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

13.

땅개, 이준오는 B급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정도의 마나 밖에 가지고 있질 못했다. 하지만 마나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응용력이 뛰어난 능력자였고, 사헌이 그런 그를 알아보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고 에스퍼에 진심인 동준이 설명했다.

그리고 땅개는 사헌이 꽤 아끼는 팀원이다. 그가 직접 발굴하고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땅개의 소식을 들은 즉시 사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게 밀린 의자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휴가는 여기서 끝낸다.”

사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재영은 덩달아 굳은 얼굴로 자리를 정돈했다.

“네? 갑자기요?”

“겨우 이거 놀자고 좁은 이코노미석에 구겨져서 온 줄 알아?”

눈치 없는 민태와 해운이 아쉬운 티를 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멀리까지 다 같이 놀러 온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대학 입학 전 여행은 던전 때문에 흐지부지되어 버렸으니까.

“애들은 그냥 따로 오라고 하죠.”

재영은 제 친구들의 눈치 없음에 한탄하며 말했다. 그러자 사헌이 대답 대신 재영을 돌아봤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눈빛이다.

“……너도 아쉬우면 놀다 와도 돼.”

마침내 사헌이 전혀 괜찮지 않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내뱉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매서운 얼굴로 고민하던 게 겨우 저를 두고 갈지, 데려갈지 고민하는 거였다니.

“같이 다니기로 했잖아요.”

재영은 가볍게 대답했다. 사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역시 데리고 가고 싶었던 거다.

“던전에 가시는 것도 아닌데 너는 좀 있다 가면 안 되냐?”

동준이 사헌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소신 발언을 했다. 재영은 도착하자마자 따로 떨어져서 엠마를 만났고, 모인 게 지금이 처음이다. 다 같이 바다까지 왔는데 추억 하나 만들지 못한다는 게 영 아쉬운 모양이다.

“안 돼. 이준오 에스퍼님이 다쳤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는 거야.”

하지만 재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따라가겠다는 건 마냥 사헌과 붙어 있고 싶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사헌과 함께 갖은 단계의 던전을 누빈 이준오 에스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렇다고 기세가 등등해서 멋대로 행동하는 일도 없다. 그러니 사헌이 부재 중인 이때, 부상 입을 정도로 위험한 행동을 자초했을 리 없다. 아마 사헌도 그래서 준오의 소식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올 때와는 달리 나름 급박한 상황이라 이동 수단으로 재효가 나섰다.

“거리가 꽤 있는데 괜찮겠어?”

윤서가 재효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윤서가 있으니까 당연히 괜찮지.”

재효가 다정하게 말하며 윤서를 달랬다. 전담 계약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도 스스럼없어졌다. 재영은 그런 둘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곧 눈앞이 이지러졌다.

* * *

사헌이 어지러움을 느끼는 재영을 품에 안고 가만히 등을 두드려 줬다. 안정을 찾은 재영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도착한 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왜 센터로 온 거예요?”

“에스퍼랑 가이드는 센터에 병동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윤서가 대답했다. 평소와 다르게 로비에서 계단을 오르지 않고, 왼쪽 복도로 꺾어 쭉 걸어갔다. 재영은 낯선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센터 소속이 아니니 곳곳을 누비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처음 와 보는 길이었다.

긴 복도에는 문이 여럿 보였다. 사헌이 거침없이 걸어가 한 방의 문을 열었다. 좁은 병원 침대 위에 준오가 앉아 있었다.

“앗, 대장, 부대장. 여행가셨다고 들었지 말입니다.”

열리는 문을 덤덤히 바라보던 준오가 눈을 땡그랗게 뜨며 말했다. 말을 그렇게 해도 두 사람의 등장에 반가워하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재영은 붕대가 칭칭 감긴 머리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이건 그냥 피가 잘 안 멎어서 묶어 둔 거야.”

준오가 씨익 웃으면서 주먹 쥔 손으로 제 머리를 퉁퉁 두드렸다. 에스퍼가 피가 잘 안 멎는다면 그건 큰 문제 아닌가. 준오는 덤덤한데 재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준오가 아차 싶었는지 제 손으로 붕대를 풀었다.

“그거 마음대로 풀면……!”

“이제 멀쩡하다니까.”

재영의 타박에 준오가 앞머리를 올려 상처를 보여 줬다. 아니, 상처가 있었던 자리를. 피부에 드문드문 달라붙은 핏자국만이 거기에 상처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에스퍼, 재수 없네요.”

제 걱정이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아챈 재영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뒤에서 사헌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아, 그게 말입니다. 이번에 B급 던전이었는데 함께 갈 상급자가 없다면서 동행하라지 않습니까. 초반만 해도 문제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왔을까, 갑자기 눈앞이…….”

“짧게.”

준오가 쏟아 내는 말을 듣고 있던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변이가 발생했고 다쳤습니다.”

준오가 눈썹 근처로 날을 세운 손을 올리며 군인처럼 대답했다.

“누가 너의 출동을 허락했지?”

사헌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준오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건 팀장인 그뿐이다.

“그게…….”

준오가 난감한 얼굴로 사헌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숨이 막힌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영은 사헌이 마나로 준오를 압박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앉은 채로 납작 엎드린 준오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래도 환자인데, 사헌은 자비가 없었다.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침 재효가 사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준오가 급격히 몰아치는 숨을 삼키며 헐떡였다.

“바, 박재윤 에스퍼님입니다.”

낯선 이름의 등장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기도 하고.

보복해야 할 상대의 이름을 들은 사헌이 몸을 휙 돌려 병실을 빠져나갔다. 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너희는 여기서 준오 좀 지켜봐 줘.”

재효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사헌의 뒤를 쫓아갔다. 윤서가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잡을 틈도 없었다.

“화나신 것 같죠?”

재빠르게 문을 빠져나간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던 재영이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응.”

준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처음에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만큼 사헌이 박재윤 에스퍼와 마찰하는 걸 원치 않은 것 같다.

