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헌이 쉬고 있다가 출동에 응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문자로 오면 차를 타고 나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의 비서나 다름없는 재효가 집으로 찾아와 순간이동 능력으로 모셔 가는 거였다. 대체로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같이 가요.”
센터에서 문자가 온 것을 재영이 먼저 발견한 것이 그날의 발단이었다.
“차에만 가만히 앉아 있을게요.”
사헌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재영은 얼른 말을 붙였다.
“차는 안전 구역에만 있잖아요.”
재영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사헌의 표정을 살폈다.
“……아, 닌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사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기 싫다면서.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
사헌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재영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조금씩 적응하려고요. 형 말대로 일인데 돈은 돈대로 받고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아서…….”
재영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을 바꿨다는 게 민망해서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도 나름 이유가 있다. 재영이 보기에 사헌의 출동은 너무 잦았고, 부상을 남겨 오는 일도 너무 많았다. 같이 던전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이서 상황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헌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불만스러운 빛이 어렸다. 재영은 제 신상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글쎄. 사헌은 재영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사헌의 페어 가이드라고 알았으면 했다. 또 한편으로는 재영이 가이드라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그런 복잡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에스퍼 중에 누가 또 재영의 진가를 알아낸다면…….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는 찹쌀떡이라니. 상상만 해도 눈앞이 새빨개졌다.
‘가이드한테 독점욕이라니.’
5년이 넘도록 에스퍼로 활동하면서 공용이나 프리 가이드에게 독점욕을 보이는 에스퍼를 왕왕 봤다. 사헌은 내심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연인도 아닌 직장 동료에게 그런 감정이라니.
그런데 지금 제가 재영에게 하는 짓이 그것이다. 사헌은 혼란스러운 마음도 모르면서 그저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재영을 노려봤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는 착실하게 움직여 던전 발생지로 향했다.
-목적지 부근입니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서 살아온 재영은 직접 겪었던 그때를 제외하고 던전 발생 구역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해당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은 뉴스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유적지처럼 흔적만 남아 있거나 아무것도 없는 폐허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목적지 알림이 나온 뒤부터 뚝딱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재영은 계속 보고 있던 책자에서 눈을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저분들은 저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재영은 얇은 철근 위에 올라서서 작업하는 인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건물 짓는 거 처음 봐?”
“던전 근처에 짓는 건 처음 보죠. 에스퍼 휴게소 같은 거 만드는 건가?”
“에스퍼 휴게소라니.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데.”
사헌이 재미있다는 듯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속도를 낮춰 재영이 더 편히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창문에 딱 달라붙어 재영은 표지판에 적힌 ‘아파트 단지 건설’ 안내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거 아파트래요!”
재영은 경악에 차서 사헌을 돌아보며 외쳤다. 놀라운 발견을 한 것처럼 신기해하는 재영의 모습을 보면서 사헌은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아파트를 왜 짓지? 무섭지도 않나? 저걸 살 사람이 있을까요?”
아주 멀리도 아니고, 정부가 쳐 둔 통제선 바로 바깥이었다. 재영은 믿기지 않아서 혼잣말 같은 질문을 쏟아 냈다.
“이미 들어올 사람이 정해져 있을걸.”
사헌의 말을 들은 재영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왜요? 왜 여기 살지?”
“던전이 생겼던 곳 근처는 오히려 안전하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네? 진짜예요?”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전부 던전 근처에 터를 잡고 사는 게 낫지 않나.
“모르지. 우리는 아직 던전을 전부 알지 못하니까.”
시니컬한 반응을 보면 사헌은 그 소문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다양한 던전을 가 보고, 겪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런 그가 확신을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는지.
“대단하네요. 확실치도 않은데 거기에 매달리다니.”
재영은 곳곳에 들어선 공사장을 눈으로 훑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내려 독서에 집중했다.
던전은 내부의 크리처를 전부 없애면 던전 자체가 사라지는 일회성 던전과 일정 주기마다 리셋 되는 재생형 던전으로 나뉜다.
오늘 사헌이 출동해야 할 던전이 재생형 던전, 그중에도 A플러스급 난이도를 가진 곳이었다. A플러스급 던전은 A은 스무 명이 달라붙어도 힘든 곳이라,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인 사헌이 빠져서는 안 됐다.
그래도 재생형 던전의 경우 나타나는 크리처의 개체나 종류도 변하지 않아서 처음보다는 위험도가 낮았다. 상대의 기억을 영상으로 만드는 능력자와 사헌의 좋은 기억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료가 센터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영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낯익은 푸른 테이프를 발견했다.
“아, 저기 통제선 있네요.”
사헌의 SUV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통제선 안으로 들어갔다.
“재효 형이다.”
재영이 반가운 얼굴로 주차장 입구를 보며 말했다. 재효가 초조한 몸짓으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사헌의 차를 발견한 직후 그 얼굴에는 안도가 스며들었다.
“늦은 건 아니겠죠?”
재영은 미안한 얼굴로 사헌을 돌아봤다. 그가 늦었다면 그건 오로지 따라가겠다고 나선 저 때문이었다.
“리셋까지 아직 한 시간은 남았어.”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의 태연한 태도에 재영은 한숨 놓을 수 있었다.
“어, 여기에 슬라임이 나오네요?”
사진과 특징이 함께 정리된 자료를 들여다보던 재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헌이 기념 삼아 한 부 챙겨 둔 것을 재영이 어떻게 찾아내 챙겨온 것이다.
“슬라임은 신체가 찢겨도 무한으로 재생되니까 형 능력하고는 상극이잖아요. 아니, 칼이 소용없으면 이걸 어떻게 잡지?”
재영의 표정은 슬라임의 습격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심각했다. 주차 공간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사헌이 그 얼굴을 보고 픽 웃음을 흘렸다.
“거기 슬라임 다른 특징은 안 보여?”
딱 사헌과 상극이란 것만 살피고 눈을 뗀 재영은 아차, 싶어서 다시 자료를 살폈다.
“아……, 불에 약하다고 쓰여 있네요.”
“우리나라에 제일 많은 능력자가 그쪽이고.”
재영은 한시름 던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리고는 페이지를 넘겨 다시 심각한 얼굴로 집중했다.
“어차피 같이 들어가지도 않을 거라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차를 세운 사헌이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 재영을 돌아봤다. 물론 재영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핸들에 누운 것처럼 머리를 기댄 사헌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재영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착각인지 아니면 맞춘 것처럼 사헌의 위로 내리쬐는 태양 때문인지 검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보였다. 어쩌면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야 할 전공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응?”
웃는 얼굴 그대로 미간을 좁힌 사헌이 손을 뻗어 말랑말랑한 볼을 쓰다듬으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재영은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명치를 꾹꾹 눌렀다. 불필요하게 기울인 머리도 똑바로 세웠다. 덕분인지 답답한 기가 조금 나아졌다.
“그, 형이…….”
재영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사헌의 시선을 피했다.
“음, 지금쯤 어디에서 뭘 상대하고, 언제쯤 끝날지 상상할 수는 있잖아요.”
별것도 아닌데 볼이 화끈거렸다. 사헌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다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상상하는 거 좋아해?”
낮게 깔린 목소리에 재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야말로 애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나쁜 목소리다.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아마 사헌도 그걸 떠올린 것 같다.
“아, 아니……헉!”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재영의 입에서는 다급한 부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헛숨을 들이켰다.
“차를 왜 여기다 뒀어? 입구 쪽에 두면…….”
재효였다. 사헌이 차를 세워 두고 내리지는 않자 조수석 창문을 두드린 것이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재영과 눈을 마주치게 된 재효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형.”
재영은 얼른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내려서 인사하고 싶은데, 아무리 안전지대라도 사헌의 허락이 필요할 듯했다.
“재영 씨가 여기는 어쩐 일로……. 아, 드디어 결심한 거예요?”
현장에서 재영을 보게 된 것이 좋은지 재효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김재영은 차 안에 남는다.”
사헌이 두말하기 싫다는 듯 싸하게 내뱉은 뒤, 차에서 내렸다. 그대로 가려나 싶었는데 갑자기 몸을 휙 돌려 재영을 쳐다봤다. 빤히 바라보는 것이 뭔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재효. 네 가이드 여기로 불러.”
