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새하얗게 변한 눈앞에 색이 돌아왔다. 재영은 자유로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재효의 힘으로 이동할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후유증으로 힘겨워하는 건 재영만이 아니었다. 순간이동 에스퍼가 무리했는지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더 이동하지는 못하겠네.’
쓰러진 에스퍼를 힐끗 살핀 재영은 바로 위치 추적 목걸이부터 손에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훈에게 끌려갔다.
“너 이거 납치라는 건 알고 있어?”
재영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설명도 없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온 것도, 그래서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헌을 바람맞히게 된 것도.
“미안.”
훈이 재영을 돌아보며 짧게 내뱉었다. 초조해 보이는 눈빛 때문에 재영은 말문이 막혔다.
“한 번만 같이 가 줘.”
훈이 재영의 손목을 고쳐 쥐며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애원하는 목소리에 몸에서 힘이 탁 빠졌다.
“그건 순간이동 능력 쓰기 전에 말했어야지.”
재영은 뾰족한 말투로 서훈을 힐난했다. 사실 이제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는데,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단단히 말해 둬야 한다.
반강제로 끌려가면서 재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시 외곽이나 시골쯤 되는지 쭉 뻗은 도로 양쪽으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어느새 처음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장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그리고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기분 나쁜.
“뭐야, 이거? 너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하얗게 질린 재영이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에스퍼인 훈에게는 역부족이다.
“위험한 일은…… 없게 할게.”
말 사이의 머뭇거림이 굉장히 수상했다. 재영이 의심을 품든 말든 훈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곧 재영의 눈에 여울 고아원이라는 명패가 보였다.
‘한 시간 거리를 왔다고?’
차도 잘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해졌다. 믿을 건 재효, 아니, 재효를 데려올 사헌뿐이다.
“오셨어요?”
입구를 막 지나자 안경을 쓴 여자가 훈에게 알은척을 하며 뛰어왔다. 재영은 저를 힐끔거리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여기 폭주 예정인 아이가 있어.”
나지막한 말에 재영은 움찔했다.
“그럼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재영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전에 중계로 본 폭주로 인해 그게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어느 정도는 알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 정도의 정의감과 딱 그 정도의 이기심을 가진 그냥 그런 사람이다.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속을 뛰어드는 용기는 없단 말이다.
“다른 아이들이 겁먹고 있어. 도와줘.”
재영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발에 힘을 줬다. 질질 끌려가는 그의 눈에 주변 풍경이 스쳤다. 낡은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작은 눈망울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S급 가이드인 네가 아주 조금만 도와줘도 진정될 거야.”
재영은 더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대신 불쾌한 기운이 뿜어지는 쪽으로 뛰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가라앉히는 게 나아.’
달라진 재영의 기세에 서훈도 조금 안심한 듯 얼굴을 폈다.
폐교를 고쳐서 고아원으로 쓰는 건지 내부의 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나무가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한 교실에 다다르자 문을 통해 던전에서 본 하랑 길드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어지러운 기운에 휩싸인 에스퍼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까 싶은 앳된 소녀였다.
신체 강화 능력자인 태진이 문 앞에서 울부짖는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구석에서는 방어 능력이 있는 에스퍼가 빠져나가지 못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가 될 때까지 왜 방치한 거야?”
재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원망스러운 투로 묻고 말았다.
“저 애는 17살이야.”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에스퍼의 폭주를 가라앉히는 것은 동급 이상의 가이드만이 가능하다. 아니면 매칭률이 높거나. 하지만 검사를 하지 않아 등급조차 모르니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를 찾는 것도, 등급이 맞는 가이드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반면 S급은 누구든 매칭률이 40퍼센트 이상을 웃돈다. 훈으로서는 자신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티도 잘 나지 않는 신체 강화 에스퍼야. 발현한 줄도 모르고 힘을 쓰다가 폭주가 왔어.”
“아…….”
재영은 탄식을 흘렸다. 아이는 그저 제가 남들보다 힘이 센 줄 알았을 거다. 이렇게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특히 일손이 부족할 테고, 그냥 잘됐다는 생각밖에 안 했을 터다.
“무려 B급의 마력이야. 폭주의 영향은 저 애에게서 그치지 않아.”
훈이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소녀를 보면서 말했다. 재영은 중계방송으로 봤던 에스퍼의 폭주 장면이 떠올랐다. 사방으로 튄 파편에 주변 사람들이 공격받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있다.
‘두 번은 안 돼.’
다시 한번 머릿속에 사헌의 목소리가 울렸다. 딜레마다. 가이딩을 하지 않으면 애들이 다치고, 가이딩을 하면 사헌과의 약속, 계약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정의로운 재영의 마음이 이내 단단해졌다.
“일단 저지르자.”
재영은 다급하게 말했다. 사헌이 위치를 쫓아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시간이 없어.’
재영은 훈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목걸이의 추적기를 발동시킨 걸 후회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눌렀을 것이다.
“저 애에게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그냥 다가가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그러자 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방사 가이딩으로 해.”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사헌에게는 A급 순간이동 능력자인 재효가 있다. 목걸이를 발동시켜서 위치를 알고 있으니 순식간에 도착할 것이다.
방어 능력의 에스퍼에게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는 폭주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막고 있어서 안 된다.
“방법 없으면 그냥 간다?”
재영은 서훈이 붙잡기 전에 안으로 발을 디뎠다. 눈을 뜨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우악!”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바람에 놀란 재영이 소리를 내질렀다. 등이 단단한 것에 기대졌다. 휘둥그레진 눈에 훈의 얼굴이 들어찼다.
“이게 안전하고, 빨라.”
공주님 안기라는 자세가 좀 민망하지만, 확실히 마나에 영향을 받는 게 덜했다. 재영은 몸에서 힘을 쭉 빼고 훈의 가슴팍에 기댔다.
