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20)

6.

몇 번의 밤이 지나고, 또 아침이 왔다. 바야흐로 대학생이 된 재영의 첫 등교일이었다. 재영은 드레스룸으로 가 적당히 깔끔한 캐주얼룩을 입었다.

곧장 주방으로 가 식탁에 앉자 사헌이 그의 앞에 밥이 봉긋하게 올라온 접시를 내려놓았다.

“오므라이스에 양파가 없네요?”

재영은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뒤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사헌이 해 준 음식 중에 양파가 들어간 게 없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양식이라 그렇다 쳐도 볶음밥에까지 들어가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재영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사헌을 훑었다.

“먹기 싫으면 버려.”

웃음기 어린 재영의 눈빛을 본 사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어색해서.”

평소에 비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까 화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제 예상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거가 없지만, 심증은 충분했다.

재영은 일단 의심은 일단 제쳐 두고 한 숟가락 가득 오므라이스를 퍼 올렸다. 우물우물. 씹는 횟수가 늘수록 재영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와, 진짜 맛있어요!”

재영은 멍하니 밥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혼자만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벌써 몇 번을 말했지만, 친구들은, 특히 사헌의 동생인 해운은 그가 음식을 한다는 것부터 믿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거지.’

다시 행복해진 재영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한입 가득 밥을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포슬포슬하지?”

간간이 감탄하며 음식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헌도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반찬 대신 재영을 보며 식사를 마쳤다.

* * *

아무리 낯을 가리지 않아도 완전히 새로운 환경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안녕하세요! 어? 형, 헤어스타일 바뀌셨네요?”

“그냥 가르마만 바꾼 건데…….”

“훨씬 인물이 살아요. 개훈남.”

재영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민망해하는 과 선배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세희 옷 새로 산 거야? 너한테 잘 어울려.”

동기도 재영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의 칭찬은 과하지 않아서 가식 없는 진심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오늘 립 진짜 예쁘시다.”

재영은 첫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향하면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OT 때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강의실에 와서는 인사를 건넬 사람이 없었다. 전부 교실 앞쪽에 양떼처럼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무슨 일 났어?”

재영은 미리 와서 자리를 맡아 놓은 민태에게 물었다.

“서훈이 웬일로 출석했대.”

책상에 가방을 올리자 민태가 의자에 올려놓은 제 가방을 치웠다.

“서훈?”

‘서훈’이 대체 누구라고 등교 한 번 했다고 저렇게들 난리란 말인가. 재영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연예인이야?”

재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텔레비전을 즐겨 보지 않는 터라 배우든 가수든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보는 건 게임 중계 채널과 던전 레이드 영상뿐이었다.

“‘하랑’ 서훈 말이야.”

민태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재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재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길드 1위인 ‘하랑’은 모를 수가 없다.

민태의 말에 따르면 서훈은 A급으로 하랑 길드의 간판 에스퍼였다. 잘난 외모와 길드의 전신인 하랑그룹의 자제라 더 유명하다고. 재영도 이번 신입생 중에 에스퍼가 있다는 사실은 들었다. 그 이름이 ‘서훈’인 줄은 몰랐지만.

“철벽 대박이야.”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지만, 서훈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사헌과 같은 스타일일까.

“대답은 잘해 주는데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민태가 슬픈 얼굴로 웅얼거렸다. 어쩐 일로 얌전히 있나 했더니 벌써 말을 붙여 본 모양이다. 재영은 어지간하다는 생각으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우는 척 책상 위에 엎드렸던 민태가 갑자기 상체를 벌떡 들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재영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아무리 서훈이라도 네가 ‘그거’인 거 알면 발이라도 핥으려고 하지 않겠어?”

재영을 바라보는 민태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아마 그에게 기대 본인도 관심받으려는 전략 같았다.

“괜히 피곤해져.”

재영은 한마디로 민태의 기대를 박살 냈다. 형의 회사에서 마주친 에스퍼와의 일은 아직도 재영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사헌이 아닌 에스퍼와 괜히 엮이고 싶지 않다. 아마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서훈’의 이름도 외우지 않은 것일 테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너.”

노파심이 든 재영은 민태의 팔을 붙잡고 당부했다.

“알았어.”

무섭게 굳은 얼굴에 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아쉬운 듯 서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절대 피한다.’

재영은 더 단단하게 결의를 굳혔다.

* * *

엘리베이터 기계음이 들려오자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던 재영의 귀가 쫑긋 섰다.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헌이 재영을 발견하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거의 직전까지 중계 영상을 보고 있던 재영은 바로 가이딩을 하려고 사헌에게 다가갔다.

“씻고.”

사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입구서부터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사헌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나체가 되고도 당당하게 걸어 욕실로 갔다.

재영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의도적으로 사헌의 나체를 피한 것이다.

“이 옷들은 버릴까요?”

사헌이 껍데기 벗듯 벗어 둔 옷을 들고 물었다. 나갈 때는 새 옷처럼 반질반질하던 것이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흙이 묻은 부분도 있었다.

“손대지 말고 놔둬.”

