. 던전에서 흐르는 시간이 다르더라도 신체의 시간은 똑같을 터.

“우리가 불침번도 서고 그러는 건가?”

첫 번째 위기를 무난하게 넘기자 경우가 들뜬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너는 무조건 처음으로 서게 해 주지.”

무감각한 눈으로 쳐다보던 사헌이 내뱉었다. 싸늘한 목소리에 경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기 동굴이 있다.”

“……어디요?”

재영은 사헌이 가리키는 방향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없다.

“에스퍼는 좀 치사한 것 같아요.”

결국 재영은 볼을 부풀리며 동굴 입구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곰 같은 게 살 것 같은 커다란 동굴이야. 확인해 봐야 하니까 너희는 한쪽에 물러서 있어.”

사헌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재영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훈에게 눈짓했다. 훈이 사헌이 있던 자리로 와서 섰다.

사헌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지더니 이내 눈에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다. 까치발까지 들고 쳐다보던 재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들어가자.”

말 한마디 할 시간도 없었는데 훈이 턱 끝으로 동굴이 있다는 곳을 가리켰다.

“형님이 확인하고 오셔야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민태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러자 훈이 손을 들어 제 귀를 톡톡 두드렸다.

“이상 없다고, 들어오라고 하셨어.”

얼마나 멀리서 한 말이든 A급 에스퍼인 훈의 귀에는 거뜬히 들렸을 것이다. 재영이 먼저 발을 떼자 나머지도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따라나섰다.

동굴은 입구부터 무엇인지 모를 동물의 뼈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거 사람은 아니겠지?”

윤이 불안한 어조로 입을 뗐다. 자신들이 그랬듯 누구든 우연히 들어오게 됐을지도 모른다.

“설마 실종자가…….”

수경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의 상상대로라면 너무 끔찍하다. 사헌을 제외한 나머지는 입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행히 입구만 막으면 되겠어.”

무거운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헌이 잘됐다는 듯 말했다. 재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별로 깊지 않은 탓에 동굴 내부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사헌의 말대로 한쪽은 벽으로 막혀 있어서 무언가 들어올 거라는 불안감에 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붉은숭이를 입구에 세워 놔. 자는 동안 운용은 못해도 동굴에 주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릴 수 있겠지.”

훈이 손을 움직여 크리처를 입구에 일렬로 세웠다. 기절한 것들이 깨어나면 공격이라도 할까 봐 전부 죽여서 데려온 참이다.

“주인이 돌아오면 어떡해요?”

재영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동굴의 가장 안쪽에는 풀을 모아 만든 침상 같은 것도 보였다. 어떻게 봐도 생활감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알려 줘야지.”

사헌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털썩.

하나둘 동굴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앉았다기보다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은 것과 마찬가지다. 공포 체험을 하려다가 진짜 공포와 마주하게 된 터라 온 신경이 긴장으로 곤두서 있었다. 거기다가 진짜 크리처의 습격까지 받았으니 평온함에 길들여져 있던 몸이 버틸 리 없다.

“너는 이걸 던전에 갈 때마다 겪는 거잖아.”

민태가 핼쑥한 얼굴로 재영에게 말을 건넸다. 대단한 사람을 보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머쓱해진 재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에스퍼님들이 보호해 줘서 괜찮아.”

“그래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맞아. 이런 걸 알고도 들어가는 거 아니야.”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고개를 묻고 있던 윤이 민태의 말을 보탰다.

“난 절대 못 해.”

수경이 단호하게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일인데 해야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자 경우가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듯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때 사헌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불침번은 서훈이랑 너, 찌질이.”

사헌이 손가락을 세워 경우를 가리켰다. 경우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사헌과 눈이 마주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2시간 후에는 나랑 찹쌀떡.”

“전투력 분배 관점에서 조금 불평등하지 않나요?”

수경이 팔을 들며 염려를 드러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가 아직 둘이나 남았다. 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계속 신경 쓰이던 구도라서 거슬렸다. 말없이 수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헌의 눈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다음은 안민태랑 너, 호박.”

재영의 마음을 읽은 건지 아닌 건지. 사헌이 입을 열어 수경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뒤이어 남은 네 사람도 차례를 정해 주고, 재영의 손을 잡고 마른풀로 만들어진 침대로 데려갔다.

“여기에는 여자들이 눕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왜?”

사헌이 눈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윤과 수경은 벌써 모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내일도 얼마나 돌아다녀야 할지 모르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자.”

사헌이 걱정 말라는 듯 재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정수리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수마가 밀려들었다.

“형도 같이 누워요.”

죽은 풀 위에 몸을 누인 재영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사헌이 재영 쪽을 보며 누워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사헌의 가슴에 코를 묻은 재영은 익숙한 체취에 몸을 늘어뜨렸다.

* * *

재영은 문득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잘생긴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결에도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웃었다.

뒤척임에 눈을 떴는지 사헌이 그런 재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점점 얼굴을 가까이했다. 입술이 부드럽게 눌렸다. 이어 축축한 혀가 열어 달라는 듯 입술 위를 살살 간질였다. 떨리는 속눈썹 때문에 어지러워진 재영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스락.

그때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아.’

재영은 잠들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대부분은 잠들어 있지만, 불침번인 훈과 경우는…… 아마, 경우도 깨어 있겠지.

“누가 봐요.”

고개를 뒤로 물린 재영은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 어때서.”

사헌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재영의 뒤통수를 잡아 거리를 확 좁혔다. 놀라서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입천장을 간질이는 느낌에 재영은 어깨에서 힘을 뺐다.

재영 말고도 남성 가이드를 접해 봤을 훈이 동성 간의 스킨십을 이해하지 못할 리도 없고, 또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가. 친구인 민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고. 친하지도 않은 경우가 어떻게 보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재영은 다소곳하게 사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먼저 다가온 것이 만족스러운지 맞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새벽의 몽롱한 공기에 점차 열기가 스몄다. 눈을 살짝 뜨자 이미 잠식된 사헌의 눈동자가 보였다. 재영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이제 우리 차례야.”

입술을 뗀 사헌이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열기가 가득했다. 그뿐, 잠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안 잔 거예요?”

재영은 아쉬움을 억누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일주일은 안 자도 문제없어.”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던전의 상황이 항상 이처럼 좋지도 않다. 몸을 숨길 공간도 없이 황량할 때도 있고, 크리처의 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질 때도 있다.

“미안해요.”

