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재영은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너랑 같은 과라는 걸 네가 알아볼 줄은 몰랐어.”
“왜?”
훈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정말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야 너는 학교를 잘 안 나오잖아. 과 동기라지만 겹치는 수업이 많지도 않고.”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과에서 널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던데.”
서훈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재영의 미간은 살포시 일그러졌다. 훈이 언급한 신입생 환영회는 재영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끝났었다.
“너는 안 왔잖아.”
강의실보다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신입생 환영회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에스퍼가 왔더라면 그에게 한마디라도 붙이고 싶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재영에게 불편한 기억을 선사한 ‘10학번 선배’도 관심을 보였을 테고.
재영이 단정적인 어조로 내뱉자 훈이 그를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많이 취해 있었나 보네.”
훈의 말에 재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많이 취했던 건 사실이라 훈이 왔는데도 제가 기억을 못하는 쪽이 더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일찍 왔으면 너는 걸어서 돌아가지도 못했을걸.”
재영은 민망함을 지우려고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서훈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재영을 따라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런데 아까 그 크리처가 결합된 형체일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불이 꺼진 후, 구덩이에 쌓여 있던 건 흔히 볼 수 있는 스켈레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까맣게 변한 슬라임이 스켈레톤을 뒤덮고 있던 것이다. 서훈이 에스퍼로 활동한 2년 남짓, 크리처가 다른 크리처와 결합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아는 크리처의 특성으로 여러 가지 대보니까 그런 결론이 나왔어.”
재영은 자신이 공부한 크리처 안에서만 생각했다. 서훈을 비롯해 다른 에스퍼들은 오히려 많은 크리처를 상대했기에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던전마다 등장하는 크리처가 늘 새롭고 다양했으니까.
“편견에 갇혀 있었네, 내가.”
서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재영은 한 뼘 정도 차이를 두고 앉은 서훈을 향해 기운을 내보냈다.
‘아까는 윤서형만 따라가면 됐는데…….’
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없는 길을 틀어 기운을 내보내려니 잘 안됐다. 자신이 S급이니 가이딩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언젠가를 위해 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아직 서툴러서 집중 좀 할게.”
재영은 숨을 깊게 들이켜고 눈을 감았다.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 사이를 고요한 침묵이 감쌌다. 곧 재영의 온몸에서 퐁퐁 솟아난 맑은 기운이 훈을 뒤덮었다. 차분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느낌에 훈의 눈꺼풀이 절로 아래로 향했다.
길지 않은 휴식이 끝난 뒤,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30분도 채 되지 않아 곧 센터 대기소에 도착했다. 그 후로 처음처럼 무리로 다니는 크리처를 더 만나지 않은 덕이었다.
2차 저지선을 넘기도 전이었다. 안쪽에서부터 통곡이 들려왔다. 재영의 심장은 불안감으로 바쁘게 뛰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윤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발을 재촉했다. 앞서서 대기소로 향한 에스퍼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마침내 대기소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래서야 다친 사람도 많겠는데…….”
문용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대기소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 고통에 젖은 신음이 귀를 찔렀다. 평소 같았으면 이 장소에 있었을 윤서의 얼굴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따로 빠져 있던 게 오히려 신의 한 수였네.”
윤서가 재영을 돌아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재영은 그의 등을 두어 대 두드리며 위로했다. 제 마음도 이렇게 불편한데, 밀접한 관련자인 윤서의 마음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우선 재영의 눈에 보이는 크리처는 없었다. 그럼에도 멀쩡한 에스퍼들은 비전투원을 보호하려고 일정한 간격으로 둘러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에스퍼들조차 겁에 질려 보였다.
“형은, 사헌이 형은 어디에…….”
“재효 씨도 안 보여. 찾아보자.”
윤서가 마음을 다잡으며 재영을 끌었다. 재영은 애써 그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한쪽에서 가이딩을 받는 무리가 있었다. 들것을 만들어 부상자를 옮기는 사람도 있고, 부상자가 모여 있는 곳에서 붕대를 감거나 피를 닦아 내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서도 침통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기는…….”
누군가 반듯하게 눕혀 놓은 사람의 위로 흰 천을 덮었다. 그 위에 엎어지며 오열하는 소리에 재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던전 공략 중 사망하는 에스퍼가 있다고도 들었지만, 눈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다. 그 옆으로도 흰 천으로 뒤덮인 사람 같은 형상이 여럿 있었다.
“아니. 아닐 거야. 더 찾아보자.”
핏기가 싹 가신 재영의 얼굴을 본 윤서가 얼른 눈을 돌리게 했다. 재영은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 어디에도 사헌은 없었다. KTX를 타고 가도 눈에 박힐 인물인데 보이지 않는 게 영 이상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디 정찰이라도 갔나? 혹시 길이 엇갈린 건 아니겠지?”
윤서가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재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일이 터지자마자 사헌이 저를 찾아오지 않은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아, 아니야. 형은 괜찮을 거야.’
재영은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차게 식은 손을 주물럭거렸다.
“어? 저기 재효 씨 있다!”
윤서의 반가운 외침에 재영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사헌과 파트너인 재효라면 당연히 그의 행방을 알 터였다. 천만다행으로 재효는 멀쩡해 보였다.
“재효 형! 우리 형은……!”
눈을 번뜩인 재영은 재효를 향해 달렸다.
“재영아!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재영을 발견한 재효가 반가운 기색을 비쳤다. 그런데 재효의 얼굴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쳤으니까 그렇겠지. 다 동료들일 테니까…….’
애써 마음을 달랜 재영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사람 여럿이 바닥에 눕혀진 사람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누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재영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재영은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술만 벙긋거렸다. 차디찬 바닥에 누운 사헌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반들반들한 얼굴도 상처투성이다.
“저 혹시 꿈꾸고 있어요?”
재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헌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제 손길마저 그에게 고통이 될까, 차마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떠돌았다. 불러도 미동이 없는 사헌을 보니 덜컥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진사헌이라니. 꿈에도 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형이, 왜……?”
결국, 사헌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재영은 재효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게…….”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쪽으로 비켜 주세요.”
재효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떼려는 때였다. 웬 남자가 차갑게 내뱉으며 재영을 밀어냈다.
“진사헌 에스퍼는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던전 진입 후에 한 번도 가이딩을 받지 않아서 위험한 상태예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재영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사헌이 다친 것이 가이딩을 제때 받지 못해서라는 말이 귀에 아프게 박혔다.
“나, 나 때문에…….”
축 처진 눈꼬리 끝에 어룽어룽 매달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사헌 본인이 원치 않은 거야.”
재효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재영을 달랬다. 재영은 피로 얼룩진 사헌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몸을 낮추고 눈으로 사헌의 전신을 훑었다. 재영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악마 같은 기운이 사헌의 몸속에서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건 상황이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 몰라서 그런 거잖아요. 당장 가이딩 실로 옮겨야 해요.”
아까 재영을 밀어낸 사람이 다시 사헌에게서 그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대체 당신 뭐예요? 이러다가 진사헌 에스퍼 잘못되면 책임질 겁니까?”
남자가 분통 터진다는 듯 다그쳤다. 다급한 상황에 갑자기 끼어든 일반인이며, 그를 말리지 않는 재효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 옮겨서 어떻게 하는 건데요? 뭐 하면 형이 괜찮아져요?”
고개를 쳐든 재영은 가장 낯이 익은 재효를 봤다가 가이드인 윤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급한 물음에 윤서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안의경 가이드가 그나마 진사헌 에스퍼와의 매칭률이 높아. 정신 차릴 정도만 돼도 스스로 회복 가능하니까…….”
윤서는 왜 자신이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말꼬리를 흐렸다. 재영이 가이드인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매칭률이 높은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는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손을 잡는 정도로는 온종일이 걸려도 모자랐다.
“그래서요? 뭘 하면 되는 건데요?”
웬만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였으면 했다. 재영은 애타는 시선으로 윤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게 그냥 친구 형을 대하는 태도라고?
윤서가 헛숨을 삼키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안의경 가이드 정도면 손으로 하는 것 정도로 괜찮을 거야.”
상상하지도 못한 적나라한 표현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윤서 가이드님. 일반인에게 왜 그런 정보를 멋대로 주는 거죠?”
윤서의 파격적인 발언에 의경이 쏘아붙였다. 자칫 가이딩을 성적인 행위로 인식하게 될까 봐 세세한 단계나 행위까지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어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재영의 반응을 지켜볼 뿐이었다. 투명하리만치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손으로 뭘…….”
이내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채고는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형이 정신도 없는데 그런 걸 해도 괜찮은 거예요?”
재영은 한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하는 건 가이딩이니까.”
재영은 다시 말을 잃고 멍하니 윤서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헌과 가이딩을 할 거라는 의경을 바라봤다.
‘저 남자랑 사헌이 형이……?’
사헌과 가장 자주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그걸 제가 아니라 의경이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는 해 본 적 없는 은밀한 행위까지 하게 된다. 거기까지 상상한 재영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재영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재영이 고개를 들었다. 윤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던전이 아직 닫히지 않았잖아. 시간이 없어.”
재촉이었다. 움켜쥐고 있는 손을 놓든가, 다른 것을 감당하든가. 무엇이든 선택할 시간이었다.
“……제가, 제가 할게요.”
재영은 누가 뺏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헌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 와중에도 아플까 봐 사헌의 맨살은 손도 못 댔다.
“그래도 되죠? 네?”
재영은 필사적인 목소리로 윤서에게 매달렸다. 굳어 있던 윤서가 그제야 안도한 듯 흐릿한 미소를 보였다.
“아니, 무슨…….”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의경만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잠깐만요! 하윤서 가이드 멋대로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진사헌 에스퍼와 매칭률이 가장 높은 건 나……!”
“재영이는 진사헌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예요.”
상상치도 못한 재영의 정체에 의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뭘 하든 전담 가이드가 하는 편이 뒤탈이 적을 테니 물러서요.”
윤서가 얼떨떨해하는 의경에게 못을 박았다. 그리고는 의경의 부름으로 온 에스퍼들을 보며 말했다.
“진사헌 에스퍼 좀 옮겨 줘요.”
“네, 알겠습니다!”
에스퍼들이 준비해 온 들것에 사헌을 옮겼다. 그러면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재영을 힐끔거렸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는 에스퍼 대부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누구래?”
“진사헌 에스퍼가 정말 가이드와 계약을 했다고?”
“깨어나서 누구 마음대로 가이딩했냐고 난리 나는 것 아니야?”
“내버려 둬. 아닌 것 같으면 안재효 에스퍼가 말렸겠지.”
재영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들것에 실린 사헌을 잰걸음으로 쫓았다. 개인 가이딩 실은 구석 자리, 방음 마법을 입힌 가족용 텐트에 마련되었다.
“이제 나가 봐요.”
윤서는 에스퍼들이 사헌을 폭신한 이불 위로 옮겨 눕히자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에스퍼들은 나가는 그 순간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가이드를 힐끔거렸다.
“그, 정신 차릴 때까지만 하면 돼. 그 뒤는 진사헌 에스퍼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제 냉담한 얼굴을 했냐는 듯 윤서가 볼을 붉히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영이는 매칭률이 높으니까 끌어안고 키스만 좀 오래 해도 될 거야. 걱정 마.”
재효가 미소 지으며 윤서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재영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진사헌 에스퍼 상태가……!”
“그래요, 그래. 사헌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가이딩이 필요하거든요?”
재영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듯 재효가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 텐트 바깥까지 윤서를 밀어냈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잠시 후,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게 됐다.
숨도 못 쉬고 사헌만 응시하던 재영은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정신을 차린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사헌의 옷을 풀어헤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급함에 달달 떨려서 자꾸만 손이 엇나갔다. 재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둘러야 돼.”
재효가 키스만으로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가이드인 윤서의 말은 달랐다. 그리고 재영은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는 쪽이다.
여기서 재영이 놓친 것은 재효는 두 사람의 매칭률을 알지만, 윤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맨몸뚱이에 차가운 공기가 스쳤다. 급격히 밀려든 어색함에 몸을 떤 재영은 냉큼 사헌에게 다가갔다.
가이딩은 접촉면이 넓을수록 효과적이다. 재영은 넓은 가슴팍 위로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사헌의 체온은 언제나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했는데, 지금은 닿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
“형 많이 아프겠다.”
재영은 고개를 들고 사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까칠하게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그 위에 입술을 내렸다.
한동안 입술을 겹친 채로 숨을 골랐다. 살포시 짓눌러도 얌전하기만 한 사헌이 영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먼저 한 적은 없었네.’
사헌의 열기가 옮기라도 했는지 목덜미부터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재영은 사헌의 양 볼을 감싸 쥐고 그의 입술 틈으로 꼼질꼼질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으…….”
혀를 넣은 채로 입술만 벌린 재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헌의 입술 안쪽은 정말 녹아 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이게 다 형이 고통스럽다는 증거야.’
눈가를 일그러뜨린 재영은 사헌이 해 준 키스를 떠올리며 그의 입천장부터 핥았다. 쾌락을 미끼로 하는 키스라기에는 지극히 계산적인 행위였다. 그래도 열심히 빨아 댄 덕에 열기로 메마른 사헌의 입 안이 조금씩 젖어갔다.
입 안 구석구석을 핥은 재영은 정해진 순서처럼 혀를 빼내고 사헌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물기를 머금은 입술은 유난히 붉게 빛났다. 그 때문에 재영은 아무 이상 없이 잘 자는 사람에게 치근대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야, 이건 일이잖아.”
재영은 언젠가 사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순간 사헌의 고통이 옮은 것처럼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재영은 얌전히 누운 사헌의 혀끝을 두드리다가 제 혀로 감아 올렸다. 당겨도 보고, 빨아도 보고, 이로 긁어도 보고. 하지만 사헌의 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홀로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재영은 문득 서러워졌다.
“형, 빨리…….”
애원하듯 말한 재영은 고개를 비틀어 더 깊은 곳까지 침범했다. 그리고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사헌의 승모근을 어루만졌다. 응답 없는 혀를 쭉쭉 빨아 대던 재영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우뚝 굳어졌다.
“손으로…….”