아침에 청소하는 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재영은 옷가지가 몇 개 되지도 않고, 거슬리기도 해서 치우기로 했다.

* * *

씻고 나온 사헌이 바로 옆에 개켜진 옷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은근히 말 안 듣지.”

사헌이 씻고 나왔을 때, 재영은 욕실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헌의 타박에도 속없이 배시시 웃었다.

“밤새 거기 둘 수는 없잖아요. 화장실 가다가 발이 걸릴 수도 있고.”

“……마음대로 해.”

사헌이 한숨과 함께 내뱉고는 걸음을 뗐다. 각진 엉덩이가 걸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던 재영은 당황했다.

“왜, 왜 벗고 나와요?”

얼굴만 보느라 몰랐는데, 그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것이다. 재영은 황급히 통유리창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바로 맞은편 건물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곧장 뛰듯이 걸어가 커튼을 쳤다.

“미러창이라 밖에서는 안 보여.”

사헌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파파라치한테 찍혀서 온 국민이 형 나체를 보게 되면 어떻게 해요?”

재영이 걱정된다는 듯 사헌을 다그쳤다. 육식 동물에게 덤벼드는 소동물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던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숨길 몸은 아니지 않나?”

정말 얼굴을 조금도 붉히지도 않는 뻔뻔한 태도였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사헌의 나신을 훑었다. 저처럼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처럼 하얀 몸도 아니고, 적당히 타서 건강해 보이는 피부였다. 가슴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올라와 있고, 오밀조밀한 근육으로 들어찬 복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헌의 말대로 돈을 내고 봐도 아깝지 않을 완벽한 몸이기는 했다.

‘근데 자랑할 만한 몸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재영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참 서 있었다. 그렇게 패배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재영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형.”

재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헌을 불렀다. 사헌이 왠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안에서 좀 닦고 오시면 안 돼요?”

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헌의 눈꼬리가 못마땅한 듯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재영은 그 완벽한 몸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사헌이 서 있는 자리 밑으로는 벌써 한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재영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젖은 바닥을 닦았다. 사헌이 그렇게 깔끔한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청소해 주시는 분을 매일 불러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급한 일도 없으시잖아요.”

“네가 애타게 기다릴 것 같아서.”

사헌의 대꾸에 골이 난 재영은 그가 머리 위에 덮고 있는 수건을 낚아챘다. 그리고 소파 아래에 반듯하게 펴 놓았다.

“여기 앉아 보세요.”

재영은 수건을 깔아 놓은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가 뭘 하려는지 궁금한 사헌이 얌전히 말을 따랐다. 사헌이 시키는 대로 앉자 재영은 소파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무릎 사이에 사헌의 몸을 끼워 둔 셈이다. 마른 수건을 들고 사헌의 머리카락부터 탈탈 털었다.

“그냥 두면 마를 텐데.”

사헌이 재영의 무릎 뒤로 손을 뻗었다. 예민한 오금을 가만가만 만져 오는 손길에 재영은 뒷골이 오싹오싹했다.

“간지러워요.”

“가이딩 얼른 해 주겠다며.”

그러려고 문 앞에서 대기한 건 맞아서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알아서 가이딩을 하니 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재영은 사헌의 손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둔 채 입을 열었다.

“이모님이 오다가 사고가 나셨대요. 그래서 오늘 저녁은 시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재영은 요리할 줄 모르고, 일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사헌에게 식사를 만들게 할 수는 없었다. 밥은 해 뒀지만, 하필 주말이 지나고 첫 날이라 적당한 반찬이 없었다.

“찜닭 시켜도 돼요?”

망설이던 사헌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그제야 사헌이 남이 해 준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모님이 해 준 반찬은 좀 먹는 것 같던데.’

재영은 사헌을 위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중하게 리뷰를 살펴본 후에 주문을 끝냈다.

* * *

그토록 좋아하는 찜닭을 앞에 두고도 재영은 사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헌이 앞 접시에서 뭔가를 골라내고 있던 것이다.

“형. 그거 안 먹어요?”

재영의 목소리에 사헌의 젓가락이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매서운 눈으로 재영을 노려봤다. 사헌의 앞 접시 한쪽에는 그가 골라낸 양파 한 무더기가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느낀 재영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사헌이 왜 요리를 시작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양파를 넣지 않는 음식은 거의 없다. 그러니 남이 해 준 음식은 웬만해서는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먹을게요.”

재영은 사헌이 거절이라도 할까 봐 팔을 뻗어 그가 골라 놓은 양파를 제 접시에 옮겼다.

“맛있는데.”

양파를 야무지게 씹어 먹은 재영은 약을 올리듯 사헌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사헌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다시 식사를 재개한 사헌이 집게로 양파를 들어 재영의 앞 접시에 떨어뜨렸다. 재영은 제 접시에 양파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 * *

재영은 거실 테이블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었다. 비교할 기업의 목록을 정리해 조원들에게 톡을 보내는데, 마침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툭 끊겼다.

고개를 돌려 욕실 문을 쳐다본 재영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펼쳐 놓은 책을 덮어 노트북 옆에 쌓아 두고, 어지러이 널린 에이포 용지들도 반듯이 모아 놨다.