“만약에 저 녀석이 나를 강제하려고 하면 말이야.”
재영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훈이 눈만 내려 재영을 쳐다봤다.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집착한다.
그게 사헌이 재영을 연습시킨 이유였다. 에스퍼에게 가이딩은 고양이의 캣닢과 같다. 입에 맞는 기운을 찾으면 정신을 잃고 달려들게 된다.
“저 애를 나한테서 떨어뜨려 줘.”
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딩은 할 거야. 그런데 주도권은 내가 잡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재영은 에스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훈이 걸음을 멈춰서 손끝이 겨우 잡혔다. 재영의 힘이 아이의 몸 안으로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순간이동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속이 뒤집혔다.
날카롭게 벼려진 힘은 난도질할 것처럼 재영의 피부를 공격했다. 재영은 참고, 또 참으면서 혈관을 타고 기운을 흘려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던 아이의 눈이 번뜩였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기운이 모자랐는지 재영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처럼 팔을 마구 휘둘렀다. 공포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이지를 잃은 괴물 같다.
“서훈.”
하얗게 질린 재영은 약속 지키라는 듯 서훈을 불렀다. 훈이 단단한 팔로 재영의 몸을 감싸 끌려가지 않게 했다. 동시에 에스퍼를 잡은 태진에게 눈짓해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얌전히 받아먹기만 해.”
서훈이 에스퍼를 향해 경고조로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그를 향해 눈을 치떴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훈이 무슨 짓이라도 했는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꼬리를 말았다.
“잘했어.”
재영은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채 기운으로 아이를 쓰다듬었다. 얌전히만 있으면 푹 젖도록 쏟아내 준다는 걸 깨달은 아이는 눈을 감고 가이딩을 누렸다.
방 안을 휩쓸던 사나운 기운이 줄어들었다. 바람이 멈추고, 위협적인 공기가 사라졌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거둬들였다. 눈을 뜬 소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안 돼. 이건 다른 사람 거거든.”
재영은 상냥하고 한편으로는 단호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김재영!”
멀지 않은 곳에서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내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형!”
재영은 단박에 뛰어가 사헌의 품에 안겨 들었다. 걱정되던 차에 얼굴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덜 혼나려고 미리 애교를 떨어 두는 거기도 했다.
“서훈 어디 있어.”
바닥을 긁는 목소리가 위협적이다. 훈이 눈에 띄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재영은 사헌이 가지 못하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무 일도 없잖아요. 혼내는 건 제가 했으니까 형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들을 감싸고 있던 어른들이 재영에게 달려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헌이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누가 누구에게 묶인 것이든 재영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라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물론 우리까지도 구하신 거예요.”
그들은 재영의 민망한 자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도의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런데 저희가 보답할 게 없어서 어쩌죠?”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께서 안절부절못하며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군데군데 낡아빠진 폐교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이 고아원이 부유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보답을 생각하고 가이딩한 것도 아니다. 그럴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보답은 저희 길드에서 따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다만 하랑 길드와 고아원이 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대신 보답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재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할머니와 태진을 번갈아 봤다.
“하지만 그러면 저희가 너무 염치가 없어서…….”
“이게 다 빚이라니까요? 나중에 세라가 우리 길드에 올 수 있게 설득 도와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이 분은 하랑 길드 분이 아니시고,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던데…….”
아이들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재영과 훈의 굳어진 분위기를 읽은 모양이다.
“아! 그럼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여기서 가온시로 돌아가시려면 시간도 많이 지체될 테고.”
이래저래 곤란해진 재영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럴까요?”
그 정도로 고아원 사람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재효가 있으니 곧장 돌아갈 수 있어.”
사헌이 못마땅한 눈치로 말했다.
‘아, 참. 사헌이 형이 있었지.’
재영은 그때까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 폭주 에스퍼 상대로 가이딩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가서 쉬어야지.”
오늘만은 재효도 사헌의 편이었다.
재효가 고아원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해해 달라는 듯 웃었다. 사람들은 가이딩을 한 재영이 지쳤을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아……. 그런 생각은 못 했네요. 그럼 어쩌면 좋지?”
“연락처 남겨 주시면 저희가 어떻게든 사례를…….”
“아니, 하랑 길드 분들 통해서 연락드리면 되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노부인이 재영의 등을 떠밀었다. 보답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고아원 식구들이 이제는 재영을 돌려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재영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건 그도 마찬가지다. 폭주 직전의 아이에게 가이딩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제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든 받아야 마음이 편해지시겠지.’
고민하던 재영은 옆에 선 사헌을 돌아봤다.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폭주할 뻔한 에스퍼, 세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태진이 그녀를 데리고 사라졌다.
재영은 사헌의 관심을 제게로 돌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뺨에 닿자 사헌이 눈을 내렸다. 눈동자가 유독 까맣고 번들거려서 재영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저 밥 먹고 돌아가고 싶은데 안 돼요?”
대꾸 없이 바라보는 빤한 시선이 싸늘하기만 했다.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할 만큼. 하얗게 질린 재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헌이 이내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의견이 중요한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재영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렸다. 사헌이 훈에게 보인 감정을 착각했다. 고작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다. 바닥으로 꾹꾹 눌러놨지만, 쌓인 분노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잠깐, 형…….”
뭔가 잘못됐다. 재영은 다급하게 사헌을 불렀다.
“너. 또 약속을 어겼지.”
하지만 사헌이 재영의 말을 끊어 냈다. 이번에도 재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계약을 어기고 훈에게 가이딩을 해 준 뒤에 사헌은 용서해 주며 두 번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기어이 두 번째도 저지르고 말았다.
“……집에 가서 얘기해.”
굳어서 어쩔 줄 모르는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재영은 마냥 끌려가지 않기 위해 땅을 디딘 발에 힘을 줬다.
“넌 지금 계약을 위반한 거야. 그 결과로 나한테 뭘 줘야 할지 이야기해 주지.”
