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학교 경영학과 신입생 환영회는 학교 정문에 있는 술집에서 열렸다.
선후배는 물론이고, 신입생끼리도 친해질 수 있도록 짜둔 동선에 따라 두 시간이 넘도록 움직이다 보니 나중에는 어느 테이블에 앉아도 어색하지 않게 됐다.
재영은 사이다로 입을 헹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곧 신경 쓰이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탁!
술기운이 올라 힘 조절에 실패해 술잔이 세게 놓였다.
“옆으로 조금만 가 주라.”
재영은 자기 앞에 떨어진 술잔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사람을 향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아, 뭐야. 깜짝 놀랐잖아.”
동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으로 비켜 앉았다. 비워진 자리를 차지한 재영은 맞은편에 앉은 동기가 보기 편하게 메뉴판을 펼쳤다.
“정민이 너는 안주 뭐 좋아해? 총무 누나가 하나 더 시켜도 된대. 우리 먹고 싶은 걸로 고르자.”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친근한 태도에 정민이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쪽 아니야? 그럼 탕으로 볼래?”
재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메뉴판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섬세함이 부족해서 자꾸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갔다. 재영은 미간에 입술까지 모으며 메뉴판에 집중했다.
“응? 왜 안 넘어가지?”
“아, 아니야. 거기서 고를게.”
“그럴래? 탕 좋아?”
정민이 웃음을 지우지 않는 재영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바로 손을 번쩍 들었다.
“이모! 여기 소시지 세트 하나요. 그리고 콘옥수수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돼요?”
탕이 좋냐고 해놓고 시킨 건 소시지 세트다. 동기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거기다가 재영이 서비스로 원한 것은 기본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엄연히 메뉴판에 존재하는 인기 메뉴였다. 그래도 술이든 안주든 워낙 아끼지 않고 시켰으니 서비스 하나 받는 게 진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 김재영! 여기 안주 바닥 내놓고 또 뭘 시켜!”
먼 테이블에서도 재영의 목소리를 들은 총무 선배가 윽박질렀다.
“봤죠? 웬만하면 저도 주문하고 싶은데 또 시키면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재영은 귀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밝게 웃던 얼굴에서 울상을 지으니 그 효과는 더 컸다.
“으이그. 뻔한데 내가 넘어가 준다.”
“감사해요, 이모!”
재영은 웃으며 돌아서는 사장님을 보고 팔을 들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여기 단골이야?”
식당 사장님과의 친근한 대화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기가 재영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니. 처음 와 봤는데?”
재영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너는 이런 데 많이 와 봤어?”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앞자리 친구에게 질문을 넘겼다. 테이블에 팔을 얹고 앞으로 몸을 쭉 빼서 거리가 확 가까워졌다.
“아, 아니. 나는 시골에 살아서……. 거기에는 이런 곳이 없고…….”
“가온에 안 살았어? 그럼 어디서 왔어?”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정민도 반쯤 강제로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 달무리시 옆에 있는 곳 맞지?”
재영의 물음에 정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말해도 잘 모르는 곳인데.
“엄청 멀리서 왔네. 나중에 그 근처에 놀러 가면 너한테 연락해도 돼?”
“거기에 관광지가 있기는 한데…….”
재영은 불쑥 스마트폰을 건넸다. 말을 멈춘 정민이 당황한 듯 그를 힐끔거리면서도 번호를 찍었다.
“나도 번호 줘!”
그러자 정민의 옆에 있던 동기도 그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렇게 테이블에 번호 교환의 장이 열렸다. 그리고 또 술자리에 빠질 수 없는 게임이 시작됐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벌주의 주인공은 재영의 옆자리 동기였다. 재영은 조금 전의 게임에서도 그 친구가 걸렸고, 그때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던 걸 기억해냈다.
“이거 나 마셔도 되지?”
재영은 동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부가 시끄러워서 바로 옆 사람 말고는 듣기 힘든 정도였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어? 그, 그런데…….”
재영의 제안에 동기는 기뻐하면서도 머뭇거렸다. 남자가 남자의 흑기사를 해 주는 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영은 허락의 뜻으로 알아듣고 미리 물을 채워 놓은 잔과 바꿔치기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동기의 입술에 술잔을 마구 밀었다. 남들에게는 억지로 먹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들 동기가 술잔을 꺾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재영은 얼른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미리 내려놓은 맥주잔에 술을 부었다.
“아…….”
그 과정에서 술기운에 몸이 휘청하는 바람에 넘친 술이 손을 적셨다. 재영을 쳐다보던 옆자리 친구가 재빨리 티슈를 건넸다.
“고마워.”
“그런데 재영이 너는 같은 학교에서 온 친구 있다면서?”
티슈로 손을 닦던 재영은 누군가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저건 친구가 아니라 웬수지, 웬수.”
재영은 의자를 밟고 일어선 민태를 눈으로 가리켰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를 바라보는 재영의 눈에는 애정이 넘쳤다.
“쟤는 원래 저렇게 놀아?”
동기 중 하나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정신 못 차리고 몸을 흔드는 민태를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주 보던 모습이라 별생각이 없던 재영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 친구들끼리 있으면 저것보다 심할 때도 있지.”
심지어 그건 술도 마시지 않고서였다. 덧붙인 말에 재영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뭐, 축제 때 써먹을 녀석 하나는 확실히 있어서 다행이네.”
어느새 또 자리가 바뀌었는지 재영의 맞은편에 앉은 학회장이 잘됐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긍정적인 반응에 다른 사람들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 노는 거 구경 그만하고 우리도 좀 놀아 볼까?”
“네!”
누군가 먼저 잔을 높게 들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기 잔을 들었다. 누구는 소주, 누구는 물, 누구는 음료수. 내용물은 다양했다. 어느 한 사람도 술을 강요하지 않아서 신입생 환영회의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이야-, 이번 신입생들 물이 좋네?”
가래가 낀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입구에 가까운 쪽에 앉은 사람은 전부 돌아볼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재영은 선배들을 중심으로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겁도 많은 민태가 재빨리 테이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등장한, 아마도 과 선배일 것이 분명한 남자가 민태에게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 이번 신입생들 물이 좋네?’
생긴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첫인상으로 박혀 버린 그의 발언 때문인지 평범한 주먹코마저 심술궂은 성격을 보여 주는 것 같다고 느꼈다.
‘여기가 클럽입니까? 물이 좋고 말고 하게.’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사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라면 분명 그렇게 받아칠 것 같았다. 상상만 했는데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도 형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재영은 사헌과 달리 조용히 눈치밖에 살피지 못하는 제 모습에 씁쓸하게 웃었다.
“선배님. 오셨어요?”
남자의 걸음이 테이블 앞에서 멈추기 직전. 학회장이 벌떡 일어나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학회장 주변에 있는 다른 선배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야, 박민주.”
‘선배님’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학회장의 이름을 불렀다. 제 몸의 반이나 될까 싶은 후배에게 향하기에는 퍽 위협적인 음성이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살피던 재영은 언제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뺐다.
“애들 모아 놓고 나한테는 연락도 안 해?”
이번에는 처음 ‘선배님’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던 안쪽의 사람들까지도 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시끌벅적했던 술집 안이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썰렁해졌다.
“이제 나는 선배도 아니다, 이거냐? 어?”