가이드와 그 정도는 해야 사헌이 나아질 거라는 윤서의 말이었다. 재영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의식이 없는데도 사헌의 존재감은 너무 컸다.
“저건 좀…….”
재영은 질린다는 듯 웅얼거렸다. 신체 부위의 하나일 뿐인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크리처가 형 몸에 기생하게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형태라 재영의 몸이 놀람과 경이, 공포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재영이 한참 그것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사헌의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재영은 반가움에 상체를 쭉 뻗어 사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잠시 손만 잡았을 뿐인데, 눈에 띄는 상처는 전부 없어져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 돋보였다.
“제가 금방 안 아프게 해 줄게요.”
결연한 빛을 띤 재영은 침을 꿀떡 삼키고 사헌의 허벅지로 옮겨 앉았다. 재영은 급격히 밀려드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손을 뻗었다.
“이거 내 손목만 나가는 거 아니야?”
재영이 불안한 음성으로 투덜댔다. 그에게 더 이상 사헌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더 많이 닿아야 좋은 거니까…….”
변명처럼 중얼거린 재영은 사헌에게 바짝 당겨 앉았다.
“아, 으, 이거 이상해.”
재영은 생소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맨살에 다른 누군가의 피부가 닿는 게 처음이었다.
“하아.”
재영의 입술 사이로 뜨겁고 습한 숨이 흘러나왔다. 혼자 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쾌감에 허리가 절로 바르르 떨렸다.
“으, 흡…….”
손을 움직일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재영은 목을 쭉 빼고 신음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이렇게 좋은 거라면 매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거칠어지자 머리가 몽롱해졌다. 재영은 살짝 눈을 떠서 사헌의 얼굴을 쳐다봤다.
“형으, 읏!”
상대는 깨어 있지도 않은데, 심지어 환자인데 그 위에 올라타 쾌락을 갈구하는 자신이 너무나 짐승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재영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재영은 괜히 안달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피가 끝까지 몰려서 더는 참기 힘들었다.
“하아, 뜨거……, 흣.”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진 재영은 사헌의 위로 납작 엎드려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내 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내렸다.
“왜 안 하지?”
당황스럽고 속상했다.
“아파서 제대로 못 느끼는 건지도 몰라.”
애써 덤덤하게 뱉은 재영은 사헌의 몸을 살폈다. 다른 건 몰라도 회복에는 도움이 됐는지 다행히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재영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근데 왜 정신을 못 차리지?”
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손으로는 편하게 만들지 못했으니까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법을 떠올린 재영은 움찔 몸을 떨었다.
“시, 간이 없으니까.”
재영은 머뭇머뭇 머리를 낮췄다.
“이게 더 커질 수 있는 거였냐고.”
망설이던 재영은 곧 과감하게 입을 크게 벌렸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으음.”
재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먹먹한 머리가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움찔하며 입술을 뗐다.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자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왜. 더 하지.”
깊게 잠들어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다 갈라져 나왔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내뱉는 말이 재영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했다.
“……형!”
굳어 버린 재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기쁨을 이기지 못한 재영이 덮치듯 사헌의 목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소중한 부위가 깔리게 된 사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건 자극이 너무 센데.”
사헌이 고통을 감추고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재영은 애교 많은 강아지처럼 볼을 기댔다.
떡 주무르듯 하얀 볼을 주물럭거리던 사헌의 눈빛이 불현듯 깊게 가라앉았다. 점차 느려진 손이 재영의 턱을 올려 쥐었다.
반강제로 고개를 들게 된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사헌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의 엄지가 느리게 입술 안으로 미끄러졌다.
“순진한 척하는 건지…….”
사헌의 엄지가 숨이 막히도록 느린 움직임으로 재영의 혀를 문질렀다. 저를 감싼 이상한 기류에 재영은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네?”
당황한 듯 재영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갑자기 맞닿은 사헌의 체온이, 몸이 지나치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불편해하는 재영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헌이 손에 힘을 주어 저를 보게 했다.
“네가 해 주는 거, 좋았다고.”
사헌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잘못 들을 수 없게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재영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아, 형, 무거우시죠. 제가…….”
사헌이 제 몸 위에서 벗어나려고 허둥대는 재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재영은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잠깐 팔, 좀…….”
“가이딩은 아직 멀었어. 알잖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었다.
* * *
크리처는 동굴 천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 키가 컸다. 눈동자는 뒤집힌 것처럼 위를 향해 있었고, 얇은 실핏줄이 흰자위를 물들였다. 새까만 몸통에는 붉은 점 같은 것이 빼곡했다.
“던전이 변화했어.”
재효가 속삭이듯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나신의 거인이 이 동공(洞空)을 차지하고 있어야 했다.
사헌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재효를 보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런 머저리는 제가 먼저 구덩이를 파서 묻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팀원들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한차례 살핀 사헌은 입을 열었다.
“살아 나가고 싶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힘이 실린 목소리가 팀원들의 귓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상자부터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까지 모두가 눈에 힘을 바짝 줬다. 그 어떤 크리처보다 위험한 인간이 눈앞의 공주님이라는 걸 떠올려 낸 것이다.
“뭐, 잘했어. 사기 진작은 확실히 됐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재효가 공간을 분리해서 곰의 가슴팍에 구멍을 뚫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면서 작은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새까만 구름 같은 것이 몰려와 구멍을 채웠다. 머리와 몸통, 다리, 사지가 분리된 시체는 작은 쥐의 것이었다.
“각 개체의 힘은 강하지 않다. 시전이 빠르고 마나 사용이 적은 공격으로 끊임없이 몰아붙여.”
“네, 대장님!”
“알겠습니다!”
무려 S급 에스퍼 진사헌의 팀이었다. 작은 쥐는 커다란 덩치로 뭉치기도 전에 쏟아지는 공격에 허물어졌다.
“그나저나 잡몹이 이 정도면 보스는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지.”
재효의 걱정 가득한 말에 사헌도 얼굴을 굳혔다. 던전에 발을 들인 이상 보스가 얼마나 센지는 중요치 않았다. 무조건 클리어해야만 한다.
“확실한 건 우리가 뚫리면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거란 거야.”
던전 브레이크. 제한 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의 크리처들이 바깥 세상까지 침범하는 현상이다.
‘하필 오늘…….’
사헌은 속으로 후회를 되뇌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인지한 순간, 떠오른 얼굴은 말간 미소를 짓는 재영의 것이었다.
“재영이는 던전 바깥에 있잖아. 혹시나 던전 브레이크로 크리처들이 나간다고 해도 우선은 대기소에 남은 팀원들이 막아 줄 거야.”
재효가 사헌의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진사헌의 통역사’라고 불리는 사람다웠다.
재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사헌은 다시 눈앞의 보스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몸 안에 남은 기운을 체크하며 숨을 골랐다.
“가이드들 상태는?”
사헌의 말에 재효가 뒤를 돌아 가이드와 더불어 팀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전체 인원 12명에서 전투 불능 상태의 에스퍼가 셋이고, 나머지도 자잘한 부상은 달고 있었다. 가이딩을 최소한으로 받고 있어서 자가 치유를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보호를 받는 가이드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오는 내내 치열한 전투를 목격한 데다 평소보다 자주 가이딩을 한 탓이다.
“두 명 다 가이딩을 더 하면 위험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재효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마 이 정도까지 살아난 것도 던전을 산책하러 가듯이 다녀오란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꼼꼼하게 챙겨온 사헌의 준비성 덕이었다.
사헌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제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제되지 못한 사나운 기운들이 호시탐탐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가이딩을 받지 않은 건 특유의 결벽증 때문이 아니었다. 훈련을 위해서 진입 초반의 전투는 팀원들에게 맡겼다. 사헌은 뒤에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다가 조금씩 도움을 줄 뿐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던전 내 크리처의 변화였다. 더 강해지고, 대처 방법 또한 모호한 크리처의 앞에서 처음의 계획이 무너지는 건 금방이었다. 사헌의 부담은 더 커졌다.
이제 남은 건 던전을 지키는 대장 크리처를 해치우는 것. 솔직히 제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사헌의 시선이 부상당한 후배들을 챙기는 땅개에게 향했다.
“땅개!”
“네!”
땅개가 사헌의 부름을 듣고 냉큼 달려왔다. 사헌이 신뢰하는 능력자답게 비교적 괜찮은 상태였다.
“가이드랑 저 녀석들 챙겨서 대기소로 돌아가 있어.”
사헌은 고개를 까딱여 정신을 잃은 에스퍼 쪽을 가리켰다.
“저희끼리도 갈 수 있어요.”
땅개에게 내려진 지시를 들은 가이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베테랑 가이드다. 더는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들이 이쯤에서 빠지는 것은 마땅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에스퍼의 경호를 받을 수는 없다. 전력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이드도 잘 알았다.
“위험해요! 돌아가는 길에 크리처라도 마주치면 큰일입니다.”
땅개가 무거운 표정으로 가이드들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한 번 처치한 크리처는 일정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변화한 던전이다. 그 기본 규칙마저 변했을지도 모른다.
“마주치면 그냥 운이 없는 거죠.”
“설사 따라간다고 해도 준오 씨 혼자서는 역부족일걸요.”
가이드들이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마치 죽음을 예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에스퍼 한 명으로는 5분도 못 가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비전투원인 그들보다야 에스퍼인 준오가 상황을 더 잘 알 것인데, 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헌은 성가신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가이드들을 흘겨보고는 땅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스존도 어쩔지 몰라서 더 붙여 주지는 못하겠다.”
“압니다. 제가 죽을힘을 다해 돌아오실 곳을 지켜 내겠습니다!”
준오가 씩씩하게 답하고는 부상자들을 챙겼다. 빠릿빠릿한 움직임을 보고 사헌의 입가에 옅게나마 미소가 걸렸다.
“가자.”
떠나는 것을 지켜볼 새도 없이 사헌을 위시한 에스퍼들은 걸음을 옮겼다.
보스존이 어디부터냐, 고민할 필요도 없다. 콩알만 한 무언가가 눈에 보이는 순간, 공기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뒷머리가 쭈뼛 서는 오싹한 기분이 사헌을 감쌌다.
‘이건 안 돼.’
뒤로 빠지라는 말을 뱉을 여유조차 없었다. 사헌은 전신의 힘을 끌어 모아 보스를 뒤덮었다. 뻣뻣한 털로 덮인 설치류 크리처가 입을 쩍 벌리며 고통스러워했다. 훤히 드러난 이빨은 상어처럼 개수가 많고, 뾰족했다. 이빨 사이사이, 상상하기도 싫은 검붉은 것이 끈적하게 뒤엉켜 있었다.
크리처도 얌전히 맞기만 한 건 아니었다. 위협을 느낀 크리처는 주변에 깔아 둔 마기로 사헌을 공격했다.
“윽……!”
순간 사헌의 몸이 휘청였다. 몸통이 두꺼운 뱀이 전신을 옥죄는 것 같았다.
“사헌아!”
재효가 언제든 뛰어올 것처럼 안달 난 얼굴로 사헌을 불렀다. 사헌은 오지 말라는 뜻으로 팔을 뻗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그 말에 재효가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만일의 상황이라는 건 사헌마저 보스를 이겨 낼 힘이 없어질 경우를 뜻한다. 재효의 임무는 사헌을 비롯한 팀원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장이 보스존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이 유지되어야만 하지만.
크리처는 마구 손을 뻗어 잡히는 것마다 입에 넣었다. 그 중에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작은 설치류도 있었다.
“집어삼키는 대로 힘이 쌓이고 있어.”
사헌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사악한 마기가 휘몰아치며 그의 몸 곳곳에 상처를 입혔다. 그나마 저나 되니 이만큼이라도 버티는 거지, A급 이하는 안에 딛는 순간 목이 잘릴 수 있다.
‘절대 먼저는 안 쓰러지지.’
사헌은 고소를 머금은 채 크리처를 노려봤다. 크리처도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는 중이었다.
땅에 등을 대고 누워 버둥대던 크리처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사헌은 저를 공격하는 마기가 점점 약해지는 걸 느꼈다.
“빼야 해.”
다가올 수도 없는 재효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사헌을 보며 채근했다.
“안드, 큭……!”
대답하려고 연 입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뚫리면 끝이다. 이 나라에서 그의 존재는 단지 가장 강한 에스퍼가 아니라 최후의 벽 같은 것이었다. 사헌은 이를 악물고 허물어지는 몸을 바로 세웠다.
사헌은 몸 안에 퍼져 있는 기운을 싹싹 긁어모았다. 그래 봐야 쓴 양이 많아 E급 에스퍼 정도의 능력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을 모아 작은 총알 모양으로 뭉치고 숨을 고른 뒤 빠르게 쏘아 냈다.
사헌을 공격하던 마기가 뒤로 빠져 크리처의 앞을 막았다.
쾅!
무조건 뚫으려는 총알과 버티려는 방패 사이에서 굉음이 울렸다. 보통 사람보다도 예민한 귀를 가진 에스퍼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망친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사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 감기는 눈으로 크리처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크리처의 몸뚱이가 작아지고 있었다. 마나 소비를 줄이고, 도망에 유리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
걱정과 환희가 섞인 팀원의 물음에 재효가 고개를 흔들었다. 사헌도 잡지 못한 크리처다. 겉만 멀쩡하지 속이 엉망이 된 에스퍼로는 피해만 늘 뿐이다.
마침내 크리처가 작은 굴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꿋꿋하게 버티던 사헌의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그 꼴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진사헌!”
재효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앞으로 쓰러지는 몸을 받아 내는 동시에 사헌은 정신을 잃었다.
* * *
의식을 찾은 사헌이 제일 먼저 찾은 감각은 귓가에 엉기는 질척한 소리였다. 그는 제가 정신을 잃은 사이 멋대로 행하는 가이딩을 본능적으로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루만지는 손길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뱃속이 근질거릴 만큼 기분이 좋았다.
곧 온몸의 감각이 돌아와 뒷머리가 당겼다. 제게 이런 감각을 줄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다. 사헌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역시 콧속 가득히 들어차는 건 다디단 재영의 체취다.
“형, 빨리…….”