사헌이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재영은 다른 쪽 손을 들어 사헌의 손등을 감쌌다.
“하지만 폭주 직전이었어요. 그 애가 폭주하면 그 다음은요? 여기 있는 아이들, 사람들. 모두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간절함이 담긴 외침에 사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제가 여기서 가이딩을 한다고 해서 형한테 못 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헌은 오늘 훈련 계획도 없고, 출동도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조금만 쉬어도 금방 채워질 정도의 힘밖에 소모하지 않았다.
사헌의 얼굴에서 비웃음마저 사라졌다.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졌다. 어떠한 온기도 없는 눈빛에 몸이 떨렸다. 허탈한 웃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은 사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다치는 건 괜찮고?”
뜻밖의 말에 재영은 굳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가이딩을 받지 못할까 봐 염려한 것이 아니다. 독점욕 때문에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걱정이다. 목구멍이 탁 막혀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했어요. 봐요. 괜찮잖아요.”
재영은 보란 듯 양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조심한다고 해서 생기지 않으면 사고가 아니지.”
사헌이 입술을 비틀었다. 재영은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애교스럽게 매달리면 된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빌면 된다. 하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또 이런 상황이 올 때, 나서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 할 수 없다.
사헌이 간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재영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안재효.”
사헌의 부름에 다가온 재효가 재영을 보고 난처하다는 듯 미소 짓더니 사헌과 함께 사라졌다.
“아…….”
재영은 뱀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스친 사헌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 * *
남겨진 재영은 식탁에 앉아 과하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사헌이 그렇게 돌아가 버린 후로 고아원 사람들이 불편할 정도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랑 길드와는 어떤 관계예요?”
가라앉은 분위기도 바꿀 겸, 재영은 계속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자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입을 뗐다.
“계속 저희를 후원해 주고 계세요.”
“일 년에 두 번은 직접 찾아와서 애들하고 시간을 보내 주세요. 구호품도 자주 지원해 주시고요.”
하랑 길드원들을 바라보는 고아원 식구들의 눈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그에 방어 계열 에스퍼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죠. 나라에서 데려가기 전에 먼저 찜해 두는 거예요.”
태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뽐내려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별건 없지만, 많이 들어요.”
노부인이 재영의 앞에 5구를 꽉 채운 식판을 내려 주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손맛이 들어간 반찬이 구미를 당겼다.
“감사합니다. 다 먹고 더 달라고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인자하게 웃은 노부인이 훈의 앞에도 식판을 놓으며 물었다.
“후원해 주시는 곳이 여기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죠?”
고개를 끄덕이는 훈을 보고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랑 길드는 던전에서 크리처의 사체를 뒤적이면서 길드의 사정이 썩 좋지 않아서라고 했다.
‘없는 형편에 남을 돕는 건 정말 보통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어쩌면 후원이 길드의 사정을 어렵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사람들이라는 건 확실하다.
“필수 검사 전에 사설 검사를 하면 위험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된 후로 재영은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곤 했는데, 필수 검사뿐만이 아니라 사설 검사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국가의 승인을 받은 기관만이 가능했다.
‘아마 사헌이 형이 나를 데려간 곳은…….’
사헌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설 검사는 진짜 터무니없이 비싸거든.”
“보통은 있는 줄도 잘 모르지. 그래서 발현이 이른 에스퍼들이 방치되는 거야. 그 주변 인물도 위험에 노출되는 거고.”
태진의 눈이 세라를 향했다.
“그걸 조금이라도 방지하고 싶어서 전국의 고아원과 커넥션을 만들어 두는 거야.”
“그래서 세라도 너무 늦지 않을 수 있었던 거고.”
“덕분에 살았어, 진짜.”
하랑 길드원들이 연달아 재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재영은 그냥 끌려와서 어쩔 수 없이 해 준 거라 인사를 받는 것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계속 거절할 수도 없으니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늦게 발견해도 폭주까지 가는 상황은 잘 없나 봐요?”
대처가 되어 있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저를 끌고 올 일은 없었을 테니. 태진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신체 강화가 아니면 능력이 쉽게 드러나서 에스퍼라는 걸 인지하기 쉽거든요. 그럴 땐 능력에 따라 센터로 인계하기도 하니까.”
이런 상황이 언젠가 또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재영은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하랑 길드 분들처럼 꾸준히 후원을 하지는 못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또 저를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에스퍼가 폭주하면 그 피해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시골이 아니라 도시였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네? 김재영 가이드가 도와주신다고 하면 저희야 좋죠!”
방어계 에스퍼가 환하게 웃으며 상체를 당겨 앉았다. 그러더니 곧 뭔가 떠오른 듯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진사헌 에스퍼님이…….”
화를 내고 간 사헌을 떠올리자 모래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까끌거렸다.
“제가 설득해 볼게요.”
“이런 일, 자주 있지 않을 거야. 우리 길드에도 A급 가이드가 있으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훈이 무리하지 말라는 듯 재영을 말렸다.
“마, 맞아요. 지금까지도 우리끼리 어떻게든 했으니까…….”
방어계 에스퍼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오늘 일로 꽤 겁을 먹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제가 손해 보면서까지 남을 돕는 착한 성격은 아니라서.”
재영은 걱정 말라는 의미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헌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야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는지 가닥이 잡힌 것 같았다.
* * *
불이 꺼진 집안은 조용했다. 하지만 재영은 사헌이 방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침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못 열겠어.”
작게 울먹인 재영은 박치기를 하는 것처럼 이마로 쿵, 문을 박았다. 예민한 사헌은 이 정도로 소리로도 잠에서 깼을 것이다.
“형. 저 하랑 길드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요.”
재영은 일말의 양심도 집어던진 채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사헌이 느른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둠 속에 그의 눈동자만 이질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계약서를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싶은 모양인데.”