재영이 입을 떼기 전에 사헌이 입을 연 건 재효를 향해서였다.
“아니에요! 저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재영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던전에 함께 들어가지 않으려는 저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제가…….”
“여기로 오라고 하면 좋아할 거예요. 대기 텐트를 엄청 싫어하거든요.”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던 재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와 함께였다.
“공, 아니, 진사헌 에스퍼?”
남자는 빠르게 말을 고쳤지만, 그가 사헌을 공주님이라고 부를 뻔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 또 가이딩이 필요하신 거예요?”
남자가 팔을 뻗어서 사헌의 손을 덥석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중심을 잃은 몸뚱이를 잡아 준 건 옆에 있는 재효였다.
“왜. 그냥 가라고 할까?”
재영은 재효의 가이드가 팔을 뻗은 그 위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사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사헌은 어딘지 기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지, 이게……. 고백도 안 하고 차인 느낌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사과할게요.”
사헌을 친구로 둔 재효가 제 가이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 같은 사과를 건넸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가이드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스러움에 재영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재효가 제 가이드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데려왔음이 분명했다. 사헌과는 정반대의 사람이라서 잘 지내는 줄 알았더니 이런 막무가내인 면이 그의 친구다웠다.
“어디까지 말해도 돼?”
분명 사헌에게 묻는 것 같은 투인데 재효의 시선은 재영을 향해 있었다. 재영이 어리둥절해서 사헌을 쳐다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모든 결정권이 제게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뭔데 그래요? 이게 무슨 분위기야?”
재효의 가이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라 재영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제가 설명드릴게요. 형들은 어서 가세요. 다들 기다리겠어요.”
재영은 가장 편한 사헌의 등을 떠밀었다. 그 모습을 본 재효의 가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치 사자의 콧속으로 긴 귀를 쑤셔 넣은 토끼를 본 것 같았다.
“아직 시간 남았다.”
“네가 데려오라고 한 거잖아. 상황 달라진 거 아니었어?”
사헌이나 재효나 각자 자기의 말이 우선이었다. 상황이 제 생각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은 재효는 난처한 얼굴로 사헌과 제 가이드를 번갈아 봤다.
“가벼워 보여도 남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는 녀석은 아니야. 신중한 안재효가 몇 년을 곁에 두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성가시다는 얼굴을 한 사헌이 재영을 보며 남자를 가리키며 고갯짓을 했다.
“믿을 수 없지만 저를 믿어 주시는 것 같은데, 기분이 썩 좋지도 않네요.”
눈을 끔뻑이며 사헌의 말을 천천히 되새긴 재효의 가이드가 찝찝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곤란한 거면 말 안 해 주셔도 돼요.”
그리고 재영을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마음을 편히 해 주려는 모습이 재효와 닮았다. 사헌의 입에서도 칭찬 비슷한 말이 나왔으니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았다.
‘가이딩도 자주 해 준 것 같았지.’
남자가 사헌의 손을 잡으려고 했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서 느리게 재생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부터 내민 걸 보면 자주 있던 일인 것 같다.
“대신 이번 계약 끝나면 개인 전담으로 계약해 주세요. 재효 씨만큼 매너 좋은 에스퍼는 보기 드물다고.”
남자는 재효를 보며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가를 요구했다. ‘재효의 가이드’라고 칭하길래 저처럼 전담인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경우인 듯했다. 그는 재영 자신과 달리 국가 소속인 모양이다.
‘국가 소속은 별로인가?’
하긴. 사헌과 하는 친밀한 일들을 낯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또 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싫은 소리부터 나올 것 같았다. 재영은 스킨십이 많은 타입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한했다. 에스퍼 중 ‘길성필’같은 사람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그 이름을 떠올리자 기분 나쁜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그 선배 요즘 안 보이던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재영은 곧 좋은 사람도 아닌데 떠올려 봤자 뭐가 좋을까 싶어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물론이죠.”
“나중에 매칭률 더 높은 가이드 생겼다고 말 바꾸기 없어요!”
재효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자 남자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이 됐다.
재영은 저 빼고도 잘만 이어지는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렸다. 무슨 소리를 낸 것도 아닌데 금방 시선이 몰렸다.
“저 때문인데 재효 형이 대가를 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뒤늦게 입장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느낌이다. 거기에 그 입장료를 다른 사람이 내어 주기까지?
‘역시 따라오지 말 걸 그랬나.’
재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괜히 어중간한 마음으로 따라와서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일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됐을 거야. 시간 문제였을 뿐이지.”
당사자인 재효가 아니라 사헌이 나서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며 재영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말이 맞아요.”
곧이어 재효도 재영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다른 사람 의사 무시하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마지막으로 재효가 데리고 온 가이드가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만 빼고 전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니 재영은 마음을 놓기로 했다.
“그럼 형한테는 제가 보답할게요.”
그래도 영 모른 척하기는 그래서 덧붙였다. 맛있는 식사라면 재효도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을 거였다. 역시나 재효가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 차에서는 절대 내리지 말고.”
한 번 클리어된 던전이 안전하다는 정부의 주장은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정작 그 던전을 청소한 사헌은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재영이 멍하니 서 있자 사헌이 직접 문을 열고 그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거슬리게 하면 쫓아내고.”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제대로 인사도 안 했는데 멀어지는 모습에 재영은 다급하게 창문을 내렸다. 재효의 가이드를 붙들고 무어라 말을 하려던 사헌이 고개를 돌렸다.
“형!”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반응하는 사헌에 움찔한 재영은 곧 침착을 되찾고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시라구요!”
어쩔 수 없이 재영이 사헌에게 하는 말을 같이 들어 버린 재효와 그의 가이드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느른한 미소를 걸친 사헌은 배부른 짐승처럼 보였다.
이내 사헌과 재효의 모습이 사라졌다. 재영과 달리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던 남자는 스스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저도 뒤로 갈게요.”
인사를 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 재영은 얼굴을 마주 보기 힘든 자세에 당장 문손잡이를 잡았다.
“아니에요. 그냥 거기 있어요.”
재효의 가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말 앞에 ‘제발’이라는 하지도 않은 말이 들릴 정도로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낯을 많이 가리시나.’
재영은 얌전히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저 때문에 여기 끌려온 사람을 불편하게까지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제대로 소개도 안 했네요. 저는 김재영이라고 해요. 스무 살이구요.”
재영은 제일 기본인 인사를 잊었다는 게 민망해서 목덜미를 문지르며 웃었다. 부릅뜬 눈으로 재영의 면면을 살피던 남자도 뒤따라 인사를 건넸다.
“아! 저는 하윤서라고 합니다. 스물넷이에요.”
“형이시네요? 괜찮으시면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재영의 살가운 태도에 윤서도 사헌 때문에 쌓아 둔 경계를 조금 무너뜨렸다.
“와 줘서 고마워요, 형. 사실 5시간을 혼자 뭐 하나 걱정되긴 했거든요.”
재영의 무해한 미소는 윤서에게 죄책감까지 들게 했다. 윤서가 양손을 바쁘게 흔들었다.
“진짜 괜찮아. 대기 텐트도 할 거 없기는 마찬가지거든.”
대부분의 가이드는 던전 클리어 시간에 맞추어 출동하지만, 정부에서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던전 입구에도 상주하는 이들을 몇 뒀다.
윤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로 재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재영이 운을 뗐다.
“궁금한 거 있으세요?”
“그럼 곤란한 건 알아서 패스하고 대답해 줘.”
윤서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재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그의 말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재영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윤서가 편히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음, 그게, 재영이 너……혹시 공주님 애……인이야?”
망설이던 윤서가 눈을 질끈 감고 지르듯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가이드일 거라는 상상을 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재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잘…… 어울리나?’
그런 사이라는 걸 상상만 했는데 뱃속이 근질거렸다. 이런 오해는 윤서가 처음도 아니다. 재영과 사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해운과 친구들, 가족들도 연인 사이일 거라고 단정했으니까.
“어쩐지! 공주님이 저렇게 막 눈깔 이렇게, 이렇게 하고 누굴 쳐다볼 사람이 아니잖아.”