사헌은 안달하는 목소리에도 얌전히 눈을 감고 반시체 흉내를 냈다. 울음 섞인 숨소리에서 비틀린 쾌감이 똬리를 틀었다. 재영이 이토록 간절히 저를 원하는 것을,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느낄 수 있을까. 사헌은 재영이 주는 감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평생의 업적을 뛰어넘을 가장 훌륭한 판단이었다.
“손으로…….”
재영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에 사헌은 기대로 심장이 뛰었다.
“크리처가 형 몸에 기생하게 됐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재영의 귀여운 말에 사헌은 하마터면 뒤통수를 당겨 입을 맞출 뻔했다. 그런데 꾸역꾸역 참고 몸을 내맡겼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형!”
사헌은 다시 능력을 써 신체의 감각을 느리게 돌렸다. 거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재영이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누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즐기던 사헌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그는 제 위에서 할딱거리는 재영의 숨소리를 들으며 몇 번이고 눈을 뜨고 싶었다. 확 퍼지는 야한 냄새에는 정말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왜 안 하지?”
사헌은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시간을 더 끌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재영이 저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
‘키스는 이미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지.’
재영이 멋대로 걸어 버린 규제를 풀 수 있는 기회다.
“시, 간이 없으니까.”
곧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평소에 어떻게든 선을 지키려고 애쓰던 재영 답지 않았다.
사헌은 슬쩍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몰래 눈을 뜨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슬슬 못 참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재영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눈앞이 새빨갛게 변하며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헌은 마침내 환자 행세를 집어치우고 재영을 만졌다. 재영이 행동을 멈추고 동그란 눈으로 저를 쳐다봤다.
“왜. 더 하지.”
사헌이 혀를 찼다. 멈춰 버린 행위가 못내 아쉬웠다.
“……형!”
재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헌에게 안겨 들었다. 사헌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무엇보다 이 얼굴이 더 자극적이었다. 사헌이 발간 뺨을 만지작거리자 재영이 볼을 기댔다. 제게 길들여진 강아지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문득 재영의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아, 형, 무거우시죠. 제가…….”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한 재영이 옴짝거리며 도망치려 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사헌은 속으로 혀를 차며 재영의 허리를 잡아 내려 앉혔다.
“가이딩은 아직 멀었어. 알잖아?”
그리고 재영을 유혹하듯 눈을 휘었다.
꿀꺽.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재영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게 신호라도 된 양 사헌이 재영의 몸을 호떡 뒤집듯 뒤엎었다.
“혀, 형……!”
바닥을 짚은 재영이 달아오른 얼굴로 사헌을 돌아봤다. 하지만 사헌은 재영의 허리 부근을 붙든 채 새하얀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느라 여유가 없었다.
성실한 성격처럼 관리가 잘된 몸은 군살 없이 매끄러웠다. 게임을 더 오래 하기 위해서라는 의도는 조금 시커멓지만, 어쨌든 결과가 완벽했다.
이 정도라면 진도를 좀 나가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 사헌은 혀로 제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으읏, 형! 거긴 왜 손대요!”
사헌의 손이 어디에 닿은지 알아챈 재영이 기겁하며 파드득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조르지 마.”
사헌은 눈앞을 어지럽히는 요망한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조르기는 누가……!”
덕분에 억울한 듯 항변하려던 재영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사헌은 제 손에 닿는 말랑한 감촉에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으으…….”
생소한 감각에 재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사헌은 눈을 내리뜨고 재영이 주는 감각을 음미했다.
“하…….”
사헌은 배부른 짐승처럼 느른한 숨을 내뱉었다.
“잠깐, 잠깐만요.”
한층 거북해진 느낌에 재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재영이 사헌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젖 먹을 힘까지 다했을지는 모르지만, 사헌에게 있어 파리의 성가심 그뿐이었다. 단지 제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에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재영의 허리에 단단하게 팔을 둘렀다. 재영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든 후, 붉게 달아오른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끝까지 가고 싶은 게 아니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나직한 경고에 재영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찹쌀떡.”
갑자기 저를 부르는 통에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재영의 등이 마치 고양이처럼 튀어 올랐다.
“너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내 몸을 멋대로 가지고 놀았지.”
사헌은 달래는 것처럼 재영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당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도 편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 진짜 억울한데요.”
울상을 지은 재영이 툴툴댔다. 그냥 재효의 말처럼 키스만 할 걸 그랬다. 아니면 아예 센터의 가이드인 의경에게 맡겨두거나.
“그럼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문제없는 것 아닌가.”
재영이 뭐라든 사헌은 제가 할 말만 이어갔다. 재영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네네,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린 재영이 몸에서 힘을 뺐다. 순종적인 건지, 당돌한 건지 모를 행동에 사헌은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나 꼴리는 대로 할게.”
진사헌은 같은 말이라도 인상이 찌푸려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재영의 기분이 어떻든 사헌은 내내 거슬리던 뽀얀 살결에 입술을 내렸다.
“후우.”
사헌은 재영의 등을 끌어안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형. 조금만, 떨어져서 하시면 안 돼요?”
등 뒤에서 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움찔거리던 재영이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사헌은 가늘게 뜬 눈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봤다. 하얀 뺨을 물들인 채 어쩔 줄 몰라 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상상만 했는데도 아랫배가 당겼다.
“하. 이 좋은 걸, 어쩌자고, 흣, 혼자 했어, 응?”
사헌은 다그치듯 재영의 등에 이를 세웠다. 아래로 향하는 이를 따라 붉은 자국이 길게 남았다. 남은 손 하나가 입술과 반대로 움직였다.
“형이 일어나질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앗!”
놀란 재영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영에게서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기운이 쏟아졌다.
“이제야 제대로 맛보겠네.”
사헌은 땀에 젖어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제 꼴을 살피려고 고개를 쭉 내미는 재영의 머리를 끌어다가 입을 맞췄다. 예민한 입천장을 혀끝으로 문지르자 재영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깝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에 재영이 헛숨을 삼켰다. 숨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몸을 움츠리고 눈치를 살피는 게 앙큼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협조하라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헌은 선량한 피해자인 척 재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에게 당하는 것이 좋아 정신을 잃은 체하고 있던 주제에.
“아니, 그건 가이딩이라고……, 읏! 형! 말 좀……!”
열기로 메마른 목구멍에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헌의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땀과 눈물이 섞인 재영의 체취가 흥분을 돋웠다.
형, 형. 안달 내며 부르는 소리에 사헌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대로 통째로 꿀꺽 삼키고 싶은 욕망과 두고두고 아껴 먹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이런 곳에서 얼렁뚱땅해 버릴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건 제게 거는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 재영을 안는 상상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 * *
재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헌의 시선에 겪어 본 적 없는 음란함으로 엉망진창 뒤섞인 제 머릿속이 전부 까발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흑!”
간지러워 미치겠는데 그 주변만 긁어서 더 미칠 거 같은 기분이다. 재영은 매달리듯 이불을 움켜쥐었다. 곧 적당히 시원한 체온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 감각에 이끌려갔다.
“흐으.”
재영은 애교를 부리듯 사헌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너무 끓어서 터질 것 같던 머리가 조금은 식었다. 문득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한 건 이렇게 음란한 게 아니었다.
“읏, 응, 뜨거……, 흡.”
서로 살이 마찰하면서 과도한 열을 자아냈다. 재영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사헌의 손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재영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갔다. 재영은 견딜 수 없는 감각에 몸을 비틀었다. 사헌의 손이 잠시라도 닿은 곳은 간지럽고 뜨거웠다.
“아, 놔, 놔주세요.”
재영은 울먹이며 자신을 괴롭히는 손길을 떼어 내려고 했다. 당연히도 사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왜……왜, 흐윽, 괴롭히세요.”
“내가 당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응?”
시간이 걸리더라도 키스로만 할 걸.
뒤늦은 후회가 재영을 쥐어짰다. 재영은 지나치게 짙은 쾌감에 흐느꼈다.
“아흐, 형, 제발…….”
간절한 호소에 사헌이 재영의 몸을 다시 홀딱 뒤집었다. 눈물과 땀으로 범벅된 얼굴이 그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감추기도 전에 사헌의 입술이 다가왔다.
“똑바로 봐야지.”
짧은 입맞춤 후에 다시 얼굴을 숨기려는 걸 사헌이 귀신같이 알아챘다.
“너, 너무 부끄럽단……흣, 말이에요.”
“익숙해져.”
사헌의 대꾸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진사헌이 찔러봐야 바늘도 안 들어갈 사람이라는 걸 깜빡했다.
만족스러운 듯 재영의 얼굴을 살피던 사헌이 팔을 구부려 몸을 낮췄다. 기다리듯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두꺼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사헌의 혀가 입 안을 누볐다.
재영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분이 좋아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의 반응에 맞닿은 사헌의 입술이 옆으로 길게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서로를 느꼈다.
혀가 얼얼해질 즈음에야 사헌이 입술을 떼고 재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헌이 재영의 이마를 적신 땀을 제 손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는 고개를 비틀어 다시 입술을 삼켰다.
* * *
숨이 막히도록 뜨겁고 습한 공기는 다시 빠르게 식었다. 침묵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어색함이 재영을 덮쳤다. 재영은 쭈뼛쭈뼛 팔을 뻗어 벗어 놨던 티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한기가 돌아 떨리던 몸이 한결 진정됐다.
“읏!”
어깨에 걸린 티셔츠 끝자락을 잡고 끌어 내리던 재영은 찡한 고통에 단말마를 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까끌까끌한 천이 피부에 닿으면서 통증을 일으킨 것이다.
“까졌나.”
재영은 상태를 보려고 옷자락을 들쳤다. 피부에는 거스러미가 일어나서 언뜻 피가 비친 곳도 있었다.
‘이러니 아프지.’
미간을 좁힌 재영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을 뒤졌다. 되는대로 쑤셔 넣은 광고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재영은 그 사이에서 노란색 캐릭터 밴드를 찾았다.
티셔츠 끝을 입으로 물고 밴드를 양손으로 잡아 붙이려는데 자꾸 흘러내리는 옷자락에 가려져 붙일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 안 되네.’
재영은 시야를 가리는 옷을 몇 번이고 고쳐 물며 끙끙거렸다. 계속되는 실패에 골이 난 아이처럼 가운데로 몰린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냥 감으로 붙이자.’
대충 위치를 가늠해 보던 재영은 문득 머리통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흥미로운 눈빛으로 저를 지켜보는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주세요.”
재영은 볼멘소리를 내며 사헌을 향해 가슴을 툭 내밀었다. 저는 아파서 낑낑거리는데 남의 일인 양 태평한 사헌이 얄미웠다.
양반 다리를 하고 있던 사헌은 자신의 무릎에 팔꿈치를 얹었다. 그 손으로 얼굴을 괴고 삐뚜름히 고개를 틀어 재영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웃는 듯 마는 듯 한 얼굴로 입을 뗐다.
“부끄러움 많은 귀여운 녀석은 어딜 가고 이런 무신경한 놈만 남은 거야?”
끝으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영은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사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아니면 따로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건가?”
재영과 눈을 맞춘 사헌이 짓궂게 웃었다.
“아, 형!”
놀림 받고 있다는 걸 알아챈 재영은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사헌을 다그쳤다. 장난인 줄 알면서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본 사헌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재영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어차피 지금은 가이딩 그렇게 필요 없으시잖아요.”
재영은 입술을 툭 내밀고 구시렁거렸다. 사헌이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들이 이걸 어째, 하며 걱정스럽게 쳐다볼 때와 비슷한 제스처다.
“흠, 근데 형.”
재영은 입구로 다가가는 사헌의 등을 보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불러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 고백할 게 있어요.”
마침내 사헌이 뚝 걸음을 멈추자 재영은 입이 말랐다.
“저 방사 가이딩을 했어요.”
가르쳐 주지 않은 걸 배워 왔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저 아닌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했다고 싫어할까. 재영은 자신을 돌아본 사헌의 표정을 읽으려고 이리저리 살폈지만, 모호했다.
“방사 가이딩? 해 본 적 없잖아.”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해 보니까 되던데요.”
어깨를 들썩이며 대꾸한 재영은 이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말하고도 좀 재수 없게 들렸다.
‘이런 건 사헌이 형 전공인데.’
그래서인지 사헌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이 허탈해졌다. 재영의 어깨에서 힘이 툭 빠졌다.
“……화 안 내요?”
“왜? 혼나는 거 좋아해?”
사헌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휘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어도 그가 화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 놀림당했다는 생각에 재영은 눈을 흘겼다.
“아니. 계약했잖아요. 형 전담으로.”
재영이 아무리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라지만, 계약 무서운 건 알았다. 사헌이 골이 나서 퉁퉁거리는 재영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성실한 네가 계약을 어겼다면 그럴 만한 상황이었겠지.”
평소처럼 나른한 말투였다. 재영을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재영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가 뜨거웠다.
“왜 그래?”
사헌이 이상하게 쳐다보며 재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때를 미는 것처럼 목 부근을 세게 박박 문지르고 있던 것이다.
“그냥 좀 기분이 이상해서요. 이제 괜찮아요.”
재영은 사헌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에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는데 사헌의 목소리를 듣자 정말 괜찮아졌다.
평소처럼 해맑게 웃는 재영의 모습에 사헌의 입가에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정도로 이상이 있으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아주 쉽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놀린 것이다. 재영은 억울함에 씩씩댔다.
“힘을 썼잖아요, 힘을! 주도권을 잡고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형이 알아요?”
물론 가이딩 이야기였다. 그런데 울분 섞인 외침에 사헌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랬지. 잠든 사람 위에서 멋대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재영은 손으로 양 뺨을 감쌌다. 얼굴이 홧홧하다 못해 익어 버릴 것 같았다. 사헌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런 재영을 쳐다봤다.
“특별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터는 허락 제대로 받아.”
사헌이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했다. 재영은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해운은 제 형이 이렇게 장난기가 많은 사람인 걸 알까.
“갑은 저예요.”
재영은 억울한 목소리로 쥐어짜듯 말했다.
“그 계약에 걸린 건 너고.”
즐거운 듯 웃은 사헌이 검지를 펴서 재영의 가슴께를 꾹 눌렀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재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더는 사헌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 가이딩이요.”