입꼬리를 올린 사헌이 빈정거렸다. 재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형, 그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헌이 빨랐다.
“안 되지. 넌 내 거라고 했잖아.”
사헌이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턱에 힘을 주면서 내뱉었다. 동시에 재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항할 틈도 없이 몸이 문 안쪽으로 당겨졌다.
“먼저 어긴 건 너야.”
그대로 몸이 날아가 침대로 던져졌다. 재영은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눈을 끔뻑이면서 사헌을 쳐다봤다.
사헌이 천천히 침대에 한쪽 무릎을 댔다. 양팔을 교차해 셔츠를 벗고는 바닥으로 던졌다. 오밀조밀 잘 짜인 근육이 달빛에 빛났다. 재영은 목이 타서 마른침을 삼켰다.
“벗어.”
사헌이 위에서 깔보듯 내려다보며 뱉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에서는 장난기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재영은 머뭇머뭇 티를 벗었다. 눈치를 살폈는데 다른 행동을 취할 기미가 안 보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싸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바지 입고 하게?”
상의만 벗은 채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재영을 향해 사헌이 성가시다는 투로 말을 뱉었다.
“하, 하다니, 뭘.”
“순진한 척 사람 홀리는 게 너였지.”
당황한 재영이 말을 더듬자 사헌이 빈정거렸다. 그제야 재영은 그가 저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배상으로 뭘 받아 낼지는 내가 고르는 게 맞잖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사헌이 재영의 턱을 잡고,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늦게라도 제 뜻을 알아차린 걸 칭찬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조건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가이딩해도 된다는 거야.”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스까지만 하는 게 조건이었다. 침대 위로 올라온 사헌이 재영을 위에서 눌렀다. 그의 피부에 코를 박고 짐승처럼 목덜미부터 아래로 냄새를 맡으며 내려갔다. 재영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사헌이 눈을 들어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재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헌의 눈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언제나 저변에 깔려 있던 다정함이 보이지 않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헌이 형.”
재영은 애원하듯 불렀다. 멈춰 달라는 건지, 아니면 다정하게 해 달라는 건지. 자신이 뭘 원하는 지도 잘 몰랐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헌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읏! 아파요, 형.”
재영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사헌이 빗장뼈를 아프게 깨문 것이다. 피가 배어 나왔을 게 분명했다.
“흑, 제발.”
간절한 부름에 사헌이 혀끝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따끔한 통증이 반복됐다. 거기에 상처가 있다는 걸 잊을 수 없게 하고 있었다.
“왜. 나랑은 하기 싫어?”
사헌이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몸을 더듬는 손바닥에서 평소와 달리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재영은 못내 서러워졌다.
“형.”
울먹이는 목소리에 사헌이 고개를 들었다. 발갛게 익은 재영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또 내가 나쁜 새끼인가?”
재영의 얼굴을 살핀 사헌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재영은 흠칫하며 제 얼굴 옆에 놓인 사헌의 팔을 붙잡았다. 심기가 상한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해요, 형.”
재영은 단단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사헌에게 가이딩해 줘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사헌과 거의 끝까지 간 적도 있다. 넣지만 않았을 뿐, 사실 관계를 가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더욱이 재영은 그 행위에서 제대로 흥분했다.
“역시 쉽네.”
분명 원하던 거였을 텐데, 사헌이 화가 난 얼굴로 비아냥댔다. 재영은 가슴이 지끈거려서 눈가를 찡그렸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사헌이 재영의 입술을 피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피부에 닿은 이의 감촉을 느낀 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
재영은 정신 차리고도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어제도 결국 안 했네.’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열린 문 앞에서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자 외출 준비를 한 사헌이 보였다. 활동성 좋은 옷을 입은 걸 봐서는 현장에 나가는 모양이다.
‘자는 동안 던전이 발생했나 보네.’
재영은 다급하게 이불을 거둬 냈다.
“잠깐만요. 금방 준비…….”
“됐어. 넌 그냥 집에 있어.”
사헌이 발을 멈추지 않은 채 툭 내뱉었다. 재영은 침대에서 내려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저, 저번처럼 가이딩이 필요해지면 어쩌려고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아마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그럴 것이다.
“센터에서 나온 가이드 있잖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 나온 재영은 뻗은 손으로 사헌을 붙잡지도 못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을 받으시겠다고요?”
흔들리는 목소리에 사헌이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에서는 감정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안 될 이유 있나?”
“아…….”
탄식 말고는 내뱉을 말이 없었다.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하지 말라는 조건은 저에게만 달려 있다. 사헌은 누구에게나 가이딩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붙잡고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지만, 사헌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 * *
꼴깍.
손목을 한 번 꺾는 것으로 주먹만 한 잔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재영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리고, 미끄러뜨리듯 앞으로 내밀었다.
“형님 오늘 출동하시지 않았나? 너 여기 있어도 되냐?”
동준이 재영의 잔을 채워 주면서 의아하게 물었다. 쓰디쓴 액체가 목을 타고 흘렀다.
“형이 그냥 집에 있으래.”
재영은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대꾸했다. 실실 웃으며 내뱉은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심각한 눈으로 재영을 관찰하던 해운이 물었다.
“해운아아.”
풀린 눈으로 그를 돌아본 재영이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며 엉겨 붙었다. 그리고 해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주절주절 지난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아, 좀 떨어져서 말해.”
알코올 섞인 더운 숨이 불쾌했는지 해운이 움찔거렸다. 그럴수록 재영은 더 꽉 달라붙었다.
“너까지 나 밀어내면 나 진짜 울어.”
“너 지금 울고 있거든?”
퉁명스럽게 받아친 해운이 손가락으로 재영의 볼을 훔쳤다. 그제야 뜨거운 뺨이 젖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공기 취급당할 정도로?”
갈색 눈동자에서 동그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닦아 내도 달라지는 게 없어서 해운은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야. 얘 술주정 바뀌었냐?”
