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본 적 없는 사헌의 태도에 훈련장에 소리 없는 경악이 번졌다. 뼈가 다 드러나도록 크게 다쳤을 때도 신음 한 번 흘린 적이 없는 지독한 사람이 진사헌이다.
‘그런 사람이 엄살을 부린다고?’
‘도대체 누구야?’
덕분에 재영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높아만 갔다. 그의 얼굴 반을 덮은 마스크를 뜯어내고 싶은 정도였다.
물론 재영도 이제 사헌이 제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형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때가 있겠지.’
사헌이 발현된 해에 S급 에스퍼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안전을 바라는 모든 사람의 기대가 18살 사헌에게 쏠렸다. 그때부터 그는 늘 최고여야 했고, 최강이어야만 했다.
재영은 사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쪽으로 가서 치료부터 하고 집에 가요.”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사헌을 이끌었다.
“형. 혹시 여기 구급상자 같은 거 있어요?”
옆에 있던 윤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 동안 재영은 사헌을 벤치에 앉혀 두고 지갑을 뒤져 밴드를 꺼냈다.
“여기.”
“고마워요.”
구급상자를 건넨 윤서가 한시도 머무르기 싫다는 듯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재영은 익숙하게 면봉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 부위를 닦아 냈다.
피부를 두드리는 면봉 끝은 가벼웠다. 하지만 하얀 솜을 축축하게 적시는 피를 보고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 다칠 수 있었잖아요.”
재영은 괜히 속이 상해 툴툴거렸다.
“다칠 수도 있지.”
사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맞는 말이라서 재영은 불퉁하게 입술만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호, 해 줘.”
그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사헌이 즐거운 듯 싱글싱글 웃었다. 그가 저를 놀리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재영은 입술을 모았다.
상처 위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사헌의 눈가가 작게 찡긋거렸다. 재영은 상처에 밴드를 살살 붙이고 떨어졌다.
사헌이 멀어지는 재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훅 다가왔다. 코끝이 비벼질 만큼 가까웠다.
“잘했으니까 뽀뽀.”
재영의 입술에 입술을 붙인 사헌이 가볍게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재영은 어안이 벙벙해서 동그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재영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헌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더 깊이 입을 맞췄다가 뗐다. 입술이 떨어질 때, 젖은 살덩이가 입술을 스친 것 같기도 했다.
“뽀뽀해 줬으니까 착하다고 뽀뽀.”
입술을 뗀 사헌이 눈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말했다. 재영은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새까만 눈동자에 제 모습이 꽉 들어차 있었다. 바닥을 긁는 낮은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형은 진짜 그 좋은 머리를 왜 그렇게 써요.”
재영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먹였다. 신입생 환영회 때 데리러 온 사헌에게 주정을 부렸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왜. 네가 당하니까 억울해?”
사헌이 붉게 달아오른 재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공주님’이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정한 목소리다. 재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헌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을 깔았다.
“싫은 건 아니에요.”
재영은 투덜대듯이 웅얼거렸다. 괜히 목이 근질거렸다. 그 말에 사헌이 드물게 놀란 눈을 하고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사헌이 옆을 돌아봤다. 재영의 옆에 웬 남자가 다가서는 것을 본 것이다.
“저, 가이드님?”
사헌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재영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요즘 들어 낯이 익은 얼굴이다. 재영은 얼른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주 뵙네요.”
씨가 있는 말이었다. 반가움이 담기지 않은 말투에도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센터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재영이 따라가겠다고 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S급으로 측정된 후부터 재영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매번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을 해도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내 가이드는 센터 소속도 아닌데 왜?”
등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재영은 움찔했다. 평소와는 달리 사헌이 곁에 있다는 걸 깜빡했다.
“너는 돈 주는 내 말만 들으면 돼.”
사헌이 커다란 손으로 머리 위를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목 뒤를 쓰다듬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가 서로에게 번졌다.
“진사헌 에스퍼님께서는 센터에서 월급을 받고 계시고요.”
센터장의 비서가 사헌에게 지지 않고 대꾸했다. 재영은 그 용기에 속으로 감탄했다. 사헌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틀었다.
“그러니 닥치고 센터장님 말씀이나 들어라?”
사헌이 풍기는 살기에 주변 공기가 싸해졌다. 무표정하던 비서도 살짝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래. 가 주지.”
그런 분위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헌이 앞장서라는 듯 턱을 들었다. 그러자 비서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 아니. 센터장님께서 부른 건 가이드님…….”
“그쪽 돈 받고 일하는 건 난데?”
사헌은 남자의 말을 듣는 시늉도 안 했다. 비서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상대하기 어려운 사헌의 동행은 센터장이 원치 않았을 것이다.
“형은 좀 쉬고 계세요.”
재영에게 센터장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헌의 말대로 제게 있어서 그가 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헌이 끼어서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재영은 아니지만 사헌은 센터 소속이니까.
그러자 사헌이 미간을 좁힌 채 재영을 쳐다봤다.
“나 가이딩해야 돼.”
“네. 금방 올게요.”
재영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사헌이 가이딩해야 한다는 말을 비서가 코앞에서 들은 건 잘된 일이다. 후에 재영이 센터장과의 지지부진한 대화를 끊기에 좋은 핑계가 되어 줄 것이다.
사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비서를 노려봤다.
“가요.”
재영은 굳어 있는 비서를 재촉했다. 비서가 안심한 얼굴로 재영을 안내했다. 문을 열어 주는 손길이 어느 때보다 상냥했다.
* * *
투명한 물방울이 유리컵 표면을 따라 흘렀다. 재영은 그것이 실리콘 컵 받침으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가이드에게…….”
재영을 앞에 앉혀 두고 얼음을 씹어 대던 센터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재영을 부르려다가 센터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음, 오늘도 이름은 말해 주지 않을 셈인가?”
센터장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재영의 신상을 캐묻고는 했다. 재영은 유일하게 보이는 눈만 깊게 접으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래.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센터장이 거만한 눈빛으로 인심 쓰듯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만나면 또 이름을 물을 거라는 걸 재영은 모르지 않았다.
“자네에게 가이딩실을 내어 주려고 하네.”
오늘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지 센터장이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영은 그가 제 어떤 반응을 기다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센터 소속이 아닌 가이드는 복도나 공동 가이딩실에서 긴급 치료만 하도록 되어 있네.”
물론 재영도 출입권을 준다고 해서 센터 소속 가이드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동 가이딩실은 소파와 침대가 즐비해 있는데 프라이버시를 지켜 줄 가림막 같은 건 따로 없었다. 분명 키스 이상의 가이딩을 하려면 민망함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재영은 센터장의 ‘호의’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저도 따로 가이딩실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등급이 높다고 특별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재영의 부모님은 세상에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고 가르치셨다. 금전적인 대가든 자기만족이든.
재영의 단단한 눈빛을 본 센터장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로 향했을 때였다.
“센터장님!”
재영의 앞에서는 차가운 태도만 보이던 비서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센터장이 불러서 왔을 때도 노크로 의향부터 묻던 비서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손님이 계신데 이 무슨 무례인가!”
센터장이 큰소리로 비서를 힐난하는 척하면서 재영을 힐끔거렸다.
“괜찮습니다. 급하신 것 같은데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재영은 센터장이 기다리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비서가 다가와 들으란 듯 말했다.
“한별시로 갔던 팀이 돌아왔는데 대기 중인 가이드가 없습니다.”
“뭐? 폭주라도 일으키면 어떡한단 말인가!”
재영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코미디 무대에 참여한 관객이 된 기분이다. 그만큼 비서와 센터장의 연기는 터무니없이 어색했다.
“제발 가이드님! 폭주를 막는 것은 우리 센터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센터장에게 보고하듯 말하던 비서가 돌연 재영을 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열하듯 외치는 비서의 입꼬리는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재영은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일을 저지른 건 이 사람들인데 왜 수치는 제 몫인지 모르겠다.
“저는 계약 때문에 사헌이 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가이딩할 수 없어요.”
재영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은근슬쩍 허락했다가는 이번이 시작이 될 게 뻔했다. 다음, 그 다음도 있겠지.
