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0)

16.

햇볕이 한층 따가워진 날. 재영은 길드 건물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 중이었다.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 달린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숨이 턱턱 막히고, 목이 탔다.

재영은 러닝머신의 속도를 줄이면서 옆을 돌아봤다. 사헌이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럼에도 땀을 흘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숨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불공평해.’

그렇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였다.

“……김재영 가이드님!”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얼굴 반쪽을 가린 채로 들어와 재영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관리자인 박문용 실장이었다. 분명 문 쪽에 있는 사헌을 먼저 발견했을 텐데 그는 곧장 재영에게로 왔다.

‘존재감 없는 사람이 아닌데 신기하네.’

사헌도 돌아보지도 않은 건 똑같다. 재영은 완전히 멈춘 기계에서 내려 문용에게 다가갔다.

“그건 뭐예요?”

“인사 좀 해 주시겠습니까? ‘하랑시대’ 팬 분들입니다.”

문용이 ‘하랑시대’?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재영의 얼굴로 스마트폰을 가져다 댔다. 화면 한쪽에 채팅창이 정신없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재영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언제 기계에서 내려왔는지 사헌이 옆으로 와 맨손으로 재영의 땀을 닦았다. 방송을 통해 재영의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 잘생긴 손을 보고 뭐냐고, 누구냐며 난리가 났다.

“길드 개편 후로 던전 레이드 영상이 아주 잘 팔렸거든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아예 길드 채널을 따로 운영해 보려고요.”

속물적인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문용이 사헌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하지?”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했다. 그의 등장에 채팅창이 더 빠르게 올라갔다.

“우리 길드가 가난해서 그렇대요.”

재영은 짐짓 침울한 척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이런 얘기, 방송에 들어가도 돼요?”

그리고는 눈물바다가 된 채팅창을 힐끔거리며 문용에게 속삭였다.

“당연하죠. 요즘 트렌드는 솔직함이니까.”

문용이 손을 내저으며 편히 움직이라고 말했다. 막 운동도 질린 참이라 재영은 그냥 휴식을 위해 가져다 둔 벤치에 앉았다.

재영을 따라온 사헌이 나란히 앉은 재영의 손을 잡았다. 얼굴 쪽으로 카메라를 확대하고 있어서 화면에는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비밀 연애라도 하는 것 같아서 더 설렜다.

“안녕하세요. 진사헌 에스퍼의 가이드 김재영입니다.”

재영은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으며 다시 제대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옆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영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김재영의 진사헌입니다.”

마치 사헌이 제 것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재영의 심장이 팔딱 뛰었다.

“아니, 형.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재영은 달아올라서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사헌이 수식어 몇 개를 생략하는 바람에 뜻이 엄해졌다.

채팅창은 또 알아볼 수도 없이 빠르게 올라갔다. 간혹 외국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헌의 팬까지 몰려든 모양이다.

“뭐 하고 계셨냐는데요?”

“운동.”

재영이 채팅 중에 눈에 보이는 걸 읽자 사헌이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좋은지 채팅창의 사람들은 자지러지고 있었다.

“그럼 평소에 집에서는 뭐 하세요?”

두 번째 질문을 읽어 놓고, 재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신체 건강한 성인 남성 둘이 집에 처박혀 뭘 하겠는가. 그것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데.

“왜 대답 못 하세요?”

사헌이 놀리듯 채팅창을 읽으며 재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집에 갑니다. 할 일 하러.”

마침내 들끓는 채팅창에 사헌이 불을 질렀다.

* * *

그 길로 길드를 나와 두 사람이 간 곳은 집이 아니라, 케이의 연구소였다.

“어때?”

저번의 변이 던전에서 가져온 크리처 사체를 해부한 결과를 듣기 위해서였다.

“재미있어, 정말로!”

케이는 성가셔하던 저번과 달리 엄청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나왔다.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구나.’

케이의 신경질적인 얼굴만 봤던 재영은 신기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이 녀석들. 유전 체계부터 평범한 크리처와 달라.”

케이가 들뜬 목소리로 내뱉자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변이된 건데 당연히 다르겠지.”

그리고 재영은 둘이 나누는 대화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서 눈만 끔뻑였다. 외계어라도 들은 기분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니까. 인위적으로 배합을 달리한 흔적이 있어.”

“유전자 배합?”

케이가 답답하다는 듯 사헌에게 소리쳤다. 대단한 용기다.

“누군가 일부러 변이를 만들어 냈다는 거야?”

“그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재영은 조금 질투가 났다.

“이 녀석들 에너지원이 뭔 줄 알면 더 놀랄걸?”

케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알 리가 없는 사헌이 고개를 내저었다.

“가이드의 기운이야.”

뜸 들일 시간도 아깝다는 듯, 케이가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듣고 재영은 헉 숨을 삼켰다.

“그걸 먹이고 키우니까 가이드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거지.”

“그럼 설마 우리가 변이 던전에서 느낀 기운이…….”

재영은 뜨악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환한 미소를 머금은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처에게 먹힌 가이드의 기운이라는 거지.”

대답을 듣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사헌이 재영의 등 뒤에 붙어 휘청이는 몸을 지탱했다.

“대체 어떤 놈들일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지?”

케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할 수만 있다면 본인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역시 나는 대악당이 될 자질은 부족한가 봐.”

케이는 그 대단한 일을 먼저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에 상심했다. 정말 침울해 보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사헌의 친구라는 사람 중에 이상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 * *

케이의 연구소에서 나와 향한 곳은 이번에도 집이 아니었다. 재영은 낯선 풍경을 기웃거렸다.

“우리 어디 가요?”

“마켓으로 갈 거야.”

“무슨 마켓이요?”

재영이 아는 마켓이라면 집 근처 슈퍼마켓뿐인데, 지금 가는 길은 도시 외곽으로 뻗어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로 제작한 물건들을 파는 시장이 있어.”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나온 광석이나 크리처의 사체 등 부산물이 큰돈이 된다고 들었다.

“거기서 뭐 사시게요?”

“보호구.”

