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

5.

수능이 끝난 후.

재영을 포함한 ‘뽕팸’은 이전보다 더 바빠졌다. 수험표를 내밀면 머리도 반값, 영화도 반값.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는 사헌이 함께였다. 사헌이 뜨면 그의 팬들이 모여드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걸음 하나 떼기도 힘들었다.

사헌이 어려우니 그의 동생으로 소문난 해운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타고난 관종 민태만 신이 난 상황이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점점 해운의 집에서만 모이게 됐다.

그날 뽕팸은 넷이서만 떠나는 첫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놀 거리가 있는 여행 장소를 선별하기 위해 몇 가지 후보부터 내놓았다.

“그러지 말고 내가 아는 곳으로 안 갈래?”

친구들끼리 골라놓은 장소를 본 듯 만 듯하던 동준이 운을 뗐다.

“어딘데?”

재영은 노트북을 돌려 동준이 검색할 수 있게 했다.

“바닷가인데, 마을 뒤에 작은 산도 있어서 썰매도 탈 수 있음! 대기 없이 무료 썰매 개꿀 아니냐?”

제 쪽으로 노트북을 밀어 놓은 재영의 의도를 모르는 것처럼 동준은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재영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답이 정해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바닥에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가고 싶은 곳이 이미 있으니 친구들이 머리에 열나도록 여행지를 찾는 동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바닷가? 이 겨울에?”

서늘한 바닷바람이라도 떠올린 건지 민태가 양팔로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얘들이 낭만을 모르네. 한겨울 바닷가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

“너는 꼭 아는 것처럼 말한다.”

재영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조곤조곤하게 동준의 가슴을 찔렀다. 팩트 공격을 당한 동준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모르니까 알아보러 가자는 거지!”

“바닷가를 간다고 쳐도 왜 하필 그 끝이냐는 말이지. 근처에도 유명한 바다 많은데.”

해운이 빨리 사실을 고하라는 듯 매섭게 노려봤다.

“우리는 모르고 너만 아는 거기를 누가 알려 줬냐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동준에게 해운이 못을 박았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한 민태가 촐싹거렸다.

“여자야? 예쁘냐?”

기대에 찬 물음에 재영이 민태의 허벅지를 철썩 내리쳤다. 하지만 진짜 맞아야 할 건 민태가 아니었다.

“사진 같은 거 안 봐서 모르는데…….”

동준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재영은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말을 듣고, 낯선 곳에 가겠다는 거야, 지금?”

요즘 남녀노소 가림 없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재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눈으로 동준을 다그쳤다.

“아니, 애가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바르고, 착해. 묘하게 애늙은이 같은 게 웃기기도 하고.”

하지만 동준은 자신에게 여행지를 추천한 친구에게 이미 푹 빠진 듯했다. 호소로 시작된 말은 그 애의 칭찬으로 이어졌다.

“같이 가자, 친구들아, 응?”

마침내 칭찬 타임이 끝났는지 동준이 친구들에게 매달렸다.

“어차피 산에 가도 춥고, 바다에 가도 추운 건 마찬가지 아니야? 이왕이면 아는 사람 있는 곳이 좋잖아!”

친구들이 계속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동준이 앙탈로 방법을 바꿨다.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얼굴도 모른다며.”

“그랬지.”

“이름은?”

“…….”

재영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만하면 왜 안 되는지는 본인도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아니, 아예 모르는 애가 아니라니까! SNS로 1년 넘게 알고 지냈다고.”

뭐에 홀린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아니면 저렇게까지 가고 싶을 만큼 여행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든가. 재영은 곤란한 얼굴로 동준을 바라봤다.

“남자 넷인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냐?”

마침내 해운이 과한 걱정이라는 듯 내뱉었다. 동준에게 설득당했다기보다는 그의 찡얼대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 같다.

“주소는?”

재영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물었다. 동준이 화색이 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져 종이를 꺼냈다. 친구들이 제 말을 들어준 것 같아 안도한 것이다.

“여기 너무 시골 아니야? 차는 다니나?”

동준이 건네준 주소를 지도에서 검색해 본 후, 재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마을에 리조트가 있고, 그 사이트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마트도 없는 것 같고…….”

“여기서 다 사가면 되지.”

동준이 아주 문제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진짜 우리 어디로 팔리는 건 아니겠지?”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라 오히려 민태가 불안한 듯 가슴 위로 팔을 올렸다.

“너를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냐?”

해운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민태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재영은 그 틈에 리조트에 방을 예약하고 준비하지 않아도 될 물품을 체크했다.

열아홉의 마지막 날이자 스물의 첫날을 기념하는 여행의 장소가 결정됐다.