“가이딩을 했다는 이야기는 새어 나가지 않을 걸세.”
“죄송합니다.”
“이미 던전 안에서 다른 사람의 가이딩을 하지 않았나!”
센터장이 안달 난 듯 큰소리쳤다. 이제야 조금 연기가 자연스러워졌다.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편하겠네요. 그때 경고 먹었거든요.”
재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경고가 장난이 아니라는 건 센터장도 알 것이다.
“진사헌 에스퍼는 걱정 말게. 자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도록 막아 주지.”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센터장이 진짜 사헌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례로 사헌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몇 번이나 센터장의 요구를 무시한 일이 있다.
“그럼 먼저 사헌이 형부터 직접 설득해 주세요.”
재영은 속으로 사헌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긴 걸 사과했다. 역시나 센터장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S급 가이드가 단 한 사람만을 담당한다는 건 재능 낭비 아닌가.”
센터장은 다시 사헌을 언급하지 못했다. 대신 일그러진 얼굴로 호소했다. 재영은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싫어서 웃기만 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센터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재영은 곤란함에 찡그린 채로 웃었다. 센터장의 성가신 설득이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재영은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로 쓰러졌다. 연달아 지루한 수업을 들었더니 잠이 올락 말락 혼곤해졌다.
“이 기사 봤냐? S급 가이드래.”
그런데 강의실 한편에서 들려온 말이 재영을 잠들지 못하게 했다.
‘S급 가이드? 나?’
바닥으로 가라앉으려던 의식이 급격히 끌어 올려졌다. 재영은 눈만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확인했다. 별로 친하지는 않은 동기 무리였다.
“어떻게 딱 고른 가이드가 S급이냐. 진사헌 입맛 보통 아닌 듯.”
“근데 남자라며?”
“진사헌 게이였음?”
“가이드가 무슨 애인이냐? 남자 가이드랑 계약 맺었다고 게이는 무슨…….”
누가 자신들의 말을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재영은 고개를 파묻고,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자 인상을 찌푸렸다. 나이도 한참 어린 제 동기들이 진사헌, 진사헌 멋대로 이름을 부르는 게 기분 나빴다.
“신경 쓰지 마. 쟤네한테 형님은 그냥 연예인 비슷한 거잖아.”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민태가 재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쩌다 한 번 감이 좋은 녀석이라 뒤통수만 보고도 친구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례한 동기 녀석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내가 아는 사람의 형의 친구의 애인의 사촌의 친구의 작은아버지가 센터에서 좀 높은 자리에 있대. 그래서 그 사람한테 들었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굳이 길게도 설명하더니 이내 목소리를 줄이고 주변을 살폈다.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제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워낙 목소리가 커서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녀석이 입을 떼려고 했다.
“그 정도면 그냥 모르는 사람 아니야?”
민태가 끼어들어 한껏 무르익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리가 눈치 챙기라며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일부러 말을 건 민태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아무튼 좀 들어 봐.”
이야기를 꺼낸 동기가 짜증을 부리며 분위기를 되살렸다. 어쩔 수 없이 주위가 잠잠해지자 다시 웃으며 입을 뗐다.
“이번에 구태식 에스퍼가 폭주 상태까지 갈 뻔한 거 알아?”
일반인들은 모르는 소식이니 구구절절 무슨 관계의 사람이 말했다고 운을 뗐을 것이다. 그의 기대대로 청자들은 처음 듣는 소리라며 의문을 표했다.
“구태식 에스퍼면 A급 아니야?”
안 듣는 척 다 듣고 있던 재영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센터장이 폭주를 핑계로 가이딩을 해 달라고 했던 에스퍼도 A급이었기 때문이다.
“맞지.”
동기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다른 녀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데? 최근에 출동한 게 그, 한별시 리셋 던전 아닌가?”
“그거 그냥 무난하게 나왔잖아.”
재영은 탄식을 흘렸다. A급 에스퍼에, 한별시까지 조합하니 역시 그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몰라. 나온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폭주 바로 전 단계까지 갔었나 봐.”
지인의 누구의 누구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정확도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재영은 동기가 그나마 듣지 못한 이야기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아무리 리셋 던전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가이드를 대기시켜 놓지 않았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외면한 것이었다. 일전에 ‘문서하 에스퍼 폭주 사건’이후로는 던전 진입 시에도 가이드가 동행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 사헌이 들어간 리셋 던전이 변이하는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 진사헌 에스퍼 가이드가 센터에 있었대. 그 사람이 가이딩만 해 줬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거야.”
‘역시나.’
재영은 질린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느낌이 싸하다 싶더라니. 민태가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재영을 힐끔거렸다.
“뭐래. 결국 폭주는 안 했다는 거 아니야?”
“그리고 그 가이드는 진사헌 에스퍼 전담이잖아. 다른 에스퍼 가이딩하면 안 되는 거 아님?”
민태의 말에 다른 동기들도 거들었다. 그러자 말을 꺼낸 동기가 마치 자신이 그 에스퍼인 것처럼 흥분했다.
“위급한 상황인데 그게 중요해? 센터장이 무릎까지 꿇고 빌었는데도 하기 싫다고 무시했대.”
“센터장 머리 벗겨진 할배 아냐? 그건 좀 선 넘었다.”
그 상황은 재영도 불편했다. 하지만 나이가 무기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상황도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린 건지, 대나무숲에 떠들었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동기 녀석의 입을 타고, 제 귀에까지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순간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머쓱해졌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재영은 결연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나]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내 줄 수 있어?
[둘째누나♥] 이게 누구야
당연하지
재영은 둘째 누나 재아와 만날 장소, 시간 등을 정하고 연락을 끝냈다.
* * *
하나씩 벗어 던진 옷이 현관부터 거실 소파까지 쭉 이어졌다. 신발을 벗은 재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형!”
재영은 소파 등받이에 늘어져 있는 사헌을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는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바지는 벗다 말았는지 지퍼만 내려가 있었다.
“아니, 센터장이 원래 이렇게 할 일이 없어요?”
울분 섞인 목소리에 사헌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재영을 바라봤다.
“요즘 아주 피곤해 죽겠다니까요! 한 번은 센터장실에 가니까 웬 여성 분이 계신 거예요. 에스퍼래요.”
재영은 사헌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서?”
“악수 한 번만 해도 되냐고 묻길래 먼저 내밀었죠.”
“그랬어? 먼저?”
사헌이 입을 열자 왠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싸해졌다. 재영은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가이딩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해 줬어?”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고개가 앞뒤로 꺼떡꺼떡 움직였다.
“형. 이건 좀 때리는 것 같…….”
“어떻게 했냐니까. 또 뽀뽀할까요? 했어?”
손바닥으로 재영의 뒷목을 잡은 사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떠봤다.
“응? 그거 네가 잘하는 거잖아.”
가라앉은 목소리에 겁에 질린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사헌의 심기가 엄청 비틀려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곤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재영은 이내 씨익 웃었다.
“저한테 능력 제어를 가르쳐 준 분이 S급 에스퍼거든요.”
그 S급 에스퍼 앞에서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헌이 더해 보란 듯 턱을 튕겼다. 그래도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보였다.
“근데 억지로 가이딩을 끊으면 내상을 입을 수 있다는 얘기는 왜 안 해 주셨어요?”
재영은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듯 물었다. 억지로 가이딩을 시도한 에스퍼가 제게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기운을 차단했다. 그러자 그 에스퍼가 피를 토했다.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게 맞잖아, 안 그래?”
재영의 귀를 만지작거리던 사헌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고 억지로 가이딩을 하려고 한 에스퍼는 다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도덕적인 듯 도덕적이지 않은 말에 재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그 여자가 걱정돼?”
언제 기분이 좋았냐는 듯 사헌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게 아니라 형하고 연습했을 때도 형이 아팠을 테니까…….”
사헌이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재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뭔가를 찾는 것처럼 집요했다.
“아무튼 이제 악수도 안 해 주니까 남자 분들로 바꿔서 데려오더라고요.”
재영은 툴툴대며 제 손을 내밀었다. 하얀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안 그래도 일반인보다 센 에스퍼가 재영을 억지로 당기다가 생긴 상흔이다.