재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사헌은 던전에 들어갈 때 착실하게 보호구를 착용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날이 잘 선 단검 하나만 허리춤에 덜렁 매달고 가기 일쑤였다.

“잘 생각하셨어요. 진작 그렇게 하지.”

보호구를 사고 나면, 사헌이 다치는 일이 좀 줄어들겠다 싶어 방긋방긋 웃었다. 사헌이 그런 재영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차는 어떤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두 사람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왔다.

“아이고, 진사헌 에스퍼님!”

가게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후덕한 인상의 양복쟁이가 달려와 허리를 꾸벅거리며 사헌을 반겼다. 그의 정장 앞주머니 쪽에는 ‘판매자’라고 적힌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이쪽은 그 유명한……!”

뒤늦게 재영을 발견한 판매자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녀석한테 맞는 보호구랑 호신용 무기를 살 거야.”

판매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사헌이 그에게 용건을 던졌다.

“저요? 형 거 사러 온 거 아니었어요?”

재영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당연히 사헌의 것인 줄 알았다. 직접 뛰어들어 크리처와 싸우는 사헌과 달리 저는 보다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는 것이 전부니까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너는 약해.”

“아니, 저는 평범한 정도라니까요.”

재영은 골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윤지소 가이드 자리에 네가 있었을 수도 있어.”

단호한 목소리에 재영의 몸이 우뚝 굳었다. 사헌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이곳까지 데려왔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특별히 원하시는 거라도 있을까요?”

두 사람 간의 이야기가 정리됐다고 여겼는지 판매자가 눈치 빠르게 말을 건넸다.

“가볍고, 활동성 좋은 것으로요. 옷 아래에 입어도 티가 안 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고쳐먹은 재영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전했다.

“그런 거라면 이건 어떠실까요?”

빛나는 얼굴로 재영의 말을 경청하던 판매자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갔다. 사헌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상품을 살폈다.

“슬라임의 껍질로 만든 갑옷이에요. 가볍고, 재생 능력이 좋아서 오래 입을 수 있죠.”

“하지만 화기에 취약하지 않습니까?”

사헌의 반박에도 판매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상품을 소개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콩거미의 거미줄로 꿴 갑옷이에요. 촘촘하게 짜여서 방어력도 뛰어나죠.”

가볍고, 얇아서 재영이 원하는 대로 옷 아래로 입기에는 좋아 보였다.

“내구성은 약할 것 같은데.”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요.”

판매자는 이번에도 순순히 상품의 단점을 인정하고 다른 것을 소개했다.

“이건 정말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는 건데…….”

하지만 사헌의 인내심이 더 버텨 주질 않았다.

“그만. 시간 낭비 그만하고 저걸로 보여 주시죠.”

사헌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리 상자 안에 든 갑옷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영이 보기에도 다른 상품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그물 옷이라고 하나? 아니면 망사?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흐물흐물해서 가벼워 보이긴 했다.

“근데 저건 철로 된 거 아니에요? 무거울 것 같은데…….”

재영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이걸 정말 가이드분께 드릴 겁니까?”

그리고 자기가 입던 팬티라도 벗어서 팔 것 같던 판매자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영은 대체 저 물건이 뭐기에 두 사람이 이 정도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안 팔겠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이 정도 기술을 가진 판매자는 당신말고도 많으니까.”

망설임 가득한 판매자의 태도에 사헌이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자 기겁을 한 판매자가 사헌의 팔을 붙들었다.

“드리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놀라서 그런 거지요. 에스퍼님들도 좋은 줄 알면서 사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대체 뭐길래 판매자조차 파는 걸 아까워하는 걸까. 재영은 아까보다 더 자세하게 물건을 살폈다. 그냥 단순한 철은 아닌지 고개를 기울이니 오색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용의 비늘로 만든 갑옷입니다.”

“네?”

상상치도 못한 갑옷의 정체에 재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이라니.

재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쯤 중계방송으로 본 기억이 난다. 용을 상대한 사헌이 꽤 고전했던 거로 기억한다. 판매자가 머뭇거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냥 좋은 장비가 아니라, 재료부터 구하기 힘든 것이다. 위험할 일이 거의 없는 가이드가 갖기에는 낭비다.

“형.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한 것 아니에요?”

재영은 부담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비가 오면 자기의 머리가 아니라 가방을 감싸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제가 다치고 말지, 이 귀한 걸 망가뜨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네 목숨값에는 한창 못 미치니까 걱정마.”

사헌이 재영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목숨줄이 잡힌 것처럼 등골이 싸했다. 재영은 잠자코 판매자의 손끝을 바라봤다.

“가볍고,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가장 큰 장점은 용보다 하위의 크리처들은 이 옷을 입고만 있어도 겁을 내어 피한다는 겁니다.”

어느덧 판매자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돌아와 내력을 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용만큼, 아니, 그보다 강한 크리처가 얼마나 될까. 웬만한 크리처는 접근부터 불가할 것이다.

“가격은…….”

“이걸로.”

사헌이 카드를 내밀어 판매자의 말을 끊었다. 아마 가격을 들으면 재영이 또 기겁하면서 거절할 일이 성가셔 그런 것 같다.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아서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이걸로 해요?”

재영은 사헌의 팔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사헌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말해야 그 머리에 새겨둘 거지?”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에 재영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네가 없으면 이 대한민국은 크나큰 전력을 잃게 되는 거라고.”

사헌이 이번에는 제대로 새겨두라는 듯 한 자, 한 자 힘을 들여 말했다.

“아, 아니.”

팔불출스러운 발언에 재영은 당황해서 옆에 있는 판매자의 눈치를 살폈다. 남의 앞에서 태연하게 뱉을 말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숙련된 딜러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재영만 얼굴이 화끈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다음은 호신용 무기라고 하셨던가요?”

거의 수집품으로 놔뒀던 갑옷을 팔아치운 판매자가 이 최고의 호구가 또 어떤 걸 팔아줄까, 하는 눈빛으로 손을 비볐다.

“마법검으로.”

예상대로 사헌은 이번에도 심상치 않은 걸 요구했다.

