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4권) (15/20)

15.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길드장을 보며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4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어 보였다. 미리 검색해 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삼십 대 초반인 제 누나들과 비슷한 나이대라고 생각했을 거다.

“아!”

갑자기 손을 옥죄는 힘에 재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에스퍼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재영은 한순간에 자신을 관심종자로 만들어 버린 사헌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시선이라도 좋은지 사헌의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안 그래도 경이로운 외모가 한숨이 나올 만큼 빛을 냈다.

사헌의 검은 눈동자가 저에게 홀린 재영의 얼굴을 훑었다. 하나도 놓치기 싫다는 듯 집요하고, 세심한 시선이다. 사헌의 의도대로, 재영은 저를 향한 욕심으로 그득한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정면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재영은 이곳이 사헌과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길드장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사헌과 재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김재영이라고 합니다.”

재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꼬시려 드는 사헌과 다니려면 저도 뻔뻔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사헌입니다.”

재영의 시선을 빼앗겨 버린 사헌이 속으로 혀를 차며 마지못해 내뱉었다.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진사헌 에스퍼님, 김재영 가이드님.”

조급한 투로 내뱉은 길드장이 소파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으라는 눈치여서 재영은 사헌을 끌고 가서 앉았다.

“차는 뭐가 좋아요? 커피? 주스? 아니면 허브티 종류도 있으니까 말만 해요.”

소파를 지나 방구석으로 간 길드장이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며 물었다. 거기에는 간단한 카운터와 커다란 벽장이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종류가 다른 병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거의 탕비실 수준이다.

“찹쌀떡, 바닐라 라떼 좋아하지?”

사헌의 말에 컵을 꺼내 늘어놓던 손이 멈췄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카페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처음 뵙는 분 앞에서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허브티도 괜찮습니다. 종류는 아무거나 추천해 주세요.”

재영은 다시 말을 내뱉으려는 사헌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실실 웃었다. 그런데 이내 손가락 안쪽이 축축해지면서 간지러워졌다. 아연한 얼굴로 돌아보자 새빨간 혀가 손가락 사이에서 날름거리고 있었다.

“으아, 형……!”

재영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듯 속삭이며 손을 뗐다.

“내가 네 손가락 핥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좀…….”

사헌이 눈을 깔고 수줍은 양 웃었다. 졸지에 재영에게 낯부끄러운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처럼 되어 버렸다.

“자신만만했는데 아직 부족했어요.”

한쪽에서는 길드장이 자신의 준비가 미흡했음을 고백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재영은 그녀가 이 민망한 상황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닐라 라떼는 생각지도 못했네요. 내가 부족했어요. 핸드 드립을 좋아해서 커피 머신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생각해 봐야겠어.”

길드장이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이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차를 준비하는 걸 취미로 여기는 느낌이어서 재영은 말리지 않기로 했다.

“준비되시면 그때 다시 마시러 올게요. 오늘은 그냥…… 추천해 주시는 거 먹을게요.”

재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길드장이 기꺼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한 잔 부탁드립니다.”

사헌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물이어도 상관없지만, 그랬다가는 되물을 것이 귀찮으니 대충 아무거나 부른 모양새였다.

그리고 길드장의 시선이 방 안에 있는 마지막 사람에게로 향했다.

“넌 안 가니?”

길드장은 서훈을 아예 손님으로도 취급 안 했다. 사장과 직원이라기엔 허물없는 투였다.

“일정 없습니다.”

“없으면 집에 가. 친구들이랑 놀든가.”

길드장이 귀찮다는 듯 손을 팔랑팔랑 내저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에스퍼를 성가진 꼬마 대하듯 하는 모양새다. 재영은 그 두 사람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번갈아 봤다.

“없습니다.”

반복되는 대꾸에 길드장이 노골적으로 싫은 얼굴을 했다.

“가서 너 좋아하는 훈련을 하든가! 좀 가!”

그제야 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터덜터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쫓겨나는 뒷모습이 유난히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아는 척을 해 봤자 사헌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다. 그가 화를 낼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소유권을 주장한답시고 사람들 앞에서 또 무슨 짓을 할지가 두려웠다.

직후부터 길드장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거…… 내가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야?’

재영은 눈을 번뜩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런 그를 발견한 사헌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불안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얼굴이 홧홧해진 재영은 맞잡은 손만 꼼지락거렸다.

“계약서 사본은 확인하셨습니까?”

그 꼴을 보기 싫다는 듯 날 선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재영은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추가로 원하는 게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 주세요.”

그게 뭐든 들어주겠다고, 길드장이 당당하고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사헌이 재영을 돌아봤다.

“그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아요.”

재영이 대답하자 사헌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대답할 일이 생기면 사헌의 시선이 재영에게 닿았다. 재영은 모든 결정 권한이 제게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좋은 조건도 많았을 텐데 하랑 길드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재영이 결정권자라는 걸 확실히 깨달은 길드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S급 에스퍼와 가이드를 모두 모실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아,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하죠.”

재영은 몸 둘 바를 몰라 꾸벅꾸벅 마주 절을 했다. 사헌이 재영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더 꾸벅이지 못하게 했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조건이었어요. 만나 본 분들이 전부 좋은 사람이었고, 또 훈이와는 과 동기라서 친근하고요.”

반강제로 인사를 멈춘 재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으로 사헌의 표정이 사진처럼 그려졌다. 재영은 달래듯 사헌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진사헌 에스퍼님이 오시면 센터로 몰렸던 신고 요청도 이쪽으로 올 겁니다.”

길드장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다. 재영 자신이라도 무슨 일이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헌을 찾을 것 같다.

“신고 건을 전부 맡는 건 시간 낭비고, 또 재능 낭비라고 봐요. 던전 탐험 말고도 할 일은 많잖아요?”

길드장이 사헌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길드에는 센터만큼의 인원이 없다. 던전 발생은 급한 사안이라 차례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구역을 나눠서 다른 길드에 협조를 요청할 예정이에요.”

던전을 독식하지 않겠다니.

던전을 클리어하면 국가에서 보상금을 줄 뿐 아니라, 던전에서 나오는 부산물도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큰 수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남과 나누겠다니. 재영은 놀라서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혹시 이에 대해 이의 있나요? 모든 던전을 내가 가져야겠다든가, 전투 기회를 뺏기고 싶지 않다던가.”

사헌의 반응을 살피는 길드장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여유가 생기면 그 시간에 뭘 할지 고민해야겠군요.”

사헌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동의하셨으니 타길드에도 연락 돌리겠습니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지만, 길드장이 만족하고 있다는 건 여실히 느껴졌다.

‘하랑으로 하길 잘했어.’

당장 뭘 한 것도 아닌데 뿌듯함이 차올랐다. 이제 이런 곳에 소속되는 것이다.

“아참.”

슬슬 일어나야 하나 고민하는 차에 길드장이 두 사람의 앞에 태블릿을 내밀었다. 윤서가 센터에 있을 때 받은 것과 비슷해서 생소하지 않았다. 길드장이 팔을 뻗어 길드 관련 앱을 누르고 몇 개의 카테고리를 거쳐 일정표를 켰다.

“두 사람 다 매칭 스케줄 뽑아야 하니까 돌아가서 일정 작업해서 업로드 해 주세요.”

“아…….”

새로운 무리에 들어왔으니 모든 것을 새로 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행위를 또 반복해야 한다니. 재영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매칭은 필요 없습니다.”

얌전히 받아들인 재영과 달리 사헌이 차갑게 잘라 내듯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리는 페어에게서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특수한 상황까지 대비해야 합니다.”

길드장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가 말한 ‘특수한 상황’을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번 변이 던전에서처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이 사헌의 곁에 없다면. 재영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할 거예요.”

사헌의 손을 꽉 잡은 재영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사헌이 미간을 좁히고 돌아봤다. 하지만 아까처럼 단칼에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형만 하라고 하면 불공평하니까 저도 할게요.”

재영이 덧붙인 말에 사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더 불공평해.”

사헌이 아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게 기본적인 규칙이잖아요.”

재영은 투정 부리지 말라는 듯 다정한 어투로 사헌을 다그쳤다.

“그러면 두 분 다 매칭 테스트를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재영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세라 길드장이 빠르게 말하며, 태블릿을 그들 쪽으로 밀었다.

“언제 어느 때든 가이딩은 본인의 의사가 우선입니다. 그건 분명하니 걱정 마세요.”

길드장이 사헌을 달래듯 말했다. 같은 에스퍼라 가이드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는 모양이다.

“매칭 결과가 어떻든 제가 형만 가이딩하겠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재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사헌을 보며 길드장의 말에 보탰다.

“네가?”

그러자 사헌이 잘도 그러겠다는 듯 비소를 머금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온다면 외면할 수 있을지 자신도 장담하기 힘들긴 했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형 있는 곳에서, 형 허락받고 할게요.”

재영은 보다 현실성 있게 말을 바꿨다.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기는 아쉬울 텐데, 길드 시설이라도 좀 둘러보고 갈래요?”

상황이 정리됐다고 여긴 길드장이 제안했다. 계약서에 도장 찍고 한 식구가 돼서인지 처음 볼 때보다 친근한 목소리다.

“안 그래도 건물이 엄청 커서 구경하고 싶었어요.”