* * *

여행이 얼마 남지 않자 친구들은 머리를 한다, 새 옷 산다, 때 빼고 광내느라 바빴다. 재영은 꾸미는데 취미도 없고, 의류 회사에 팀장으로 있는 형 덕에 옷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따라오면 안 돼요, 알았죠?”

그래서 재영은 그 시간에 앞에 사헌을 앉혀 두고 당부, 또 당부했다. 뽕팸이 놀러 가려는 곳은 가온시 근처도 아니고 지도의 저 끝에 붙어있는 여울시였다. 그곳에까지 사헌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그의 진짜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결의에 찬 재영의 눈동자를 보고 기대 어린 눈으로 기다리던 사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있는 스케줄도 취소하고 싶어지는 말이네.”

사헌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재영의 턱 밑을 쓸었다. 귀 뒤부터 목젖 위까지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손길에 재영은 오싹함을 느꼈다.

하얗게 질린 재영의 얼굴을 보고 사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비상 호출기 눌러.”

사헌이 재영에게 직접 걸어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재영은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해외로 출장 가신다면서요.”

S급 물리계 에스퍼인 사헌의 힘을 필요로 하는 건 비단 대한민국만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A급 이상 던전에 사헌이 동행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 대가로 사헌은 어마어마한 특별 수당을 챙긴다고 했다.

“안재효가 A급이야.”

사헌이 걱정 말라는 듯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파트너 에스퍼인 재효의 순간이동으로 날아오겠다는 소리였다. 재영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A급이라도 바다를 건너는 것에는 엄청난 힘이 소진된다고 들었다.

“눌러, 꼭.”

사헌이 머뭇거리는 재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원하는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굳은 눈빛이었다.

“그럴게요.”

재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사실 부모님 없이 친구들끼리 멀리 여행 가는 건 처음이라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민태가 걱정하는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사헌이 저를 찾아와 줄 거라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럼 출장 가시기 전에 가이딩 왕창 하고 가요.”

재영은 해사하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사헌이 기꺼이 그를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키자 고소한 우유와 같은 향이 호흡을 채웠다.

‘꼭 저 같은 냄새가 나네.’

사헌은 눈을 감고서 재영의 체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 * *

가온시에서 여울시까지, 제일 편한 이동 수단은 기차였다. 친구들은 중간에 내려서 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다시 기차를 탔다. 시간도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루해서 재영은 솔솔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떨며 눈이 번쩍 뜨였다. 재영은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고 무언가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깨우려고 했는데 마침 일어났네.”

잔뜩 신이 난 동준이 재영을 반겼다.

“어?”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재영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저기가 그 마을이야.”

어딘지 멍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동준이 팔을 뻗어 창문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다. 기차 옆으로는 녹색 식물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 사이에 깊은 우물처럼 새까만 입구가 보였다. 기차가 빠르게 그 옆을 스쳐갔다.

“야, 야! 일어나!”

더 이상 입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동준이 나머지 친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아, 엄마, 5분만!”

“나 안 잤는데?”

해운이 쌍꺼풀이 생긴 눈을 부릅뜨며 부정했다. 누가 봐도 푹 자다 깬 얼굴이다.

“지금 못 내리면 종점까지 가야 돼. 빨리 짐 챙겨!”

동준의 다그침에 친구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고 그를 따라 내렸다. 그리고 아까의 그 입구로 가기 위해 기차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하나도 없네.”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민태가 재영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재영은 겁쟁이 친구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토닥였다.

“웰컴!”

그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씨, 깜짝아.”

생긴 것 같지 않게 담이 작은 해운이 제자리서 팔짝 뛰어올라 재영의 어깨 뒤로 숨었다. 재영은 앞뒤로 장성한 친구들을 하나씩 매단 채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마을로 가는 입구는 기차에서 보던 것보다 더 새까맸다. 가지가 아래로 축 늘어진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서 그 그림자로 그늘이 진 것 같았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는 그 어둠 속에 오롯이 서 있었다. 피부가 햇빛에 그을려 건강해 보이는 인상이다.

“네가 동준이지?”

여자애는 넷 중에서 정확히 동준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너한테서 내 냄새가 나거든.”

고개를 끄덕인 여자애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 냄새’라는 말을 들은 친구들이 경악했다.

“냄새?”

제 친구가 혹여나 착하다는 여자애에게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당장 함께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건 아닌지.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 아니.”

그러자 동준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내가 보낸 편지, 가져온 거지?”

묘한 문장으로 동준을 위기로 몰더니 오해를 풀어 준 것도 여자애였다.

“어, 어……. 물론이지. 진짜야.”

동준이 제발 믿어 달라는 듯 친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웬 편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자애의 말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재영은 편지보다는 메일이, 메일보다는 카톡이 익숙한 세대니까.

“혹시라도 믿지 못할까 봐 주고받은 편지 가져왔어.”