“정식으로 무술을 배운 적 있으십니까?”

흡족한 미소를 띤 판매자가 재영을 보며 물었다. 재영은 조금 머쓱한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게 운동은 게임을 더 오래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아니요.”

판매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억거렸다. 재영은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살짝 기분이 상할 뻔했다.

“그런 분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마도구가 있습니다.”

반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재영은 순순히 판매자의 뒤를 따라갔다.

“이쪽으로.”

판매자가 가리킨 매대에는 아름다운 검, 아무런 문양도 없이 투박한 검, 장검, 단검. 검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칼이 있었다.

“인이 새겨진 주인에게는 날을 세우지 않는 검입니다.”

딜러가 그 많은 검 중 아콰마린 빛의 보석이 박힌 단검을 들고 재영을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늑대 마수 형의 크리처를 생전 형상 그대로 만들어 놓은 마네킹이 있었다,

“이 뒤쪽을 봐주시죠.”

완벽한 박제라고 생각했는데, 앞만 그럴싸하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재영은 딜러가 이 늑대 가죽을 가지고 뭘 보여줄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칼을 박아 넣으면……!”

판매자가 단검을 쥐고 마네킹의 가슴 부위에 냅다 꽂았다. 크게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푹 소리를 내면서 가죽이 뚫렸다. 더 놀라운 건 그 후였다. 아니, 끔찍한 거라고 해야 하나.

챙.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검에서 다각도로 날이 튀어나왔다. 단검을 든 판매자가 손목을 살짝 돌리자 팽이처럼 핑글핑글 돌았다. 저게 박히면 내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재영은 순간 토기가 올라와 입을 틀어막았다.

“좋군요. 우선 그 두 가지로 챙겨주십시오.”

단검의 능력에 질린 재영과 달리 사헌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면 김재영님. 잠시 피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예의 그 단검을 쥐고 하는 말에 재영은 흠칫 놀랐다. 그러자 사헌이 재영의 손을 제 입가로 끌어갔다.

“악!”

아득, 소리가 나며 손가락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판매자가 빠르게 단검을 갖다 댔다. 그러자 검의 표면에 떨어진 피가 자국도 없이 사라졌다.

“이걸로 됐습니다. 검은 바로 가지고 가실 거죠?”

화들짝 놀라는 건 재영뿐이었다.

“손 좀 줘보시겠습니까?”

판매자의 정중한 말에 재영은 아무 생각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으려는 찰나.

찰싹.

차진 소리와 함께 판매자의 손이 저만치 내쳐졌다. 재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손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왜, 왜 그러십니까?”

판매자가 매서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사헌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함부로 손대지마.”

사헌이 재영을 끌어안으면서 집 지키는 개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 검의 사용법을 설명 드리고 싶어서…….”

판매자가 식겁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검의 특별한 점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재영은 호기심이 치솟아서 알고 싶다는 눈빛을 담아 사헌을 올려다봤다.

“말로 해.”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판매자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서도 재영을 안은 팔에 힘은 빼지 않았다.

“거, 검을 잡고 보관하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판매자가 위험스럽게 칼날, 그것도 날 끝을 잡고 재영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흉기의 날카로움보다 사헌의 분노가 더 무서운 모양이다. 재영은 덜덜 떨리는 판매자의 손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 단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보관이요? 허리춤에 차는 것…….”

-까지 말했을 때였다. 재영의 손에서 단검이 사라졌다.

“어?”

놀란 재영은 손도 뒤집어보고, 바닥도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단검은 없었다. 대신 손가락에 못 보던 반지가 생겼다.

“혹시 이게…….”

재영이 설마 하는 마음에 판매자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검을 잃어버리셔도 언제든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판매자가 턱을 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정말 손을 잡을 필요는 없었군. 무슨 꿍꿍이지?”

조용히 지켜보는가 싶던 사헌이 눈을 번뜩이며 판매자에게 다가섰다. 조금만 더 놔두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다.

“제가 바로 손을 볼 수 있게 해주시려던 거겠죠.”

재영은 사헌의 팔을 끌어다가 아예 움직일 수 없게 팔짱까지 꼈다. 그리고 판매자에게 눈치를 줬다.

“네, 네. 맞습니다.”

판매자가 재영을 보며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헌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판매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히익-

판매자가 숨을 삼키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빠르게 말했다.

“여기 검 손질과 청결을 한 번에 도와줄 특제 클렌징 티슈를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시면 다음에 꼭 추가 구입해 주세요.”

사헌은 제 팔을 두른 재영의 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재영님께 드린 것은 딱 하나 더 있거든요.”

이러니 저러니해도 그는 숙련된 장사꾼임은 분명해 보였다.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사헌의 입에서 하나 더 달란 말이 나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 * *

재영이 차에 올라타 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리던 사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재영의 손을 끌어가는 것이었다. 깨물어서 피가 나는 손이었다. 그는 선명한 잇자국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긴 해요?”

사헌의 시선을 따라간 재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

칼 같은 부정이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나름 아팠는데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니까 서운했다.

“말이라도…….”

“내 흔적이 남아서 좋은데.”

사헌이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서 재영의 말을 끊었다. 토라진 티를 내려던 재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사헌이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형 흔적이 남은 게 한, 두번도 아니고.”

재영은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지금도 셔츠 바로 아래가 사헌이 남긴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보이는 곳엔 없잖아.”

미간을 확 좁힌 사헌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뱉었다.

“아니. 보이는 데 남기면 안 되죠!”

“왜?”

되묻는 사헌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입을 떡 벌리고 굳을 만큼 당황했다. 재영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 그건……! 너무 부끄럽잖아요.”

결국 재영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시선에서 도망쳤다. 동그란 재영의 머리꼭지를 보던 사헌의 눈이 곱게 접혔다.

“저녁은 뭐 해줄까?”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물었다. 얼굴에 오른 열이 좀 나아졌다 싶은 재영은 고개를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마켓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저녁 때가 훌쩍 다가와 있었다.

“바로 해서 먹을 수 있는 걸로 해야겠네요.”

사헌이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시켜 먹을래요?”