해운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좀 실연당한 그런 느낌 같은데…….”
민태가 재영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떡하지? 우리집에 가서 재울까?”
“가만있어 봐.”
동준을 말린 해운이 며칠 새 초췌해진 재영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서민태, 너 진사헌이랑 연락하지.”
해운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민태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몸을 움츠렸다.
“그, 그건 왜?”
“진사헌한테 연락해서 김재영 취했으니까 네 집에서 데려가서 재운다고 말해 봐.”
“뭐? 내 방 좁아서 싫은데…….”
“냄새나서 찹쌀떡 코 썩을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튼 연락이나 하라고.”
해운이 민태의 얼굴 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느라고 어깨에 기대있던 재영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민태가 떠밀리듯 사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영은 테이블에 볼을 대고 엎드려서 귀를 쫑긋 세웠다.
“아, 예. 오신다고요? 왜……. 아, 아니. 알겠습니다! 바로 대기하겠습니다!”
“온다고 하지?”
민태가 전화를 끊자 해운이 뻐기듯 물었다. 민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또 한편으로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은 흐느적거리는 재영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가게 앞에 바로 서 있는 사헌을 보고 놀란 친구들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우렁찬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면서 슬금슬금 멀어져갔다. 불량한 어떤 무리로 오해를 받은 듯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태워.”
해운에게 붙어 있는 재영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사헌이 차 쪽으로 턱짓을 했다.
“예? 아, 예!”
사헌의 명령에 재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평소라면 민태의 손을 쳐내고 직접 태웠을 텐데. 이제 정말 가이드와 에스퍼로만 대하려는 모양이다.
재영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척했다. 라디오 소리 하나 없는 차 안은 고요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쩌다가 잠이 들었다. 재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깨어났다. 허둥지둥 문을 열고 나와서 벌써 저만치 멀어진 사헌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같이 가요!”
하지만 사헌은 여느 때처럼 걸음을 늦춰 주지 않았다. 덕분에 재영은 엘리베이터까지 헐떡이며 뛰어갔다.
재영은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사헌의 뒤를 따라다녔다.
“형. 가이딩해야죠.”
사헌이 벗어서 바닥으로 내던지는 옷가지들을 익숙하게 척척 받아 내며 말했다. 사헌이 고개만 틀어 재영을 돌아봤다.
전투하고 왔으니까 오늘도 전날 밤과 비슷한 정도의 가이딩을 할지도 모르겠다. 열기로 눅진해진 공기를 떠올리자 목덜미부터 뜨거워졌다.
“받고 왔어. 신경 쓰지 마.”
“네?”
사헌의 말에 재영은 얼빠져서 되물었다. 말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른 가이드에게서 가이딩을 받은 모양이다.
‘누구였을까. 역시 안의경 가이드인가?’
아이돌처럼 미끈한 얼굴이 떠올랐다. 사헌과 매칭률이 높아서 언젠가 그의 페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던 그 사람.
“아,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역시 제가 따라갈걸 그랬어요.”
재영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 이모님이 전복 삼계탕 해두고 가신 댔는데. 데워 드릴까요?”
“입맛 없어.”
또 다시 차갑게 대꾸한 사헌이 욕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재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씻고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재영을 보고 사헌이 멈칫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을 스쳐가려고 했다.
“왜 오셨어요?”
재영은 꾹꾹 눌러둔 원망을 담아 소리치듯 말했다. 걸음을 멈춘 사헌이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봤다.
“데리러 안 오셔도 됐잖아요. 그냥 민태 집에서, 아니, 어디서 자든 내버려 두지 그러셨어요.
재영은 울컥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내 가이드이고, 내가 널 지켜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지나치게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가이드라서. 두 사람 사이에 그것밖에는 없는 것처럼 말했다. 재영은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나는 여전히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사헌이 감정 없는 사람처럼 내뱉었다.
‘내가 보호 받으려고 형 옆에 붙어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억울했다. 처음 계약은 그랬어도, 뭔가 달라지지 않았나? 그걸 그냥 가이딩이라고 설명할 수 있나. 사헌과 보낸 따뜻한 하루하루가 눈앞을 스쳐갔다.
“얘기 좀 해요.”
재영은 사헌을 앞질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눈을 들어 노려보듯 사헌을 쳐다봤다. 그제야 제대로 눈이 맞았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술 마셨다고 데리러 왔을 때부터 은근히 기대하기는 했다. 힐끔힐끔 사헌의 표정을 살핀 재영은 겨우 입을 뗐다.
“계속 이럴 거예요?”
함께 살면서 사헌을 가깝고, 편한 사람으로 느껴서인지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말이 튀어 나가 버렸다. ‘계약 위반’이라는 지극히 공적인 일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말이다. 사헌도 황당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게 평범한 페어, 아닌가?”
이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비웃는 듯한 미소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대꾸했다. 재영의 심장은 다시 한번 덜컥 내려앉았다.
“평범한 페어가 어떤지는 몰라요. 하지만…….”
두 사람은 페어라기보다는 친밀한 가족에 가까웠다. 마주 앉아서 밥을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준다거나 가이딩이 필요 없어도 치댄다거나. 하지만 그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려니 이상했다.
‘그건 가족이라기보다…….’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사헌이 말을 잇지 못하는 재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제대로 반성했다. 내가 에스퍼로서의 내 위치를 잊은 것 같아서.”
또다시 선을 긋는 느낌의 말에 재영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동시에 사헌이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할 말 더 있어?”
입술만 물어뜯고 서 있자 사헌이 심드렁한 투로 물었다. 먼저 물어 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무언가 바라는 것처럼 그를 쳐다봤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재영은 솟구치는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물었다. 사헌이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재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침묵이 숨 막힐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딱 하나야.”