사헌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재영의 손을 잡았다. 사람의 손 모양이 그대로 남은 손목을 보면서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보자 보자 하니까…….”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사헌이 던전에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출동 시간이 수업과 겹쳐서 종종 재영이 따라가지 못한 때가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마다 센터장 쪽에서 연락이 왔다.
“더 이상 참으라고 하지 마.”
사헌이 조용히 속삭이듯 내뱉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들끓는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부어오른 손목을 잡고 쓰다듬는 손길은 달걀을 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재영은 더는 사헌에게서 센터장을 보호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재영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가이딩부터 해요.”
그러자 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재영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가이딩하려는 거 맞아? 왜 내 눈에는 네가 가이딩을 이용해서 욕구를 채우는 것처럼 보이지?”
상상도 못한 표현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목덜미부터 천천히 붉게 달아올랐다. 재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안 한다고요?”
“그럴 리가.”
재영의 도발에 사헌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재영의 몸을 잡아 제 몸 위에 앉혔다. 재영은 몸을 낮추고 날카로운 턱 끝에 입을 맞췄다.
* * *
“야, 김재영. 잠깐 거기 서 봐.”
다음 강의실에 막 도착한 재영은 동기 무리의 부름에 멈춰 섰다.
“왜?”
동기 하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재영을 앞에 두고 스마트폰을 갖다 댔다. 아마 그 안의 사진과 그를 비교하는 듯했다.
“잘 모르겠는데?”
무리는 재영의 말에 대답해 줄 생각은 없고, 자신들의 호기심만 채우려 했다.
“너 쟤 입 좀 가려 봐. 이렇게, 이렇게.”
“어어.”
불만스럽게 쳐다보다가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이렇게, 라고 하는 모양새가 재영이 마스크를 해서 얼굴 반을 가리던 것과 똑같았다.
“야. 더럽게 어디다가 손을 갖다 대. 손바닥에 세균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술을 향해 다가오는 손바닥을 피했다.
“그럼 책으로, 책으로 해 봐.”
무리는 끈질겼다. 아는 형의 사촌의 친구였나 뭐였나. 아무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센터의 높은 사람이라며 소문을 가져온 녀석이었다. 어디서 또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
“뭐 하려는 건지 몰라도 나중에. 나 여기 땀 나는 거 안 보여? 뛰어와서 엄청 힘들거든?”
재영은 일부러 더 지친 얼굴을 하며 자리로 가 앉았다. 동기 녀석들을 등진 재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동기 녀석들이 저를 힐끔거리면서 자기들끼리 투닥거렸다. 재영은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길은 신중했다. 하지만 뉴스를 훑어보는 눈은 바빴다. 재영은 사회면, 연예면, 심지어 경제면까지 꼼꼼히 살폈다.
“쟤들이랑 무슨 일 있었어? 왜 자꾸 꼬라보는데?”
강의 시간이 임박해서야 도착한 민태가 그 자리에 서서 동기 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은 역시 착각이 아니다. 재영은 민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무리를 등진 모양새다.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아.”
재영은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무리가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의심? 왜? 너 무슨 짓 했어?”
똑같이 소리를 낮춘 민태가 재영의 어깨 너머를 힐끔거렸다.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내가 사헌이 형 가이드라고 의심하는 것 같다고.”
천천히 자리에 앉는 민태의 눈빛은 영혼이 빠진 것처럼 멍했다.
“너 맞잖아.”
곧 눈동자에 빛을 되찾은 민태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재영은 차게 식은 얼굴로 민태를 바라봤다. 뒤늦게 민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만. 네가 말도 안 했는데 너를 의심한다고?”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태가 늦게라도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답답해서 죽을 뻔했다. 뒤늦게 재영의 상황을 이해한 민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영과 동기 무리를 번갈아 살폈다.
“너한테 별로 좋은 감정 가진 것 같지도 않던데…….”
녀석들이 S급 가이드가 A급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아 폭주 직전까지 갈 뻔했다는 낭설을 떠들었던 것까지 기억한 모양이다.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야?”
이내 혼자 화들짝 놀라더니 곰 같은 손으로 스마트폰을 붙잡았다. 킹제네랄갓……어쩌구 써 있는 것이 보였다. 재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사헌과 내통한다는 걸 숨기려는 노력도 없다.
“너 학교에서 내 옆에 꼭 붙어 다녀.”
민태가 결연한 얼굴로 내뱉었다.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분명히 전해졌다.
“화장실까지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마라?”
재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민태의 옆구리를 찔렀다.
“칸 안에는 안 들어갈게.”
그와 달리 민태의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장난기를 찾으려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재영은 조용히 민태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재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바탕 샤워를 끝냈다. 뽀송뽀송한 느낌을 만끽하며 컵에 따른 우유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올려놓으려다가 보니 스마트폰 액정에 반가운 이름이 떠올랐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민주 누나!”
[재영이 너 어디야?]
전화를 받기 무섭게 민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놀란 재영은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민주 누나>
저장된 이름도 확실하고, 목소리도 분명 제가 아는 민주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얼굴을 굳힌 재영이 다시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냐니까!]
뛰면서 말하는 듯 목소리에 거친 숨이 섞였다. 먼저 답해 주지 않으면 무슨 말도 듣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다.
“저 집이에요.”
재영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헐떡이는 숨이 잦아들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내뱉은 목소리는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의아함이 든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왜 그래요?”
[어디 나가지 말고 기사부터 봐. 끊는다?]
재영은 끊긴 전화를 멍하니 쳐다봤다.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한 셈이다. 민주의 말대로 뉴스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뉴스앱을 켜자마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한민국 최초 S급 가이드 김재영은 누구?>
<공주님의 가이드는 x대 재학생 김재영 군>
제 신상이 전부 드러나 있었다. 사헌이나 윤서와 던전, 센터를 드나든 전적이 있으니까 목격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재영은 그때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뭐, 백 보 양보해서 누군가 얼굴을 봤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우연하게 이름도 알았을 수도 있다.
문제는 학과 행사에서 찍힌 사진이 있다는 거다. 제공자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센터의 누군가와 연줄이 있다는 그 동기 녀석.
“근데 이 누나는 사실이냐고 묻지도 않네.”
재영은 스크롤을 올려 검색창에 제 이름을 넣었다. 제 신상이 이미 온갖 커뮤니티로 퍼져 나가 있었다.
‘뉴스 몇 개 막는다고 해결될 게 아닌데.’
속으로 혀를 차고는 대화창을 열었다.
[나] 기사 봤어요
[민주누나] 너 괜찮아? 합의된 건 맞아?
톡을 보내자마자 민주에게서 답이 왔다. 신상 공개하는 걸로 미리 이야기가 됐냐는 말이다. 재영은 쓰게 웃었다.
[나] 전부 고소하려고요.
민주가 잘 생각했다며 이모티콘을 보냈다. 대화창을 끈 재영은 곧바로 둘째 누나의 번호를 찾아 길게 눌렀다.
달칵.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Jang & Lee 법무법인 이재아 변호사입니다.]
“누나, 나야.”
고소하겠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 * *
그 시각. 사헌은 센터 회의실에서 연구실 직원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날 선 공기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갈 정도였다. 원래도 센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즘엔 짜증이 일 정도로 성가시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차가운 목소리에 재효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사헌이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센터에서 몇 번 회의를 명목으로 상급 에스퍼들을 소집했지만, 그때마다 한 말은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 현상을 직접 경험한 사헌에게는 정말 들을 필요도 없는 소리였다.
곧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단상 위의 스포트라이트만 남았다. 직원이 지금까지 발견된 변이 던전과 크리처를 사진 자료와 함께 설명했다.
“변이된 던전의 크리처들은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연구원은 이것이 더 이상 소득 없는 회의가 아니라는 듯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그 말에 사헌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라윤이가…… 아니, 그, 크리처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그, 게…… 제 껍데기를 먹으면 재영이 곁에 있기가 더 편해질 거라고요.”
당시에도 덫에 걸려든 동준이 아니라 재영을 노린다는 말에 의아함을 가졌었다. 그게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라고 하면 말이 된다.