재영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괜히 심령 스폿을 구경하겠다고 설쳐 댄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너도 나 때문에 항상 던전에 들어가잖아.”

“그건……!”

그건 일이지 않냐고 대꾸하려던 재영은 입을 열었다. 결국 자신이 던전에 들어간 건 사헌 때문이니까. 그러자 사헌이 그것 보라는 듯 웃었다. 왠지 억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재영은 잊고 있던 요의에 몸을 떨었다.

“뭐야, 쌌어?”

사헌이 목소리를 낮춰 은근하게 물었다.

“아, 안 쌌거든요?”

“도와줘?”

붉어진 뺨을 쳐다보던 사헌이 재영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애기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데 누가 잠자리에 소변을 눠요.”

재영은 질색하며 사헌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사헌이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대다.”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자 사헌이 훈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경우는 이미 벽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제대로 안 할 줄은 알았지만.’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훈이 고개를 들어 재영을 쳐다봤다. 집요하다 싶은 시선에 조금 전까지 사헌과 나눈 대화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힐끗 두 사람을 본 사헌이 재영의 앞을 막아섰다.

“제대로 쉬어 둬. 전투 중에는 교대할 사람도 없으니.”

“……네.”

훈이 순순히 대답하며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는 못 가니까 저기에 눠.”

바깥으로 나간 사헌이 동굴 바로 옆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등을 돌려서 지퍼를 내리는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꼭 그렇게까지 보고 있어야 해요?”

사헌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재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영은 몸을 웅크렸다.

“어디서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적어도 제 다리 사이에서는 안 나올 거예요.”

피식 웃은 사헌이 손을 들며 항복했다. 재영은 마음 놓고 긴장을 풀었다.

사악.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있는데 앞의 수풀이 흔들렸다.

“뭐지?”

재영은 미간을 좁히며 정면을 가만히 쳐다봤다. 흔들린 수풀 사이로 뭔가가 튀어 올랐다. 언뜻 보기에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대형견 같았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털이 비에 젖은 듯 축축했다. 맑은 하늘에서 뭐가 내렸을지 생각하던 재영은 곧 정답을 찾아 냈다.

“헉, 미안해! 거기 있는 줄 모르고…….”

각도상이나 상황상이나 제 소변을 뒤집어쓴 게 분명했다. 반사적으로 다가가려던 재영은 살벌하게 생긴 얼굴에 멈칫했다.

‘저런 게 강아지일 리 없잖아.’

던전에 평범한 동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전에 동물의 왕국에서 하이에나를 본 적이 있다. 눈앞의 짐승은 늑대와 하이에나의 못생긴 부분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혀, 형…….”

재영은 작게 사헌을 부르면서 천천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샛노란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바로 제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래. 잘하고 있어.”

등 뒤에서 곧장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당장 나서기에는 크리처와 재영이 너무 가까웠다. 염력을 이용해 뒤로 확 당기면 크리처가 놀라서 휘두른 발톱에 재영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대로 눈 떼지 말고!”

재영의 고개가 제 쪽으로 돌아오는 것 같자 사헌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계속 부릅뜨고 노려보느라고 눈이 시큰거렸다.

“세 걸음만 오면 돼. 힘들면 숫자 세도 괜찮아.”

재영은 그대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헌의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헌과 닿으면 영영 재영을 잡지 못할 거라는 걸 감지했는지 크리처의 기세가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털을 바짝 세우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느리게 감기를 누른 것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재영의 눈동자에 각인됐다.

바삭.

재영이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크리처가 바닥을 딛고 크게 도약했다.

“잘했어.”

동시에 사헌이 단단한 팔로 재영을 끌어안으면서 염력으로 크리처의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끼잉!

크리처가 개 같은 소리를 내며 나무에 처박혔다. 무리 지어 행동하는 놈이었는지 나무 사이, 사이의 어두운 장막에 샛노란 불빛들이 하나둘 늘었다.

“너는 이대로 동굴로 가서 서훈 깨워.”

“알겠어요!”

재영은 곧장 몸을 돌려 안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머뭇거려 봐야 사헌이 버틸 시간만 늘 뿐이다.

“서훈! 훈아!”

재영의 외침에 훈이 눈을 떴다. 이제야 잠이 들었던 터라 피곤이 가시지 않아 눈에 핏대까지 섰다. 재영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제 기운으로 훈의 몸을 적셨다.

갑작스러운 가이딩에 훈이 놀란 듯한 얼굴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동굴 안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전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뭐야? 무슨 일이야?”

“벌써 아침이야?”

억지로 깬 사람들이 부스럭대며 큰소리가 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잠에 취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녀석도 있는 것 같았다.

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초점이 흐려졌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바로 앞에서 그를 보고 있던 재영은 훈의 귀가 쫑긋거린다고 느꼈다. 아마 사헌의 말을 듣고 있었을 거다.

“내 꼭두각시를 두고 갈 거니까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

“뭐? 어디 가는데? 야, 서훈! 다른 데서 들어오면 어떡하고!”

경우가 서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미친 새끼야!”

민태와 우진이 반쯤 화를 내면서 경우를 떼어 냈다.

“꼭두각시가 보는 걸 보고, 들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훈이 성가신 기색도 없이 말했다. 무뚝뚝한 것과 달리 상냥한 녀석이다. 재영은 훈에게 보내는 기운을 늘렸다.

새벽의 전투는 싱거우리만치 간단히 마무리됐다. 훈이 도울 틈도 없었다. 그 후로 재영은 사헌과 불침번을 섰다. 교대하고 쪽잠을 잔 탓에 잠을 잤는데도 잔 것 같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됐다. 재영은 몽롱한 정신으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걸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헌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전투원한테 업혀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재영은 어이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그건 정말 짐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할 거라는 이유로 던전에는 전투원인 에스퍼에게 물통 하나도 들지 못하게 하는데, 성인 남자를 업기까지 하라니.

“전투를 몸으로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사헌이 코웃음을 쳤다. 중계 영상만 봐도 직접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긴 했다.

“그…….”

“잠깐. 저기에 뭔가 있는데.”

그래도 안 된다고 다시 반박하려는데 사헌이 재영의 앞을 막았다. 저 멀리 나무들 틈으로 세 개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을 한 그것들은 지팡이로 쓰기에 괜찮은 두께의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 이번엔 사람 형체의 크리처인가?”