“박재윤 에스퍼가 누구에요?”

“A급인데 구실도 못 하는 놈 있어.”

재영의 물음에 윤서가 말도 꺼내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별로 평이 좋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아, 얼굴은 제대로 봐둬.”

윤서가 보고 피해야 한다며 스마트폰에 박재윤 에스퍼를 검색하게 했다. 정보는 넘치도록 많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도련님처럼 생겼다. 실제로도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대기업의 3세다.

그런 그가 ‘S급에 살짝 모자른’ A급 에스퍼로 발현했고, 기업 경영 대신 목숨을 걸고 던전에 뛰어든 것이다.

과장해서, 대한민국이 열광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며 언론마다 요란하게 기사를 때려 댔다. 그것이 사헌이 발현하기 3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아직 활동 중인 S급 에스퍼가 있는데도 박재윤이 대한민국 최고 전력인 것처럼 불리던 때였다.

그러다가 S급 진사헌이 나타났다. 비슷한 조건으로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닌 데다가, 소란을 만드는 데도 재능 있는 사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넘어간 건 당연했다.

재윤도 마찬가지로 팀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어째서인지 중계로도 그의 모습은 잘 볼 수 없었다.

‘나랑은 별 상관없겠지.’

재영은 인터넷 검색창을 껐다. 던전에 동행하더라도 사헌이 팀 단위로 움직이니 박재윤 에스퍼와는 따로 만날 리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준오 에스퍼는 갑자기 왜 부른 거래요? 휴가 내지 않으셨어요?”

윤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준오를 비롯한 팀원들은 징계를 받은 사헌을 따라 휴가를 냈다고 했다.

“그게, 그 사람 취미가 우리 대장님 관심 끌려는 거거든.”

재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라이벌. 훈훈하게 잘생겼다고 생각한 박재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갑자기 야비한 족제비처럼 그려졌다.

“박재윤 에스퍼가 우리 대장님한테 은근히 자격지심이 있어. 그러니까 그 팀원인 나를 부리면서 어느 정도 대리만족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사헌에 대한 박재윤 에스퍼의 감정은 재영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재영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 사람 좋아하지는 않지만, 심하게 하지는 않으셔야 할 텐데…….”

준오가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게 같은 소속인데 마찰이 생기면 센터 측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재효 형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윤서가 준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키려 했다. 재영은 문득 사헌만큼은 아니어도 화가 나 보이던 재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윤서도 재영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얼른 덧붙였다.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변이 던전이 정말 많이 발생하네요.”

재영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그런데 뱉고 보니 그것도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변이 던전이 많이 발생하는 건 물론이고, 던전이 발생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지구가 화가 나서 인류 멸망이라도 시키려는 거 아닐까요?”

윤서가 애써 장난스럽게 꾸민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준오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것보다는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문제는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냐는 거다. 각자의 생각으로 병실이 조용해졌다.

콰앙-

그때,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렸다.

“엎드려요!”

재영은 윤서의 머리를 감싸며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몸을 일으킨 재영은 준오가 침대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민망해졌다.

“큰일이다. 난리 났어.”

하지만 몸이 괜찮다고 해서 정신까지 괜찮은 건 아니었다. 준오가 창백하게 질려서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재영은 불안해하는 그의 모습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사헌 형 짓이에요?”

경악한 재영의 얼굴이 이내 파랗게 질렸다. 이미 징계 중인데 같은 에스퍼에게 손을 댔으니 무슨 벌을 받게 될지 걱정됐다.

재영과 윤서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두 사람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X 됐다.’

말로 하지 않아도 생각은 같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었다. 그리고 두 가이드의 앞에는 환자복을 나풀거리는 에스퍼 이준오가 있었다.

“3층 독신 에스퍼 기숙사 쪽입니다.”

준오가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청각이 발달한 에스퍼답게 정확한 위치를 잡아낸 것이다. 길을 잃을까 봐 중간중간 멈춰서 두 사람을 기다려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이미 모여든 구경꾼으로 인산인해였다. 준오가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 틈을 벌리면 재영은 그 안으로 쏙 몸을 넣었다.

“뭐야, 폭행 사건이야?”

“무슨 일이지? 박재윤 에스퍼가 또 진사헌 에스퍼를 건드렸나?”

뒤에 있어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어 대며 재영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했다. 안달 난 재영은 까치발을 들고 낑낑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문 가까이 사헌이 등을 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살피기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형은 안 다쳤나 보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해서 사헌을 이길 상대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재윤 에스퍼는?’

큰 걱정을 날려 버린 재영은 이제야 다른 사람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꼿꼿하게 서 있는 사헌과 달리 박재윤 에스퍼는 거의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다친 건 아니겠지?’

재영은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겨우 본 재윤의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에스퍼라서 다 나은 건가?’

하지만 재영은 곧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재윤이 데굴 바닥을 굴러 사헌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이다.

아니다.

‘형이 피하게 둔 것 같은데…….’

다음 공격이 이어지는 간격이 컸던 것이다. 사헌의 발차기를 피한 재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다음 공격이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재영은 사헌이 완전히 이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그리고 슬슬 사헌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잠깐만요. 들어갈게요, 죄송합니다.”

재영은 제게 밀려서 짜증이 난 사람마다 얼굴을 들여다보며 꾸벅거렸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진사헌 에스퍼의…….”

“네. 제가 바로 진사헌 에스퍼님의 가이드입니다.”

재영은 웃는 얼굴로 싹싹하게 대꾸하며 사헌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방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반으로 갈린 테이블이 천장에 꽂혀 있고, 침대가 던져진 벽은 부서져서 옆방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 외에도 온갖 집기가 바닥, 천장, 벽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엉망으로 널브러진 소품만 봐도 얼마나 고급스러운 방이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쉰 재영은 사헌의 곁으로 한발 더 다가섰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 사헌이 곧장 뒤를 돌아봤다.