“또한 변이된 던전의 크리처가 가이드의 기운을 먹고 더 강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가운데 웅성웅성 소란이 번졌다. 집착의 이유가 분명했다. 재영을 집어삼켜 양분으로 강해질 속셈이었던 거다.
‘감히 내 것을…….’
사헌은 이를 아득 갈았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가이드의 존재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때 센터의 높은 분 중 하나가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를 했다. 사헌은 건조한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맞습니다. 전투 중 크리처가 가이드를 흡수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가이드를 던전에 동행시키는 것부터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던전이라는 게 어디에 생긴다고 예고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가이드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해야 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람들이 저마다 떠들었다. 불안으로 얼룩진 주변을 둘러본 재효가 사헌의 곁에 바짝 붙었다.
“섬뜩하네.”
심지어 가이드를 어딘가에 가두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센터에 소속된 가이드는 물론, 가이드임을 거부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까지 전부. 이건 정말이지 광기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쾅!
그때 커다란 굉음이 회의장을 울렸다. 그건 곧 싸늘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저마다 떠들어 대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회의 중 발언권을 얻어야 말할 수 있다는 건 초등학교 때 다 배우지 않나?”
사헌은 벽을 때린 주먹을 거둬들였다. 깨진 알갱이들이 부스스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을 들어 쳐다보자 연구원이 감동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더 이상 내 시간 낭비하지 마.”
하지만 연구원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국한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연구원이 사헌의 눈을 피하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만 변이가 있다고?’
사헌은 미간을 좁혔다. 던전 발생과 크리처의 등장, 에스퍼와 가이드의 발현. 그 모든 건 세계 공통이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소국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변이만은 오직 한 나라에서 발생한다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연구소는 우연히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필요한 말은 다 들었다. 사헌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회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꺼 둔 스마트폰을 켰다.
등 뒤로 재효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마트폰에 쌓인 메시지를 확인하던 사헌은 걸음을 멈췄다. 못마땅함에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사헌은 로비로 향하던 걸음을 엘리베이터로 옮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바로 옆까지 따라잡은 재효가 의아하게 물었다. 회의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사헌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 당연하다.
“센터장실.”
사헌의 목소리는 지하 바닥을 긁고 있었다. 재효는 붙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저 정도로 화난 사헌은 말릴 수 없다. 그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주기 위해 손을 뻗을 뿐이다.
“지, 진사헌 에스퍼님! 아직 회의가……!”
센터 직원이 뒤늦게 회의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럴 리 없지만, 혹시라도 따라 들어올까 봐 재효가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애 신경 좀 긁지 말지.’
재효는 무조건 센터장의 잘못일 거라고 단정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작된 던전이라.’
그건 또 누구 짓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만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윤서를 데리고 센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 * *
재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사헌이 몸을 낮추며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렇게 긴장돼?”
마주한 눈동자는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새카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안정된다. 재영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던전에 동행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무서워?”
사헌이 재영의 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손으로 아무렇게나 볼살을 뭉갰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재영은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새 학기 때 그 기분인가? 설렘? 긴장?”
재영은 떠오른 단어를 마구 늘어놓았다. 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데 설렘은 좀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재영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툭 내밀었다.
“그나저나 센터에서 다른 연락은 안 왔어요?”
“무슨 연락?”
사헌이 정말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저번에 형이 센터장실에서 사고 쳤잖아요.”
“아.”
그제야 사헌이 생각났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센터가 한가하지는 않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이상하다는 눈으로 사헌이 재영을 쳐다봤다.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흔한 일이라는 건가.’
재영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는 사헌을 둘러싼 환경이 이상한지,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 * *
보통 던전이 생겼다고 하면 출동하는 건 센터 에스퍼만이 아니다. 최초의 목격자나 기자에 의해 소문이 퍼지면 에스퍼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일대가 마비된다.
그 속을 뚫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재영은 던전의 입구에 다다르기 전부터 몰려든 수많은 인파에 질려 버렸다.
“김재영 군! 여기 한 번만 봐 주세요!”
차에서 내리던 재영은 움찔했다. 누군가 큰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김재영 군!”
“손 한 번만 흔들어 주세요!”
하마터면 그대로 다시 차에 숨어 버릴 뻔했다. 첫 공식 출동이란 대단했다. 저 많은 기자들 중 단 한 명도 재영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재영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어차피 다 공개됐는데 가릴 필요가 있어?”
윤서가 옆으로 다가오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사진 찍히는 건 싫어서요.”
재영은 잘됐다 싶어서 윤서의 뒤로 숨었다.
“보통 기자들이 찍은 사진 보면 그렇잖아요. 얼굴이 찐빵이 되거나 양쪽 눈의 높이가 달라지고, 턱은 비틀리고. 안 그래요?”
“그건 그래.”
윤서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풍 나온 줄 아나 봐.”
“페어는 S급 에스퍼고, 본인도 S급인데 좋으시겠지.”
그때 어디선가 빈정거리는 말이 들렸다. 재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센터 소속 가이드들이었다. 오며 가며 본 적이 있어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무리 중에 사헌에게 가이딩을 하려고 했던 안의경 가이드도 있었다.
“S급이어도 발현한 지 얼마 안 됐다며.”
“가이딩한 것도 진사헌 에스퍼뿐이라던데?”
그들의 말투에서 재영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미움받는 거야 당연히 싫지만, 이유가 확실치 않으니 더 속상했다.
“대한민국 최고 가이드는 아직 의경이지.”
“그럼. 숙련도에서는 우리 의경이 못 따라오지.”
의도치 않게 안의경 가이드와 라이벌 구도가 잡힌 모양이다. 의경의 옆에 붙어 살살거리던 가이드는 재영과 눈이 마주치자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이딩 실력을 까놓고 보여 줄 수도 없고.”
옆에서 듣고 있던 윤서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윤서도 의경과 같은 A급인데, 센터 내 가이드들이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내버려 둬요.”
어깨를 으쓱한 재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윤서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너 그러다가 호구 잡혀.”
지독히 걱정스러운 표정에 재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면전에 대고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하고 무슨 대화를 해요.”
말하자면 무시하는 거다. 윤서가 웃으며 내뱉는 재영을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봤다. 말랑말랑하게 생겼다고 사헌이 찹쌀떡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기는 했지만, 그게 성격도 말랑하다는 뜻은 아니다.
옆에서 걸으며 먼 곳만 바라보던 사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성가시게 굴면 말하고.”
“네.”
재영은 환하게 웃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는 온기가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도 해결해 줄 사람이 있으니 더욱 근거 없이 저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하찮게 여겨졌다.
* * *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탐정 코X’급이라는 말이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도 이번 던전은 변이가 아니다.
센터에서 최고의 팀이 출동한 만큼 큰 문제 없이 일행은 던전을 점령해갔다. 덤벼드는 크리처들을 해치우며 무자비한 전진을 이어가던 팀은 커다란 동공에 다다라서 멈춰 섰다.
“길이 다섯 갈래예요.”
선발에서 길 안내를 하던 에스퍼가 사헌을 돌아보며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그렇게 큰 문제예요?”
재영은 목소리를 낮춰 사헌에게 물었다.
“중간에 모든 길이 이어지는지, 아니면 어느 한 길의 끝이 보스존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까.”
미간을 좁힌 사헌이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다 같이 모든 길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그건 던전과 바깥의 시간 흐름이 얼마나 다를지 몰라서 문제다.
“어렵네요.”
재영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 팀엔 안재효가 있지.”
사헌이 그런 재영을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몇 걸음 옮겨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형이 다른 사람 칭찬도 하네.’
재영은 새삼스러운 감탄을 했다. 하긴. 사헌이라면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파트너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팀을 다섯으로 나눈다.”
사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로 몇 개의 무리가 생겼다.
4, 4, 4, 5, 2.
사헌의 팀은 그를 포함해 둘뿐이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는지 팀 구성원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김재영 가이드님은 어느 팀과 움직입니까?”
그때 에스퍼 하나가 손을 들고 용감하게 내뱉었다. S급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두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말한 이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재영이 움찔했다.
“김재영이 왜?”
