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0)

14.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재영은 막 꿈에서 깬 사람처럼 움찔했다. 이마에 사헌의 손끝이 닿아 있었다.

“누, 누가요?”

재영은 긴장으로 굳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얼굴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윤서만큼 친한 건 아니어도 인사 정도 나누는 센터 가이드가 몇 있다. 센터 일이 아니면 사헌이 나갔다 오지 않았을 테니,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게 당연했다.

“이지수 가이드.”

대답을 들은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는 이름이다. 안의경 가이드와 항상 함께 다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 한편에 안도감이 들었다.

“과, 과로사요? 아니면 혹시 던전에서…….”

재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어느 쪽이든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사헌이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손을 뻗어 재영의 귀 끝만 만지작거렸다. 재영은 눈을 들어 사헌의 얼굴을 살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어딘지 멍해 보였다.

무표정으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사헌 탓에 재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좋지 않은 종류다.

“납치살해야.”

사고가 아니다. 주변에서 일어날 줄 몰랐던 사실이라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재영은 억지로 침을 꼴딱 넘겨서 숨통을 텄다.

“앞으로 어디든 혼자 갈 생각하지 마.”

드물게도 사헌의 목소리에서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영은 의아함을 느꼈다.

“납치살해였다면서요.”

무섭고, 또 안타까운 일이지만 20대 건장한 성인 남성인 재영에게는 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이 그것 보라는 듯 실소를 흘렸다.

“너는 너무 조심성이 없어.”

그러더니 귓불을 만지던 손으로 재영의 목을 감쌌다. 재영은 압박감에 눈을 깔았다. 사헌이 차가운 눈으로 재영의 목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힘을 조금만 줘도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확실히 범인이 사헌이라면 재영 같은 남자도 쉽게 당할 것이다.

“그, 그건 형이 에스퍼라서….”

변명같이 중얼거리던 재영의 머릿속에 퍼뜩 깨달음이 스쳤다.

“혹시 단순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사헌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특이점이라도 있었어요?”

재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 센터에 등록된 가이드인데, 사후 검사에서 E(일반인)등급이 나왔어.”

“죽으면 가이드의 기운이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에요? 피가 굳는 것처럼.”

재영의 반박에 사헌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이드의 죽음 자체가 처음은 아니야.”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일반인처럼 살다가 던전에 휘말려 죽은 사람, 사고를 당해 죽은 사람, 그리고…….”

사헌이 말꼬리를 흐렸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에스퍼의 폭주에 휘말려 죽은 사람.”

무거운 목소리로 툭 내뱉는 말에 재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자신이 폭주 에스퍼에게 가이딩한 사실을 알았을 때, 사헌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다. 전례가 있으니 더 걱정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온 적은 없었어. 에스퍼는 에스퍼로, 가이드는 가이드로 죽는다.”

딱딱하게 굳은 사헌의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느낌이 좋지 않아.”

사헌이 재영의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런 사헌은 처음이다.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재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사헌이 안심할 만한 말을 했다. 어차피 곧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 *

재영은 사헌의 훈련을 위해 센터에 동행하게 됐다. 보안이 확실한 집 안은 괜찮을 거라고 여겼지만, 사헌은 달리 생각하는 듯했다. 재영을 혼자 두는 것 자체를 불안해했다.

가는 내내 쏟아지는 시선에 재영은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의경의 무리와 스쳤다. 재영은 문득 발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봤다. 무리의 모든 사람이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으니 힘들만도 하다.

“안 됐어.”

옆에 있던 윤서가 작게 혀를 찼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연민의 감정은 느꼈다.

“나 오늘 센터에서 나오기로 했어.”

이어지는 윤서의 말에 재영은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했지만, 갑작스러웠다.

“무슨 일 있어요?”

“이번 일 때문이지, 뭐. 재효 형이 걱정된다고 하기도 하고, 이번 사건 수사 종료 때까지는 가이드들 전부 개인적인 외출이 금지된대.”

윤서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상황에서건 침착한 재효가 그럴 정도면 예사 상황이 아닌 건 분명했다. 센터 측에서도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은 물론이고.

그리고 사헌이 느낀 불길함대로 그건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 * *

한 달 새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 발견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깨어난 사람은 없다. 그러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연쇄살인범 같은 것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냐는 뒤숭숭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가이드를 노린 범죄로 보입니다. 가이드의 기운을 바닥까지 뽑아내면 에스퍼로 변환된다는 낭설이 도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비인가 에스퍼 단체에서 군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으로 예측되며…….

뉴스를 보던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피해자 중에는 센터 소속 가이드가 아닌 사람도 몇 있는데, 어떻게 전부 가이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전에 발견된 시신처럼 검사에서 일반인을 의미하는 E 판정을 받았는데 말이다.

“개소리.”

소파 뒤를 지나던 사헌이 시크하게 한마디 내뱉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온 그는 정장을 쫙 빼입고 있었다. 시상식에 가는 영화배우처럼 멋있었다. 저러고 나가면 누구든지 홀릴 것 같다.

“형. 어디 들렀다 가요?”

불안한 마음이 든 재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끄고, 사헌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늘은 재영의 집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별말은 없었지만, 겸사겸사 사헌의 집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너희 집 가잖아.”

사헌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우리 집에 가는데 정장?’

재영은 좋기도 하고, 이게 맞나 싶기도 해서 얼떨떨한 얼굴로 사헌을 쳐다봤다. 정정. 영화배우의 뺨을 쳐도 수십 대는 치게 생겼다.

“형. 그냥 우리 집 안 가면 안 돼요?”

재영이 사헌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칭얼거렸다.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사헌이 비소를 흘리며 차키를 집어들었다.

* * *

말을 그렇게 했어도 오랜만에 오는 본가에 재영도 들떴다. 재영은 괜히 부모님을 수고스럽게 해 드리기 싫어서 직접 키패드를 눌렀다. 출발하기 전에 온다고 연락은 했으니까 문이 자동으로 열려도 놀라시진 않을 것이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재영은 문 옆에 캐리어를 세워 두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 우리 막내, 왔니?”

숙희가 곧바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엄마!”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에 뭉클해졌다. 재영은 크게 외치며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이게 누구야?”

하지만 숙희의 관심은 우두커니 서 있는 사헌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사헌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어머님.”

부담스러울 정도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사헌이 들고 온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님?”

숙희가 설렌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사헌이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재영의 누나들도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터라 처음 듣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재영도 어색하게 웃었다.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닌데, 상대가 사헌이다 보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쩜. 꽃도 저처럼 잘난 것만 골랐네.”

숙희가 꽃에 코를 묻다시피 하며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어 주방 쪽을 바라봤다.

“자기야! 안 나와 볼 거예요?”

사헌에게 말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문 뒤쪽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아빠, 창현이 마지못해 나왔다. 요리하는 중간중간 설거지를 맡았는지 분홍색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사헌이 그를 발견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재영은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센터장에게도 뻣뻣한 허리가 90도로 굽어졌다. 창현이 근엄한 얼굴로 사헌을 바라봤다.

“자네, 술은 좀 하는가?”

“꼰대 같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데없는 말에 숙희가 창현을 힐난했다.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나 하든 아버님은 저를 못 이기실 겁니다.”

당당한 말에 창현이 이를 갈았다. 재영도 사헌이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에스퍼의 자가 치유력이 취기에도 효력이 있는 듯했다.

‘좀 보고 싶기는 한데…….’

풀린 눈을 하고 흐트러진 사헌을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헌이 입을 헤, 벌린 재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재영은 고개를 흔들어 엄한 상상을 털어 냈다.

띵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어머니 오셨나 보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재영은 모습을 드러낸 사헌의 어머니, 도화를 끌어안으며 데면데면한 아들 몫까지 애교를 부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전화라도 좀 해 주지 그랬니.”

그러자 도화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재영을 타박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연락하다가 뜸해졌더니 서운한 모양이다.

“죄송해요. 이번 달은 시험 때문에 좀 정신이 없었어요.”

재영은 처연한 얼굴로 도화의 손을 감쌌다. 어디에서 마음이 상했는지 사헌이 다가와 두 사람의 손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래? 그럴 땐 미리 말해 주렴.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 새아기 몸보신이라도 시켜 줬어야 하는데…….”

도화는 아들에 의해 내쳐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새, 새아기요?”

재영은 사헌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사헌이 덤덤한 표정으로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화가 사헌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안 챙겨도 알아서 잘하겠구나.”

혀를 차며 말하더니 두 사람을 지나쳐 숙희의 손을 잡았다.