달칵.

문이 열리고 희뿌연 김과 함께 사헌이 나왔다. 오늘도 축축하게 젖은 몸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아래는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질적으로 도드라져 아무런 소용도 없었지만.

닦지 않은 물방울이 굴곡진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흘렀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저를 보고 있는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왜?”

사헌이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재영을 쳐다봤다.

“……바닥 다 젖잖아요.”

재영도 슬슬 사헌이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아챘다.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내뱉자 사헌이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다가왔다.

소파에 앉은 사헌이 재영을 당겨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재영은 중심을 잃을까 봐 사헌의 어깨를 손으로 잡고 버텼다.

“하아.”

재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사헌이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재영은 그의 등 뒤로 팔을 뻗어 도담도담 쓰다듬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히 따뜻한 그 몸을 끌어안으면 기분이 좋았다. 따끈따끈한 반려동물을 안고 잔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반려동물치고는 덩치가 지나치게 크지만.

“그런데 원래 이렇게 출동이 잦아요?”

오늘 사헌이 출동한 던전은 C급 이하의 하급으로 중계도 되지 않는 정도였다. 보통 던전의 단계보다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에스퍼가 동행하는데, 센터에서는 사헌의 동행을 요구했다. 처음 연락을 받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을 보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그래도 B급 이상 던전에 가는 날은 안 부르니까.”

“그건 당연하고요!”

아무렇지 않다는 투에 재영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웬만한 에스퍼들도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지친 얼굴을 했다. 상대해야 하는 크리처의 등급이 어떻든 매 순간을 목숨을 거는 것이기에 정신력 소모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니 이미 그날 던전에 진입한 사람을 또 다른 던전에 또 부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진입하는 것이 평균이었다.

그게 사헌에게만은 예외였다. 센터는 던전만 생성되면 등급에 상관없이 사헌에게 연락했다. 당장 어제 출동했어도 마찬가지다. 재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헌이 화를 내지 않으니까 더 답답했다.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 진사헌이 이런 호구라는 걸 국민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괜찮아.”

당연히 사헌은 그런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쓸데없이 재능 낭비는 하지 마요.”

재영은 이제 자신이 사헌의 스케줄을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써서 엉망이 된 사헌의 몸을 책임져야 하는 게 가이드니까 그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사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연한 표정의 재영을 바라보는 눈은 영 생소한 빛을 하고 있었다.

* * *

던전은 이 세계에 존재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드넓은 농장 지대 한가운데가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카메라가 멀찍이서 던전 내부와 참여한 사람들을 훑었다. 날씨에 맞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에스퍼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아직 사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카메라가 모래 언덕을 비쳤을 때, 웬 형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부릅뜬 눈으로 집중해서 보니 꼭 사람 같았다.

“저거 진짜 사람은 아니겠지.”

재영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메라맨도 제가 본 것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겁도 없이 다가갔다.

“저게 뭐야?”

카메라맨이 형체에 가까워질수록 재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피부는 모래색과 유사한데, 뼈에 살가죽이 철썩 달라붙어 꼭 미라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카메라 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 키야악.

그것이 입을 크게 벌렸다. 치즈가 늘어난 것처럼 입술 사이의 살점이 붙어서 길게 늘어졌다. 크리처다. 카메라맨이 놀라 넘어졌는지 화면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 으, 으아악!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흔들리는 화면에 손마디가 불거진 깡마른 손이 카메라맨의 다리를 붙잡는 게 보였다. 재영은 서랍장에 넣기 위해 들고 있던 속옷을 그대로 끌어안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대체 왜 가까이 가서는…….”

시체 같은 것에 다가갈 때부터, 아니, 던전 공략에 따라나설 때부터 보통 담력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카메라맨은 정말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괴수의 손에 잡힌 제 다리를 찍고 있었다. 덕분에 잡힌 주변의 피부 위로 혈관이 죽은 것처럼 검은 줄기가 불거지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 죽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카메라맨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카메라맨은 카메라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헌이 보였다. 재영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렸다. 이 와중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느 각도로 봐도 굴욕이 없는 얼굴이다.

- 아니면, 내 말이 우스운 건가?

사헌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뱉었다. 크리처에게 붙잡혔을 때조차 흔들리기만 하던 앵글이 완전히 뒤집혔다. 카메라를 놓친 듯했다. 뒤집힌 화면에는 카메라맨의 얼굴과 옆에선 사헌의 다리만 비쳤다. 그때 와그작, 하고 뭔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카메라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크리처에게 잡혔을 때보다 더 겁먹은 표정이었다.

“설마 일반인에게 힘을 쓴 건 아니겠지?”

재영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헌이 에스퍼가 된 후로는 말로는 패도 주먹이나 능력으로 팬 적은 없었다.

“언제나 최초는 있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런 재영의 오해를 풀어 주려는 듯 카메라맨이 카메라의 방향을 바꿨다. 사헌의 발은 카메라맨의 다리를 잡은 팔을 밟아 으깨고 있었다.