사헌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재영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반박하는 태도에 말을 꺼낸 에스퍼가 굳어졌다. 사헌은 재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스퍼 중에 나 말고 친한 사람 있어?”
“재효 형이요.”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사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파트너라 부딪힐 일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는데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빼고.”
사헌이 애용하는 팀원인 땅개 말고는 별칭이든 이름이든 아는 게 없다. 재영은 당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헌이 그것 보라는 듯 말을 꺼낸 에스퍼를 쳐다봤다.
“그, 그게 아니라 김재영 가이드님도 어느 팀에든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헌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가라앉은 눈빛에서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이드가 없어도 된다는 건가?”
비꼬는 듯한 말투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사헌은 지금까지 약물과 기계로만 연명했고, 이런 식으로 팀이 나뉠 때면 가이드도 데려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재영은 사헌이 직접 데려온 그의 가이드다. 에스퍼들은 다시 그 사실을 떠올려야만 했다.
“앞으로도 명심해. 김재영은 나랑 한 몸이야.”
사헌이 다시 재영에게로 돌아왔다. 솔직히 던전 안에서 그와 떨어지는 건 재영도 불안했다. 재영은 손을 뻗어 사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옷이 당겨지는 걸 느낀 사헌이 눈을 내렸다. 손목 언저리에 매달린 재영의 손가락을 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 손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사헌이 재영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사헌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저는 팀장님을 따라가죠.”
카메라맨이 자연스럽게 사헌의 뒤로 따라붙었다. 센터에서 파견한 카메라맨은 그뿐이었다. 어차피 팀원 전체에게 바디캠이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중계될 기회를 놓친 에스퍼들은 큰 실망감을 느꼈다.
“가자.”
사헌이 상의도 없이 길 하나를 선택했다. 뭔가 느껴진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 길이나 찍은 걸까. 이 상황에 쓸데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잠깐만요. 정말 흩어진다고요?”
사헌이 고른 길로 가려던 재영은 커다란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아직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탓에 사헌도 나란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발을 멈추게 한 건 가이드였다. 그는 꽤 불안해 보였다. 가이드가 던전 출동 시에 동행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팀으로 들어와서 나눠지게 된 상황이 익숙하지도, 달갑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 저는 진사헌 에스퍼님 팀으로 갈래요.”
안의경 가이드가 사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내뱉었다.
“저, 저도…….”
“저도요!”
다른 가이드들도 질세라 손을 들었다. 아무 말도 없는 건 재영을 제외하고는 윤서뿐이었다.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 팀은 나와 땅개 둘입니다.”
사헌의 팀 전원은 스무 명 남짓이다. 그런데 단 둘만 간다는 건 다른 팀에는 적어도 네 명의 에스퍼가 있다는 뜻이다. 이 팀에는 이미 재영이 있는데 A급인 의경을 포함해 그 어떤 가이드가 동행해도 낭비다.
“어떤 길에서 보스가 나올지 모른다면서요. 저는 그냥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팀을 무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이드들의 이탈에 안절부절못하던 에스퍼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죽음이라고 말할 건 없지 않나.’
사헌이 없다고 해도 사헌의 팀이다. 그가 직접 선별하고 훈련시킨 사람들이란 말이다. 아무리 못해도 B급 이상의 힘을 내는 사람들이 뭉쳐서 B급 던전의 보스를 해치우지 못한다는 건 실로 상상하기 어렵다. 가이드들의 요구는 무례할뿐더러 근거도 없었다.
“형. 그냥 제가…….”
사헌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던 재영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노려보는 눈이 살벌하다.
“제가 무조건 형 따라간다고요.”
재영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헌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제야 날카로운 눈빛이 가셨다. 재영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새삼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집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준오 에스퍼한테는 가이딩 허락해 주려나?’
재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헌을 힐끗거렸다. 나른하게 눈을 내리깐 사헌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열이 오른 것을 식히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왜 자꾸 멀쩡한 페어를 찢어 놓으려고들 하는지 몰라.”
사헌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다. 가이드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었다.
사헌의 팀인 만큼 에스퍼들은 그의 성정을 알았다. 그들은 빠릿하게 움직여서 길 하나씩을 골랐다. 하지만 가이드들은 달랐다. 사헌과 함께가 아니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사헌의 눈에 짜증이 서렸다.
“내 가이드 말고 다른 사람의 가이딩은 불쾌하다고. 이해 못 하겠어?”
한 자, 한 자 짓씹듯 내뱉은 사헌이 이해 못 하는 니들을 이해 못 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자존심이 상해서 입술을 짓씹던 의경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재영을 노려봤다.
갑자기 강렬한 시선을 받은 재영은 움찔했다. 원망하는 눈초리가 당황스럽다. 첫 만남에서 사헌을 가이딩하려는 의경의 앞을 막은 적 있어서 부채감이 있었는데, 그건 그의 무리가 뒤에서 재영 자신의 뒷담화를 한다는 걸 알고부터 없어졌다.
“알아들었으면 각자 한 팀씩 붙어서 이동해.”
할 말을 끝낸 사헌이 등을 돌렸다. 이번에 센터에서 지원해 준 가이드가 셋이라 팀이 나뉘어도 크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재영은 살짝 뒤를 돌아 윤서에게 손을 흔들고 다시 앞을 향해 갔다.
“오늘 땅개, 네 주임무는 이 녀석을 보호하는 거다.”
사헌이 재영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사헌의 명령에 준오가 밝게 대답했다. 재영은 어쩐지 그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 발 떨어져서 그 꼴을 지켜보던 사헌이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준오를 흘겨봤다.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말고.”
“어…….”
가이딩을 거부해 오던 사헌이 고른 사람이니 특별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준오가 동그랗게 뜬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을 쭉 내밀어 사헌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형수님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아니면 사모님?”
“저 다 들리거든요.”
재영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 그러자 준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사람 앞에서 사람을 소외시키는 건 나쁜 거잖아요.”
“아니, 그럼 왜 귓가에 대고 말씀하신 건데요?”
재영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준오가 알았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질투하셨군요? 안 그러셔도 되지 말입니다. 저는 정말 대장님의 충직한 개로…….”
준오의 말에 재영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스스로 개를 자처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본인이 아무 거리낌이 없으니 괜찮은 건가.’
허탈하게 웃는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의 눈이 번뜩였다.
“질투했어?”
몸을 낮춘 사헌이 재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지분거렸다. 아까는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더니 지금은 기분이 넘치게 좋아 보였다. 그의 음성에 재영은 심장까지 간질간질했다. 당장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여기엔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얼른 출발해요. 바깥의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잖아요.”
재영은 사헌의 어깨를 밀어내며 재촉했다. 사헌이 가늘게 뜬 눈으로 야속하다는 듯 쳐다봤다.
* * *
사헌이 만든 작은 구가 벽과 바닥, 천장을 통통 두드리며 앞질러 갔다.
“뭐하는 거예요?”
재영은 혹시라도 사헌에게 방해가 될까 봐 목소리를 줄이고 물었다. 준오가 말을 걸어 줘서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 무게만큼의 자극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혹시 있을지 모를 함정을 찾아내려는 거지 말입니다.”
“호오.”
확인을 마쳤는지 사헌이 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카메라맨이 따르고, 재영은 준오보다 앞에서 걸었다.
“완벽한 건 아니니 조심해.”
앞에서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췄어도 그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순간 흠칫 놀랐다.
“내 거에 흠집 하나 남지 않게 조심해.”
재영을 바라보며 눈을 휜 사헌이 다시 한번 준오에게 경고했다.
“물론입니다!”
준오가 제자리에 멈춰서 발을 붙이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 모습이 꼭 훈련된 군인 같았다.
“혹시 이준오 에스퍼는 군인 출신인가요?”
재영은 이번에는 앞의 카메라맨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이준오 에스퍼는 센터의 영재 발견 프로젝트의 일원이었습니다.”
보통 에스퍼나 가이드의 발현은 18살이다. 의무적으로 국가 검사를 실시하는 것도 그때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이르게, 혹은 느리게 발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영재 발견 프로젝트’는 18살 이전에 발현한 에스퍼를 찾기 위해 실시된 이른 바 게릴라성 테스트다. 그러니까 그 프로젝트의 일원이었다는 준오는 18살 이전에 이미 에스퍼로 발현했다는 뜻이다.