마침내 사헌이 입을 열었다. 힌트가 아니라 아예 답을 주겠다는 말에 재영은 눈을 반짝였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잘못 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는지 사헌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한 방씩 뒤통수를 크게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헌을 올려다보던 재영은 침을 꿀떡 삼켰다. 그냥 따라만 하면 되는 말인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간 낭비할 뻔했군.”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재영은 입을 떡 벌리고 굳어 버렸다.
‘나와의 대화가 시간 낭비라는 거야?’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에 가슴이 저릿했다. 사헌의 등이 오늘따라 크고, 멀게 느껴졌다.
‘폭주 직전인 아이한테 가이딩을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문득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거 조금 나눈다고 형한테 할 가이딩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재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외쳤다. 사헌이 막 손잡이를 잡고 걸음을 멈췄다. 잠시 후 재영을 돌아본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계약 조건도 바꿨으니 너 좋을 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사헌이 침실로 사라졌다. 재영은 멍하니 서서 닫힌 문만 바라봤다. 손을 뻗었지만, 부를 수 없었다. 틈 없이 닫힌 문이 사헌의 마음 같았다.
‘또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았는데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재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라리 완전히 취해 버릴 걸 그랬다. 아무런 두려움도, 염치도 없이 사헌에게 매달릴 수 있게.
* * *
재영은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있었다. 초점 없는 시선은 글자가 빼곡히 적힌 칠판을 향해 있었다.
“하아.”
“괜찮아?”
깊은숨을 뱉자마자 옆에서 걱정스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서훈이다.
“너 그거 몇 번째 묻는 건지 알아?”
재영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고아원으로 납치했던 이후로 말수가 적은 서훈답지 않게 일정 간격으로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야말로 몇 번이나 한숨 쉬었는지 알아?”
훈의 말에 재영은 얼뜬 얼굴을 했다. ‘몇 번’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한숨을 자주 쉬었는지도 몰랐고, 누군가가 그런 저를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날 진사헌 에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주제라 재영은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능력자 둘이서만 사이좋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
타이밍 좋게 누군가가 뒤에서 두 사람을 덮쳤다. 어깨에 걸쳐진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음흉하게 웃는 민태가 있었다.
재영은 민태의 눈짓에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 내 사람들이 이쪽을 훔쳐보면서 호기심이 점철된 얼굴로 쑥덕거리는 게 보였다. 서훈이 에스퍼고, 자신이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서훈도 나왔는데 동기 모임 한 번 가져야 하지 않겠냐?”
민태의 말에 모인 눈빛들이 기대로 반짝였다.
“이번에는 서훈, 너도 빠지기 없어.”
훈과 가장 친한 친구인 녀석이 그의 몸을 누르면서 말했다. 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재영은 곤란한 미소를 흘렸다.
“사헌이 형은 어쩌고?”
심기가 상한 지금도 사헌은 등교할 때 재영의 경호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달라진 게 없었다. 친밀한 접촉만 제외하고.
“어차피 형님은 연락해야 오시는 거 아님? 놀고 간다고 하면 되지.”
“그래도…….”
재영은 찌푸려진 미간을 문질러 폈다. 다른 때 같으면 재영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사헌과의 약속을 어기는 게 꺼려졌다. 그냥 하굣길을 돕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경호는 서훈이 해 주면 되잖아. 동기가 위험에 노출되는데 무시하지는 않겠지.”
민태가 그렇지, 하는 눈으로 서훈을 쳐다봤다. 모르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고아원으로 봉사까지 다니는 녀석이다. 당연히 제 앞에서 위험에 처하는 걸 내버려 둘 수 있을 리 없다.
“위험하다고?”
서훈이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어?”
훈에게서 처음 보는 격한 반응에 민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냥 기자들이 달려들어서 불편한 것뿐이야.”
재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도움을 주고받은 관계라 친밀하게 느껴져서 괴롭힘당한다는 말에 화가 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연락해서 오늘은 데리러 안 오셔도 된다고 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그러…….”
“그럼 동기 모임 소집한다!”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은 민태의 들뜬 외침에 묻혔다. 재영은 높이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사헌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냥 친구들과 놀고 간다고 하면 되는데 망설여졌다.
[나] : 형. 저 오늘 동기모임 있어서 늦을 것 같아요.
[공주님] : 집 올 때 연락해
어렵게 보낸 것과 달리 사헌의 답은 바로 돌아왔다. 재영은 다음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망설였다.
[나] : 서훈이 데려다 준다고 하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바로바로 오던 답장이 끊어졌다. 재영은 스크롤을 올려서 이미 읽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화났나?’
하지만 답이 한참 오지 않자 괜히 말했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동시에 사헌이 전처럼 화를 내 줬으면 하는 미미한 기대가 들었다. 저 말고 다른 에스퍼 곁에 가지 말라고.
[공주님] : 그래
하지만 곧 날아온 메시지에 재영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
기분이 묘했다. 분명 마음 편히 놀 수 있다고 기뻐해야 하는데. 재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을 못 잔 것처럼 눈이 시큰거렸다.
“형님이 뭐래? 안 된다고 하셔?”
갑자기 끼어든 민태의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했다.
“응? 아니. 잘 다녀오래.”
재영은 애써 웃었다. 민태가 강의실이 떠내려가라 소리치며 날뛰었다. 입꼬리를 당기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 * *
치킨집에서 이루어진 동기 모임은 동기 모임이라기보다 에스퍼 서훈의 팬미팅 현장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주변에 앉으려는 통에 번호표를 뽑고 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누구의 꼼수인지 재영은 훈의 옆자리 붙박이였다.
“그러면 너도 가이드가 따로 있는 거야?”
동기인 효경이 눈을 반짝이며 훈에게 물었다.
“아니.”
서훈의 대꾸는 무뚝뚝하기만 한데 여자애들은 그것도 좋다고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고 관심이 온통 훈에게만 쏠린 것도 아니다.
“재영이 너는 진사헌 에스퍼 페어라고 했지? 안 무서워?”