“언니! 미리 알았으면 우리 집에서 준비했을 텐데…….”

“같이 먹을 건데 누가 하면 어떠니?”

숙희가 새침하게 덧붙였다.

“혹시 내가 하면 맛없을까 봐 그래?”

“언니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언니 솜씨 좋은 거, 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도화는 딱딱한 사헌과 해운을 낳은 엄마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청스러웠다. 재영은 인체의 신비에 놀라 사헌과 도화를 번갈아 봤다.

오른쪽에는 재영의 가족이, 왼쪽에는 사헌의 가족이 앉았다. 해운이 없어서 수도 딱 맞았다. 재영은 맞은편에 앉은 사헌의 기분을 살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턱을 괴고 재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멀어.”

사헌이 툭 내뱉었다. 재영은 당장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다리에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보자 자신의 다리에 닿아 있는 사헌의 발끝이 보였다. 재영은 데자뷔를 느꼈다.

사헌의 발이 집요하게 재영의 다리를 더듬었다. 재영은 그 감촉에 움찔움찔 놀라며 애써 웃었다. 요즘 들어 사헌은 그가 손에 닿지 않으면 안달했다. 그건 계약하기 전 보인 조급함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따라올 기세니까.’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제게 쏠리는 사헌의 관심이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너무 피곤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좋은 의미로 주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걱정하는 건 항상 재영의 안전이었다.

도란도란 대화 속에서 식사를 끝내고, 두 가족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후식으로 과일을 먹었다.

“생활은 좀 어때? 싸우지는 않고?”

숙희가 재영을 보며 물었다. 재영은 아빠, 창현의 옆에 사헌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이도 있는데 설마 싸우겠어?”

재영이 채 답하기도 전에 도화가 말을 내뱉으며 불안한 눈으로 사헌을 힐끔거렸다. 싸움이 생긴다면 반드시 그 탓일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형이 저를 잘 봐줘서 싸울 일이 없어요.”

포크를 내려놓은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이 사헌을 안 좋게 보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게 설령 그를 낳고 기른 친부모라도.

그때 사헌이 재영의 앞 접시에 멜론을 가져다 놓았다. 잘 먹는 걸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잘 먹을게요.”

재영은 사헌을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문득 사헌이 제대로 챙겨 먹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 형은 내가 챙겨야지.’

재영은 손을 뻗어 제 포크로 멜론을 찍었다. 혀가 아릿할 정도로 단맛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맛있는 건 사헌도 꼭 먹어 봐야 한다.

“형도 하나 먹어 봐요. 이거 엄청 단데…….”

재영은 사헌의 입술 앞에 포크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재영의 눈보다 조금 낮았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사헌이 손을 뻗어 재영의 입술 주변을 훔쳤다.

“아, 뭐 묻었어요? 과일이 싱싱한지 과즙이 엄……청…….”

재영은 사헌이 제 입술을 훔친 손가락을 혀로 핥는 것을 보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하지만 자주 있던 일이라 유별난 반응은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헉.”

그런데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돌렸다. 재영은 그제야 이곳이 사헌과 저, 둘만 있는 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도화가 충격으로 크게 뜨인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눈동자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제 배로 낳은 제 자식이 맞느니 의심하는 눈치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던 재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혀, 형! 빨리 손 씻으러 가요!”

그리고 사헌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늘 그렇듯 사헌은 묵묵히 재영의 뒤를 따랐다. 재영은 먼저 사헌을 안으로 밀어 넣고 닫힌 문에 등을 기대어 숨을 골랐다.

“문은 왜 잠가?”

재영이 하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던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재영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미소 짓고 있는 사헌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 가둬 놓고 뭐 하려고, 응?”

그렇게 물은 사헌이 바짝 몸을 붙였다. 배와 가슴이 닿고, 다리가 얽혔다. 사헌의 눈동자가 이질적인 열기로 번들거렸다. 재영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이 소설이라도 한 편 쓰려고 하실 텐데, 괜찮겠어?”

짐짓 여유로워 보이는 사헌의 모습이 재영은 분했다.

“형도 당사자거든요?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따지듯 묻자 사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지.”

나른한 투로 내뱉은 말에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에게 저와 같은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괜히 서러웠다.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자 사헌이 달래듯 재영의 한쪽 뺨을 어루만졌다.

“소설이 아니라 아마 사실일 테니까.”

재영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 전에 입술이 닿았다. 사헌이 저항 없는 입술을 열고 더운 숨과 함께 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축축하고 뜨거운 입안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문밖에 부모님들이 계시잖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재영이 사헌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사헌이 그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묵직한 체온이 느껴지며 미끄러운 혀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아, 몰라. 일단 하자.’

생각을 포기한 재영은 남은 한 손으로 사헌의 어깨에 매달렸다. 맞닿은 입술 새로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재영과 사헌이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그 후로 10분이 더 지나서였다. 어른들이 동시에 두 사람을 쳐다봤다. 집요한 시선이 어떤 흔적을 찾는 것 같아서 조금 섬뜩했다.

재영은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하다가 움찔하며 주먹을 꼭 쥐고 버텼다. 그러면 더 눈에 띄기만 할 테니까.

“손을 오래 씻는구나.”

제일 어른인 숙희가 침묵을 깼다.

“손은 30분씩 박박 씻으라고 제가 어릴 때부터 말씀하셨잖아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관자놀이 옆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지금껏 3분인 줄 알았지 뭐니.”

숙희가 퍽도 그렇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매서운 눈빛에 재영은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 * *

집에 다녀온 후로도 재영은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갔다. 비록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갔지만.

오후에 들려온 초인종이 비슷비슷한 일상을 깨뜨렸다. 주스를 가지러 주방에 간 사헌 대신에 재영이 문 앞에 섰다. 그런데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사람이 상당히 의외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재영은 문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혼자 있어요?”

그러자 의경이 집안을 훔쳐보기라도 할 것처럼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기웃거렸다. 그 행동이 소름끼쳤다.

어떻게 할까요?

재영은 어느새 등 뒤까지 온 사헌에게 물었다. 의경이 볼 수 없게 인터폰을 등지고 있는 건 당연했다.

그냥 내치기에는 의경의 방문이 예사롭지가 않다. 미간을 좁히고 재영을 쳐다보던 사헌이 말없이 침실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발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채 바깥 상황을 아는 건 사헌에게는 별일도 아닐 것이다. 침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재영은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들어온 의경이 사헌을 찾으려는 듯 재영의 뒤를 살폈다.

“형은 자고 있어요. 깨워 드려요?”

팔짱을 낀 채 그를 지켜보던 재영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화에서 우위를 완전히 뺏길 것 같았다.

“아, 아니, 그러지 마요.”

화들짝 놀란 의경이 재영의 팔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사정하는 모양새였다. 괜한 사람을 핍박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 재영은 걱정 말라는 듯 의경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냥 한 말이라서 그대로 실천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사헌은 깨어서 이 대화를 다 듣고 있고 말이다.

“가이드 대 가이드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조용하게 이야기 나눌 장소가 있을까요?”

의경이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용건을 꺼냈지만, 두 눈은 여전히 정신 사납게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고민하던 재영은 문 앞에서 비켜나며 먼저 거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네? 집으로요? 근처 카페라도…….”

의경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재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재영은 꿋꿋하게 버티고 섰다.

“밖은 사헌이 형 없이는 안 가요.”

재영은 단호한 얼굴로 내저었다.

“하지만 알잖아요.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에스퍼는 들을 수 있어요.”

의경이 작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럴수록 재영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게 사라지려고 하자 꼬리를 내린 개처럼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수치스러운 일일 수도 있어서 그래요”

그 누군가가 자신은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친구의 이야기’인 척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모양이다. 재영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헌이 형은 잠귀가 어두운 편이에요.”

“네?”

의경이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집에서는 얼굴에 물을 쏟고, 뺨을 때려도 못 일어나요.”

재영은 진지한 얼굴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아마 방에서 듣는 사헌도 어이가 없을 거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재영이 품에서 벗어나려고만 해도 눈을 뜰 정도로 예민한 타입이었다.

“차 드릴까요? 커피? 주스?”

“무, 물이면 됩니다.”

“그럼 물 가져올 동안 할 말 정리하고 계세요.”

그 이상의 시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재영이 차갑게 내뱉었다.

“저는 A급이라 에스퍼를 선택하는 데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거든요.”

재영이 시원한 물이 가득 채워진 컵을 내려놓자 의경이 자기 자랑으로 말문을 열었다. 거의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재영은 짜증 난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특정 에스퍼나 특정 등급과의 매칭을 원하는 가이드는 매칭률을 조작해 주는 브로커를 이용해요.”