재영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길드장이 그런 재영을 보고 다정한 미소를 짓더니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훈 에스퍼.”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훈을 쫓아낼 때는 언제고, 밖에서 대기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부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길드장의 시선을 쫓았다. 아까 쫓겨나서 가 버린 줄 알았던 서훈이 길드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길드장의 애정 어린 타박을 무시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란 건 재영뿐이었다. 길드장은 물론이고, 사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다.

“두 사람 길드 안내나 좀 해 주고 집에 가.”

제 지시를 어긴 것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이렇게 기회까지 주는 걸 보면 서훈을 꽤나 특별히 여기는 모양이다.

“둘러보는 건 저희끼리도 할 수 있어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헌이 나쁜 소리를 내뱉기 전에, 재영이 먼저 나서서 거절했다. 서훈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미안해서 가슴 한구석이 콕콕 쑤셨다. 하지만 그것까지 받아들이면 사헌의 심기가 완전히 뒤틀릴 것 같았다. 힐끔 살펴보니 사헌은 대견하다는 듯 재영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큼 말랑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길드장이 놀랍다는 듯, 한편으로는 재미있다는 듯 작게 미소 지으며 재영을 쳐다봤다.

“그럼 이만.”

사헌이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재영을 끌고 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미안.’

재영은 서훈을 스쳐 가며 입 모양으로 사과했다. 그래도 재영에게는 사헌이 우선이다.

“그냥 가게요?”

재영은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물었다. 길드장실을 나온 사헌이 입구 쪽으로 발을 옮긴 것이다. 여전히 손이 잡힌 터라 재영은 그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리셉션에 안내 책자 있던데 그거라도 가져가자.”

재영을 내려다본 사헌이 짐짓 다정한 투로 말했다. 훈에게 안내받지 못하게 한 것이 은근히 마음 쓰였나 보다.

“1층에는 전용 병원하고 긴급 가이딩실이 있대요.”

재영은 리셉션에서 챙겨온 안내 책자를 보면서 말했다. 당장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큰 부상을 입은 에스퍼는 스스로 회복할 힘조차 내지 못한다. 전용 병원은 그런 상황을 대비해 응급 치료를 진행한다고 쓰여 있다.

첨부된 수술실 사진을 본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센터는 학교 보건실과 비슷한 정도였는데 이곳은 아예 본격적이다.

“그건 좀 괜찮은데.”

재영의 옆에 찰싹 붙어 팸플릿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사헌이 갑자기 툭 내뱉었다.

“그렇죠?”

재영은 그가 제 말에 동의하는 줄 알고 눈을 반짝이며 돌아봤다.

“응. 환자복 입고 해 보고 싶어.”

사헌이 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순한 이유에 재영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형은 무슨 생각을…….”

“응급 치료를 끝내면 가이딩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사헌이 빙글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재영의 얼굴에서 당황한 기가 가셨다. 열기가 확 식었다.

‘그래. 형한테 그건 그냥 가이딩이었지.’

갑자기 재영의 어깨가 축 늘어지자 사헌이 미간을 좁히며 쳐다봤다.

“왜? 뭐가 맘에 안 들어? 네가 환자 할래?”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말에 완전히 김이 빠졌다.

“얼른 가요.”

재영은 뚱하니 내뱉고 발을 뗐다.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사헌이 빠른 걸음으로 재영을 쫓았다. 금방 따라잡은 사헌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재영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은 왜 놓아.”

“그냥요.”

재영은 심통이 난 얼굴로 툴툴거렸다. 사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가시를 세우는데 이유는 모르겠고, 답답하긴 할 테다.

재영은 가라앉은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다른 일이었다면 마음에 묵혀 두는 대신 솔직하게 말하고 털어 냈을 거다.

‘그러다가 튕겨지는 건 나였고.’

마음을 털어놨다가 성가시게 군다고 밉보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재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속이 좁아지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제 본모습을 이제야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재영은 절대 괜찮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 앞선 등을 사헌이 날카로운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 * *

철 지난 예능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이나 흘리는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요즘 들어 자주 느껴지는 것이라 재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고정했다.

“결혼할래?”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는 저도 모르게 제자리서 튀어 오르고 말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재영은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뗐다. 하지만 사헌의 얼굴에서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나 설렘이 보이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흥분한 자신만 바보됐다.

“그런 말 안 해도 페어 안 바꿔요.”

하지만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재영은 숨이 가빠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사헌이 못마땅한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내가 뭐…….”

“매칭 테스트 결과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재영은 사헌의 말을 끊고 말했다. 예상대로 서훈과의 매칭률은 73퍼센트로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사헌만큼은 아니어도 길드 전체가 술렁일 정도였다. 지금껏 높아 봐야 50퍼센트 언저리라고 하니 재영의 가이딩을 받아 본 훈이 눈이 뒤집힌 것도 그럴 만했다.

“그럼 각인?”

결혼을 거절하자 사헌이 더 무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결혼은 돌이킬 수라도 있지. 각인은 마음이 바뀌어도 페어를 바꿀 수 없다. 각인한 에스퍼는 그의 짝 말고는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을 수 없다.

“그것도 싫어?”

굳은 얼굴에서 대답을 읽어 낸 사헌의 입술이 비틀렸다. 단단히 심기가 상한 것이다. 사실 가이드는 각인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 가이딩을 안 한다고 어떤 패널티를 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재영이 각인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건 에스퍼인 사헌을 위해서다.

사헌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키스해.”

그러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재영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내리떴다. 부끄럽지만 그걸로 사헌이 안심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아.’

재영은 앉아 있는 사헌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혔다. 사헌의 다리 사이 틈이 좁아서 몸을 끼워 넣을 수 없고, 반대로 제 다리 사이에 사헌의 허벅지를 끼는 건 무리였다.

곤란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그는 무표정으로 재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 저변에 깔린 어떤 감정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상체가 맞닿자 사헌의 검은 눈동자가 이질적인 빛으로 번들거렸다. 사헌의 볼을 감싼 손바닥이 뜨겁다. 그게 누구의 열기인지 알 수 없었다.

재영은 머뭇머뭇 다가가 고개를 비틀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눌렸다.

“하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숨이 뜨거워졌다. 재영은 숨을 고르고는 혀를 꾸물꾸물 밀어 넣었다. 그때까지도 사헌은 움직임이 없었다. 재영은 입안에 차오른 사헌의 숨을 꼴깍 삼켰다.

움직임이 없는 사헌을 제멋대로 희롱하고 있다는 생각에 배 속이 열기로 들끓었다. 재영은 한 손으로 사헌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의 입천장을 핥았다. 맞닿은 가슴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느끼고 있어.’

제 손길에 반응하는 사헌을 보고 있으니 환희가 차올랐다. 재영은 고개를 틀고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축축한 혀가 얽히는 질척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재영의 뒷목을 감싸고 있던 사헌의 손이 목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네크라인 아래로 손가락이 들락거렸다.

손가락이 조금씩 깊이 들어와서 그 끝이 예민한 곳을 스칠 것 같았다.

“혀, 으응…….”

몸 안의 모든 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뱉어지는 것 같다. 분명 시작은 재영이었는데 어느 순간 주도권이 넘어가 있었다. 쾌감에 약한 재영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흐려진 눈동자를 보는 사헌의 얼굴이 서늘했다.

* * *

재영은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지선 밖에는 기자들과 구경꾼으로 북적였지만, 진입을 준비하는 던전 입구는 오히려 차분했다.

“진사헌 에스퍼님과 던전에 진입할 수 있다니. 오늘 일기 꼭 쓸 거예요.”

낯선 에스퍼가 사헌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재영은 복잡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길드로 옮긴 후부터 사헌에게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헌을 따라 센터에서 나온 사람이 전부 ‘하랑 길드’로 온 것은 아니다. 각자 고향에 적을 둔 길드로 흩어졌다.

던전이 수도권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니 에스퍼가 분산되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출동 시간을 아낄 수 있어 피해도 크게 줄었다.

그러자 사헌을 향한 국민들의 선호도가 대통령을 넘어설 정도가 됐다. 미국에서 그를 데려가기 위해 어떤 조건들을 붙였었는지가 알려지면서 거의 무슨 대천사 수준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사헌을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게 된 게 다행이긴 한데, 또 그의 다정함을 알고 저처럼 가까워지고 싶어 할까 봐 두려웠다. 재영은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하게 찌그러진 얼굴로 뒷목을 주물렀다.

‘속 좁다, 김재영.’

길드의 사람들이 사헌에게 관심을 보일 때마다 이 모양이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헤맨 건 처음이다. 팀원이었던 몇 중에 사헌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팀의 팀장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빠져나간 인원 대신 하랑의 베테랑 에스퍼들이 자리를 채웠다. 새로운 팀은 아예 A급 이상의 던전을 전담하게 됐다.

그리고 오늘은 그 팀의 첫 출동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사헌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김재영.”

“서훈.”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데 훈이 자리를 뜨는 대신 쭈뼛거리며 재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만약에 내가 엄청 크게 다치면…….”

조심스럽게 나온 말에 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수가 없다. 막 입을 떼서 답하려는데 어깨가 붙잡혀 어디론가 당겨졌다.

“그러게 에스퍼한테 다가가지 말라고 했잖아.”

뒤에서 끌어안겨진 채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저만치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사헌이 어느새 등 뒤에 있었다.

“짐승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을 거야.”

어깨를 끌어안은 사헌이 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재영의 가이딩을 받기 위해 부상 입을 생각까지 하는 서훈을 겨냥한 것이다.