매서운 얼굴은 재영을 확인하자마자 부드럽게 풀렸다. 알게 모르게 쫄아있던 재영은 안도하며 잰걸음으로 사헌에게 다가갔다.

“형. 안 다쳤어요?”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헌의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센터 안에서는 사사로이 능력을 쓸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참상은 순수하게(?) 사헌의 완력으로만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 다쳤잖아요.”

사헌이 눈을 내려 재영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벌써 상처가 아물어 핏방울만 고여 있을 뿐이다. 재영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저 안타깝다는 눈으로 흔적을 바라봤다. 구경꾼들이, 그중에서도 직접 피해를 입은 박재윤이 자신을 차게 식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제 됐어.”

“집으로 돌아갈까요?”

사헌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가라앉은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살살거리며 그의 팔에 엉겨 붙었다.

“그런데 우리 여기 차 없잖아요. 택시 부를까요?”

“그냥 뛰어가도 되는데…….”

사헌이 말꼬리를 끌면서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에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택시 불러.”

사헌이 바로 말을 바꿨다.

“네.”

재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스마트폰에서 택시 어플을 열어 예약했다.

“가면서 가이딩할까요?”

사헌의 팔에 매달린 재영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람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다 보면 기분 나쁜 게 날아가곤 한다. 그러니까 온기를 나누면 사헌도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재영은 아무런 흑심도 없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서는 큰 의미 없는 스킨십까지 가이딩으로 통용됐다.

‘나야 좋지.’

재영은 유일한 전담 가이드라는 특권을 한껏 누리기로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헌이 고개를 내저었다. 재영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집에서.”

사헌이 짧게 덧붙였다. 거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재영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감돌았다.

“그래도 손은 잡을까요?”

재영은 포기를 모르고 사헌에게 치댔다. 사헌이 망설임 없이 따뜻한 손을 잡고 깍지를 낀 덕에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구경꾼들이 반쯤 넋이 나가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쳐다봤다.

“진사헌의 가이드라고?”

팀원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재윤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재영의 등을 눈에 새길 것처럼 집요하게 쳐다봤다.

* * *

소란이 일어난 층에서 빠져나오자 사헌을 둘러싼 공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뒤에 누가 있나 알아봐. 저 찌질이가 믿는 구석도 없이 나댈 리가 없어.”

돌아서 재효를 바라본 사헌이 확신에 찬 어조로 내뱉었다.

“너는 괜히 또 불려 다니지 말고 병실에나 박혀 있어.”

재효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사헌이 이번에는 준오를 노려보며 까칠하게 내뱉었다. 그래도 아까보다 화는 많이 가신 느낌이다.

“옙! 가이딩 안 받고, 적당히 손가락 분지르면서 뻐기겠습니다!”

준오는 쓸데없이 밝고 힘이 넘쳤다. 재영은 그의 우렁찬 대꾸에 깜짝 놀랐다. 사헌이 달래듯 잡은 손의 등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그래.”

짧게 대답한 사헌이 준오를 스쳐 갔다. 준오도 그 반응이 대수롭지 않은 듯 아까와 같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설마 진짜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건 아니겠지?’

재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겨진 준오를 힐끔거렸다.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헌이 힘을 주어 재영의 팔을 끌었다.

‘뭐, 자기 몸인데 알아서 하겠지.’

애써 걱정을 털어 낸 재영은 사헌과 발을 맞췄다.

* * *

자체 휴강 이후, 돌아온 학교는 기말고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1학년은 대학에 와서 처음 치르는 시험에는 안중에도 없고, 이어질 방학을 기대하며 어수선해졌다.

그렇다고 시험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재영은 대부분의 공강을 학교 휴게실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한민국 최초의 S급 가이드 취재 열기는 불타오른 만큼 빠르게 식었다. 덕분에 시험 기간에 재영은 한결 편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경호는 전보다 조금 느슨해진 정도였다.

벌써 몇 번이고 줄을 그으며 읽은 초반부를 읽던 재영은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오며 가며 인사 정도 나누던 동기가 재영이 앉은 테이블 앞에 있었다.

“에스퍼님이 너 찾는데…….”

눈이 마주친 동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에스퍼님?”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수업은 전부 경영관 안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라 사헌도 집에서 쉬다가 올 참이다.

“혹시 누구인 줄 알아?”

재영은 사헌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팀원을 대신 보낸 건 아닐까 추측했다. 동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낯이 익긴 한데 누군지 모르겠어.”

“전해 줘서 고마워.”

고민하던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동기의 시간 뺏지 말고 직접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것도 없는데, 뭐.”

동기가 뺨으로 흘러내린 단발을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웃었다. 재영은 용건이 끝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차 싶었다.

“아, 자리 찾는 거면 여기서 해도 돼.”

휴게실 안에 빈자리가 없다는 걸 깨달은 재영은 책을 정리해서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다음 수업이 없으니 집에 가서 공부하면 그만이다.

“돌아올 거면 책 두고 가도 돼. 내가 지키고 있을게.”

동기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그래 줄래?”

고마운 제안에 재영의 눈매가 사르륵 접혔다. 동기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재영은 마음도, 손도 가볍게 문을 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남자를 발견했다. 아는 얼굴이다.

“박, 재윤 에스퍼님?”

재영은 기억 속에서 낯선 이름을 찾아 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이 날 왜…….’

계약한 에스퍼가 따로 있고, 센터 소속도 아닌 재영은 그와 인연이 없다. 그리고 준오를 다치게 한 재윤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지 재윤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지나는 길에 가이드님도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들어서 인사나 나눌까, 하고 왔습니다.”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경영관은 넓디넓은 **대 캠퍼스의 중심에 있었다. 학교 내부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면 ‘지나가다’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 학교에 다니세요?”

내뱉어 놓고 검색창에서 봤던 정보가 떠올랐다.

“아닌데…….”

재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에 대해 좀 알아보셨나 봐요.”