“주고받은 편지? SNS로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재영은 다그치며 동준을 노려봤다. 여자애가 의아한 눈으로 재영과 동준을 번갈아 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동준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 나중에…….”

여자애가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린 동준이 제발 봐 달라는 듯 양손을 모으고 비볐다. 재영은 민태도 아닌 동준이 대체 왜 이런 모자란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 * *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애는 생긋생긋 웃기만 했다. 경계하듯 여자애를 바라보던 재영은 이질감을 느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준의 뒤에서는 민태가 여자애를 힐끔거리면서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소개해 달란 뜻이다. 동준이 곧장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게 동준도 여자애의 이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저, 너는 뭐라고 부르면 돼?”

저를 노려보는 친구들의 눈치를 살핀 동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주소는 알려 주면서 이름은 알려 주기 싫었던 건지 여자애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평소 사람을 좋아하는 재영은 왜인지 점점 더 그녀가 꺼림칙했다.

“고라윤이야.”

마침내 비싼 이름을 알아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에 띤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말 그대로 그림 같은 미소다.

“나랑 성이 똑같네!”

라윤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여행지를 고집한 동준은 그녀와 공통점을 만들어 내려고 애썼다. 해운이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재영의 어깨를 툭 쳤다.

“우선 리조트에 가서 짐 놓고 오자.”

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멀리까지 쭉 이어진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시멘트로 덮여 있었다. 길 양쪽으로는 논과 밭이 빼곡했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이 줄지었다. 마을이 완전히 둘러싸인 모양이다.

‘경찰서도 없는 것 같던데…….’

이렇게 단절된 곳에 있는 경찰서를 믿어도 되는지도 의문이다.

“그 다음에 마을 구경시켜 주라.”

적응력이 누구보다 빠른 민태가 라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야. 그래도 괜찮냐고부터 물어야지.”

동준이 라윤의 얼굴을 살피면서 민태에게 눈치를 줬다.

“아니, 쟤가 초대했으니까 안내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민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내뱉었다. 재영은 민태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이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리조트도 내가 데려다 줄게.”

동준의 걱정과 달리 라윤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에 동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마 라윤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쁜 듯했다. 재영은 동준이 안쓰럽기도 하고, 또 걱정되기도 했다.

‘쟤가 진짜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거면 어쩌려고 저렇게 푹 빠졌어.’

재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리조트는 좀 먼데 걸을 수 있겠어?”

“응! 아, 근데 너는 괜찮아?”

동준이 라윤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말이 우스웠는지 라윤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들썩였다.

“이 마을 전부가 내 놀이터인걸.”

주변을 살피는 틈틈이 라윤의 얼굴을 보던 재영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린 듯 일정하던 미소가 그 말을 뱉은 순간 짙어진 것처럼 느꼈다.

“마을이 되게 조용하네.”

재영은 불길한 느낌을 억누르며 혼잣말을 했다. 다해서 열 채는 될까 싶은 집들이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집 안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도 소음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무슨 나쁜 일이 생겨도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래.”

재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라윤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혼잣말이었던지라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재영은 놀란 눈으로 라윤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둥글게 휘어져 있던 라윤의 눈매가 천천히 일자로 펴졌다.

‘너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구나.’

재영은 웃음기가 사라진 라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한 명도 안 보일 수가 있나?”

“겨울이라 일도 없고, 추우니까.”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운 날씨라서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너 말고 다른 또래는?”

“여기에는 학교도 없고, 학원 같은 것도 없으니까 다들 읍내로 나가 버렸어.”

가만히 재영을 쳐다보던 라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울한 목소리를 낸 탓에 동준이 당혹스러워한 건 당연했다.

“그래? 그러면 너희 부모님은? 네 친구로 초대받은 거니까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라윤이 미심쩍기는 해도 어른들에게 예의는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무리는 전부 남자인데 딸 가진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그리고 늦둥이 막내인 재영은 또래보다 연상의 어른들이 더 대하기 편했다.

“그건 좀…….”

하지만 라윤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꺼리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 그래! 그냥 놀러 온 건데 부모님께 인사는…….”

동준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손을 내저었다. 음흉한 속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친구들은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흘겼다.

“부모님은 아직 말을 못 하셔서…….”

내키지 않으면 괜찮다고 말하려던 재영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굳어 버렸다.

“아, 미안해.”

재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를 건넸다. 괜히 라윤의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닐까 미안했다.

“괜찮아. 네가 왔으니까 부모님도 곧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라윤이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 괜찮은 얼굴이라 재영은 조금 안도했다.

‘응?’

그런데 미안함이 가시고, 심장이 정신없이 쿵덕거리던 게 가라앉자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라윤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뇔수록 이상했다.

‘아직 말을 못 하셔서…….’