재영은 머릿속으로 오크나 엘프 같은 것을 주워섬겼다. 긴장감으로 잠이 확 달아났다. 재영은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그냥 사람이야.”

그런 재영을 귀엽다는 듯 쳐다본 사헌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게 더 문제 아니에요?”

재영은 경악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아, 혹시 에스퍼?”

재영은 그러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면서 물었다. 사헌이 무감각한 눈으로 그쪽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니.”

짧지 않은 시간, 가늠하듯 나무 사이를 바라보던 사헌이 내뱉었다. 일반인이라는 말에 재영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여기에 왜 사람이……, 아니, 일단 구해야 하잖아요.”

재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마침내 그 사람들도 재영을 발견했다. 세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여자가 재영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바짝 마른 몸에 푹 들어간 눈매가 흉흉했다.

“저기…….”

재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물러나요!”

그나마 상태가 좋아 보이는 남자가 여자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저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고…….”

재영은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손바닥이 보이게 들어 올렸다.

“다, 다가오지…….”

“어? 박민재 선배님 아니세요?”

재영이 말을 걸 때는 막대기를 더 질끈 고쳐잡은 남자가, 윤이 말을 걸자 주춤거렸다.

“어제 말했지? 몇 달 전에 예대에서 실종된 선배가 있다고…….”

이 분이 그 분이셔.

윤이 그렇게 말하듯 손바닥을 펼쳐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남자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기세가 줄어들었다.

“진사헌 에스퍼!”

상황 파악을 하려고 눈을 굴리던 남자가 그제야 사헌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뭐? 진짜다! 진짜 진사헌 에스퍼야!”

그러자 다른 사람도 한발 늦게 희열과 설움이 뒤섞인 얼굴로 외쳤다.

“이 사람이 그 에스퍼라고?”

가장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여자가 놀라고 생경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한민국에서 사헌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이라 재영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시죠.”

사헌이 재영의 손을 잡아끌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는 저를 보고 열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하긴. 밖에서도 늘 겪는 일이니까.’

재영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네, 네!”

던전 안에서 챙길 짐이 있을 리도 없으니 실종자들은 바로 일행에 합류하려 했다.

“히익! 크, 크리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민재가 사람마다 하나씩 붙어 있는 ‘붉은숭이’를 보고 기겁했다. 훈의 꼭두각시였다.

“숨통은 끊어졌으니까 걱정마세요.”

훈이 세심하지 못하게 내뱉었다. 실종자들은 시체가 움직인다는 말까지 듣자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서훈 에스퍼 능력이 꼭두각시 조종술이거든요.”

재영은 훈을 밀어내고 일부러 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리고 길들인 동물이라도 대하듯 아무렇지 않게 크리처의 털을 쓰다듬었다.

“아, 아, 그런 능력자도 있었군요.”

그 모습을 본 민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안심되지는 않는지 이동하는 내내 훈과 그가 부리는 크리처의 시체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혹시 가져오신 식량이 있나요?”

묵묵히 걷던 민재가 주린 배를 문지르며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던전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게 뻔하다.

‘경우가 제사상을 차린다고 가져온 음식들만 챙겼어도 좀 나았을 텐데.’

이제와 후회해도 도리가 없다. 재영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민재 일행이 탄식을 흘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어떻게 하죠?”

기운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재영은 사헌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도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자 사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높아지는 그의 얼굴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던전 전체를 둘러보고 올 거야.”

“네? 혼자요?”

“제가 같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쩌면 에스퍼도 없이 동굴에 남겨질 것 같은 상황이라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스몄다.

“기척을 죽이고 살피기만 할 거다. 넌 여기서 동굴을 지켜.”

“알겠습니다.”

딱딱한 말에 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야 할 사람만 열이 넘으니 어떻게 보면 그의 역할이 더 막중했다.

“아까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식생이 낯익어. 먹을 만한 것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다시 재영을 돌아본 사헌이 그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 발 떨어져 재영과 훈을 한눈에 담았다.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방사 가이딩만 해.”

겨우 그 말을 하는데 쓴 약을 들이켠 것 같은 표정이다. 재영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형 배웅 좀 하고 올게.”

재영은 멀뚱히 선 훈을 지나쳐 사헌의 뒤를 졸졸 쫓았다.

“할 말 있어?”

동굴 입구를 지나자 사헌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재영은 눈치 없는 그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여 보라고 손짓했다. 사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몸을 낮췄다.

“혹시 모르니까 충전은 하고 가야죠.”

밖으로 나가려면 스마트폰 배터리가 100퍼센트가 아닌 것도 신경 쓰인다. 하물며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모르는 에스퍼의 마나인데. 뭐, 사실 핑계고 재영은 단지 사헌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 말고.”

길지 않은 입맞춤 끝에 사헌이 당부했다. 질투심 가득한 말에 재영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네.”

“배고프니까 입도 열지 마.”

“알겠어요.”

대화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막상 재영을 훈의 곁에 두고 가려니, 그것도 방사 가이딩을 할 것도 알고 있으니 영 눈에 밟히는 모양이다.

“무슨 일 있으면 큰소리로 불러.”

“네, 네. 어서 다녀오기나 하세요.”

재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사헌의 등을 떠밀었다. 늦게 갈수록 돌아올 시간도 늦어지기만 한다.

“네가 부르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을 수 있어.”

사헌이 허투루 듣지 말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의 진심에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알겠다니까요.”

재영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먼저 들어가.”

사헌이 동굴 입구를 턱으로 가리켰다. 고작 세 걸음이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었지만, 사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거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어도 될까요?”

재영이 동굴로 돌아가자 실종자 중 한 명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죠. 우리 찹쌀떡이 여기 있는데.”

민태가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당겼다. 실종자들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민태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얘가 사헌이 형 애인…….”

“야……!”

당연히 페어 가이드라고 말할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재영은 화들짝 놀라 민태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케미로 안 사귀면 범죄지.”

사헌의 팬클럽 회원인 수경이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범한 에스퍼-가이드 관계로는 안 보이긴 했어.”

윤도 거들었다.

“아니, 두 사람 다 남자인데 그건 상관없고?”

태연한 두 사람과는 다르게 경우가 혐오감 짙은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삐쩍 마른 여자가 재영을 곁눈질하며 몸을 웅크렸다. 재영은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제 인생에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야. 네가 혐오를 하든 어쩌든 상관없는데, 그딴 식으로 드러내지 마. 무식해 보이니까.”

윤이 나서서 경우를 비난했다.