대꾸를 못 하는 재영을 보고 윤서가 긍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라고 할 때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눌러 짙은 쌍커풀을 만들었다.
‘사헌이 형은 저렇게 느끼하게 안 생겼는데…….’
재영은 속으로 윤서의 말에 반박했다. 윤서가 너무 흥분해 있어서 끼어들 틈이 없던 것이다.
“그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와,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잖아.”
윤서의 말을 다 듣고 보니 재영을 가이드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건 사헌의 태도 때문이었나 보다. 재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일단 사헌이 형 동생이 제 불알친구거든요.”
“아, 그래?”
하지만 윤서는 그 정도로는 사헌의 묘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물론 재영도 그 정도로 풀릴 오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제가 사헌이 형 가이드예요.”
재영은 말을 하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따끈따끈한 걸 보니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게 뻔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큰일이 나고 그런, 대단한 비밀도 아닌데 꽁꽁 감춰 온 탓에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어색했다.
윤서가 말없이 재영을 쳐다봤다. 이마저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 믿으시는 거죠?”
“지금까지 진사헌 에스퍼한테 가이드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윤서가 코웃음을 치며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진 건 재영이다.
‘맞아. 형한테 가이드가 없었을 리가 없지.’
재영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그래도 윤서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보면 저를, 다른 가이드와는 다르게 대한 모양이다. 재영은 윤서의 말 한마디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마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음, 진짜인데…….”
재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윤서가 에스퍼라면 모를까, 가이드인 이상 제가 가이드라는 걸 직접 증명할 방법은 더 없었다.
‘믿지 않으면 별수 없지.’
더 이상 사헌에게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하긴 했는데, 모르더라도 사헌이 그렇게 순순히 몸을 내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상관이 없었다.
말간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는 재영을 보던 윤서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왜?”
윤서가 재영이 앉은 시트를 탁, 잡으며 외쳤다. 설득하기를 포기하자 진실이 전해진 것이다. 눈이라도 깜빡하면 잡아먹힐 것 같은 기세라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협박당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
윤서가 절망적인 얼굴로 내뱉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절대 사헌의 가이드를 할 리 없다고 굳게 믿는 눈빛이었다.
재영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순간 움찔했다. 실제로 사헌에게 협박 비슷한 걸 당한 느낌이기는 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하지만 결국 제 선택이다. 사헌과 에스퍼-가이드로서 계약한 것도, 신상 털릴 각오를 하고 현장까지 따라온 것도. 오히려 이제는 제가 가이드라는 정체성을 숨기려는 탓에 사헌에게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이 생긴 것 같아 미안할 정도다.
“그, 그래? 왜, 아니, 그럴 수 있지. 소꿉친구 형이면 그쪽이랑도 많이 봤을 테고…….”
윤서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사헌을 두둔하는 재영의 말투로 보아 그가 자기 의지로 계약한 것은 분명해 보였으므로.
“어차피 가이드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편한 상대랑 하는 게 좋긴 하지. 나도 그래서 안재효 에스퍼 전담하고 싶은 거니까.”
마침내 윤서가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이자 재영의 얼굴 근육에서 힘이 빠졌다. 드디어 윤서의 이야기를 할 만한 타이밍이다. 재영은 눈을 반짝였다.
“형은 센터 소속인 거죠?”
에스퍼인 사헌에게보다는 같은 가이드의 관점에서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사헌이 그러라고 일부러 윤서를 데려오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영이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게 네 대의 컴퓨터를 설치한 방을 따로 만들어 줄 정도로 섬세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국가에서 소속 가이드에게 주는 혜택이 많고, 다양하니까. 노후까지 책임져 주는데.”
윤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해 주자 재영은 몸을 틀어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었다.
“그럼 센터에 소속되는 게 좋은 거네요?”
재영의 물음에 윤서가 잊고 있었다는 듯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개인 계약만 한 거구나? 센터에서 내가 모르는 가이드가 있을 리 없으니까. 아니다. 아까 하는 것 보니까 가이드인 거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모양이지?”
재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이 재영의 앞에 데려다 둔 사람이면 어디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도 아닐 테고, 이미 제가 가이드라는 걸 밝혔으니 윤서에게는 털어놓고 정보를 얻는 게 득이다.
“음, 센터 소속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세금 감면이랑 교육, 안전 보장, 월급 정도인가?”
재영의 물음에 윤서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대답했다.
“월급이요? 저는 기본급에 가이딩할 때마다 추가금이 붙는데, 센터도 그래요?”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처음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본 재영은 너무 놀라서 눈이 빠질 뻔했다. 하지만 사헌이 재영의 능력에 그것도 부족하다고 하는 바람에 기겁해서 사인했다. 물론 차후에 합의를 통해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건은 달아 뒀다.
재영이 발현되기 전에는 가이딩 없이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인 사헌은 이제 매일 같이 그 온기를 갈구했다. 유독 잦은 출동 횟수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됐다. 그렇게 받은 인센티브가 새로 개설한 재영의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추가 수당은 주말이나 연휴, 야간 근무할 때만.”
윤서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센터의 단점이지.”
내리깔린 목소리가 너무나 우울하게 들렸다. 공감 능력이 좋은 재영도 함께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국가가 운영하는 센터에 소속된 이상, 우리는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니까.”
윤서가 말 끝에 에스퍼든 가이드든 등급과 상관없이 호봉에 따라 월급을 차등 지급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부분의 가이드가 센터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그건 조금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등급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은 힘을 쓰고, 더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거잖아요.”
요즘 들어 재영은 접촉 없이도 가이딩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A급 가이드인 윤서가 동시에 여러 명을 가이딩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때문에 그처럼 등급이 높은 사람은 불만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등급이 높으면 승진은 빨라요?”
“그것도 연차대로.”
혹시나 해서 물은 말에 부정적인 답이 돌아오자 재영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운이 짙어졌다.
“센터에 소속되는 게 정말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등급 좀 높은 사람들은 적당히 경력 쌓고 나가잖아, 나처럼.”
재영이 툴툴거리자 윤서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전담 계약할 수 있으면 바로 나갈 거야. 덕분에 시기가 좀 당겨졌다, 야.”
윤서가 아프지 않게 재영의 어깨를 툭 때렸다. 그렇게 말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서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돼요?”
“솔직히 가이딩이야 그냥 본능적으로 할 줄 아는 거거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일해 보면 교육은 필요 없고…….”
재영은 격렬하게 동의했다. 사헌이 시키는 대로 몇 번 연습하다 보니 저도 어느 정도가 적당한 가이딩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센터의 교육을 직접 경험해 본 윤서의 말이니 더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A급 에스퍼의 전담이 된다는 건 그만큼 강한 밀착 경호원이 생긴다는 거야. 이렇게 안전 문제도 해결.”
그렇게 하나씩 지우다 보니 남아 있는 센터의 장점은 세금 감면뿐이었다. A급 가이드 정도라면 세금 혜택을 받지 않아도 너끈히 해 낼 것이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재영은 이내 저와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처음부터 사헌이 형이랑 계약하게 된 저는 엄청 운이 좋았던 거네요!”
재영은 눈을 반짝이며 기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를 바라보는 윤서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네가 좋다면…… 좋은 거겠지.”
윤서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사헌이 센터에 들어온 초반에야 재영처럼 그의 곁에 있는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는 가이드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라는 특별함에 더해 황홀할 정도인 외모, 재계를 주름잡는 집안 배경까지. 사헌은 그야말로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잘 익은 과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중 대부분은 그와 얽히기를 꺼렸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사헌의 주둥이 때문에 자신들에게까지 화살이 튈까 봐 두려워서였다. 아름다운 껍질 안에 든 것이 사실은 신포도라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윤서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재영이 신기했다.
‘진사헌 에스퍼의 동생 친구라면 꾸며진 모습을 봤을 리도 없고…….’
진사헌이 누군가를 속이려고 가면을 쓸 리도 없으니 재영은 그의 본모습을 낱낱이 알고도 저만큼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된다.
“왜요?”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하게 일그러진 윤서의 얼굴을 본 재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그냥 너도 보통은 아니구나, 싶어서.”