‘선배님’이 얼굴을 사납게 구기며 시비를 걸었다. 재영은 슬핏 미간을 좁혔다. ‘선배님’의 말을 들은 사람은 전부 그랬다. 와서 몇 마디 내뱉지도 않았는데 선배들이 왜 연락을 안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유, 선배님 아직 학교에 계시는 거 뻔히 아는데 그럴 리가 없죠.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민주가 달래듯 말을 건네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선배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직’이라는 말에서 흘러나온 뉘앙스는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그 정도 눈치니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도 그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겠지만.
“학과실에 연락해서 겨우 알아냈잖아. 조교님이 나를 뭐로 보겠냐, 어?”
눈치 없이 아무 자리에나 끼려는 것으로 보겠지.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선배님 요즘 취업 준비하시느라 바쁘잖아요. 괜히 신경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죠.”
살갑게 ‘선배님’을 대하는 민주의 태도에 재영은 내심 감탄했다.
‘학회장은 진짜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얼굴 한 번 구기지 않았다.
“평소에 얼마나 빡세게 하는 줄 알아? 한 번씩 이렇게 환기도 하고 해야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본인이 필요해서 하는 준비인데 ‘선배님’은 생색을 내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게 다 네 사회생활에 도움 되라고 해 주는 이야기야, 알겠어?”
“네, 그럼요.”
사회생활을 해 보지도 않은 것 같은 ‘선배님’이 거드름을 피우며 민주가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자자, 주목!”
‘선배님’의 옆에 선 민주가 목소리를 높여 주의를 끌었다. 이미 모두가 아닌 척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분은 10학번 길성필 선배님이시다.”
10학번이라는 말에 20학번 신입생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경악이 터졌다.
‘10? 그렇게 오래 학교에 다닐 수 있나?’
‘10년 동안 대체 뭐 한 거래?’
‘그 정도면 학교가 집 같기는 하겠다.’
신입생들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은 채로 대화를 이어갔다.
“항상 도서관 3층에 계시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커피 한잔 사 들고 가서 여쭤보고 해. 그래도 되죠, 선배님?”
민주의 말에 성필의 얼굴에 남아 있던 불퉁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당연하지. 내가 안 들어 본 수업이 거의 없으니까 꿀팁 얻고 싶으면 잘해.”
“넵!”
“네, 네!”
눈치 빠른 재영이 빠르고, 크게 대답하자 나머지도 벙벙하게 따라 외쳤다.
“대답은 기똥차게 잘하네.”
성필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민주가 잘했다는 듯 흐뭇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번 신입생 대표는 누구야? 얼굴 좀 보자.”
의자에 등을 거의 묻다시피 앉은 남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분위기는 남자가 처음 등장할 때보다 몇 배는 더 싸하게 가라앉았다. 기분 좋게 오른 술기운이 다 날아갈 지경이었다. 질척한 눈빛 때문에 그가 말하는 ‘대표’가 잘난 것이 얼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너잖아, 김재영.”
눈치 없는 서민태를 빼고는.
재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민태의 행동에 선배들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굳은 분위기가 풀렸으니 잘됐다고 해야 할까. 재영은 실소를 흘렸다.
“김재영?”
남자는 노골적으로 여자애들 쪽을 눈으로 훑으면서 재영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애들은 선배들마저 쩔쩔매는 선배의 등장에 싫은 티도 내지 못하고, 실수로라도 시선이 마주칠까 봐 덜덜 떨고 있었다.
“네, 접니다.”
여학생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재영은 팔을 번쩍 들고 비틀거리며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서 소주잔을 내밀었다.
“20학번 김재영입니다. 선배님들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배님!”
“어어, 그래?”
‘선배님’은 제 의도와는 다르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자를 당혹스럽게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듯 병을 들었다.
“아, 이 자식들. 사람 없는 데서 또 무슨 얘기를…….”
겁난다는 듯 말하지만, 기대되는지 입꼬리가 씰룩였다. 제가 남들이 꺼릴 만한 성격이라는 건 생각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 뭐라고 하디?”
남자가 재영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한참 멀리서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할 거면서 얼굴은 왜 붙였는지 모르겠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귀를 적시는 숨결이 기분 나빴다.
‘사헌이 형이 할 때는 이런 느낌 아니었는데…….’
“응? 뭐라고 했냐니까?”
재영의 속내를 모르는 남자가 친한 척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재촉하듯 어깨를 주무르는 손아귀가 상당히 억셌다.
“우직하고, 남자다운 분이라고 하시던데요?”
재영은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말갛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또 뭐래?”
“박식하시니까 모르는 거 물으면 친절하게 도와주실 거라고…….”
“또?”
하지만 염치없는 사람은 욕심도 많았다. 당연히 들은 이야기가 없기에 재영은 잠깐 말을 멈추고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막 뱉으면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재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함에 입 안의 여린 살만 깨물었다.
“에이, 선배님은 부끄럽게 무슨 그런 말을 물으세요.”
그때 학회장 민주가 기다렸다는 듯 소주병을 들며 남자를 만류했다. 도저히 남자를 상대로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재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학회장님이 민망하신가 봐요.”
재영도 학회장의 말에 보탰다. 원래 민주를 부르는 호칭은 누나였지만, 그녀가 성필을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이상 그렇게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재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두 손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거의 쉬지 않고 술을 마셔서 손이 떨렸지만, 진상을 상대하려면 고될 민주의 짐을 덜어 주고자 했다.
“그래. 내가 남자한테는 술 안 주는데 영광인 줄 알아.”
쓰레기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했다. 재영은 짜증 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도 한잔 따르겠습니다!”
“난 여자가 따르는 술만 마시는데…….”
재영은 입 안의 살을 꽉 깨물었다. 하마터면 애써 그려 낸 미소가 일그러질 뻔했다.
“술은 좋은 마음으로 따라야 맛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억지로 끌어낸 재영의 너스레에 성필이 웃으면서 한 번 따라 보라는 듯 술잔을 내밀었다. 재영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자꾸만 풀리는 눈이 문제였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성필이 그런 재영의 얼굴을 빤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근데 넌 진짜 남자 맞냐?”
성필의 물음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귀엽다거나 어려 보인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성별을 의심받는 건 처음이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남자 아닌가요?”
재영은 가슴을 쫙 펴며 보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술기운에 혀가 짧아져서 도리어 애교만 돋보였다.
“무슨 남자가 살결이 이렇게 뽀얘?”
성필이 손을 뻗어 재영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땀이 많은 체질인지 닿은 부분이 축축해서 찝찝했다. 재영은 제 뺨을 쓰는 척 성필의 손을 떼어 냈다.
“엄마 닮아서 그런가 봐요. 피부는 큰누나랑 닮았고…….”
재영은 의식하지 못한 채 고개를 양쪽 번갈아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누나가 있어? 너랑 닮았냐? 몇 살? 솔로?”
손바닥보다 작은 소주잔을 머그컵처럼 들고 홀짝거리던 재영은 반복되는 질문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누나가 있다고 하면 흔히 듣는 말이지만.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 처음이었다.
“뭐, 솔로 아니어도 확실히 꼬실 수는 있지만.”
성필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꺾었다.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래서 몇 살인데? 너랑 닮았냐니까?”
자꾸만 재촉하는 말에 재영은 좀 성가시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흐릿한 눈으로 성필을 쳐다봤다. 저와 닮은 것에는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만 엄마 닮았고, 형, 누나들은 아빠 닮았다고 하던데요.”
“그래?”
성필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누나들이랑 안 닮아서 다행이네.’