“미, 미안합니다.”

그 말을 듣고 머쓱한 얼굴로 사과를 한 건 아까의 여자였다.

“괜찮아요. 그러실 수 있죠.”

“야, 내가 또 실수한 거야? 미안하다.”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있던 민태가 뒤늦은 사과를 건넸다. 어차피 녀석의 눈치 없음과 무신경함에는 도가 텄다. 재영은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헌이 형이 좀 늦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는 안 될 거예요. 여기 서훈 에스퍼도 A급 전투 계열이거든요.”

재영은 사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설은 완전히 배제했다. 그 말에 생존자들이 놀란 눈으로 훈을 보더니 이내 노골적으로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단신으로 이 던전에 떨어져서 며칠이나 버텨 오셨잖아요.”

“맞아. 여기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야.”

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수경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운이 좋았어요.”

한 명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뗐다.

“사실 이 던전에 들어온 게 우리가 전부는 아니었거든요.”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명이나 같은 건물에서 실종이 됐는데, 여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실종자 세 사람 중 가장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여자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사헌 에스퍼 말대로 던전 자체는 그다지 넓지 않아요. 출구도 멀지 않고요.”

“출구에 가 보셨어요?”

재영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출구가 어딘지 알면 나가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네. 하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었어요.”

여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출구 바로 앞이 대장 크리처의 영역이란다.

“이제 사헌이 형이랑 훈이도 있으니까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재영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여기는 너무 끔찍해.”

여자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들썩거렸다. 울먹이는 목소리에는 증오마저 담겨 있었다.

“전에 큰소리를 듣고 찾아갔다가 크리처한테 먹히고 있는 사람을 봤어요.”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텅 빈 눈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었다. 던전에 몇 번 다녔어도 사람이 산 채로 먹히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얼마나 끔찍했을지 재영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보고도 제정신을 붙이고 있는 것도 대단하다.

“그 뒤로 그 사람처럼 또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구에서 기다렸어요.”

“네?”

윤과 수경이 경악했다. 한 번 끔찍한 것을 목격한 곳을 찾아간다는 게 보통 용기 있는 걸로는 안 될 것이다.

“왜요?”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크리처한테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는 것 아세요?”

물음과는 상관없는 듯한 대꾸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크리처에게 각자의 영역이 있고, 거길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재영도 알았다.

“제가 여기서 지켜본 바로는 일정한 구역 이상으로는 나가지 않았어요.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도 않고요.”

들어보니 마냥 숨어만 있지 않고, 여러모로 살 방도를 모색한 것 같다.

‘하긴. 그러니 포식자로 가득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과장하면 재영의 반이나 될 법한 몸으로 대단한 배짱이다. 재영은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입구 근처에는 크리처가 다가가지 않아요. 그 사람처럼 소리 지르면서 시선을 끌지 않는 이상은요.”

반짝이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여자가 민망한 듯 눈을 깔았다.

“그럼 쭉 거기서 지내셨어요?”

“배고플 때랑 볼일 볼 때는 빼고요.”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먹을 건 어떻게 찾으셨어요?”

그 말을 듣고 허기짐에 고통스러워하던 경우가 화색이 되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풀도 먹고, 열매도 먹고……. 물로 배 채운다는 말을 여기 와서 배웠다니까요.”

여자가 질린다는 투로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여기서 얼마나 계셨는지는…….”

조심스럽게 묻자 여자가 해도 없는 천장을 눈짓했다. 낮인지 밤인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하루가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을 리 없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만요. 그럼 여기 있는 열매도 먹어도 된다는 거 아니에요?”

그때 경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안달 난 표정으로 밖을 힐끔거렸다. 동굴 바로 있는 작은 덤불에 보라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모두가 봤다. 경우는 마음 같아서는 입을 대고 통째로 따먹을 것 같은 표정인데, 아마 입구를 지키고 있는 크리처 꼭두각시가 무서워 뛰쳐나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저 보라색 열매는 안 돼요.”

그러자 여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정색했다.

“저걸 먹은 사람은 다 죽었어요.”

죽는다. 그 살벌한 문장에 경우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우리끼리 뭉쳐서 늑대 한 마리를 잡은 적도 있어요.”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민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머지 한 사람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거 맛있었죠.”

“근데 이제 힘이 없어서 잡지도 못하겠어요. 사람도 많이 줄었고…….”

하지만 기껏 띄워 놓은 분위기를 본인이 무너뜨렸다.

“어, 시체라면 저기 잔뜩 있는데…….”

그때 우진이 동굴 벽을 가리켰다. 바로 어제 몰살한 늑대형 크리처 몇 마리는 훈이 꼭두각시로 쓴다고 빼놨고, 나머지는 상황이 잘 풀리면 가져가려고 차곡차곡 쌓아뒀다.

“정말요? 그럼 우리 그거라도 먹어요!”

실종자들이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크리처를 먹는다고요?”

경우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며 뒤로 한발 물러나는 게 보통 싫은 게 아닌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뭘 가릴 처지인가요? 다행히 늑대에는 독이 없어요.”

경우의 반응에 여자가 뚱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거라도 먹고 겨우 버틴 사람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다.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먹을 수 있다니까 방법을 찾아보죠.”

“아, 나 라이터 있어.”

재영의 말에 유일한 흡연자인 현덕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그럼 우리는 태울 만한 것 좀 주워 오자.”

재영은 가만히 있는 훈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아무리 근처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바로 어젯밤에 겪었다.

“진짜 저걸 먹겠다고?”

저를 빼고는 긍정적인 반응인 것 같자 경우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경우야. 눈치 좀 챙겨.”

경우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재영은 더 참지 못하고 비난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경우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입을 달싹였다. 재영은 더 기분이 상하기 전에 몸을 돌렸다.

“위험하니까 장작 모으는 건 내가 할게.”

훈이 동굴 입구에 죽 늘어세워 놓은 꼭두각시를 눈짓하며 말했다. 아마 꼭두각시를 움직여 일을 시키겠다는 것 같다.

“여기가 던전 안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마나 좀 아껴.”

재영은 눈을 흘기며 서훈을 타박했다. 그의 꼭두각시는 동굴의 입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한 거다.

“같이 하면 더 빠를 거야.”

재영의 말에 조금 고민하던 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 한 명쯤은 지킬 수 있다고 결론 내린 듯하다.

“겸사겸사 가이딩도 하자.”

재영의 제안에 훈이 흠칫했다.