훈이 재영 쪽을 멀거니 쳐다봤다. 재영의 얼굴보다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등 뒤에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사헌과 눈을 맞추고 있을 것 같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재영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실례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물러난 쪽은 훈이었다. 뒤쪽으로 고개를 꾸벅하고, 재영에게는 눈인사를 건넸다.

옥죄는 것 같던 사헌의 팔이 느슨해지자 재영은 고개를 돌려봤다. 사헌이 멀어지는 훈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형, 형?”

재영은 손으로 사헌의 얼굴을 감싸 제 쪽을 보게 했다. 저항 없이 끌려온 사헌이 미간을 확 좁혔다.

“떨어져 있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엄한 목소리로 재영을 다그쳤다.

“어쩔 수 없었잖아요.”

사헌이 길드로 옮긴 후 첫 던전 진입이다. 기자들이 끊임없이 문의를 넣는 바람에 길드 측에서 짧은 기자 회견을 부탁했다. 발언권을 얻은 기자들은 일부러 자극적인 질문만 쏟아 냈다. 센터 측에서 사헌을 괴롭히라고 돈이라도 줬나 싶을 정도의 집요함과 치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헌은 전부 한마디로 일축했다.

‘센터와는 계약이 끝났고, 돈 많이 준다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밝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할 텐데 사헌은 그런 것도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넘어서 전 세계의 관심인 ‘가이드 접대’에 관한 이슈나 상부와의 갈등설 등 민감한 질문에도 대답은 모두 같았다.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5분 만에 기자들은 사헌의 입에서 저 말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냥 옆에 가만히 서 있기라도 하라니까.”

“그랬다가는 제가 대신 기자들 밥이 됐을걸요.”

재영은 익살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네 얼굴 여기저기 팔리는 건 나도 싫어.”

사헌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재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재영에 대한 소유욕이 그득그득했다.

‘이러는데 설레지 않을 수 있냐고.’

재영은 원망스러운 마음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들어가시죠!”

크게 외친 직원이 가이드들의 손에 너튜브에서나 보던 방송 기기를 나눠줬다. 정부 소속인 센터는 국영 방송국에서 전용 카메라맨을 보내 레이드 영상을 생방송으로 송출한다.

하랑 길드에서는 그 역할을 가이드가 맡아서 한다고 한다. 재영은 전투 인원인 에스퍼를 낭비하지 않는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가이드는 에스퍼가 지켜야 하니까.

길드장은 S급 에스퍼와 가이드가 동시에 길드에 영입되면서 후원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방송국도 세울 수 있을 정도?’

얼마나 많이 버는 거냐고 묻는 말에 그렇게 대답하기에 우스갯소리로만 넘겼다. 그런데 실제로 망해가는 방송국 하나를 인수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다.

‘그때 되면 내가 찍은 영상이 스크린에 송출되는 건가?’

기대로 마음이 붕 떴다. 방송 플랫폼의 벽이 낮아지면서 개인 방송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때다. 재영은 게임 방송을 주로 보는데 직접 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찍은 영상을 다른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한 번씩 일상 브이로그도 올려 볼까.’

재영은 그런 상상을 하며 던전에 발을 들였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건 꿉꿉하고 어딘가 시큼하게 느껴지는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곰팡이?”

“뭐가 썩고 있는 건가?”

“뭐? 그럼 설마 좀비는 아니겠지?”

재영에게만 고약한 냄새가 아닌지 여기저기서 술렁거렸다. 하지만 지금 재영의 얼굴이 찌푸려진 건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형. 이거…….”

재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사헌을 올려다봤다.

“변이 던전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사헌이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스퍼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어떻게 아는 거죠? 아직 크리처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는데…….”

“센터가 정보를 풀지 않았나?”

사헌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던전이 발생한 후로 기관들은 각자 아는 정보를 나누어 가며 대처해 왔다. 경쟁보다는 협력이 각자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초기의 에스퍼들 덕에 생긴 법안이었다.

특히나 변이된 던전은 위험성이 크니 중요도도 높다. 던전 안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으니 미리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던전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기에 작은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길드의 에스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사헌이 재영을 향해 눈짓했다. 재영은 헛기침을 두 번 정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가이드는 변이 던전에서 좀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피부가 따끔거리는…….”

“아! 저도 느꼈어요!”

정윤소 가이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한테 쏠린 시선에 부담이 됐는지 볼을 붉히며 살짝 몸을 움츠렸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에스퍼들이 저마다 가까이 선 가이드들에게 사실을 물었다. 그러면 가이드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모두가 이곳이 변이 던전이라는 걸 받아들인 듯했다.

“이게 변이 던전이라는 건 확실하니 알고 있는 크리처가 나오더라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대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크리처를 앞에 두고 당황하지 말라는 뜻으로 미리 경고한 것이다. 그러자 아까보다 경직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S급 에스퍼인 사헌과 함께 있으니 A급 던전은 문제없을 거라고 편히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걷던 일행 앞에 곧 공터가 나왔다. 커다란 텐트 다섯 개는 너끈히 설치할 수 있을 만큼의 둘레였다.

“일단 이곳에 임시 거처를 두죠.”

사헌이 눈으로 대충 주변을 둘러본 후에 말했다. 입구 쪽을 제외하고 길이 하나뿐이다. 아직 이른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저번과 달리 팀을 나눠서 따로 행동할 일은 없을 듯하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텐트를 넓게 둘러서 알림 종을 이중으로 설치해 주십시오.”

사헌이 가까운 아무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던전의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안전구역이 필요하다.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방울이 달린 줄을 설치해 두는 것이 보통이다.

“머리 위쪽은 서훈 에스퍼가 맡아 주십시오.”

사헌은 거기에 더해 천장을 기어오거나 날아오는 경우도 염두에 뒀다. 재영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실을 보며 찌푸린 채로 웃었다. 보호하는 건지 갇힌 건지 헷갈릴 정도다.

“텐트 하나는 여성, 둘은 남성. 남은 두 개는 긴급 가이딩실로 놔둘 겁니다.”

“가이드와 에스퍼는 나누지 않나요?”

모두가 사헌의 지시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가이드 한 명이 불안한 얼굴로 이의를 표했다. 이번에 길드에서 충원했다는 조연호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에스퍼와 다른 성(性)을 지녔답니까?”

사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힐난했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투다.

“하, 하지만…….”

조연호 가이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하려 했다. 재영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다. 연호가 에스퍼를 무슨 잠재적 성범죄자처럼 피하는 탓이다. 그런 태도에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어디서 괴담 같은 거라도 듣고 오셨나 보네요.”

“센터에서도 가이드랑 에스퍼 팀이 따로 있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신 걸 거예요.”

윤지소 가이드와 재영은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게 아니라는 걸 두 사람도 안다. 하지만 며칠간이나 함께 지내야 할지 모르는데 에스퍼와 가이드가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조를 짜야 하니까 이쪽으로 모입시다.”

사헌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에스퍼들을 향해 내뱉었다.

“가이드들은요?”

“선만 넘어가지 않는다면 뭘 하든 상관없습니다.”

사헌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재영은 굳어 있는 연호를 다독이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있는 곳에서 가이드가 에스퍼가 있는 텐트에 들어간다는 건 그런 뜻이었어요.”

“그런 뜻이요?”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기분이었다. 연호도 어떻게 말해야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아, 아니에요! 말 안 해 주셔도 돼요.”

붉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연호를 보던 재영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19금의 의미가 맞는 듯했다.

“정상적인 곳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혼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호가 떨면서 내뱉었다. 아무도 묻지는 않았지만, 털어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내버려 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주변에 던전이 생겼어요. 발견자는 곧장 센터에 신고했고, 우, 리 길드에서는 그들이 다 도착한 후에나 소식을 들었어요.”

‘사헌이 형도 갔을까?’

평일이든 주말이든,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던전이 발생하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헌이니 어쩌면 그 장소에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물어볼까.’

그런 와중에도 연호는 말을 이어갔다.

“대장이 우리에게 센터 사람들을 가이딩하라고 했어요. 거기서 만난 센터 에스퍼님이 저를 데리고 와 주셨어요.”

센터 에스퍼의 손을 빌려 부당한 대우를 받던 길드에서 도망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센터가 아니라 하랑으로 온 거예요?”

지소가 순진한 얼굴로 묻자 연호가 움찔했다. 재영도 의아한 얼굴로 연호를 쳐다봤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자신을 도와준 쪽에 붙지 않나.

“세, 센터 에스퍼와 있다가 없어진 걸 아니까 금방 찾으러 올 것 같았어요.”

연호가 당황한 모양새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 태도에 재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진사헌 에스퍼님을 동경해 와서…….”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연호를 수상쩍게 여기는 마음이 저 멀리 달아났다. 동경. 겪어 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우러르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는 것. 재영은 속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되새겼다.

“보통 구해 준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혹시 진사헌 에스퍼님이…….”

지소가 무슨 감동 실화 영화를 본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재영의 심장이 묵직하게 뛰기 시작했다.

‘형이 그렇게 오지랖 넓게 굴 리가 없잖아.’

아마 사헌이었다면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는 대신, 그 길드를 박살 냈을 거다.

“아, 아, 그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는지 연호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냥 남의 눈치도 안 보고, 무력도 강하고…… 멋지잖아요.”

재영은 다른 의미로 경계의 날을 세웠다.