‘네가 왔으니까, 부모님도 곧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예의상 하는 말이라면 재영이 아니라 동준을 언급해야 맞는 거 아닌가.

재영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혼자만의 의심이 아니었는지 동준이 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윤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재영은 복잡한 심경으로 동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내가 텐트 가져오자고 그랬잖아!”

그러다가 신경질적인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재영은 다시 이쪽저쪽 눈치 보느라 바쁜 동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앞의 건물을 훑어봤다.

괴담에서 많이 들어 본 리조트가 여기 아닐까.

그 정도로 눈앞의 건물은 벽면에 녹물이 흐르고, 검푸른 이끼가 기둥을 타고 자라고 있었다. 정원은 관리도 안 했는지 잡초가 무릎만큼 자라 있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더 좋다고 하던데.”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라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가 체험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비주얼이긴 하네.”

그런 건 질색하는 동준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마찬가지인 해운이 리조트를 추천해 준 라윤의 앞에서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데서 자 보겠냐.”

재영은 달래듯 말하며 해운의 옷자락을 쭉쭉 당겼다.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찌푸린 채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던 해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 마음에 드는 방에서 묵어. 어차피 여기 사람은 너희뿐인걸.”

라윤이 제가 책임자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충 가만히 둘러보니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기는 했다.

‘하긴. 이런 곳에 리조트가 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니까.’

사람들이 여행지를 선정할 때 고려하는 건 보통 아름다운 풍경이나 맛집의 유무다. 리조트까지 오는 동안 식당이라고 할 만한 건물은 보지 못했고, 마을의 풍경도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관리가 안 된 건가.’

재영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리조트 입구를 향해 발을 뗐다.

“그럼 우리 여기 층 다 써도 돼? 1인 1층이야?”

민태가 신이 나서 외쳤다. 리조트가 4층짜리 건물이었던 것이다. 사이트를 통해서 직접 예약을 한 재영은 그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 있으면 해 보든가. 너는 4층 어때?”

해운이 민태를 비웃으며 말했다. 무리 중에서 겁이 많기로는 그와 1, 2위를 다투는 민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쫄리냐? 쫄리면 뒤지시든가.”

해운이 낄낄거리면서 민태를 놀렸다. 사실 저도 무서워서 더 그러는 거라는 걸 재영은 모르지 않았다.

“야, 우냐?”

하지만 재영은 그 점을 들어 해운을 면박을 주기는커녕 해운의 민태 놀리기를 거들기로 했다. 재영마저 푹 숙인 고개를 따라오며 놀려 대자 민태가 울먹거렸다.

민태가 진짜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해운이 달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뛴 재영은 점점 걸음을 늦췄다.

“야. 직원이 없는데?”

해운의 말대로 리셉션은 텅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희뿌연 먼지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재영과 민태가 번갈아 가며 소리쳤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만 들려왔다. 재영은 난처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사이트에서 결제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여기 침구 같은 것도 제대로 없을 것 같은데…….”

은근히 둔한 주제에 해운이 깔끔한 척하면서 툴툴댔다. 재영은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세 사람이 뛰어서 온 탓인지 동준과 라윤이 보이지 않았다.

“라윤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자.”

아무래도 주인 허락 없이 무단 침입하는 느낌이라 찝찝했다.

“일단 더 찾아보자.”

해운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재영은 그를 말리려다가 그냥 따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게 확연히 티가 났다.

“어? 엘리베이터는 움직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하던 민태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녹슨 철이 맞물릴 때 나는 끼익, 끽거리는 소리가 재영에게까지 들려왔다. 제일 간단한 걸레질도 하지 않는데 엘리베이터를 관리했을 리 만무했다.

“그냥 걸어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야! 나도 데려가야지!”

그때 저쪽에서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리며 동준이 뛰어왔다. 하지만 그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었다.

“라윤이는?”

“잠깐 집에 갔다가 온대. 저기서 만나기로 했어.”

라윤이 기다릴까 봐 걱정이 됐는지 동준은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굴었다. 그래서 일행은 어영부영 엘리베이터로 떠밀리듯 들어가게 됐다.

“몇 호?”

“3층, 307호.”

재영은 혹시나 싶어서 예약 페이지를 확인하며 말했다. 녹슨 철이 금방 떨어질 것처럼 덜컹덜컹거렸다.

“야. 이거 진짜 떨어지면 어떡해?”

민태가 엘리베이터 벽면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몸을 덜덜 떨었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는데도 네모난 상자가 계속 흔들리고 있어서 겁을 먹을 만도 했다.

“3층 정도로 죽지는 않을 거야.”

해운이 참도 위로되는 소리를 뱉었다. 재영은 쥐어짜지는 것 같은 팔을 내려다봤다. 해운이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흰 손등에 핏줄이 터질 것처럼 도드라졌다.

