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제 재영에게 가이딩은 게임에서 뒤돌아보며 뛰는 것만큼 쉬웠다. 기운으로 사헌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중계를 통해 그가 던전에서 날아다녔다는 걸 아는데, 그의 마나는 거의 풀(full)이었다. 지금 사헌에게 가이딩은 필요하지 않았다.
‘가이딩을 받았어.’
충격으로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누군가 커다란 주먹 같은 것을 목구멍까지 쑤셔 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때 사헌이 말을 꺼냈다. 재영은 얼빠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사헌의 얼굴을 바라봤다. 동시에 사헌이 재영의 어깨를 누르며 위로 올라탔다.
“오늘은 그 녀석에게 가이딩을 했나?”
날 선 목소리가 분위기를 싸하게 가라앉혔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건 모두 재영의 착각이었다. 사헌이 거친 손길로 재영의 옷을 헤집었다.
“어디까지 만지게 했지?”
거칠 것 없는 손길에 재영은 힉, 숨을 삼켰다. 쇄골까지 올라온 커다란 손이 목을 조를 것 같아서 바짝 졸았다.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재영을 보며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 아무것도…….”
재영은 헐떡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사헌은 그 말을 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면 네 쪽이 만져줬나?”
사헌이 제 눈동자처럼 절절 끓는 손바닥으로 재영의 손바닥을 비볐다. 몇 번 반복하더니 손가락을 구부려 깍지를 꼈다.
“너는 나같은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니까.”
“왜 말, 을 그렇게…….”
심술궂은 말에 반발하려던 재영은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사헌이 있다. 두 눈에 꽉 찬 사헌의 모습에 재영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아, 나대지 마, 심장아.’
이럴 상황도 아닌데 뛰는 심장이 야속했다. 재영은 눈을 질끈 감아서 뜨거운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게 제 위를 차지한 짐승의 성깔을 더 돋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제 손길 몇 번에 달아오른 재영을 보며 나름 흡족해하던 사헌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미 해봤으니까……여기까지?”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을 노려보다가 자유로운 한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읏! 혀엉……!”
재영은 기겁하며 눈을 홉뜰 수밖에 없었다. 사헌이 하반신을 세게 움켜쥔 것이다.
“아, 제발……, 하악, 아, 안 했……어요.”
재영은 동그란 눈꼬리 끝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애원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바람에 눈물방울이 여기저기로 번졌다.
“거짓말쟁이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서.”
사헌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하는 재영을 놀리며 희롱을 즐겼다. 재영은 수치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피까지 붉어졌을 게 분명하다.
“직접 확인하지.”
훌쩍거리는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돌연 이불을 들치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형?”
재영은 갑자기 사라진 사헌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배 아래에서 불룩 솟은 이불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그 순간, 바지가 불쑥 내려갔다. 예민한 피부에 음습한 숨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사헌이 뭘 하려는지 알아챈 재영은 기겁을 했다.
“혀, 형! 잠깐……!”
재영은 사헌을 밀어내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곧 밀려든 쾌감에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 *
식탁 앞에 앉은 재영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동이 터오기 직전까지 시달린 터라 아직도 비몽사몽이었다.
결국, 우유가 담긴 숟가락에 코끝이 잠겼다. 사헌이 재영의 이마를 밀어내고, 제 손가락으로 그의 물기를 닦아냈다. 재영은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사헌이 손가락을 핥는 걸 지켜봤다.
“왜?”
재영의 시선을 느낀 사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뗐다.
“내가 먹는 게 아까워?”
그러면서 젖은 손가락으로 재영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재영은 사헌의 손가락과 눈동자를 번갈아 보면서 그의 의도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 그런……. 손가, 손가락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재영을 보며 사헌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리고 틈을 노려 슬금슬금 입술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도톰하고 말캉한 혀에 손끝이 닿았다. 사헌의 눈치를 살피던 재영은 더 크게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사헌의 입가에 미소가 더 짙어졌다. 뱃속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웃음이다. 재영은 숨을 가다듬으며 입술을 조이려고 했다.
삐, 삐, 삐-
순간,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음에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사헌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손목을 확인했다.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이 줄어들 줄 모르고, 점점 잦아졌다.
“던전이야. 준비해.”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던 사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확 깨진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같이 가요?”
재영은 사헌을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묻고 말았다. 사헌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넌 내 가이드야.”
그리고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재영의 머리통은 사헌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사헌이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박살 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보인 소유욕에 재영은 가슴이 떨렸다.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고민하던 재영은 이내 사헌의 손을 끌어내려 가슴 쪽에서 안았다. 좋은데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반전이 없는 A급 던전은 조금 싱겁다고 할 정도로 쉽게 클리어됐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동행하게 된 사헌이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오기 전부터 경계했던 안의경 에스퍼도 보이지 않아 재영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랜만에 사헌과 나온 것이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창밖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들이 스쳐 갔다. 흥얼거리며 내다보던 재영의 눈이 돌연 크게 뜨였다.
“형! 잠깐만 차 좀 세워주세요.”
재영은 시선은 그대로 둔 채로 대충 사헌이 있을 만한 곳으로 팔을 뻗었다. 언덕 아래에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잠깐만요!”
재영은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튕기듯 뛰어갔다. 그리고 오르막길을 지나는 수레 뒤로 가서 붙었다. 갑자기 힘주어 밀면 할아버지가 놀라서 넘어지실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응?”
무게가 느껴지지 않자 할아버지가 뒤를 돌아보셨다. 혹시라도 주워 모은 폐지가 떨어진 것일까 걱정된 듯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안녕하세요!”
재영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거기서 뭐 해! 그러다가 큰일 나!”
오히려 할아버지가 재영을 걱정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저랑 자리 바꾸실래요?”
아무래도 앞에서 손잡이를 끄는 게 더 편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바로 손을 떼면 수레가 미끄러질 것 같아서 곧장 움직이지는 못했다.
“젊은이가 바쁠 텐데, 무슨……. 혼자도 할 수 있어.”
할아버지는 폐 끼치기 싫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재영은 찡그린 채로 웃었다.
“괜찮아요. 저 시간 많아요!”