“어쨌든 잘 왔어요. 하랑 길드는 센터보다 가이드 복지가 훨씬 좋으니까.”

가이드 중 하나가 연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가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센터하고 나란히 입에 올리는 건 좀.”

“아참. 거기는 반대로 가이드가 힘쓰지?”

가이드들이 말을 이으며 비아냥거렸다. 재영은 한켠으로 미뤄 둔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얼굴을 알고 대화를 나눠 본 사람들이라고, 떠올리면 입안이 썼다.

사헌이 하랑 길드를 이용해 ‘접대 가이드’ 사건을 터뜨린 후, 그 가이드들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위압에 의한 희생자 또는 매춘부. 윤서처럼 접대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던 가이드도 그야말로 싸잡아서 매도를 당하고 있다.

‘윤서 형은 그 전에 나와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그에게도 불똥이 튈 뻔했다. 온라인상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던 가이드들을 떠올린 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방송이나 SNS 등으로 얼굴이 알려진 가이드는 악플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조차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센터는 가이드들을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센터로 향하는 공격을 막는 것에 급급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은 A급 가이드 안의경을 비롯한 몇 명의 일탈 정도로 정리되는 듯했다.

초췌한 몰골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메라를 피하던 의경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 그거야 그 사람들 자업자득이니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낸 재영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그런데 혹시 그 이야기들 들으셨어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재영의 입에 시선이 모였다. 은근슬쩍 남녀 가이드 모두를 한 텐트로 모은 건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이제 곧 전 세계 가이드 연합이 생길 거예요.”

아주 짧았던 휴가 이후로 재영은 사헌을 통해 캐나다의 S급 가이드 엠마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제 곧 전 세계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한 기관, 세계가이드보호원(WGP)이 창립될 예정이란다.

“네? 정말요?”

“그게 가능할까요?”

“저 영어 못하는데 괜찮을까요?”

연호가 눈을 부릅뜨고 재영을 쳐다봤다. 나머지 가이드들은 염려를 표했다. 다들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특히 윤지소 가이드의 현실적이고 귀여운 물음에 재영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요.”

재영은 천천히 뜸을 들였다.

“우리를 대표해서 WGP에 우리 뜻을 전해 줄 대한민국 가이드 연합을 먼저 만들까 해요.”

“그게 좋겠네요!”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내뱉자 제일 먼저 지소가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가이드의 의견이 전달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지…….”

연호가 우울한 얼굴로 걱정을 드러냈다.

“아, 그것도 그렇네요.”

다른 가이드들이 연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어떤 기관이 펴낸 정책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건 보통 대표 자리를 현장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연합의 대표를 가이드 경력이 있거나 가이드로 활동 중인 사람으로 한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재영의 제안에 가이드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연호만 빼고.

‘걱정이 많은 건가, 아니면…….’

재영은 가이드 경험도 거의 없는 데다가 사회 생활도 해 보지 않은 풋내기다. 연호가 연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김재영 가이드님이 대표가 되는 건가요?”

지소가 고민에 빠진 재영에게 물었다. 질투도, 시기도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의문이었다. 오히려 약간의 기대가 담긴 것 같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S급 가이드신데 당연한 것 아니에요?”

류혜리 가이드의 말에 재영은 부랴부랴 손을 내저었다.

“저는 가이드 경력도 짧고, 아는 게 없어서……. 그 자리에 맞는 분은 더 신중하게 선정해야 할 거예요.”

이 사회에서는 에스퍼나 가이드의 등급이 명성 등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재영은 제 등급이 너무 과분하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S급 가이드 정도가 아니면 누가 가이드들의 말을 들어주겠어요?”

강아민 가이드가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S급은 존재만으로도 힘이야.

재영에게 한국의 가이드를 모으는 역할을 맡기면서 엠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렇기까지야 하겠나 했는데…….’

막중한 책임감에 재영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연합이 자리 잡기까지 저도 신경을 쓰긴 해야 할 것 같아요. 원래 이런 일에 나서는 거 좋아하거든요.”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하지 않으니 자신이 하는 것뿐. 그리고 생각보다 잘 해내기도 하고.

“그래도 앞으로 가이드들이 아무것도 몰라서 부당한 일을 당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겠어요?”

“맞아요. 소통하기가 편해질 테니까. 그리고 의견을 모아서 주장을 관철하기도 쉬워질 거예요.”

지소가 잘됐어요, 하면서 연호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흠…….”

재영은 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사헌은 에스퍼들의 등급과 능력 등이 적힌 이력서를 미리 건네받았다. 팀장으로서 균형 있게 조를 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더라도 실전을 거쳐 보완해야 한다.

전투조와 그들이 나갈 길을 다지는 정찰조, 크리처의 사체를 분해해 쓸 만한 것을 찾아내는 해체조, 그리고 그것을 옮길 운반조. 또…….

“저, 저도 진사헌 에스퍼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한 남자가 서러운 얼굴로 외쳤다. 경비조로 쉼터를 지키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사헌은 그의 눈 속에 담긴 경외를 느꼈다.

남자는 원래 센터의 에스퍼였다. 사헌이 센터를 나와 길드로 옮긴다는 사실에 따라온 것이다. 원래는 사헌과 어떤 연도 없었는데 길드로 와서 같은 팀으로 편성된 것을 알고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그런데 전투에 동행할 수 없다니.

사헌은 온기 하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리가 전투를 끝내고 돌아와 쉴 곳을 지키는 게 하찮은 일 같습니까?”

남자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신들의 목숨줄도 있습니다.”

사헌은 가이드들이 들어간 텐트를 고갯짓했다. 그 안에서 제 것은 하얀 얼굴을 홍조로 물들이고, 그 탐스러운 입술을 달싹이고 있겠지. 왠지 입이 말라서 혀를 내어 축였다.

“하,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라도…….”

남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달콤한 환상에 끼어들었다. 사헌은 조금 성가신 기분을 느끼며 눈을 흘겼다.

“이곳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상황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은 당신뿐입니다.”

사탕발림이 아니라 지극한 사실이라 사헌의 말투에는 고저가 없었다. 남자는 곤충을 다루는 에스퍼로, 다룰 수 있는 곤충의 종류나 수는 그의 마력에 비례했다. 정말 적당히 아무에게나 맡긴 게 아닌 것 같아서 남자는 심장이 뛰었다.

“날려 보낼 수 있는 곤충은 뭐가 있습니까.”

“자, 장수풍뎅이, 무당벌레, 그리고 바퀴벌레…….”

남자가 조바심 난 말투로 읊어 내는 곤충의 종류에 주변의 에스퍼들이 윽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위험 신호는 무당벌레로 하죠.”

사헌이 그의 말을 딱 잘라냈다. 무당벌레는 알록달록하니 전투 중에라도 눈에 띌 것이다. 바퀴벌레로 했다가는 자칫 사람들의 혼란이나 불러일으킬 듯하고.

“아, 알겠습니다!”

팀 배정을 끝낸 사헌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럼 슬슬 움직입시다.”

“네!”

힘이 바짝 들어간 대답을 들은 사헌은 입꼬리를 움직였다. 변이 던전인 게 차라리 다행이다. S급 에스퍼가 동행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에스퍼고, 가이드고 지나칠 정도로 풀어져 있었다.

가끔 사람들은 사헌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걸 잊는 듯했다.

‘내 찹쌀떡뿐이지.’

혹시라도 제가 다칠까 걱정하는 건 재영뿐이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얼굴만 보면 가슴이 뻐근했다. 사헌은 그런 느낌이 기꺼웠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야겠군.’

당장 돌아가 뜨뜻하고 말랑한 몸을 안고 싶다. 사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텐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군가에게 시켜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재영을 제 곁에 데려다 두기 위해서 스스로 움직였다.

‘대체 각인은 어떻게 버티지.’

사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조바심에 걸음은 빨라졌다. 마침 재영과 가이드들이 텐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가이드 연맹에 대한 이야기가 잘 풀렸는지 다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재영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텅 빈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연호.’

사헌은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남자에게서는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실제로 풍기는 게 아니라 느낌상 그렇다는 말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지?’

수상쩍은 남자지만, 아직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사헌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재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형.”

재영이 곧장 웃는 얼굴로 사헌을 반겼다.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두 눈동자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사헌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강아민, 류혜리 가이드님은 이곳에서 대기합니다.”

“셋만 가요?”

혜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그리고 에스퍼들과 현장으로 가게 된 지소와 재영, 연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원래는 하나, 그도 아니면 아예 동행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사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 팀에 가이드가 다섯이나 붙은 것도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했다. 아마 던전의 등급이 최고의 바로 아래인 A+급인 것이 크게 적용했을 것이다. 사헌의 이적과 함께 늘어난 가이드의 수도 무시 못 할 거고. 하지만 낭비이기도 해서 곧 조정될 것 같다.

“그건 그렇지만…….”

혜리가 재영과 지소를 번갈아 힐끔거렸다. 두 사람 다 전담 가이드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가이드는 한 명만 가는 것과 다름없다.

“괜찮을 거예요.”

재영이 말로 혜리를 다독였다. 그것만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가이딩은 하지 않는 쪽으로 갑니다.”

사헌이 모두를 향해 내뱉었다. 그제야 혜리가 완전히 마음이 놓인 얼굴을 했다.

“대신 쉼터에 돌아오면 모든 에스퍼가 일정 이상의 가이딩을 받게 될 겁니다.”