재영은 해운의 팔을 떼어 내는 대신 차가워진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온기에 깜짝 놀란 해운이 크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가 다른 손까지 들어 그 손을 붙잡았다.

체감상 한 시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쉬이 발을 떼지 못하는 친구들을 대신해 재영이 문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조명도 다 나가 버렸는지 복도는 깜깜했다.

“가자.”

친구들은 고개를 마구 주억거리며 조심조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에는 붉은색 부직포가 깔려 있어서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307호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재영은 307호 앞에 멈춰 섰다.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다가 움찔 굳었다. 문득 떠오른 사실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랐다.

“왜? 왜 그래? 뭐 있어?”

민태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열쇠를 안 가져왔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재영의 말을 기다리던 두 사람이 허탈함에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곧 재영이 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는지 알아챈 듯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저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서 열쇠 찾아올 사람?”

재영이 그들의 의심에 못을 박았다.

“미친.”

공포로 머리가 둔해졌는지 세 사람 중 누구도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혹시 모르니까 하고, 재영은 문고리를 당겼다.

달칵.

쇳덩이가 구멍에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열려 있네.”

재영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건물의 곳곳이 그렇듯 방문도 역시나 철이 녹슬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와씨. 진짜 다시 내려가야 하는 줄 알고 식겁했네.”

“진작 문부터 열어 봤어야지!”

재영은 친구들의 원성 아닌 원성을 뒤로하고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둘러보니 신발장 위에 카드키가 있었다. 열쇠가 어디 사라질 것도 아닌데 재영은 잽싸게 집어 들었다.

“여기 열쇠도 있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카드키를 들어 보였다. 재영에게서 열쇠를 낚아챈 해운이 문 옆에 열쇠를 꽂았다. 방에 전기가 들어오자 아이들이 불을 발견한 유인원처럼 괴성을 지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와, 엄청 넓어!”

가운데 거실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하나씩 있는 형태였다. 한쪽은 킹사이즈의 침대가 하나, 다른 쪽은 싱글침대 두 개가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 재영은 조용히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환기부터 시켜야겠네.”

여기에 와서 좋은 점을 찾자면 공기가 맑다는 것이다. 방에는 바깥쪽으로 난 큰 통유리창이 있었다. 아쉬운 건 방충망이 없다는 거.

“벌레는 없는 것 같은데.”

재영은 창문 밖으로 몸을 빼고 주변을 둘러봤다. 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겨울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재영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맑은 하늘에 유일한 구름 한 점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헌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가온에 있을 때는 오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오더니.”

입술을 삐죽이던 재영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처럼 아무 연락도 없이 사헌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문득 리조트 입구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 우두커니 선 그림자가 있었다. 난간 밖으로 몸을 쭉 내밀고 본 재영은 움칫했다. 집에 다녀온다던 라윤이 나무 그늘 아래서, 정확히 재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단축키를 꾹 눌렀다.

툭.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소리가 툭 끊어졌다.

“뭐지? 형? 받은 건가?”

재영은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바라봤다. 하지만 보이는 건 키패드였다. 자세히 보니 통화 표시가 뜨지 않았다. 인터넷도 물론.

싸한 기분이 들었다. 사헌이 준 목걸이를 손에 쥐고서 다시 나무 아래를 봤지만, 이번엔 아무도 없었다.

“거기서 뭐 해?”

뒤에서 황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재영의 허리를 잡고 끌었다. 돌아보니 동준이다. 난간 밖으로 몸을 빼고 있는 게 위험해 보였던 모양이다. 재영은 자신을 잡고 방 안으로 끌고 가는 동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편지는 무슨 소리야?”

갑자기 꺼낸 말에 동준이 재영을 뜬금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나 작년 여름에 가족들이랑 바다 갔던 거 생각나?”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재영, 해운, 민태네까지 네 집이 다 같이 가려다가 도저히 스케줄을 맞출 수 없어 파투 난 것이다.

“그때 다들 낮잠 잔다고 하고, 나도 거기 있다가는 잠들 것 같고 해서 단어장 들고 바다로 나왔거든.”

아무리 노는 날이 많았다고는 해도 아이들은 밥 먹을 때도 단어장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고3이었다. 어쨌든 그때 빠졌던 물이 들어오면서 뭔가가 파도에 출렁이며 다가왔단다. 그건 돌돌 말린 종이가 든 유리병이었다. 편지를 읽은 동준은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편지에 적힌 주소로 한 번, 두 번 답장을 보내다가 보니까…….”

“너 진짜 홀린 거 같은데.”

재영은 동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평범한 여자애든 귀신이든. 조심성이 많은 동준이 모르는 사람에게 답장을 보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건……!”