물론 그게 온전히 재영을 향한 관심은 아니었다. 재영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헌이 사람들을 무섭게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전혀. 나한테 잘해 주셔.”
머리도 대신 말려 주고, 식사를 준비해 줄 때도 있다. 부탁하면 대부분은 들어주는 편이고. 와중에도 재영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 자연스레 사헌을 떠올린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그러자 동기들이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에스퍼는 가이드한테 약하다고 하더라. 목줄을 쥐고 있으니까.”
“진사헌 에스퍼는 오랫동안 맞는 가이드도 없었다며.”
에스퍼를 무슨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말하는 태도에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근데 형님은 얘한테는 원래 좀 약했어.”
재영의 기분이 더 상하기 전에 민태가 치고 들어왔다.
“아.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나?”
재영의 말에 힘을 싣는 증인의 등장에 동기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누리꾼들의 수사로 이미 재영의 친구가 사헌의 친동생이라는 것까지 밝혀진 마당이다.
“이 볼따구, 이거 반은 형님이 만든 거야.”
민태가 말랑말랑한 볼을 주물럭거렸다. 재영은 민태의 손을 아프게 쳐냈다.
“다 같이 맞을 때도 얘만 덜 패시고.”
그건 아마 피부가 유독 하얘서 티가 잘 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똑같이 때려도 더 많이, 더 심하게 때린 것처럼 보이니까.
“졸업할 때도 이 녀석만 찹쌀떡 챙겨 주시고…….”
속으로 일일이 반박하던 재영은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그때 이미 가이드라는 걸 알고 계셨나?”
하지만 민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팩트 폭행을 자행했다. 그때 사헌은 재영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에스퍼를 경계하고, 재영을 꼬드기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내가 가이드라서…….’
재영은 사헌이 제게만 특별히 다정했던 건 자신이 가이드이기 때문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진짜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깨달음을 얻은 재영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러다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착각했다고? 무슨 착각?’
재영은 갑작스러운 의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헌의 흑심 가득한 친절을 두고 다른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다.
* * *
쾅.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에 치킨집 내부의 시선이 쏠렸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낸 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풀린 눈으로 입을 뗐다.
“집에 갈래.”
그리고는 등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어? 김재영! 벌써 가게?”
“모처럼인데 좀 있다 가지.”
동기들이 못 보내 준다며 팔을 뻗었다. 하지만 재영은 기사가 터지기 전까지는 학과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러니까 절대 ‘모처럼’이 아니다.
“나중에.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야.”
재영은 단호하게 내뱉으며 손을 내저었다. 평소와 달리 어두운 그의 표정에 동기들이 주춤한 사이, 재영은 가게를 빠져나갔다.
“간다.”
훈이 일어나 재영의 뒤를 쫓았다.
“뭐? 서훈도 간다고?”
“훈아!”
서훈이 뒤에서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재영에게 달려갔다.
“어디서 뭐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먼저 나온 재영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툴툴거리며 사헌과의 대화창을 쓱쓱 올려 봤다. 며칠 동안 그가 보낸 메시지라고는 알았다, 그래 뿐이었다. 그래도 행방을 알리는 메시지는 잊지 않고 해 주고 있다. 그래, 변한 건 없다.
우울해서 한숨을 푹 내쉬다가 뒤에서 어깨를 잡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다.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휘둥그레 뜬 눈으로 돌아보니 훈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 미안. 내가 좀 취해서…….”
재영은 배실배실 웃으며 스마트폰을 내렸다. 걸음을 걷기 시작하자 다시 사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왜 그런 착각을 했지?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이 왜 이렇게 아프지?’
재영은 손바닥을 쫙 펴서 뻐근한 가슴팍을 문질렀다.
“어디가 안 좋아?”
평소 같지 않은 재영을 계속 지켜보던 훈이 곧장 반응했다.
“아니, 그냥 좀.”
재영은 괜찮다며 웃었다. 훈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택시를 타고, 재영이 사는 곳에서 내렸다.
“웬일로 이쪽으로 오네요?”
입구로 가자 경비원 아저씨가 알은척을 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재영이 창을 내리고 인사를 해서 안면은 익힌 상태였다.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었거든요.”
“아, 이쪽 분이 친구?”
경비원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훈 에스퍼군요.”
사헌보다는 못해도 훈 또한 이름 있는 에스퍼다. 그를 알아본 경비원이 감탄하며 재영을 힐끔거렸다. 사헌은 어디다 두고 다른 에스퍼를 달고 다니냐는 눈치다.
“네. 같은 과거든요. 오늘 동기 모임이 있었어요.”
“펜트 하우스에 방문하시는 겁니까?”
재영은 이것이 입주민이 아니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방문자를 확인하는 절차라는 걸 떠올렸다.
“아니에요. 이제 가야죠.”
경비원에게 대답하고 서훈을 향해 돌아섰다. 경비원 아저씨는 뒤로 조금 물러났지만,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위치에 서 계셨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제 혼자 갈 수 있어.”
훈이 경비원을 눈으로 훑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웃기는 상황이다.
“조심히 가!”
재영은 경비원에게도 눈인사를 건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로지 한 층으로만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 신상 보호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구에서 서훈과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에스퍼도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겠구나. 던전만이 아니라 보안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에스퍼를 경비로 두게 된 지 오래다.
자신이 원한 건 신원 보호인데, 사헌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깨달음에 입이 썼다.
“다녀왔습니다!”
재영은 현관에 들어서며 힘 빠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고개를 들자 테라스에서 바깥을 향해 서 있는 사헌이 보였다.
‘봤을까?’
재영은 물을 마시는 척 사헌을 힐끔거렸다. 그러라고는 했지만, 정말 훈과 나란히 나타난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귀찮은 계약자다. 전에 말한 것처럼 집안에 묶어 두고 가이딩을 하게 될까. 아니면,
‘계약 파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침 매칭률이 적당한 의경이 있다. 그 사람도 사헌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고. 재영은 초조한 마음이 드는 한편,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내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운 건가?’