- 죽고 싶으면 보는 눈 없는 데서 혼자 뒤지세요.

사헌은 무심한 표정으로 카메라맨에게 일갈하고 미라의 머리를 짓밟았다. 동시에 화면이 천장을 향해 돌아갔다. 화면 너머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이 크리처만으로는 A급 던전이라고 하기 어려워.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거야.

카메라맨이 정신을 차리고 에스퍼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그들의 대화를 담았다. 에스퍼-가이드의 등급과 마찬가지로, 던전의 등급도 F-A급으로 나뉘어진다. 다른 점은 최고 등급이 A 플러스라고 불리는 것. 아마도 부르는 등급이라도 낮춰 국민의 불안감을 줄이려 한 것 같다.

미라 같은 크리처는 에스퍼들이 큰 어려움 없이 해치웠다. 하지만 던전 공략은 끝나지 않았다.

- 환경이 이따위로 조성된 이유가 있을 텐데…….

사헌이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사막을 눈으로 훑었다.

- 어디든 숨을 데는 하나뿐이지.

탐색을 끝냈는지 사헌이 입술을 비틀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자신만만한 표정이 더 빛이 나게 했다. 그의 팬 중에 이 장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 땅개!

- 네, 대장!

사헌의 외침에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의 팀원 중 땅 속성 마법을 쓰는 에스퍼였다. 사헌이 매번 ‘땅개’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름보다 별칭이 더 유명한 에스퍼다.

- 다 엎어.

- 네? 엎으라 하심은…….

땅개는 사헌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서 혼쭐이라도 날까 봐 눈치를 살폈다.

- 땅속까지 흔들라고.

- 그, 그러면 지진이 날 텐데요?

지진이 나면 땅속에 있는 크리처만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영향을 받게 된다.

- 전부 B급 이상 아닌가? 그 정도도 못 버틸 거면 자격증 반납해.

냉정한 말에 에스퍼들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일그러졌다. ‘땅개’는 타고난 마력이 많지 않아 C급으로 판정이 났지만, 운용력이 뛰어나 B급 이상의 능력을 내고 있다. A급도 그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센터 내에서의 평가다. 하지만 사헌이 하라고 뱉은 이상 이를 악물고 해내야만 한다.

- 뭔가 저항하고 있어요!

땅개의 외침대로 물이 끓는 것처럼 모래가 불쑥 솟았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에스퍼들은 요동치는 모래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뭘까.”

재영은 지금껏 나왔던 크리처 중에서 땅속에서 생활할 만한 것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던전마다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다른 크리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 두더지 게임인가.

오락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 같은 사헌이 말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염력으로 제 몸뚱이보다 큰 바위를 들어 올렸다.

- 티, 팀장님. 지금 뭘 하시려고…….

- 두더지는 머리를 내려쳐야 모습을 드러내는 거 아니었나?

사헌이 허공에 뜬 바위를 둥글게 솟아오른 모래를 향해 내던졌다. 떨어진 중심에서부터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먼지가 다 가라앉고 보니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서 주변에 떨어져 있었다.

- A급이 그렇게 시시할 리가 없지.

사헌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박살이 난 바위 조각들을 모았다. 모인 돌멩이들은 마치 방패처럼 타원 모양을 만들어 사헌의 앞을 막았다.

캉, 캉!

동시에 무언가가 방패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카메라맨이 제대로 찍고 있는데 보이지가 않아서 재영은 눈을 더 크게 떴다.

파삭, 소리와 함께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면 그 큰 바위를 깼는데 작은 조각을 깨지 못할 리가 없다.

먼지가 가라앉고 사헌의 모습이 드러났다. 던전에서 몇 시간을 뒹굴어도 깔끔하던 그의 옷이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찢어진 천 사이로 붉은 피가 비쳤다.

“아프겠다…….”

재영은 그 선명한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선인장이었다. 물론 던전에 있는 만큼 평범한 식물의 모습은 아니었다.

“으, 징그러워.”

재영은 바닥에 토하기라도 할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선인장의 통통한 몸통에는 두꺼운 줄기가 달려 있는데, 그 끝은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는 손처럼 생겼다. 거기서 투명하고 미끈해 보이는 액체가 걸쭉하게 늘어졌다.

“저게 무기인가?”

선인장의 온몸에 검붉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따로 들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니 그게 사헌을 공격한 날카로운 것의 정체인 게 분명하다.

“형 괜찮으려나?”

걱정스러움에 재영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독버섯처럼 화려한 가시의 빛깔이 불길함을 불러일으켰다.

- 공주, 아니……! 대장님!

- 팀장님! 괜찮으세요?

크리처의 공격이 멈춘 사이, 에스퍼 팀원들이 사헌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크리처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크리처들은 모래 속에서 눈을 빼꼼 내밀고 침입자들을 염탐했다. 그 모습이 귀여울 만도 한데 온몸에 분화구처럼 뽕뽕 뚫린 자국 때문인지, 질척하게 흐르는 액체 때문인지 보기 거북하기만 했다.

- 다치셨어요?

- 왜 다치셨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팀원들의 모습에 재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픈 사람한테 왜 다쳤냐니.”