할 수 없이 뒤에서 계속 밀어야겠다 싶어 자리를 잡는데, 사헌이 척척 재영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낚아채듯이 할아버지의 손에서 수레 손잡이를 가져갔다.
“누, 누구요!”
갈취와 같은 태도에 할아버지는 도둑질을 당한 것처럼 허둥거리셨다.
“저희 형이에요, 할아버지.”
재영은 곤란한 듯 웃으며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저희 형은 저보다 훨씬 세요.”
재영이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챈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비켜주셨다.
“할아버지. 조심히 올라오세요.”
재영은 할아버지의 걸음이 조급해지지 않게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사헌이 그보다 조금 빠르게 걸어서 무게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묵묵히 앞서는 사헌을 보며 재영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 * *
재영은 5분 이상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면 불안감을 느끼는 평범한 요즘 아이였다. 샤워하자마자 머리도 말리지 않고, 메시지를 확인하던 눈이 반짝였다.
“형. 이것 봐요. 사진 진짜 잘 찍었다.”
들뜬 목소리에 돌아본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재영의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어깨를 적시는 것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영 거슬린다는 눈으로 보던 사헌이 걸음을 뗐다. 재영은 얼른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를 팡팡 두드렸다.
자연스럽게 옆을 차지한 사헌이 재영의 머리 위로 덮인 수건을 손에 쥐었다. 그가 대신 머리를 말려 주는 게 익숙해진 재영은 그의 앞에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댔다.
“모델이 누군데.”
잘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챈 사헌이 당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사진에는 수레를 미는 사헌의 옆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것 봐요. 마음만큼 아름다운 그의 팔뚝. 천하장사의 좋은 예.”
스크롤을 내린 재영이 댓글을 읽으며 제가 더 좋아했다.
“일상적인 곳에서 조용한 선행이 더 돋보인다는 말도 있어요.”
“누구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좋은 사람이 되네.”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는 그걸 알아챌 계기가 없었을 뿐이죠. 형은 착한 사람이잖아요.”
재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최근 들어 서먹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헌은 세세한 곳에서 자신을 위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수건을 꾹꾹 누르면서 머리를 말려주고 있지 않은가.
사헌이 재영의 머리통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뗐다.
“내가 착한 사람이면 좋겠어?”
의외의 물음에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비웃음이 사라진 진지한 얼굴이다. 그에 맞춰 재영도 진솔한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조곤조곤 내뱉은 말에 사헌이 굳었다. 재영은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욕을 듣거나 미움을 받는 게 싫어요.”
평범한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 않나. 재영은 크게 뜨인 사헌의 눈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재영에게서 조금이라도 거짓의 흔적을 찾아내겠다는 것처럼 사헌이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고 있자 사헌의 얼굴 근육에서 힘이 빠졌다.
사헌이 재영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 재영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사헌의 입가에는 평소처럼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위로 매끈하게 솟은 붉은 입꼬리가 지독히도 매혹적이었다.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자 사헌의 입술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왜 말을 안 들을까, 응?”
웃음기를 지운 사헌의 눈동자에 이질적인 빛이 감돌았다. 몰려드는 긴장감에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이야말로 지지부진한 상황을 정리할 때다. 언제까지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덮어 둘 수는 없는 법이다.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굳었다.
“잠깐만요.”
재영은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가 마른안주와 캔맥주 몇 캔을 챙겼다. 마음속 깊이 있는 진심을 털어놓는 건 적당한 용기로는 안 됐다.
다행히 그때까지 사헌이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재영은 거실 테이블 위에 가져온 안주와 캔맥주를 세팅했다.
“이제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좋아해.”
사헌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핀잔을 주면서도 제대로 들어주려는 듯 허리를 똑바로 폈다.
탁.
시원한 소리가 터졌다. 거품이 캔 뚜껑 위로 솟았다. 눈이 동그래진 재영은 입술을 쭉 내밀고, 거품을 호로록 마셨다. 곁눈으로 사헌과 눈이 마주치자 들고 있던 캔을 그에게 내밀었다.
“일단 한잔하고.”
재영이 입술을 댄 부분만 색이 진했다. 어영부영 받아든 사헌이 얌전히 그 부분에 입술을 붙였다. 막 자기 몫의 캔을 딴 재영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꼴깍꼴깍.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시원했다. 사헌에게 홀린 정신도 어느 정도 돌아왔다. 재영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이번에는 중간에 끊기 없기.”
빈 캔을 내려놓은 재영이 엄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사헌이 저번처럼 딱 잘라 제가 원하는 답만 들으려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한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한 사헌이 캔을 내려놓았다.
“너,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지.”
재영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쉽게 사과를 받아 주려는 건가 하는 기대 때문에 화색이 돌았다.
“뭐가 미안한데?”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재영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덤덤한 저음인데도 사헌이 뱉은 대사가 그를 새침하게 느껴지게 했다. 이 말을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도 아니고, 사헌에게서 듣게 될 줄이야.
“다, 당연히 형 말고 다른 사람을 가이딩한 것…….”
“아니지.”
재영은 당황한 와중에도 어물어물 말을 꺼냈다. 하지만 바로 차단당했다. 재영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곧 속으로 혀를 찬 사헌이 답을 알려 줬다.
“내 진심을 짓밟았잖아.”
“네? 제가요?”
그 답이라는 게 물음표를 자아낼 만큼 황당했다. 재영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가이딩이 아까워서 화낸 줄 알아?”
“네.”
주저 없이 대답하자 사헌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재영은 솔직하게 말하라는 눈빛으로 사헌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예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마침내 사헌이 어깨를 으쓱하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재영은 그것 보라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야.”
말을 잇는 사헌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재영은 뭐든 새겨듣겠다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그를 응시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가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 준 적 있지.”
재영은 흠칫 굳었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이 에스퍼의 가이딩에 대한 욕심을 들어 가이드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닥까지 싹싹 긁어가 버릴 거라고. 그것에 대비해 철저히 연습시키지 않았던가. 덕분에 폭주는 아니어도 센터에서 강제로 가이딩을 시도한 에스퍼에게 성과를 올린 적도 있었다.