반박하려던 동준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을 멈췄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어. 지금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재영은 양손으로 동준의 볼을 잡고 꾹 눌렀다. 미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동준의 눈이 세모꼴이 됐다. 그걸 보면서 재영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 * *

뽕팸은 대충 짐을 내려놓고 동준이 라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산 아래로 향했다.

“얘들아!”

채 가기도 전에 하이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산을 울렸다. 눈 덮인 뒷산을 배경으로 라윤이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 것까지 만들어 왔어.”

“이게 뭐야?”

민태가 받아 든 비료 포대 안에는 지푸라기가 얇게 깔려 있었다. 라윤이 대답 없이 친구들의 손에 하나씩 그것을 들려 줬다.

“저기로 올라가서 타면 돼.”

그리고 나서 한다는 말이 산 위로 올라가라는 거였다. 재영은 라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러니까 비료 포대는 썰매 대용인 모양이다. 생소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막 발을 뗐을 때였다. 라윤이 올라가는 그 바로 옆에 둥글게 솟은 것이 보였다.

“저건 뭐야?”

“아. 묘야.”

재영의 의아함에 라윤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묘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인데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핀 동준이 먼저 라윤의 뒤를 따랐다. 재영마저 그 뒤를 따라 걷자 민태가 달려서 그를 앞서 갔다.

“너, 폰 안 되는 거 알지?”

해운이 긴 다리를 쭉 뻗어 재영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워낙 외진 곳이니까…….”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돌려 돌려 알고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알고 있으면 됐어.”

해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함을 저만 인지한 게 아니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가 된 모양이다.

“하여튼 진사헌 필요할 때는 또 안 나타나지.”

어지간히도 무서웠는지 해운이 평소에는 번호도 차단해 놓은 사헌을 찾으며 투덜댔다. 재영은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쯤 던전에 들어갔으려나?’

그리고 그동안 본 중계 영상을 떠올리며 사헌이 지금 어디쯤 있을지 가늠해 봤다. 하지만 먼저 꼭대기까지 올라간 민태가 재촉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 * *

“곧 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

재영이 총대를 메고 맥을 끊었다. 시골에는 어두워지면 야생 동물이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재영의 말을 들은 동준이 제일 먼저 그를 향해 달려왔다. 여행지를 이곳으로 정하는 대신, 재영의 말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벌써 돌아가게?”

온종일 함께 놀았는데 지치지도 않는지 라윤이 서운한 티를 냈다. 그러자 동준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동글이 너 쟤한테 무슨 빚졌어?”

그쯤 되자 눈치 없기로는 기네스 신기록 감인 민태마저 이상함을 느꼈다.

“나 아직 너희한테 보여 줄 게 남았는데…….”

친구들의 술렁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윤이 아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뭔데?”

“저쪽에.”

어쩔 수 없이 묻자 라윤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뭐가 있어?”

“유람선이 있어.”

“유람선?”

이렇게 작은 시골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로 만든 쪽배를 유람선으로 착각할 리도 없고.

“진짜야.”

동준마저 제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는지 라윤이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그 자리에 계속 있었어.”

“그 자리에?”

되묻자 라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통영으로 놀러 갔을 때 봤던 거북선을 떠올렸다. 그런 류의 모형인가. 그렇다면 이런 시골에 리조트가 있는 것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는 그런 큰 배를 다루는 기술이 있는 어른도 없어서 지금은 그냥 고물 신세야.”

흔하게 놀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궁금하기는 했지만, 어느 하나 가겠다고 나서지 않고 망설였다. 그러자 라윤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어차피 너희 돌아가 봐야 먹을 거 없잖아, 안 그래?”

“맞네. 그럼 우리 내일까지 굶어야 하는 거임?”

라윤이 심술쟁이 같은 말투로 현실을 짚자 민태가 울상을 지었다.

“리조트 뒤져 보면 바비큐장 하나는 나오겠지.”

해운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 온 고기를 냉장고에 넣어 두진 않았지만, 이 날씨에 발코니에 뒀으니 아직 상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게 아니면 불 켜진 집이라도 가서 부탁드려 보면 돼.”

어른들에게 호감을 사는 일은 재영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 가겠다고?”

라윤이 토라진 티를 내며 동준을 빤히 쳐다봤다. 결국 동준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공동 운명체인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유람선 탐방에 나섰다.

“저기야.”

라윤이 말한 유람선은 바다와 해변에 반반 걸쳐져 있었다. 바다가 파도도 없이 잔잔한 탓에 묶어 두지 않아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까 배는 숨이 막힐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라더니 시설은 멀쩡한 모양이다. 방마다 불빛이 들어와 거대한 아파트로 보일 정도였다.

“야. 차라리 여기서 자자.”