“비슷하지.”
단호한 어투에 사헌이 봐주겠다는 듯 손을 거뒀다. 재영은 얄미움에 시원하게 드러난 등을 노려봤다.
‘시원하게 드러나……?’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헌이 바지만 쑥 올려 입고 텐트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다.
“형! 잠깐만요!”
재영은 제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다급하게 이불을 벗어났다. 사헌이 움직일 때마다 성난 등 근육이 움찔거렸다.
“형 옷 안 입었다니까요!”
아무리 보기 좋은 몸이라도 공공장소에 적당한 차림새는 아니다. 재영은 허둥지둥 사헌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셔츠로 그의 등을 감쌌다.
“헉.”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재영은 사헌의 손목을 잡고 셔츠에 팔을 넣으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스퍼, 가이드, 센터, 길드 할 것 없이 모두가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영은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사헌을 봤다. 대체 왜들 저렇게 보느냐고 묻는 시선에 사헌의 입술이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고개를 갸웃한 재영은 금세 신경을 껐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그에게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옆에는 ‘그’ 진사헌이 함께이지 않나.
재영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오른팔을 꿰어 넣은 사헌이 왼쪽 팔도 쭉 뻗었다. 날 때부터 시중을 받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재영은 단추를 채우려고 옷깃을 여미다가 미간을 좁혔다.
“다음부터는 출동할 때 여벌도 챙겨 다닐까 봐요. 아주 넝마가 따로 없네.”
아침까지만 해도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깨끗한 셔츠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가 팔을 넣는 구멍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뭔지 모를 것들로 더럽혀져 있었다.
재영은 풀 때와는 달리 침착한 손길로 단추를 채웠다. 그러다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사헌이 재영이 집중할 때만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재영은 그러려니 하고는 최소한의 단정함을 찾은 사헌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사헌이 곧장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재영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모인 곳, 그러니까 하랑 길드원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하랑 길드원들의 몸이 점점 더 꼿꼿하게 섰다.
“하랑에서 내 가이드를 살려 줬다고 들었습니다.”
하랑 길드원의 근처까지 다가간 사헌이 말을 건넸다. 어떻게 알았는지 관리자인 문용을 향해서였다.
“살려 주다니. 그.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말을 걸어 주어 황송하다는 표정을 한 문용이 두 손을 내저었다.
“제안이 있습니다.”
사헌이 저를 불편해하는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무, 무슨…….”
사헌의 말에 문용이 불안한 표정으로 재영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재영도 사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말간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 팀만으로 클리어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랑 길드와 협동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가능합니까?”
“혀, 협동을……. 지, 진사헌 에스퍼님과…….”
뜻밖의 제안에 문용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을 더듬었다.
“대장이 그 정도로 강한 거예요?”
재영은 사헌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헌이 그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것이 제때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충전을 했으니 대장 크리처도 문제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물론 센터 차원의 보상을 할 겁니다.”
사헌이 최종 결정권자인 것처럼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 옆에서 센터 직원들이 쩔쩔매는 것이 보였다. 재영으로서는 자신을 도와준 하랑 길드원에게 보답할 기회이니 좋았다.
곧 사헌을 바라보는 문용의 눈빛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던전 부산물을 10퍼센트만 나눠 주십시오. 그리고 리셋 던전일 시 같은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던전을 클리어한 팀이 재참여를 원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셋 던전이 아니게 되면 센터의 다른 던전을 예약할 때, 달에 단 한 번 50퍼센트 비용으로 대여할 수 있게 해 드리죠.”
“자, 잠깐만요, 진사헌 에스퍼님! 그, 그건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차후에…….”
하지만 사헌과 생각이 달랐는지 센터 직원이 경악하며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재영은 좋은 보상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는데 상당히 무리한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하랑 길드원들이 참여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던전에서도 나가지 못한 채 모두 죽을 수 있습니다.”
사헌은 제게 뻗어오는 손을 가볍게 피해 냈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센터 직원이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하, 하지만 죽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내 가치가 던전 하나, 아니, 그 반에도 못 미친다는 말입니까.”
사헌이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센터 직원을 노려봤다. 에스퍼끼리는 서로의 마나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헌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기운은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도 느낄 수 있었다. 센터 직원도 날 선 기운을 느끼고 뒤로 한 발 물러나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재영은 슬며시 사헌의 옷자락을 당겼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센터와 사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직원이 안쓰러웠다.
사헌이 고개를 돌려 재영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문용을 향해 심드렁하게 말을 뱉었다.
“뭐, 센터 꼰대들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사비를 들여서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이거면 됐냐는 듯, 사헌이 재영을 향해 눈짓했다. 약간 뻐기는 것 같기도 한 얼굴에 재영은 냉큼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 고마워요.’
재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바라보는 사헌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헌에게 전담 가이드가 생겼다는 것에 한 번, 그 가이드를 꼭 끼고 다니는 사헌에 한 번, 그를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재영의 태도에 한 번. 연달아 세 번을 놀란 셈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구하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재영은 생명의 은인인, 하랑 길드원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대표로 인사를 받게 된 문용이 안절부절못하며 맞절을 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도 도움을 받았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센터라면 모를까, 진사헌 에스퍼 개인이 보답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훈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용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저를 향한 오롯한 시선에 사헌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내가 보답할 일이 맞지. 이 녀석은 내 가이드니까.”
“보답이라면 이미 김재영에게 직접 받았습니다.”
미소를 띤 채 서훈을 바라보던 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영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불편한 분위기에 어색하게 웃다가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자 사헌이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사 가이딩했다고 했잖아요.”
재영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나마 먼저 이실직고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주 잡아먹었을 기세다.
“그래, 그랬지.”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본 사헌의 눈빛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리고 팔로 재영의 머리통을 감쌌다. 자칫 다정하고 친밀해 보일 수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작은 머리통이 금방 터질 풍선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사람들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헌이 입을 맞추는 것처럼 재영의 머리칼 위로 입술을 내렸다.
“두 번은 안 돼. 내 거 나눠 먹는 취미는 없으니까.”
붉은 입술이 들썩이며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가까이 붙은 것치고는 큰 목소리였다. 덕분에 에스퍼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사헌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형은 어휘 선택을 좀…….”
재영은 귓가에 진득하게 엉겨 붙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사헌이 그런 재영의 머리를 흩트려 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이건 내 몫인 걸로 하지. 김재영을 살린 건 나를 살린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서훈은 사헌의 호의를 그냥 받아들이기 싫은 눈치였다. 길드의 경제를 위해 크리처 시체까지 뒤지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이고! 자꾸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만 살피던 문용이 못 참겠다는 듯 서훈을 뒤로 밀쳤다. 에스퍼인지라 평범한 인간인 문용에게 밀릴 리 없을 텐데 서훈은 얌전히 물러났다.
“정리 끝났으면 움직이죠?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 함께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한 미소를 지은 재효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큰소리를 내는 것도 아닌데 그의 한마디로 사위가 조용해졌다. 언제나 소란의 중심에 있지만,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헌의 최측근이라 할 만했다.
“대장 크리처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사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피부가 따끔거렸다. 던전이 몸을 부풀릴 때 느꼈던 것과 같았다.
“왜? 무서워?”
전투를 앞두고 어떻게 그런 여유가 생기는지, 사헌이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물었다. 재영은 자신이 저도 모르는 새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혹시 크리처가 유독 물질을 뿜는 종류예요?”
“아니. 왜 어디가 안 좋아?”
어떻게 건드릴까 고민하던 사헌이 재영의 말을 듣고 금세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재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 느낌은 곧 사라졌다.
“아픈 건 아니니까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요.”
그냥 넘기기엔 영 찝찝했지만, 지금은 사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영은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못하는 사헌의 등을 떠밀었다.
“작은 크리처를 삼켜 양분으로 삼는 놈입니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커지고, 또 강해집니다. 그래서 세 팀으로 나눌 겁니다.”
대장 크리처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인 만큼 브리핑은 짧았다. 첫 번째는 가이드를 비롯해 센터 직원 등 비전투 인원을 호위하는 팀. 두 번째는 대장 크리처의 힘이 될 잡몹을 처리하는 팀. 세 번째는 당연히 대장 크리처를 상대할 팀이다.
“서, 서훈 에스퍼와 함께 대장 크리처를 상대하신다고요?”
수첩까지 꺼내 들고 열심히 듣던 문용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렇다고 해도 말씀드린 보상과 차이는 없습니다만.”
사헌이 들뜬 마음에 딱 좋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른 거 다 안 받아도 진사헌 에스퍼님과 합을 맞추는 것만 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문용의 눈빛에서 감동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헐떡이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걸 예상한 사헌이 서훈을 향해 말했다.
“대장이 똘마니들을 삼키지 않게 방해해야 합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문용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외쳤다. 슬쩍 그를 본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그쪽이 서훈 에스퍼인 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여 문용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안재효 뒤에 숨어 있어.”
서훈을 볼 때와는 다른 다정한 눈빛을 한 사헌이 재영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무리의 앞으로 가는 걸음이 여느 때와 달리 다급해 보였다.
“재영아, 이리 와.”
사헌이 멀어지자 윤서가 기다렸다는 듯 재영을 향해 손짓했다.
“형!”
재영은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윤서의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재영을 힐끗거리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윤서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안녕하세요! 김재영이라고 합니다. 사헌이 형 전담가이드예요.”
재영은 저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에게 살갑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헌을 가이딩하겠다고 설쳤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기계나 약물에 의존하면서 다른 가이드들을 뿌리치던 진사헌이었으니까 더더욱 그럴 테다.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으니까 잘 부탁드려요!”
“자주? 센터에 들어오려고?”
생글생글 웃으며 내뱉는 말에 윤서가 놀라서 되물었다.
“아니요. 앞으로 사헌이 형이 출동할 때 동행하려고요.”
윤서의 말에 대답하느라 고개를 돌렸는데 볼 쪽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매서운 눈빛을 한 낯익은 가이드가 보였다.
‘안의경 가이드랬나.’
사헌이 정신을 잃었을 때 가이딩을 하려던 사람이다. 재영은 갑자기 막아서서 그를 곤란하게 했던 일을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의경은 재영과 눈이 마주치자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려 딴 곳으로 갔다. 잠깐 마주친 눈동자에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해서 재영을 얼떨떨하게 했다.
“앞으로 저런 건 수없이 당하게 될 걸.”
두 사람의 대치 아닌 대치를 지켜본 윤서가 재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달래듯 말했다. 재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시고 쓴 과일이라도 탐내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거든. 어쨌든 겉은 먹음직스럽잖아.”
윤서가 눈으로 사헌을 가리켰다.
“안의경 가이드는 특히 진사헌 에스퍼와 매칭률이 높았으니까. 언젠가는 그 곁이 자기 자리가 될 줄 알았을 거야.”
윤서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재영을 돌아보며 이해하라는 듯 웃었다.
“약물과 기계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줄 알았거든. 너라는 존재를 몰랐다면 계속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갑자기 나타난 재영에게 자리를 뺏겨 원망하고 있다는 것 같다. 재영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쩐지 피곤한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땅을 밟기가 무섭게 개만 한 크기의 쥐 옆으로 작은 쥐 떼가 몰려들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대장 크리처가 손을 휘둘러 잡히는 대로 제 입 안에 욱여넣었다.
“윽, 징그러워.”
소리를 낸 사람을 향해 크리처의 목이 휙 돌아갔다. 그리고 피처럼 붉은 눈으로 노려봤다.
“헉.”
섬뜩함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살기 어린 눈이 저에게 향할까 봐 입술을 꽉 물어 소리를 참았다.
“서훈 에스퍼. 시작해요.”
서훈이 대꾸 없이 팔을 뻗었다. 대장 크리처를 향해 몰려가던 작은 쥐들이 실에 발이 묶인 것처럼 뒤로 끌려갔다.
대장이 다시 끌고 가 양분으로 삼기 전에 벽이 세워졌다. 구역을 나눈 에스퍼들이 갈 곳 잃은 크리처를 공격했다. 힘이 소진된 사람은 가이드에게로 와 간단한 조치를 취하고 다시 돌아갔다.
‘형은 괜찮은 건가?’
재영은 불안한 눈으로 사헌을 쫓았다. 이 던전에 있는 에스퍼 전원이 가이딩을 받고 돌아갔는데, 사헌만은 대장 크리처 앞에서 돌아서질 못했다.
크리처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짧은 순간에도 재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가 위로 치솟았다가를 반복했다.
사헌이 크리처의 공격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모래 범벅이 된 뺨이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갈수록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아졌다. 사헌이 지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까이 갈 수 있으면 방사 가이드라도 할 텐데…….”
재영은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가만. 방사 가이드는 닿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랑 길드가 크리처와 대치할 때도 떨어져 있는 서훈에게 방사 가이드를 했었다. 거리만 조금 더 멀어졌을 뿐.
‘할 수 있어.’
재영은 결연한 눈빛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재영은 먼저 사헌에게 뻗어지도록 경사진 길을 만들었다. 이후로도 가이딩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 허투루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하고, 있더라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깊게 숨을 몰아쉰 재영은 먼저 깔아 둔 미끄럼틀을 따라 기운을 쏟아 냈다. 다져진 길을 따라 흘러간 기운은 그대로 사헌을 적셨다.
“됐다!”
재영은 작은 목소리로 환호를 내뱉었다. 동시에 사헌이 이쪽을 돌아봤다. 살짝 놀란 듯한 눈이 생소했다.
기운을 움직여 사헌의 내부를 어루만진 재영은 보란 듯 웃었다. 뾰족하게 치솟은 에너지의 끝이 뭉툭해졌다. 이제 완전히 재영이 한 일이라는 걸 알아채고, 사헌의 입꼬리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때, 대장 크리처의 가늘고 긴 꼬리가 사헌의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형! 앞으…….”
재영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헌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크리처의 꼬리를 잡아챈 사헌이 그것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숨도 못 쉬고 지켜보던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전투 중인 사헌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어째 진사헌 에스퍼가 지치는 것 같지가 않은데?”
“심지어 평소보다 쌩쌩해.”
근처의 가이드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면서 재영을 힐끔거렸다.