그것도 던전 탐험이 며칠이나 이어질 때 이야기다. 남은 가이드 두 사람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사헌은 등을 돌렸다.

“가이드는 후방조 앞에 섭니다.”

그 양옆과 뒤를 후방조가 둘러싸는 격이다. 가이드들까지 제자리를 찾아 서자 정찰조-전투조-운반조-해체조-후방조 순서로 된, 짧지 않은 행렬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나아갔다.

일행이 걷는 길은 끝을 알 수 없는 굴이었다. 사방은 고르지 않은 돌벽으로 되어 있는데, 굴곡을 따라 무언가 흘러 축축했다.

“조금 으스스하네요.”

윤지소 가이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재영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습한 분위기에, 가끔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더욱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저기, 김재영 가이드님.”

“네?”

“저 옷 끝에만 살짝 잡으면 안 될까요? 진짜 살짝만 잡을게요.”

윤지소 가이드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한 듯 숨을 몰아쉰 지소가 재영의 셔츠 밑단을 잡은 둥 마는 둥 했다.

‘직접 닿은 것도 아니니까.’

재영은 고개를 들어 사헌 쪽을 슬쩍 살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알게 되더라도 피를 뽑아 낸 것 같은 지소의 얼굴을 보면 이 정도로는 뭐라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크리처는 어떤 걸까요? 유령? 뱀파이어? 아니면 벌레?”

아예 대화를 나누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재영은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던전의 환경에 맞춰 나타나는 게 보통이었다. 계곡물 속에서 인어가 나타난 것처럼. 실제로 인어가 계곡에 사는 건 아니지만, ‘물 속’이라는 환경이 그렇다는 거다. 재영의 추측에 상상이라도 했는지 지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파래졌다가 난리였다.

“뭐든 벌레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지소가 질색하며 혀를 뺐다. 재영도 벌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괜히 말 꺼냈나.’

벌레가 지나가는 것처럼 피부가 근질근질했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적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재영은 점점 지쳐갔다. 보호받고 있는 저도 그런데 에스퍼는 더할 거다.

“그런데 정말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지 않습니까?”

에스퍼 중 하나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운을 뗐다.

“함정이든 크리처든 탐지되는 것 없나?”

사헌이 늘어지는 말투로 물었다. 정찰조에는 단단한 흙 너머까지 엿볼 수 있는 땅개, 준오와 생명체의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는 이능력자가 편성되었다.

“이 앞으로 100미터까지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해요.”

분명하게 대답하는 준오와 달리 에너지를 감지하는 능력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읽는 생명력은 능력의 강함과 상관이 없어서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의 문제거든요.”

사헌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지되는 에너지가 굉장히 흐릿해요. 이건 생명체가 꽤 멀리 있을 때 느껴지는 정도예요.”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우뚱 기울인 에스퍼가, 그런데 또 멀리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스스로의 의견에 반하는 말을 내놓았다.

“주변에서 계속 같은 양의 에너지가 느껴져요.”

“그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는 말인가?”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영은 놀라서 휙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유령일까요?”

“그러면 보이지 않게 따라올 수는 있겠네요.”

누군가 말을 꺼내자 다른 사람이 장단을 맞췄다. 말을 듣고 보니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럼 유령은 어떻게 상대하죠? 성수? 성수가 필요한가? 십자가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에스퍼 중 하나가 벌벌 떨면서 횡설수설했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게 사람이 귀신이 된 유령이 아니라 크리처라는 괴물이라는 걸 잊은 것 같다.

“닥쳐. 생긴 건 당신이 더 무서우니까 호들갑 떨지 마.”

사헌이 에스퍼를 향해 까칠하게 내뱉었다. 지지부진한 상황에 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온 모양이다. 그 에스퍼는 하늘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인지 어딘지 무섭게 생기긴 했다. 그래도 사헌의 다그침에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짠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의 대화를 듣던 재영은 괜히 제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런데 순간 뒷목에서 따끔한 것이 느껴졌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그곳에 손을 대며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요?”

옆에 있던 지소가 같이 뒤를 돌아보며 재영에게 물었다. 그냥 기분 탓이 아니다.

“그냥 누가 좀 쳐다보는 것 같아서요…….”

“네?”

재영의 대답에 지소가 히익, 하고 헛숨을 삼켰다. 그녀도 유령을 먼저 떠올린 것 같았다.

“크리처말이에요.”

재영은 지소가 오해하지 않도록 말을 고쳤다. 변이 던전이라고 느꼈던 때와 같은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지소가 가슴께에 한 손을 올리며 안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도 큰일 아닌가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연호가 소신 발언을 했다.

“앗! 그것도 그렇네요.”

눈을 동그랗게 뜬 지소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낮은 탄성을 흘렸다. 다소 엉뚱한 그녀의 모습에 재영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응이 솔직하고 커서 보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다.

“멈추십시오.”

그때 사헌이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소곤대며 떠들던 가이드들도, 조금 지친 기색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에스퍼들도 걸음을 멈췄다.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헌의 말에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앞사람의 등만 보고 걷느라 몰랐는데, 주변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안 보여요.”

재영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헌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옆사람, 앞사람. 전부 밀착해.”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네!”

스무 명 남짓의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도 옆에 있는 지소와 간격을 좁혔다.

“앞에 뭔가 있지 말입니다!”

준오가 다급하게 외쳤다. 고요에 젖어 가던 에스퍼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뭐가 있는지 파악 가능한가?”

“해보겠습니다.”

준오가 온 집중을 쏟는 동안, 나머지 에스퍼는 그를 에워싸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했다.

“에너지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미간을 좁힌 사헌은 준오가 탐색을 마치기만 기다렸다.

“신경 같은 가느다란 줄기가 땅과 벽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저번처럼 땅을 밟으면 자극받은 크리처가 공격을 하는 게 아닐까요?”

재영은 전에 아래층에서 바닥을 뚫고 나온 촉수 때문에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 제발, 그건 아니라고 해 줘.’

재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절망했다.

“지금부터 전원 제자리에 멈춥니다. 땅개는 천천히 가면서 안전한 길 확보해 놔.”

“알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숨죽인 채 준오만 바라보고 있었다. 준오는 한발, 한발 천천히 나아가며 표시를 남겼다. 그리고 다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슝-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이어 뭔가 벽에 부딪힌 듯 툭 소리가 났다. 준오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막대기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스위치를 눌렀나 봅니다.”

준오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방금 전 꼬챙이가 꿰뚫릴 뻔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해맑은 태도였다.

‘아니면 그만큼 사헌이 형을 믿었던가.’

실제로 준오 본인조차 포착하지 못한 그 순간에 사헌이 공기를 움직여 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줬으니까.

“그 줄기는 벽과 바닥에만 연결되어 있었나?”

“아닙니다. 천장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렸다. 실수로라도 벽이나 천장을 건드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지금처럼 팀장님이 막아 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때 한 에스퍼가 껄렁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보디빌더 대회 출전자라도 되는지 온몸이 두꺼운 근육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할 테지만 아마 뇌도 근육으로 들어차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고요.”

자신의 능력에 꽤나 자신이 있는지 남자가 뻐기듯 말했다.

“그렇습니까?”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당신이 책임지고 길 뚫으십시오.”

그러고는 준오에게 손짓해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재영은 흥미로 반짝이는 사헌의 눈동자를 보고 불안해졌다.

남자가 밟은 바닥이 툭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는 재빨리 매달려 옆의 공간에 섰다. 그리고 그것 보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쳐다봤다.

재영은 안전하다고 표시된 곳을 지나가면서 바로 옆, 뻥 뚫린 땅을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창끝이 보였다. 그대로 추락했으면 온몸이 꿰뚫렸을 것이다.

몸을 떤 재영은 손을 뻗었다. 지소가 그의 손에 기대 무사히 함정을 지나왔다.

“진짜 여기 너무 싫어요.”

재영의 옆에 선 지소가 반쯤 우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얼마나 더 이런 과정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재영도 알 수 없지만, 가능한 의연한 태도로 지소를 달랬다.

운반조까지 전부 이동한 걸 확인한 남자가 다시 앞장섰다. 전진은 순조로웠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있을 때였다.

쿠궁.

굉음과 함께 땅이 크게 흔들렸다. 재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몸을 세우고 있던 남자가 중심을 잡으려고 벽을 짚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닿은 곳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바닥과 날아오는 무기만 신경 쓰던 남자는 곧장 대응하지 못했다. 그가 중심을 잡으려는 순간, 벽이 돌아가면서 남자의 몸을 후려쳤다.

“우아아악!”

남자는 단말마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아니, 사라질 뻔했다. 사헌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남자는 뒤로 넘어져 얼빠진 얼굴로 헐떡였다. 모두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멈춰 있었다.

“위, 위험해……. 내가 미쳤지. 여기가 어디라고…….”

침묵을 깨고 연호가 미친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재영은 그가 못내 불안했다.

“당장, 나는, 당장 여기서 나갈 거야!”

출구가 보이지도 않는데 연호가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뿌리치며 튀어 나갔다. 흔들린 몸을 다잡은 재영은 옆에 있는 지소를 살피려고 했다.

“지소야!”

등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재영의 눈에 뒤로 넘어가고 있는 지소가 보였다. 느리게 되감기를 하는 것처럼 놀란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김재영!”