내내 심각한 표정이던 해운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만큼 유람선의 상태는 괜찮았다.

“유람선이니까 방도 있고, 씻을 곳도 있지 않을까?”

민태도 기대되는 얼굴로 유람선을 훑어봤다.

“좋아할 줄 알았어.”

어느새 배를 빙 돌아간 라윤이 철로 된 계단 위에 서서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에는 더 멋져! 얼른 들어와 봐!”

라윤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활기가 돌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윤아! 조금만 천천히 가!”

친구들을 돌아본 동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찼다. 라윤이 그새 콩알만 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것이다.

쿵쿵쿵.

동준의 발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혼자 다니지 말라는 말은 왜 자꾸 안 듣는 거야?”

나선형 계단이라서 벌써 동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해운이 짜증 섞인 말을 뱉으며 계단을 두 칸씩 밟아 올라갔다. 민태와 재영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제일 먼저 지친 건 민태였다.

“헉헉, 아, 동준이가 원래 이렇게 빨랐나?”

재영도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꼈다.

“시골에서 뛰어놀면서 커서 그런가? 라윤이 체력도 장난 없다.”

민태의 말에 동준과 함께 사라진 이의 존재가 떠오르자 재영의 표정은 더 굳었다. 그 순간에 어째서인지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라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얼굴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소름끼치는 눈이.

“얼른 찾아보자.”

마음이 급해진 재영이 민태를 밀치고 앞서 갔다.

“어? 야! 같이 가!”

한차례 휘청거린 민태가 해운의 등을 보며 쫓았다. 쿵쿵쿵.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 * *

동준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튕겼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라윤과 단둘이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몸을 움찔했다.

“여기가 어디야?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애들이 걱정하겠다.”

동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라윤과 절대 단둘만 있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네가 정말 와 줄 줄 몰랐어.”

“오지 말았어야 했나?”

동준이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대충 대꾸했다. 그러자 라윤에게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동준은 제가 너무 무심하게 말했나 싶어 흠칫 라윤을 쳐다봤다.

“어? 잠시만…….”

동준이 라윤의 볼 옆으로 손을 뻗었다. 라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준을 올려다봤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동준의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여기 뭐가 묻은 것 같아서.”

“그래?”

라윤이 민망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동준의 손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 왔다. 동준은 두근대는 가슴을 잡으며 라윤의 얼굴에 묻은 티끌을 떼어 냈다. 하지만 그건 쉽게 떨어지지 않고 눌어붙은 것처럼 계속 당겨졌다.

‘이게 왜 이러지?’

동준이 영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떼어 내려던 것이 아직도 라윤의 뺨에 붙어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건 그냥 먼지 떼어 주는 거니까.’

동준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하며 라윤의 앞에 한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티끌이 붙은 뺨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그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라, 라윤아…….”

가죽이 벗겨져 붉게 핏기가 도는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라윤의 피부까지 벗겨 버린 거야?’

동준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라윤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를 보며 동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별안간 뒤통수가 따가웠다. 재영은 홱 뒤를 돌아봤다. 저처럼 두리번거리며 걷는 친구들 말고는 벽에 액자만 한 작은 거울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거기를 스쳐 가면서 곁눈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본 듯했다.

“어?”

그때 민태가 이상하다는 듯 소리를 냈다.

“왜 그래?”

재영은 민태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재영의 그림자가 있는 곳이었다.

“아니, 방금 네 그림자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차, 착각이겠지.”

민태가 착각이길 바라는 것처럼 계속 되뇌었다. 그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 귀신한테 홀린 거야?”

모르는 척하려다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민태가 매달리듯 물었다. 재영은 슬슬 이상한 점들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기차역에서 우거진 나무 아래서 나오지 않던 라윤. 그리고 작동되지 않는 휴대폰. 재영은 라윤에게 가까이 갈 때마다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가 뭐였는지 알아챘다.

“던전 같은데…….”

재영의 말에 두 친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그럼 우리 어떻게 해?”

“확실해?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던전이면 라윤이는 뭔데?”

친구들은 뜬금없이 던전이라고 하는 재영의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너 우리 형님께 여기 온다고 주소 불러 드렸어?”

민태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 해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따라올까 봐 여행가는 티도 안 냈지.”

해운이 후회가 가득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해 댔다. 민태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튼 위험하니까 절대 떨어지면 안 돼.”

“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민태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뭐야?”

“손잡으면 안 놓칠 것 같아서.”

덜 무서울 것 같고. 작게 중얼거리는 민태의 말을 들은 해운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리고 셋은 줄줄이 소세지처럼 손을 잡은 채 동준을 찾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미친. 이게 뭐야, 징그러워.”