재영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필이 누나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어도 절대 그럴 마음은 없지만 그랬다가는 학교생활이 피곤해졌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너는 여자친구 있냐?”
“아니요, 아직.”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재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소재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재영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기며 수줍게 웃었다.
“이거 설마 아직인 거 아니야?”
장난스레 던진 성적인 물음에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남자끼리 있어도 친하지 않은 사이에 불편한 언급이었다. 하물며 지금 테이블에는 여자 선배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이야기는 좀…….”
“다 성인인데 뭐 어때서.”
주위를 둘러본 성필이 깨인 사람인 척 당당하게 성추행을 했다.
“살도 이렇게 야들야들해서 여자들이 좋아하겠냐?”
마침내 재영이 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동성끼리의 장난이라고 해도 선을 넘었다. 하물며 두 사람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이런 더러운 소리의 주인공이 여자애들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필이 음흉한 눈빛으로 재영을 힐끔거렸다. 허물없는 농담인 양 하는데 묘하게 기분 나쁜 소름이 전신을 뒤덮었다.
“걱정 마! 누님이 책임지고 예쁘고, 착하고 눈치 빠른 여자친구 소개해 줄게.”
그때 민주가 재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다. 재영은 가까스로 말을 목으로 넘겼다.
“진짜요? 나중에 입 싹 씻으시면 안 돼요?”
재영은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민주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어리광이 묻어나는 말투에 민주가 살짝 움찔했다.
“민태 좀 불러와 봐.”
민주가 옆에 앉은 친구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면서 재촉했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봐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재영을 살폈다. 평소에도 잘 웃기는 하지만, 지금은 누구 꼬시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달콤하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거 취했네, 취했어.’
추측일 뿐이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재영이 취했나?”
안타깝게도 재영의 바로 옆에 앉은 이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이거 내가 챙겨가야 하는 건가. 아아, 뒤처리는 질색인데.”
묘하게 들뜬 음성에 민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엇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귀찮은 일에 나선다는 게 전혀 성필답지가 않았다.
‘남자도 가능한 쓰레, 아니, 사람이었나?’
민주가 가늘어진 눈으로 성필을 샅샅이 훑었다. 재영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예쁨받을 녀석이기는 하지만 그게 그런 느낌은 아니지 않나.
“어? 서훈이다!”
“서훈?”
그때 성필의 신경을 앗아갈 소란이 일었다. 빡빡머리에 키가 큰 남자가 가게로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경영과 학생은 물론 같은 장소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하는 다른 과까지 난리가 났다.
“웬일이래?”
“오늘 출동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같은 과라고 이쪽은 좀 여유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쑥덕거리는 말을 듣고 성필이 눈을 반짝였다.
“뭐야? 쟤도 우리 과냐?”
성필이 엉덩이를 들썩하며 안달했다. 아무도 그에게 ‘서훈’이 경영에 들어왔다고 말해 주지 않은 듯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달려가 말이라도 걸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모양 빠진다고 생각하는지 쉽게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에스퍼와는 거리를 두고 싶은 재영은 성필의 신경이 제게서 멀어진 사이에 테이블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뜨다가 만 흐린 눈에 수박을 든 손이 보였다.
“형, 아.”
손의 주인공을 확인한 재영은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아, 입을 벌렸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과 형이 이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수박을 입에 넣어 줬다.
“고맙습니다.”
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과즙을 즐긴 재영은 눈을 접어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 이쪽으로 온다.”
그러던 중 성필에게서 기쁨 섞인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서훈이 거침없이 이쪽 테이블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에스퍼잖아. 도망가야 해.’
취한 와중에도 그 사실을 떠올린 재영은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놈 이거 완전히 갔네.”
그때, 민주의 등 뒤에서 피곤에 절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태야아.”
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술에 취한 재영이었다. 민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자 재영은 그의 팔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설렘 섞인 비명까지 터져 나왔다.
“민태야. 재영이 집 알지?”
민주가 반쯤 확신하며 물었다. 두 사람이 소꿉친구라는 건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다. 민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가 잘 됐다는 듯 얼굴을 밝혔다.
“왜? 둘이 무슨 사이인데 집을 알아? 학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친해졌을 리는 없고…….”
성필이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불쾌한 것 같기도 한 복잡 미묘한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서훈’에게 정신이 완전히 팔렸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저랑 재영이랑 십년지기라서요.”
“그럼 네가 얘 좀 데려다 줘. 2차 가고 싶으면 연락하고.”
“2차 가요?”
민태가 재영과 반응 좋은 방청객들을 힐끔거리며 가늠했다. 그리고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 굳이 제가 데려다 줄 건 없고, 재영이랑 같이 사는 형이 있는데 제가 연락을…….”
재영만큼은 아니지만 민태도 술에 꽤 절어 있었다. 그래서 순간 ‘재영과 같이 사는 형’이 누군지 깜빡한 것이다.
<킹제네랄갓진사헌공주님>
연락처를 뒤지던 민태의 손이 멈칫했다. 웅장한 그 이름이 눈에 보인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같이 사는 형?”
민태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오묘한 표정의 성필이었다.
“어……, 재영이가 치, 친구 형이랑 같이 자취하거든요. 둘이 친해서…….”
민태가 울상을 지었다. 함부로 사헌과 재영이 친하다는 말을 꺼낸 혀를 깨물고 싶었다.
“친구 형이랑 산다고……?”
친구도 아니고 친구 형이랑 함께 산다는 말에 성필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짧은 순간에 미소 지었다가 인상 찌푸렸다가를 반복했다. 중요한 건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 신기하네.”
“네, 네. 그러니까 잠깐 전화만 하고 다시 올게요.”
민태가 폰을 들어 보이며 민주 쪽으로 살짝 재영을 밀었다. 그러고도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일부러 그럴 거 없어. 내가 데려다 줄게.”
그때 민태의 뒤쪽에서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민태가 뒤를 돌아봤다. 피리 부는 소년처럼 뒤에 팬들을 주렁주렁 매단 서훈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후, 더 어리둥절해졌다.
“네가? 네가 왜?”
그도 그럴게 서훈과 재영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와서, 그것도 오자마자 재영을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는 게 영 이상했다.
“인사만 하려고 들른 거야. 차도 가져왔으니까 가는 길에 내려 주면 돼.”
그것도 네가 왜, 라는 말에 답은 아니었다. 나 모르게 좀 알고 지냈나, 하는 생각에 어리둥절해하던 민태는 그 순간에 재영이 가이드라는 걸 숨기고 싶어 했다는 걸 떠올렸다.
“아, 아니야. 내가 챙길게. 그럴 수 있어.”
민태가 고개까지 내저으며 굳은 의지를 보이자 서훈은 더 우기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럼 재영이는 민태가 책임지고 데려다 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친 민주가 민태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압박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한 성필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도 이만 일어날까?”
그대로 앉아 눈동자를 굴리던 성필이 슬쩍 엉덩이를 들었다. 어딘지 미심쩍은 그 행동이 민주의 걱정이 유난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다.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모처럼 나오셨는데 2차까지 가셔야죠.”
민주가 민태를 따라 나가려는 성필의 팔을 붙들었다. 가히 처절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태가 제 팔에 들러붙는 재영을 거의 보쌈하다시피 들고 나갔다.
재영이 아무리 귀엽게 생겼더라도 갓 성인이 된 남자로서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니까 더럽게 무겁다는 소리다.