“이지를 잃은 에스퍼에게 남는 건 파괴 본능뿐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지. 주변의 사람, 사물, 가이드, 심지어는 스스로도.”
나직한 목소리가 재영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미련한 가이드는 그제야 제 에스퍼가 뭘 걱정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전신의 기운을 뺏기든 상해를 입든. 어느 쪽이든 재영이 다칠까 봐 걱정한 것이다.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재영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하지만 그 애는…….”
재영은 고아원에서 가이딩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애는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던 와중에 이 기운은 주인이 있으니 주는 것만 받아먹으라는 말에도 순순히 따랐다. 재영은 아무리 폭주 직전의 에스퍼라도 그처럼 말로 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제 걱정을 한 사헌에게 할 말은 아니다. 재영은 하려던 말을 목구멍 아래로 밀어 넣었다.
“저를 걱정하셨어요?”
사실 정말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내가 형의 가이드니까?’
사헌은 성가신 것을 싫어하고, 까다롭다. 매칭률이 썩 높다는 의경에게 간단한 가이딩조차 받지 않은 것도 어딘가 맞지 않아서일 테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마음에 든 재영을 잃으면 대체할 사람을 찾기까지 고생깨나 할 것이다.
‘형이 나한테 호감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어쩌면 ‘가이드’가 아닌 ‘김재영’을 걱정해 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가 가진 감정과는 다를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장난처럼 넘겨 버리는 사람이니까. 재영은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너도 날 걱정하잖아.”
재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는 사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것도 가장 쓸모없는 걱정이 ‘진사헌 걱정’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형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았어요.”
재영은 진지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알았는데…… 죄송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 못 드리겠어요.”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자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 하지만 다음은? 항상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나?”
사헌이 거친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재영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화가 나도 꾹 참는 것 같았다. 재영은 그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솔직히,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요.”
재영은 말을 멈추고 사헌의 얼굴을 살폈다. 사헌이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도 들어주겠다는 듯 얌전히 그를 바라봤다.
“저는 적당히 졸업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려고 했거든요.”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게임을 독보적으로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영의 삶은 전형적이고, 평범했다. 가이드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런데 가이드라잖아요. 지금까지 회사원이 되려고, 그것만 목적으로 삼았는데. 완전히 다른 삶이, 정해져 있다잖아요.”
재영은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피할 수도 없는데 어쩌겠냐 싶었다. 그런데 내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일이 힘들지도 않고, 돈도 많이 벌고 좋아요. 좋은데…….”
혼란스러웠다. 가이드라는 정체성 때문에 대단한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꺾인 것도 아닌데 괜히 기운이 빠졌다. 선택권이 있는데 쓰지 않는 것과 처음부터 없는 건 너무나 다르다.
“그러다가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 같았어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기쁜 일이었다.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사헌이 그런 재영의 얼굴을 꼼꼼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맘대로 해. 어차피 결정한 거 아닌가?”
비슷한 의미라고는 해도 차갑게 무시하던 때와는 달랐다. 재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
한 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좋아진 재영은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갈 때는 항상 나랑 동행해.”
그건 오히려 부탁하고 싶은 거였다. 세라의 폭주 때, 휘몰아치는 마나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는데 훈의 보호로 훨씬 나아졌었다. 그보다 등급이 높고, 방어에도 특화된 사헌이라면 훨씬 안전을 보장받기 편할 것이다. 그리고 재영은 사헌의 품이 훨씬 편했다. 그게 자신이 그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막 알에서 깬 아기 새의 각인효과 같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럼 형, 이제 화 안 내는 거죠?”
재영은 사헌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애교가 가득했다.
“내가 화내고 안 내고 달라질 게 있나?”
사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의 분노를 받고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재영은 움찔했다. 결국 제 뜻대로 밀어붙였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형이 화내면 무섭단 말이에요.”
재영은 과장되게 겁에 질린 척하면서 사헌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전에는 그가 화난 것 같으면 말을 걸어올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는 말을 걸어 주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무섭다는 놈이 잘도 멋대로 굴었네.”
말로는 툴툴거려도 볼을 매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항상 매섭게 날이 서 있던 눈빛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사헌의 눈치를 살피던 재영이 조심히 입을 뗐다.
“근데 진짜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았어요?”
“네가 화낼 처지야?”
밉지 않게 흘기는 눈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린 사헌이 재영의 콧등을 때렸다. 재영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코를 문질렀다.
“형도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 받지 말아요, 네?”
그리고 사헌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애원했다.
“응? 나랑만 해요.”
대답 없는 사헌에 골이 난 재영의 볼이 불룩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덮치듯 입술을 붙였다.
사헌이 재영에게 떠밀려 중심을 잃은 채로 스치듯 테이블을 살폈다. 어느새 뚜껑이 따인 캔이 다섯은 넘어 있었다.
재영은 사헌의 몸 위로 올라가 떨어진 입술을 다시 겹쳤다. 제 것에 비해 메마른 상태다. 기꺼이 혀를 내밀어 버석한 입술을 적셨다.
“형, 입술…….”
낑낑거리며 매달리는 혀에서 알싸한 향이 훅 끼쳤다. 사헌이 손을 내려 재영의 허리께를 매만졌다. 매끄러운 피부에서 기분 좋은 열기가 피어났다.
재영은 뱃속이 근질거려서 사헌의 위에서 바르작거렸다. 손바닥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숨이 막히도록 좋았다.
* * *
공강 날을 맞이한 재영은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체 휴강이지만. 그런 재영의 옆에는 바디필로우 역할을 하는 사헌도 있었다.
“그런데 형, 오늘은 어디 안 가요?”
사헌은 어쩐 일로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요 며칠간은 거의 매일 같이 훈련이든, 회의든 뭐든 나갔다.
‘설마 나 보기 불편해서 피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재영의 얼굴은 울상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그도 과제다 뭐다 집에 들어올 일이 거의 없어서 사헌이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징계라서 센터 근처에도 오지 말래.”
사헌이 옆구리에 찰싹 붙은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른하게 내뱉었다.
“징계요?”
사헌의 대답을 들은 재영은 새된 소리로 되물었다. 그 이유는 그의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바른 생활 소년으로 징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재영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상대가 제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들이 아닌 ‘진사헌’이라는 걸 떠올렸다.