“배달 음식 뭐 좋다고.”

재영은 그게 딱이라는 듯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하지만 사헌에게는 그렇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 형 준비하려면 배고프실 테니까…….”

재영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너 배고파?”

그러자 사헌이 재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재영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이럴 때면 사헌의 생활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많이 고프지는 않지만…….”

겨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사헌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냥 먹고 싶은 거나 말해.”

“딱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럼 마트에 가서 고민하든가.”

그리고 차가 도로에 합류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영은 안전띠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로 옆을 힐끔거렸다.

요즘 재영의 고민은 하나다. 언제,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원래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사헌이 가이드라는 걸 강조할 때마다 매번 아픈 걸 보니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되새겨봐도 사헌 또한 자신을 좋아한다. 재영은 조금 전 사헌이 선물해준 무거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그냥 가이드를 향한 독점욕이라도 상관없다. 그 가이드라는 것도 자신이니까. 누구도 대체할 수 없으니까.

‘S급이라 다행인가.’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 걱정보다는 기대로 콩닥콩닥 뛰었다.

* * *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재영은 신중해졌다.

“너 여자친구한테 고백 어떻게 했어?”

재영은 패밀리 중 가장 먼저 여자친구가 생긴 동준에게 물었다. 뱉어놓고도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너 썸녀 생김?”

민태가 먹던 닭날개를 입에서 툭 떨어뜨렸다.

“형한테 허락은 받았고?”

해운이 사헌을 언급하는 바람에 재영은 움찔했다. 그 반응을 뭘로 알아들은 건지 해운이 혀를 쯧쯧 찼다.

“어떤 사람인데? 나이는? 취향이 어떤 줄 알아야 맞출 거 아니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동준이 참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재영은 동준에게 묻는 게 탁월했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성공한 사람이자 사헌을 잘 아는 그의 팬이니까.

“사헌이 형이 어떤 걸 좋아하는데?”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동시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공주님? 아니지? 그냥 공주님 같은 타입이라는 거지?”

“공주님같은 사람이라니. 취향 독특하네. 너 그동안 어디 끌려갔다가 온 건 아니지?”

현실을 외면하려는 친구들을 빤히 바라보던 재영은 입을 열었다.

“사헌이 형 얘기하는 거 맞는데. 나 형 좋아해.”

동준과 민태의 얼굴을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상식적으로 얘가 진사헌 아니면 누구랑 엮이겠냐?”

해운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친구들을 타박했다.

“다른 사람 만난다고 하면 진사헌이 가만둘 거 같아?”

해운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치를 떨었다.

“아, 아니. 형이 그 정도로 무도한 사람은…….”

사헌을 변호하려던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어제 마켓의 판매자가 손 한 번 잡으려고 했다가 내쳐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영은 머리를 흔들어 애써 그 기억을 지워냈다.

“그리고 형은 가이딩만 제대로 해줘도 별로 신경 안 쓸 걸.”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 우울감이 섞였다. 해운이 그런 재영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둘이 이미 할 거 다 하지 않음?”

오전에도 겨우 침실을 빠져나온 재영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해운은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 그 얼굴을 보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흠흠, 어쨌든 몸에 반응이 있다는 게 이성?적으로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니냐고.”

그럴싸했다. 재영은 눈을 반짝였다.

“가이딩도 골라서 받는 까다로운 인간이 아무한테나 반응한다? 말도 안 되지.”

해운의 말에 재영은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안 그래도 형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닐까, 싶긴 했어.”

재영이 흥분해서 동조하자 해운이 또 싫은 얼굴을 했다. 이랬다 저랬다 복잡한 놈이다.

“근데 진짜 형님이랑 했다고?”

“어땠어? 좋았어?”

뒤늦게 충격에서 벗어난 동준과 민태가 연달아 물었다.

“아니, 엉덩이 쾌락에는 관심 없는데…….”

그러더니 민태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당장 웬 남자가 자신의 엉덩이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걱정마. 아무도 네 엉덩이에는 관심 없을 테니까.”

재영은 다정하게 웃으며 민태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렇게 민태를 안심시켜주면서 고개를 들어 동준을 쳐다봤다.

“그리고 동그리. 너는 누가 네 여친 소식 듣고 했냐고부터 물었으면 좋겠냐?”

“그럼 죽여버리지.”

대답을 들은 재영은 그저 웃으면서 동준은 빤히 쳐다봤다.

“……미안.”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동준이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재영은 화해의 의미로 잘 말은 소맥을 건넸다.

“어쨌든 우리의 선물이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민태가 정말 잘됐다는 듯 말했다. 하여튼 단순한 녀석들이다.

“내가 형이랑 사귄다고 해도 너희는 상관없어?”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 때문에 동성애도 전처럼 숨기는 게 나은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거야 남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척에서 두 남자의 애정을 목도하면 같은 남자로서 아무래도 꺼려지지 않을까. 재영이 친구들에게 먼저 마음을 고백한 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싶어서였다.

“형님이랑 이것저것 다 하면서 애인은 따로 있으면 그게 더 문제 아니야? 좀 문란하잖아.”

민태가 재영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가이딩이 전부 그런 건 아니야.”

“알아. 근데 넌 했다며.”

재영은 이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역시 문제가 될 건 사헌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달하느냐. 그를 어떻게 자신의 남자친구로 만드느냐였다.

“굳이 뭔가 할 필요가 있나?”

“같이 살기까지 하는데…….”

재영은 자신감이 떨어져서 말꼬리를 흐렸다. 고백에 대한 생각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재영은 답답함에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해운이 들고 있던 마른안주를 던졌다.

“뭐, 각인이라도 하게?”

“각인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아?”

재영이 이를 드러내자 해운이 그것 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근데 원래 연애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정해놓고 오늘부터 사귀자, 하는 건 어린애들의 방식이지.”

민태가 뻐기는 듯한 얼굴로 재영을 찔렀다.

“그래서 너는 있고?”

재영은 심통 난 얼굴로 되받아쳤다. 민태가 상처받은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뭣하면 우리 사귀는 거냐고 물어보든가.”