“내가 왜 하필 찹쌀떡이랑 같은 과로 왔지?”
도망치듯 술집에서 나온 민태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게 다른 과에서 자유를 즐기고 있을 해운과 아예 다른 학교로 간 동준이었다.
“내가 순진했지. 같은 과 가면 시험 공부도 같이 하고, 과제도 나눠 할 수 있으니 편하다는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부러워해 봐야 바뀌지 않을 현실에 민태는 한숨과 함께 스마트폰 화면을 건드렸다. 아까 놀라서 화면 채로 꺼 버린 터라 곧장 사헌의 연락처가 떠 있었다.
- 왜 너야.
신호를 제대로 듣기도 전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마자 뚝 끊기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서민태입니다!”
액체 괴물처럼 흘러내리는 재영을 추어올리던 민태는 바짝 굳어서 큰소리로 제 소개를 했다. 쫓기듯 나간 민태가 걱정되어 나와 본 민주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김재영 바꿔.
건너편의 사헌이 그건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까칠하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심기가 불편한 게 어지간해서는 못 알아챌 민태에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그게 재영이가 좀 취해서요.”
제가 술을 먹인 것도 아닌데 안절부절못하고 난리였다. 민주가 그런 민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 그런데 직접 오시게요?”
민태가 머뭇거리며 사헌에게 물었다. 차마 ‘재영이가 싫어할 텐데…….’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근처에 차 세울 테니까 데리고 나와.
잠시 후. 짧은 침묵 끝에 사헌이 문자 잘 보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끊었다. 민태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싸늘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
민태는 뒤늦게서야 무려 S급인 사헌이 제 속삭임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버리고 가고 싶다.”
민태는 간절한 눈빛으로 재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근데 왜 어디냐고는 안 물으시지?”
민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진사헌인데 아무렴, 하고 납득했다. 잠시 통화하는 사이에 여자애들이 재영을 둘러싸고 말을 걸고 있었다.
“재영아. 괜찮아?”
“응, 괜찮아.”
“많이 힘들면 내가 저기 가서 숙취 해소제 하나 사다 줄까?”
“아니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재영은 이어지는 답이 모순되는 줄도 모른 채 빙글빙글 웃으며 일일이 대꾸해 주고 있었다.
“연락됐으니까 금방 오실 거예요. 저는 저쪽에서 기다릴게요.”
재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사헌이라는 걸 방방곡곡 알릴 셈도 아니어서 민태는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기려고 했다.
“왜? 힘들 텐데 여기서 기다리지.”
“맞아. 저기 앉을 곳도 있는데.”
재영을 그냥 보내기엔 아쉬웠는지 여자애들이 건너편 편의점의 의자를 가리켰다.
“아니야. 데리러 오는 형님이 쑤, 쑥스러움이 많으셔서 안 돼.”
민태는 겨우 말을 끝냈다. 사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붙이려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형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흐느적거리던 재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누군지 딱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태는 재영이 혹시라도 사헌의 이름을 꺼낼까 걱정이 됐다.
“그럼 가 볼게요!”
민태는 누가 붙잡기 전에, 그리고 재영이 어마 무시한 이름을 내뱉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민태야아. 우리 어디가?”
재영이 제 팔을 끌어당기는 민태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방싯거렸다. 민태는 엉겨 붙는 재영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애정 표현을 좋아하는 녀석의 술버릇은 뿌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형은 이 녀석 술버릇 아시려나?”
친구들끼리는 주량을 알고, 버릇을 알아서 밖에서 사고 치지 말자는 핑계로 정신 놓을 때까지 먹은 경험이 있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때 찍은 영상은 두고두고 쓰일 참이었다.
“꼴 보기 싫다고 내던지시진 않겠지?”
민태는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형님이 그래도 재영이는 많이 귀여워하고, 또 재영이가 형님 가이드니까…….”
민태는 사헌이 재영을 내칠 수 없는 이유를 하나씩 주워섬겼다. 그러다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어느새 잠든 재영을 옆구리에 끼고 가이드와 에스퍼에 대해 검색했다. 에스퍼는 페어 가이드를 만나기 힘들기 때문에 아주 소중히 여긴다는 이야기가 있어 조금 안심했다.
“아니, 근데 내가 위험한 거 아니야?”
에스퍼는 가이드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도 강하다는 문구에서 멈칫했다. 그게 에스퍼의 등급이 높을수록 심하다고…….
“괜히 모르는 사람한테 붙어 있는 꼴 보이는 것보다 낫겠지.”
누가 들어도 불안함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린 민태는 고개를 내젓고는 아무 자리에나 주저앉았다. 기다리는 일뿐이었는데 당장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지치는 기분이었다.
* * *
사헌은 늘 보던 차가 아닌 낯선 차를 타고 나타났다. 비싼 차이기는 하지만 그의 벌이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것이라 민태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혀엉!”
차에서 내린 사헌을 발견한 재영이 그를 부르며 자신을 안으라는 듯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목소리에서도 애교가 철철 넘쳤다. 사헌의 눈가가 찡그려지는 것이 민태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미쳤어? 저분은 공주님이야!”
민태가 기겁하며 재영을 결박하듯 뒤에서 끌어안았다.
“너야말로 미친 것 같은데.”
사헌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민태를 압박했다.
“허, 헉!”
한걸음 거리에 서 있는 사헌을 발견한 민태가 숨을 헐떡였다. 사헌이 그런 민태를 더럽다는 듯 흘겨봤다. 그리고 민태의 팔 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재영을 그에게서 떼어 냈다.
재영은 결박이 풀리자마자 사헌의 품에 뛰어들었다. 거칠게 내쳐진 친구의 팔은 안중에도 없었다.
“야, 야! 김재영! 술에 꼬라박았어도 누울 자리는 알아야지!”
민태는 팽개쳐진 제 팔처럼 재영이 바닥을 구르게 될까 걱정됐다. 다시 끌어당기려고 팔을 뻗었는데 또다시 사헌에 의해 막혔다.
재영은 아무런 방해 없이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빌 수 있었다.
“눈 감았다가 뜨니까 형이 있네.”
재영은 사헌을 기다리는 동안 민태에게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제대로 뜨지 못한 눈으로 샐샐거리며 사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뽀뽀할까요?”
뒤에서 상처받아서 울먹이는 제 친구를 알지도 못한 채 재영은 턱을 들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재영의 허리를 마주 안은 채 고개를 내리던 사헌의 눈에는 질겁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민태가 똑바로 보였다.
사헌은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이러다가 진짜 못 볼 꼴을 다 볼 것 같은 기분에 민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네 친구가 저기서 보고 있는데, 진짜 해?”
사헌이 재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이야 상대가 부모님이라도 보여 주는데 망설임이 없지만, 재영은 아니었다. 괜히 해 달라는 대로 해 줬다가 스킨십은 당분간 금지네, 어쩌네 하는 개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재, 재영이랑 정말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사헌은 더듬더듬 말을 잇는 민태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뜻이냐 따지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 아니, 얘가 술 취하면 치대기는 해도 뽀, 뽀……해 달라는 말은 처음 듣거든요.”
“취하면 치댄다고?”
사헌이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 술버릇이……. 같이 술은 안 마셔 보셨구나.”
민태는 점점 더 살벌해지는 얼굴을 보며 말소리를 줄였다. 아는 사람 누구나 인정할 만큼 눈치가 없는 그지만, 생존 레이더만큼은 날카로웠다.