신기한 것을 보듯 하는 윤서의 눈빛에 재영은 눈만 끔뻑거렸다. 곧 부정적인 느낌도 아닌데 아무렴 어떤가 싶어 입술을 늘여 웃어 보였다.
“어쨌든 반대로 하급 가이드들한테는 좋은 조건이지. 금전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재영은 그건 또 그럴 만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가다간 결국 센터에는 등급이 낮은 가이드만 남게 될 텐데 괜찮을까.
“이거 보여?”
작은 피어싱이지만, 신경 써서 볼 정도는 아니었다. 윤서가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는 걸 보고서야 발견한 재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거야. 위치 추적기.”
재영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그거 사생활 침해 아니에요?”
“센터에서는 우릴 위한 거라고 하지.”
“그게 왜 그렇게 되지?”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사헌도 제 몸에 비슷한 걸 붙여 놓은 적 있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고. 사생활이냐, 안전이냐 굳이 고르자면 안전이 중요하긴 했다.
“조금 멀리만 가려고 하면 전화가 온다니까. 센터에 소속된 후로 해외여행은커녕 가온시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
윤서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사헌이 알려 준 가이드는 에스퍼를 돕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에스퍼가 그런 고마운 존재를 위협하는 걸까. 재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 재영을 보고 윤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전체적으로 가이드가 부족한 게 크지.”
그래서 센터에서는 한 명의 가이드가 많은 에스퍼를 담당해야 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센터가 그 정도인데 길드나 프리는 어떻겠어. 국가랑 계약 못 하는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이나 하급만 주워 먹는 거야. 아주 운이 좋아서 국가보다 먼저 발견하는 경우를 빼고는.”
윤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것도 돈 많은 길드 이야기고…….”
더 잇기 힘들다는 듯 윤서가 말끝을 흐렸다.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서 재영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아, 그거 저번에 뉴스에서 봤어요. 3년 전 사라진 남자친구가 망가진 시신으로 돌아왔다, 였나.”
“가이드를 납치까지 해서 써먹으려는 놈들은 여자보다 남자를 더 선호하거든.”
그건 대체로 남자가 여자보다 튼튼하기 때문이다. 에스퍼는 기본 구성물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반대로 가이드는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일반인과 다르지 않고. 그래서 욕심껏 써도 망가지지 않을 남성체를 선호했다.
“그런 데 잡혀가면 묶여서 충전기 노릇이나 하다가 인생 종 치는 거야.”
윤서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실제 그런 사례를 건너건너라도 들어 경험한 얼굴이었다,
“그런 걸 방지한다고 달아 놓은 거지, 이걸.”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윤서가 피어싱을 손끝으로 툭 쳤다. 그의 말대로 그리고 센터의 말대로, 어찌 보면 가이드들을 위한 장치라는 말도 영 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감시당하는 기분이라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무언가 고민하던 윤서가 이상한 점을 알아챘는지 미간을 좁혔다.
“근데 진사헌 에스퍼는 왜 국가 소속이지? 프리로 뛰어도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했을 텐데.”
무엇보다 사헌은 명령이나 복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미 몇 번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전적도 있었다.
“돈은 별로 필요 없을걸요.”
재영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돈 많은 조부가 회사 이미지와 홍보에 큰 도움이 된 손자를 어여삐 여겨 돌아가시기도 전에 일찍이 자식들보다 큰 재산을 뚝 떼어 줬다고 들었다.
사헌이 봉사나 희생 정신으로 에스퍼 활동을 할 리는 없으니까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전에 재영도 사헌에게 같은 걸 물어본 적 있어서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냥 제일 먼저 제의한 게 국가라던데요?”
“……그것뿐?”
센터에 들어와 직접 사헌을 겪은 후 몇 년간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답을 알게 된 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탄식했다.
“하긴. 있는 곳이 뭐 중요하겠어.”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 윤서가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라면 어딜 가든 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은 말, 그게 뭐든 참지 않고 다 할 성격이니까 영입된 곳이 센터든 길드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체로 재영이 센터의 교육에 대해서 묻고, 윤서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상냥하게 대꾸해 줬다.
재영은 문득 등 뒤의 던전이 신경 쓰여 돌아봤다.
“그런데 형은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연락해서 5분 안에 나타날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 돼.”
윤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재영은 그가 제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걸 알았다.
“아, 그게 아니라 요즘은 가이드가 던전까지 동행하게 되어 있잖아요.”
던전 클리어 직후 폭주 전조 증상에 시달리던 에스퍼 때문에 급히 생겨난 법이었다. 재영은 만약 누군가 던전에 따라 들어간다면 A급 가이드이자 베테랑인 윤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꺼번에 여러 명의 가이딩이 가능할 테니 그게 합리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규칙상 셋 이상은 함께 들어가게 되어 있어. 나는 어제 들어가서 오늘은 대기조.”
“로테이션이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에스퍼와 달리 신체 강화도 안 된 가이드가 던전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 센터로 들어오면 그것도 있었네. 개인이면 자기 에스퍼랑 상의해서 안 들어와도 되거든. 공무원만 죽어나는 거지.”
윤서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재영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위험까지 센터의 가이드들에게 떠넘긴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아, 그렇다고 네가…….”
어두워진 재영의 표정을 본 윤서가 달래듯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
“---! ----, ---!”
차 밖에서 시끄러운 고성이 들려왔다. 재영과 윤서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가만히 쳐다봤다.
“뭐지?”
잠시 후, 재영은 뒤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사헌의 차가 들어온 주차장 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과 경비원이 대치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왜 못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재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사헌의 차를 타고 들어올 때는 나와 보는 사람이 없어서 경비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 덩치 좋아 보이는 사람 여럿이 나서도 밀리지 않는 걸 보면 상대 쪽 남자들도 평범한 이들은 아닌 듯했다.
“하랑 길드네.”
가늘게 뜬 눈으로 창밖을 살피던 윤서가 아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말을 뱉었다. ‘하랑’은 대한민국 1위 길드로 이능력자들에게 관심이 거의 없는 재영마저도 알 정도로 명망 높은 곳이었다.
‘저기에 서훈도 있나?’
유일하게 아는 에스퍼가 재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하랑 길드가 왜 여기까지 왔지? 이 근처에 다른 던전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윤서가 기억을 더듬는 듯 골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던전은 원칙적으로 발견자에게 가장 먼저 출입이 허락된다.
“근데 신고 전화가 센터랑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길드들이 홍보에 큰돈을 들이는 거지.”
그렇게 정부가 소유권을 갖게 된 던전은 공개적인 경매를 통해 길드들에 낙찰 기회를 주거나, 예약 형식으로 대여해 주기도 한다.
“센터 쪽에서 요청해서 온 거 아닐까요?”
재영이 들뜬 목소리로 그럴싸한 추측을 했다. 에스퍼에 진심인 동준이 몇 번 말한 적 있는데, 하랑 길드는 간혹 센터의 요청으로 연합 출동을 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길드라고 했다.
“진사헌 에스퍼님이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하지만 윤서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무슨 일일까요?”
“음, 창문 열면 조금이라도 들릴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뒤, 윤서가 창문을 내리려고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형!”
재영은 황급히 팔을 뻗어 바로 창문을 내리려는 윤서를 만류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헌의 당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차에서 내리지 말라는 것뿐이었지만, 말 잘 듣는 모범생은 그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그, 그럴까?”
해맑은 미소를 지워 낸 얼굴이 사뭇 진지해서 윤서는 얌전히 손을 내렸다. 대신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바깥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험……! 당장……!”
나란히 창가에 붙어 숨을 죽이자 알 수 없는 소음으로만 들리던 아까와는 달리 드문드문 단어 같은 게 들려왔다.
여전히 뜻 모를 소리라 재영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뻐근한 몸을 세우던 재영의 눈에 차 앞 유리 쪽 풍경이 보였다.
“근데 저거 왜 그래요? 클리어될 때 원래 저러는 거예요?”
재영은 입구와는 정반대인 그곳, 던전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넣는 것처럼 돔 모양의 던전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뭐가?”
윤서가 재영의 말에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하며 돌아봤다.