“아까 가이딩을 했다죠?”
재영과 눈이 마주친 가이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덕분에 어떤 식으로 사헌을 가이딩했는지 떠올랐다. 재영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라면 근처에 오는 것도 질색하던 분인데 어떻게 한 거예요?”
동글동글한 인상의 가이드가 호기심과 억울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사헌에게 가이딩을 하려다가 거절당한 피해자인 게 분명했다.
“그냥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라 편했나 봐요.”
그러자 근처 가이드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야유했다. 재영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사헌에게로 눈을 돌렸다. 대답하느라 가이딩이 살짝 삐끗했다.
“매칭률이 높아서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돼요? 매칭률 높은 사람이 당신뿐인 줄 알아요?”
의경이 코웃음을 치며 대화에 끼었다. 그 높은 매칭률 때문에 사헌의 페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사람이니 누구보다 실망감이 클 수도 있다.
“아, 맞다. 매칭률이 어느 정도라고 했지?”
윤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매칭률이라면 의경도 깨끗이 마음을 비울 수 있을 테니.
“97.6이요.”
재영은 가이딩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짧게 대꾸했다. 별생각 없이 물어본 윤서까지, 재영의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은 전부 경악으로 물들었다.
“……와, 그건 진짜 뿌리치기 힘들었겠네요.”
동글동글한 인상의 가이드가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나 중얼거렸다. 사헌이 재영을 받아들일 만했다고 납득하는 반응들을 보니 차라리 더 일찍 매칭률부터 밝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에 멈춘 재영은 가이딩을 재개하려고 자세를 고쳤다.
“김재영.”
그때 지친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이드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훈이었다. 대장 크리처가 잡몹들을 삼켜 힘을 쌓지 못하게 견제하느라 그도 힘을 꽤 소모한 모양이다.
“지금 사헌이 형 가이딩도 하고 있어서 너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기대하는 듯한 눈빛에도 재영은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까 들었잖아.”
재영은 사헌의 경고를 되새겼다. 코앞에서 한 말이니 A급 에스퍼인 서훈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계약 기간동안 다른 사람을 가이딩하는 일은 없을 거야.”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내뱉고 시선을 돌리니 사헌이 서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영은 별일 없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특수한 상황인데도?”
원래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가 이런 것인지, 서훈도 꽤나 끈질겼다. 재영은 난감함에 미간을 좁혔다.
“다른 분께 부탁드리기 어려우면 내가 대신 말씀드려 볼까?”
계속되는 거절에 서훈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가이딩해 드려도 될까요?”
아닌 척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의경이 서훈에게 다가섰다. 사헌은 더 어쩔 수 없게 됐고, 서훈 또한 A급 에스퍼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에스퍼이니 탐이 날 만도 했다. 훈이 미련이 남은 눈으로 스치듯 재영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저한테 가이딩받고 싫다는 분은 없었거든요. 서훈 에스퍼도 만족하실 거예요.”
1등 판매원처럼 의경의 혀는 매끄러웠다. 가이딩을 위해 서훈을 한쪽으로 데려가는 의경을 보며 윤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진사헌 에스퍼를 가이딩하고 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 방사 가이딩이요.”
훈을 보내고 나서 다시 가이딩을 하려다가 윤서의 물음에 그럴 수 없게 됐다. 재영은 눈에서 힘을 풀고 윤서를 쳐다봤다.
“여기서 저기까지 방사 가이딩을 한다고?”
윤서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재영처럼 먼 거리를 가이딩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안 해 봐서 그렇지 다들 할 수 있을 걸요?”
그 말에 가이드들이 방사 가이딩을 시도했다. 윤서가 가이딩을 할 때처럼 다른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부분이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가이드를 지키는 에스퍼들에게 흡수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연습은 다음에 해요. 지금은 조금이라도 아껴야하니까…….”
재영은 허공에 버려지는 기운들이 많이 보여서 안절부절못했다. 몇몇 가이드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자기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하지만 의경은 달랐다. 다 들리게 쏘아붙인 그가 방사 가이딩을 시도했다.
“역시!”
의경이 곧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근처에서 가이딩을 할 때와는 달리 그의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재영은 의경의 기운을 느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의경의 힘이 하랑 길드 소속 에스퍼 해영의 어깨에 닿았다. 닿긴 닿았는데 안개처럼 흩어진 모양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인데.’
재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해영의 근방에 있는 작은 크리처들이 동시에 한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타닥타닥.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린 크리처가 네 발로 뛰기 시작했다. 재영은 무리 지어 달리는 크리처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방사 가이딩을 하겠다고 여념이 없는 의경이 있었다.
“위험해요!”
재영은 본능적으로 외치며 의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 의경이 떠밀려서 풀썩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짓……!”
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경이 서 있던 곳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에스퍼들이 있었다.
“김재영!”
너머에서 사헌의 부름이 들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에스퍼들에게 가려져서 재영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형! 저 괜찮아요!”
재영은 사헌이 안심할 수 있게 큰소리로 외쳤다. 대장을 상대하고 있을 사헌의 신경이 분산되면 좋을 게 없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에요!”
그리고 의경이 저를 감싼 재영의 몸을 밀었다. 떠밀려져 엉덩방아를 찧은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의경은 몸에 붙은 모래를 털어 내느라 바빴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닌가요?”
“뭐라고요?”
되묻는 목소리에도 짜증이 가득했다. 재영이라고 도와주고도 싫은 소리를 듣는 게 좋을 리 없다.
“저 아니었으면 그쪽은 저 살인 크리처들한테 먹혔을지도 몰라요.”
재영은 바닥에 수두룩하게 흩뿌려진 크리처의 사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서 있던 위치라는 걸 깨달은 의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쪽이 아니더라도 에스퍼들이 지켜 줬을 거예요. 쓸데없이 나서서 다칠 뻔했잖아요.”
이어지는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무례하고 뻔뻔하다. 재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차라리 신경 끄는 게 낫다 싶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공격당하면 물어뜯기는 건 저 새끼나 너나 마찬가지야.”
돌아서자마자 사헌이 재영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걱정했다는 말을 뭐 그렇게 무섭게 하세요?”
재영은 웃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며 사헌의 눈치를 봤다.
“대장, 대장! 더는 무리입니다!”
그때 땅개가 울 듯이 사헌을 불렀다. 땅이 모래 폭풍처럼 대장 크리처를 아래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멀쩡한 땅을 잡고 버티고 있어서 힘든 모양이다.
“끝내지도 않고 온 거예요?”
재영은 다그치듯 물었다. 사헌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네가 신경 쓰이게 하잖아.”
“윤서 형 뒤에 숨어 있을게요. 진짜 약속.”
재영은 사헌의 새끼손가락에 손가락까지 걸고 흔들었다. 이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헌이 더 끌지 않고 대장 크리처에게 돌아갔다. 재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스퍼들 주변에서 벗어나지도 않더니 갑자기 왜 이쪽으로 방향을 튼 거지?”
크리처들의 이탈을 언급한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온 재영의 귀에 에스퍼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도 걸리는 게 있었다.
‘정확히 그 사람을 보고 있었어.’
무엇에 반응한 것일까. 왜 하필 그 사람이었을까.
“몰라. 하마터면 가이드 하나 잃을 뻔했다.”
에스퍼의 촉촉해진 눈가를 보니 몸을 던져 의경을 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라 똑같이 행동했을 테지만.
그러다가 문득 안의경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이드’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
‘가이딩?’
그때 방사 가이드를 시도한 의경의 기운은 해영을 넘어 주변에 대치하고 있던 크리처들에게도 뿌려졌다.
‘가이딩이 크리처를 자극했다고?’
재영은 의경이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고민했다. 제 추측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방사 가이딩을 하게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말이라도 해 볼 건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놀라서인지 의경은 자신과 친한 가이드의 옆에 앉아 숨만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터질 듯한 환호성이 터졌다. 작은 구 안에 정신을 잃은 대장 크리처가 뻗어 있었다.
‘죽이지 않은 건가?’
아마 죽이지 않으려고 해서 시간이 더 걸린 듯했다. 문득 연구소 직원 중에는 사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던 윤서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가 열광하고 있을 때, 재영의 손에 적당히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몸속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꾸물거리며 흘러갔다. 고개를 돌리자 땀과 모래로 엉망이 된 얼굴의 사헌이 있었다.
사헌을 올려다보던 재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던전이 사라졌어요.”
사헌의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뻥 뚫린 하늘은 유난히 맑아 보였다. 갑작스럽게 커져 사람들을 삼킨 던전은 없고 휑한 공터에 그들만이 남아 있었다.
“분명 재생 던전이었는데 이상하지 말입니다.”
사헌의 옆으로 다가온 땅개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리셋 던전이라면 던전의 형태가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 변화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때 저 먼 곳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몰려왔다.
재영은 소란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양복을 입은 무리가 던전에서 나온 사람들을 향해 거의 돌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누구야?”
“센터 사람들은 아닌데…….”
온갖 추측으로 시끄러워졌다. 더 이상하다고 여기는 건 그 무리 너머에 제복 경찰로 이루어진 바리케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선 바깥으로는 어떻게든 하나 건져 보겠다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내가 가서 확인해 볼게.”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재효가 먼저 나섰다. 그가 나선다는 데 이의를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재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던전 안에서 못해도 족히 몇 시간은 지났을 텐데,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에서 겨우 20분 지나 있는 걸 확인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많이도 모였네요.”
사헌이 재영의 앞을 막아서며 그가 입고 있는 집업의 후드에 손을 댔다.
“리셋 던전은 보통 클리어 시간에 맞춰 오는데…….”
윤서가 재영의 말에 대꾸하면서 사헌을 힐끔거렸다. 그는 후드를 씌워 재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었다.
“던전이 비이상적으로 커졌다는 게 벌써 다 퍼진 모양이에요.”
윤서의 옆에 있던 가이드 하나가 뉴스 기사를 살피며 질린 듯 말했다. 이상 현상의 원인을 추측하는 말부터 멸망설까지 변이된 던전의 소식이 뉴스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스퍼 안재효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안재효 에스퍼님.”
재효가 먼저 다가가 정중한 인사를 건네자 선두의 오른쪽 뒤에 선 사람이 허리를 굽신대며 응대했다. 그리고 명함 한 장을 내밀었는데, 그것을 살핀 재효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경찰이나 군대, 뭐 그런 쪽인가?”
재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하지만 이내 그쪽이었으면 양복 대신 제복을 입을 거고, 그게 신분 증명이니 명함을 내밀 필요가 없는 것을 깨닫고 더 깊은 의문에 빠져들었다.
“에스퍼님? 언제부터 에스퍼가 계급장이 된 거야?”
가장 앞장서서 달려오던 뚱뚱한 남자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재영은 눈을 들어 사헌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상한 티는 나지 않았다.
“나래시청 총무과장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어흠, 이 분께서는 나래시 학성길 의원님이십니다.”
명함을 건넨 과장이라는 남자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고는 재효에게 옆 사람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의아함만 더 키울 뿐이었다.
“아…….”
재효마저 순간 말을 잃고 뭐라고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사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재효와 의원 무리에게 다가갔다.
“여기 다솜시의 의원님도 아니면서 여기까진 어쩐 일로 행차하셨을까.”
사헌이 삐뚜름히 웃으며 말을 내뱉자 과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다 하는 공주님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사헌을 말려 주길 원하는지 과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어느 쪽이든 연관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재영은 그저 난처한 얼굴로 웃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설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곧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나래시청 과장이 사헌을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 부지의 소유주십니다.”
“아아.”
사헌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학성길 의원이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땅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겐가! 설명을 들어야겠네.”
어지간히도 노했는지 말을 내뱉는 입술이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던전이 사라진 게 그렇게 큰일인가.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앞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리 없으니까…….’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곧 던전 주변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글쎄요. 아무리 땅주인이라고 해도 던전에 대해 그쪽 분께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장에 있는 에스퍼나 센터의 말단 직원들에게는 개인의 생각을 대중에 공개할 자격이 없었다.
“상관없는 사람은 내보내요.”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사헌이 말을 툭 내뱉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던전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들이 의원 일행에게 다가갔다.
“현장을 보존해야 하니까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아야겠다니까!”
정중한 축객령에도 학성길 의원이 고집스럽게 굴었다. 경비원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재영은 안타까움에 눈꼬리를 내렸다. 힘이 없는 하급 에스퍼인지라 이쪽도, 저쪽도 어려울 것이다.
“정말 미친 듯이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그 분위기를 읽어 내지 못할 리 없는 사헌이 느른하게 뜬 눈으로 의원을 돌아봤다. 성가시다는 듯 그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무. 무슨……! 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막 나가는 거야, 응?”
의원이 차마 사헌을 가리키지는 못하고,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댔다.
“알아야 합니까?”
“당연하지! 내가……!”
“그럼 딱 보고 알 수 있게 유명하셨어야지.”
입술을 비튼 사헌이 거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구겨진 인상이 평소보다 까칠해 보였다.
“뭐 빠지게 날뛰느라 힘들었으니까 피곤하게 굴지 말고 가시란 말입니다.”
재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의원에게 대들어서 사헌이 어떻게 잘못될까 걱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전투를 막 끝낸 그의 몸상태가 걱정된 것이지. 가이드와 부상당한 에스퍼까지 신경 써 가면서 전투를 벌이니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모양이다. 가이딩이 에너지를 채워 주는 행위라지만, 지친 몸과 정신까지 말짱해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S급 에스퍼라도 의원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줄 몰랐는지 학성길이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너, 너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S급 에스퍼라고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학성길 의원이 침까지 튀겨가며 노성을 토했다.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사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냐오냐하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불쾌감이 일었다.
마침내 사헌의 얼굴에서는 한자락 비소마저 사라졌다. 잠시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내 목이 잘리는 게 빠를까, 당신 목이 잘리는 게 빠를까.”
사헌이 머리를 기울이며 내뱉었다. 아예 높임말까지 집어치워 버렸다. 심기가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모양이다.
“헉!”
섬뜩한 눈빛을 마주한 의원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목을 감쌌다. 어쩌면 물리적으로 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있는 걸 떠올렸을 것이다.
“무, 무슨…….”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파랗게 질려서는 파들파들 떨었다.