의경이 그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검사 결과를 내놓는 건 센터 검사소일 텐데…….”

설마, 하는 생각에 재영은 말을 멈췄다. 찌푸려진 미간을 쳐다보며 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 직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가 있지요.”

재영의 머릿속에 윤서를 만나러 센터에 갔을 때, 어딘가로 가던 무리가 떠올랐다. 어디를 가는지 말도 해 주지 않았고, 윤서를 끼워 주지도 않는다고 했던.

“그걸 해 주고 그 사람들이 얻는 건요?”

갑작스럽게 센터의 비리를 듣게 된 재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높으신 분들이 아무런 득도 없이 불법적인 일을 할 리가 없다. 의경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 크흠, 그 사람들은…….”

목이 메는지 의경이 헛기침을 했다. 재영은 그의 앞으로 물 컵을 밀어주었다. 의경이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감사합니다. 그게, 그 사람들은 가이드를 무슨 별식 같은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별식? 진짜로 먹는다는 건 아닐 테고…….’

말뜻을 고민하던 재영은 마침내 성적인 의미로도 ‘먹는다’고 말하는 것을 떠올렸다.

의경이 느릿하게 대답하며 재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돌려 말한 것을 재영이 잘 알아 들었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일에 친구들이 휘말려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빠져나올 의지가 있는 건 맞고요?”

재영은 저도 모르게 까칠하게 대꾸했다. 그가 보기에 의경을 비롯해 몰려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억지로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물론이죠. 누가 그런, 그런 짓을 하고 싶겠어요?”

반박하듯 내뱉은 의경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개하는 건지 수치스러워하는 건지 헷갈렸다. 재영은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하세요?”

날카로운 음성에 의경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재영은 의경과 친한 사이도 아니고, 센터 소속도 아니다. 말마따나 누군가에게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로 적당하지 않았다.

석연찮은 반응에 재영의 의심은 깊어졌다. 낭패라는 듯 입술을 깨물던 의경이 확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와주세요. 그 세력에 맞서려면 증거를 모아 언론에 터뜨리는 수밖에 없어요.”

의경이 허벅지 위에 놓인 재영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매달렸다.

섣불리 대답하기에는 사안(事案)이 무겁고, 말을 꺼낸 의경의 진의(眞意)도 분명하지 않았다. 재영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의경이 초조한 듯 혀로 입술을 적셨다.

“사실 김재영 가이드님보다는 뒤에 있는 진사헌 에스퍼님께 기대는 게 사실입니다. 그분은 대통령님도 무시할 수 있는 분이니까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끝낸 의경이 실소를 흘렸다. 조력자로 하필 친하지도 않은 재영을 선택한 이유가 사헌의 비호(庇護)라면 그럴듯했다.

“그럼 왜 사헌이형이 없는 곳에서 말해야 한다고 우긴 거예요?”

재영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의경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진사헌 에스퍼님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도 그렇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런 재영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의경이 재차 입을 열려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리고 입술을 몇 번 우물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꼭 비밀로 해 주세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니라 자신이 엮였다는 거 자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보통 이런 경우는 본인의 이야기던데.’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경이 안도한 표정으로 컵에 남은 물을 꿀꺽꿀꺽 넘겼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자리에서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의경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 * *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에스퍼의 목숨을 담보로 그런 일을 벌이고 있을 줄이야.”

의경에게 낸 컵을 씻어 내던 재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봤다. 주방 벽에 기대 선 사헌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재영은 젖은 손을 닦으며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왜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복잡한 이야기를 해서 혼란스럽게 만드나 머리가 아팠다.

“이제 와서 뒷배들을 끊어 내고 싶은 걸까요?”

의경이 재영에게 말한 의도는 그것이었다. 다른 가이드는 몰라도 의경은 사헌과 매칭되는 것에 실패했으니 그 관계를 더 유지할 의미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게 약점이 되어 권력자들에게 휘둘려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게 진심일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모르니까 따라가 볼까요?”

차라리 그 편이 편하겠다는 말에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거기 뭐가 있을지 알고.”

의경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삐딱한 말투에 그대로 묻어났다.

‘형이랑 같이 간다고 할까?’

하지만 그 자리에 사헌이 모습을 드러내면 재영이 동행하면서 보려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없을 테니 좋은 생각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이딩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평범한 학생인 재영만 갔다가는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 모르고.

어찌할 바 모르는 재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헌이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다수의 에스퍼와 가이드보다, 아니, 전국민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해도 너 하나가 중요해.”

마주 본 사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재영 자신이 특별해서라기보다는 어렵게 구한 가이드라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는데. 재영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 어질어질해하는 모습을 사헌이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재영에게서 손을 떼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현관이다.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 보든지.”

사헌이 현관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서 민망한 듯 웃으며 서 있던 두 사람이 현관에 발을 들였다. 아랫집에 살고 있는 윤서와 재효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아니, 다 들은 거예요?”

재영은 의경과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게 사헌뿐이라고 생각했다. 의경도 그랬을 거다. 똑같이 감각이 발달한 에스퍼 안재효가 바로 아랫집에 산다는 건 의경도 몰랐던 모양이다.

“베란다에서 물 주다가 안의경 그 불여……가 보이더라고. 형이 너랑 얘기 중이라고 알려 줘서.”

윤서가 붉어진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재영은 의경을 칭하는 부정적인 호칭에 움찔했다. 의경에 대한 윤서의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발현 시기도 비슷하고, 같은 A급 가이드라 자주 비교 대상이 됐다는 모양이다.

“그럼 다 들은 거네요?”

“미안. 여기 방음 좋은 걸로 유명하다더니 그렇지도 않나 봐.”

윤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의경과 나눈 대화를 들은 건 전부 방음 탓이라는 거다.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헌을 제외하고는 비밀을 지켜 주려 했으나 그것조차 해 주지 못해 의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밤에 나는 소리도 들리나?’

밤마다 헐떡이는 소리가 재효에게 들렸을 거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심심하면 사헌과 엉겨 붙었으니 밤이라고 한정 지을 수만은 없지만. 재영은 재효의 얼굴을 힐끔거리면서 그도 자신과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 살폈다.

“침대에 있을 때는 전부 차단해 두니까 걱정 마.”

눈치 빠른 사헌이 재영의 귀에 대고 나직한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재영은 귓구멍을 적시는 숨결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표정 변화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침대 말고도…….”

재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사헌의 뺨에 대고 속닥거렸다.

“그래. 너와 내가 붙어 있는 모든 순간엔 말이야.”

사헌이 달래는 듯한 상냥한 어투로 대꾸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재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앞에서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재효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는 애써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면 언젠가 큰 문제가 될 거야. 뭐든 대책을 세워야 해.”

재효의 심각한 표정에 재영의 얼굴도 굳어졌다. 재영이 엮일 필요도 없이 센터 내부에서 수습할 수 있다면 베스트다.

하지만 누가 정부 인사와 협력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이상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낌새를 눈치채고 증거 인멸을 할지도 모르니까.

“믿을 만한 사람 없어요?”

“이 세상에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없어. 나 자신조차도.”

재영이 돌아보면서 묻자 사헌이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구는 남자답다.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정 걱정되면 나는 어때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윤서가 손을 들며 자청했다. 재영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센터 상황을 더 잘 아는 그라면 저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안 돼요.”

의경이 그걸 원했다면 처음부터 재영이 아니라 오래 알고 지냈고, 말이라도 섞어 본 윤서를 선택했을 거다.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널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사헌이 재영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에도 재영의 머릿속에는 폭주 직전의 에스퍼를 본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에스퍼가 매칭 조작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평소에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해 그날 폭발해 버린 걸지도.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재효의 말대로 분명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형이 있잖아요. 재효 형도 있고.”

재영은 단단해진 눈빛으로 사헌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사헌은 재영이 재효를 덧붙이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안의경 가이드님한테 연락할게요.”

재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아까 저장한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장 답장이 왔다.

* * *

의경에게 연락한 뒤에도 당장은 별 일없이 지냈다. 자리가 만들어지면 다시 연락 주겠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재영은 애착 인형처럼 사헌에게 안겨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마음을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기분 좋은 체취가 한껏 느껴졌다. 미소를 머금은 재영은 널찍한 가슴팍에 코를 비볐다.

그러다가 갑자기 꿈에서 깬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어 사헌의 얼굴을 쳐다봤다.

“근데 형, 안 가요?”