쿵!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 아래로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눈을 부릅뜬 채 감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무거운 쇠공이 보였다. 표면에 붙은 날카로운 가시가 번뜩 빛을 냈다. 그 아래에서 검은 액체가 꾸물꾸물 바닥을 기듯이 흘러와 재영의 발치까지 왔다.

“아아…….”

그것을 제대로 눈에 담기도 전에 따뜻한 온기가 뺨에 닿았다. 그 손이 재영의 고개를 돌려 사고 장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다친 데 없어?”

사헌의 눈동자가 빠르게 재영을 훑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재영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소가 있던 자리에 쇠공이 떨어졌다.

“혀, 형. 여기, 여기 윤지소 가이드님이…….”

재영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냈다.

소름 끼치는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패닉을 일으키며 튀어 나간 연호는 다른 에스퍼들에게 구속당한 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아무도, 발도 떼지 마.”

사헌이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고는, 막무가내로 제 팔을 당기는 재영을 꽉 붙들었다.

“쇠공은 치워 줄 테니 괜한 고생 마십시오.”

사헌이 아래쪽을 보며 내뱉었다. 그리고 손으로 재영의 눈을 가렸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누군가 숨이 차는 것처럼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누군가가 아니라 재영 자신이었다.

재영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사헌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 따뜻했다. 불쾌하게 뛰어 대던 심장이 조금은 나아졌다.

“지, 진사헌 에스퍼님. 우리, 우리 지소 좀…….”

그때 시야보다 좀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흐느낌이 들렸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 재영은 천천히 사헌의 손을 치웠다.

제일 먼저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모양새다. 남자의 등짝은 쇠공의 가시에 찔려 너덜너덜했다.

‘우, 리 지소?’

재영은 남자가 사헌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가만 보니 남자의 몸 아래로 가느다란 몸이 보였다. 지소를 감싸 대신 다친 것 같았다. 그 남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살아 있다. 그러면 남자가 감싼 지소도 살아 있을 것이다.

“지소, 지소야.”

남자가 애달픈 목소리로 연이어 지소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이 단순한 페어 관계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재영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이정운 에스퍼. 우선 안전 구역으로 돌아갑시다.”

사헌이 남자, 정운과 정운이 끌어안은 지소를 한 번에 들어 올렸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일행은 표시해 둔 길을 밟아 돌아갔다.

이 끔찍한 사태의 원인인 연호는 에스퍼들에 의해 양팔이 묶였다. 그가 가이드고,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심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큰 사고를 유발할 뻔했기에 보는 시선이 곱지는 못했다.

“벌써 오셨……!”

쉼터에 남아 경계를 서던 에스퍼가 반가움에 크게 외치다가 움찔 굳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누, 누구…….”

에스퍼의 외침에 텐트에서 나온 가이드들도 그 모습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류혜리 가이드님, 강아민 가이드님.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네, 네! 물론이죠.”

“형! 이쪽으로!”

재영은 긴급 가이딩실로 빼 두었던 텐트의 입구를 젖혔다. 사헌이 허공에 띄운 두 사람을 침구 위에 내려놓았다. 힘겹게 눈을 뜨고 있던 정운이 축 늘어진 지소의 손을 붙잡았다.

지소는 언뜻 보기에 상처가 없어 보였다. 반면 밝은 곳에서 본 이정운 에스퍼의 상태는 처참했다. 재영은 얼른 텐트 안 짐을 뒤져 구급상자를 꺼내 왔다.

“류혜리 가이드님은 윤지소 가이드님의 몸을 살펴 주십시오.”

그러고는 혜리가 지소의 몸을 편히 살필 수 있게 등을 돌렸다. 그 사이 재영은 가위로 정운의 옷을 자르려고 했다. 그런데 피로 축축하게 젖은 탓인지 잘 잘리지 않았다.

“내가 할게.”

사헌이 덜덜 떨리는 재영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았다.

“가이딩이 안 돼요.”

그러는 동안 이정운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시도한 강아민 가이드가 불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재영은 간절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재영아.”

동시에 사헌이 다급한 목소리로 재영을 불렀다. 사헌의 허락하에 재영은 마음껏 기운을 내보냈다. 그런데 뭔가에 막힌 것처럼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 돼요.”

몇 번 더 시도한 재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제 어쩌냐는 듯 사헌을 쳐다봤다. S급 가이드인 재영이 가이딩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에스퍼 본인이 거부하는 게 아니라면.

“이정운 에스퍼님. 들리세요? 저 김재영이에요.”

재영의 부름에 정운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상처만 치료하실 수 있게 가이딩할게요. 허락해 주세요.”

정운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재영은 그게 허락의 의미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정운의 몸은 가이딩을 튕겨 내고 있었다.

“설마 두 사람…….”

상황을 지켜보던 아민이 경악한 얼굴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큭!”

그때 정운이 허리를 튕기며 기침을 해댔다. 재영은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이딩이 필요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혹시 두 사람 각인했어요?”

아민이 말을 이었다. 정운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이 잇새로 욕을 읊조렸다.

“윤지소 가이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재영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팀에 치유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없었다. 간단한 응급조치는 할 수 있지만, 스스로의 치유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가이딩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재영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고?’

재영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깊은 좌절감이 그를 감쌌다.

“이 피는 지소 것이 아니에요.”

마침내 지소의 몸에 묻은 피를 전부 닦아 낸 혜리가 안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정 식 던전입니다. 혹시 뭔가에 물리거나 찔린 흔적은 없는지, 독성 반응은 없는지 잘 살펴 주십시오.”

“아, 네!”

시간을 들여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본 혜리가 역시 아무 흔적이 없다고 말했다. 재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소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럼 왜 안 깨어나는 거죠?”

“충격이 컸나 봐요.”

혜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도 의학 지식이 없는 건 마찬가지라 확실치는 않았다.

“이정운 에스퍼는 어때요?”

“재생이 안 되고 있어요.”

훤히 드러난 등이 석류처럼 벌겋게 갈라져 있었다. 아무리 닦아 내도 상처에서 계속 피가 쏟아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재영의 얼굴이 단단해졌다. 재영은 지소의 어깨를 흔들었다.

“가이딩이 필요해요. 지소 씨, 지소 씨.”

놀란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지만, 정운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 혜리도 재영을 도와 지소의 뺨을 살살 두드렸다. 하지만 늘어진 몸뚱이는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죠?”

아민이 조바심 나는 얼굴로 두 가이드를 쳐다봤다. 가이딩이 필요한 상대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에 가이드들은 모두 참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재영은 찡그려진 눈으로 지소를 바라봤다. 정신을 잃어서인지 그녀의 몸 주변에 오오라처럼 기운이 피어올라 있었다. 갈 곳을 잃은 기운들은 허공을 떠돌다가 그대로 흩어졌다.

‘저걸 조금만 움직여도…….’

재영은 눈가를 찌푸렸다. 아예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에 보이니까 더 미칠 것 같았다.

‘이쪽이야, 이쪽.’

재영은 손으로 부채질을 해서 정운 쪽으로 날아가게 유도했다. 당연히 꼼짝할 리가 없다.

‘확 잡아다가 집어넣고 싶네!’

재영은 이를 아득 갈았다.

그 순간이었다.

지소의 기운이 낚아채이듯 재영 쪽으로 쭉 당겨졌다. 재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혹시…….’

재영은 간절한 기대를 담아 쥐고 있는 지소의 기운을 정운의 가슴팍에 꽂듯이 담았다. 구슬이 깨지는 것처럼 팟, 하고 기운이 쪼개졌다. 그리고 그것은 정운의 안으로 사라졌다.

‘된 건가?’

가이딩이 되고 있는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확인이 될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재영은 온 정신을 집중해 지소의 기운을 끌어다가 정운의 몸 위로 옮겨 놓는 것을 반복했다.

“찹쌀떡?”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사헌이었다. 사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재영의 이마를 훔쳤다. 땀구슬이 봉긋한 이마를 따라 흐르는 중이었다.

“잠시만요.”

재영은 사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을 수 있는 지소의 기운이 많지 않아서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사헌이 손으로 재영의 이마를 훔쳤다.

“으읏.”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정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소야……?”

다시 눈을 뜬 정운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제 가이드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지소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걸 확인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대로 먹혔다. 재영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지금 분명…….”

정운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읊조렸다.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재영의 것과 마주쳤다. 희미하게 웃은 재영은 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윙크의 뜻을 알아들은 건지 정운이 그대로 입을 다물고, 보일락 말락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 다른 에스퍼랑 무슨 짓이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사헌이 악, 비명이 나올 만큼 세게 재영의 귀를 깨물었다.

“아파요! 말로 하면 되지.”

재영은 울먹거리면서 사헌을 눈으로 흘겼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로 했더니 무서운 줄 모르고 이러는 거 아니야, 응?”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사헌이 다정스레 제가 문 상처를 혀로 핥았다.

“형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재영은 사헌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민과 혜리는 어떻게든 지소를 깨우려고 애쓰느라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정운 에스퍼의 자가 치유가 가능해졌습니다. 두 가이드님 돌아가서 대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갑자기 어떻게…….”

정운의 몸에서 흐르던 피가 멎고, 상처의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아물고 있다는 증거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힘을 완전히 소진한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느리지만, 회복하고 있어요.”

에스퍼의 에너지는 가이딩을 받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아주 더딜 뿐.

“다행이네요.”

“그래도 지소가 얼른 깨어나면 좋을 텐데…….”