“저,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셔서…….”
민태는 대학이 집과 가까워서 자취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처음에는 지겨워했지만, 덕분에 핑계로 삼을 수 있어 감사했다. 사실 귀엽지도 않은 아들, 늦게 오든 아예 안 들어오든 그 사실조차 관심 없는 두 분이지만.
사헌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태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사라졌다.
재영은 빠르게 멀어지는 민태의 뒷모습에 대고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곧 사헌에게 질질 끌려가 조수석에 앉혀져 안전띠까지 착착 채워졌다.
“근데 이거 무슨 차예요?”
사헌이 운전석에 앉자마자 재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술에 취했어도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싫다며. 새로 샀어.”
사헌은 안전띠를 매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그러자 어리둥절해하던 재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저 데리러 오고 싶어서 산 거예요?”
재영이 몸을 사헌 쪽으로 완전히 틀었다. 기쁨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재영의 등 뒤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새하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환경이든 사헌의 입을 막은 사람은 없었다. 하고 싶은 걸 참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그런데 기대로 반짝이는 재영의 눈을 보니 괜히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래.”
“우와.”
사헌은 미간을 좁혔다. 제자리에서 방방 뛸 기세의 재영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주려고 사신 차를 빼앗아 올 때는 살짝 자괴감이 들 뻔하기도 했는데, 이런 재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재영은 또 한 번 사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잘했으니까 뽀뽀!”
들뜬 목소리로 크게 외치더니 사헌의 얼굴을 끌어다가 입술에 쪽 소리를 내고는 떨어진 것이다.
“뽀뽀해 줬으니까 착하다고 뽀뽀.”
그리고 멀어진 재영이 이번에는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빠른 진행이다. 사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누구 좋으라고?”
사헌이 심술궂게 받아쳤다. 제가 멋대로 해 놓고 고마움의 표시로 또 내놓으라는 게 어이가 없다. 이런 버릇을 누가 들였는지는 뻔하다. 누구라고 고를 것도 없이 재영을 귀여워하는 가족 전부일 것이다. 아마 제 어머니도 지분이 있을 거고.
“안 해요?”
재영이 가만히 있는 사헌을 보더니 이마를 찡그렸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사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쪽.
과감하게 달려든 재영에 의해 사헌은 다시 한번 입술을 도둑맞았다. 피하고자 했다면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헌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말랑한 입술이 닿는 순간, 재영의 목덜미를 쥐고 그대로 그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으읍!”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방 정신을 차린 재영이 주먹 쥔 손으로 사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사헌이 아플까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힘 빠진 주먹의 노크에 사헌은 간질거릴 뿐이었다.
“왜.”
사헌은 그게 웃기고, 또 귀여워서 마지못해 입술을 떼고 물었다. 재영은 숨을 할딱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 없다고?”
사헌은 그 잠깐을 기다려 주지 않고, 재영을 끌어당겼다.
“읏, 이거 뽀뽀 아닌…….”
입술이 다시 붙기 전에 재영이 다급히 말을 뱉어 냈다. 사헌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건 7살에 뗐어야지.”
사헌은 단호하게 내뱉고 다시 혀를 깊게 넣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골난 표정을 짓던 재영이 포기한 것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사실 포기보다는 동조였다. 재영이 내쉰 숨이 사헌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활발한 재영의 성격처럼 그의 혀도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혀가 얽히면서 마시지도 않은 술에 절여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좋은 감정은 숨기지 않는 재영이 충실하게 달아오른 신음을 흘렸다. 사헌은 그런 재영의 셔츠 밑단으로 손을 내렸다. 여자라기엔 껍질이 두껍고, 남자라기엔 부드러운 피부. 아마 찹쌀떡처럼 새하얀 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뽀얀 색을 지녔으리라. 사헌은 몸 주인의 방치하에 뜨끈뜨끈한 살을 몇 번이고 탐색했다.
“하아, 입 더 벌려 봐.”
사헌의 재촉에 말간 눈을 깜빡이던 재영이 고개를 비틀었다. 깊어진 결합에 흡족해진 사헌은 칭찬하듯 재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사헌은 혀끝을 세워 재영의 입천장을 긁었다. 좋아하는 부분을 자극당하자 재영이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릉그릉거리며 입 안을 조였다. 처음에는 빳빳하게 굳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더니 이제는 제법 혀까지 섞으며 잘 따라온다.
사헌은 기꺼이 재영에게 빨려 주다가 혀를 빼 냈다. 아쉬운 듯 따라붙는 혀를 다그치듯 몇 번 깨물고 입술을 떼었다. 적당히 부푼 재영의 입술이 두 사람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많이 늘었네.”
사헌은 내내 쥐고 있던 재영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배부른 짐승 같은 흡족함이 묻어났다.
“혀, 흐으, 형이랑 연습해, 서…….”
어쩌면 사헌이 마음에 들어 할 소리만 골라 하는지. 에스퍼는 본능적으로 제 가이드에게 약해진다고 하지만, 그게 제게도 해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재영이 뭔가 불편한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끙끙 소리를 냈다. 사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비슷한 상태라서 그 이유를 알아채기는 쉬웠다.
“느꼈어?”
역시나 재영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재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흥분으로 축축하게 젖은 눈에는 사헌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키스까지만 하자고 한 건 너야.”
사헌은 거 보란 듯 말하며 안전띠를 풀었다.
“그건 너 혼자 해결해.”
사헌은 얄밉도록 웃음기 없는 얼굴로 태연히 내뱉었다. 그런 말을 뱉어놓고 관찰하듯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 기회를 주려는 듯했다.
재영은 홧홧한 입술을 잘근거렸다. 당장 급하긴 한데 이 핑계로 사헌이 제가 그어 놓은 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 뭐. 정신 못 차리게 술 마신 벌은 받아야지.”
입술을 비튼 사헌이 망연한 얼굴을 한 재영을 방치한 채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늘 환영회에서요.”
계속 곤란해할 줄 알았던 재영이 입을 뗀 것이다.
“……해서 정민이가 나중에 가이드해 주기로 했어요. 아! 그 가이딩이 아니라 여행 안내요.”
재영이 제 말이 웃겼는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사헌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재영은 개의치 않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또 10학번 선배님이 왔는데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재영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학교 근처서 신입생 환영회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이번 신입생 물이 좋네, 어쩌네 하는 거예요.”
재영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이야기하던 것처럼 사헌에게 몽땅 털어놓았다.
“대학교가 무슨 클럽이야? 물이 좋고, 말고 하게.”
사헌이 비소를 입에 걸고 말을 내뱉었다. 재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형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거든요. 근데 딱 맞잖아요.”
재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사헌은 묘한 눈빛으로 재영을 응시했다. 저 무해한 미소가 이토록 가깝게 여겨질 줄은 몰랐다.
“너 좀 집착하는 타입인가?”
그래서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장난기가 좀 섞였다.
“네?”
재영이 외계어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생소한 눈빛을 하고 쳐다봤다. 사헌의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놀러 가서까지 내 생각만 했다는 거잖아.”
사헌은 재영의 턱을 잡고, 아래쪽을 간질였다. 말로 뱉어 내니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놀란 눈으로 사헌을 바라보던 재영이 입을 벙긋했다. 하지만 소리로 나오는 건 없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무는 일이 반복됐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맞나?”
재영은 복잡한 얼굴로 횡설수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사헌의 얼굴에는 흡족한 기운이 만만했다.