이렇게 끌어안고 뒹굴면 좋기야 하지만, 오늘 사헌의 일정에 훈련이 잡혀 있었다. 제어구로 능력을 봉인 당한 채 오롯이 신체 능력으로만 싸우는 것을 사헌도 꽤 즐겼다.

“훈련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능력도 마음대로 못 쓰고…….”

하지만 사헌은 오늘따라 약한 소리를 해 대며 미적거렸다.

“그러다가 다치면, 내 걱정은 누가 해 주고?”

그리고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래로 내리뜬 눈이 처연했다. 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재영은 어린애에게 하듯 사헌의 등을 토닥였다. 오늘은 재영이 사헌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센터에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사고로 흉흉해져서 가이드를 센터 안에 가둬 둔 지금, 외부인을 들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게 센터 소속 에스퍼의 개인 가이드에게까지 해당할 줄은 몰랐다.

“훈련 끝나고 오면 바로 가이딩도 해 드릴게요.”

재영은 어르듯 말하며 사헌의 입술 주변에 입맞춤을 쏟아부었다. 사헌이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마. 함부로 문 열어 주지 말고. 누가 초인종 누르면 대꾸도 하지 마.”

“네네.”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이어지는 걱정 어린 잔소리에 재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없는 대꾸에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재영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아래로 훅 뛰어내렸다.

“엘리베이터로 가시지.”

지나가던 행인이 얼마나 놀랐을까.

속으로 혀를 찬 재영은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럼 오늘도 노동을 해 볼까.”

굳은 어깨를 돌린 재영의 걸음이 향한 곳은 컴퓨터 네 대가 쫙 깔린 컴퓨터방이었다.

탁, 탁.

발전기를 수리하며 스킬 체크가 뜨면 한 번씩 스페이스를 눌렀다. 대성공이 연달아 뜨자 재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화면 속 그의 캐릭터 옆으로 다가온 시커먼 캐릭터가 그 앞에 뭔가를 떨어뜨렸다.

짤랑-

맑은 소리는 분명 비상 탈출구를 열 수 있는 열쇠 소리였다. 재영은 시커먼 캐릭터와 마주 보고 기쁨의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전했다.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이어폰을 파고들었다. 게임을 하는 중이라 몇 번 무시했는데 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왔다.

‘뭐지? 택배인가?’

그런 것치고는 집요한 알림에 고개를 갸웃한 재영은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도어미러로 밖을 살필 요량이었다. 요즘은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아서 집에 있다는 걸 알려 봐야 좋을 게 없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택배 올 것이 있냐고 사헌에게 톡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나예요.”

인터폰 너머에서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경이었다.

화면에 비치는 사람은 의경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다.

재영은 의경을 안으로 들여서 물부터 마시게 하려고 문을 열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의경이 들어올 수 있게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혹시나 그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미처 못 봤나 싶어 스마트폰도 뒤적였다.

“이럴 시간 없어요! 머뭇거리면 이상하다는 거 눈치챌 거예요.”

액정의 잠금만 겨우 풀었을 때였다. 의경이 스마트폰을 든 재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문을 열어 주려고 사헌의 슬리퍼에 대충 발만 욱여넣은 탓에 의경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그 상태로 강하게 당기는 힘에 재영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잠깐만요!”

탕.

커다란 소리와 함께 재영의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의경이 재영의 손을 놓고 1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이건 너무 막무가내잖아요.”

재영은 성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그새 손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쓰라린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집에서나 입는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에 늘 차고 있는 워치, 사헌이 준 목걸이. 수상한 곳에 따라가기에는 너무 무방비한 차림이다.

“다시 집으로 가야 해요. 저는 외출 준비도 안 했단 말이에요.”

퍼뜩 정신을 차린 재영은 1층 버튼을 취소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팔을 뻗었다.

“어차피 준비는 내가 해 줄 거니까 돌아갈 필요 없어요.”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의경이 재영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 내렸다. 철벽 방어에 어이가 없어 재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움을 청한다는 사람이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니에요?”

결국 재영은 짜증을 담아 내질렀다.

‘사헌이 형한테 연락할까 봐 그러는 건가?’

물론 당연히 그럴 셈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필요가 있나.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그래요.”

의경의 눈빛은 간절함이라기엔 너무 뜨거웠다.

‘이거라도 갖고 있어서 다행이네.’

재영은 의경이 눈치채지 못하게 턱을 내려 옷 안을 힐끔거렸다. 맨살에 닿는 목걸이의 온도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들킬까 봐 함부로 손도 대지 못하겠다.

의경이 스마트폰도 열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사헌이 화낼 만한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 * *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외진 호텔이었다. 의경이 능숙하게 방의 잠금을 풀고 재영을 밀어 넣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방 안에 의경과 함께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경이 성의 없게 대답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들은 다짜고짜 재영의 옷을 훌렁훌렁 벗겼다.

“왜 이래요, 진짜!”

재영은 질색하며 어떻게든 옷을 사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워치, 공식적인 가이드 호출기 등은 전부 빼앗겼다. 어떻게든 사헌과 갈라놓을 셈이다.

“이것도 안 어울리니까 빼 버리자.”

의경의 무리는 재영을 속옷 차림으로 만들고, 몸에 걸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사헌이 준 목걸이였다. 확실하게는 그가 달아 둔 위치 추적기이지만.

“이, 이건 안 돼요!”

재영은 목걸이를 두 손으로 감싸고 등을 돌렸다. 격렬한 저항에 의경의 눈이 의심스럽게 빛났다. 힘을 써서라도 뺏을 것 같은 눈치다.

“어, 엄마가 선물해 준 거란 말이에요.”

재영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익숙하지 않은 거짓말 때문에 뺨이 달아올랐다. 오히려 마마보이처럼 보일까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여겨질 테다.

날카로운 시선이 목걸이에 박혔다. 어두운 그냥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반지 모양으로, 어떻게 보면 조금 촌스럽게 생겼다.

“뭐, 그래. 그런 포인트도 나쁘지 않겠지.”

예상대로 의경이 재영을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X팔린 게 낫지.’

재영은 마른세수를 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거울 앞에 선 그는 어색하게 웃어 봤다. 분홍색 셔츠를 입은 앳된 남자애가 똑같이 웃었다. 화려한 포장지로 덮인 선물이 된 것 같다.

“오늘 VIP는 이 애가 되겠네.”

동기들처럼 나풀나풀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재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샘난다는 듯 말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입에서 나온 단어가 썩 달갑지 않다. 어감이 무슨 유흥 업소 종사자 같지 않은가.

“너무 그러지 마. 너는 고정적으로 불러 주시는 분이라도 있지.”

아이돌처럼 화려한 화장을 한 남자가 여자를 향해 빨간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화는 이상해.’

남녀할 것 없이 거울을 보며 단장하는 모습이 무슨 뽐내기 대회라도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 없어. 당장 움직여.”

의경이 다른 사람들을 닦달하며 다시 재영의 손목을 잡았다. 재영을 끌고 오려고 한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호텔의 꼭대기 층이었다. 평범한 호텔이 아니었다. 어딘가의 문에서부터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웨이터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복도를 바삐 지나며 술병을 나르고 있다.

“여기야.”

의경이 어느 문 앞에 서서 일정한 박자로 노크했다.

‘암호 같네.’

안에서 남에게 보여 좋을 게 없는 짓을 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재영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목걸이를 눌렀다.

‘그럼 형이 올 때까지만…….’

남들만 잘 보고 따라 해도 모난 돌은 되지 않을 터다. 재영은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는 내부를 둘러봤다. 안은 술을 마실 수 있는 노래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방에는 침대 대신에 널찍한 테이블만 여러 개 있었다. 모든 테이블이 가이드와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로 차 있었다. 재영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버티지.’

절망감으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에 시선이 멈췄다. 노래방 기계 앞에서 낯익은 가이드가 걸그룹 흉내를 내고 있었다. 늘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봐서 저렇게 애교 있는 표정으로 춤출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 옆에서 다른 가이드는 한 중년인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가 손자뻘 되는 가이드를 상대로 은근슬쩍 신체 접촉을 해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다. 무슨 분위기인지 파악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이쪽이야.”

울상 짓고 선 재영을 의경이 다시 끌었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는 내내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랐다.

“의원님. 데리고 왔습니다.”

의경이 발을 멈춘 곳에는 낯익은 남자가 있었다. 학성길 의원이었다. 던전 주변에 땅을 사고 건물을 지으려다가 변이 던전 때문에 모든 게 망가져 사헌에게 따지던 남자. 사헌이 징계를 받게 한 그 남자였다.

“오, 왔구나!”

그 남자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떨떨한 재영의 팔을 붙들었다. 두툼한 팔만큼이나 힘이 좋았다.