“그럼 왜 저러는 건데요?”
“확실한 건 아닌데…….”
카메라맨이 던전 내부의 토양 등을 조사하고 있는 에스퍼들을 힐끔거리며 재영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어릴 때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답니다.”
어이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유다.
‘역시 사헌이 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금 이상해.’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후로도 에스퍼 셋과 가이드 하나. 네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쪽 길이 아닌 걸까요?”
한참 후에 카메라맨이 무료한 듯 말을 걸었다. 꽤 오래 걸었는데도 저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그런데 무겁지 않으세요?”
재영은 카메라맨의 어깨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 카메라답지 않게 크고 모양이 투박했다.
“어쨌든 에스퍼니까요.”
한 번 들어 보겠냐는 말에 재영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카메라맨이 던전 안에서는 현대 기술로 만든 장치가 작동하지 않아서 특별하게 만든 기계만 쓸 수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김재영!”
그때 사헌의 외침이 들렸다. 재영은 놀라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혀……!”
동시에 준오가 재영을 끌어안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미 바닥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재영의 발목을 휘감았다.
재영을 붙잡고 있지 않은 다른 무언가가 준오의 손을 공격했다. 그가 잡고 있는 재영을 놓치게 할 속셈이다.
“앗!”
준오가 필사적으로 미끄러지는 재영을 붙잡았다.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놓쳤다가 다시 붙들고, 그러면 또 공격당하고. 재영의 허리께에 있던 준오의 손등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형수님!”
집요한 공세에 결국엔 재영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재영의 발목을 휘감고 있는 것은 그대로 그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재영은 등이 딱딱한 곳에 닿는 것을 느꼈다. 중심을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었다. 제대로 일어서려고 하자 다시 발이 걸렸다.
“윽!”
뱀처럼 다리를 타고 올라온 것이 준오의 손이 닿았던 허리를 꽉 조였다. 재영은 경악하며 눈을 내렸다. 이끼와 같은 색을 지닌 나무줄기다. 재영은 손톱을 세워 그것을 떼어 내려고 했다.
“김재영!”
저만치서 사헌이 재영을 향해 소리쳤다. 두꺼운 나무줄기가 두 사람 사이의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줄기를 뜯어내도 또 다른 줄기가 튀어나와 사헌을 공격했다.
‘하나, 둘…….’
재영은 빠져나가려고 몸을 버둥거리면서 사헌에게 달려드는 가시 줄기의 수를 셌다.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땅을 흔들어서 저게 재영이를 놓게 해!”
사헌이 준오를 향해 외쳤다.
“안 됩니다! 땅속에 뿌리를 둔 게 아니에요!”
재영을 휘감은 줄기가 땅으로 그를 끌고 가려고 했다. 재영은 벽의 돌출된 부분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자 흙 아래로 당기는 힘이 점점 거세졌다.
“꽉 잡아.”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재영의 귀에 닿았다. 탄탄한 팔이 줄기까지 통째로 잡아 들어 올렸다. 재영은 익숙한 체온에 완전히 힘을 빼고 기댔다.
“늦었어요.”
나무줄기와 씨름하느라 지쳐서 몸이 축 늘어졌다. 재영을 집어삼키려는 바닥에서 완전히 떼어 놓은 후, 사헌이 맨손으로 줄기를 잡아 뜯었다.
“도망쳤습니다!”
그때 준오가 비통한 얼굴로 보고했다. 그도 땀과 점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 녀석이 대장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보스 레이드를 찍을 수 있게 된 카메라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 크리처를 놓치지 않는 건 둘째치고 다른 팀원들이 아닌 사헌이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안전상으로도 좋았다.
사헌이 천천히 재영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떼어 놓기는 불안해서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보스존에 들어서면 바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나요?”
놀란 가슴팍이 아직도 빠르게 오르내렸다. 카메라의 사각지대라는 걸 확인한 재영은 티를 들쳐 보았다.
“다쳤나?”
사헌이 불쑥 고개를 내려 줄기에 조여졌던 곳을 살폈다. 모양 그대로 붉은 기가 올라 있었다.
“그렇게 아프진 않은데…….”
재영은 말꼬리를 흐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햇빛 한 번 닿은 적 없는 것처럼 새하얀 피부 때문에 붉은 기운이 도드라져 보였다.
사헌이 발그레 달아오른 재영의 볼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외간 남자가 있는 곳에서 함부로 속살을 보이면 안 되지.”
다그치듯 말한 사헌이 가슴까지 올라간 재영의 티를 끌어 내렸다.
“혀, 형!”
문제는 사헌의 머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거다. 재영은 불룩하게 올라온 천을 보고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에스퍼 둘이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요!”
“상처를 살피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사헌이 재영의 티 아래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뜨거운 숨이 차게 식은 피부에 닿았다.
“흐…….”
이상한 느낌에 재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 편히 노닥거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는지 사헌이 금세 빠져나왔다.
“처음이라 준비가 부족했어.”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스퍼인 카메라맨은 무조건적인 보호 대상이 아니다. 다른 때는 인원이 많아 가이드를 보호할 사람도 많았다. 전투와 보호를 동시에 한다는 건 그의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요인 보호를 위한 인원을 다시 충당해야겠군.”
사헌은 재영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엄밀히 따지면 이곳이 보스존이 아니라는 거예요.”
분위기를 살피던 준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재영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진짜는 이 아래에 있을 겁니다.”
준오가 줄기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다시 단단해진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영은 사헌의 허락하에 준오에게 방사 가이딩을 했다. S급 가이드의 힘을 받은 준오는 더 편하게 힘을 쓸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하네요. S급 가이드의 힘은…….”
준오가 연신 감탄하며 재영을 바라봤다.
“스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은 건 처음입니다!”
“그래요? 도움이 된다니까 다행이네요.”
재영이 안심하며 웃자 준오가 다시 찬사를 이어갔다. 사헌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준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던전에 들어올 때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재영에게 가이딩받은 덕이다. 평소에도 숨 쉬듯 힘을 쓰다 보니 늘 조금씩은 비어 있었는데, 꽉 채워 준 덕에 오히려 완벽해졌다.
“시작합니까?”
얼굴이 환해진 준오가 사헌을 보며 물었다. 사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결연한 표정으로 구석으로 걸어갔다.
‘땅을 다루는 능력자니까 땅을 가르려나.’
뭔가 하려는 기미가 보이니 재영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중계 방송으로 본 ‘땅개’, 준오의 능력은 땅을 격렬한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만들어 크리처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흙을 날카로운 무기로 만들어 몸통을 꿰뚫는 정도. 보기에 화려하고 강력한 능력이라 눈요기로는 안성맞춤이다.
조용한 기대 속에 준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까지 땅에 댔다. 재영은 그게 뭐든 휙 하고 지나가 버릴까 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사헌의 손가락이 간지럽게 턱을 스쳤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헌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땅개가 마음에 들어?”
재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헌의 눈을 들여다봤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제 모습만 비쳐서 그의 말이 장난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심기가 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알아내기를 포기했다.
“형이 아끼는 팀원이잖아요.”
“그것뿐?”
사헌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영은 그것 말고 뭐가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 구경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재영은 다소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며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 준오가 손끝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을 세워 바닥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 모습은 어느 집 개와 닮아 있었다.
“저기……, 이준오 에스퍼님 지금 뭐 하시는…….”
상상한 것과 다른 모습에 재영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 못 들었어? 이 아래에 보스존이 있다잖아.”
사헌이 등 뒤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땅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셨으니까 좀 더 깔끔하고 빠르고, 멋있게 땅을 가르는 방법도 있을 거 아니에요!”
재영은 멱살 잡는 것처럼 사헌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쥐었다. 속인 사람은 없는데, 속은 것처럼 분해서 두 볼이 씰룩거렸다.
“땅개를 과대평가하네.”
사헌이 재영을 비웃듯이 쳐다보며 내뱉었다. 재영은 억울한 눈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자신을 비롯해 대중이 B급 에스퍼인 준오의 능력을 그 이상으로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사헌 탓이 크다.