돌연 재윤의 눈이 번뜩였다. 재영은 문득 그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그냥 에스퍼님 이름을 처음 들어 봐서 검색해 봤어요.”

재영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재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얼굴에서 짜증스러운 기색을 지워 냈다. 표정 변화가 매끄러운 사람이다. 재영은 온 신경을 세워 그를 관찰했다.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인터넷이란 게 워낙 가짜 정보를 많이 만들어 내서요.”

재영은 그가 말하는 가짜 정보라는 게 무얼지 궁금했다. 사헌이 팀원을 구하려고 할 때마다 끼어들어 더 높은 계약금을 불러 가로챘던 일? 아니면 사헌이 해외 출장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의 팀원들을 데려다가 생고생을 시킨 일 말인가.

사실 그건 인터넷이 아니라 그 일을 겪은 준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덕분에 재영은 재윤에게 호감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더 알아가고, 오해가 있다면 풀고 그런 기회가 있다면…….”

재영이 껄끄러운 표정을 짓자 재윤이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콰앙!

그 순간 재윤의 몸이 빠르게 벽으로 처박혔다. 그의 등이 닿은 벽 주변에 금이 갔다. 재영은 누군가 남자를 짓누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형!”

사헌이 재윤의 멱살을 쥐고, 온몸으로 누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굳어 있던 재영은 곧 정신을 차렸다. 사헌과 재윤이 매서운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재윤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눈싸움은 형이 이겼네.’

재영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흡족하게 웃었다.

“감히 누굴 건드려.”

사헌이 재윤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대듯 말했다.

“건드리기는 뭘 건드려.”

사헌의 으름에 겁이 났는지 재윤이 저자세를 보였다. 적지 않은 소란에 휴게소 주변의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에스퍼끼리 싸우는 거야? 왜?”

“저기 있는 사람, 가이드 아님?”

“아! 진사헌 에스퍼 가이드네!”

“지금 가이드 가지고 실랑이하는 건가?”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집착한다는 건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재영은 단숨에 이 상황의 중심에 서게 됐다. 두 남자가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을 보며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그 상상 속에서 제 위치는 여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전혀 뿌듯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쪽팔려.’

재영은 속으로 흐느꼈다. 개중에는 용감하게 사헌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실시간으로 지금의 상황이 인터넷에 뿌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영은 종종거리며 사헌의 곁으로 다가섰다.

“형. 다른 데로 옮겨요.”

재영이 팔을 잡아끌자 사헌이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는 소리를 냈지만, 카메라를 치우지는 않았다.

‘초상권 침해로 고소하면 글이든 동영상이든 내릴 수 있겠지.’

재영은 반쯤 체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아. 얼굴 다 기억했으니까.”

곁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본 사헌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사헌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래도 몇몇은 꿋꿋했다. 에스퍼가 일반인에게 능력을 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버티는 모양이다.

‘사헌이 형은 맨주먹도 아픈데…….’

그 주먹에 맞아 본 적 있는 재영은 안됐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인사 한번 하자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

그 틈에 사헌의 손을 떨쳐 낸 재윤이 느물느물한 얼굴로 내뱉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쪽도 못 쓰고 당한 것치고 자존심 상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재영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사헌이 미끈한 눈썹을 치켜올렸다.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열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삐- 삐- 삐-

그때 사헌의 손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형! 출동이에요!”

재영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평소에는 달갑지 않던 호출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나 징계 중인 거 잊었어?”

사헌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아…….”

재영은 멍한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그렇게 던전이 가고 싶어?”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부스스하게 흩어 놓았다. 재영은 억울함에 눈썹을 모았다. 괜한 싸움을 말리고 싶었을 뿐인데, 놀이동산을 가고 싶다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뭐, 가게 될 수도 있겠네.”

심심한 투로 내뱉은 사헌이 재영의 눈앞에 A급 던전 발생이라는 문구를 보였다. 새로 발생한 던전에는 측정된 등급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동행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활동하는 에스퍼 중에 A급보다 높은 건 사헌뿐이다.

“설마요.”

재영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징계까지 준 마당에 필요하다고 부르는 건 양심 없는 짓 아닌가.

* * *

10분 뒤. 음습한 공기가 재영의 피부를 감쌌다. 결국, 센터가 위기 상황이라며 사헌을 호출한 것이다. 센터는 재영의 상상 이상으로 양심이 없었다.

“운 좋으면 S급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아볼 수 있겠네요.”

재윤이 정말 기쁘다는 듯 말했다. 하필 또 이번 던전을 배정받은 것이 박재윤의 팀이었다. 재영은 못 들은 척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은 센터 소속이 아니라 사헌의 전담 가이드 자격으로 왔고, 센터의 가이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재영이 가이딩을 할 필요가 없다.

재윤의 팀원은 서른 남짓으로 사헌의 팀보다 많았다. 자신들의 팀장과 대치 관계에 있는 사헌을 의식해서인지 그들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기 뭔가 기분이 나빠요.”

재영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발이 푹푹 가라앉았다. 거기다가 묘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중심을 잡기가 버거웠다.

“안아서 옮겨 줄까?”

사헌이 재영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사헌이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전력이라고 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다.

“그런데 크리처는 안 보이네요.”

콰르르릉.

그때 천둥소리 같은 것이 귀를 때렸다. 재영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고통스러움에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이내 소리가 가로막혀 먹먹해졌다. 소음이 줄어들어 편해진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 사헌에게 안긴 채로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소리의 정체를 따라 두리번거리다가 던전 입구에 시선이 미쳤다. 이물질이 낀 누런 물이 입구 쪽에서부터 쏟아지고 있었다.

“아악!”

“뜨, 뜨거워! 살려 줘!”

미처 피하지 못하고 액체에 휩쓸린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누런 물은 던전 안쪽을 향해 흘러갔다.

“형!”

재영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던 이들이 사헌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물은 통로를 지나는 것처럼 그대로 흘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끝난 걸까요?”