“너무 낭만이 없잖아.”

“아니, 진사헌이랑 사귀면서 낭만을 찾냐?”

해운이 일일이 반응하는 재영을 짜증난다는 듯 쳐다봤다. 어째 저만 심각하고, 다들 대충 넘기고 싶은 주제인 것 같다. 재영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테이블에 올려둔 재영의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빈 안주 그릇을 밀어냈다.

[공주님♥]

“미친.”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해운이 재영의 스마트폰을 내던졌다.

“야이, 미친놈아.”

“미친 건 너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욕에 해운도 지지 않았다. 재영은 질색하는 해운을 내버려 두고 손을 뻗어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

“네, 형.”

재영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운을 노려보던 사나운 눈빛은 지워지고, 배시시 얌전한 웃음만 남았다. 친구들이 또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언제 끝나?

“모르겠어요. 안주 하나가 이제 막 나와서.”

재영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헌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당장 돌아가고 싶기는 했다. 재영은 우울한 얼굴로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알았어.

그런데 짧은 대답에서 재영은 왠지 석연찮음을 느꼈다.

“혹시 기다리고 있어요?”

설마하고 묻자 아주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운동 갔다가 왔어.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형제같은 친구들과 만나는 걸 뻔히 알면서 괜히 전화를 할 사람이 아니다. 함께 집에 가려고 굳이 이 앞까지 왔다가 홀로 가는 사헌의 뒷모습을 생각하자 마음이 짠했다.

“들어올래요?”

재영은 은근히 그랬으면 하는 기대를 담아 물었다. 기겁하며 손을 내젓는 친구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전부 모르는 얼굴도 아니고, 사헌이 불편할 리는 없다.

-그래도 되고.

바라던 대답이 들려오자 환하게 웃은 재영은 사헌에게 몇 호실인지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아니, 그냥 네가 가면 되지! 그 인간을 왜 불러!”

“여기까지 데리러 온 것 같았단 말이야.”

재영은 당장 나가라며 떠미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형도 알탕 좋아해.”

막 나온 데다가 다들 배부르다고 손도 대지 않아서 그대로였다. 대충 자리를 정돈한 재영은 벨을 눌렀다.

“여기 숟가락, 젓가락하고, 잔 하나 부탁드려요.”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감과 거의 동시에 다시 문이 열렸다. 사헌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볼 것도 없이 재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민태가 자리를 옮겼다. 한쪽에 남자 셋이 찌그러져 앉아있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웃겼다.

“많이 마셨어?”

실실 웃는 재영을 본 사헌이 눈으로 술병을 세며 물었다.

“아니요. 이거 다 민태가 마신 거예요.”

사헌이 그럼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시켜.”

“그럴까요?”

재영은 사헌의 제안에 토를 달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왔으니 꽤 출출할 것이다. 단골 가게인 만큼 메뉴를 꿰고 있는 터라 사헌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 직원이 들어와 곁들이 안주를 새롭게 세팅했다. 그런데 곧장 나가지 않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또 사헌이 형 팬인가.’

재영은 흐뭇한 마음으로 직원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기, 김재영 가이드님. 팬이에요.”

그런데 직원이 종이와 펜을 내민 것은 재영을 향해서였다. 저에게 사인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처음이라 재영은 어리벙벙했다.

“아아, 잠시만요.”

계속 팔을 든 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냉큼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사헌이 낚아챈 것이다. 원하지도 않은 사헌의 사인이 휘갈겨진 종이를 돌려받은 직원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형.”

슬픔이 묻은 직원의 얼굴을 확인한 재영은 힐난하듯 사헌을 불렀다. 사헌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재영을 돌아봤다.

“우리 형이 장난기가 좀 많아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직원이 종이를 구길 듯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을 뺐다.

‘어떻게 해야 되지?’

재영은 펜을 잡은 손을 움찔거리며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지금껏 해본 사인이라고는 체크카드 5만원 이상 결제한 것과 계약서 같은 서류에 대충 휘갈긴 것뿐이었다.

“제가 사인이 따로 없는데 그냥 이름 써드려도 될까요?”

“네, 네! 당연하죠!”

재영은 다른 때보다 신중하게 한 획, 한 획을 그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끝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재영은 환하게 웃으며 사인지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격한 반응에 재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이름 좀 써준 건데 뭐가 그리도 좋을까 싶었다.

“오올.”

“미친, 김재영. ‘그냥 이름 써드려도 될까요?’. 무슨 신인 연예인인 줄.”

사인을 품에 안은 직원이 나가자마자 친구들이 귀가 터져나갈 것처럼 시끄럽게 재영을 놀려댔다.

“유언은 그게 끝?”

그때 사헌이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달아오른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가라앉았다.

딸꾹.

민태가 몸을 들썩였다. 눈치도 없는 딸꾹질이 계속 나왔다.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인 사헌이 맥주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셔. 딸꾹질 오래하면 죽는다는 말 못 들었나?”

민태가 사약을 받아드는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사헌에게 손가락 하나 닿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짠했다. 눈을 질끈 감은 민태가 잔을 크게 꺾었다.

푸웁!

“으악! 미친놈아!”

민태가 입으로 뿜어낸 분수를 맞은 친구들이 정색하며 그를 때렸다.

“뭐였어요? 설마 소주는…….”

재영은 걱정된다는 눈으로 민태를 힐끗거리면서 물었다.

“사이다야.”

술이 아니면 됐지, 하고 마른 안주를 입에 넣던 재영은 다시 뜨악한 얼굴로 사헌을 돌아봤다.

“따라둔 거니까 탄산 좀 빠졌을 걸.”

사헌의 말 뒤에 ‘아마도’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형은 진짜 위험한 사람이에요.”

“고작 이 정도로?”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입술을 비틀었다. 재영은 아, 하고 짧게 탄성을 흘렸다. 마음만 먹으면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점점 더 깊어지는 눈을 보며 재영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도 저한테는 안 그럴 거잖아요.”

그러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사헌이 가늘어진 눈으로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내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모르지. 너한테는 더 위험해질지도.”