돈이나 에스퍼의 보호 때문이라면, 사헌이 아니라도 제 가이딩을 원하는 사람은 넘칠 텐데. 이제 방사 가이딩에도 꽤 능숙해져서 스킨십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런 쪽의 껄끄러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 대체 왜 형을 뺏길까……봐…….’
재영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사헌은 누구에게나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새삼 ‘내 자리’라고 할 것이 없지 않나.
고개를 돌린 사헌이 이상하다는 듯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현관에 들어온 그대로 서서 침울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속이 울렁거렸다. 재영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씻고 올게요.”
그리고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을 틀고, 물이 바닥에도 채 깔리지 않았는데 욕조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머리에서 튕긴 차가운 물방울이 피부를 때렸다. 덕분에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 * *
찬물에 머리를 식힌 결과, 재영은 한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과, 과제나 해야겠다.”
그래서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어색한 연기톤으로 거실을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테라스 주변에 있던 사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더 집안을 기웃거리던 재영은 그대로 컴퓨터방으로 쏙 들어갔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재영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움직였다.
“좋, 아, 하, 는, 감, 정.”
엔터를 누르기 전 방문이 열리는지 슬쩍 쳐다봤다. 문밖은 잠잠했다. 재영은 눈을 꼭 감았다가 뜨고는 결과를 확인했다.
여러 글 중에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가장 눈에 띄었다. 재영은 곧장 마우스를 가져가 클릭했다.
-첫 번째, 나도 모르게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 아닌지, 상대의 연락이 오면 반갑고, 기쁜지 생각하자.
첫 번째부터 재영은 패배감이 들었다. 오늘 동기 모임에서도 내내 사헌의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 수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했으니까.
“아, 아직 몇 가지 더 있으니까…….”
재영은 고개를 흔들고 스크롤을 내렸다. 바로 다음 문항이 보였다.
-두 번째, 함께 있을 때 즐거웠는지 떠올려보자.
“형이랑 보낸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
거실에서 과제를 하면 사헌은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어떤 때는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고, 어떤 때는 사헌이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쳐 주겠다며 재영을 굴렸다. 그냥 영화를 보면서 뒹굴 때도 있고. 그 모든 시간이 어땠냐고 하면…….
“편안하고, 즐거웠지.”
더 외면할 수 없다. 사헌과의 시간이 별로 없다고 느낄 정도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지.”
-세 번째, 같이 있지 않아도 자꾸만 상대가 생각나는지 생각해 보자.
-네 번째, 스킨십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스킨십을 하면 떨리고 좋은지 생각하자.
세 번째는 첫 문항과 그리 다를 것도 없고, 네 번째는 생각할 것도 없다. 사헌이 만지면 재영은 항상 부끄러울 정도로 느꼈다. 가끔은 시선만으로도 열이 오를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재영은 마지막이라는 글자를 드래그해서 검은 상자에 가뒀다가 풀었다를 반복했다.
“이것까지 맞으면 진짜 인정해야 하는 거잖아.”
인정하고 나면 그것대로 문제다. 재영은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앞둔 것처럼 난처한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봤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재영은 거의 우격다짐 식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애정 행각을 하는 그 사람을 떠올려 보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자.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 마지막 문구가 가득 들어찼다. 가장 최근에 재영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일이라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 형 좋아하네.”
재영은 참담한 심경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 * *
재영이 침실로 들어왔을 때, 사헌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료를 읽고 있었다. 재영은 길게 뻗은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윗옷이 살짝 틀어져 복근이 드러나 있었다. 가만 보니 바지도 너무 내려 입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입 안에 고인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꼴딱 삼켰다. 머리 위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건조한 눈동자를 마주한 재영은 제가 쓰레기처럼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저, 제 방에 가서 잘까요?”
재영은 바로 눈을 깔았다. 노려보는 눈동자가 너무 차가웠다.
‘무서워.’
전에는 별로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다른 사람이 사헌에게 느끼는 두려움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이번에 계약을 어긴 일로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됐을까 봐 무서운 것이다.
“네 방은 여기라고 했잖아.”
마침내 사헌이 바닥을 긁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대답에 재영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냉정하게 저를 대하는 사헌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를 끌어안고 자고 싶기도 했다.
그런 재영의 얼굴을 빤히 보던 사헌이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다.
“불 끄고 와.”
툭 내뱉은 사헌이 사이드 테이블에 자료를 내려놓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직후 동침은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조금 망설이던 재영은 사헌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이불을 들추고 들어가 누웠다.
‘아아, 모르겠다.’
재영은 욕망을 따라 몸을 돌려서 사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짙은 체취가 훅 끼쳤다. 익숙하고, 반가운 냄새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재영은 사헌의 옷자락에 코를 문질렀다.
사륵.
그때 사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였다. 그가 밀어낼까 봐 겁이 났다.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줬다.
“내가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머리 위로 덤덤한 음성이 떨어졌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보다 차가운 느낌은 덜 들었다. 재영은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들었다.
“가, 가이딩이 아니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자기는 항상 마음대로 만졌으면서.
속상함에 재영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사헌의 손이 귀 끝의 여린 부분을 문지르다가 턱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하아, 좋아.’
그리운 체온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재영은 사헌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면서 기댔다.
“알아서 해 주시겠다는데 얌전히 받아먹어야지.”
사헌이 비아냥대듯 말하면서 동그란 코끝에 입술을 내렸다. 동시에 여름 이불처럼 얇게 펴진 기운이 그의 몸을 덮었다. 하나도 놓치기 싫은 것처럼 사헌이 재영을 꽉 끌어안았다.
재영은 사헌의 턱 끝에 입술을 비비면서 작게 웃었다.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한 걸음은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