“글쎄.”

사헌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격 아닌 공격에 정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했다. 재윤의 팀원 중 하나가 신발이 녹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산성을 지닌 액체였나 보다. 재윤의 팀원들도 지금껏 던전을 허투루 다닌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괜찮은 곳을 찾아 발을 디뎠다.

재영은 질서를 찾아가는 에스퍼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헌이 능력으로 띄워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저, 진사헌 에스퍼님 감사해요.”

그리고 센터의 가이드가 홍조 띤 얼굴로 사헌에게 다가왔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인지라 사헌이 재영을 들어 올리면서 동시에 떠오르게 했다.

사헌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가이드는 그래도 좋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사헌을 쳐다봤다. 재영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까 봐 경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재윤은 아직 사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오만 때문인지.

고개를 내저은 재영은 사헌의 손을 잡고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점액으로 덮인 분홍색 바닥이 꿀렁거리더니 이내 잔잔해졌다.

“이거 좀 그것 같지 않아요?”

재영이 생각나는 대로 두루뭉술하게 내뱉자 사헌이 뭐냐는 듯 쳐다봤다. 재영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만화 ‘원*스’에서였나? 주인공 무리가 생선 배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아까는 몰랐는데 액체로 젖은 후에 보니 던전 벽이나 바닥이 생물체의 속살처럼 보이는 거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살아 있는 생선의 배 속에서 던전이 발생해 버린 걸까.

‘그러면 그 생선은 어떻게 된 거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영은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관심을 돌리려는지 ‘골*’같기도 하고, 민달팽이 같기도 한 것이 벽의 주름 사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전투 대형으로 모여!”

재윤의 외침에 신체 강화가 능력인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앞쪽에 서고, 뒷줄부터 사이사이에 바람, 물 등 마법 계열 능력자들이 껴 있었다. 하지만 모두 산성액을 피해 다니느라 움직임이 굼떴다.

“움직이는 게 슬라임이랑 비슷한데 퇴치 방법도 같지 않을까요?”

사헌의 힘으로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 재영은 편안하게 상황을 관망했다.

“제대로 봐.”

재영은 사헌의 턱짓을 따라 눈을 돌렸다. 장검을 든 에스퍼가 크리처와 대치 중이었다. 재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검에 베인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슬라임은 아예 상처를 입지 않았죠?”

재영은 힌트를 알아챈 것이 기뻐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사헌이 둥근 머리통을 다정하게 툭툭 두드렸다.

“그래. 그러니까 방법은 간단해.”

사헌이 한쪽 입꼬리를 쭉 올렸다. 재영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유로운 미소에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나지 않게 빠르게 공격한다.”

말로는 쉬웠다. 한 에스퍼가 공격하자 크리처가 유연한 몸을 위로 쭉 뻗었다. 놀란 에스퍼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다.

“으아악!”

몸을 길게 늘인 크리처가 에스퍼의 머리 위를 덮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입이 그를 삼킨 모양이다. 어깨까지 사라진 동료의 모습에 당황한 에스퍼들이 한순간 흠칫 굳었다.

“뭘 하는 거야! 당장 공격해!”

“예, 예!”

크리처가 몸을 꿀렁이며 더 깊이 삼키려고 하는 바람에 구출하려는 에스퍼들은 난항을 겪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잡아먹힌 에스퍼의 머리나 목을 건드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놈은 이미 늦었어! 당장 해치워!”

한편에서 크리처를 상대하던 재윤이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통째로 베어내라는 소리다. 크리처에게 먹힌 팀원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말이라 절로 인상을 찌푸려졌다.

‘아무 상관도 없는 나도 마음이 안 좋은데‧…….’

재영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신경 쓰여?”

사헌이 이제는 허리까지 삼켜진 에스퍼를 눈짓하며 물었다. 재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괜찮으면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러자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재영의 감정에 공감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잠깐만 얌전히 있어.”

공감은 못 해도 재영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는지 사헌이 바닥으로 훅 뛰어내렸다.

“형, 안……!”

재영은 팔을 뻗었다. 모르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사헌이 다칠 수 있다는 게 더 싫다. 하지만 곧 부질없음을 깨닫고 손을 거뒀다.

삼켜지고 있는 에스퍼에게 다가간 사헌이 크리처에게 물린 사람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재영은 크리처가 사헌마저 삼켜 버릴까 봐 걱정됐다.

사헌이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로 나머지 한 손을 에스퍼의 몸통 아래로 넣었다.

키야아아-

크리처에게서 터져 나온 울부짖음에 재영은 귀를 틀어막았다. 사헌이 크리처의 입을 찢고 있었다.

점액질로 범벅이 된 에스퍼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를 구하려고 애쓰던 동료들이 재빠르게 붙어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재윤이 손을 털고 있는 사헌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빛이 절대 곱지는 않다.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스쳐본 사헌이 훌쩍 뛰어 재영의 옆으로 돌아왔다.

에스퍼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앞의 크리처도 크리처지만, 뒤에서 또 산성액이 쏟아질까 봐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화염 계열 앞으로.”

재윤의 명령에 그의 팀원들이 잘 훈련된 군인처럼 착착 움직였다.

“통째로 태워 버려.”

키야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뭔가가 타는 소리, 녹아내리는 소리. 재영은 괴로워서 얼굴을 구겼다.

“다음, 물리 계열.”

강한 신체와 무기를 가진 에스퍼들은 화상으로 약해진 크리처들을 쉽게 베어 냈다. 사헌이라고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다. 그는 공격을 준비하느라 무방비 상태가 된 마법 계열 에스퍼에게 크리처가 다가가면 염력으로 떼어 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사헌이 얼음 계열 에스퍼에게 시선을 멈췄다. 그는 크리처의 발을 얼려서 묶어 두고 샌드백처럼 후드려 패고 있었다.

“호오.”