“형 저 모르는 새에 사람 팼어요?”
반쯤 확신을 담아 묻자 사헌이 미간을 확 좁혔다. 지금이라도 하나 패겠다는 듯 살벌한 눈빛이라 재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그 정도는 돼야 징계 받는 거 아닌가 해서요.”
재영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직장 생활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다른 그럴 듯한 사유가 떠오르지 않은 건 사실이다.
“품위 유지 불량, 상관 명령 불복종이었나.”
무심코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부 사헌이 할 법한 행동이다. 오히려 진작 받았어야 했는데 센터 측에서 많이도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 나래시 의원 관련으로.”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래시요? 형 최근에 파견 근무도 안 나갔는데 어떻게 만났…….”
재영은 말을 하던 도중 사헌이 어디서 나래시 의원을 만났는지 경위를 깨달았다.
시작은 몇 주 전으로 돌아간다. 일정 주기로 크리처가 재탄생하는 리셋 던전의 변이로 주변까지 던전에 삼켜지게 됐다.
그때 던전 주변에는 건설 중인 아파트와 빌딩 등 건물들이 있었다.
‘한 번 던전이 발생한 지역 주변에는 던전이 발생하지 않는다.’
‘센터의 관리로 다른 곳보다 훨씬 안전하다.’
그런 낭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하지만 변이 던전이 발생하면서 안전에 대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나래시의 홍길동인지 뭔지 하는 의원이었다.
“내 목이 잘리는 게 빠를까, 당신 목이 잘리는 게 빠를까.”
자기 땅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생난리 치는 홍길동 의원에게 사헌이 그렇게 말했었다. 결국 누구의 목도 잘리지 않았지만.
“형이 그 의원한테 진 거예요?”
재영은 충격으로 하얗게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사헌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하다.
“……뭐, 됐어.”
사헌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나 챙겨.”
무신경하게 툭 말을 내뱉고는 주방 구석에 있는 작은 창고 방으로 갔다. 재영은 그 뒤를 쫄래쫄래 뒤쫓아 가며 물었다.
“무슨 짐이요?”
“한 일주일치면 될 거야.”
재영이 건넨 질문에 맞는 답은 아니다. 잠시 그 뜻을 고민하던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우, 우리 별거하는 거 아니죠?”
재영은 충격에 빠진 눈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헌이 무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봤다.
“우리 화해, 화해했잖아요.”
우는 척하며 옷깃을 당기자 사헌이 손가락으로 재영의 이마를 튕겼다.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거다. 재영은 그대로 드레스룸으로 가 캐리어를 챙겼다.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겠어?”
캐리어를 펼쳐 놓고 사헌의 옷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자 사헌이 재영의 뒤에 서서 참견했다.
“여름이라서 부피가 그렇게 크지도 않을 텐데요?”
던전이라는 게 약속하고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서 갈아입을 옷도 여유 있게 챙긴 편이다. 사헌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너도 가는 거야.”
“네?”
“페어는 어디든 함께 가야지.”
사헌과 저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말에 재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출장이에요? 학교에는 사유서 내면 되겠죠?”
재영은 비슷한 크기의 캐리어를 하나 더 꺼내서 먼저의 캐리어 옆에 나란히 놓았다.
“아니. 무단이야.”
“네, 그럼 사유서 내용은……, 네?”
옷을 챙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재영이 멈칫하며 사헌을 돌아봤다.
“휴가니까.”
재영은 사헌이 던진 여행용 칫솔 등을 받아 넣었다.
“네? 징계 아니었어요?”
“징계를 어디서 받든 내 자유 아닌가?”
사헌이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말하자면 던전과 센터만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징계를 받아서 오히려 즐거운 것 같다. 역시 진사헌 걱정은 하는 게 아니었다. 재영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밤에는 좀 추우니까 얇은 바람막이나 카디건을 챙기는 게 좋겠죠?”
재영은 한 손에는 바람막이, 다른 손에는 카디건을 들고 번갈아 살폈다.
“어느 쪽으로 해야 하나. 바다? 산? 여름이니까 역시 바다겠지.”
일주일 여정이면 둘 다 갈 수도 있겠다. 재영은 양손에 든 외투를 모두 접어 넣었다.
“바다 맞죠?”
재영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수영복을 입은 사헌의 몸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록볼록 예쁘게 짜인 근육 위로 흐르는 물방울도.
‘역시 바다가 좋겠어.’
하얀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사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래. 개인 섬으로 갈 거야.”
재영은 짐을 챙기던 손길이 멈추고, 사헌을 돌아봤다.
“사람들 더 부를까요? 다 같이 놀면 좋잖아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 치는 재영을 보며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고민하는 얼굴이 됐다.
“열 명 이상은 안 돼.”
사헌이 싫은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연락할 사람을 정해 뒀다.
[나] : 내일 오전 11시까지 집합
[나] : 준비물 : 수영복/ 갈아입을 옷
우선 뽕팸 단체 대화방에 통보한 뒤, 알림을 꺼 뒀다. 당장 놀러 갈 짐을 챙기려면 지금부터도 시간이 없다.
“그러고 보니까 형하고 첫 여행이잖아!”
뒤늦은 깨달음에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재영은 입을 틀어막았다. 보통 첫 여행이라고 하면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나? 연인은 아니어도 침대를 같이 쓰고, 스킨십도 많은 사이니까 그런 기대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재영은 사헌을 찾아 문 쪽을 힐끔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뒤에서 감시하듯 쳐다보더니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혼자 남았다는 걸 확인한 재영은 구석에 넣어둔 상자를 꺼냈다. 처음 집에 들어올 때 친구들이 선물로 챙겨 준 콘돔이 하나도 줄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제 진짜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았어.”
재영은 콘돔을 한 움큼 집어서 캐리어에 몰래 넣었다. 그리고 카디건을 꺼내 그 위를 덮었다.
“이 정도면 되나?”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던 재영은 지퍼를 잠그려다가 말고 한 움큼을 더 집어넣었다. 불룩하게 배가 부른 캐리어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다음 날 공항에는 뽕팸과 재효, 윤서가 있었다.