재영이 입술을 툭 내밀고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열심히 싸운 사헌을 팀원들이 타박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 너희들이 각자 맡은 일만 제대로 했어도 내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서늘한 한마디에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에스퍼들이 입을 다물었다. 사헌의 말대로 팀원들의 방어를 담당하는 에스퍼는 따로 있었다.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에스퍼들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재영은 내심 속이 시원했다.

* * *

현관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다. 재영은 여태 멍하니 안고 있던 속옷을 내던지고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형!”

문을 열자마자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로 뛰쳐나온 그를 보고 사헌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재영은 사헌의 옷을 들치며 여기저기 상태를 살폈다.

방송에 비친 상처들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까지 확인을 마친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빛이 묘해졌다.

“너, 내 몸이 목적이었어?”

“네?”

재영은 무슨 그런 희한한 말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내 얼굴보다 몸을 먼저 보는 사람은 처음인데.”

나한테 이렇게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만화, 드라마, 영화 속 온갖 남자 주인공이 다 읊어도 그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사헌은 아주 덤덤하게 내뱉었다. 자만이 아니라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듯한 말투였다. 재영은 그 말을 하는 표정이 궁금해서 고개를 들었다.

“형! 얼굴이……!”

사헌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마자 재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 밑에 가로로 길게 베인 상처가 있던 것이다. 살이 깊게 파여서 피에 젖은 속살이 전부 보일 지경이었다.

“이거 그 가시에 당한 거죠?”

재영은 TV를 통해 중계를 볼 때처럼 일그러진 눈을 하고 물었다.

“이거 치료 안 받아도 돼요?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사헌의 눈 밑에 난 상처를 살피느라 재영은 거의 그에게 매달린 꼴이 됐다. 사헌이 태연한 얼굴로 서서 제게 안겨드는 몸을 끌어안았다. 흔들리는 옅은 눈동자만큼이나 절제되지 않는 기운이 재영에게서 뿜어져 나와 지친 몸을 적셨다.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후처리도 제대로 해 줘야 할 것 아냐. 원래 센터가 이렇게 무책임해요?”

에스퍼에게는 자체 치유력이 있어 남들보다 빠르고 쉽게 상처가 회복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마력 부족으로 스스로 치료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뿐이다. 하지만 폭주 에스퍼 사건 이후로 B등급 이상의 던전을 공략할 때, 팀 인원수에 따라 두세 명의 가이드를 동행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그러니 상처가 나더라도 그 안에서 치료가 돼야 했음이 마땅했다.

분기를 터뜨리느라 재영의 새하얀 볼이 붉게 물들었다. 사헌이 반쯤 신기해하고, 반쯤은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열을 냈다.

“당장 병원 가 봐요, 네?”

“선인장 가시에 찔려서 파상풍 걸렸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는데.”

사헌이 태평하게 구는 통에 재영은 더 속이 상했다. 재영은 울상을 지은 채로, 다친 그의 뺨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건 금방 나아.”

가볍게 대꾸한 사헌이 재영의 손을 잡아서 끌어내렸다. 에스퍼는 일반 사람에 비해 모든 신체 능력이 강화되어 있다. 재생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그 좋은 치유력으로도 이만큼이나 상처가 남아 있다는 거잖아요.”

에스퍼의 자체 치유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재영도 알았다. 대체 원래 입은 상처가 얼마나 심했길래 아직도 남아 있는 거냐고. 재영의 커다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사헌은 희한한 것을 보는 눈으로 재영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나를 걱정하는 건가?”

“상처가 없다고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요.”

재영은 불퉁하게 대꾸했다. 대수롭지 않아 하는 사헌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이다.

“저는 주사만 맞아도 아픈데…….”

“그건 네가 엄살쟁이라 그런 거 아니고?”

사헌이 짓궂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서 재영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번에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러자 사헌이 말을 꺼냈다. 재영이 휘말린 던전으로 출동을 앞둔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어?’

재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에스퍼가 되기 전 사헌이 온갖 명문대에서 미리 눈독을 들이던 수재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형도 다칠 수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렇죠.”

재영은 사헌을 힐끔거리면서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헌이 달아오른 볼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나도 사람이야.”

재영이 눈을 끔뻑이며 사헌을 쳐다봤다.

“사람은 누구나 다칠 수 있다고.”

“아…….”

재영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사헌을 인간 외의 것으로 규정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도 못내 이상하게 여기던 사헌의 팀원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자신과 같은 인간의 범주에 넣기에는 뭔가 조금 많이 그랬다.

“여기 잠깐 앉아 봐요.”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한 재영은 사헌의 손을 끌어다가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텔레비전 밑의 서랍을 열어 구급상자를 들고 그의 발치에 앉았다.

“쓸데없는 짓이야.”

재영은 코웃음 치는 사헌을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연고 튜브를 짰다. 그리고 무릎을 들어 사헌의 얼굴에 난 상처 위에 살살 면봉을 문질렀다. 상처에 집중하느라 미간이 모였다. 사헌은 한없이 심각한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됐다.”