사헌이 눈이 번뜩였다.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한계 내에서 알아서 제 일을 찾아서 하는 게 그의 취향을 저격했다.

“그래도 어떻게 다 잡아가네요.”

사헌 이전에 대한민국의 대표 전력이었다는 게 사실인지 박재윤의 팀은 금세 요령을 터득하고, 크리처들을 쓰러뜨렸다.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방어구로 쓰기 좋겠네.”

사헌이 흥미가 동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퍼들이 가지고 온 상자에 크리처의 시체를 차곡차곡 담는 걸 보고 있었다.

“저걸 입는다고요?”

재영은 기겁했다. 처치한 크리처의 시체를 도구로 재활용한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움직이던 모습을 상상하니 태연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정리 끝났으면 이동한다.”

수거가 끝난 것을 확인한 재윤이 팀원들을 독촉했다. 그러자 에스퍼들 사이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가 끝나고 휴식을 취한 재윤과 다르게 팀원들은 시체를 챙기느라 쉬지도 못했다.

“너무하네.”

재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저만치 서 있던 재윤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쳐서 움찔했다.

‘에스퍼는 귀가 좋지.’

속으로 혀를 찬 재영은 이내 못할 소리도 아니란 생각에 당당하게 그를 마주 노려봤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까매졌다. 눈을 덮은 체온이 익숙하게 느껴져 재영은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옆에 두고도 한눈파는데 이걸 어쩔까, 응?”

귓가에 젖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뱃속을 간질이는 묘한 음성이다. 재영은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아서 침을 모아 꼴딱 삼켰다.

“아니, 한눈파는 게 아니라…….”

“눈동자를 파 버리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제 말을 끊고 나온 말에 재영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냥 가이드일 뿐인데도 이러는데, 연인 관계가 되면 어떨지.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그래도 하고 싶다, 연인.’

마음 깊숙한 곳에 작은 희망도 피어올랐다.

“너 말고 상대 눈이니까 너무 걱정 마.”

사헌이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재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재영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휴식한다.”

그때 재윤이 팀원들에게 다시 명령했다. 재영은 그가 제 말을 신경 쓴 것인가 싶어 눈을 끔뻑였다.

“잠깐 있어.”

재영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사헌이 어디론가 갔다. 아까 눈여겨 본 얼음 능력자에게 향하는 것이 분명했다.

“김재영 가이드님.”

질투할 새도 없이, 누군가 재영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재윤이 있었다. 사헌이 자리를 비우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헌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그나마 만만한 자신을 노리는 건가 싶었다.

“그런 이야기는 사헌이 형한테 직접…….”

“가이드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재영은 재윤의 어깨 너머로 그의 팀원들을 바라봤다.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들이 센터에서 파견된 가이드에게 적당히 나뉘어 줄을 서고 있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고개를 흔들며 거절하자 재윤이 대놓고 눈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재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물렁하게 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차가운 눈빛을 읽은 박재윤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에스퍼는 많고, 그에 비해 가이드는 부족합니다. 어차피 진사헌 에스퍼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가이딩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재영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재윤이 말한 것들이 계약을 어기고 가이딩을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사활이 걸린 다급한 일이라면 또 모를까. 센터 소속 가이드들을 대충 훑어본 결과, 시간이 걸릴 뿐이지, 재윤의 팀원들을 가이딩하는 데는 충분했다.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재윤이 입을 다물고 재영을 노려봤다. 재영은 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대치가 이어지자 눈이 시큰거렸다.

“하는 수 없군요.”

먼저 시선을 거둔 재윤이 몸을 돌려 센터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재영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잘했어.”

뒤에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져 흠칫했다. 돌아보자 사헌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됐어요?”

사헌이 눈을 크게 떴다가 눈을 접어 웃었다.

“당연하지.”

재영은 고개를 돌려 얼음 계열 에스퍼를 쳐다봤다. 이제 사헌의 팀으로 자주 만날 사람이니 얼굴을 익혀 둬도 나쁠 게 없다. 눈이 마주치고, 먼저 꾸벅이며 인사를 하자 그녀도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헌이 재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시야가 다시 높아지고 있었다.

“다시 올라가요?”

재영이 입을 뗌과 동시에 콰르릉, 하고 들어본 적 있는 소리가 났다.

“물이 옵니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사헌이 눈여겨본 얼음 속성 에스퍼다. 마음 놓고 늘어져 있던 에스퍼들이 우왕좌왕했다.

재윤이 사헌을 돌아봤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는 거다. 자신의 팀원들이 산성액에 피해 입지 않게 하라고. 재영은 그의 뻔뻔함에 화가 나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총이 쏘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탕 소리가 나며 튕겨지는 소리도.

“뭐, 뭐예요?”

재영은 깜짝 놀라서 사헌을 돌아봤다. 뭔지는 몰라도 제 주변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살려 두기 싫게 만드는데…….”

사헌이 혀로 입술을 적시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영은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재윤의 총구가 재영을 향해 있었다. 동시에 아까의 소리가 재윤의 총에서 쏘아져 나온 사슬을 사헌이 쳐내느라 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재영을 휘말리게 해서 사헌이 어쩔 수 없게 나서게 만들려던 거였다.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인 재영을 미끼로.

“뭐, 저런 인간쓰레기 자식이…….”

재영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욕설을 들었을 재윤이 총구를 천장으로 옮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온 사슬이 천장에 꽂혔다. 재윤의 몸이 사슬을 따라 쭉 딸려 올라갔다.

“혼자 튀는 거야, 설마?”

재영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터뜨렸다. 땅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는 에스퍼들이 아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크리처의 사체가 든 상자까지 챙겨야 해서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았다.

“형.”

재영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사헌을 불렀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산성액에 화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싫은 건 재윤이지, 저 사람들이 아니지 않나. 게다가 사헌의 능력이면 아주 쉽게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사헌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재영이 입을 엶과 동시에 사람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10분 간격이야. 3분간 쏟아 내고, 10분 휴식.”