“아무튼! 그리고 또 술은 여자가 따르는 것만 마시네, 어쩌네 하는 거예요. 그렇게 좋으면 집에 가서 엄마한테 따라 주라고 하던가.”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지 재영이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앗. 이건 아닌가? 그럼 취소!”
사헌이 그런 재영을 힐끗 쳐다봤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골이 난 얼굴이 볼만했다. 계속되는 토로에 사헌은 엷은 미소를 띤 채로 ‘선배’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 * *
형광등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이 뜨였다. 눈동자를 굴려 옆자리를 확인한 재영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읽고 있던 책을 닫는 소리가 모른 척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알려 줬다.
“너, 술버릇.”
사헌이 대화는 마주 보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재영은 부질없는 손가림막을 내렸다. 침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치미라도 떼면 좋을 텐데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정말 아무한테나 치대는 건가?”
“아, 아니요. 보통 웃음이 많아지는 정도인데…….”
울상을 지은 재영은 사헌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건 일어나면서부터 기억이 돌아온 재영도 의아했다. 술버릇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해지는데 사헌을 가족들과 똑같이 대했다니.
“형이 그렇게 편해졌나?”
재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니면 원래 하던 사이라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사헌과 나눈 입맞춤을 떠올리느라 새하얀 볼에 홍조가 피었다.
“나는 주정뱅이 혐오해.”
눈뜬 재영을 지그시 바라보던 사헌이 툭 내뱉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를 넘는다는 말에 재영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나 없는 데서 술 마시지 마.”
툭 내뱉은 사헌이 침대에서 벗어났다.
“네?”
재영은 상체를 들고 동그란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술 마시고 부르는 일 없게 하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너 묶어 놓고 가이딩만 받을 수도 있다고.”
진심이 아닐 리 없는 말에 재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둬 두고 싶지 않게 잘해.”
사헌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재영의 근처에 뭔가를 툭 던지고 방을 나갔다. 재영이 이불을 들쳐서 낯익은 스마트폰을 찾아냈다.
“밤새 시끄러웠겠네.”
상단에 뜬 무수한 알림을 확인한 재영이 중얼거렸다. 동기 단톡방은 메시지가 너무 많아서 대충 넘기고, 학회장의 개인톡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나 저 무사히 돌아왔어요!]
재영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너무 일찍 보낸 게 아닌가 후회했다. 술 마신 다음날은, 특히 그날이 휴일이라면 누구든 늦잠을 잘 권리가 있으니까.
[민주누나 : 재영이가 수고 많았다.]
그런데 민주에게서 곧장 답장이 왔다.
“이 누나는 진짜 에스퍼인 거 아니야?”
재영은 반쯤 농담으로 중얼거렸다. 학회장 일을 처리하면서도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척척 해 대는 덕에 과에서 도는 소문이었다.
“누나?”
그때, 머리 위에서 제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물 컵을 들고 선 사헌이 보였다. 메시지에 집중하느라 그가 방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학회장 누나요. 어제 잘 들어갔는지 걱정됐나 봐요.”
재영은 정신 못 차리고 취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머쓱하게 웃었다. 사헌이 협탁에 들고 온 물 컵을 내려놓고는 재영의 허리를 잡았다. 눈 깜짝할 새에 재영은 사헌의 다리 사이에 앉혀져 있었다.
“에스퍼는 무슨 소리야. 너 나 말고 다른 에스퍼 만나?”
사헌이 재영을 뒤에서 꽉 끌어안으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투가 꼭 의심하는 애인한테 추궁이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이게 에스퍼랑 가이드 사이에서 하는 대화 맞아?’
혼란스러운 기분에 재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는 연애도 해 본 적 없고, 가이드도 처음인지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누나가 일을 잘해서 붙은 별명이에요.”
재영은 사헌의 가슴에 기댄 등을 떼고 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리고 다른 에스퍼가 무슨 말이에요. 난 형 전담이잖아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말하자 뾰족하게 날 서 있던 눈매가 누그러졌다.
“잊지 마.”
무시무시한 얼굴로 말한 사헌이 물 컵을 재영의 앞에 끌어다 놨다. 재영은 사헌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꿀물이네요?”
컵에 입술만 대고 맛을 본 재영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헌은 제가 타준 꿀물을 마시고 촉촉해진 입술을 핥았다.
“꿀물이네.”
재영의 얼굴은 금세 붉게 타올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가이딩일 테니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잘 마실게요!”
잘 먹겠다는 말과는 달리 재영은 컵을 받아들지 않고 스마트폰의 키패드만 두드렸다. 사헌은 예의상 한 말인가 싶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재영은 메시지를 하다가도 한 번씩 사헌의 손목을 끌어다가 마셨다.
“네가 아주 내 머리 위에서 노는구나.”
사헌이 어이없어하며 재영의 머리를 톡톡 쳤다. 사헌의 손길로 엉망으로 솟구쳐 있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정리됐다. 툴툴대는 말과는 달리 남은 손은 착실하게 재영의 입가에 컵을 갖다 대고 있었다.
[민주누나 : 그 인간 좀 수상하던데...]
[민주누나 : 진심이야. 학교서도 눈에 안 띄게 조심히 다녀.]
민주와의 대화는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재영은 바로 앞에 민주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민태라면 몰라도 민주의 말이라면 믿어 볼 만했다. 손가락으로 OK를 그리는 귀여운 토끼 이모티콘을 보내려는데 메시지 하나가 더 올라왔다.
[민주누나 : 어차피 안 갈 것 같지만 도서관 근처는 얼씬도 말고]
OT 때 한 번 보고, 이제 막 신입생 환영회를 했는데 민주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정신계 에스퍼가 아닐까. 민주의 에스퍼설에 더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재영은 그 뒤로 민주와 다른 사람들은 잘 놀고 들어갔는지 물어보고 메시지를 끝냈다. 따뜻한 꿀물로 데워진 속이 이제 씹을 것을 내놓으라고 안달하는 탓도 있었다.
“‘그 인간’이 10학번?”
사헌이 재영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재영은 귓속의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 들어서 몸을 떨었다.
“봤어요? 어제 말했던 그…….”
메시지를 하는 동안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는 사헌에게도 내용이 전부 보일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개진상 말이지.”
“맞아요.”
재영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입으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사헌이 대신해 주니 속이 시원했다.
“어떻게 해 줄까?”
“네?”
“그 진상. 꼴도 보기 싫다면서.”
재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내가 없애 줄 수 있어.”
사헌의 말이 농담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이제 또 볼일도 없을 텐데요, 뭐.”
재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방긋방긋 웃었다.
“저 배고파요, 형.”
그리고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혀 사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재영을 물끄러미 보던 사헌이 이내 어이없어서 픽 웃음을 흘렸다.
“콩나물국 끓여 놨어. 나와.”
사헌이 먼저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의 손에는 재영이 말끔히 비운 꿀물 잔도 있었다.
“감사해요, 형. 꿀물도 그렇고, 10학번 선배 어떻게 해 준다고 한 것도.”
재영은 사헌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아무 짓도 하지 말라며.”
“그래도 제 기분 생각해 주신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사헌이 인덕션에 불을 켜는 동안 재영은 식탁을 닦고 밥 먹을 채비를 했다.
“맨날 뭐가 그렇게 감사할까.”
싱크대를 등지고 선 사헌이 재영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뭐가?”