재영은 밴드까지 붙이고서야 사헌에게서 손을 뗐다.

“일단 손부터 잡을까요?”

재영은 사헌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사헌이 미끄러지듯 그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일어나 등을 돌려 드레스룸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면 뽀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재영은 사헌의 뒤를 졸졸 쫓아가면서 물었다. 익숙하지 않은 제안을 하느라고 얼굴은 익어 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셔츠 단추를 풀던 사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돌아서는 그를 보고 재영의 눈이 반짝거렸다.

“침대로 갈 거니까 씻고 오라고, 똥강아지야.”

사헌이 검지로 재영의 이마를 튕겼다.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감각이 없어서 재영은 눈을 깜빡였다.

“계속 뭉그적거리면 같이 씻고 싶다는 걸로 알고 들고 간다.”

사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르렁거리지 않아도 말의 내용 때문인지 재영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들렸다.

“씻고 올게요!”

“빨리.”

외치고 뛰어가는 재영의 등 뒤에서 사헌이 낮은 목소리로 강조했다. 돌아오자마자 재영을 끌어안고 자려고 센터에서 미리 씻고 왔는데, 정작 재영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니. 사헌은 짜증스레 혀를 찼다.

“알았어요.”

그리고 재영은 정말 빠르게 씻고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쓰고 있던 사헌이 인상을 쓰며 쳐다봤다.

“물만 묻힌 건 아니지?”

단번에 팔을 뻗어 재영을 끌어당긴 사헌이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냄새를 맡으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더러우면 저는 제 방으로…….”

심기가 상한 재영이 입술을 툭 내밀고 말했다.

“네 방은 여기라니까.”

사헌이 재영을 꽉 끌어안은 채 침대 위로 누웠다.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재영의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이제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매번 기분이 이상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헌은 태연하게 재영의 손을 끌어다 제 몸 위에 올렸다.

“오늘은 진도 좀 더 나가도 되나?”

사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재영의 티셔츠 밑자락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목둘레선이 늘어나면서 새하얀 살결이 훤히 드러났다. 사헌이 거기에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방금 샤워를 해서인지 살결이 촉촉하고 뜨거웠다.

재영은 긴장한 눈으로 사헌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그새 떼 버렸는지 제가 붙여 준 밴드가 보이지 않았다. 눈 밑에 있던 상처는 그가 씻고 온 동안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재영은 사헌의 얼굴에서 상처를 본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응?”

사헌이 재영보다 낮은 위치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달달한 체향이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아, 아직 끝까지는…….”

재영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야살스러운 미소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끝까지 할 셈이었어?”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흥분에 겨운 그의 목소리에 재영은 제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니……, 상처 고치느라고 몸이 또 힘을 썼으니까…….”

재영은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누운 채로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사헌이 더 잽쌌다. 허리를 매만지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혀, 형! 손이, 손이요!”

재영은 벌게진 얼굴로 경악했다.

“끝까지 하면…….”

사헌이 말꼬리를 늘렸다. 긴장감에 재영은 입이 말랐다.

“남자랑은 어디로 하는 줄은 알고?”

재영은 입술을 꾹 문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정보가 돌처럼 굴러다니는 요즘 같은 때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아, 안 돼요.”

재영은 질겁을 하며 몸을 비틀어 사헌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하필이면 피한 곳이 그의 품 깊은 곳이었다.

“준비도 했으면서?”

사헌은 낯 뜨거워질 소리도 무덤덤한 얼굴로 내뱉었다. 잊고 있던 친구들의 선물이 떠오르자 재영의 눈 밑까지 붉어졌다.

“제, 제가 준비한 거 아니잖아요.”

재영은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사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샅샅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들어갈 때처럼 손을 쑥 빼 냈다.

“내가 끌어안고 잠만 자도 된다고 한 건 잊어버린 거야, 잊어버린 척하는 거야?”

사헌이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빈정거렸다. 그에 재영은 헐떡거리면서 그를 쳐다봤다. 표정이 없어 눈치채는 게 조금 늦었는데, 사헌이 그를 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형이 이렇게 다친 적은 없으니까 당황해서 그런 거죠.”

사헌이 억울해하는 재영의 입술에 입술을 비볐다. 재영과 닮은 맑은 기운이 보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촉촉하게 그를 적셨다.

평소보다 부드럽고 느린 입맞춤이다. 조금 전의 사고 같은 일 때문인지 재영은 이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자연히 사헌의 어깨에 얹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헌이 그의 손목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에 의해 손바닥이 단단한 가슴에 문질러졌다. 손바닥 아래의 피부가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사헌이 혀끝으로 재영의 입 안을 긁었다. 원래 이렇게 좋은 건가. 높은 매칭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재영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의 몸 위를 더듬었다. 맞닿은 입술이 옆으로 길게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하, 나도 만져도 되는 거지?”

사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뱃속을 긁는 것 같은 거친 소리에 재영은 움찔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뜨거운 손이 재영의 허리를 문질렀다.

평소보다 더 많은 기운이 사헌의 손을 타고 흘렀다. 빠르게 많은 기운을 앗아가면 더부룩한 느낌이 들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런 게 없었다. 재영은 신기한 눈으로 사헌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얽혀드는 서로의 기운이 보일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더.”