사헌이 손가락으로 산성액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시계를 자꾸 확인했던 거다.

“던전에는 규칙이 있어.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을 거야.”

아마 사헌이 말한 어지간한 경우는 변이가 발생할 때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3분이 지나자 쏟아지던 산성액이 멈췄다.

산성액이 전부 흘러가자 사헌이 들어 올린 사람들을 다시 말없이 내려놓았다. 산성액이 지나가도 흔적은 남기 때문에 에스퍼들은 신발 바닥이 녹아내릴까 봐 당황해서 허둥지둥 거렸다. 하지만 신발 바닥이 녹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잘 보니 얇은 얼음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얼음 계열 에스퍼가 사헌을 돌아봤다. 마치 채점표를 기다리는 학생 같다.

“쓸데없이 마나를 낭비하는 일이 없어.”

사헌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야기를 나눌 때, 이렇게 하라는 조언을 남긴 모양이다.

“바닥을 얼리면서 앞으로 이동한다!”

재윤의 팀중 다수가 물리 계열이고, 몇 안 되는 마법 에스퍼 중에 얼음 계열 에스퍼는 단 하나였다. 단 한 사람이 바닥을 얼리는 속도를 따라 가느라 움직임은 더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산성액이 또 올까 봐 두려워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에스퍼들은 다시 그 상황이 오면 사헌이 또 도와줄 거라고 여기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

“잠깐.”

그때 선두에서 움직이던 에스퍼가 걸음을 멈췄다.

“앞에 뭐가 있어요?”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요?”

“모르겠는데요.”

선두 에스퍼의 옆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던전을 벗어나고 싶어 조급한 모양이다.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시 행군이 멈췄다.

“자꾸 왜 그래요?”

이제는 그 에스퍼를 둘러싼 주변 모두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형, 저거…….”

재영은 선두의 뒷사람을 가리켰다. 재윤의 팀원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걸었는데, 원래 저곳은 빈자리였다.

“가스로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그 틈에 끼어드는 건가?”

사헌이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던전에서 크리처를 분석하는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재영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진짜로 센터에 등록한 이유가 뭐예요?”

에스퍼로 발현한 이상 국가의 관리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가는 것보다야 덜 귀찮을 것이다.

사헌이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재영은 눈빛으로 재촉했다.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사는 게 지루했어. 자극이 필요했고,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에스퍼가 그야말로 제격이었지.”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대를 이어 건실한 사업가였고, 본인도 어릴 적부터 영재로 불릴 만큼 능력치가 뛰어났다. 돈, 외모, 머리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어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자신과는 다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서 재영은 잠자코 있었다.

사헌이 가늠하는 듯한 눈으로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어때, 실망했어?”

사헌의 물음에 재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사헌에게서는 옅은 긴장감도 느껴졌다. 아마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을 의식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말을 고르느라 뜸을 들였다. 재영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고 입을 뗐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크리처로부터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요.”

어떤 마음이었든 사헌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편안한 밤을 보내고, 평범한 일상을 지내고 있다.

“저는 결과주의자니까.”

“퍽도.”

재영이 덧붙이자 사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과주의자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안도하는 기색이 보였다.

“내 인생은 내 건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맞잖아요.”

재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헌이 손으로 재영의 목덜미를 뭉근하게 쓰다듬었다. 마주친 눈동자에 열기가 낮게 깔려 있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끌어안고, 만지고 싶었다. 당장 그럴 수 없다는 아쉬움에 입맛이 다셔졌다. 그런 재영을 보며 웃음을 흘린 사헌이 자세를 바로 했다. 재영은 사헌의 손바닥이 닿았던 곳을 제 손으로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가 뜨끈뜨끈했다.

사악-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 사이에 머리통 하나가 더 생겼다. 사헌이 올렸다, 내렸다 하기 귀찮다면서 내내 띄워 놓은 덕에 재영은 이변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저거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왜?”

사헌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이번 던전에서 그의 역할은 교관 비슷한 것이다. 목숨이 위험한 수준이 아니니 나설 필요가 없는 게 맞다.

“하지만…….”

재영의 시선 끝에는 재윤이 있었다. 그는 대열의 가운데에서 이동하며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헌의 방치에 어느새 그들 틈에 끼어든 그림자가 전체 인원의 반에 달했다. 그쯤 되자 다른 사람들도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에……헉!”

한 에스퍼가 원래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똑같은 사람이 거기 또 있는 것이다.

“귀, 귀, 귀신이다! 귀신, 귀신이다!”

그 에스퍼는 내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넘어갔다. 유달리 귀신에 약한 사람인 듯하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그제야 재윤도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인지했다. 그리고 선두에서 팀원의 길을 뚫어 주는 역할의 에스퍼를 다그쳤다.

“죄, 죄송합니다.”

이상한 점을 느꼈음에도 팀장인 재윤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은 선두 에스퍼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그녀가 기이한 점을 느꼈다고 했을 때, 딱 잘라 무시한 동료도 잘못이 없지는 않다. 당사자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는지 민망하고 미안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스퍼들은 명령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동료인지, 크리처인지 모를 형체와 서로를 노려보며 기묘한 대치를 이어갔다.

“저래서야 보스존에 갈 때까지 정신이 말짱할까요?”

어쨌든 저들과 운명 공동체인지라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보스존에서는 특별한 에너지가 느껴져.”

사헌이 에스퍼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내뱉었다.

“지금 대장 크리처는 제 모습만 감출 뿐 아니라 힘도 숨겼지.”

“그럼…….”

재영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래. 이 던전 전체가 보스의 영역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경악하며 묻자 사헌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눈빛으로 재영을 내려다봤다.

“그럼 알려 줘야…….”

“지금 끼어들면 저 찌질한 놈이 아이구, 고맙습니다. 할 것 같아?”

사헌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며 재윤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따라서 눈을 돌린 재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존심 하나는 높은 남자라 괜히 끼어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다친 다음에야 나설 수 있단 말이에요?”