“저거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요? 괜찮은 건……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재영이 틀어졌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런 재영의 눈동자 안을 가득 채운 건 창백하게 질려 경악하는 윤서의 얼굴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온 것처럼 차량 내부가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커다란 돔이 다가오던 속도와 같았다.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싸고, 동시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도 잠시,
끼야아아아악-
기이한 비명이 귀를 찔렀다. 꿈에서 깬 것처럼 재영의 몸이 위로 튀었다. 시선 끝에서부터 어둠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재영은 눈을 홉뜨고 유리창 너머를 살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온 빛에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언뜻 보였다.
“형, 형! 몸 낮춰요.”
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재영은 당장 뒷좌석 쪽으로 몸을 빼고 윤서의 어깨를 눌렀다.
“뭔가 다가오고 있어요. 어쩌면 크리처일지도 몰라요.”
재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윤서를 향해 다급하게 속삭였다. 고작 그뿐인데도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뭐?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야……!”
허겁지겁 문을 열려던 팔이 재영에 의해 막혔다.
“크, 크리처의 색적 능력이 시각밖에 없는 줄 알아? 놈들 중에는 후각, 청각이 짐승보다도 예민한 녀석들이 있어.”
윤서가 겁에 질린 얼굴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그래도 큰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자각은 남았는지 속삭이는 것에 가까웠다.
“네. 그러니까 일단 하나씩 조심하자구요.”
재영은 윤서를 올곧게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윤서의 목소리가 떨릴수록 재영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일단 몸을 숨기고, 침착하게 생각해 봐요.”
“그럴 여유 없어! 나가야 돼. 던전 안으로, 아니, 크리처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가 던전 안인가. 아니면 밖으로…….”
정신없이 말을 내뱉던 윤서가 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숙련된 가이드라도 이전에는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한 모양이다. 재영은 그런 윤서의 머리통을 걱정스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크리처가 던전 밖으로 나왔다는 건 그것들을 퇴치하려고 나선 에스퍼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사헌 형은 괜찮을 거야.’
불안을 잠재우려고 억지로 떠올린 게 아니라 진사헌이라면 정말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저는 그가 찾으러 올 때까지 잘 숨어 있기만 하면 된다.
“우선 담요부터 머리끝까지 덮어요.”
재영은 한층 단단해진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봤다.
“아, 응. 그래.”
윤서도 그런 재영에게 동화되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지만, 눈빛이 맑아진 터라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상황 파악부터 할게요.”
재영은 짙은 색 담요를 몸에 두른 채 몸을 낮추고 창문에 바짝 붙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바깥을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떼로 밀려들어 어둠이 짙어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 것은 동그란 몸통에 짧은 다리가 다닥다닥 붙은 곤충형 크리처였다.
“‘검은콩 거미’예요.”
통째로 외울 기세로 공략집을 읽어 대던 재영은 쉽게 크리처의 정체를 알아냈다. 윤서가 그를 따라 눈만 내놓고 창문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대기소로 가면 어때? 거기에 가이드 보호를 담당하는 에스퍼가 있어.”
윤서가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선택지를 내놓았다. 눈앞의 크리처가 시각, 후각, 청각이 발달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검은콩 거미는 딱딱한 몸을 둥글게 말아 굴러다니는 것이 능력의 전부였다.
하지만 재영은 희망에 겨운 윤서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까지 갈 때까지 우리가 거미의 몸통에 전혀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위기감 가득한 목소리에 윤서가 침을 꼴딱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검은콩 거미는 질보다 양을 자랑하는 개체였다. 떼로 몰려다니며, 하나가 적을 발견하면 무리 전체가 달려들어 그것을 짓이기려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초조한 긴장감에 윤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퉁, 퉁.
그러는 동안에도 콩알 거미는 여기저기 부딪히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차와 함께 뭉개지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던전 주차장 경비실이 있잖아요.”
“경비원은 전부 에스퍼고.”
윤서가 맞장구를 치며 눈을 반짝였다. 일단 원래의 던전 입구에서 멀고, 그들이 지금 있는 위치와는 가깝다.
“셋 하면 뛰…….”
하지만 재영은 결연하게 뱉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끼긱, 끽.
얇은 철판 너머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소리를 따라간 눈이 두려움으로 크게 뜨였다. 문 옆이 벌어져 있었다. 틈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바, 반대쪽으로…….”
재영은 다급한 손길로 윤서의 어깨를 잡아 반대쪽으로 밀었다. 윤서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곧 등골이 서늘해지는 예감에 윤서의 등이 굳었다. 동시에 재영은 피부를 쩌릿하게 찌르는 기운을 느꼈다.
‘이 느낌……!’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재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윤서의 어깨를 눌렀다.
“야! 사람 있는지 확인만 하랬잖아, 확인만!”
그때 커다란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때렸다. 동그랗게 뜬 두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인두겁을 쓴 크리처를 만난 적 있는 재영은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조수석의 머리와 등받이 사이로 밖을 내다봤다.
“있네, 사람.”
문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이 재영의 눈을 보며 말했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이 축 늘어질 정도로 기운 빠지는 목소리였다. 아는 얼굴이다.
“괜찮으세요? 다른 분은 안 계십니까?”
아는 척을 하려던 재영은 낯익은 남자의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입술을 붙였다. 맨 처음에 들린 목소리다. 그가 목을 빼고 차 안을 둘러봤다. 동시에 걱정이 담긴 목소리와는 달리 차가운 기운이 쏘아지듯 재영을 덮쳤다.
‘에스퍼다!’
하나를 인식하니 다음은 쉬웠다. 재영은 코앞의 남자에게서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운을 느꼈다. 손을 대지 않고도 두 에스퍼의 힘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능력을 과하게 썼거나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을 때 남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다 아까 느낀 저릿한 기운과는 달랐다.
‘왜 아까는 느끼지 못했지?’
답은 금방 나왔다. 두려움이 모든 감각을 좀먹고 있던 것이다. 숨이 가쁠 만큼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도, 온몸이 차갑게 식어 덜덜 떨고 있다는 것도 이제야 느껴졌다.
“서, 서훈 에스퍼님!”
재영이 아는 얼굴은 어쩌면 당연하게 윤서도 아는 이였다. 크게 외친 윤서가 안도감에 눈물까지 보였다.
“네, 이쪽은 서훈 에스퍼입니다. 저는 김태진이고요.”
소외된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소개를 더했다. 태진이 저를 빼놓았다고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 윤서는 더 미안해했다.
“크흠, 죄송해요. 제가 서훈 에스퍼 팬이라서…….”
“괜찮습니다. 잘난 녀석을 파트너로 둔 업보라고 생각하죠.”
태진의 말투가 정말 대수롭지 않아 하는 듯해 윤서가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둘뿐이야?”
그때 훈이 재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재영은 훈이 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차에는.”
“잠깐, 잠깐!”
훈과 재영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던 태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 편한 사이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적어도 재영보다는 서훈을 더 많이 알고 있을 태진조차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재영은 홀로 덤덤한 훈을 힐끔 보고는 입을 뗐다.
“과 동기예요.”
사실 태진이 말한 것처럼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에스퍼인 서훈이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어쩌다 출석하더라도 훈에게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재영은 그가 등교할 때면 제 존재를 감추기 바빴다. 그게 훈이 저를 알아본 것에 놀란 이유였다.
“정말요? 별 인연이 다 있네.”
“인원 파악됐으면 얼른 움직이죠! 공기가 심상치 않아요.”
태진이 어쩐지 기대에 찬 얼굴로 말을 내뱉었을 때, 그의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제야 재영의 눈에도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콩 거미는요? 여기 검은콩 거미가 있었는데…….”
일반인보다 몇 배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가 그럴 리 없지만, 혹여라도 놓쳤을까 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정도야 우리한테는 껌이죠. 걱정 마시고, 일단 나오세요.”
태진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야말로 든든했다. 재영과 윤서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가는 건가요?”
주위의 에스퍼들에게 눈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윤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태진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렸다.
“입구가 막혔어요.”
“네? 그럼 우리 갇힌 거예요?”
기대로 밝아진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상황이 좋지 않다니까 일단 움직여요. 계획이 있으신 거죠?”