“이 녀석을 가지면 그 반반한 에스퍼 녀석도 내 앞에 무릎 꿇겠지.”

학성길 의원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재영을 훑었다. 그를 이용해서 사헌에게 복수를 계획한 것처럼 들린다. 재영은 설마, 하는 마음에 의경을 돌아봤다.

의경이 언제 애원을 했냐는 듯 차가운 낯으로 재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사헌의 말대로 함정이었다. 그것도 상상과는 다른 더러운 함정. 재영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단 한 잔 따라.”

눈동자를 도록 굴린 재영은 순순히 의원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 진사헌 에스퍼한테 악감정이 있으신 거죠?”

“그래! 그 건방진 자식! 센터가 부리는 개 주제에 이 학성길이한테 눈을 까뒤집어?”

단번에 잔을 비운 학성길이 씩씩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참 동안 떠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면 말이야……!”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면 제가 진사헌 에스퍼한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실 수도 있나요?”

재영은 옷 아래 감춰 둔 목걸이를 떠올리며 운을 띄웠다. 사실 목걸이에는 그가 모르는 기능 하나가 더 있었다. CCTV. 사헌이 뻔뻔하게도 끝까지 감추다가 마치 이번 일을 위해 안배해 둔 것처럼 말해 준 것이다.

“사실 저도 좋아서 옆에 붙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응? 그래, 그렇지. 그런 폭력적이고, 성질 더러운 놈 옆에 붙어서 있으면 좋을 리가 없지. 언젠가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고!”

‘형, 미안해요.’

재영은 성길을 유도해 사헌이 욕을 듣게 한 걸 속으로 사죄했다.

“내가 자네를 좀 오해할 뻔했구만.”

고작 한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재영을 바라보는 의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군.”

“김재영입니다.”

“대학생?”

“네.”

나긋나긋한 대답에 학성길 의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영을 위아래로 훑는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재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의경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무슨 일이죠?”

허튼짓하지 말라는 눈이다. 익숙한 제 구역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세등등해진 의경의 태도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는 것뿐이에요.”

“이 방에는 화장실이 없어. 복도 끝으로 가 봐.”

이 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재영에게는 희소식이다. 재영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층마다 에스퍼들이 경계 서고 있으니까 위험한 일 없을 거야. 조심히 다녀와.”

이어지는 의경의 말에 재영은 움찔했다. 이건 사실상 협박이다. 에스퍼들이 지키고 있으니 도망갈 생각은 말라는. 재영은 곤란한 기분을 애써 감췄다.

“높으신 분들 계시는데 당연히 그러겠죠.”

재영은 의경을 따라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접대나 할 생각으로 오지 않았다는 걸 두 사람은 아니까.

‘사헌이 형 올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 있을까?’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온 재영은 문을 잠그고 옷 입은 채로 변기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었다. 그리고 허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평소에도 스마트폰을 쥐고 있지 않으면 불편했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게 못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문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와 화장실 칸을 확인하고 있었다. 재영은 일부러 물소리를 냈다. 적당히 옷을 입는 척하면 방문자는 칸 안으로 들어갈 거고, 그 틈에 다른 곳으로 옮길 셈이었다.

‘응?’

그런데 이상했다. 화장실 문 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계속 같은 문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재영이 있는 끝 쪽으로 가까워지는 거였다.

마침내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 재영은 숨을 삼킨 채 가만히 있었다.

콰앙.

끝이 뭉개지는 성의 없는 노크 소리에 재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망설이던 재영은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문을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

“물을 내렸으면 나와야지, 안 그런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는 학성길 의원의 것이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화장실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여기 있는 거 다 아네. 문 열어.”

학성길 의원이 재영이 들어간 화장실 칸 문 앞에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료할까 봐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했다면서?”

덧붙은 말에 재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한 말인지는 안 들어도 뻔했다. 이딴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재영은 상상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속으로 욕하며 숨을 죽였다.

“흐음.”

그러자 문 너머도 조용해졌다.

‘포기한 건가?’

실낱 같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을 때였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단단한 플라스틱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

순간 정수리가 오싹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 학성길 의원이 칸막이에 턱을 기대어 재영을 내려다보면서 씨익 웃고 있었다.

* * *

이상한 날이다. 센터의 훈련은 누군가 붙고 싶은 상대에게 대련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평소에 사헌은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대충 시간만 때우곤 했다. 그가 사정없이 두들겨 팼기 때문에 그에게 요청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마음에 든 상대면 재미있어서 패고, 겁쟁이처럼 몸을 빼는 상대는 용기를 심어 주겠다며 팼다. 가끔 악의적으로 덤벼드는 녀석들은 사정을 봐줄 필요도 없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 상대로나 지목되곤 하는데, 오늘은 쉴 새 없이 덤벼든다.

재영에게서 연락이 온 건, 17번째 상대의 정수리를 찍어 바닥에 꽂았을 때였다. 사헌은 발로 목을 밟으며 항복을 받아 냈다. 그리고 마력 제어기를 제거하기 위해 담당자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담당자.”

하지만 담당자가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담당자 어디 갔어?”

사헌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감을 열었다. 마음은 급한데 담당자의 목소리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마력 제어기는 던전에서 나온 크리처의 시신에 온갖 기술을 때려 박아 만든 것으로 아무리 에스퍼라도 함부로 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둘러보고 왔는데 안의경 가이드 무리가 안 보여.”

재효가 헐떡거리며 사헌의 앞으로 뛰어와 말했다.

“하윤서한테 연락해 봐.”

“알았어.”

재효가 훈련 전에 반납한 스마트폰을 찾으러 간 동안 사헌은 품에 숨겨 둔 것을 꺼내 확인했다. 재영에게서 온 문자가 보였다. 갑자기 의경이 찾아와 자신을 끌고 간다는 것이다.

사헌은 잇새로 욕을 내뱉으며 센터를 빠져나갔다. 제어기를 제거할 사람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아마 근처에는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가면 돼요?”

센터 로비를 나가자마자 윤서가 툭 튀어나와 물었다. 집에서 택시를 타도 올 시간은 안 됐으니 처음부터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다.

“너는 안 돼. 집에 돌아가 있어.”

재효가 단호하게 내뱉자 윤서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어지간히도 끼고 싶은지 쉽게 물러나지를 않았다.

“그거 마력 제어기 아니에요?”

어떻게 엉겨 붙을까 고민하던 윤서가 두 사람의 손목을 가리켰다. 담당자가 없어서 끊어 내지 못한 마력 제어기였다.

“그거 없으면 에스퍼도 그냥 힘 좀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냥이라기엔 상당히 좋지만. 사헌은 재효에게 선택을 미뤘다.

“상황이 이상하다 싶으면 당장 빠질게요.”

윤서가 결의에 찬 얼굴로 내뱉었다. 결국 재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재영이 신호를 보낸 호텔로 갔다. 하지만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로비서부터 그냥 손님이라기엔 이상한 양복쟁이들이 보였다. 모두 에스퍼인 건 어쩌면 당연했다.

“성가시네.”

힘으로 제어기를 끊어 보려다가 실패한 사헌은 신경질적으로 팔을 떨어뜨렸다.

“경찰 부를까요?”

윤서가 어쩌면 좋냐는 듯 돌아봤다.

“센터는 정부 기관이잖아.”

의경의 말대로라면 센터의 윗분들이 관여되어 있다. 호텔 내부 곳곳을 돌아다니는 에스퍼들을 생각하면 그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아니, 불러.”

고민하던 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판단을 이해하기 어려웠는지 재효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든 별종 하나는 있겠지.”

사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센터 내에서 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당당하게 자행되는 일은 아니다.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경찰들도 에스퍼니까 일반인보다야 낫겠지.”

“사설 경비든 센터에서 지원 나온 거든 경찰이 상대하기는 힘들 거야.”

재효의 걱정에 사헌이 억제기가 채워져 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경찰에 지원하는 사람은 주로 에스퍼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다. 지금 두 사람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제압해 달래?”

사헌이 혀를 찼다. 재효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경찰들이 할 일은 발을 묶는 거야.”

재효와 윤서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경찰이 입구를 정찰하는 에스퍼들의 발만 묶어도 잠입이 수월할 터다.

“그런데 뭐라고 신고하게? 어지간해서는 안 올 텐데…….”

“같이 술 마시던 사람이 돌변해서 죽이려고 한다고, 그래서 방에서 도망쳤다고 제발 구해 달라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윤서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결정적으로 그 작전을 성공시킨 건 그의 연기력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정말 위협받고 있어 두려운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호텔 앞에 멈췄다. 윤서의 신고 내용대로 위로 올라가려고 호텔에 진입하자 하나둘 모여든 에스퍼들이 그들을 막았다.