“그렇다면 역시 꼭두각시를 부리는 게…….”

훈이 어딘지 기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재영은 눈가를 찡그린 채로 웃었다.

“나도 가이딩은 좀 아껴 두고 싶거든.”

던진 자체가 그리 넓지 않다고는 하지만, 대장 크리처를 처치하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쉬면서 기운을 회복할 틈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재영의 말을 들은 서훈이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죄책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재영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은 고기 먹을 수 있게 손질 좀 해 주세요.”

“그건 우리도 자신 있지.”

“가르쳐 주세요! 저희도 할게요.”

민재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재영은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가 먼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괜찮을 거야.”

재영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린 훈이 갑자기 툭 내뱉었다.

“응?”

재영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눈으로 훈을 쳐다봤다.

“진사헌 에스퍼.”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한 듯싶다. 재영이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훈이 덧붙였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뛰어난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이 돌아올 거라고.”

“아…….”

결국 재영을 다독이려고 꺼낸 말이다. 재영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형 걱정한 거 아닌데. 그냥 보고 싶어서.”

훈이 재영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남자끼리라 불쾌해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사이가 정말 좋네.”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내뱉는 훈을 보고 재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서로 많이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사헌이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어도 아마 그럴 것이다. 재영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훈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 얼른 장작이나 구해 오자. 더 늦으면 다들 생고기라도 뜯으려고 할 걸.”

재영은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앞장섰다. 등 뒤에서 무거운 걸음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 *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전부 고깃덩어리를 꿴 꼬챙이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둘러앉았다. 고기가 익으면서 육즙이 나와 바닥에 톡톡 떨어졌다.

‘고기 구워질 즈음엔 형도 왔으면 좋겠는데…….’

재영은 고기가 타지 않도록 막대기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헌을 떠올렸다.

“저기…….”

그렇게 멍하니 불만 보고 있는데 실종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동시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몇 달 전에 실종됐다고 하지만, 제가 여기에 온 건 며칠 되지 않았거든요.”

재영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민재가 조금 민망하다는 듯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던전에서 나가면 현실의 시간대로 폭삭 늙어 버리고 그럽니까?”

지극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재영은 민재의 목소리 뒤에서 불안함을 읽었다. 바깥이 자신이 아는 것과 너무 다를까 봐 걱정될 것이다.

“그럼 훨씬 전부터 있던 저는 할머니게요?”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한결 표정이 나아진 마른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지만 민재가 얼마의 시간동안 실종되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처럼 가볍게 웃을 수 없었다.

“혹시 여기에 오기 전에 몇 년도였는지 기억나요?”

윤이 총대를 매고 여자에게 물었다.

“그럼요.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는데……. 2002년도예요. 그러고 보니까 8강전은 어떻게 됐어요?”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영과 동기들은 오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2002년은 그들이 잉태되었을 즈음이다.

“왜 그래요? 역시 못 갔구나? 그럴 수 있지.”

대답이 없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자가 찡그린 채로 웃었다. 자신을 가엽다는 듯 보는 눈빛 때문에 조금 불안해진 것 같다.

“저기, 제가 2020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요.”

여자와는 가장 가까운 민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여자는 입을 작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던전 안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 알고 계시잖아요.”

민재가 억눌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자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재영과 동기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출구 찾았어.”

그때 재영의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헌이 나타난 덕분에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무거운 공기가 깨졌다. 재영은 화색이 되어 뒤를 돌아봤다. 사헌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형!”

재영은 벌떡 일어나 사헌에게 다가섰다. 눈이 저절로 그의 몸을 쭉 훑었다. 숨어서 정찰만 하겠다는 말을 제대로 지킨 건지 그의 몸에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어서 와서 이것 좀 먹어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재영은 사헌의 손을 끌어다가 불 앞에 앉히려고 했다. 덕분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앗!”

재영은 당장 허리를 굽혀 떨어진 것을 주워 올렸다. 껍질이 무른 것도 있었는지 으깨진 것도 보였다. 그것을 본 재영은 사헌이 그냥 정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도 구해 오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게 다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사헌이 가져온 것들은 전부 색과 크기, 종류 또한 다양했다. 재영은 그중에서 울퉁불퉁 못생긴, 호박처럼 생긴 것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것들은 구워 먹어야 해.”

사헌이 그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수분 보충도 필요하니까 고기만 먹지 말고 조금씩 먹어 두십시오.”

재영의 손에 다른 과일들도 들려 준 사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딱딱한 목소리로 권했다. 주춤주춤 다가와 그가 가져온 것들을 살피던 사람들이 그 말에 반색하며 다가섰다.

“이게 먹어도 되는 거였구나.”

“화려한 버섯은 독버섯이라더니, 다 거짓인가 봐요.”

실종자들이 미리 알지 못해 안타깝다며 과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잇새로 과즙이 터지는 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입맛을 다시며 손을 뻗었다.

“던전에도 먹을 수 있는 게 있는 줄은 몰랐어요.”

현덕의 말에 우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리고는 사헌이 따로 빼 둔 것을 가져다가 꼬챙이에 꽂기 시작했다.

“이렇게 먹으니까 꼭 캠핑 온 것 같지 않아요?”

그 모습을 본 윤이 밝은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다들 어두운 분위기를 떨쳐 내려고 열심이었다.

“과일도 몇 개 꽂아서 구워 보자.”

재영도 팔을 걷어붙이고, 꼬치 무리에 끼어들었다. 곧 노릇노릇 고소한 냄새가 동굴을 채웠다.

“와, 진짜 배부르다.”

민태가 부른 배를 문지르며 한숨처럼 내뱉었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니 기분이 나아졌는지 사람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재영은 제가 뿌듯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사헌에게 물었다.

“현실 시간은 얼마나 지나 있을까요?”

20년은 지났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러 사람의 노력에도 그녀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질 않았다.

“이 정도면 한 주?”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뱉었다. 재영은 태연하기만 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쩌면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을 터다.

“저번에도 한 달이 지났었다고 했죠.”

복잡한 눈으로 사헌을 바라보던 재영이 입을 열었다. 그가 납치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언제를 말하는지 금방 떠올린 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다시는 형 혼자 던전에 들여보내지 않을 거예요.”

재영의 말이 갑작스러웠는지 사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재영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반대로 던전의 하루가 현실의 며칠이라면 말이에요. 저는 형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시간을 혼자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 말을 뱉으면서 재영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새삼 느꼈다. 사헌이 던전에서 한 달을 보냈다고 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하다가 반대의 경우를 떠올리자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에스퍼로 활동한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헌은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낸 걸까.