“이런 좁은 길에서 땅을 크게 움직였다가 숨은 함정이라도 움직이면 큰일 아닙니까.”
준오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네요.”
재영은 제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를 건넸다.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로 몸이 떠밀렸다. 입술 주변에 사헌의 입맞춤이 쏟아졌다. 간지러워서 재영은 그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줬다. 뺨을 감싼 손이 뜨거웠다.
“더 줘.”
사헌이 애원하듯 입술을 비볐다. 재영은 기운을 움직여 사헌의 몸속을 탐색했다. 충분히 준 것 같은데 아직도 모자랐다.
‘기본 마나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재영은 엄지로 사헌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 붉은빛이 더 도드라졌다.
“벌려 봐요.”
과감한 발언에 사헌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헌이 모든 걸 맡기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입꼬리는 부드럽게 위로 솟았다.
살짝 벌어진 입안으로는 붉은 기가 보였다. 군침이 돌았다. 재영은 고인 침을 꼴딱 넘기고 사헌의 입술을 삼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입술이 젖어갔다. 점점 ‘누구의 것’이라는 경계도 흐려졌다. 그저 닿는 대로 비비고, 핥았다.
“하아.”
사헌이 더운 숨을 내뱉었다. 젖은 혀가 엉망으로 섞였다. 삽시간에 더운 피가 전신으로 퍼지면서 나른해졌다.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헌이 재영의 귀 뒤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예민한 피부를 자극당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열기 때문에 촉촉해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재영은 겨우 눈을 뜨고 사헌을 바라봤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손바닥에 닿는 사헌의 피부가 절절 끓었다. 재영은 젖 빠는 어린 짐승처럼 사헌의 혀에 매달렸다.
몸이 천천히 뒤로 밀리다가 등까지 완전히 닿았다. 사헌이 입술을 떼고 재영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가이딩은 끝났다.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헌도 재영의 뒤통수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재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오늘따라 학교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출동도, 훈련도 없이 혼자 집에 남은 사헌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을 그냥 날릴 수도 없고…….
“재영아!”
마음만큼이나 복잡한 얼굴로 걷던 재영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누군가 기자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굴만 아는 동기지만, 무안하게 할 수는 없어 마주 흔들어줬다. 그런데 실수였다.
“김재영 군!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동기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재영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는 못 봤는데 그 옆에 카메라를 든 사람까지 있었다. 기자나 방송을 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제가 강의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재영은 그가 완전히 가까이 오기 전에 뛰어서 멀어지려했다.
“잠깐만요, 재영 군! 이미 발현을 하고도 체질을 숨겨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김재영 군! 김재영 군!”
동기와 함께 있던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쪽 저쪽에서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나와 재영을 몰았다. 재영은 난감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상이 공개된 후에 학교에 나온 게 처음이라서 몰랐다.
“진사헌 에스퍼가 가이딩을 독점하기 위해 감금해 뒀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재영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멀쩡히 돌아다니는 저를 앞에 두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언론은 대체 왜 대한민국의 영웅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안달인지 모르겠다. 약간 괘씸함도 들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하지만 지금은 도망이 먼저다. 그대로 뛰어서 강의실로 숨어 버리고 싶었으나 순식간에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재영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발을 멈췄다.
둘러싸고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 때문에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재영은 단축키를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그 모습을 보던 기자들이 눈을 반짝였다.
“누구한테 연락하시는 겁니까?”
“설마 진사헌 에스퍼?”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들 같다. 수화기 너머에서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낮게 탄성을 흘렸다.
[내 13년지기 패밀리 김재영아. 무슨 일이니?]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가식적이다. 재영은 혹시나 싶어 귀를 떼고, 액정에 떠오른 민태의 이름을 확인했다. 살면서 이렇게 상냥한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재영의 이름을 부를 땐 특히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화기 너머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민태도 S급 가이드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곤욕을 치르는 중인 모양이다.
“헛소리 말고. 나 좀 데리러 와.”
재영은 한쪽 귓구멍을 막으며 말했다.
[뭐? 이 형아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미친놈인가.”
재영은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가 뚝 끊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숨까지 멈추고 재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자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질문 세례를 시작하려는 듯 막 입을 떼고 있었다.
‘지금이다!’
재영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하지만 얼마 가기도 전에 다시 둘러싸였다.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을 훑었다.
다시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기대감 어린 시선이 돌아왔다. 재영은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뗐다.
“거기 경찰서죠? 제가 지금 감금당해 있는데요.”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설마 진짜 경찰을 불렀겠어, 하는 반응과 불렀어도 뭐, 라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경찰 아저씨들 위상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기예요!”
다행스럽게도 민태가 보안 요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학교 보안 요원들이 막아서는 동안 민태가 재영의 손목을 끌고 갔다.
“우리 찹쌀떡. 연예인 다 됐네.”
누구보다 관심 받고 싶어 하는 민태가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부러우면 그냥 네가 연예인을 해.”
재영은 지긋지긋한 투로 말했다. 별로 오래 쫓기지도 않았는데 온몸의 기가 쭉 빠졌다.
“그건 싫어. 나 좀 자관추잖아.”
민태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재영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그건?”
“자연스러운 관심 추구.”
“별걸 다 줄이네, 진짜.”
민태의 줄임말이 어이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흐뭇하게 웃던 민태가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근데 너 이래서야 학교 다닐 수 있겠어? 형님께 연락해 볼까? 데리러 와 주시면 안 되냐고?”
민태가 주변을 살피며 재영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수업 들어야지. 등록금이 얼만데.”
등록금은 스스로 감당하는 비용이라서인지 더 아까웠다. 가이드인 덕분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못해 남아돌 정도이지만, 이렇게 낭비하기는 아까웠다.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밤새우며 마신 커피는 얼마고, 허벅지를 찌른 자국은 또 얼마던가. 이미 들통 난 이상 평범한 생활은 물 건너갔어도 기껏 들어온 대학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사헌이 형한테 경호라도 붙여 달라고 해야지.”
재영은 민태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이라 재영은 윤서와 점심을 먹기 위해 그를 만나러 왔다.
“아직도 센터 소속이라고요? 왜요?”
그리고 그가 아직 센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재영은 윤서가 센터를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아했다.
“인수인계가 필요하다고 당장은 안 된대.”
윤서가 실소를 내뱉었다.
“우리가 진짜 공무원도 아니고, 사무 처리를 하는 사람도 아닌데. 웃기지 않냐?”
재영은 그의 말이 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A급이고, 베테랑인 가이드 하윤서를 센터 측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질질 끄는 게 분명하다.
“그럼 얼마나 더 있어야 해요?”
“한 달쯤? 그런데 숙소는 옮겨도 괜찮대.”
문득 시선이 윤서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이드들이 무리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디에 던전이라도 생긴 걸까요?”
재영을 따라 시선을 옮긴 윤서도 그를 발견했다. 가이드 무리의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안의경 가이드가 있었다.
윤서가 태블릿을 꺼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점심시간도 지났고, 퇴근 시간은 한참 남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리고는 태블릿에 떠오른 화면을 재영에게 보였다. 재영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센터에서 만든 어플을 통해 던전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센터 소속 가이드의 스케줄이 적힌 페이지도 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재영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전부 가이딩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네요.”
재영은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현장 출동이 아니고서야 센터에 있는 가이딩실에 대기하다가 가이딩을 하는 게 맞다. 따지자면 업무 태만 아닐까.
“종종 있는 일이야.”
재영이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자 윤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도 궁금해서 데려가 달라고 한 적 있거든.”
“그래서요?”
“초딩 때도 안 당해 본 따를 직장에서 당할 줄은 몰랐잖아.”
윤서가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따라가지 못했단 소리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너무하네요.”
“별로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어.”
윤서의 말이 그냥 허세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소외받는 일이 달갑지는 않을 터다.
그때 스마트폰이 소리를 냈다.
[공주님]훈련끝났어
곧장 메시지를 확인한 재영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사헌이 형 훈련 끝났다는데 점심 같이 먹을까요? 재효 형은 어디래요?”