“우리까지 껴도 되는지 모르겠네.”
재효도 파트너인 사헌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께 징계를 받은 터라 다행히 시간이 났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징계 기간이어도 진사헌 에스퍼를 케어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
재영과 마찬가지로 들뜬 윤서가 재효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리고 친구들 쪽은,
“혀, 형님도 간다고는 안 했잖아.”
민태가 반쯤 울면서 재영에게 항의했다.
“나랑 형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데 말할 필요 없지.”
재영은 그런 민태를 보며 뻐기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친구들이 겁에 질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얘들아! 나 안재효 에스퍼님 사인받았어.”
동준이 그런 친구들 사이에 파고들어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인지를 들어 보였다. 어지간히도 감동적인 모양이다.
“하, 한 몸…….”
“역시 그렇게 된 거냐?”
동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민태와 해운이 재영의 말에만 경악하며 반응했다. 하지만 일명 ‘성덕’이 된 동준도 꿋꿋했다.
“안재효 에스퍼는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지만, 사실 내 최애 중 하나거든.”
“넌 좀 저리 가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재영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아차하면 그 순간이 오겠지만, 아직은 잘 유지 중이다.
‘솔직히 조금 궁금하긴 한데…….’
그냥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그 이상은 얼마나 좋을까. 캐리어 안을 채운 콘돔을 떠올리자 든든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하나씩만 말해.”
재영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사헌이 짜증스레 내뱉었다. 각자 저 할 말만 늘어놓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승무원분들이 기다리시니까 우선 타자.”
분위기가 가라앉자 재효가 능숙하게 안내했다.
“개인 비행기로 가는 거예요?”
“그쪽으로 가는 항공기는 없으니까.”
“미친. 개인 항공기래.”
“그럼 우리 뷔쥐니스석에 앉는 거야?”
재영의 물음에 사헌이 답하는 것을 보고는 친구들이 기쁨에 젖어 외쳤다.
“왜들 이래. 해외여행 한 번 안 해 본 사람들처럼.”
해운이 도도하게 말하며 비소를 지었다.
“너 고소공포증은 괜찮냐?”
재영이 사실을 지적하자 선글라스를 쓴 해운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꼬리 쪽에 타.”
먼저 계단을 올라간 사헌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비즈니스석을 상상한 친구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냥 이쪽에 타게 해 주면 안 돼요? 자리도 많이 남을 텐데…….”
재영은 쫓겨나다시피 한 제 친구들을 챙기려 했다.
“안 돼. 시끄러우니까.”
하지만 사헌이 단호하게 내뱉으며 재영의 어깨를 당겼다.
“그러면 저도 친구들이랑…….”
재영은 사헌의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 뒤를 힐끔거렸다. 어느새 끌려가던 걸음이 멈췄다. 재영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마도 귀빈석이었을 자리가 넓은 침대로 채워져 있었다.
“넌 안 되지. 나랑 한 몸인데.”
그렇게 말한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며 침대를 두드렸다. 제가 한 말을 따라하는 식의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재영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 그렇죠?”
재영은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사헌이 그 팔을 휙 당기는 바람에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침대로 눕혀졌다.
“좀 자 둬.”
품으로 끌어당긴 사헌이 재영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뭐, 장단이나 맞춰 줄까.’
재영은 사헌의 옷자락에 코를 묻으며 눈을 감았다. 들떠서 잠을 설친 탓인지, 냄새가 좋아서인지 금세 몸이 늘어졌다.
* * *
정신이 깨어났을 때는 몸이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노곤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았다.
‘형이 안아서 옮겨 주는 건가?’
재영은 사헌의 가슴팍에 얼굴이나 비비면서 편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등이 좀 축축……. 아니, 엉덩이도 좀…….’
따뜻한 것에 감싸인 것 같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이 차게 느껴지고. 귀를 기울이자 찰싹찰싹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슬슬 눈 떠볼까 생각하자 재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깼나?”
곧장 귓가에 사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이야 어떻든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벗은 상체에 사헌의 손바닥이 스치는 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아이들이 떠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소리다. 재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조차 반가웠다.
“정말 여기서 벗겨지고 싶은 게 아니면 그만 눈뜨는 게 좋을 거야.”
그때 위협적인 말이 달콤한 목소리로 귀를 파고들었다. 재영은 귀를 적시는 숨결을 느끼며 못 들은 척했다.
“뭐야, 진사헌 맞아? 도플갱어라도 나타난 건가?”
그런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구지?’
재영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초대한 사람은 전부 남자. 이렇게 높은 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안녕.”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금발의 미인이 재영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완벽한 외국인의 모습이라 유창한 한국말에 위화감이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김재영이라고 합니다.”
재영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상대를 살폈다. 저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여자고.
“그런데 누구…….”
재영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헌과 낯선 상대를 번갈아 살폈다.
‘설마 나한테 형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주려는 건 아니겠지?’
재영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었다. 당장 연인은 아니어도 썸타는 사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재영은 앞으로도 사헌이 계속 접촉해야 하는 가이드로 미리 인사라도 시키려는 건지도 모른다. 온갖 우울한 추측이 재영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캐나다의 S급 가이드다.”
“어머, 싫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재영의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여자는 가감 없는 정체성 소개가 진짜 싫은 얼굴이었다.
“엠마 이본이야, 재영. 엠마라고 불러 줘.”
“반가워요, 엠마.”
재영은 엠마가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전에 재효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다. 사헌과 친한 캐나다의 S급 가이드가 있다고. 그게 엠마였던 모양이다. 거기까지 떠올린 재영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엠마는 여기 어쩐 일로…….”
사헌과 친한 건 알겠는데, 갑자기 떠나온 여행지에 왜 그녀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 내 섬인데. 몰랐어?”
엠마의 말에 재영이 놀란 눈으로 사헌을 돌아봤다.
“형 거 아니었어요?”
“필요를 못 느껴서 안 샀는데, 하나 살까?”
사헌이 재영의 턱 아래를 살살 긁으면서 말했다. 귀여움 받는 반려 동물이 된 기분이다. 재영은 아무렴 어떤가 싶어 힘을 빼고 실실 웃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요, 뭐.”