“저는 언제나 형하고 같은 시간에 있을래요.”

재영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하며 사헌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헌이 그 얼굴과 옭아매듯 틀어쥔 손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뗐다.

“여기서 나가면 바로 하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그러다가 열기로 번들거리는 사헌의 눈동자를 보고, 그가 하자는 게 뭔지 알아챘다.

“혹시 정찰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재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까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었는데…….’

재영은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당장 사헌의 옷을 벗겨 확인할 것처럼 그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여기서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버클까지 내려간 재영의 손을 잡은 사헌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움찔한 재영은 눈을 들었다. 사헌의 시선이 제 어깨 너머로 향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보던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몸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잖아.’

재영은 바보 같은 제 행동을 탓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기운을 움직여 사헌의 몸속을 확인했다. 조금 비어 있기는 해도 그냥 일상생활에서 쓴 에너지 정도였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며 내뱉은 말에 사헌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네가 환장하게 굴잖아.”

사헌이 손으로 재영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느른하게 내뱉었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화끈거렸다. 연인으로서 자신을 바란다는 뜻에 재영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형이야말로 사람 자극하지 마요.”

재영은 고개를 숙여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뚱하게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서 사헌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의 열기가 어느 정도 식었을 무렵, 재영은 뒷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냈다.

“이거 받아 주세요.”

그리고 지갑에서 꺼낸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를 던전에서 생존한 세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확인하고,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가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 주세요. 별거 아닌 일이라도 괜찮아요.”

하랑 길드는 던전과 관련해 다양한 봉사를 하고 있다. 던전으로 인한 일반인의 후유증 치료도 그중 하나다. 그들은 생소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명함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신경 쓰이는 일 하나를 처리했다는 생각에 재영은 겨우 안도했다.

“배 채웠으면 다 일어나십시오.”

묵묵히 서서 재영을 지켜보던 사헌이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래요.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요.”

최소 몇 개월은 실종 상태인 사람들이다. 실종자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 있다가 나중에 데리러 오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경우의 말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라 무섭고, 불안한 건 알겠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저는 에스퍼님 따라갈 거예요.”

“저도요.”

실종자는 물론이고, 함께 온 친구들도 사헌 쪽으로 붙었다.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자 경우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대장 크리처를 공격한 후에는 던전에 무슨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사헌이 싸늘한 눈으로 경우를 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크리처들이 자신의 영역을 지켜왔다지만, 자신들의 터전이 박살나는 것을 알고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괜찮다면, 남던가.”

사헌이 비소를 머금은 채로 경우를 보며 내뱉었다.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동굴에 세워 둔 보초병도 전부 회수할 거야.”

그리고 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가면 되잖아요.”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진 경우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끝까지 뚱한 태도에 찌푸려진 눈썹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자 사헌이 다가와 엄지로 아미를 살살 문질렀다.

동굴을 나서자 어두운 하늘에 하얀 무언가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동굴 입구만이 아니라 저 멀리서도 똑같이 내리고 있었다.

“눈인가?”

경우가 손바닥을 펼쳐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받아 내려고 했다.

“다, 당장…….”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과는 달리 실종자들은 공포로 홉뜬 눈으로 쳐다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손대지 마!”

다급한 사헌의 외침에 경우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놀란 것을 탓하는 것 같은 눈으로 사헌을 돌아봤다.

퍼엉! 펑, 펑!

그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당장 동굴로 돌아가!”

모두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동굴 안으로 도망쳤다. 곧 폭발 소리가 끝났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멈추지 않았다.

“뭐, 뭐예요?”

사헌이 하얗게 질린 재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체온에 조금 나아졌다.

“사방이 검은 재로 덮여 있었잖아. 구석구석 빠진 곳 없이 덮여 있었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면 불가능해.”

바닥을 덮은 재를 손댈 때부터 사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전부 끝내고 싶었는데…….”

일행이 동굴에서 나가려고 할 때 폭발이 일어난 것은 사헌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너, 하마터면 머리 날아갈 뻔했다.”

민태가 하얗게 질린 경우에게 다가가 눈치 없이 내뱉었다. 경우가 종이를 받아 내려던 제 손바닥을 충격으로 홉뜬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며 동굴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에게 겁을 준 민태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 한 번 터졌으니까 이제 한동안은 잠잠할 거예요.”

놀란 주변을 돌아본 민재가 겨우 웃으며 말했다. 자신들이 던전에 들어온 후에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으니 적어도 하루의 텀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서 다행이네요.”

재영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을 완전히 벗어나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친 사람도 몇 나왔을 것이다.

“그럼 다시 움직이죠.”

“예? 아직 좀 더 지켜보는 게…….”

사람들은 사헌을 따라 기겁하는 경우를 무시하고 동굴을 빠져나갔다.

미리 정찰을 한대로 사헌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기만 지나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정면을 가리키는 사헌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기쁘면서도,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걱정도 지울 수 없는 모양이다.

재영은 그들을 안타깝다는 눈으로 보다가 언덕 사이에서 나타난 인영을 발견했다.

“저거 유니콘 아니에요?”

푸른빛이 도는 하얀 몸체와 윤기 나는 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깔을 띠는 뿔까지. 동화에서 보던 신성한 모습 그대로였다. 과할 정도로 큰 생식기만 빼고.

언덕 위에서 제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을 발견한 유니콘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동물들이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몸을 부풀리는 것과 비슷한 결의 행동 같았다. 하지만 크리처의 행동은 다른 방향으로 일행을 위협했다.

“아, 너무 숭한데.”

질색하는 투로 내뱉은 민태가 손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두 발을 들고 뒷다리만으로 걷는 유니콘은 그 말대로 너무 흉물스러웠다. 자세 때문에 다리 사이가 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데 앞이 깜깜해졌다.

“저런 거 보면 눈 썩어.”

갑자기 귀 바로 옆에서 흘러들어오는 낮은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아서 재영은 몸을 떨었다. 등으로 딱딱한 가슴이 느껴져서 지금 자신이 사헌에게 반쯤 안겨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금방 치워 줄게.”

다정한 목소리와 동시에 시야가 훤히 트였다. 언제 날아갔는지 허공에서 나타난 사헌이 유니콘의 뿔을 잡아챘다.

“위허……!”