재영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태진을 향해 물었다. 그들은 재영과 윤서에게 가이드인지 에스퍼인지, 혹은 일반인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떤 필요성에 의해 인명 구조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던전 근처에 있으니까 은연중에 에스퍼나 가이드로 여기는 걸지도 모르지만…….’
재영은 묵묵히 서 있는 서훈을 힐끔거렸다. 입학 때부터 에스퍼와 가이드는 등급에 상관없이 이름이 알려졌다. 재영은 대외적으로 일반인이다. 그러니 동기라는 걸 알아본 서훈이라면 재영이 아무런 능력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우선 대기소로 가서 협회 분들과 합류할 예정이에요.”
태진의 설명에 두 사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재영과 윤서, 둘만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거, 거기는 안전하겠죠?”
던전 밖은 안전하다는 믿음이 깨진 마당이라 윤서의 목소리에는 떨쳐 내지 못한 불안이 남아 있었다. 태진이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윤서도 별 기대 없이 물었던 거라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원들 쪽에서 신호가 왔어. 거기는 구출이 필요한 인원이 없는 모양이야.”
“바로 옆에 크리처가 우글거리는 던전이 있는데 누가 오겠어?”
누군가의 말에 다른 사람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스퍼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대화를 듣던 재영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훈이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역시 윤서가 가이드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재영은 앙다문 입술에서 힘을 뺐다. 아무 관계 없는 저를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가이드라는 사실을 감춰야 할 정도로 대단한 이유는 없다.
“제가……! 제가 심부름 좀 시켰어요. 그런데 괜히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고…….”
하지만 재영이 입을 열기 전에 윤서가 나서서 변명했다. 그가 말을 하다가 고개를 숙인 탓에 끝에 가서는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재영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던 걸 떠올리고 감싸 줘야겠다고 여긴 모양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바로 코앞에 주택 단지도 들어선 마당에.”
태진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윤서를 달래 주려는 듯 말을 붙였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눈으로 공사 현장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저, 왜 이렇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재영은 대화가 트인 틈을 타 태진에게 물었다.
“갑자기 큰 기운이 폭발하면서 던전의 범위가 넓어졌어요.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어서 얼른 뛰어 왔죠.”
태진과 훈이 속한 하랑 길드는 입구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럼 길드분들은 왜 안으로…….”
“센터에서 던전 바깥에 가이드들을 대기시킨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닥친 상황에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순전히 걱정되는 마음에 뛰어들었다는 소리다. 원래라면 그 대기소에 있었을 윤서가 감동에 겨워 촉촉한 눈으로 태진을 바라봤다.
“겸사겸사 정부 소속 에스퍼들한테 짐도 지우고, 연도 맺어 놓고 하면 이득이죠.”
태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어진 말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진심은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아직 그런 인사하기는 이른데.”
훈이 밝은 표정으로 허리를 꾸벅이는 재영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야! 너는 초를 쳐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훈을 다그치려던 태진이 앞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까만 그림자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들이 발을 뗄 때마다 덩어리가 뚝뚝 떨어졌다.
“우선 비전투인력은 뒤쪽으로 빠지세요.”
재영과 윤서는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몸을 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열다섯에 가까운 인원 중에 비전투 인원은 두 사람을 포함해 셋뿐이었다.
“센터분들은 보호를 우선적으로 여겨 주세요. 전투는 먼저 저희 하랑 길드가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태진의 지시에 에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재영은 자신들을 에워싼 센터 경비원들의 어깨 너머로 크리처를 살폈다. 마치 사람과도 같은 형체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영화나 사극의 전투씬에서 볼 만한 엄청난 인파였다.
“공략에서 저런 놈은 보지 못했는데.”
각자의 포지션을 정해 준 태진이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윤서와 대화하면서도 틈틈이 자료를 본 탓에 내용을 외우다시피 했는데 저런 형체는 스치면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럼 센터 측에서 정보를 숨겼다는 말이야?”
“카메라까지 붙었는데 숨겼겠냐?”
“넌 진짜 그놈의 일요 미스터리 같은 것 좀 그만 봐라.”
보고된 적 없는 크리처의 등장에 에스퍼들이 술렁였다. 막 내뱉는 말이 긴장을 풀기 위함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크리처의 접근은 더뎠다. 발을 떼면 바닥과 본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검은 타르 같은 것이 길게 늘어졌다.
“형도 모르겠어요?”
재영은 에스퍼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윤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재영은 눈을 굴리며 낯선 크리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다. 석유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온몸이 검은 액체로 덮여 있었다.
“우선 던져 보죠.”
훈이 툭 뱉으며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빠각.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크리처의 머리통에 그의 주먹이 박혔다. 질척하게 묻어나는 검은 액체에 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찝찝한 눈으로 제 손등을 쳐다보던 훈이 재차 주먹을 꽂아 넣었다. 빠르고 강한 공격에 크리처가 맥을 추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뿐. 크리처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훈아, 여기!”
다른 쪽에서 크리처 한 마리를 상대하던 태진이 크게 외쳤다.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축 늘어진 크리처가 바닥에 던져진 것이 보였다. 그것 또한 완전히 처리한 것이 아닌지 손가락 끝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뭐냐고 묻지도 않고 훈이 뒤로 훌쩍 빠졌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꼭두각시를 맨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훈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듯 윤서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센터와는 달리 길드는 돈을 받고 레이드 영상을 대여해 줬다. 던전에 동행해야 하는 가이드로서 윤서는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영상을 빌렸다. 대여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단연 희귀한 능력을 지닌 서훈의 레이드였다.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훈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에 늘어진 크리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삭.
훈의 명령을 받은 크리처가 공격한 것은 에스퍼가 아니었다. 맞은편의 크리처가 방심한 틈을 타 손쉽게 그것의 머리를 부쉈다. 본래의 능력에 서훈의 마력이 실려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아…….”
서훈의 꼭두각시의 활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다. 머리가 부서진 크리처가 잠깐 멈칫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제대로 상대법을 알아내지 못하면 끝도 없겠어.”
훈의 말투에서 짜증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가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온전히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터뜨리고, 다리를 부서도 멈추지 않는 크리처들에 신물이 나기도 했다.
“괜찮으십니까?”
재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굳었다. 앞을 지키는 경비원이 말을 건네기 전까지도 크리처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것을 몰랐다.
“뒤로 빠지는 놈 없게 해!”
뒤를 돌아본 태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또다시 에스퍼들 사이를 빠져나가던 크리처가 앞쪽으로 던져졌다.
재영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아까 크리처가 다가왔던 그곳이다. 덩어리진 검은 액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지렁이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이거 저희도 전투에 나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센터 경비원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만큼 하랑 길드원들의 전투는 난항이었다. 크리처의 반항이 심해지면 훈은 조종하는 것을 포기하고, 막 공격을 받고 해롱거리는 크리처를 새 꼭두각시로 삼았다.
“사람 형체……, 기름…….”
재영의 시선은 멀리 크리처 무리와 바닥의 검은 액체를 오갔다.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는 액체는 분명 크리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응? 재영아, 뭐라고?”
자신과 달리 던전에 처음 들어온 재영이 걱정됐는지 윤서는 작은 중얼거림에도 귀를 기울였다. 한참 크리처를 노려보던 재영은 사람 형체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액체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달라붙는 것을 확인했다.
“저거 혹시 슬라임 아니에요?”
재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슬라임?”
대답은 윤서가 아니라 저 앞에서 고군분투 중인 서훈에게서 나왔다. 코웃음을 치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슬라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발광하는 연녹색의 몸체였기 때문이다.
“왜?”
하지만 훈은 재영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크리처의 다리를 짓밟으면서 재영을 향해 되물었다.
“응?”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훈이 재영의 앞까지 훌쩍 날아왔다. 재영은 느린 움직임과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액체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근데 딱 슬라임이라고 하기 보다는 뭐가 합쳐진 느낌이야.”
재영은 그 와중에도 바쁘게 까딱거리는 훈의 손가락을 흘낏거렸다. 크리처 두 마리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서로 부딪쳐 날아갔다.
“스켈레톤?”
“아마도.”
슬라임은 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정확한 형체가 없지만, 던전 안에는 사람과 형체가 유사한 스켈레톤도 있었다. 직접 붙어 본 훈의 말이니 더 확신이 생겼다.