사헌이 바로 옆에 있는 재영이 아니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묘한 눈빛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예민한 허벅지 안쪽에 감각이 느껴졌다. 불에 댄 것처럼 몸을 튕긴 재영은 그 느낌을 쫓아 눈을 내렸다. 허벅지 사이에 사헌의 손이 들어가 있었다.

놀란 눈으로 다시 사헌을 돌아보자 그 반응이 기꺼웠던 모양이다. 한층 짙은 미소를 지은 그가 더 깊이, 더 은밀한 곳으로 손을 움직였다.

‘애들도 있는데……!’

점차 숨이 가빠졌다. 재영은 숨을 참으며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친구들은 민태가 뱉어 낸 사이다를 닦아 내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사헌의 손이 보다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직접 손을 치워 내면 될 텐데, 그건 재영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중심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손이 바지 허리춤에 닿았다. 곡예를 하는 것처럼 바지선을 따라가더니 가운데서 멈췄다.

“형.”

재영은 그제야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고 말리는 어조로 내뱉었다. 사헌의 손가락이 노크하는 것처럼 가볍게 툭툭 건드리는 것은 바지 버클이었다. 긴장감으로 아랫배가 수축했다.

“둘이 사귀어?”

그때 툭 던져진 말에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던 재영의 몸이 위로 튀었다. 해운이 여상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뭐? 갑자기 그게 무슨…….”

혹시나 해운이 테이블 아래 사정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재영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사헌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확 좁혔다.

“반응이 이상한데…….”

달갑지 않은 듯한 재영의 반응에 말꼬리를 흐린 사헌이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다. 재영은 긴장한 고양이처럼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마침내 사헌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사귀지도 않는데 엉덩이 구…….”

노골적인 표현에 화들짝 놀란 재영은 사헌의 입을 틀어막았다. 단둘만 있을 때도 듣기 버거운 말을 제 친구들이 있는 장소에 듣게 되다니.

‘형은 수치심도 없냐구요.’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재영은 눈빛으로 사헌을 다그쳤다.

“아무한테나 핥게 둘 거냐고.”

불만 어린 눈빛을 한 사헌이 기어코 재영의 손을 떼어 내고 말을 내뱉었다. 동시에 경악한 시선이 모였다. 재영의 얼굴이 타올랐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머릿속에 뭐가 떠올랐는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만 싶었다.

“어, 그,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뒤늦게 민태가 덕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재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도피를 시도했다.

* * *

재영은 사헌이 훈련받는 동안 길드 건물 내 휴게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앉을 자리만 있는 센터와 달리 컴퓨터도 여러 대 있고, 다양한 종류의 책과 먹고, 마실 것까지 있어서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사냥물을 팔고, 다음 퀘스트를 향해 둥실둥실 날아가고 있을 때였다.

“저기…….”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휴게소에는 재영뿐이었다. 게임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저를 부른 거라는 걸 깨달은 재영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아, 안녕하세요.”

그곳에는 소심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연호가 있었다. 저번 던전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먼저 부른 것치고 재영의 인사에 대답도 없었다.

‘그냥 인사하려고 부른 건가?’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호의 입은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말 없으시면…….”

“아니……!”

재영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연호가 다급한 기색으로 손을 뻗었다.

드디어 용건을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연호는 그대로 다시 굳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재영의 어깨 너머, 조금 높은 곳으로 향해 있었다.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의아함을 느낀 재영은 뒤를 돌아봤다. 사헌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샤워는 건너뛰고 당장에 달려온 듯 진한 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급하게 입을 연 재영은 다음에 얘기해도 되겠냐고 말하려고 다시 연호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휑하니 비어 있었다.

“쟤랑 왜 놀아.”

사헌이 어딘가를 노려보며 툭 내뱉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자 도망치듯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연호가 보였다.

“아니, 논 건 아닌데요.”

재영은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호에게 일방적으로 부름을 당했다가 또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이상한 사람이랑 노는 거 아니라는 건 유치원 때 배우지 않았나?”

게다가 사헌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얼른 집으로나 가요. 땀 냄새 때문에 어지러워.”

재영은 사헌의 팔을 잡고 당겼다. 하지만 평소처럼 쉽게 따라오지 않았다.

“왜? 너 내 땀 냄새에 환장하잖아.”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사헌이 정말 환장할 말을 내뱉었다. 재영은 주변을 휙휙 살폈다. 연호까지 도망치듯 가 버린 후로 휴게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아, 그래서 어지러운 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사헌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당황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전날 밤, 땀으로 범벅된 사헌의 가슴팍에 코를 묻은 자신을 떠올리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실컷 맡게 해 줄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사헌이 재영의 팔을 끌었다. 재영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가볍게 끌려갔다.

* * *

지글지글.

동그란 프라이팬 위에서 붉은 양념을 입은 쭈꾸미와 대패 삼겹살이 뒤섞였다. 직원의 능숙한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영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죄송해요!”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재영을 바라봤다. 달궈진 양념이 재영의 옷으로 튄 것이다. 하필 하얀 티를 입고 있어서 자국이 선명했다.

“괜찮아요.”

재영은 당혹스러워하는 직원을 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옆자리의 사헌에게 말하자 그가 따라 일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진짜 금방 올 거예요. 화장실이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재영은 사헌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렸다. 길드로 옮겼다고 해서 사헌의 과보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30초 내로 안 오면 찾으러 간다.”

사헌이 재영의 손을 떼어 놓지 못하고 으르렁대며 말했다.

“아니, 가는 데만 30초……!”

“하나, 둘, 셋.”

어이없어하는 재영을 뒤로 하고 사헌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 진짜…….”

재영은 서둘러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신사 그림이 그려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변기 세 개와 양변기 칸 세 개가 있었다. 그중 제일 끝에 있는 칸만 사람이 있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재영은 세면대 앞에 서서 양념이 튄 부분을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빠지려나.”

하필 하얀 티를 입고 와서는.

붉은 양념은 지워지지는 않고, 넓게 번지기만 했다. 회식 메뉴가 뭔지 몰랐다고는 하나, 함께 나온 앞치마를 걸치지 않은 건 분명 제 부주의다.