제대로 듣지 못한 재영이 묻자 사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재영은 미간을 모으고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지금 제 욕하신 것 아니에요?”
“네가 잘하면 내가 욕할 일도 없겠지.”
제 욕을 했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에 재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제가 뭘 또 그렇게 잘못했다고…….”
잘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처럼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졌다. 솔직히 어제 술주정을 부린 것부터가 너무 찔렸다. 사헌이 그런 재영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이상한 놈이 덤비면 망설이지 말고 까 버려.”
“까요? 뭘요?”
물음에 사헌의 눈이 재영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재영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어떻게 같은 남자로서 그런 지독한 말을…….”
“같은 남자라고? 그런 쓰레기랑 내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재영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뭐든 사헌은 항상 가장 앞에서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영웅이다. 또 그의 솔직한 폭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니 성차별적 발언을 할 거라고 예상하기도 어렵다.
“취소할게요.”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주워섬긴 재영은 얼른 사과를 건넸다. 그런 쓰레기와 비교하면 사헌은 너무 좋은 사람이다. 사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런 것도 폭력이란 말이에요. 저 고소당하면 억울해 죽어요.”
잘못한 건 그 남자인데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반대로 가해자가 되어 버린다면. 상상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우주가 무너지고. 재영은 참담한 심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뒤는 내가 알아서 해. 너는 참을 필요 없어.”
참으로 든든한 말이었다. 그리고 콩나물국이 엄청 시원했다. 재영은 콩나물 한 가닥을 집어 입에 넣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삭아삭.
콩나물 씹히는 것도 딱 재영의 취향이었다.
“참고할게요.”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밥그릇을 통째로 들고, 국에 밥을 말았다. 하지만 반응을 본 사헌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움직였다.
“화도 안 나나?”
“그런 꼴을 당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사헌이 혹여나 행동으로 옮길까 봐 재영은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같은 남자로서 어렴풋이나마 그 고통이 상상이 돼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그래.”
사헌이 신경 끄는 것처럼 보여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공주님의 집요함을.
* * *
“요즘 화석 경영관에 왜 이렇게 자주 출몰하냐.”
민태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우는 소리를 냈다.
“너무 그러지 마. 나중에 너 제대했는데 신입생들이 저기 냄새나는 예비군 있다, 하면 좋겠냐?”
동준이 옳은데 맞는 소리를 해서 민태에게 맞았다. 대학 가고는 처음으로 모두가 모이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달리 웃음이 없던 재영이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서민태 냄새나는 건 인정이지.”
“야, 김재영!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민태가 앙칼지게 외치며 입술을 툭 내밀었다. 서운함과 억울함이 여실히 느껴져서 재영은 다정한 손길로 민태를 토닥였다.
“그래, 그래. 내가 다 알지.”
“진짜 그 화, 아니, 선배 완전 변태 같다니까.”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났던 길성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재영은 흐뭇하게 웃었다. 동준의 지적에 바로 잘못한 것을 고치는 게 민태의 귀여운 점이다.
“민주 누나 말로는 도서관 근처만 안 가면 괜찮다고 했는데…….”
재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쓸었다. 길성필은 도서관에서 사는 귀신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학회실이 있는 경영관에 자주 보였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아서 죄 없는 애들을 데리고 고나리질을 하다가 끝에는 재영을 찾는다고 했다.
“우리 김재영 매력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아서 그렇지.”
단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받은 동준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학과생들의 도움으로 보호받는 재영과 달리 민태는 재영의 절친이라는 이유로 다른 애들보다 더 시달려야 했다.
“계속 그렇게 쫓아다니면 공주님한테 말씀드려보면 어때?”
동준이 은근하게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구경 가고 싶어서 그러는 마음이 훤히 보였다.
“형한테는 저번에 말해 놨어. 무슨 짓 하려고 하면 바로 까고 도망쳐서 이르라던데.”
재영은 동준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사헌이 했던 말을 전했다.
“까? 뭘?”
동준이 알아들었으면서 외면하고 싶은 듯 물었다.
“아니, 그보다 진사헌이 이르라고 했다고?”
해운이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며 경악했다. 떨리는 눈동자에는 서러움도 담겨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너한테 처맞았을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놈이?”
“그건 네가 보라 괴롭혀서 그런 거잖아.”
비교할 걸 비교하라고. 재영은 대놓고 해운을 눈으로 흘기며 혀를 찼다.
“그보다 너 그거 형님한테 일렀냐?”
그리고 어이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잘못은 제가 해 놓고 혼내 달라고 형한테 이른 게 괘씸했다.
“아니, 나는 네가 보라 좋아하는 줄 알고……, 앞에서 추한 꼴 좀 보여 주려고 그랬지.”
“진하다, 추해운!”
“우리 해운이 남자다운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상찌질이였네?”
그렇게 놀림의 대상을 해운으로 바꿔 떠들었다. 해운에게 팝콘을 던지며 야유하던 민태가 갑자기 폰을 확인하더니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왜? 누군데 그래?”
친구들이 민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누가 봐도 그는 통화 상대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민태가 잠시 재영을 빤히 쳐다봤다.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 예.”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며 민태는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허리까지 꾸벅거리고 있었다.
‘얘가 우리 몰래 무슨 사고친 건 아니겠지?’
재영은 심각한 눈으로 민태의 등을 응시했다.
친구들을 피해 테라스에 나온 민태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보고해.
인사를 하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했다. 온몸의 신경이 다 예민해진 민태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예, 예……! 오늘은 점심시간에 인문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재영이 시간표를 다 꿰고 있는 것 같은데…….”
민태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없는 민태는 압박감을 느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잠시의 침묵 끝에 들려온 말에 민태가 바짝 굳어서 대답했다. 지금까지도 자신이 상대를 위해 일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그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민태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불안함에 떨리는 눈으로 재영을 힐끔거렸다.
* * *
막 지하철에 오른 여자가 조용한 내부를 둘러봤다. 노약자석에 눕듯이 몸을 늘어뜨리고 시끄럽게 코를 고는 민폐남이 있었다. 언제 감았는지 모를 엉킨 머리카락. 흰색 기본 티는 언제 빨았는지 목 주변이 새까맸다.
가까이 가면 안 좋은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가장 먼 자리로 가서 앉았다.
‘저런 고물은 왜 들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자기가 진짜 **대학교 경영학과가 될 줄 아는 건가.’
여자가 남자의 옆에 놓인 책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책의 위쪽에는 ‘10학번 길성필. **대학교 경영학과’라고 보란 듯 쓰여 있었다. 정말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람이 뭘 하는 거야! 냉큼 일어나지 못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노성이 들려왔다. 몇 안 되는 내부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예의 그 성필이 있던 곳이다. 허리가 반은 굽은 노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로 성필의 다리를 툭툭 치고 있던 것이다.
“아, 모처럼 꿀잠 자는데 뭐야.”
성필이 가래가 잔뜩 낀 것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야? 늙은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자리도 많은데…….”
불손한 눈으로 노인을 힐끔거리면서 구시렁거렸다. 내부가 워낙 조용해서 못 듣는 사람은 없었다.
“뭐? 어디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노인이 지팡이를 머리 위로 높게 치켜들었다. 놀랍도록 정정한 기세였다.
“어어? 크, 큰일이다! 여기서 내려야 하는데……!”
위협을 느꼈는지 성필이 허겁지겁 지하철에서 뛰어내렸다.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톤이다.