“그럼 불부터 붙여 보면 되는 거지?”
뛰어난 청력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했다. 그리고 길드의 화염계 능력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화염계 에스퍼가 밝은 얼굴로 캐스팅을 시작했다. 제 공격 때문에 팀원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두 사람이 제 의견을 받아 주는 것 같아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련한 마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무시하지 않아 줘서.”
결국 처음 말꼬를 터 준 서훈 덕이었다.
“어차피 뭐든 해야 했어.”
훈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하며 다시 최전방으로 걸어갔다. 서훈이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아래로 향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크리처가 자신의 동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리처가 슬라임과 스켈레톤의 결합체인지, 공략법이 태우는 것인지.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랑 길드원들은 여전히 크리처의 몸체를 전부 부수는 데 집중했다.
“화염은 아직입니까?”
서훈이 무언가를 밀치듯 손을 휘두르고는 법사 쪽을 향해 물었다.
“30초 남았습니다.”
커다란 화염을 준비하는 동안, 화염계 에스퍼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이가 초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와 함께 화염계 에스퍼를 지키던 남자의 단검이 빠르게 날아가 크리처의 가슴 한복판을 푹 찔렀다.
기아아악-.
크리처가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멈춰 섰다. 그것도 잠시. 크리처가 뒤로 밀려난 몸을 다시 움직여 화염계 에스퍼에게로 다가갔다.
서훈이 손을 움직이면 고통스러운 비명이 공간을 울렸다. 재영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살벌한 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현실 레이드는 그동안 제가 본 스크린 속 영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묵직한 타격에 박살 난 파편 중 하나가 뒤쪽에 선 재영에게로 튀었다.
“다치셨습니까?”
전투 능력이 없는 재영을 보호하는 던전 경비원이 재빠르게 쳐내고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재영 또래의 아들이 있을 법한 중년이었다.
“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친 곳은 없지만, 놀란 가슴이 술렁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조금 더 뒤에 위치하셔야겠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운 전투 상황에 경비원들이 재영과 윤서를 더 살뜰히 살폈다.
“재영아, 이리로.”
그래도 윤서는 에스퍼들과 함께 던전을 다닌 경력이 있다고 재영보다는 나았다.
‘뭐지?’
윤서가 이끄는 대로 그의 옆에 붙은 재영은 뭔가가 피부를 간질이는 걸 느꼈다. 손바닥으로 팔을 문질러 봤지만, 닿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다. 게다가 그 감각은 팔을 문지르는 순간까지도 손바닥 아래서 계속 느껴지고 있었다.
‘혹시 여기가 던전이라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라도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어 윤서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윤서가 집중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거 설마…….’
집중하자 그것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은 윤서의 몸에서 나와 주변의 에스퍼들에게 뿌려졌다. 마치 인간 분무기 같았다.
‘방사 가이딩.’
직접 해 본 적 없지만, 사헌이 말해 준 적 있다. 잠이 든 동안에 무의식이 조절하지 못한 기운이 나와 가이딩을 하는데, 깨어 있는 동안 의식적으로도 할 수 있다고.
“형. 혹시 지금 방사 가이딩하시는 거예요?”
“어? 어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의 반응에 재영은 다른 사람이 가이딩하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평범한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중에 얘기해요.”
재영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닥거렸다. 주변에 사람이, 그것도 신체 감각이 뛰어난 에스퍼가 너무 많았다.
“그래. 일단 집중할게.”
재영의 마음을 알아챈 윤서도 더 묻지 않았다.
‘방사 가이딩만 할 수 있으면 나도 이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굳이 길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재영은 윤서의 기운을 느끼고 거기에 제 기운을 더했다. 윤서의 힘에 섞여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에스퍼에게로 향했다.
‘됐다……!’
마침내 에스퍼의 내부로 흐르는 제 기운이 느껴졌다. 재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재영은 설렘 반, 불안 반으로 훈을 관찰했다.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훈이 가이딩을 느끼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제일 많은 활약을 했던 만큼 에너지를 많이 썼고, 그만큼 가이딩의 효과를 눈에 띄게 받은 탓이었다.
결과를 확인한 재영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미심쩍은 눈으로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던 훈이 곧 여기저기 가이딩을 하는 윤서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다시 앞을 보며 전투에 집중했다.
‘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영은 에스퍼가 있는 곳을 향해 여기저기로 힘을 뻗쳤다. 갑자기 나아진 상황에 윤서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어, 저거……!”
에스퍼들의 상태를 살피던 윤서가 바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동그라진 조각이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바닥을 기어 다시 크리처의 몸체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었다.
“재생 능력은 슬라임과 비슷한 게 맞아.”
원래 형태를 알 수 없게 제멋대로 붙은 크리처를 본 태진이 불쾌하다는 듯 손을 털었다. 신체 강화가 능력인 그는 방금 맨손으로 크리처 하나의 목을 터뜨린 참이었다.
“그럼 아무리 때려도 소용없을 텐데…….”
윤서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태진에게 집중적으로 기운을 쏟아 냈다.
“이래 봬도 우리 ‘하랑 길드’ 기대주만 모아놓은 팀입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스퍼에게 둘러싸여 안심하고 있던 때에 습격이라도 당한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저는 박문용이라고 합니다.”
하얗게 질린 재영의 얼굴을 본 남자가 서글서글한 얼굴로 굽신거리며 명함을 건넸다. 재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랑 길드라고 금박으로 크게 새겨진 회사 이름 아래에는 ‘이능력자 관리부 팀장 박문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능력자?”
낯선 명칭에 고개를 갸웃하자 문용이 사람 좋게 웃으며 설명했다.
“저희 길드에서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통틀어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가이드까지 능력자로 부르는 건 처음 봤어요.”
생소한 눈으로 바라보는 재영의 옆에서 윤서는 ‘가이드가 이능력자…….’라는 말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가이드야말로 진정한 능력자이지요.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힘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저 대단한 에스퍼들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을요.”
문용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가이드를 칭송했다. 어쩐지 민망해진 재영은 가이드가 에스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남자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준비 끝났어요!”
화염계 에스퍼가 저 끝에서 크게 외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에스퍼들이 한쪽으로 크리처를 몰아붙였다.
“대체 뭘 하려고 시간을 그렇게 끌었을까.”
크리처 몰이를 끝낸 에스퍼가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는 걸 보면 범위가 큰 마법인 것은 분명했다.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강해영 씨는 우리 길드 유일의 A급 화염계 에스퍼거든요.”
문용이 자식 자랑하듯 뿌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곧 머리 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화염계 에스퍼인 해영의 위에 주홍빛의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불이 아니더라도 저 구에 얻어맞으면 뼈가 으스러져 죽을 것 같았다.
“미친. 메테오잖아!”
윤서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침과 동시에 푸른 벽이 크리처 주변으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여기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어쩔 수 없는 걱정에 묻자 문용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훈 에스퍼가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능력자들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확고하게 느껴졌다. 재영은 그의 믿음을 믿어 보도록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윤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콰아아아앙-
“아! 귀는 막으…….”
뒤늦은 경고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한차례 크게 휘청인 재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충격 때문에 땅에 발붙이고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타닥타닥, 하고 거센 불길이 닿는 것마다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빼꼼 눈을 들어 앞을 봤다.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 않은 크리처가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다가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몸을 부풀린 불 속으로 사라졌다.
“방어벽이 흔들립니다!”
내내 화염계 에스퍼의 옆에 있던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가 만든 벽은 공격 범위 내 크리처의 이탈을 막고, 메테오가 사람들에게 튀지 않도록 보호했다. 이미 가진 능력 이상을 쏟아부었는지 남자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불길을 막아 주는 벽이 흔들리자 더운 정도였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두피에서부터 볼을 타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이딩할게요!”
윤서가 허락을 구하는 눈빛으로 서훈을 돌아봤다.
“부탁드립니다.”
망설일 것 없이 바로 허가가 떨어졌다.
“형, 저도…….”
재영은 곧바로 에스퍼에게 달려가려는 윤서의 옷깃을 잡았다.
“등급도 높지 않고, 나로도 충분할 것 같아.”
돕고 싶은 재영의 마음을 알아챈 윤서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형 옆에 서서 방사 가이드라도 할게요.”