“아유, 의원니임!”
그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굳은 분위기를 갈랐다.
“어떻게 이런 데까지 다 행차를 해 주시고……!”
인파를 뚫고 나온 건 안의경 가이드였다. 학성길 의원과는 따로 친분이 있는지 살갑게 다가가 팔을 끌어안기까지 했다. 혼자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던 의원의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오랜만에 봬서 반가운데 어디 가서 이야기라도 좀 해요.”
의경이 부드럽게 던전 바깥쪽으로 끌고 가자 이번에는 학성길 의원도 별 반항 없이 따라갔다. 아마 내심 자신을 사헌의 앞에서 치워 주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저 가이딩 많이 해서 힘든데 몸보신시켜 주실 거죠?”
“다솜 호텔로 가지.”
두 사람은 사이좋게 서로에게 기대 멀어졌다. 사헌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등을 훑고는 돌아섰다.
“연구소장님께 빠르게 회의 잡아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네, 네! 알겠습니다!”
넋 나간 표정으로 제게 다가오는 사헌을 쳐다보던 직원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이 재영의 손을 당겼다. 어김없이 끌려간 재영은 그의 걸음에 맞춰 다리를 넓혔다.
“형, 괜찮아요?”
“전혀. 모자 똑바로 써.”
사헌이 빠르게 걷느라 흘러내린 재영의 모자를 다시 추어올렸다. 재영은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 눈동자를 발견한 사헌이 후드 끝을 만지작거렸다. 느릿해진 움직임에 의아함이 들려는 때였다.
“오늘은 같이 씻을까?”
달콤한 목소리가 재영의 귓가에 맴돌았다. 재영은 넋을 잃고 사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재영의 울대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 위로 솟은 사헌의 입꼬리가 보였다. 재영은 목이 졸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가이딩은 충분하잖아요.”
재영은 맞댄 이마를 떼고, 콩 소리가 나게 다시 박았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헌이 허리를 들었다.
“안 통하네.”
차로 가려는 듯 방향을 튼 사헌을 보며 재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냥 장난으로 떠보려는 행동일 텐데 눈치 없이 뛰는 제 심장이 야속하다.
“집으로 보내 줄게.”
그때 재효가 잰걸음으로 사헌의 뒤를 쫓아왔다. 이번 전투에서는 힘을 쓰지 않아서 비교적 쌩쌩해 보였다.
“잠깐만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헌을 보다가 재영이 외쳤다. 재효와 사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형하고 윤서 형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재영의 말에 윤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집으로 가.”
사헌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윤서까지 네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 * *
눈을 감았다가 뜨니 바로 집, 거실이었다.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역시 순간이동 능력은 너무 편리한 것 같다.
“둘이 살기엔 너무 넓은 거 아니야?”
먼저 여유를 찾은 윤서가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렸다.
“좀 그렇긴 한데 건물 내에서 전부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재영도 갑자기 넓어진 집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일단 적응하고 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우리도 여기로 할까요?”
부러워하는 윤서를 바라보던 재효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우리요?”
“계약하면 같이 사는 게 아무래도 좋으니까.”
재효를 돌아본 윤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재영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이웃되는 거예요?”
“같이 운동 다니고 그러면 심심하지는 않겠다.”
설렘에 들뜬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사헌이 재영의 팔을 당겼다. 재영은 사헌의 옆자리에 앉혀졌다. 허벅지가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넓히려고 했다. 하지만 사헌이 허리를 감싼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얘기해.”
재영은 단단한 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멈췄다. 애초에 사헌이 불편할까 봐 피하려고 했던 거니까, 그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벗어날 필요가 없다.
세 사람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재영의 입술을 향했다. 재영은 민망함에 손바닥으로 볼을 문질렀다.
“별것 아닌데…….”
시선이 쏠리자 괜히 뜸을 들여 기대감을 키웠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더 머뭇거려 봐야 좋을 게 없다. 재영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보스존에 갔을 때요. 피부가 따끔거리는 걸 느꼈어요.”
사헌이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금방 입을 뗐다.
“유독성 크리처냐고 물었을 때?”
“네.”
재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스치듯 한 말을 사헌이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든 게 처음이 아니었더라고요.”
그 말에 사헌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듯 눈을 부라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화들짝 놀란 재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라윤이, 그러니까 달무리시 던전에서 고라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대장 크리처를 봤을 때요. 그때도 잠깐 그랬어요, 아주 잠깐.”
재영은 눈동자를 굴리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전기 같은 거 있잖아요. 잠깐 따끔하고 마는 거. 그런 거여서 별로 신경이 안 쓰였나 봐요.”
사실 정전기보다야 조금 더 아팠고, 따가운 부위도 넓었지만. 과도한 관심을 물리치려는 노력이 통했는지 형형한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재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사헌을 애써 무시하며 윤서를 향해 물었다.
“혹시 형도 느꼈어요?”
“안 그래도 센터에 보고 올리려고 했어.”
윤서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상부에 보고까지 하려고 했다면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재영은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이전에 다른 던전에서 느꼈던 적은?”
사헌이 윤서를 향해 물었다.
“저는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다른 사람도 같은 일을 겪은 적 있는지 확인할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재효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던전도 변이한 형태였지.”
사헌의 말에 재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크리처가 제 영역을 벗어나서 영향력을 끼쳤으니까.”
재효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동준이 받은 편지에 대한 이야기 같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따끔한 기운이 던전의 변화로 발생한 이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헌이 재영을 돌아보며 묻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아마도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읽은 듯했다. 머뭇거리던 재영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아까 말이에요. 크리처가 가이딩에 반응하는 것 같았어요.”
말을 마친 재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면면을 훑었다. 의아해하는 재효, 황당하다는 눈빛의 윤서. 표정에 변화가 없는 사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영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저……, 다른 사람의 가이딩이 보여요. 아니,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윤서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그는 다른 사람의 기운을 느껴 보지 못한 것 같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윤서 너는 그런 적 없어?”
“전혀.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건 없어. 혹시 착각한 거 아니야?”
윤서가 재영을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이면 모를까. 시간차를 두고 몇 번이나 느꼈다. 게다가 윤서만이 아니라 안의경 가이드나 다른 가이드한테서도 느껴졌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까처럼 어디 아프거나 한 건 아니지?”
윤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고맙게도 재영이 말을 지어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은 모양이다.
“S급만 있는 능력일 수도 있지.”
무관심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반응이 없던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툭 내뱉었다. 시끌벅적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을 끈 것처럼 갑작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비밀 아닌 비밀이 탄로 난 터라 재영은 잠깐 동안 귀가 들은 것을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S급이라고?”
언제나 침착하던 재효가 드물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재영을 쳐다봤다. 숨넘어갈 것 같은 물음에 현실로 돌아온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결과는 못 들었었구나.”
평온을 되찾은 재효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짜 S급이라고?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없었잖아!”
시간차 공격처럼 이번에는 윤서가 테이블을 탕, 치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재영에게 달려들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재영은 놀라서 사헌의 허리에 매달렸다.
“한 번만 더 애 놀라게 하면 내쫓을 거야.”
사헌이 바람을 일으켜 윤서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윤서를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저 괜찮아요.”
재영은 사헌의 손을 끌어다가 제 허벅지 위에 모아 놨다. 꼭 손이 있어야만 능력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은 사헌이 윤서를 압박하는 기운을 거뒀다.
“하지만 이게 S급 가이드에게만 있는 능력이라도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나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라도 외국에는 S급이 몇 있잖아요.”
이어진 말을 들은 윤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충분히 모를 수 있지. 가이드는 커뮤니티 같은 게 없으니까.”
불을 부르고, 바람을 다루는 등 다양한 능력을 지닌 에스퍼와는 다르게 가이드는 소모된 그들의 에너지를 채우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아니, 모두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에스퍼가 아래 등급의 에너지를 감지하는 거랑 비슷한 원리인가.”
“가이드는 모든 등급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지만.”
윤서와 재효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재효가 사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S급 중에 친한 사람 있지?”
사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재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게 친한 가이드가 있다는 것도, 친하다는 걸 사헌이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도 의외였다.
“안 그래도 곧 캐나다 출장 있으니까 하루 일찍 가서 만나면 되겠네.”
직접 만나라는 말에도 사헌은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볼게.”
이야기가 끝나는 기미가 보이자 재효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독 힘든 전투를 벌인 사헌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재영이도 오늘 고생 많이 했는데 푹 쉬어.”
“안 그래도 긴장을 너무 해서 그런지 어깨가 뻐근한 것 같아요.”
재효의 상냥한 토닥임에 재영은 기다렸다는 듯 우는 소리를 냈다.
“형들은 어떻게 계속 이런 일을 하셨어요? 진짜 존경합니다.”
재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럼 쉬어.”
다정한 미소와 함께 재효와 윤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번에 프랑스 갈 때 저도 같이 가는 거죠?”
재영은 씻을 준비를 하는 사헌의 뒤를 쫓아다니며 눈을 반짝였다.
“여행이 그렇게 가고 싶었어?”
갈아입을 속옷을 손에 든 사헌이 재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들뜬 재영은 두 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형하고 친하다는 가이드가 궁금해요!”
그냥 아는 것도 아니고, 무려 친한 사람이다. 그것도 사람에게는 가이딩을 받지 않는다는 사헌의 친한 ‘가이드’. 사헌이 별 이상한 이유도 다 있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물론 여행도 가고 싶죠.”
재영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얼른 덧붙였다. 국내 여행은 가족끼리 몇 번 갔지만, 해외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재영이 어릴 적에는 부모님 일정 때문에 국내 여행이 고작이었고, 조금 커서는 형, 누나들마저 바빠진 탓에 해외로 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얼른 씻고 쉬기나 해.”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지으며 거실 화장실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가이딩은요?”
“그건 됐어.”
탁, 소리를 내며 욕실 문이 닫히자 재영은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그때 손안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존재를 드러냈다.
“진짜 피곤하긴 했나 보네.”
재영은 목을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평소엔 중독일 정도로 확인하는 폰인데, 어떻게 던전을 나와 한 번도 안 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재영은 스마트폰의 잠금을 열자마자 보이는 집착적인 메시지에 경악했다.
[엄마] 김재영김재영김재영김재영
[해또] 야김재영왜말이없냐
상단에 보기만해도 시끄러운 문자들이 떠올랐다. 현재 진행형이라 계속 바뀐다는 게 더 무서운 점이다. 재영은 질린 얼굴로 단체 대화방을 열었다. 쭉 올려보자 대화의 시작점인 링크가 보였다.
<6년간의 수절 끝! ‘공주님’의 가이드 누구?>
“뭐야, 이게?”
재영은 제목만 조금씩 다르고 다 같은 내용의 기사가 이어지는 것을 보고 질색했다. 하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헌의 가이드라고 나섰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친구들의 말에 대꾸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재영은 손바닥으로 홀쭉한 배를 문질렀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허한 느낌이 들었다. 제 안에 있는 기운을 사헌에게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럴 만했다. 속으로 중얼거린 재영은 스마트폰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안방의 욕실로 향했다.
* * *
어쩌면 당연하게도 다음날까지 진사헌의 가이드가 대체 누구인지 추측하는 기사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가끔 <리셋 던전이 사라지다>와 같은 제대로 된 기사가 있기는 했으나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인데 학교를 가겠다고?”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엎드린 사헌이 재영을 향해 물었다.
“제 신상이 드러난 건 아니잖아요.”
재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헌의 가이드라는 정체가 드러난 순간, 그곳에는 에스퍼, 센터 직원들, 가이드, 심지어 하랑 길드원도 있었는데, 어느 기사에도 재영의 이름이나 얼굴은 실려 있지 않았다.
“바로 대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재영은 애교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헌이 손을 써 준 덕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불편하다고 도망가면 안 되니까.”
사헌이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듯 내뱉었다. 재영은 그것 또한 사헌의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며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학교 가면 그 녀석도 있을 거 아니야.”
사헌이 웬일로 현관까지 따라붙으며 질척거렸다. ‘그 녀석’이라는 건 서훈이다. 방사 가이드 한 번 해 줬다가 여자친구 두고 다른 사람이랑 썸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잘할게요. 완전 철벽남.”
사헌을 돌아본 재영은 눈꼬리를 올려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형은 오늘 회의 간다고 하셨죠?”
“그래.”
“저녁은 집에 와서 드세요?”
“못 올 것 같으면 연락할게.”
사헌의 대꾸에 재영은 환하게 웃었다. 사헌이 알아서 연락하겠다고 말을 하다니 큰 발전이다.
“배고프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네.”
재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헌이 저녁을 먹고 온다고 연락하지 않는 이상 먼저 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녀올게요.”
재영이 현관을 벗어나자 사헌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재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왜 오늘따라 현관까지 따라와서…….”
남겨진 것 같은 사헌의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렸다.
* * *
흐드러지게 피어 캠퍼스를 물들이던 벚나무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생겨났다. 봄이 가고 있다는 신호다. 재영은 얼마 남지 않은 봄의 흔적을 눈에 새기며 경영대 방향으로 걸었다.
“김재영!”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학회장 민주가 어느 때보다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재영은 왔던 길을 뛰어서 되돌아갔다.
“민주 누나! 주말 잘 보내셨어요?”
“어어, 재영아.”
열렬하게 쫓아오던 것에 비해 너무도 싱거운 반응이었다. 재영은 그런 민주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멈춘 발 대신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너 이거 봤어?”
가방에서 찾아낸 스마트폰을 꾹꾹 누르던 민주가 마침내 재영에게 화면을 보여 줬다. 어제저녁부터 지긋지긋하게 날아오던 기사의 제목이 보였다.
“제 친구들도 어제부터 난리더라구요.”
재영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나 공주님 팬이거든.”
“팬이라면 흥분할 만하네요.”
갑자기 긴장감이 돌면서 뒷목이 뻣뻣해졌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사헌의 팬이 보이는 반응이 신경 쓰이는 건 당연했다.
“속상해서 잠도 못 잤어!”
좋아하는 아이돌의 열애설 같은 느낌인가.