“아씨, 오랜만에 나왔더니 별 거지 같은 꼴을 다 당하네.”
빠르게 뛰던 발이 점차 느려졌다. 등 뒤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성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뭐 이 시간에 선배를 오라 가라 해서…….”
하지만 투덜대는 말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가면 재영이도 있겠지. 절친이라고 했으니까.”
오히려 설렘에 들떠 있었다.
“흠흠흠~”
노래하면서 계단을 오르던 성필은 문득 눈앞의 사람에게 시선이 닿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성필은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흥얼거리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다른 데에 신경이 팔려서 중간이 뚝뚝 끊겼다. 수상함을 느낀 여자가 뒤를 힐끔거렸다. 성필은 그것도 모르고 조금만, 조금만. 하는 마음에 몸이 자꾸만 앞으로 기울었다.
“아저씨! 지금 저 찍었죠?”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성필은 얼른 스마트폰의 전원을 누르고 시큰둥한 얼굴을 했다.
“제가 그쪽을 왜 찍어요. 아는 사람도 아닌데.”
한두 번 한 일이 아니라서 시치미를 떼는 것은 자신 있었다. 여자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하면 치마를 입지 말든가. 다 보이는 거 입어 놓고 별…….”
여자는 억울함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심증은 확실한데 증거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며 성필은 희열을 느꼈다. 마침 막차 시간이 가까워서 인적이 드물었다. 여자도 느꼈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휙 돌려 걷기 시작했다.
성필은 빠르게 여자를 따라 걸었다. 한참 후배이고, 늦은 시간에 불러낸 것이니 조금 늦는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여자의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이 들렸다. 지금 딱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성필은 짙은 미소를 띤 채로 팔을 뻗었다.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성필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 뒤로 누군가 나타나 쓰러지는 몸을 붙잡았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여자는 빠르게 멀어졌다.
“한결같이 쓰레기라 다행이네.”
성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남자가 빈정대며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도와줄 수 있겠지?”
남자가 뒤를 돌아 누군가를 쳐다봤다.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띵동-
일찍 새벽에 기상한 노년의 부부가 초인종 소리에 느릿느릿 거실로 걸어 나왔다.
“성필이 이 녀석. 술 퍼마시고 이제야 들어오는 건가?”
“알아서 따고 들어올 것이지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벨을 눌러.”
주방에서 나온 부인이 젖은 손을 닦으며 힐난했다. 아들일 거라고 예상하는 부부의 목소리에는 걱정은 없고, 성가시다는 투만 역력했다.
“택배가 있는데?”
문을 열고 텅 빈 밖을 두리번거리던 남편이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이 시간에?
부인이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남의 집 택배가 잘못 왔다기에는 주소와 받는 사람의 이름이 확실히 두 노년 부부의 것이었다.
“위험한 건 아니겠죠?”
남편이 한 겹으로 대충 붙인 듯한 테이프를 뗐다. 상자를 열자마자 보이는 건 최신형 스마트폰이었다.
“뭐지? 당신 폰 바꾸게?”
“바꾼 지 얼마나 됐다구요. 여기 사진도 있어요.”
하나같이 아들 성필이 찍힌 사진이었다. 어딘가를 보며 화내는 표정, 겁에 질린 얼굴.
“편지도 있어.”
돋보기가 없으면 편지를 읽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편지를 잡았다.
“여기가 외지에 있는 암자래요.”
“암자?”
부부는 아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제대로 공부를 하려는가 싶어 기대를 품었다.
“성필이 이놈이 또 누굴 건드렸나 봐요. 아이고, 이걸 진작에 어디 가둬 놓고 제대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부인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한 태도로 다음 글귀를 읽었다. 그러자 똑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편이 그녀에게서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어디 봐!”
성필이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고, 그 죄로 암자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의 암자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걸어서 3일은 건너는 곳에 있고, 2주에 한 번 관리자가 방문해 먹을 것을 채워 놓는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걸 켜면 볼 수 있다는 거 같은데.”
남편이 상자 속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앱은 딱 하나였다.
“어어, 이거 맞네. 여기 이놈.”
재생되는 영상에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는 성필이 보였다.
“여기 주소도 있는데 어쩔까?”
부인이 편지 마지막에 쓰인 주소를 가리키며 남편에게 물었다.
“나와 봤자 사고만 치겠지. 거기서 다른 짓은 못 할 테고 심심하면 공부라도 하겠지. 내버려 둬!”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남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지옥엽 키워 놨더니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고, 남의 집 애먼 딸이나 건드리고 다녀 낯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었다.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원하면 자신들이 상태를 볼 수도 있다.
“그냥 멀리 지방에 일자리 구해 간 거라고 생각하자고.”
두 사람은 어느덧 묵은 때를 벗겨 낸 것처럼 속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샤워를 끝내고 침실로 들어온 재영이 발견한 건 외출 준비를 끝낸 사헌이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어디 가시게요?”
“아란시에 던전이 발생했어.”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던전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시간 정해서 나오는 것도 웃기긴 한데 잠잘 준비 다 하니까 나온 건 정말 선 넘은 거 아닌가 싶다.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예상할 수 없는 거 알잖아. 먼저 자고 있어.”
사헌이 습관처럼 재영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더니 그대로 나갔다. 닫힌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영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사헌이 집에 있다고 해서 특별히 떠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문득 고요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컴퓨터 좀 하다 잘까.”
일부러 큰소리로 내뱉은 재영은 하다가 졸리면 바로 잘 수 있게 노트북을 가지고 침대 위에 올라갔다.
“뭐 볼 게 있나.”
유료 스트리밍 사이트를 열고 목록을 살피던 재영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있었다. 적나라한 표지와 노골적인 제목이 시선을 끌었다. 재영은 숨을 죽이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한 층을 통으로 차지한 펜트하우스는 당연히 조용했다.
재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영상을 재생했다. 지루한 서사가 지나고, 곧 개연성 없는 러브신이 등장했다. 그는 화면에 집중하며 손을 아래로 향했다. 곧장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손을 덮쳤다. 손끝에 여린 피부가 만져졌다.
“하아…….”
재영은 젖은 숨을 내뱉으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의 다리 위에 있던 노트북이 이불 위로 미끄러졌다.
“흐으.”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온몸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손길을 따라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원래도 자주 하지 않는데 이 집에 와서는 처음이었다. 재영은 입술을 핥으며 손길에 집중했다.
몸이 비틀리며 베개에 코를 묻었다. 제 것이 아닌 체취가 훅 들어왔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길이 떠올랐다.
“아, 흐……, 형.”
재영은 저도 모르게 체취의 주인공을 불렀다.
“그래.”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서는 안 될 대답이 들렸다. 흥분으로 들끓던 피가 단숨에 차게 식었다. 재영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잠든 거야. 이건 잠꼬대고.’
사헌의 꿈을 꾸면서 가는 것도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괜히 그를 마주해서 민망한 상황만 피하고 싶다.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반찬으로 사헌을 쓴 것 같아 미안하고, 왜 하필 그였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재영은 이불을 마구 걷어차고 싶은 욕구를 눌렀다.
살짝 뜬 눈으로 살색으로 가득한 화면이 보였다. 재영은 몰래 이불 밖으로 팔을 꺼내 노트북을 덮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다시 등 뒤에서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깨어 있는 걸 다 알고 있는 투였다. 재영은 필사적으로 모른 체했다.
‘다시 씻어야 하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침내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