재영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윤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역시 너였구나.”
재영의 개입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침착했다. 하긴. 자신이 해야 할 가이딩의 양이 줄었는데 윤서 정도의 베테랑이 알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윤서는 재영을 데리고 벽을 만드는 에스퍼에게로 갔다. 손을 잡은 정도라지만 A급 가이드의 집중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의 회복은 금방이었다. 녹은 얼음처럼 흐물거리는 지경까지 간 벽이 다시 단단해졌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만들어진 메테오는 시전자조차 없앨 수 없었다. 벽이 무너지면 꺼지지 않은 불꽃이 새로운 먹이를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 없는 서훈이 손을 휘둘렀다. 그에게 조종당한 크리처들이 서로를 메테오가 만들어 낸 커다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불이 붙은 크리처들이 빠져나가려고 허우적거렸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지옥의 불’은 뼛조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걸 태워 버렸다.
그러자 뚫려 있던 벽이 위로 늘어나 뚜껑을 덮었다. 가둬진 불은 더 타오르지 못하고 조금씩 부피를 줄여갔다. 이제 그 안에서 움직이는 건 없었다.
“……다 잡은 것 맞지?”
모두가 벽 속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때, 경비원 중 하나가 고요를 깨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때마침 뱀의 혀처럼 하늘을 향해 낼름거리던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
“불이 꺼졌으니까 그런 것 같네요.”
해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보스가 아니라 중간에 만난 잡몹일 뿐이지만, 첫 축하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서 에스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예요?”
재영은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구덩이 속에 들어간 에스퍼들이 죽은 크리처의 사체를 뒤적이고 있었다.
“나라에서 홍보까지 해 가면서 던전을 차지하려고 하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던전에서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광물이 나온다는 건 알아요.”
그 정도는 에스퍼-가이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려고 입을 뗀 건 아닐 것이다.
“혹시 크리처의 사체도 돈이 되는 거예요?”
눈썹까지 모으며 고민하던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서가 잘 가르쳐 놓은 제자의 성장을 본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크리처는 아주 특별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대. 사체로 무기도 만들 수 있고, 특별한 도구를 제작할 수도 있어.”
“저렇게 다 태워 버렸는데 남는 게 있을까요?”
“에스퍼한테는 필요한 걸 알아보는 특별한 힘이 또 있다고 해.”
그건 에스퍼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거라서 센터에서 수거는 주로 등급이 낮은 에스퍼들이 담당한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한 건 하랑 길드원들을 못 본 척하며 구석으로 피하는 센터 소속 경비원들이다.
“결국 던전은 대한민국 땅에 나타나는 거고, 그래서 우리 소유의 던전이라도 국가나 땅 주인에게 막대한 세금 혹은 보상금을 줘야 해요.”
의아함에 입을 떼려는데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문용이 재영의 바로 등 뒤까지 와서 에스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리처 사체를 다루는 기술자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대부분이 국가에서 지원한 전문 인력이죠.”
문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어디든 어두운 부분은 있기 마련이에요.”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센터에 보고하실 건가요?”
윤서에게 떠보듯 묻는 문용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메테오가 크리처의 형체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다는 건 당연히 보고해야겠죠.”
윤서가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구석으로 간 경비원들도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안심한 목소리로 감사를 전한 문용이 눈인사를 하고는 에스퍼들에게 다가갔다.
“센터에서 하급 에스퍼에게도 일괄적으로 나눠 주는 방어구조차 제대로 갖춘 사람이 없어.”
문용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윤서가 입을 열었다. 센터와는 달리 제대로 대우도 못 받는 길드 소속 에스퍼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잘 보존된 시체는 연구용으로도 쓰여.”
윤서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재영에게 손짓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할 기세에 재영 또한 긴장하며 귀를 댔다.
“연구소 직원 중에 진사헌 에스퍼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 알아?”
동준에게 듣기로 에스퍼 진사헌은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당당한 태도 때문에 팬만큼이나 안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과장이야 있겠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재영의 흥미를 돋웠다.
“연구 자료를 멀쩡하게 데려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에스퍼거든.”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죽어라 덤벼드는 크리처를 멀쩡하게 잡아가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그때 메테오를 불러낸 강해영 에스퍼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내가 불러낸 능력에 내가 당할 뻔했잖아요.”
무사히 크리처를 가두는데 성공해서 한시름 놓았는지, 에스퍼들이 윤서를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쏟아지는 인사치레에 윤서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다른 에스퍼님들이야말로 저희를 구하셨죠.”
메테오를 불러오느라 큰 힘을 쓴 해영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가이딩해 드릴까요?”
지친 얼굴을 바라보던 윤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속 가이드가 있으면 제 일을 뺏었다고 불쾌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았는데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해영이 흔쾌히 윤서에게 손을 내주었다. 윤서의 가이딩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해영 에스퍼의 얼굴에는 금세 생기가 감돌았다.
“우리 팀은 현장 가이드가 없어서 이럴 때 곤란하다니까요.”
“가이드가 없다고요?”
윤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A급 에스퍼가 셋이나 포함된 팀이니 길드의 최고 전력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던전에서 그들을 지킬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쓰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길드 상황이 그렇게까지 안 좋은가요?”
재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하랑’은 가장 인기 많고, 평도 좋은 길드다. 그런 ‘하랑 길드’가 가이드가 부족할 정도면 여타 길드들은 어떻단 말인가.
“가이드는 항상 부족하고, 현장까지 뛰려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으니까요.”
재영의 물음에 해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면서 하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던전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잖아요.”
센터에서 가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 하는 줄 아는 윤서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재영의 입장에서는 센터와 길드의 가이드에 대한 처우가 다른 것이 분명히 보였다.
“가이딩 필요하신 분들 있으면 저한테 오라고 전달 좀 해 주세요.”
씁쓸한 얼굴로 입맛만 다시던 윤서가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내뱉었다.
“괜찮겠어요? 방사 가이드도 꽤 하시던데…….”
해영이 말꼬리를 흐렸다. 윤서의 제안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눈치였다. 윤서가 슬쩍 재영을 쳐다봤다. 그 가이딩 내내 재영이 함께해서 해영이 추측하는 것만큼 힘든 상황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멀쩡합니다. 접촉은 방사보다 힘이 덜 들고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보며 재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몰래 방사 가이딩을 한 것과는 또 달랐다.
‘사헌이 형이 연락만 돼도 물어볼 텐데…….’
재영이 가이드라는 정체를 드러내고 나서지 못하는 건 자신이 사헌의 ‘전담 가이드’라서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가이딩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묻고 싶은데 던전 안으로 들어오는 게 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 제품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던 재영의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훈이었다.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너도 가이드잖아.”
서훈이 재영의 앞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단정적인 말투에 재영은 헛숨을 삼켰다.
에스퍼의 능력이 다양한 것처럼 가이드의 기운도 모두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매칭률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고.
그러니까 재영은 윤서의 뒤에 숨어 방사 가이딩을 할 때부터 예민한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미리 각오했는데도 막상 그 상황이 오자 움찔 놀라고 말았다.
“저쪽보다는 네 가이딩이 나한테 더 맞는 것 같아서.”
서훈이 재영을 가만히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재영은 먼저 주변을 살폈다. 에스퍼의 신체 능력은 보통 수준을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윤서의 가이딩 홍보 덕인지 시끌시끌하고, 이쪽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접촉 가이딩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인데 어느 정도 보답의 의미로 괜찮지 않나. 한 번에 여러 명을 상대하면 윤서도 지칠지 모른다. 가는 동안 크리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게다가 방사 가이딩은 이미 했잖아. 한 번하나 두 번하나.’
재영은 나중에 사헌을 만났을 때, 그가 알아채고 추궁이라도 하면 자신을 보호할 변명거리도 생각해 두었다.
“음, 방사라도 상관없다면…….”
“네가 해 주는 거니까 편한 대로.”
서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실랑이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안심한 재영은 은근슬쩍 훈을 몰고 구석으로 갔다.
“내가 가이드라는 건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재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이드라는 게 알려진 후에도 가이딩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도 마음이 훨씬 불편해질 것 같았다.
“그래.”
서훈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