조바심이 난 사헌이 재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재영은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 * *

가운데는 콩알만 한 몸통이 있고, 거기서 뻗어 나온 긴 다리가 M자로 구부러져 있었다. 짙은 색 다리의 길이는 몸통의 몇십 배나 되었고, 솜털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으, 징그러워.”

벌레를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거미의 몸통에 있는 수많은 눈이 외부의 적들을 찾아내고, 입에서 실을 뽑아냈다.

-으아악!

‘무당거미’라고 이름이 붙은 거미가 촘촘하게 쳐진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에스퍼를 향해 실을 뿜어냈다. 실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모자이크 처리를 하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하얀 뼈가 보인 것 같았다.

공격당한 에스퍼는 겨우 풀려나서 다른 에스퍼의 부축을 받고 한쪽으로 빠졌다.

“에스퍼라는 게 원래 저렇게 위험한가?”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재영이 물었다.

“던전 난이도에 따라 불구가 되거나 아예 사망하는 에스퍼도 없지는 않으니까.”

동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실이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갔다면 그 에스퍼도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어도 상처를 아예 입지 않을 수는 없지. 근데 그 정도 다친 건 에스퍼 신체 기능으로 금방 회복하던데.”

그런데 S급 에스퍼인 사헌이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동준의 말을 듣자니 역시 사헌이 일부러 다쳐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갑자기 재영의 귀가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쫑긋했다.

“갑자기 어디가?”

동준이 화면과 재영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형! 오늘 빨리 오셨네요?”

재영의 마중을 받으며 들어온 사헌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도 고, 고생 많으십니다, 형님.”

동준의 인사에 놀란 민태가 컴퓨터방에서 나와 인사를 건넸다.

“나 오기 전엔 내보내라고 했잖아.”

사헌이 저에게 인사하는 동준과 민태를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고, 재영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이모님이 아귀찜 해 주셨거든요. 너무 많아서 나눠 먹으려고 불렀어요.”

재영은 겁먹는 기색도 없이 사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대꾸했다.

“형은 저녁 드시고 오실 때도 많으니까 미리 연락 못 드렸어요. 다음부터는 꼭 먼저 말할게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재영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덤덤했다. 사헌이 옷을 던지려고 들면 재영이 자연스럽게 받았다.

자연스러운 티키타카에 지켜보던 친구들은 묘한 기분이 들어 서로를 쳐다봤다.

재영은 뒤를 돌아 친구들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드레스룸의 문을 닫았다. 사헌의 몸을 보고 자괴감에 시달려야 할 친구들이 너무 가여웠다.

“내가 돌아오면 가이딩을 해야 하는데 친구들이 그런 걸 봐도 괜찮아?”

사헌이 재영의 볼을 톡톡 치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은근한 그 눈빛에 재영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그래도 친구들을 불러 노는 걸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침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는 가이딩은 별거 없다. 그걸 알면서도 괜히 긴장감에 입이 말랐다.

“밥 먹여서 얼른 보낼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형한테 연락부터 할게요.”

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드레스룸을 나갔다.

* * *

깊은 잠에 빠진 재영을 깨운 것은 눈부신 햇살도 아니고, 달그락거리는 소음도 아니었다. 몸을 짓누르는 묵직함이었다.

“으응…….”

입술을 핥는 축축함에 재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뜨면 키우지도 않는 고양이가 가슴팍에 올라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양이가 이렇게 매끄럽진 않겠지.

“흐읏, 혀엉, 아침부터…….”

겨우 실눈을 뜬 재영은 잠긴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시선을 내리자 옷이 둥글게 솟아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일찍 가야 한다며.”

사헌이 입을 열자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옷 안에 들어가 있어서 억눌린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재영은 온도 차이에 소름이 끼쳤다. 뜨거운 손이 그런 재영을 달래 주는 척 제 욕심을 채웠다.

“알람 맞춰 놨는데……!”

고개를 틀어 탁상 위 전자시계를 확인한 재영이 울상을 짓고는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건 네가 학교 갈 준비할 시간이고. 그 전에 내 상대도 해 줘야지.”

재영의 티셔츠 아래에서 빠져나온 사헌이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재영의 상체를 일으켜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피곤한데…….”

셔츠 아랫단을 잡아 올리자 재영이 울상을 지은 채로도 순순히 팔을 들어 도왔다.

“학교 가서 자면 되잖아.”

사헌은 잠이 덜 깨서 흐물거리는 재영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는 재영에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굴었다. 볼만 만지는 맛이 있는 줄 알았더니 몸도 제법이었다.

“밥 차릴 테니까 씻고 와.”

한참 후, 사헌이 헐떡이는 재영의 머리 위를 톡톡 치고, 먼저 침대에서 벗어났다. 남겨진 재영은 화끈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누르다가 알람이 울리고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사헌은 방문 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그릇에 밥을 담았다. 고봉으로 쌓은 밥을 식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가 젖은 머리로 침실에서 나오는 재영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머리 제대로 말리고 와.”