재영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자신이 사헌의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되면 민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진사헌 에스퍼가 가이딩을 안 받는 줄은 몰랐잖아.”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민주가 미리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언제나 사헌이 뒤로 빠지고, 센터 소속의 가이드가 다가서는 것이 보였으니까 몰랐을 만도 하다. 재영도 사헌과 계약을 하고 나서야 안 것이다.
“센터도 너무했지. 그렇게 방치하다가 폭주라도 왔으면 어쩔 뻔했어?”
“센터가 말한다고 공주님이 들었을까요?”
“그리고 폭주보다 진사헌 에스퍼가 없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
재영이 지극히 타당한 말로 대꾸했지만, 민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A급 이상 던전 누가 닫아 주겠냐고!”
외침에 주변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이쯤 되자 재영은 민주가 사헌의 팬이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는지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이제라도 가이드 찾았다니까 다행이잖아요.”
“진짜! 어디 계실지 몰라서 사방에 대고 큰절을 했잖아, 내가.”
진짜 참된 팬이 아닐 수 없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때마침 민주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아! 수업 늦겠다. 다음에 또 보자!”
“누나! 넘어져요!”
허망하게 민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재영은 크게 외쳤다. 땅을 짚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힐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 돌아본 민주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 *
‘하루, 이틀로 끝나면 좋겠는데…….’
강의실에 도착한 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를 보고 난리 난 것은 사헌의 팬만이 아니었다. 어딜 가든, 누구든 공주님의 가이드에 대해 떠들어 댔다.
‘형 인기 제대로 실감하네.’
재영은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민태가 맡아 둔 자리로 향했다.
“찹쌀떡, 찹쌀떡.”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민태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재영에게 어깨동무했다.
“오늘 5시에 집합하기로 했다.”
그리고 재영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전해 줬다. 신문에 난 추측성 발언을 하나, 하나 꼬집으며 놀려 대는 친구들 때문에 톡을 전혀 확인하고 있지 않아서 몰랐다.
“근데 갑자기 왜?”
“신문에 난 기념은 해야지.”
주변을 둘러본 민태가 재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신문에 난 거 처음도 아닌데…….”
재영은 가려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민태에게서 떨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전, 계곡물 아래의 던전을 발견한 고등학생으로 잠깐 인터뷰도 했었다. 얼마 전 뽕팸과 함께 간 마지막 여행도 마찬가지.
“그러고 보니까 너 명탐정 코X급 아니냐.”
같은 사실을 떠올렸는지 민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는 곳마다 던전이 발생하고, 휘말리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게. 내 인생 왜 이렇게 됐지?”
“공주님한테 찍힌 죄지.”
돈, 명예 전부 가진 S급 에스퍼의 가이드가 된 게 형벌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이없어할 것이다.
“기사 얘기 안 하면 간다고 해.”
톡으로 쏟아지던 놀림들이 현실에서도 이어진다고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당연하지!”
민태가 밝게 외치며 스마트폰 액정을 켰다. 친구들에게 재영이 오케이 했다는 말을 전하려는 게 분명했다.
“에이, 곧 잊혀지겠지.”
재영은 애써 속 편한 말을 뱉으며 교재를 펼쳤다. 곧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됐다.
* * *
매일 톡을 하면서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뽕팸이 모인 룸에서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약속대로 기사에 대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동준이 처음으로 나간 과팅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상대가 무용과라는 모양이다. 그중 한 여학생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듣던 중 손안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재영은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여 메시지를 확인했다.
[공주님]아직. 밥은?
회의가 끝났냐는 메시지에 대한 답이다. 재영은 저녁 7시가 넘어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나]무슨 회의가 그렇게길어요?
[나]저는먹었어요(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발 구르는 이모티콘)
[나]지금은 술집.
“뭐야? 여친 생긴 건 찹쌀떡 같은데?”
연이어 메시지를 보내는데 흥미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고개를 들어 말을 꺼낸 해운을 쳐다봤다.
“뭐야, 뭐야. 찹쌀떡 제법이네.”
지금만큼은 온 세상 일이 즐겁고, 아름다울 동준이 눈을 찡긋거렸다.
“근데 공주님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님?”
앞서 나가길 좋아하는 친구들은 재영이 연락하는 사람이 여자친구라고 이미 단정 짓고 있었다.
“여자친구 아니거든.”
재영은 픽 웃으며 부정했다. 사헌이 재영의 여자친구라니. 그 말이야말로 들키면 큰일 날 일 아닐까. 그러자 이번에는 저 여유로운 표정 보라며, 솔로인 자신들을 비웃는 거라 원성이었다.
“여자친구 생겨도 사헌이 형은 신경 안 쓸걸.”
그냥 넘길 수 없어 덧붙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그 여자친구가 에스퍼라면 모를까.
“그건 모를 일이다, 너.”
“가이드에 대한 집착은 상상 이상이래. 매칭률이 높을수록 더.”
민태의 말에 동준도 진지하게 덧붙였다.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자연스럽게 서훈에게 보이던 공격적인 눈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역시 제가 가이드이고, 서훈이 에스퍼이기에 보인 반응이 분명했다.
“일반인도 그냥 안 넘길걸? 저번에 그 10학번 선배도…….”
흥분해서 떠들던 민태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입을 틀어막았다.
“10학번 선배? 길성필?”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응했다. 그 징그러운 시선이 쉽게 잊힐 리가 없다. 어느 날부터 주변은 물론 학교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는데 뭔가 사연이 있던 모양이다.
“뭐야? 저번에 말한 그 진상?”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옴?”
민태를 빼고는 모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비밀이랬는데. 내가 말한 거 비밀이다?”
민태가 울먹거리며 친구들을 힐끔거렸다. 사헌의 보복이 무서워서 비밀로 하고 싶기는 한데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티가 났다. 재영은 민태가 여태 비밀로 하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뭔데?”
민태가 몇 번이고 불만을 토로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10학번 길성필 선배가 무슨 짓을 했었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희대의 관종 민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재효 에스퍼 도움까지 얻어서 인적 드문 암자에 가둬 버렸대.”
“그냥 가뒀대? 아무 짓도 안 하고?”
사헌이 작정하고 벌인 일치고는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에 해운이 경악했다. 더욱이 여기 모인 친구들은 미성년자 신분으로 담배에 손을 댔다고 사헌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은 적 있는 사람들이다.
“김재영이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했다던데.”
민태가 재영을 힐끔거렸다. 재영은 살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사헌이 제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어느 정도는 지켜 주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니까.
“가이드 힘이 그 정도냐?”
해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보통 좀 괴롭혔다고 어디 산속에 가두고 그러지는 않지.”
“그 새끼가 추행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폰에도 몰카 증거가 빽빽했대. 그래서 곧 고소 들어갈 거라는데.”
가둔 건 증거 인멸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재영은 사헌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에스퍼 말고 일반인이랑 결혼하는 가이드도 많대.”
재영은 윤서에게 들었던 말을 전하며 친구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그 가이드가 누군가의 전담은 맞고?”
해운이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애초에 전담 계약은 쉽게 하지도 않는다는데. 너 사기당한 거 아님?”
“사기인 걸 알아도 뭐가 달라졌을까?”
재영의 말에 모두 숙연해졌다.
“그리고 원래 동거인끼리 이 정도는 하잖아.”
재영은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부모님께도 약속 장소와 시간 등만 알리고, 만나면 그 사람들에게 집중하기는 한다. 하지만 사헌에게는 틈틈이 연락하게 된다. 아마 언제 어디서 재영이 에스퍼와 만날지 몰라 경계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거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동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보내면 형이 답장을 보내기는 해?”
해운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재영의 일방적인 메시지 공세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공주님]
마침 사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재영은 사헌의 이름이 뜬 스마트폰 액정을 친구들에게 보여 줬다. 화면이 꺼질 때쯤 또 새로운 메시지가 와서 화면에 떠올랐다.
“대박.”
재영은 경악하는 친구들을 보며 웃다가 내용을 확인했다.
[공주님]피부가 따끔한건 던전변화하고 연관된 것 같다
[공주님]B급 이상 가이드만 느낄 수 있는 것같고
결과는 예상했던 바라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어 올라오는 메시지에는 재영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내일쯤 센터와서 정식검사하라는데
[공주님]싫으면말해
* * *
그렇게 수업이 없는 오전 시간, 재영은 센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와.”
재영은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전면에 보이는 창이 전부 유리로 된 것 같은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아서 더 안달 났다.
“무슨 센터 건물이 이렇게 높아요? 엘리베이터 타면 멀미 나겠다.”
“왜? 멀미약이라도 사다 줘?”
사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재영을 곁눈질했다.
“긴장 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여유로워 보이니까 좀 그렇네.”
심술 가득한 사헌의 말에 재영이 그를 눈으로 흘겼다. 직전까지 토할 것 같아서 축 늘어져 있던 걸 봤으면서 잘도 놀린다.
재영은 안전띠를 풀면서 어두운 바깥을 살폈다. 가수들이 음악 방송 출근길에 찍히는 것처럼 수많은 기자가 둘러쌀 거라는 친구들의 말에 살짝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차장에 빽빽하게 세워진 차들 틈으로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자.”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 사헌이 재영에게 모자를 건넸다. 재영은 사헌이 준 모자를 쓰고, 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검은 마스크까지 꼈다.
“어때요?”
재영은 눈을 끔뻑거리며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사헌이 몸을 낮추고 재영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진지한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완벽하게, 수상해 보여.”
사헌이 덩달아 심각해진 재영의 볼을 툭 치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검사실 인원은 최소로 제한했다.”
재영은 사헌을 따라 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그라도 검사실에 가는 길까지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영이 아무런 요구도 없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사헌이 재영의 머리꼭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S급인 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어.”
하지만 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비밀이 많아지면 조마조마할 일도 많아진다는 뜻이다. 지금도 세간의 화제인 진사헌 에스퍼의 가이드가 김재영이라는 비밀 하나만으로도 너무 무거웠다.
“누구 가이드인데 S급 정도는 돼야죠.”
재영은 그럴 리 없지만, 사헌이 제 걱정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더 우쭐한 표정으로 눈썹을 씰룩거렸다. 사헌이 대꾸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재영은 잠시 멋쩍은 얼굴로 멈춰 있다가 조급한 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띵-
엘리베이터는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1층으로 데려다 놓았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쏠리는 시선에 재영은 놀라서 뻣뻣하게 굳었다.
“원래 늘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금세 조잘대며 사헌의 옆에 붙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센터의 직원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센터 직원들이 눈만 보이는 그의 얼굴을 가늠하려고 매서운 눈으로 훑었다.
“뭡니까?”
사헌이 냉랭한 시선으로 직원을 쳐다봤다. 직원이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 네, 그게…….”
“준비가 아직 안 돼서 그러는데 여기서 조금만 대기해 주시겠습니까?”
우물쭈물대는 동료 대신 다른 직원이 입을 열었다. 사헌이 눈을 들어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평소에는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전부 나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는 기자들까지 잔뜩 몰려와 있었다.
“비켜요.”
사헌의 손길에 직원들이 발바닥에 바퀴가 달린 것처럼 아주 쉽게 밀려났다. 그들을 무시하고 걷는 사헌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 어디 가요?”
재영은 당황해서 사헌을 뒤쫓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직원이 보였다.
“그냥 가면 안 되잖아요!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따라 줄 이유 없어.”
재영이 안절부절못하며 옷자락을 당겨도 멈추지 않았다. 타고난 신체의 차이 때문에 거리는 금방 벌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거의 뛰듯이 사헌을 쫓아가던 재영은 어떤 남자의 인사에 발이 묶였다.
“안녕하세요?”
재영은 어리둥절해하다가 밝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고민하던 재영은 금방 그의 정체를 알아냈다.
‘A급 김중연 에스퍼.’
센터에 간다는 소식에 동준이 짚어 준 ‘조심해야 할 인물’ 베스트에 있는 사람이다. 중연은 사헌보다 몸통 자체는 커 보였다. 뚱뚱하다고 해야 하나.
“더운데 꽁꽁 싸매고 오셨네.”
“괜찮아요. 저는 추위를 많이 타거든요.”
재영은 경계하고 있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더 화사하게 웃었다. 건물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대서 여름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옷이 두꺼워졌다.
“그래도 처음 인사 나누는 사이에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이어지는 말에 재영은 움찔했다. 중연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헌을 최대 라이벌로 여기고, 또 그만큼 싫어한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본인뿐인 것 같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중연이 뭐라든 사헌은 미생물체를 보듯 넘겨서 의도치않게 그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재영이 그런 생각을 주워섬기는 동안, 중연이 그의 모자로 손을 뻗었다. 무례한 접촉에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재영도, 남자도 원하는 곳에 손이 닿지 못했다.
“너나 예의 지켜. 내 가이드에게 말 걸어도 된다고 허락했던가?”
중연의 두꺼운 손목을 붙잡은 건 사헌이었다. 어느새 갔던 길을 돌아와 재영에게 뻗으려는 남자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예의?”
중연이 헛웃음을 치며 자신을 붙잡은 사헌의 손을 털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 당겨 봐도 빠지지가 않았다.
“돈 받고 몸 파는 게 뭐 대수라고.”
중연이 분에 차서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내뱉었다. 명백한 비하에 구경하던 가이드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영도 다르지 않았다. 센터에 소속되면 저런 사람에게도 어쩔 수 없이 가이딩을 해 줘야만 하는 것이다.
‘형이 주워 줘서 진짜 다행이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넌. 돈 받고 몸 파는 거 아니고? 목숨까지 거는 거니까 네 쪽이 더 절절한 거 아닌가?”
사헌이 똑같이 남자를 비웃었다. 중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하는 일은 크리처와 맞서 싸워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숭고한……!”
“네 그 숭고한 전투에 필요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데?”
사헌이 심드렁하게 듣기 싫은 목소리를 끊었다. 중연이 위풍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내 몸…….”
“그래?”
하지만 이번에도 끝을 낼 수 없었다. 아집에 찬 말에 사헌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헌의 얼굴을 바라보던 재영은 몸을 떨며 한 발 멀어졌다. 그의 아름다운 미소에서 불길함이 느껴졌다.