뒤늦게 사헌을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서 외치려고 했다.

“어딜, 감히.”

하지만 분노에 찬 사헌의 목소리와 그가 낸 폭력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쿵, 쿵.

유니콘의 몸에 받힌 땅이며 나무가 푹푹 패였다. 쿵,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땅이 요동쳐서 일행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유니콘이 괴성을 지르는 탓에 몸을 낮추고 귀까지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사헌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유니콘은 온힘을 다해 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주, 죽은 건가?”

재영은 움직임이 없는 유니콘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늘어진 몸은 그 후로도 몇 번 땅으로 패대기쳐졌다.

쿵.

마침내 유니콘이 사헌에게서 벗어났다. 사헌이 잡고 있던 뿔과 몸이 그대로 분리가 된 것이다. 무심한 눈을 한 사헌은 크리처의 몸을 세게 걷어찼다.

‘인간이 미안해.’

재영은 속으로 애도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지만, 눈앞에서 저런 짓을 당하는 것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던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장 크리처가 사라지고 던전이 사라지려는 신호였다.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깨닫자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공주, 아니, 진사헌 에스퍼 손에 있으니까 보석 같아요. 색 진짜 예쁘다.”

“그러게. 보석 같아.”

사헌의 손에 들린 유니콘의 뿔은 수경의 말대로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각도에 따라 하얀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푸른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재영은 눈을 반짝이며 사헌의 옆으로 다가갔다. 정확히는 사헌이 들고 있는 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변태 같은 크리처이긴 했는데 예쁘긴 진짜 예, 쁘…….”

하지만 재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사헌이 들고 있던 뿔을 수경의 품으로 툭 던진 것이다.

코앞에서 목적을 놓친 재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헌을 올려다봤다. 사헌이 뭐냐고 묻는 듯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가 싶어 입맛을 다시고는 뿔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왜 또 하필 쟤야?’

요리조리 돌리며 유니콘의 뿔을 눈에 담는 수경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었겠지.’

재영은 술렁이는 마음을 억눌렀다.

* * *

다행히 던전은 리셋이 아니라 일반형이었고, 예대는 이전의 평범한 건물을 되찾았다. 복도 끝에서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한 조교 하나가 소리를 지른 것 빼고는 큰 소란은 없었다.

사헌이 아주 자연스럽게 남은 일을 훈에게 떠넘긴 덕에 재영은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둘만 남은 차 안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재영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를 작게 들썩였다. 사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아까.”

그때 적막을 깨고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움까지 느낀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사헌을 돌아봤다. ‘아까’라고 하니 사헌이 수경에게 뿔을 건네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 없을 때, 가이딩했어?”

좌회전을 준비하려는지 사헌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아, 서훈이요?”

재영은 자신이 떠올린 타이밍과 그가 말한 때가 달라서 헛웃음을 흘렸다.

“형이 하라고 했잖아요. 걔가 있어야 형이 전투할 때 편하기도 하고…….”

사헌은 입을 꾹 다물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는 그냥 눈을 맞출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제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 자신과는 달리 곧장 불만을 토로하는 사헌을 보니 재영은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혹시 가이딩한 거, 싫어요?”

“네 건 뭐든 나누기 싫어.”

재영의 물음에 사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약한 기대가 느껴졌다.

‘다시는 다른 사람을 가이딩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의아함과 동시에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불만이 쑥쑥 몸을 불렸다. 사헌이 집착을 보이는 게 가이드이든 자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럴까? 대답은 울적해진 기분으로 충분했다. 매칭률이 높지 않아도, 가이딩을 하지 못해도 사헌이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형.”

생각을 정리한 재영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수경이한테는 왜 그렇게 친절했어요?”

역시 모르는 채 넘어가는 건 자신과 맞지 않았다. 툭 내뱉은 말에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언제 그랬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친절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영이 보기에는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사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재영은 알 수 있었다.

“수경이가 누군데? 왜 그렇게 다정하게 칭해? 친해?”

재영을 다그치는 사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재영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동자를 굴렸다.

“그, 호박마차, 걔 있잖아요.”

“아.”

그제야 떠오른 듯했다.

“너랑 나랑 잘 어울린다잖아.”

사헌이 기껍다는 투로 말했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사람한테 이게 맞나?’

재영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그럼 유니콘 뿔은 왜 줬는데요? 그거 비싼 거잖아요.”

길드에 넘겨도 되는데 굳이 수경에게 건네줬다는 것이 마음 쓰였다. 꼭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니 선물해 준 것 같은 타이밍 아니었나.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라고 줬지. 아마 서훈이 수거했을 거야.”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그 자리에 같은 길드 소속 에스퍼인 서훈이 있었다는 걸 간과해 버린 재영은 낮게 탄식을 흘렸다. 제 감정에 사로잡혀 아주 당연한 사실조차 지나쳤다. 착각 때문에 괜히 복잡해졌던 재영은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윽고 갓길을 확인한 사헌이 그곳에 차를 멈췄다.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사헌이 두 손으로 양뺨을 감싸고 있는 재영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재영은 슬쩍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사헌이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이런 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거는 건 저뿐이다. 흔들리던 마음이 단단해졌다.

“형이 그 애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어요.”

“마음에는 들었다니까?”

그건 수경이 재영과 어울린다는 말을 해 줘서다. 재영은 그 건에 대해서만큼은 더 오해하지 않았다.

“설마 네 앞에서 바람핀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는 듯 내뱉은 사헌이 입을 꾹 다문 재영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바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해요?”

“연인이 아닌 사람에게 눈 돌리면 그게 바람이지.”

사헌이 혹시 너는 다르냐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니, 형이 저를 연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냐고요.”

“그건 저번에 이야기 끝난 거 아닌가? 연인도 아닌데 그런 짓을…….”

사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재영은 미간을 확 좁혔다. 또다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형은 왜 나한테 계약하자고 했어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사헌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네 기운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언젠가 물은 적 있던 질문에 사헌이 막힘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겉도는 듯한 대화에 재영은 답답해졌다.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아도 나랑 키스는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

“혹시 형이 노리는 게 내 몸이에요? 그 궁합이라는 것도 있다고…….”

재영의 말을 듣던 사헌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말꼬리를 흐린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사헌이 차갑게 내뱉었다. 재영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항상 제대로 말하지 않는 건 형이잖아요.”

재영은 사헌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후로 그에 대한 표현을 아낀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사귀지 않으면 그런 짓을 하겠냐는 둥 어중간한 말로 넘어간 것은 늘 사헌이다.