“두 사람만 푹 쉴 수 있게 우리는 이만 나가요.”

정운의 자가 치유가 가능해졌으니 이제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지소도 단순히 기절한 것뿐이라면 곧 깨어날 것이다. 재영은 혜리와 아민,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아픈 사람 둘만 남겨 놓는 건…….”

혜리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발을 질질 끌었다.

“괜찮을 거예요. 방음 장치도 꺼 뒀고, 윤지소 가이드님이 깨어나면 이정운 에스퍼님이 말해 주기로 했어요.”

재영은 미는 팔에 힘을 줬다. 정운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소가 깨어나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운까지 그렇게 말하니 두 가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발을 뗐다.

“저희는 이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두 가이드는 탐험을 다녀온 다른 에스퍼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발을 뗐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사헌이 입을 뗐다.

“무슨 짓이라니.”

재영은 그렇게 말하니 굉장히 파렴치한 일을 한 것 같지 않으냐고 따졌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재영은 그의 눈을 피해 하늘을 쳐다봤다. 이게 원래 가능한 일인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재영의 현실 도피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헌이 그의 두 볼을 감싸 눈을 피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재영은 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지소 가이드님의 기운이 보였어요. 정신을 잃어서 그런지 몸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사헌이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재촉했다. 재영은 입을 달싹였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욱해서 잡았는데 잡아지더라고요.”

재영은 반쯤 포기한 어투로 내뱉었다. 사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런 표정은 또 처음이라 재영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사헌이 더 말해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정운 에스퍼님의 몸을 향해서 던졌어요.”

한 번 말꼬를 트니까 그 다음은 쉬웠다. 재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더니 회복이 됐다?”

사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재영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헌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 것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않은 건 잘했어.”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토닥였다. 상냥한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네가 특별하다는 게 드러날수록 넌 위험해져.”

“조심할게요.”

재영은 볼을 쓰다듬는 손에 제 손을 겹쳐 놓으면서 말했다.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사헌이 제 걱정을 해 준다는 게 기뻤다.

“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대한민국은 S급 에스퍼마저 잃게 된다는 걸 기억해.”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한껏 치솟았던 기분이 땅을 뚫고 지하로 처박혔다. 재영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사헌을 쳐다봤다.

다른 때는 눈치도 빠른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기울이고 있다.

“그만큼 네 목숨을 무겁게 여기란 말이야.”

“알겠어요.”

그러면서 재차 당부하는 말에 재영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저녁을 준비해 막 먹으려는 참에, 다행히 지소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옆에 있는 이정운 에스퍼를 확인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거나 하지는 않고?”

재영과 혜리가 달라붙어 지소의 상태부터 살폈다.

“괜찮아요. 그냥 좀 놀란 것뿐인데요.”

그들의 격한 반응에 지소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정운이 보호해 준 덕에 직접적인 타격도 입지 않았는데, 그보다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페어인 이정운 에스퍼가 부상으로 출동할 수 없으니 윤지소 가이드는 함께 쉼터에 남습니다. 류혜리 가이드가 대신 합류하세요.”

식사를 마친 뒤 사헌이 새로이 조를 편성했다.

“조연호 가이드는 여기서 대기합니다.”

“네? 하지만 그러면 가이딩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연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이딩은 돌아와서 받도록 하죠.”

사헌의 결정에 조연호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른 가이드들도 친한 에스퍼에게서 정운이 다친 사건의 경위를 들어서 필사적으로 연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헌은 출발 직전 쉼터의 경계를 맡겼던 에스퍼를 불렀다.

“정수한 에스퍼.”

벌레들을 움직여 나갈 길을 만들어 둔 수한이 그의 부름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조연호 가이드를 감시해 주십시오.”

사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

수한이 놀라서 되물었다가 이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명령 이후로 사헌의 명령은 이유 불문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사헌이 말꼬리를 늘리며 연호가 있을 텐트를 쳐다봤다. 긴장감에 수한이 침을 꼴딱 삼켰다.

“그 즉시 구금해도 좋습니다.”

구금이라고 해 봐야 줄로 묶어 외딴 텐트에 던져두는 것뿐이다. 하지만 수한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것처럼 대답했다.

첫 번째 진입으로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거라 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일행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으으, 전부 그대로 있네.”

하지만 사고가 난 지점에서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짙은 피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진짜 에스퍼라서 다행이지.’

물론 이정운 에스퍼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튼튼하고, 회복력이 빠른 에스퍼라 생명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리라. 당연히 아무도 다치지 않는 쪽이 좋았을 테지만 말이다. 재영은 두 팔로 몸을 감싸며 흥건한 피바다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이 너머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져요.”

걸음을 멈춘 정찰조 에스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대장 크리처가 코앞에 있다는 의미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까 그 기운은?”

“계속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우리를 감싸고 있어요.”

문제는 대장 크리처를 만나기 전에 잡몹들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잡몹들부터 처리하고 갑시다.”

사헌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잡몹이 아예 없으면 상관이 없는데 주변에서 계속 기운은 느껴진다니까 대장 크리처를 상대하다가 뒤치기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지금까지도 발견 못했는데…….”

누군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대처법은 고사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발끝이 돌멩이에 걸린 것처럼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헉.”

재영은 헛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다음 순간에는 똑바로 서 있었다.

슬며시 눈을 뜬 재영은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재영의 옆에 있던 에스퍼가 잡아 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빈손을 허무하게 쳐다봤다.

‘형이구나.’

재영은 사헌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괜찮다고 손이라도 방방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참았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린 재영은 웃는 얼굴 그대로 옆의 에스퍼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았어도 그 마음만은 분명했으니까. 사헌이 먼저 나서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도움을 받았을 거다.

그러자 사헌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진사헌이라도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 곧장 재영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아무래도 크리처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핀 정찰조의 에스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은 에스퍼들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재영도 마른침을 삼키며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었다.

“으앗!”

그때 또다시 누군가 단말마 비명을 내질렀다.

“엉덩이! 제 엉덩이 쪽이에요!”

에스퍼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엉덩이로 향했다. 하지만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까르륵-

순간 어린아이의 것 같은 말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자신의 발을 건 것도 저 크리처의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난이 좀 심한 친구들이네요.”

옆의 에스퍼가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장까지 솟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번뜩이며 크리처의 모습을 찾았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저기, 불을 피우면 어떨까요?”

조심스러운 제안에 에스퍼들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재영을 쳐다봤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좋은 에스퍼들에게 동굴의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스퍼님들은 몰라도 평범한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이왕이면 찾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불 켜.”

더 들을 것도 없이 사헌이 딱 잘라 명령했다.

“라이트.”

마법 계열 에스퍼가 기다렸다는 듯 주문을 외웠다. 크리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할 일도 없던 터라 심심했던 것이다. 좁은 굴 안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러자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바람이 일었다.

“저기……!”

누군가 손을 들며 외쳤을 때, 사헌의 눈은 이미 그곳에 닿아 있었다. 분명 그림자와 같은 색인데, 다른 것인 듯 어울리지 못하고 술렁였다. 그러더니 곧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흡수됐다.

“어둠에 숨는 녀석입니다. 당장 불을 피우세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사헌이 재차 명령을 내렸다.

“장난질을 한 걸 보면 물리 공격이 가능할 겁니다.”

볼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스퍼들이 한발씩 움직이면서 크리처가 숨을 공간을 없앴다. 다른 곳으로 도망갈라치면 사헌이 재빠르게 붙잡아 내던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크리처에게 대기하고 있던 팀원들이 공격을 가했다.

“역시 S급 가이드라 그런가? 통찰력이 좋으시네요!”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되자 옆의 에스퍼가 재영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그냥 운이었어요. 저는 깜깜하면 잘 안 보이니까요.”

재영은 머쓱함에 뒤통수만 긁었다. 정말 그녀가 칭찬할 만큼의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안 보이니까 불을 켜자고 했을 뿐.

“송이진 에스퍼.”

그때 바로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과 송이진 에스퍼는 동시에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가라앉은 눈빛의 사헌이 이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자리를 변경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이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차가워지는 사헌의 눈빛을 보고 후다닥 그의 자리로 갔다. 사헌이 느릿한 걸음 다가왔다. 사냥을 앞둔 짐승의 눈빛이다.

“저 여자가 마음에 들었어?”

재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사헌이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재영의 뒷덜미를 주물럭거렸다.

“네? 아뇨.”

재영은 빠르게 부정했다.

“그럼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줬는데?”

눈을 좁힌 사헌이 엄지로 재영의 입가를 문질렀다.

“으, 으프여.”

끝을 꾹 눌러 옆으로 늘이는 바람에 입술이 이상하게 뭉개졌다. 눈에 힘을 주고 놓아 달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사헌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던전에서 죽은 사람은 온전한 시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알아?”

그런 무서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고작 웃어 줬다고 목숨을 잃는 건 너무 가엽지 않나.

“아무 짓도 하면 안 돼요.”

재영은 사헌의 손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몸을 낮춘 사헌이 재영과 눈을 마주쳤다.

“왜? 저 여자가 걱정 돼?”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 좋은 의도를 품은 어투는 아니다. 재영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되는 건 형이에요. 그리고 저도.”

혹시라도 사헌이 제 마음을 오해라도 할까 봐 마음이 다급했다. 재영은 주변을 살피고 사헌에게 몸을 낮추라고 손짓했다.

“사람 죽였다고 잡혀가면 어떡해요.”