센터 소속 에스퍼와 경찰들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주로 센터 쪽에서 던전에도 못 가는 얼간이들이라고 일방적으로 경찰들을 무시하는 쪽이지만. 곧 몇 대의 경찰차가 더 도착했다. 힘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올라갈 기세였다.

“역시 대한민국 경찰은 믿을 만하네요.”

그들을 부른 윤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윤서 너는 여기서 돌아…….”

“걱정 말아요.”

재효의 말을 가로막은 윤서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스프레이, 쌍절곤. 버튼을 누르면 시끄럽게 울려 대는 호출기까지. 에스퍼의 습격에 최소한의 대비는 하고 있는 듯했다.

“그거 구매한 사이트. 김재영한테도 꼭 알려 주십시오.”

사헌은 마음에 든 투로 윤서에게 당부했다. 친하게 지내는 걸 막을 수도 없지만, 막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이죠.”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윤서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못 쓰는 건 마찬가지니까 다 같이 움직이자.”

재효의 제안에 사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판단에 있어서는 재효가 맞는 편이다. 세 사람은 계단을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숨이 찬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흐릿했다.

마침내 꼭대기 층까지 올라서서 주변의 소리를 탐지했다. 음악 소리. 시답잖은 농담에 웃는 소리.

“정말 유흥 업소가 따로 없네.”

윤서까지 업고 오느라 늦어진 재효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정도예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윤서가 질린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네가 이런 일에 엮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

재효가 다행이라는 듯 윤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알았더라면 당장에 자리 엎어 버리고 센터에 신고했을 걸요.”

“너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사헌은 제 앞에서 눈치도 없이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며 속이 쓰렸다.

“지금 재영이는 안 괜찮으니까 조용히 해.”

신경질적인 한마디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집중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얼간이가 왜 여기 있어?’

거슬리기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재영이다. 사헌은 다시 재영의 흔적을 찾아 귀를 열었다.

순간 사헌의 눈이 번뜩였다. 끊어질 듯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재영의 것이었다. 쫓기는 듯 초조함이 느껴졌다.

“찾았다.”

“정말요?”

윤서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비상구 문을 열려고 했다. 사헌이 손으로 문을 누르며 막았다.

“찹쌀떡은 방 바깥에 있어. 찾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너희는 다른 가이드들을 찾아 봐.”

센터가 가이드를 이용해 정부 실세들에게 접대하고 있다는 증거를 남겨야 했다. 그러려고 재영이 이 위험한 곳에 뛰어든 것이니까.

“맡겨만 주세요!”

윤서가 속삭이듯 외쳤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재효보다 믿음직하긴 한 것 같다. 그들을 보내고 사헌은 홀로 재영을 찾아 소리가 난 곳으로 갔다.

* * *

재영은 놀라서 힉, 숨을 삼켰다. 앉아 있는 상태가 아니면 그대로 뒤로 넘어갔을 터다.

‘미친놈인가.’

하얗게 질린 재영은 당장 문을 젖히고 화장실 칸에서 빠져나갔다. 몸이 무거운 의원은 변기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이구. 또 도망인가?”

등 뒤에서 징그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워하는 음성이었다. 재영은 허겁지겁 화장실을 나갔다.

‘어디로 가지?’

재영은 막무가내로 뛰어든 복도에서 탈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땀이 식어서 등이 서늘했다. 그런데 저만치서 의경이 복도에 나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이쪽으로 똑바로 오고 있었다.

‘이대로면 다시 끌려갈 거야.’

재영은 초조한 얼굴로 숨을 곳을 찾았다. 그때 재영의 눈앞에서 다른 방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재영은 열린 문 뒤로 몸을 감췄다. 재영을 발견하지 못한 의경이 그를 지나쳐 화장실로 갔다. 이제 거기에도 재영이 없다는 걸 알고 주변 경비를 보고 있다는 에스퍼까지 불러 모을지도 모른다.

‘우선 아래로 내려가자.’

의경에게 빼앗긴 스마트폰이나 워치가 눈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거야 나중에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재영은 쓴웃음을 삼켰다. 갑자기 복도에 사람이 늘었다. 정장을 입은 경호원 같은 사람들은 분명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학성길 의원을 마주친 의경이 재영을 찾으라고 연락한 게 분명했다.

재영의 눈에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이 보였다. 재영은 그의 팔 아래로 들어가 반강제로 어깨동무를 했다.

“어디까지 가세요?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남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에스퍼라면 분명 들을 수도 있겠지만, 방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에 묻히길 기도할 뿐이었다.

“친절한 분이시네요.”

재영의 호의 아닌 호의를 받아들인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경계심이 없긴 하지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럼 저 앞까지만 데려다 줘요.”

남자가 가리킨 곳은 멀지 않은 방이었다. 취한 남자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걷자 에스퍼들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운이 좋았어.’

남자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 준 재영은 뒤를 힐끔거리면서 모퉁이를 돌았다. 재영이 아래로 도망쳤다고 생각했는지 경비들이 비상구로 들어갔다.

그때 손목이 잡혔다. 벽의 차가운 기운이 등에서 시작해 온몸을 오싹하게 했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상대의 소중한 곳을 가격하기 위해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재영의 어깨를 잡아 제 품으로 당겼다. 단단한 가슴에 코를 부딪친 재영은 몸에서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이 온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다.

재영은 퍼뜩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갈색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사헌이 형!’

눈동자를 바삐 굴려 그 얼굴을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굳은 사헌의 얼굴에도 안도가 스며들었다. 재영을 꽉 틀어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재영의 눈앞에 사헌의 스마트폰이 들이밀어졌다.

[나] : 어디야

자세히 들여다보자 화면에 글자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대화 상대는 재효고, 보낸 건 사헌이다. 재영은 그가 왜 제게 다른 사람과의 대화창을 보여 주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다시 사헌의 얼굴을 살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나한테 묻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뭘 묻는지는 뻔하다. 재영은 손가락을 들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중간에 눈을 들어 사헌의 눈치를 살폈다. 변함없이 조용히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이게 정답인 것 같다.

[나] : 1405호요.

사헌이 고개를 틀어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재영이 찍어 둔 문장을 전송했다. 곧장 재효에게서 오케이라는 답이 날아왔다.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알아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건물에 에스퍼가 사헌과 재효, 두 사람만이 아니다. 그중 누군가가 대화를 엿듣기라도 하면 현장을 급습하기 어렵다.

이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온기가 느껴졌다. 사헌이 재영의 손을 꽉 맞잡고, 걷기 시작했다. 재영은 사헌을 등에 업고 당당히 룸으로 돌아갔다.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가 실리지 않은 음악 소리만 내부를 쿵쿵 울리고 있었다.

‘설마 벌써 도망친 건 아니겠지?’

문을 코앞에 두고 재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서 춤까지 추던 사람들이 방구석에 모여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가려다가 막힌 모양새였다.

“자자, 고개들 드세요. 이렇게 즐거운 건 다 기록해 놔야죠.”

가만보니 테이블 위에 올라 선 윤서가 스마트폰으로 방 구석구석을 훑으면서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밝은 얼굴이다.

‘형이 즐거우면 된 거지.’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김 회장님! 왜 거기에……, 윤 사장님도…….”

등 뒤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알아챈 듯 의경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려는 의경의 앞에 학성길 의원이 무거운 몸을 들고 나타났다. 재영은 흥미가 어린 눈으로 그들의 반응을 감상했다.

“너, 너 이 새끼……!”

아연한 얼굴로 방을 살피던 학성길이 다른 사람과 달리 당당히 선 재영을 발견했다. 그리고 무슨 배신자라도 본 양 손가락질을 하며 몸을 덜덜 떨어 댔다.

마주 잡은 사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재영은 신호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였다.

“방해꾼은 이만 빠질 테니 즐거운 시간되세요!”

급한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가자 경호원 같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경찰을 뿌리치고 올라온 그들은 사헌을 발견하고 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뭐 하다가 이제들 오는 거야! 당장 잡아!”

숨기 바쁘던 사람들이 제 편을 발견하고는 기세등등해져서 소리쳤다. 당황하던 에스퍼 중 하나가 제일 만만해 보이는 재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재영이 그 시도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헌이 멱살을 잡고 벽으로 집어 던진 후였다.

“감히 누굴 건드려.”