“듣고 싶은 말이 그거야?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면 되잖아.”

사헌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원하는 말을 해 주려고요? 그게 뭐든?”

재영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유도하는 건 지쳤다. 사헌이 나서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김재영.”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던 사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재영의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너는 내가 다른 사람 비위 맞추려고 살살거릴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잖아요. 형이랑 매칭률도 높고, 형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가이드.”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특별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사헌을 알수록, 함께 있을수록 조금씩 더 욕심이 났다. 더 이상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가이딩하지 마.”

사헌이 망설임 없이 툭 내뱉었다.

“너는 그래도 내 곁에 있을 건가?”

그러고는 떠보는 듯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너야말로 가이드라서, 이왕이면 친구 형이니까. 나를 고른 거잖아.”

재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전부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사헌이나 재영이나 시작은 그랬다.

“이제 S급 가이드인 것도 알려졌으니 비밀로 할 필요도 없겠다. 언제든 다른 에스퍼를 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사헌이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아예 네 마음에 드는 여자 에스퍼로 골라 평생 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거야. 나처럼 비틀린 남자보다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 네게 어울리겠지.”

“무슨 그런…….”

사헌이라면 모를까, 제가 그를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언제나 솔직하게 질투나 집착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불안이 네 것보다 못해?”

사헌이 일그러진 얼굴로 재영을 쏘아봤다.

“겁먹고 질린다고 도망칠까 봐 참아 줬더니, 뭐가 어째?”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은 사헌이 재영의 턱 끝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나는 말이지. 가끔 이 머릿속을 열고, 샅샅이 뒤져 보고 싶다고 생각해.”

사헌이 커다란 손으로 재영의 머리통을 꽉 움켜쥐면서 말했다. 재영은 어깨를 움찔했다. 말대로 사헌이 열어 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속 끓고 있지 말고 전부 있는 그대로 말해. 묻는 말에는 뭐든 솔직하게 대답해 줄 테니까.”

재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널 온전히 손에 쥘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헌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저와 다를 것 없는 그 모습에 재영은 마음속의 불안이 햇살 아래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냥 사랑해 줘요. 다른 누구보다 내가 특별하다고 말해 주세요.”

재영은 안아 달라는 듯 사헌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런 재영을 바라보며 사헌이 조소를 지었다.

“고작 그거야?”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불만을 토해 내기 전에 사헌이 말을 이었다.

“너는 나에게 유일해.”

자신이 요구한 것보다 무거운 감정이 되돌아왔다. 재영은 그것이 벅차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질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궁금해해 본 적도,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답답해한 적도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도 몰랐고, 함께 있어도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겁이 날 때도 있어.”

고해성사하듯 낮게 읊조리던 사헌이 눈을 들어 재영을 마주했다.

“이렇게 절절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회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숨을 고른 재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무서운 것밖에 없어요?”

재영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뭐든 대답해 주겠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사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계속 만지고 싶은 거?”

“역시 제 몸을 좋아하는 거죠?”

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사헌이 시선을 내려 입술을 쳐다보다가 다시 재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보였다.

“사랑해.”

속삭이듯 나온 말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에 이명이 들려서 제가 들은 말이 제대로 된 것인지 헷갈렸다.

“다, 다시…….”

쪽, 쪽, 쪽.

사헌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게 귀여운 소리로 내부가 가득 채워졌다. 입이 틀어막힌 것도 아닌데 재영은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말 같아?”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뱉은 사헌이 조금 더 진하게 입을 맞췄다. 익숙한 체취가 입안으로 훅 들어와 목구멍을 간질였다. 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 대서 토할 것 같았다.

달콤한 입맞춤에 혀끝이 아렸다. 볼부터 목을 따라 어깨로 흘러내리는 사헌의 손길이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다.

“형만 괜찮다면 각인하고 싶어요.”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자 재영은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각인하면 사헌은 자신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을 수 없다. 정말로 그에게서 유일해지는 것이다.

재영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더는 그에 대한 욕심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재영을 빤히 쳐다보던 사헌이 갑자기 급한 손길로 안전띠를 풀었다.

“내리려고요?”

재영은 창밖을 살폈다. 편의점도 없고, 화장실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갑자기 왜 내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각인하자며.”

문을 열고 나가려는 게 아니라 재영이 있는 조수석으로 넘어오려는 거였다.

“당장 하자는 건 아니고…….”

놀란 재영은 우선 사헌의 어깨를 눌렀다. 각인하자고 말은 했지만,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다.

“그럼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지.”

사헌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의도치 않게 선물을 줬다가 뺏은 심술 궂은 사람이 된 것 같다.

“각인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뚝, 딱되는 게 아니라면서요.”

재영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나한테는 형이 각인하고 싶을 만큼 간절한 상대라는 것만 알아 둬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결과만 기다리는 거야.”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말이 재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먼저 말을 꺼낸 만큼 재영도 하고 싶기는 했다.

“그럼 뭐라도 해 볼까요?”

재영은 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그러자 사헌이 손을 뻗어 재영의 스마트폰을 밑으로 눌러 내렸다.

“제일 확률이 높은 방법은 내가 알고 있어.”

툭 내뱉은 사헌이 아까 풀어둔 안전띠를 묶고 기어를 드라이브로 옮겼다. 재영은 헛숨을 삼켰다. 차가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몸이 튕길 뻔했다. 가슴 앞을 막은 사헌의 팔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뭔데 그래요?”

재영은 안전띠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잡고는 소리치듯 물었다.

“평소에 가이딩하는 거랑 똑같이 하면 돼.”

사헌이 흥분한 듯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평소에 가이딩……?”

사헌의 말을 되뇌다가 결국,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하지만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그 이상으로는 입을 열지 못했다.

“걱정 마. 될 때까지 하면 되니까.”

사헌이 달래듯 말했다. 재영은 그 말이 더 겁이 나서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사랑해요, 형.”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은 듯 차가 덜컹거렸다. 싱글싱글 웃는 재영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더 사랑해.”

사헌이 한 자 한 자 짓씹듯 내뱉었다. 그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처럼 느껴져 재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쩐지 각인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각인이 되지 않더라도 더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도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기다린 것처럼 마주친 눈동자 가득 자신만이 비추니까.

재영의 미소를 본 사헌이 더없이 환하게 마주 웃었다.

- 공주의 찹쌀떡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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