“세탁기로 돌리면 좀 빠지겠지.”

손끝이 얼얼해지는 느낌에 재영은 그냥 포기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문득 닫혀 있는 화장실 칸이 신경 쓰였다.

‘속이 안 좋으신가? 혹시 쓰러진 건 아니겠지?’

재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거울 속, 등 뒤를 힐끔거렸다. 그가 들어온 이후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기, 괜찮으세요? 구급차 불러 드릴까요?”

망설이던 재영은 문 앞에 가 노크하며 물었다.

철컥.

곧 쇳덩이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걸쇠를 풀고 나오려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모양이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의 사람이 나올 수 있게 한발 물러섰다.

“45초 초과.”

천천히 열리는 문을 지켜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자 사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에…….”

재영은 변명을 위해 앞의 문을 가리켰다. 그런데 열리는 것 같던 문이 입 다문 조개처럼 꽉 닫혀 있었다.

“문 뜯어 줘?”

재영의 시선을 따라간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아, 잠깐 여쭤 보고요.”

재영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사헌이 화장실 문을 뜯는 게 먼저였다.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재영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구석에 찌그러져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람은 연호였다. 그래도 바지를 벗고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다.

“어디 안 좋으세요? 부축이라도 해 드릴까요?”

재영은 우선 손을 내밀었다. 언제부터 연호가 자리에 없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혹시 숨어 있던 건가? 회식 자리가 불편해서?’

그때 던전에서의 일로 연호를 보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건 재영도 느꼈다.

“괘, 괜찮습니다!”

연호가 사헌을 지나쳐 재영의 어깨를 밀치고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재영은 반쯤 넋이 나가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변비인데 들켜서 민망하셨나……?”

재영은 확신 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쎄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 * *

“이상해.”

볼펜으로 교재를 툭툭 두드리던 재영이 작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요즘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주 보여.”

몰래 폰 게임이나 하고 있던 민태가 재영을 돌아봤다.

“설마 너…….”

가늘게 뜬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재영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미간을 좁혔다.

“형님 두고 바람난 건 아니겠지?”

“미쳤어?”

단번에 정색하자 민태가 민망한 듯 코밑을 문질렀다. 말 그대로 ‘보인다’고 다시 한번 말하자 민태의 표정이 변했다.

“여자야?”

“아니, 남자.”

“그럼 그냥 네 착각 아니야?”

재영을 쫓아다니는 누군가가 여자가 아니라는 것에 민태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재영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제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연호의 태도는 정말 이상했다.

늘 주변에 있다가 재영이 혼자 있는 때만 노려 말을 걸었고, 사헌이 나타나면 몸을 뺐다. 사헌을 무서워해서 그를 피하는 사람이 연호만은 아니다.

‘그것도 아니라 그냥 낯가린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상하게 불길했다. 재영은 볼펜 끝을 잘근거리며 고민했다. 사헌에게 말하고 싶은데, 또 과민하게 굴까 봐 쉽지 않았다.

“김재영 가이드님.”

그때 옆에서 누군가 재영을 불렀다. 옆을 돌아본 재영은 놀라는 대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연호다.

연호가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 같은 태도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저, 드릴 말씀이…….”

마침내 연호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려는 때였다.

“거기 자네.”

교수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재영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의 손끝은 연호를 향해 있었다.

단박에 쏠리는 시선에 연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전공인 데다가 교수가 워낙 괴팍한 것으로 유명해서 듣는 사람도 많지 않은 강의다. 아무리 무심한 교수님이라도 연호가 수강생이 아니라는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친구가 청강하러 왔다고 해 줘야 하나?’

재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연호를 힐끗 살피곤 입을 열려고 했다.

“자네, 교재는 어디에 뒀지?”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재영의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앞의 사람이 수강생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는 모양이다. 자신이 직접 집필한 교재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모양이다.

“네?”

김빠진 재영만큼이나 연호도 넋이 나가 있었다.

“이름이 뭐야. 무슨 학과.”

못마땅한 듯 혀를 찬 교수가 출석부를 꺼냈다. 당황한 연호가 다급하게 의자를 뒤로 밀었다.

“다,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재영의 귓가에 던지듯 내뱉고는 꽁지가 빠져라, 강의실을 벗어났다. 재영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영과 김재영 학생.”

채 닫히지 않은 문을 황망히 바라보던 재영의 등 뒤로 음산한 물음이 따랐다.

“네!”

이미 연호가 뒤틀어 놓은 심기가 더 상하기라도 할까 봐, 재영은 냅다 팔을 들며 대답했다.

“아는 학생인가?”

아는 사람은 맞지만, 같은 학교의 학생인지는 모르겠다. 수강생도 아닌 연호가 왜 이 강의실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제게 할말이 있어 온 것이라는 거다.

“아닙니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엮여서 교수님께 이유도 없이 미움받고 싶지는 않다.

“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구만.”

교수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이 일로 교내 경비실에 클레임이 갈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재영은 교수의 시선을 피하려고 교재로 눈을 떨궜다. 자연스럽게 연호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저, 드릴 말씀이…….”

생각해 보면 사헌이 없을 때만 노려 접근하는 것 같다. 화장실에서, 길드 휴게실에서 말을 걸다가도 사헌이 나타나면 도망치기 일쑤고.

‘절대 혼자 있으면 안 되겠네.’

재영은 마음 깊이 연호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다.

* * *

재영은 바로 아랫집에 사는 윤서의 초대를 받아 푸짐한 식사를 끝내고,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는가 싶던 윤서가 호들갑을 떨며 채널을 돌렸다.

-……이렇게 굉음을 내며 진동합니다.

화면에는 거대한 왕릉 같은 던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리포터의 말대로 던전 바깥이 부화하는 알처럼 떨렸다.