벽에 반쯤 박힌 남자를 쳐다보며 사헌이 차가운 분노를 내뿜었다. 재영마저 오싹해질 정도였다. 정면에서 그 시선을 마주한 에스퍼들은 꼼짝 못 하고 굳어졌다.

“손목 안 보여?”

그때 뒤에서 앙칼진 외침이 들렸다. 목소리를 들은 사람의 시선이 전부 사헌의 손목을 향했다. 손목에 장신구처럼 주렁주렁 달린 것은 분명 마력 제어기다. 재영은 눈을 크게 뜨고 사헌을 올려다봤다.

“마력을 못 쓰면 평범한 인간이나 다를 바 없어!”

그러면서 정작 의경 자신은 덤벼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용기가 생겼는지 에스퍼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움직이지 마.”

재영의 앞을 막아선 사헌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시에 온갖 이능력이 사헌의 앞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옆얼굴에 떠오른 것은 성가심뿐이었다.

“마력 제어기가 무슨 무적이라도 되는지 아는 모양인데.”

느른하게 내뱉은 사헌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들이 쏟아 낸 공격과 함께 에스퍼들이 저 멀리로 날아갔다. 현실감 없는 모습에 재영은 눈만 끔뻑였다.

“다쳤어?”

사헌이 재영을 돌아보며 여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커다란 등 뒤에 숨어 있던 재영은 당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사헌의 얼굴 근육에서 힘이 빠졌다. 그를 본 재영의 얼굴이 이내 하얗게 질렸다.

“혀, 형! 피나요!”

쏟아지는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선 것은 사헌이다. 역시나 그의 얼굴, 팔 등 드러난 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재영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상처부터 톡톡 두드렸다. 손이 조금씩 떨렸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뒤에서 재효가 말을 걸었다. 벽에 처박힌 에스퍼들이 정신을 차린 듯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저들 말고도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른다.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헌이 그의 손을 손수건 채로 붙들었다.

재영은 재효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서 사헌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민망한 소리가 났다.

앞에 있는 재효와 윤서가 신경 쓰였지만, 재영은 말리지 않았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던 사헌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서훈 연락처.”

어느 정도 만족했는지 사헌이 재영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사헌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이름이라 순간 굳었다.

“아, 전화해서 바꿔 드릴게요.”

뭐든 용건이 있겠지, 싶어 재영은 서훈의 번호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사헌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됐으니까 번호만 내놔.”

그러더니 재영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채갔다. 훈의 연락처를 제 스마트폰으로 옮긴 사헌이 그대로 윤서에게 넘겼다. 제가 찍은 동영상과 사진을 보며 낄낄대던 윤서가 두 손으로 정중히 받았다.

“하랑 길드로 넘기려고요?”

그게 아니라면 사헌이 훈의 연락처를 궁금해할 이유도, 그걸 윤서에게 넘길 이유도 없다. 사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개인으로 처리하기엔 힘든 일이야.”

하랑 길드는 대한민국에서 센터 다음으로 강한 무력 집단이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는 하랑 그룹이 있다. 대치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센터의 높은 분들과 얽혀 있을 리도 없고. 전국 고아원으로 봉사를 다닐 만큼 에스퍼의 복지에도 힘쓰는 이들이다. 센터의 부패를 안다면 분명 제대로 터뜨려 줄 것이다.

“그런데 형, 제어기는 왜 안 풀었어요?”

“담당자가 부재중이라서 풀 수가 없었어.”

사헌이 비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재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훈련이 있는 날 일을 벌인 게 분명해요.”

재영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던 의경을 떠올리며 씩씩댔다.

“사헌이는 의외로 성실해서 훈련을 빼먹은 적이 없으니까.”

재효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돌아가면 담당자부터 신고해요.”

윤서가 사헌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위에서 명령을 받았든 아니든 그자가 제 일을 소홀히 한 건 사실이야.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지.”

사헌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력 제어기 몇 개로 사헌을 완전히 어쩌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번거롭게 만든 건 사실이다. 센터에서 징계를 주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라도 벌을 줄 것 같은 기세다. 재영은 잠자코 사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벌써 집에 돌아온 것처럼 포근했다.

* * *

폭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고요한 날이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센터에서 사헌을 호출하는 잦아졌다는 것이다. 그 사건 때문은 아니다. 아니, 맞나.

사헌이 쉴 새 없이 울리는 워치를 풀어 소파 위로 던졌다. 센터 소속 에스퍼는 한 달간 일정 횟수 출동했다면, 모든 던전에 참여할 의무는 없다. A급 이상의 던전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재영은 차게 식은 눈으로 워치를 쳐다보다가 쿠션을 던져 덮어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벨소리가 울렸다. 이것 또한 그간의 변화 아닌 변화다. 에스퍼 관리자라는 이름부터 센터장까지 끊임없이 사헌을 귀찮게 굴었다.

“안 받아도 돼요?”

재영은 누구 실장이라고 적힌 화면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받으면 센터에 출근하라고 할 거고, 가면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하겠지.”

사헌이 시니컬한 투로 말했다. 에스퍼는 처음 계약 3년 이후로 1년씩 재계약 시즌이 오는데 지금이 그때였다. 그런데 항상 두말없이 계약을 이은 사헌이 이번에 굼뜨게 행동한 것이다. 센터도 그에게 한 짓이 있으니 여유 시간이 있는데도 조급하게 구는 것이고.

<센터,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와 재계약 불발?>

포털의 메인에 올라온 이 기사를 필두로 비슷한 제목과 내용의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연이어 쏟아지는 기사가 이상하긴 했다.

재영은 물어볼까, 말까 복잡한 눈으로 사헌을 힐끔거렸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형, 택배 올 거 있어요?”

재영은 대수롭지 않게 물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웬 노인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 있었다.

“날세.”

인터폰이 연결됐다는 걸 알아챈 노인이 얇은 입술을 옴작거리며 말했다.

“이 분…….”

재영은 말꼬리를 흐렸다. 한동안 재영도 자주 보던 얼굴이다.

“센터장이네.”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사헌이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바로 내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노인이라서 그냥 쫓기 그랬나?’

재영은 제가 떠올려 놓고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사헌이 그렇게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으면 ‘공주님’이라는 별칭이 생겼을 리가 없다. 어쨌든 공동현관을 지나 펜트하우스 현관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사과하러 온 걸까요?”

재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사헌이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센터장에 대해서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재영은 센터장의 앞에 주스가 든 컵을 내려놓았다. 권하지도 않은 상석을 차지한 센터장은 대접에 고마워하는 티도 내지 않았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헌의 옆에 앉았다.

“……뜸 들일 필요가 있나? 괜히 기자들 연락하고, 민원 때문에 업무에 차질이 있다고 아주 난리야.”

센터장이 질린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사헌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센터장을 쳐다봤다. 안달이 나서 집까지 찾아왔으면서도 고자세를 유지하던 센터장이 그제야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 입장도 생각 좀 해 주게. 나만이 아니야. 센터 유지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상상할 수도 없을 걸세. 그게 다 자네들, 에스퍼를 위해…….”

“에스퍼를 위해?”

말을 모르는 것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사헌이 되물었다. 아주 재미있다는 투였다. 속이 있기는 한 건지 센터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 돈 들인 티는 잘 안 난다고 하지 않나.”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변명이라고 내뱉은 것이 초라했다.

이마 위쪽의 광이 나는 부분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센터장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수리까지 훑었다.

“어쨌든 계속 불안을 조장해서 좋을 게 뭐가 있나.”

능청 떠는 센터장의 말에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헌이 에스퍼를 관둔다는 것도 아닌데 국민들이 불안할 것이 뭐가 있나.

“저 하나 없다고 불안을 느끼면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재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헌도 언젠가 쉬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다. 잠깐의 휴가일수도, 아니면 긴 휴식일수도 있다. 그때마다 던전 브레이크 초기의 공포를 느낀다면 살기 힘들지 않을까.

“지금 센터장님 말씀은 나머지를 가진 힘도 제대로 못 쓰는 머저리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말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사헌만큼은 아니어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에스퍼들이 많다. 그 점을 꼬집자 센터장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머저리가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낯부끄러운 접대를 하는 현장이나 지키고 있으니. 사헌이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작지 않은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훤하게 벗겨진 센터장의 머리는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난리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나.”

이제 센터장은 거의 빌고 있었다. 겉모습은 노인이라서 약간의 연민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원의 비위를 맞추겠답시고 사헌에게 부당한 징계를 준 것이 지워질 정도는 아니다. 재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제게 썩 긍정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살피던 센터장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마침 계약서도 있으니 여기서 마무리 짓지.”