엠마가 두 사람을 기이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그럼 우리 휴가 때문에 빌려 주신 거구나. 감사합니다.”
한발 늦은 감사 인사를 전하자 엠마가 깜짝 놀란 얼굴로 재영을 쳐다봤다.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멋대로인 녀석의 파트너가 되려면 보통 착해서는 안 되겠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할 말만 하고 꺼져.”
엠마의 반응에 사헌이 차갑게 내뱉었다. 말은 거칠어도 심기가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물어볼 게 뭐야? 진사헌이 진짜 휴가나 즐기자고 나한테 연락했을 리도 없고.”
그냥 징계받은 겸 휴가를 보내려고 섬을 빌린 게 아닌가? 게다가 사헌이 먼저 연락을 했다니. 재영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엠마와 사헌을 번갈아 살폈다.
“아까 말했듯 이 녀석은 캐나다의 S급 가이드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전부 물어봐.”
사헌이 말을 꺼낸 엠마가 아닌 재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덕분에 완전히 의심을 거두게 된 재영은 사헌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고 보니 네 나라는 S급이 처음이라고 했나?”
“네. 어쩌다 보니…….”
재영은 뒷목을 긁적였다. 쑥스러워서 얼굴까지 붉어졌다. 빤히 쳐다보던 엠마가 눈꼬리를 휘었다.
“좋아. 재영은 귀여우니까.”
“감사합니다.”
재영은 기분만큼 밝게 생글생글 웃었다.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좋은 법이다.
“앗, 차거!”
엠마와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는데 차가운 물이 뺨에 튀었다. 재영은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옆을 돌아봤다. 옆에 비스듬하게 누운 사헌이 바깥으로 손을 뻗어 물에 적시고 있었다.
‘누워? 바깥?’
그제야 재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가 있는 곳은 바다도 땅도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바다가 맞긴 한데 네모나고 넓은 튜브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한 번씩 튜브가 기울어지면 바닷물이 침범했다.
“제, 제가 왜 이런 곳에…….”
게다가 앞이 막힌 동굴 안이다.
“둔하네, 재영.”
재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자 엠마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밤에 안 재운 게 미안해서 깨울 수 없었어.”
사헌이 오해하기 좋은 말을 하며 재영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하얀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아, 으, 그럼 어쩔 수 없죠.”
재영은 그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한 모습에 사헌이 김빠진 듯 혀를 찼다.
“아, 저기,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S급 가이드에 대해서 궁금한 건 뭐든 물어봐.”
엠마가 물이 차지 않은, 동굴 끝자락에 서서 양팔을 펼쳤다. 풍부한 표정 때문인지 연기하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재영은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뗐다.
“다른 가이드의 기운이 보여요. 이게 S급 가이드의 고유능력인지, 아니면 제게만 있는 능력인지 궁금해요.”
“내 힘이 보이는지 볼래?”
고개를 끄덕인 재영은 엠마에게 집중했다. 빨간 불길 같은 것이 그녀의 손끝에서 살랑거리며 사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탐스러운 과일을 향해 혀를 낼름거리는 뱀처럼 보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사헌의 몸 안에서 그의 마나와 섞일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재영은 재빨리 사헌의 앞을 막아섰다.
“사헌이 형한테 가이딩할 수 있는 건 저뿐이에요.”
제법 힘이 들어간 눈빛에 엠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맞죠, 형? 제 가이딩만 받기로 하셨잖아요.”
재영은 고개를 돌려 사헌과 눈을 마주쳐 제 편을 들라고 졸랐다.
“걱정 마. 나도 괜히 고생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자 엠마가 먼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고생이요?”
“에스퍼로부터 가이딩을 거부당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에스퍼가 가이딩을 거부할 수도 있어요?”
엠마의 말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아는 건 에스퍼가 강제로 끌고 가려는 걸 가이드가 끊어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에스퍼는 모두 가이드에게, 가이딩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나?’
에스퍼가 가이딩을 거부한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
엠마가 예쁘게 칠한 손톱 끝으로 사헌을 가리켰다.
“아…….”
재영은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것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가이드를 거부하는 에스퍼가 바로 옆에 있었다.
“에스퍼가 튕겨 낸 기운은 우리에게 독으로 돌아와.”
그렇게 말하는 엠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지 입술이 하얗게 질려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이딩을 하는 건 위험해.”
사헌이 그것 보라는 눈빛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폭주를 앞둔 에스퍼가 가이딩에 집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도 위험하다니. 재영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라이터 끝에 붙은 불꽃처럼 머무르던 기운이 엠마의 몸 안으로 갈무리됐다. 재영은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기운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재영, 남자네.”
엠마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음흉하게 웃었다.
“난 재영이라면 괜찮아.”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모를 말에 재영은 그제야 자신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깨달았다. 엠마가 괜찮다고 하는 말은 분명 건전한 교제에 대한 건 아니리라.
“네? 어,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대학에 가면 막연히 여자친구를 사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농염함이 넘치는 연상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 재영에게는 사헌이 있었다.
‘형도 좀 저런 과였나.’
움찔한 재영은 사헌을 힐끔거렸다. 가끔 피곤해서 늘어진 그를 보고 있으면 뱃속이 근질거리기는 했다.
“김재영.”
등 뒤에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헌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가이드인 김재영에게 한 말이겠지만, 한눈 팔지 말라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두드렸다.
“아니, 진짜 그런 게 아니라요.”
재영은 호들갑스럽게 두 손을 내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엠마 힘이 거기에 뭉치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가이드의 힘은 평소에는 조용히 잠들어있다가 가이딩을 하려고 움직이면 선명하게 색을 드러냈다. 재영 같은 경우에 기운이 잠들어 있는 장소가 단전 바로 아래다.
“그것도 보이니?”
엠마가 크게 뜬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도 설명해 볼래?”
“어떤 식이냐하면…….”
재영은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지 미간을 모으고 골몰했다.
“꼬리가 긴 도깨비불……이라고 하면 될까요? 붉은 별똥별이라고 해도 좋고. 아무튼 그런 게 혈관을 쭉 타고 흘러서, 여기, 하나로 뭉쳐지는 느낌이에요.”