“오늘부터 그 어떤 가이드도 이 사람한테 가이딩하면 안 됩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사헌의 시선이 스쳤다. 조용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새끼 말대로 돈에 몸이고, 영혼이고 다 파는 거고.”
사헌의 비아냥거림에 가이드들의 얼굴이 더없이 찌푸려졌다.
“지, 진사헌 에스퍼. 그건…….”
센터 직원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렸다.
‘센터 소속의 가이드는 가이딩을 거부할 수 없는 게 아니었나?’
그 시점, 재영은 순수한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거부에 따른 벌금은 내가 냅니다.”
‘벌금이 있었구나.’
재영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사헌이 말을 이었다. 가이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환호가 터졌다. 중연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가이드들이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사헌을 등에 업고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사헌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그럼 이제 다들 꺼지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열리며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할 짓이 없으면 가서 훈련이나 하든가, 아니면 엎어져 자든가.”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을수록 사헌의 목소리는 춤을 추는 것처럼 자유분방해졌다.
“타고난 등급이 떨어지면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에스퍼, 가이드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건 타고난 등급도 높은 사헌이 단련도 누구보다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이능력을 제한하고 싸워도 누구 하나 그를 이기지 못했다.
“이, 이쪽으로 가시죠.”
상황을 지켜보던 센터 직원이 딱 맞춰 검사실의 준비가 끝났다는 것처럼 사헌을 불렀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그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게 뻔히 보였다.
“얼른 검사하고 집으로 돌아가요.”
재영도 사헌의 팔에 매달리며 직원을 거들었다. 따끈한 체온을 내려다보던 사헌이 아직 잡고 있던 중연의 팔을 내팽개쳤다.
사헌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검사실로 들어온 재영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검사실은 전에 사헌에게 끌려갔던 곳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굳이 찾자면 더 많은 기계와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재영은 입구에서 안내대로 따라가면서 수도 없이 인사를 건넸다. 의사 선생님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잔뜩 있었다. 검사를 하는데 이렇게까지 필요한가 싶을 정도였다.
검사실에 와 본 적 있을 사헌도 가라앉은 눈으로 내부를 훑어봤다. 그러더니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거기 뭐 있어요?”
사헌의 팔에 매달린 재영이 그가 보는 곳을 향해 기웃거렸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는 한눈에도 다른, 높으신 분들처럼 보이는 양복 신사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여기가 동물원도 아니고…….”
사헌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그때 직원이 크게 외쳤다. 재영은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는 사헌의 손을 잡아끌었다.
매칭 테스트는 저번처럼 금방 끝났다. 그냥 의자에 앉혀 모자를 씌울 거면, 대체 무슨 준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했던 건가.’
재영은 사헌이 왜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97.6 퍼센트.”
매칭률을 확인한 직원이 검사실에 있는 사람 전부가 들을 만큼 큰소리로 내뱉었다. 놀랍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눈치였다. 무려 진사헌이 계약으로 묶어 둔 가이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등급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또다시 기다리라는 말에 사헌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건 그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 듯했다.
“등급 결과는 오래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 검사를 했을 때 매칭률만 안 채로 집으로 돌아왔고, 등급에 대한 건 사헌이 따로 연락을 받았었다.
“그러게.”
사헌이 재영의 말에 동조하며 재미있다는 듯 직원들을 쳐다봤다. 결코 긍정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저, 이것 좀 먹어도 되죠? 어제부터 너무 긴장해서 좀 출출하거든요.”
눈치를 살피던 재영은 사이드 테이블에 마련된 쿠키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하죠. 차도 한 잔 드릴까요? 아메리카노랑 녹차 있는데 뭐가 좋아요?”
사헌의 신경을 돌리는 건 직원도 원하는 바였다. 재영의 물음에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아메리카노요. 적당히 식은 걸로 가능할까요? 뜨거운 건 잘 못 마시거든요.”
들어오면서 대충 보기로 이미 내려진 커피가 있었다. 아마 일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마시는 게 아닐까. 재영은 한편으로 짠함을 느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금방 가져 올게요.”
직원이 거의 뛰듯이 커피메이커로 다가갔다. 재영은 순간적으로 허공으로 뻗은 팔을 거뒀다. 이미 배고프다고 말한 터라 서두르지 말라고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오독오독.
검사실 안에는 십수 명이 있었지만 오로지 재영이 쿠키를 짧게 베어 무는 소리만 들렸다.
사헌과 재영을 제외하고는 검사실에 있는 모두의 눈이 결과가 떠오를 모니터에 박혀 있었다. 의미 없이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던 재영은 옆을 돌아봤다.
“형도 하나 드실래요? 이건 별로 안 달아요.”
한눈에 봐도 녹차 맛일 것 같은 녹색 쿠키를 내밀자 사헌이 재영의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아까 재영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막혀서 심통이 난 것 같다.
“밥 먹은 지 꽤 돼서 출출하잖아요.”
“……손에 묻는 거 싫어.”
한 번 더 권유하자 사헌이 뚱한 얼굴로 내뱉었다. 심술쟁이 막내 삼촌이 생긴 기분이다.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쿠키를 사헌의 입술 바로 앞까지 가져다 댔다.
“아, 해요.”
쿠키를 문 사헌의 입꼬리가 기분 좋은 듯 호선을 그렸다.
“먹어 보기를 잘했죠?”
재영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빈손을 거두려고 했다. 그런데 눈을 깔고 그 손을 쳐다보던 사헌이 덥석 붙잡았다. 미간을 모은 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피나잖아.”
의아한 얼굴로 사헌을 바라보던 재영은 아, 하고 낮은 탄식을 흘렸다. 검사 때문에 찌른 손가락 끝에 피가 몽글몽글하게 맺혀있었다.
“아, 죄송해요.”
당황스러움에 낯이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센터 직원을 서둘러 사헌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검사 후에 손을 닦지도 않았다. 제 손에 있는 세균이니 스스로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사헌은 아닐 텐데. 재영은 당장에라도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사헌의 옆에서 몸을 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사헌이 검사 때 찔려 피가 배어 있는 손가락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형. 놔줘야 씻든 말드…….”
재영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사헌이 혀를 내밀고, 피가 맺힌 재영의 손가락 끝에 댄 것이다.
‘난 썩었어.’
재영은 속으로 절망했다. 하얀 손가락을 휘감은 붉은 혀가 더없이 선정적으로 보였다. 사헌이 눈을 들고 뭐라고 했냐는 듯 쳐다봤다.
“손가락에 세균도 많고, 아니, 입 안에 더 많은가?”
눈이 마주치자 재영은 얼굴이 횡설수설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뺨이 뜨거워졌다.
“아, 아무튼 더러워요!”
사헌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을 노려봤다.
“하여튼 무드가 없다니까.”
사헌이 새침하게 말하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더 말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비난이 황당했다.
“저 정도 수치면 몇 등급이라는 거지?”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그때 양복 입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마침내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재영은 입 안에 있는 쿠키를 꿀떡 삼켰다.
“이, 이건 설마…….”
“말도 안 돼. 기계가 고장 난 것 아니야?”
“관리를 너무 안 했나?”
검사실 직원 쪽은 반응이 또 달랐다. 적어도 화면에 떠오른 의미는 아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똑같았지만.
“다시 검사한다고 하면, 진사헌 에스퍼가 허락할까?”
연구원들이 재영을 힐끔거렸다. 벌써 반은 믿고, 반은 아직 기계의 고장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대체 왜 그러는 건가.”
점잖은 척 상황을 지켜보던 관리들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직원들을 재촉했다.
“그, 그것이…….”
“우리가 시간이 남아돌아 이러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얼른 말하게!”
“S, S급입니다!”
양복 입은 사람의 재촉에 직원 중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S급? 우리나라 가이드 등급에도 그런 게 있나?”
“진사헌 에스퍼가 S급이니까 그냥 맞춘 것 아니겠습니까?”
한 명이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그리고 대형 스크린에 차례로 사진을 띄웠다.
“이, 이것이 호주 캐롤라인 카터 가이드의 지표입니다. 이건 태국의 싼디 아고야 가이드의 지표고요.”
두 사람 다 S급 가이드였다. 점으로 보일 만큼 작은 기포가 꽉 들어차 있었다. 혈액 안에 든 기운을 확대시켜 보인 듯했다.
“그러면 저 학생, 아니, 저 분이 정말 S급 가이드란 말인가?”
“그냥 S급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입니다!”
타국 S급 가이드의 자료를 근거로 재영의 등급을 증명한 직원이 흥분하며 외쳤다. 모니터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재영을 쳐다봤다.
“그렇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은가!”
“당장 대통령 비서실 연락해요!”
“여보세요? 나 조동희일세. 강문주 회장 바로 연결해.”
누구는 스마트폰을 꺼냈고, 누구는 당장에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재영은 어수선한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여, 영광입니다.”
그러던 중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내민 손을 저도 모르게 잡았다. 사헌이 기분 나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재영은 제 손이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는 걸 상기했다.
“우리나라 최초 S급 가이드와 악수라니! 이 손 절대 안 씻을 겁니다! 죽을 때 가보로 남길 거예요!”
“네? 대체 뭘 남기시려는…….”
재영은 당황하며 직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직원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씻으셔야 하는데…….”
재영은 상대에게 닿지 못한 말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본 사헌이 입을 뗐다.
“이만하면 동물원 짐승 역할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18살, 에스퍼로 발현한 후 몇 년을 센터의 간판으로 굴려진 사헌이다. 검사실, 아니, 더 나아가 센터 전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수가 없다. 로비에 모여 있는 기자들 하며, 검사실에 모인 양복 입은 사람들까지.
지금도 누군가 열고 나간 문 뒤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재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시선에 익숙하고, 이런 상황을 예상도 했지만, 재영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가자.”
사헌이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제 품 안으로 당겼다. 재영은 그의 가슴께에 몸을 기댔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익숙한 체향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 * *
재영은 저를 두고 진사헌의 가이드, 대한민국 최초의 S급 가이드라고 떠들어 대는 세상에도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친구들과 평소와 다름없는 날을 지내다가 윤서의 연락을 받았다.
[오늘 센터에서 에스퍼들 훈련 있는 날인데, 올래?]
센터 소속 에스퍼들이 원하는 상대와 대련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는 모양이다. 크리처가 아닌 에스퍼끼리의 싸움이라니.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가도 돼요?”
재영은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센터에서 찍은 다큐로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사헌은 없었다. 사람을 상대로 한 그는 또 어떻게 싸울지 궁금했다.
[센터 출입권 받았잖아.]
윤서가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센터 소속의 에스퍼와 페어인 경우, 그를 가이딩할 수 있게 출입권이 주어진다. 거기다 재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S급 가이드’라는 이유로 센터장의 무한한 애정을 받아 사헌 없이도 한 번씩 센터에 초대받고는 했다.
[이런 날 흔치 않으니까 웬만하면 오는 게 좋을 걸. 진사헌 에스퍼가 공개 훈련까지 나오는 경우는 엄청 드물어.]
희귀도 높은 이벤트를 그냥 넘길 게이머는 없다. 지금이 아니면 보기 어렵다는 윤서의 말에 완전히 넘어간 재영은 그와 약속을 잡고 통화를 끝냈다.
“그래서 센터에 간다고?”
통화 내내 재영의 스마트폰에 바짝 붙어 있던 동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개부럽다. 나도 가면 안 됨?”
“가방 속에 숨겨서 들어가 주라.”
재영은 애원하는 친구들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안 돼.”
친구들의 원성 어린 야유가 터진 건 당연했다.
* * *
수업이 다 끝난 뒤에 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사헌의 마지막 대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야!”
윤서가 일부러 이름을 생략하고 재영을 불렀다. 사헌의 가이드가 그와 친하다는 걸 알고 있는 센터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영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갈게요. 죄송해요.”
재영은 저를 탐색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뚫고 윤서의 옆으로 갔다.
“운 좋네. 막 시작했어.”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재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링 위의 사헌을 살폈다.
“지금까지 연승이야.”
“다친 데는 없어요?”
재영의 물음을 듣지 못한 것처럼 윤서에게서는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재영은 직접 사헌을 살피기로 했다. 그런데 사헌의 목덜미와 양쪽 손목에 처음 보는 장신구가 있었다.
“저게 뭐예요?”
분명 사헌의 것은 아니다. 사헌과 드레스룸을 나눠 쓰는 입장에서 그의 액세서리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마력 제어기야.”
“마력 제어기요?”
“아마 저거 하나면 A급이 B급 정도의 힘밖에 못 쓸 걸?”
그런데 사헌의 몸에 달린 제어기는 보이는 곳에만 세 개나 됐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C급이라는 이야기인데 괜찮아요?”
재영은 난간을 붙잡고 일어났다. 사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S급일 때의 사헌은 당연히 걱정할 일이 없지만, 제어기를 하고 있는 건 또 달랐다.
사헌이 바닥을 차서 위로 뛰어올랐다. 거의 동시에 그가 디디고 있던 바닥이 얼어붙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얼어붙은 건 사헌의 발이었을 것이다.
불안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재영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진사헌 에스퍼가 대단한 게 단지 이능력뿐인 줄 알아?”
안절부절못하는 재영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윤서가 눈을 흘겼다.
“아니, 그래도……. 몸이 평소랑 다르니까 적응을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재영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사헌만을 향해 있었다. 마침 사헌의 돌려차기에 맞은 상대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겨우 일어났지만 부딪친 머리가 어지러운 듯 바로 자세를 잡지 못했다.
“누가 걱정된다고?”
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그때 사헌이 재영을 발견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대가 팔을 내질렀다. 바람이 날카롭게 벼려져 사헌을 공격했다.
흉터 하나 없던 뺨에 얇은 실선이 그어졌다. 붉은 액체가 스믈스믈 기어 나와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
재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훈련장을 채웠다. 사헌이 상대의 팔을 잡고 다시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헌이 빈손을 털고 링 아래로 내려왔다.
“괜찮아요?”
재영은 관중석에서 달려서 링 아래에서 사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사헌이 턱을 비스듬히 하고 몸을 낮췄다.
피가 고인 상처가 재영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 재영의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그를 본 사헌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아파.”
사헌이 낮은 목소리로 내뱉자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잘못 들었나. 다들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