계약서였다. 사헌이 당연히 그렇게 할 거라는 투다. 사헌은 거들떠보기만 했다. 그런데 센터장이 그 옆에 당연하다는 듯 한 장의 계약서를 더 내려놓았다.

“이번 기회에 자네 가이드도 함께 계약하는 게 어떤가. 물론 자네처럼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될 걸세.”

마치 인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였다. 재영을 언급하자 심드렁하던 사헌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 그럼 잘 생각해 보게. 나는 이만 가 볼 테니까, 편하게, 응?”

이런 쪽에서는 눈치가 좋은지 센터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재영을 힐끔거리며 현관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등을 보이면 맹수에게 뜯기기라도 할까 봐 겁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현관문이 기계음을 내며 닫혔다. 어느덧 지워진 불쾌감에 멍하니 문만 보던 재영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생각나요?”

센터장이 가든 말든 스마트폰을 들고 어딘가로 연락하던 사헌이 뭐냐는 듯 묻는 눈으로 재영을 내려다봤다.

“우리 계약하기 전에요. 형도 어딜 가든 항상 계약서 들고 다녔잖아요.”

그때를 추억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하다. 어디서나 나타나는 사헌 때문에 등골이 서늘하곤 했었다.

“그러게 일찍 해 줬으면 좋았잖아.”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흘린 사헌이 핀잔을 줬다. 재영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진사헌 에스퍼, 발현 이후 처음으로 FA로 나와…….>

<공주님, 센터와 결별?>

<센터는 어쩌다가 진사헌 에스퍼를 놓쳤나>

사헌의 계약 종료와 함께 온 세계가 들썩였다. 그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메일이며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다. 심지어는 집 앞까지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중 일반인도 있다는 걸 알아챈 재영은 미약한 책임감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제가 사헌을 달래야 했다. 뭐든 충격이 덜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복을 걷어찬 건 센터야.”

후회하는 재영을 본 사헌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스스로를 ‘복’이라고 칭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의 뻔뻔함에 재영의 마음도 편해졌다.

사헌의 말대로 센터가 나쁜 게 맞다. 그 정도 공헌을 했으면, 조금 편의를 봐 줘도 될 텐데 징계 중 소란을 일으켰다고 기간 연장까지 했다. 범법을 저지른 사람은 분명 따로 있는데도 말이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사헌이 저지른 위법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설마 진짜 해외로 갈 건 아니죠?”

댓글을 살피던 재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센터와의 계약 불발은 물론이고, 다른 어디와도 계약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사헌이 높은 연봉을 제안하는 해외로 넘어갈까 봐 국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높아졌다. 센터는 기자 회견을 통해 S급 에스퍼의 부재로 국가가 위험 상태에 빠질 일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키려 했다. 사헌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전국민이 불안해할 거라고 했던 센터장의 말과 대조됐다.

“왜? 가고 싶은 곳 있어?”

사헌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만 하면 그게 어디든 날아갈 자신이 있다는 듯 당당한 투다.

“아니요. 가족도 친구도 여기 있는데 해외에 가서 뭐 해요.”

잠깐 여행을 가도 가족이나 친구가 그리워지는데 아예 이민이라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읽어 둬.”

사헌이 대답 대신 검은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재영의 앞에 내밀었다.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하랑 길드 가이드 계약서?”

상단의 글씨를 확인한 재영은 믿을 수 없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랑으로 가려고요?”

대충 봐도 하랑은 센터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제안했다. 대기업을 등에 지고 있어서인지 국내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국내로, 다른 선진국에서 제안한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네가 거길 좋아하잖아.”

사헌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내뱉었다. 하랑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재영이 무언가 좋아한다는 걸 싫어하는 느낌이다.

“아니, 그래도 계약이 장난도 아니고…….”

재영은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사헌이 회사를 고른 이유가 저에게 있다는 게 기쁘고, 한편으로는 저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을 마다한 게 되어 미안했다.

“가족, 친구가 다 여기 있는데 가기는 어딜 가. 국내 최고 조건이야.”

사헌이 재영의 말을 그대로 되돌리며 손끝으로 계약서를 톡톡 쳤다. 그렇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재영의 눈에 테이블 끝이 걸렸다.

“그건 다 뭐예요?”

테이블에 쌓인 종이를 가리키며 묻자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재영에게 넘겼다. 재영에게 보여 준 것과 같은 계약서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길수록 재영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름 한 번쯤은 들어 봤다 싶은 에스퍼들의 이름이 거의 다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팀 소속으로 진사헌 에스퍼를 대장으로 두고 있었다.

“계약이 완료되는 시점은 거의 다 비슷하거든.”

사헌이 얄밉게 웃었다. 그 대단한 사람들이 거의 사헌을 따라 이적한다는 거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득을 따라 움직인다는데 안 될 게 뭐 있어.”

사헌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재영은 제법 괜찮은 복수법이라고 생각했다. 국내를 떠나는 것도 아니라 국민의 원성을 받을 일도 없을 터다. 다만 어떻게 했길래 에스퍼들이 한꺼번에 보이콧을 하는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진 재영은 포털 사이트를 열어 하랑 길드에 대해 검색했다. 길드장은 이지적인 외모의 여성이었다. 에스퍼라기 보다는 엘리트 회사원처럼 보였다.

“길드장은 B급 보조 에스퍼래요.”

그녀의 이력을 살핀 재영이 놀란 얼굴로 내뱉었다. 의외다. 공무원인 센터장과는 달리 길드의 장은 보통 가장 강한 사람이 맡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고 뒷배라는 서훈의 집안 사람도 아니다.

“하랑 길드는 여러모로 독특하네요.”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소풍 가기 전날처럼 기대와 설렘으로 마음이 붕붕 떴다.

“뭐 하러 찾아봐.”

사헌이 못마땅하게 말하며 재영의 폰을 뺏었다. 뒷조사처럼 보이려나. 재영은 민망한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내 직장이 될 건데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계약서를 줘 놓고도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센터 떠나려니까 걱정 안 돼요?”

물론 재영은 좋기만 했다. 지금까지 만나고, 겪은 하랑 길드의 사람들은 전부 좋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헌은 다르다. 그에게 센터는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의탁한 곳이다. 새로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크게 와닿지 않을까.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내가 그대로인데.”

하지만 사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그랬다. S급 에스퍼 진사헌은 그대로고, 출동 명령을 어디서 받는지만 달라질 뿐이다. 그의 손발이 되어 줄 팀원들도 대부분 그와 함께할 테고.

“너는 나만 알면 돼.”

사헌이 재영의 품에 파고들 듯이 그를 끌어안았다. 어감이 묘했다. 재영은 볼을 붉혔다.

“그래도 형은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해.”

웅얼거리듯 내뱉은 사헌이 재영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그가 제 말을 부정하지 않는 게 기뻤다. 재영은 그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열기가 잔잔하게 깔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알려 주세요.”

재영은 속삭이듯 내뱉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눈가가 촉촉했다. 재영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사헌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 * *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재영은 바로 다음 날 사헌에게 끌려 시내 중심에 있는 하랑 길드를 찾았다. 아무래도 계약을 원하는 사람들의 연락이 귀찮았던 모양이다.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다더니 하랑 길드의 건물은 센터 못지않은 규모에, 시설도 번쩍였다.

“손.”

입구로 들어가기 전, 사헌이 재영을 향해 내뱉었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낯선 곳인데 길 잃으면 큰일이잖아.”

그 손에 깍지를 껴서 잡은 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형이 좋으면 됐지.’

터무니없는 이유지만 아무래도 좋은 재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영.”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서훈!”

재영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낯선 장소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더 기뻤다. 그러자 맞잡은 손에서 압박이 느껴졌다.

“네가 여긴 웬일이지?”

사헌이 날선 어투로 물었다. 그가 에스퍼로서 훈을 경계하는 걸 알았기에 재영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훈이 사헌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길 안내를 맡았습니다. 가시죠.”

“어린애도 아니고.”

사헌이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길을 잃을까 봐 손잡으라던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다. 재영은 사헌의 흑심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서훈이 계단을 지나쳐 쭉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엘리베이터로 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재영은 물었다.

“길드장실.”

서훈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곧장 최종 보스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단숨에 긴장감이 들었다.

“위로 안 가?”

재영은 지나쳐 버린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길드장실은 1층에 있어.”

어느 드라마든 사장실은 꼭대기 층에 있지 않나.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올라가기도 귀찮고, 시간 낭비라고 안 좋아하셔.”

서훈이 익숙하다는 듯 대꾸했다. 현실적인 이유다. 재영은 현명한 판단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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