사헌이 잡혀간다고 해서 제가 그를 떠날 일은 없겠지만, 감옥에 갇히면 볼 수 있는 날이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손도 잡을 수 없고. 나름 심각한 얼굴로 내뱉자 사헌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해외로 튈까?”

“아무도 안 죽이면 되잖아요.”

재영의 말에 사헌이 흠, 하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아주 당연한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럼 안 거슬리게 잘하던가.”

결국 사헌의 불만이 향한 곳은 재영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재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헌은 제가 누군가를 보며 웃어도 싫어하고, 눈만 맞춰도 싫어한다.

“역시 가둘까?”

“그건 싫어요.”

재영은 단호히 말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네가 고민해 봐. 어떡하면 날 안심시킬 수 있을지.”

결국 떠넘기는 거다. 사헌이 뚱한 표정을 한 재영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크리처의 사체를 길드 표시가 없는 작은 가방에 챙겨 넣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기겁한 재영은 주변을 살피면서 조용히 물었다. 어쩐지 사헌이 하는 모양새가 도둑질 같았기 때문이다.

“케이의 연구소로 넘길 거야.”

하지만 조마조마한 재영과 달리 사헌이 조심스럽지 않게 평상시의 목소리로 대꾸했다. 케이의 연구소는 재영이 아직 가이드인 걸 믿지 못했을 때, 사헌이 데려갔던 곳이다. 그곳에 있는 케이와의 만남은 썩 기분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왜요?”

저도 모르게 삐딱한 투로 내뱉자 사헌이 그런 재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가 빠르니까.”

굳이 연구소로 가져가는 이유가 너무 단순했다. 길드를 센터처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은근히 인내심이 없다니까요.”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져 있어서 여유로워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재영이 웃으며 말하자 사헌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진짜 참지 말아 봐?”

사헌이 얼굴을 확 들이밀면서 으르렁거렸다. 어디서 발작 버튼이 눌렸는지 모르겠다. 재영은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재영과 아민은 가이드 보호도 겸하는 해체조, 운반조와 함께 보스존 바깥에 대기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풀어진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대장 크리처의 공격은 보스존을 넘어서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지만, 이곳은 규칙에서 벗어난 변이 던전이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재영은 송이진 에스퍼의 등을 방패 삼아 보스존을 들여다봤다. 커다란 동공 한가운데를 차지한 대장 크리처는 색동옷을 입은 커다란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으로 만든 하얀 얼굴에 X자 모양으로 꿰어진 눈, 씨익, 웃는 듯한 입모양. 인형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웃는 얼굴의 광대와 닮은 크리처는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1조가 먼저 크리처를 자극해 공격을 유도하세요.”

사헌의 지시를 받은 1조가 저마다 무기를 손에 쥐고 크리처를 마주했다. 대장 크리처는 전투 직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는 것처럼 커다란 쇠공 위에서 흔들흔들 중심을 잡고 있었다.

“갑니다!”

사방으로 퍼진 에스퍼들이 동시에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날카로운 무기를 겨누며 대장 크리처에게 달려들었다.

피요옹-

크리처에게서 귀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입은 없는데 어떻게 소리를 냈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놀던 쇠공이 알을 낳는 것처럼 작은 쇠공들을 만들어냈다. 그럴수록 크리처가 올라탄 공은 부피가 줄었다. 크리처는 묘기를 부리듯 작아지는 공 위에서 콩콩 뛰었다.

큰 쇠공에서 분리된 주먹만 한 공이 데굴데굴 굴러서 공터 곳곳으로 퍼졌다. 한 에스퍼의 발끝에 쇠공이 툭 부딪혔다.

“응?”

큰 타격이 없어서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갑자기 쇠공이 녹아내렸다. 그러더니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최면 가루 같습니다!”

공격을 받은 에스퍼가 외쳤다. 그는 곧장 팔을 들어 입 주변을 막으며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사헌의 눈이 바쁘게 바닥을 훑었다.

“닿지 않게 주의하세요.”

아직도 많은 수의 쇠공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터져서 최면 가루를 뿜어 내는 건 전부 벽이나 에스퍼의 몸에 닿은 것뿐이었다.

바닥으로 넓게 퍼진 쇠구슬을 밟지 않게 조심하면서 대장 크리처를 공격하는 것도 고생스러운 일이다. 그때, 크리처가 크게 발을 굴렀다. 바닥 곳곳에서 날카로운 돌창이 솟아올랐다.

“크악! 내, 내 발……!”

“최면 가스가……!”

광범위한 공격에 에스퍼들은 부산스러워졌다. 창을 피하려다가 쇠구슬을 밟아 버린 사람도 있었다. 놀라서 입을 가리는 걸 깜빡한 에스퍼가 몸을 바르르 떨며 쓰려졌다.

쓰러진 에스퍼가 돌창에 몸이 꿰이기 전에 사헌이 그를 낚아채 영역 밖으로 던져 놓았다. 대기 중인 에스퍼 중 하나가 얼른 달려가 응급조치를 했다.

“일단 독성 물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성 물질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신체에 흔적이 나타날 때만 가능했다. 벌써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둘로 늘었다.

사헌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크리처를 향해 달려들었다. 덩치가 크면 느리기라도 할 것이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크리처가 순식간에 다른 쪽에서 나타났다.

“서훈 에스퍼!”

사헌의 외침에 서훈이 실을 뽑아냈다. 그의 꼭두각시 실이 크리처의 몸에 착착 붙었다. 대장 크리처가 성가신 줄을 떼어 내려고 몸을 비비 꼬았다.

“아아아악-.”

크리처가 거대한 몸으로 바닥을 굴렀다. 공격하려고 가까이 붙어 있던 에스퍼들이 몸통에 깔리면서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너무 붙지 마!”

사헌이 거칠게 내뱉으며 크리처를 걷어찼다. 에스퍼들이 쉴 새 없이 덤벼든 만큼 크리처의 상태도 썩 좋지는 않았다. 하얀 천이 너덜너덜 찢겨서는 초록색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핵을 찾아야 돼.”

사헌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사람에게 심장이 있듯이 크리처에게는 핵이 있다. 다만 생긴 모양도, 달린 위치도 달라서 싸우면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간혹 핵의 위치를 움직이는 크리처도 있다. 게다가 핵이 끊임없이 생명력을 뽑아내 무서운 속도로 상처 부위를 재생한다.

“……!”

대장 크리처가 솜주먹을 들어 사헌에게 날렸다. 전투를 지켜보던 재영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가볍게 떠올라 피해 낸 사헌은 크리처의 주먹 위에 올라탔다.

쿵-

사헌을 대신해 주먹을 받아 낸 동굴 벽이 큰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갈린 돌이 바스스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저걸 맞았으면 납작해졌을 거야.’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벽에서 멀어진 주먹이 다시 사헌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뒤로 당겨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힘이 너무 강해서…….”

크리처의 주먹을 실로 묶어 둔 훈이 일그러진 얼굴로 사과했다. 제가 확실히 제압하지 못해 크리처가 사헌을 공격하게 한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변이 던전의 크리처는 더 강해지지. 게다가 A+급이야. 고작 A급이 쉽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사헌은 별일 아니라는 듯 훈을 다독였다. 말의 내용은 썩 상냥하지 못했지만.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버둥거리던 크리처가 갑자기 몸에서 힘을 쭉 뺐다.

“포기한 건가?”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크리처가 제자리에서 몸을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괴성과 함께 커다란 입에서 무언가가 흩뿌려졌다. 그것이 색색의 꽃잎처럼 보여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방심하지 마!”

사헌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을 때였다.

펑-

꽃잎이 허공에서 파바밧 하고 연이어 터졌다.

“으악!”

몸에 불이 붙은 에스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이 즐거웠는지 크리처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윽. 끔찍하네.’

동굴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큰소리에 재영은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에서 피라도 날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인상을 찌푸린 사헌이 벼르는 듯 말하며 단검을 쥐었다. 재영은 단조로운 손잡이를 든 사헌의 손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무기를 드는 장면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능력인 염력은 딱히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사헌의 단검이 크리처의 목을 베었다. 역시나 핵이 부서지지 않은 크리처는 상처를 금세 회복했다.

사헌은 지치지도 않는지 팔, 다리, 몸통 가릴 것 없이 수차례 단검을 찔러 넣었다.

“틀렸어. 회복이 너무 빨라.”

그를 지켜보던 운반조 에스퍼가 좌절한 얼굴로 내뱉었다. 발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스퍼는 던전 진입도 처음이었다. 가이드인 재영보다도 경험이 적은 것이다.

“우리 대장이 누군지 잊으셨어요?”

재영은 그를 향해 당당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도 없잖아요.”

재영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반박하려는 에스퍼의 말을 자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하게 질렸다.

그 순간, 사헌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야비해 보이는 눈빛을 보고 재영은 곧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것일수록 함부로 두라고 하지.”

주문처럼 중얼거린 사헌이 단검을 들어 크리처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정신없이 몸을 구르던 크리처가 바르르 떨더니 굳어졌다. 충격으로 홉뜬 눈에 핏줄이 서 있었다.

끄아아악.

사헌을 노려보던 크리처가 입을 쩌억 벌리더니 굉음을 토해 냈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에스퍼들이 달려들었다.

팔, 다리, 머리.

닿는 곳은 전부 썰려 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회복이 전혀 되지 않았다. 사헌이 핵을 부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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