사헌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아플 일이 없는 에스퍼의 튼튼한 몸뚱이와 다르게 가이드는 깨물기만 해도 온종일 잇자국이 남는 여리디여린 몸이었다.

“밥 다 먹을 즈음엔 다 마를 거예요.”

하지만 매일 똑같은 사헌의 잔소리를 재영은 가볍게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헌은 그 당돌함에 헛숨을 내뱉었다. 친동생인 해운조차 상상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아우, 배고프다. 오늘 반찬은 뭐예요?”

천연덕스럽게 말한 재영은 눈으로 빠르게 식탁 위를 훑었다. 균형 잡히고, 맛도 있는 반찬이 즐비했다. 재영이 혼자 자취했더라면 절대 이렇게 먹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에 이모님 다녀가셨어요?”

재영은 그 가운데 놓여 있는 갈비찜을 보고 눈을 빛냈다. 사헌과 둘이 사는 이 집에는 한 번씩 아주머니가 오셔서 청소도 해 주시고, 반찬도 해 두고 가셨다. 사헌이 집에 있을 때는 사람 들이는 것을 싫어해서 외출했을 때만 오셔서 지금까지 얼굴을 본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

사헌이 제 말만 하는 재영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재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를 향해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헌이 딱 맞게 차려 놓은 밥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서 입맛을 돋웠다.

“잘 먹겠습니다!”

재영은 밝은 목소리로 외치고 갈비부터 야무지게 들고 뜯었다. 사헌도 별수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와, 엄청 맛있어요!”

갈비를 씹어 삼킨 재영의 눈이 감격에 겨워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국부터 한 숟가락 떠먹은 사헌이 풍부하게 변하는 표정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거 하나면 밥 두 그릇도 먹겠다.”

들뜬 목소리로 내뱉는 재영을 보고 있으려니 사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둔 스마트폰에 손을 뻗는 것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밥그릇까지 먹을 기세더니 뭐 해?”

사헌이 왜 먹지 않냐는 얼굴로 의아한 듯 물었다. 평소 재영은 스마트폰을 옆에 가져다 놓기는 해도 밥을 먹을 때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이모님께 진짜 맛있다고 연락드리려고요.”

재영은 잠깐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사헌을 보며 답했다. 사헌의 표정이 묘해졌다.

“따로 연락도 드려?”

“피드백이 있어야 이모님이 일하시기에도 좀 더 편하고, 효율도 좋아질 테니까요.”

재영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사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갈수록 요리며, 집안일이며 질이 향상되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원인이 저기 있었다. 저렇게 말해도 이거 맛있었어요, 저거 좋았어요 등 좋은 말만 했을 것이 뻔하다.

“왜요? 하지 말까요?”

한숨처럼 흘러나온 웃음에 재영이 사헌의 눈치를 살폈다. 마냥 천진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도 선은 제대로 지키는 녀석이다.

“네가 힘든 게 아니면 상관없어.”

이제 사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 가이드의 안전이다. 아주머니가 저 대신 재영을 집에 묶어 둘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건 없다. 사헌의 눈동자가 짙은 소유욕으로 번뜩였다.

“형이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조용히 눈을 깜빡이던 재영이 문득 말을 꺼냈다. 다정이라니. 사헌은 저와는 거리가 먼 단어에 움찔했다.

“그렇잖아요.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놀라고 컴퓨터도 여러 대 놓아 주시고.”

사헌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재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눈치 빠른 재영은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결국 사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데려다 줄까?”

사헌이 어느새 깨끗하게 빈 그릇을 힐끗 살피고는 물었다.

“아니요.”

재영은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형 차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지금껏 사헌은 한 번도 밖에서 재영을 태우고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재영이 홀로 밖에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집 안에 스크린에 홈시어터, 수영장 외에 다른 게임기들까지 전부 구비해 둔 것이었다.

“새로 한 대 사면 되잖아.”

사헌이 미간을 좁히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그런데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보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요.”

빈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던 사헌이 ‘그것보다’라는 말이 거슬려 눈썹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데리러 가?”

“아니요.”

밤에는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 혹시나 하고 물었건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럼 늦게 온다는 말은 왜 한 건데?”

사헌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재영은 당황했다.

“같이 사는데 온다, 간다 말은 해 줘야 걱정하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그래?”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재영의 집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형도 꼭 늦게 오면 늦게 온다, 말해 주셔야 해요.”

그렇다고 앞으로도 그래도 되는 건 아니고. 재영은 말간 눈으로 사헌을 응시했다. 대답해 줄 때까지 잡은 팔을 놓아주지 않을 셈이었다.

“너 없을 때나 자고 있을 때 나갈 수도 있는데.”

사헌이 반항하듯 말을 내뱉었다. 데려다 주지도, 데리러 가지도 못하게 한 것이 단단히 맺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문자를 남기면 되죠.”

“……알았다.”

어림없다는 듯한 대꾸에 사헌이 조금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계약서로 도장 찍은 사항도 아닌데 사헌이 제 말을 들어준 것이 신기하고 고마워서 재영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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