-현장에는 센터의 상위 에스퍼들이 진입을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는 기자의 얼굴은 참담하기만 했다. 벌써 네 번째 진입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C급 에스퍼 둘이 죽었고, 중상자도 셀 수 없이 발생했다. 그래서인지 진입을 앞에 둔 에스퍼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보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주어진 시간까지 던전의 크리처를 전부 처치하지 못하면, 던전은 폭발한다. 그리고 던전 내부에 있던 크리처가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아직 체계가 잡히기 전, 그로 인한 일반인들의 사상이 팬데믹 수준이었다.

“커뮤니티에서도 난리야. 다른 길드는 도와주지 않는 거냐면서.”

커뮤니티의 반응을 읽던 윤서가 사헌을 힐끔 훔쳐봤다. 아마 그가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 많을 것이다. 사헌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툴툴댔다. 사헌이 아직도 센터 소속인 것도 아니고, 그 지역 거주자도 아닌데, 오직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타 단체는 던전을 선점한 단체의 요청이 있을 때만 끼어들 수 있다.

이어 나래시의 주민들이 차 지붕에 짐을 잔뜩 이고 피신하는 모습들이 카메라에 비쳤다.

“센터야 자기들이 고집부리는 거니까 자업자득이라고 쳐도, 명령에 따르는 에스퍼나 국민은 애먼 죽음이지.”

재효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영과 윤서의 얼굴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순간.

사헌의 워치가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사헌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몸을 일으켰다.

“뭐 해. 출동 준비 안 하고.”

“신고 들어왔어요?”

재영은 절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헌이 다른 던전에 진입하게 되면, 센터에서 뒤늦게 요청하더라도 도울 수 없게 된다.

“지원 요청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사헌이 재영의 턱 밑을 살살 간질였다.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챈 재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 *

센터로 모인 팀원은 재효의 힘으로 눈 깜짝할 새에 나래시 던전 앞으로 옮겨졌다. 큰 힘을 소모한 재효는 곧장 윤서와 함께 현장 한편에 마련된 가이딩 텐트로 향했다.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기자들이 옆을 지나치는 하랑 길드원들에게 붙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상황이 긴박한 만큼 던전 진입 전에 하던 인터뷰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당신들하고 노닥거릴 만큼 우리가 한가해 보입니까?”

단연 많은 마이크가 향해 있는 사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도 그가 대답해 줬다는 것에 희망을 얻었는지 기자들이 엉겨 붙어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왜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센터와 하랑 길드 사이의 줄다리기가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터전을 잃을지도 모르는 나래 시민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앞선 말은 들은 적도 없는 것처럼 넘기던 사헌이 마지막 질문에 돌연 멈춰 섰다.

“내 목숨보다 그 사람들 터전이 중요합니까?”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질문한 기자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 하지만 진사헌 에스퍼님은 S급…….”

“S급은 사람 아닙니까?”

평소처럼 건방진 태도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을 들으려다가 절망만 더하게 된 셈이다. 사헌이 굳어 버린 기자를 보며 혀를 찼다.

“괜히 구경한다고 남아 있지 말고, 당장 짐이나 싸세요.”

사헌의 힐난에 기자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을 홉떴다. 사헌이 성공을 확신할 수 없으면서 목숨 걸고 가는 길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내 기자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제 일이 그거니까요.”

“……뭐, 그러시든가.”

사헌이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는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멀찍이서 지켜보던 재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김재영.”

재영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이번 진입에 재영을 비롯해 가이드들은 빠져 있기로 했다. 최대한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 하랑 길드의 목표이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여 속도를 높이기로 한 것이다.

동그란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던 손이 목 위쪽에서 멈췄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헌이 몸을 낮춰 재영의 입술을 삼켰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귀가 아프게 들려왔다. 하지만 재영은 사헌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까치발까지 돋워 더 짙은 입맞춤을 나눴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

사헌이 아쉽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재영은 미간을 확 좁혔다.

“싫어요. 형이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반겨 줄 거니까.”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도 재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어차피 브레이크가 일어날 일은 없으니까.”

기자들에게 해 주지 않던 말을 재영에게는 당당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불안하게 널뛰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신이 있는 이곳을 사헌이 어떻게든 지켜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니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알겠어요.”

재영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사헌이 계속 머뭇거렸다. 그의 등 뒤로 초조해진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얼른 가요. 그래야 빨리 오지.”

버티려고 한다면 꿈쩍도 하지 않을 테지만, 사헌은 재영의 손길에 기꺼이 밀려나 줬다. 재영은 입구까지 눈을 떼지 못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내 하랑 길드원을 집어삼킨 던전이 잠잠해졌다.

‘우리 형, 다치지 말아야 하는데…….’

재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헌을 떠올리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사헌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 * *

사헌을 대장으로 둔 하랑 길드의 팀이 던전에 들어간 직후부터 재영은 대기소에 마련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전에 들어간 팀들이 마냥 논 것은 아닌지 꽤 오래도록 크리처가 등장하지 않았다.

“앗, 뜨거!”

두 주먹을 꼭 쥐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봤다.

“죄, 죄송합니다. 거기 계신 줄 몰랐어요.”

거기에는 연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 있고, 류혜리 가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재영은 당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세트로 입은 회색 트레이닝복 한편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데였어요?”

재영은 일단 옷 끝을 잡아 피부에서 떨어지게 했다. 혜리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 벗고 찬물로 헹궈 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재영은 정수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등을 밀었다.

“일단 모두 나가요.”

놀라서 정신이 없는 혜리보다 멀쩡한 사람들이 나가는 게 빠르고, 효율적일 것 같았다.

“제가 냉수 받아 올게요!”

나래시까지 함께 온 길드 가이드 중에 여성이 몇 있는 게 다행이었다. 재영은 미련 없이 텐트를 벗어났다.

“아, 쏟은 사람은 괜찮은가?”

뒤늦게 든 생각에 재영은 연호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빈 종이컵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이 창백했던 것이 영 눈에 밟혔다.

“김재영 가이드님.”

그렇게 연호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재영을 부르며 손목을 붙들었다.

“네? 누구…….”

당기는 힘에 돌아본 재영은 낯선 얼굴을 보고 발을 뒤로 뺐다. 그때 이미 재영의 눈앞은 이지러지고 있었다. 순간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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