재영은 울상을 지었다. 명령을 듣는 에스퍼들은 죄가 없다.

“대가리의 판단에 달렸지.”

사헌이 눈을 내리깔았다. 재영은 다시 사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재윤이 고개를 들고 사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로 멈춰 있어라.”

그리고 다시 팀원들을 향해 눈을 돌리며 내뱉었다.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자리를 벗어난 사람만 찾으면 되겠네요!”

재영은 손뼉을 마주치며 외쳤다. 싫은 사람이지만 좋은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재윤의 팀에는 정해진 자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쉬울까.”

하지만 사헌이 이번에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재영은 자신까지 놀림당하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당신! 왜 남의 자리를……, 오, 그래! 네가 크리처구나!”

서로 의심하던 사람들이 마구 엉켰다. 서로 멱살을 잡고, 머리채를 잡고 난리였다. 대열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

“양쪽으로 찢어져!”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둘이었다. 에스퍼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네가 가짜구나! 널 죽여서 나를 증명하겠다!”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캐스팅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려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진짜 위험하다.

“진사헌 에스퍼!”

마침내 재윤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사헌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헌이 기다렸다는 듯 땅으로 내려앉았다.

‘아, 나도 내려가고 싶은데…….’

재영은 보이지 않는 바닥을 퉁퉁 내리쳤다. 던전이 클리어되고 바닥에 내려서게 되면 멀미라도 날 것 같다.

“크리처가 던져 준 힌트도 못 받아먹고.”

두 사람의 재윤 사이로 끼어든 사헌이 제일 처음으로 꺼낸 말은 시비조였다.

“그게 무슨 말 같잖은…….”

그러자 한 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대꾸했다.

‘저쪽이 진짜네.’

재영은 확신했다. 무례한 게 딱 박재윤 그 남자였다.

“왜 크리처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그때 다른 재윤이 화를 냈다. 사헌이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퍽, 뭔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벽에 처박혔다. 재영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 사납게.”

사헌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짜 재윤의 얼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파슥-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모래 같은 것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윤이 움찔거렸다. 아무리 크리처라도 제 모습을 하고 있으면 찝찝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망설임 없는 사헌이 지나치게 대범한 것이다.

“하나는 오른쪽, 하나는 왼쪽 벽에 붙으십시오.”

사헌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다음 지시를 내렸다. 에스퍼들이 재윤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주춤주춤 움직였다.

“무기 꺼내세요.”

“네?”

이어지는 지시에 에스퍼들이 의문을 표했다. 사헌이 짜증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 말도 못 알아듣는 수준이면 던전이 아니라 유치원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비난을 받은 에스퍼들이 사헌에게는 말도 못 하고 애꿎은 재영만 보고 화난 얼굴을 했다. 재영은 똑바로 보고 있기 어려워서 시선을 피했다.

“지금부터 셋까지 무기 안 꺼내는 놈은 크리처로 간주합니다.”

사헌은 단호한 말투로 다시 내뱉었다.

“셋.”

하나, 둘도 없이 바로 셋이다. 잠깐 멍 때리던 사람들이 이내 우왕좌왕하며 무기를 빼들었다.

사헌이 그들 사이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똑, 똑 들려왔다.

마침내 발을 멈췄다. 이제 곧 사헌의 팀원이 될 김수정 에스퍼의 앞이었다.

“꺼내.”

사헌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그녀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마법 계열 에스퍼라도 근접까지 다가오는 크리처를 견제하기 위해 단검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수정은 어설픈 자세로 단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차가운 눈으로 무기 없는 수정을 바라보던 사헌이 그녀의 목을 쥐고 높이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이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재영은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났다. 정말 무서운 건 고통스러워야 할 김수정 에스퍼의 얼굴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너구나.”

그 순간 사슬이 수정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피가 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눈이 찡그려졌다. 수정이었던 것은 재윤처럼 검은 가루로 파스스 흩어졌다.

제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당한 일에 수정이 하얗게 질려 제 손으로 목을 감쌌다.

“잘 봐. 이 크리처는 인간의 무기를 들지 못하니까.”

사헌의 말에 재윤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팀원들을 살폈다. 분명 등이나 허리 옆, 다리에 무기가 있는데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하고 싸우는 건데 멀쩡한 무기 놔두고, 캐스팅 시간도 긴 마법을 사용하는 거 보면 뻔하지.”

해결법을 알려 주고 나서는 굳이 사헌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당장 무기를 들지 않은 놈들을 해치워!”

분신을 전부 없애자 검은 가루들이 모여 뼈다귀 전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맞췄는지 입구에서 몰려온 산성액에 휩쓸려 가 버렸다. 허망한 끝이다.

“이번에 건진 건 거의 없군.”

사헌이 어딘지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사헌을 쳐다봤다.

“크리처의 사체도 그대로 그 팀의 성과가 되니까.”

귀찮은 기색도 없이 사헌이 대꾸했다. 아무리 무신경한 사헌이라도 자꾸 제 신경을 건드리는 재윤이 높은 성과를 받게 되는 게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물론 재영도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집에 가서 가이딩할까요?”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사헌의 손을 잡았다. 머리 위로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 * *

재영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사헌이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로 돌아온 그에게서는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나갔다 왔나?’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몽롱했다. 밤새 우느라 퉁퉁 부은 눈은 그 이상 떠질 기미도 안 보였다.

이불 속으로 들어온 사헌이 재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재영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의 몸 곳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간밤과 달리 열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평소 같지 않은 그의 행동에 순간 정신이 차려질 만큼 불안함이 들었다. 눈을 떠서 바라본 사헌의 얼굴이 드물게 심각했다.

사헌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재영의 얼굴을 눈으로 샅샅이 훑어봤다.

“가이드가 죽었어.”

마침내 사헌이 한숨처럼 내뱉은 말에 재영은 잠기운이 싹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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