엠마의 기운이 움직인 그대로 손가락으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마지막으로 가슴께를 가리키게 되자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재영의 손을 감싸 내렸다.
“아, 제가 또…….”
“괜찮아, 괜찮아.”
엠마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붉은색이라고 했니? 나 말고 다른 사람도 같은 색이니?”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와 달리 엠마는 색까지는 안 보이는 듯했다.
“질문은 김재영이 하는 거야.”
사헌이 엠마를 향해 싸늘하게 내뱉었다. 엠마가 토라진 것처럼 입술을 툭 내밀었다.
“가이드끼리 정보를 나누면 좋잖아. 어차피 그러려던 거 아니었어?”
엠마가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이자 사헌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엠마가 재영을 보며 즐거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번에 전세계 가이드 연합을 만들기로 했거든. 당연히 재영, 너도 가입해야 해. 왜냐하면 사헌이 추진한 거니까.”
갑자기 쏟아지는 정보에 어질어질해졌다. 눈만 끔뻑이던 재영은 엠마의 말 끝에 너를 위해 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재영은 정말이냐는 뜻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그러자 사헌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눈을 피했다. 재영은 그의 어깨를 잡고 매달려 집요하게 시선을 쫓았다.
“둘이 애정 행각은 나 가면 해.”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엠마가 눈을 흘겼다. 재영은 뻘쭘하게 웃으며 사헌을 끌어안은 팔을 거뒀다.
“색깔은…… 모르겠어요. 그렇게 신경 써서 보지를 않았거든요.”
던전에서는 가이드에게서 나온 기운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재영의 관심사였다. 가이드마다 색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지금 엠마의 질문을 받고서야 알아챘다.
“그러면 잘 보고 다음에 알려 줘.”
엠마가 자연스럽게 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재영은 사헌의 눈치를 살폈다. 사헌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안심하고 엠마의 스마트폰에 제 번호를 남겼다.
“그럼 난 가 볼 테니까 충분히 쉬다가 가.”
들고 온 백에 재영의 연락처가 남은 스마트폰을 챙겨 넣은 엠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가신다고요?”
재영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엠마 또한 휴가를 보내려고 온 것 아닌가. 비행기나 헬기가 없으면 올 수 없는 섬이라고 들었는데. 자기 섬에 놀러 온 친구 반겨 주자고 비행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만약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조금 질투날 것 같은데…….’
재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엠마와 사헌을 쳐다봤다.
“엠마는 널 만나려고 온 거야.”
사헌이 그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재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자 엠마가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S급 가이드라는 게 그렇게 흔하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재영은 무려 ‘공주님’을 쓰러뜨린 왕자님이잖아.”
엠마가 끝이 날카로운 눈으로 사헌을 흘겼다. 그를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이라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에스퍼도 아니고 가이드면서 대거리를 하는 게 대단했다. 아니, 오히려 에스퍼가 느슨해질 수 있는 가이드라서 그런가. 어쨌든 사헌과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맞는 것 같다.
“저희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재영이 미안한 얼굴로 말하자 사헌이 괜찮다는 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센터에서 우리가 외국의 가이드나 에스퍼와 접촉한 걸 알면 귀찮아져.”
“맞아. 성가셔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어.”
엠마도 사헌의 말에 동의했다. 타국 능력자들을 만나면 그들을 따라 망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소에 잘했어야지.’
재영은 입술을 삐죽였다. 사헌이 옳은 말을 좀 거칠게 했다고 징계를 준 센터의 높으신 분들이 못마땅했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봐서 좋다.”
엠마가 기쁜 목소리로 내뱉자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른 사헌이 품 깊숙이 그를 숨겼다. 엠마가 뺏어가기라도 할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엠마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만나. 당당하게 데이트하자.”
엠마가 재영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뒤통수를 누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혀, 형. 조금만……살살…….”
재영은 억눌린 상태로 겨우 입을 뗐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사헌의 몸통에 재영의 얼굴 모양이 그대로 남을 것 같다.
앓는 소리에 사헌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재영의 볼을 감싸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인사는 제대로 드려야죠.”
재영은 사헌의 손을 잡아 내렸다. 놓아주지는 않았다.
“오늘은 감사합니다. 언제든 꼭 보답할게요.”
엠마가 화사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가시게요? 헤엄쳐 가시려는 거면 차라리 여기…….”
재영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돌아선 엠마가 동굴 벽의 울퉁불퉁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서 옆으로 밀었다. 틈새로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거기에 문이 있었어요?”
재영은 놀란 눈을 깜빡였다. 영락없이 동굴 벽이라고만 생각했다.
“섬 반대편으로 이어져 있어.”
미어캣처럼 몸을 반쯤 일으킨 재영이 문 너머를 기웃거리자 엠마의 눈웃음이 더 짙어졌다.
“여기서 파티할 거니까 심심하면 놀러 와. 예쁜 친구들도 많아. 재영하고 친구들은 언제나 환영이야!”
이 이야기를 하면 동준이나 민태나 환장할 것 같다. 재영은 대답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헌과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엠마가 문을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빛이 사라졌다.
엠마가 사라진 동굴은 고요했다. 가끔 갈 곳 없는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현실감 없는 상황에 멍하니 앞만 응시하던 재영이 움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파티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요, 알았죠?”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재영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사헌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왜? 엠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는데.”
사헌이 입술 끝을 비틀었다. 다 알면서 놀리려는 게 뻔했다.
“가 봤자 전부 다 형을 노릴 거 아니에요!”
재영은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미녀들과 어울리는 사헌이라니. 상상만 해도 싫다. 사헌이 벌게진 재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헌의 입가에는 질 나쁜 미소가 걸렸다. 동그란 재영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하여튼 먼저 좋아한 사람이 죄인이라니까.’
재영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사헌의 손을 고쳐 쥐었다. 그때였다.
삐-, 삐-, 삐-
익숙한 신호음이 시끄럽게 동굴을 채웠다. 재영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소리는 사헌의 손목에서 들려왔다.
“그걸 왜 하고 오셨어요?”
재영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사헌의 손목, 정확히는 워치를 노려봤다. 지금은 센터와 관련된 모든 것이 꼴도 보기 싫었다.