재영이 보기도 싫은 센터까지 윤서를 만나러 온 이유는 거의 사헌이었다. 근처에서 점심도 먹고, 시간도 보내다가 훈련이 끝나면 사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헌의 합류 소식에 윤서가 습관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가 금방 폈다.
“진사헌 에스퍼님이 끝났으면 재효 씨도 그럴 거야.”
“그럼 재효 형도 불러요!”
재영이 신나서 외쳤다. 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재영은 저를 돌아본 의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술을 짓씹으면서 재영을 노려봤다.
“또 저러네.”
윤서가 질린다는 듯 말하며 의경을 쏘아봤다.
“그냥 가요. 형들한테 식당으로 오라고 하면 되니까.”
재영은 애써 웃으며 윤서의 옷을 당겼다. 괜히 저 때문에 그까지 의경과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다. 원래부터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그것보다 뭐 먹죠? 일식? 한식? 중식? 형은 뭐가 좋아요? 형들 훈련하고 배고플 테니까 고기로 할까요?”
재영은 일부러 더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소고기로 하자. 이 형님이 쏜다.”
윤서도 덩달아 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외쳤다.
“우와, 형 최고!”
재영은 윤서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번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심이었다.
“달라붙지는 말고. 진사헌 에스퍼 눈에 띌까 봐 무섭다.”
윤서가 질색하며 재영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소고기에 눈이 먼 청년은 끈질겼다. 작지 않은 소리로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쏠렸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 *
재영은 태어나 처음으로 모세의 기적이라는 걸 경험했다.
“지, 진사헌 에스퍼다!”
재영을 보고 좀비 떼처럼 사방에서 몰려들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저만치로 물러났다. 사헌이 아직 아무 능력도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
“김재, 히익……!”
민태도 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가 사헌을 발견하고 그대로 빽스텝을 시도했다. 저렇게까지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매일같이 사헌에게 보고를 했는지 모르겠다. 재영은 웃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어쨌든 사헌의 호위 덕에 재영은 오랜만에 아주 편하게 인문관에 도착했다.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주변으로 모여들었음에도 누구 하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들어가.”
“여기서 기다리시게요?”
재영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강의실 문 앞에 멈춰 선 사헌이 마음에 걸렸다. 현관 밖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강아지라기엔 크고, 사납지만.
“그냥 같이 들어가요. 강의가 재미없기는 해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무거운 마음을 덜어 내지 못한 재영은 사헌의 옷자락을 당겼다.
“진심이야?”
사헌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재영은 그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프랑스 시 낭송’이라는 강의는 교양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히 재미없었다. 재영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그게 뭐든 시시콜콜 털어놓는 통에 사헌도 그 악명을 익히 알았다.
“교수님 몰래 놀아 드릴게요.”
재영이 결연한 눈빛으로 사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걸리면 쪽팔린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데려가고 싶다. 저 때문에 할 일도 없이 여기까지 온 그를 밖에 두고 간다는 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금방 들킬 텐데.”
사헌이 나른한 투로 말했다.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얼굴이 감춰질 거라고 생각해?”
사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뻔뻔하게 물었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강의 시간에 마스크를 쓰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그러지 않으면 100리 밖에서도 ‘진사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저 얼굴이 보통 얼굴도 아니고…….’
얼굴뿐 아니라 남다른 덩치도 무시할 수 없다. 재영은 복잡한 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학교 인문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사헌이 제 할 말만 하고 끊었다. 지켜보던 재영은 경악하며 물었다.
“재효 형이에요?”
사헌이 이것 보란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재효는 또 무슨 죄인가. 재영의 부담이 늘었다.
“끝나기 전에 와서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재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사헌이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교칙 상 기자들은 건물 내부까지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일반인인 다른 학생들은 가이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강의실에만 들어와도 무적이 되는 것이다.
사헌이 직접 문을 열어 망설이는 재영을 밀어 넣었다. 재영은 닫힌 문 앞에서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자리로 향했다.
“야! 형님이 왜 여기서 나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민태가 달려들 것 같이 물었다. 평화로운 캠퍼스에서 사헌과 마주친 것에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아직도 얼굴이 새파랬다.
“어제 집에 가서 경호원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혀, 형님을 경호원으로 쓴다고? S급 에스퍼인데?”
민태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경악했다. 재영도 무리할 필요 없다고 미약한 거부를 해 봤지만, 어림없었다.
‘내 가이드를 다른 놈 손 타게 둘 수는 없지.’
이런 낯 뜨거운 말까지 전할 필요는 없겠지. 재영은 손을 쫙 펴서 얼굴 전체를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의 피부가 홧홧했다.
* * *
재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릇처럼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로 무수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두 통이면 실수이거나 스팸을 의심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연락을 남긴 걸 보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재영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만약 번호를 알아낸 기자이거나 센터 사람이면 끊고 차단하면 그만이다.
“여보세요. 부재중 전화 남기셨던데 무슨 일이신가요?”
[김재영?]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쪽은 누구…….”
[나 서훈이야. 너 지금 어디야?]
마침내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을 알아낸 재영은 의아했다.
“서훈? 무슨 일…….”
그와는 잠깐이나마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하지만, 그 후로 거의 마주친 적도 없어 그 이상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두 번은 안 돼.’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사헌의 경고도 여전히 머리에 박혀 있고. 재영은 서둘러 이 통화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용건 없으면 끊…….”
[어디냐고!]
서훈이 답지 않게 큰소리를 냈다. 재영은 크게 놀라 허리까지 꼿꼿하게 폈다.
“인문관…….”
놀란 재영이 답하자마자 전화가 뚝 소리를 내며 끊겼다. 재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어질어질했다.
“뭐야, 대체…….”
막무가내인 통화에 재영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왜? 뭔데? 서훈이 너한테 연락은 왜 해? 너 형님 두고 바람피워?”
뒤에서 따라오던 민태가 재영에게 바짝 붙으며 질문을 쏟아 냈다. 그렇다면 당장 이르기라도 할 것처럼 두 손에 스마트폰을 꽉 쥔 채였다.
“미쳤어? 너 같으면 사헌이 형 두고 바람피겠냐?”
무심코 대꾸한 재영은 뒤늦게 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움찔했다.
“그치? 네가 아무리 S급 가이드여도 형님 상대로는 안 되지.”
“아니.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바람은 무슨.”
어이없다는 듯 쏘아 댄 재영은 문을 열고 나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문과 재영 사이에 벽이 생겼다.
서훈과 낯모를 여자가 재영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재영은 대처도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찾았다.”
“너 대체 왜…….”
재영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훈에게 물었다. 그때 처음 보는 여자가 재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재영이 떨쳐 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스퍼?’
여자의 힘은 보통을 벗어나 있었다. 깨닫는 동시에 재영의 눈앞이 흐려졌다.
* * *
눈앞에서 재영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민태는 잠시간 벙쪄 있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형님한테…….”
민태가 덜덜 떨면서 사헌의 번호를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무서운 얼굴을 한 사헌이 들이닥쳤다.
“뭐야. 찹쌀떡 어디 갔어?”
사헌은 민태가 재영을 감춘 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서운 기세로 노려봤다.
“서, 서훈이 우리 재영이 데려갔어요! 제발 찾아 주세요, 형님!”
민태가 울먹거리면서 매달렸다. 무섭니 어쩌니 해도 비빌 언덕은 사헌뿐이다.
“안재효. 당장 돌아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사헌이 다짜고짜 말을 뱉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김재영이 납치됐어. 제발.”
재효가 거절이라도 했는지 사헌에게서 나올 리 없는 말이 나왔다. 민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재효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 안재효 에…….”
인사할 틈도 없이 재효가 사헌을 데리고 사라졌다. 멀뚱히 선 민태가 눈을 끔뻑였다. 아주 나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건 꿈이 아니야!’
정신을 차린 민태가 허둥지둥 연락처에서 서훈과 친한 녀석의 번호를 찾아냈다.
“야! 너 서훈 어디 있는지 알지!”
뜬금없이 뭐냐는 대꾸가 돌아왔다. 속이 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영이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경찰서에 그 새끼 납치범으로 신고하기 전에 빨리 말해라!”
결국 거친 말까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