“습관.”
사헌이 워치를 만지작거리면서 성의 없이 툭 내뱉었다. 18살부터 지금까지 무려 6년이다. 거의 한몸처럼 느껴질 만도 했다. 게다가 사헌은 센터의 요청에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성실 사원을 핍박하다니.
‘역시 센터에 제대로 항의 한 번 해야겠다.’
재영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가려는 건 아니죠?”
재영은 워치랑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비행기를 타고 온 여행이라고 하지만, 재효의 능력이라면 순식간에 호출이 온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오지 말라고 한 건 센터야.”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한 사헌이 풀어낸 워치를 튜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다. 파도가 치면 출렁이면서 물살에 휩쓸려 나갈 수도 있다.
“박살이라도 낼 것 같더니, 왜?”
재영이 워치를 잽싸게 주워 드는 것을 보고 사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필요하잖아요.”
재영은 싫은 얼굴로 워치를 제 손목에 채웠다. 사헌이 제 것으로 채워진 하얀 손목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것도 볼만하네.”
재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헌의 입가에는 정말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숙소로 가면 바로 가방에 쑤셔 넣어 버릴 거예요.”
재영은 으르렁거리며 나름 성질을 부렸다. 비행기에 탄 직후부터 계속 잠들어 있어서 숙소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까 숙소는 어떻게 가지?’
재영은 주변을 살폈다. 엠마가 나간 문은 닫혔고, 이곳에 있는 건 두 사람이 올라탄 튜브뿐이다. 동굴 너머는 망망대해 같은데…….
“여기 어디예요? 우리 어떻게 온 거예요? 아! 재효 형이 데려다준 거예요? 이제 용무 끝났으니까 데리러 오시는 거죠? 워치로 연락하면 되나요?”
사헌이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 내는 재영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냥 이거 타고 왔어. 데리러 안 와.”
“네? 어떻게…….”
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튜브가 둥둥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지럽지 않을 정도로는 빠른 속도였다. 바람이 분다고 해도 돛이 없고, 파도도 보이지 않았다.
“너, 내가 뭔지 잊은 거야?”
사헌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럴 리가요. 형이 염력 에스퍼라는 걸 모르는 사라…….”
재영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사람 대신 능력이 튜브를 밀고 가고 있었다.
“능력 써서 실컷 못 놀면 어떡해요!”
재영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사헌을 쳐다봤다.
“네가 뭔지도 잊은 모양인데.”
사헌이 이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재영의 머릿속으로 깨달음이라는 게 스쳐갔다.
“알았으면 입 벌려. 충전하면서 갈 거야.”
재영의 볼을 감싼 사헌의 손가락 끝이 예민한 귀 뒷부분을 문질렀다. 재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부드러운 입술을 누르고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따뜻한 숨이 섞였다. 재영의 뒷목을 잡은 사헌이 각도를 틀어 더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흐…….”
계속 빨리는 혀가 얼얼해서 뒤로 빼면 사헌이 매섭게 쫓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얽히다가 숨이 막힐 즈음 입술이 떨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봤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에 사헌이 입을 맞췄다.
“얼른 가서 물놀이하고 라면 끓여 먹어요.”
“고기가 아니라?”
“물놀이 뒤에 먹는 라면이 얼마나 꿀맛인데요. 제가 진짜 맛있는 라면 먹게 해 줄게요.”
재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헌의 입술 주변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얕아지고, 열기가 점점 식어갈 즈음에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쳤다.
“근데 이왕이면 수영복으로 갈아 입혀 주시지.”
재영은 젖은 옷을 찝찝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공항에 간다고 모처럼 쫙 빼입은 상태라 더 그랬다.
“완전히 보모 취급이네.”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재영의 머리통을 툭툭 두드렸다. 난데없는 취급에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재영은 애교스럽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했다.
“저기 김재영이다! 돌아왔어!”
곧 저쪽에서 그립고도, 그립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어디까지 떠내려간 거야!”
“역시 공주님. 우리 재영이 구해 오실 줄 알았어.”
튜브가 해변 근처까지 밀려오자 화난 표정의 아이들이 참방거리며 다가왔다. 엄밀히 따지면 잠든 사이 사헌에게 납치당한 건데. 재영은 억울했다.
사헌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태연하게 튜브에서 내렸다. 혼자 남은 재영은 분노한 친구들에 의해 튜브가 휙 뒤집어졌다. 순식간에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졌다.
“야! 옷이라도 좀……! 악……!”
머리가 수면 위로 솟으면 억센 손들이 막무가내로 눌렀다. 젖은 옷이 팔다리에 휘감겨서 더 움직이기 불편했다.
“주, 살…….”
살려 달라는 건지, 죽이라는 건지. 저도 모를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딱 이대로 죽겠다 싶을 때, 든든한 팔이 허리를 두르고 불쑥 끌어올렸다.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에 재영은 마음 놓고 기댔다.
“그만.”
재영은 사헌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커다란 손이 연신 콜록거리는 재영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흐으,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재영은 단단한 어깨에 맵싸한 코를 비볐다.
“해변으로 집합.”
하얗게 질린 얼굴을 살피던 사헌이 냉랭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차가운 분노가 저한테 향하는 것도 아닌데 재영의 몸이 떨렸다.
“엎드려뻗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머뭇머뭇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무슨 초딩이야? 그런 식으로 놀다가 진짜 다치면 어쩔래.”
사헌이 주는 벌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준비도 안 된 사람 물에 빠뜨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데. 재영은 무조건 사헌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서 라면이나 끓여.”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다. 살짝 돌아보자 친구들이 고개를 들고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재영은 인자하게 웃어 보이곤 등을 돌렸다.
* * *
커다란 냄비 세 개에 나눠 끓인 라면을 다 먹고, 물놀이를 하다가 또 고기를 구워 먹었다. 한 잔, 한 잔 마신 술이 불쾌하게 오를 즈음이었다.
“당장 돌아가야겠어.”
재효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사헌이 관심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준오가 다쳤대.”
이어지는 말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준오라면 땅개 에스퍼님?”
모두의 시선이 사헌에게 쏠렸다. 무표정했지만, 눈동자에 많은 감정이 얽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