해운이 질색하며 계단 난간 쪽으로 몸을 비켰다. 그가 서 있는 곳 바로 옆 벽에 까맣고 동전 하나만 한 것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솜털이 쭈뼛 섰다.

“소라게 아니야?”

벌레 같은 것들은 민태가 있는 곳 옆 벽면에도 있었다. 해운과 달리 얼굴을 밀착해 살펴보던 민태가 말했다.

“여기가 던전이면 그건 크리처일 거야.”

잡아서 자세히 보려던 민태가 재영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손을 물렸다.

“근데 라윤이가 놀러 다닐 정도면 위험한 곳은 아닌 거 아니야?”

민태가 고개를 쳐들고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재영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민태를 쳐다봤다.

“그 애가 크리처라서 멋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해운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민태가 헉 숨을 삼켰다.

“그, 그럼 우리 동준이 어떻게 해? 위험한 거 아니야? 빨리 찾으러 가……!”

쿵!

민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배가 크게 흔들렸다. 재영은 계단 끝까지 올라간 터라 난간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발밑이 흔들리자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어?”

“엄마아악!”

해운과 민태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아직 계단을 다 올라오지도 못한 두 사람은 계단 바깥으로 튕겨졌다.

재영의 몸은 배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흔들림은 곧 멈췄지만, 재영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서 수천 명이 미친 듯 뛰는 것처럼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린 것이다. 재영은 귀를 틀어막고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뭔가 나타난 건지, 그냥 멀리서 소리만 들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누군가 바로 머릿속에 소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괴로웠다.

‘사라졌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재영은 머리를 감싼 팔 아래로 눈을 떴다. 지금 그저 고요했다. 하지만 태풍 전야 같아서 안심할 수 없었다.

쩍, 쩍-

발바닥이 바닥에 눌어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다친 건가?’

재영은 상체를 세웠다. 언제 배 안으로 들어온 건지 바(Bar) 테이블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거기에 몸을 숨기고 눈만 내놓아 주변을 삼켰다.

사람 같은 형체가 방 안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목적 없이 헤매던 형체가 드디어 재영의 가까이로 접근했다.

재영은 숨을 멈췄다. 앞으로 내민 손발이 썩은 색깔에 가깝게 검었다. 동태처럼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앞으로 걷다가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면 그대로 방향을 돌려 걸었다.

‘좀비……?’

방안을 돌아다니는 형체는 재영이 아는 것 중에는 그것과 가장 닮아 있었다. 하나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잔을 밟고 넘어졌다. 재영은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사, 살…….”

재영은 큰소리를 낼 뻔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커다란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재영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잡았다. 반지 안쪽의 투명한 막이 눌리면서 바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해운은 깜깜한 구석에서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살피다가 제가 있는 곳이 계단 아래라는 걸 알았다.

“김재영! 서민태! 고동준!”

몸을 뺀 해운은 계단 위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하늘에서 우르릉 천둥소리가 들려와 그의 목소리는 묻혀 버렸다.

“비가 오려나?”

해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벌써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어서 흐린지, 맑은지 알 수가 없었다.

찰랑찰랑.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운은 선미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봤다.

검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속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배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무언가 빠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 사람 같았다.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파도를 따라 출렁거렸다. 물에 잠겨 몸통, 왼팔, 오른팔, 왼 다리.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이 나 보였다.

“고라윤?”

그가 여기서 아는 사람 중에 길게 늘어질 만큼 머리카락이 긴 건 라윤뿐이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파도가 일면서 물속에 떠 있는 것이 조금씩 움직였다. 해운은 난간을 잡고 그것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첨벙!

그때 바닷속에서 뭔가가 나타나 그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놀라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먹힌 것이 사람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해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렇게 끔찍했던 리조트가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 * *

가만히 지켜보니 좀비는 바(Bar) 안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입구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근처에만 가면 방향을 틀었다.

재영은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중계 영상을 꼼꼼히 챙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던전 안 크리처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가 좀비의 영역인 거야.’

예로 계단을 올라올 때는 아무것도 만나지 못했지 않나.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겁이 나도 여기서는 나가야 한다. 재영은 빠르게 눈을 굴려 쓸 만한 것을 찾았다. 아까 좀비가 밟은 와인 잔이 그의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재영은 잔이 깨지지 않게 툭 내던졌다. 동그란 와인 잔은 돌돌돌 굴러서 벽에 툭 부딪혔다. 바 안에서 돌아다니던 좀비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듣는데……. 그럼 보는 건?’

재영은 또다시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바텐더가 입었을 법한 앞치마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좀비가 벽에 툭툭 부딪히는 소리에 맞춰 앞치마를 죽 찢었다. 한 번에 찢으려고 힘을 준 탓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남았다.

하지만 쉴 수 없다. 그동안 다른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재영은 천을 여러 개 묶어 긴 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천을 마구 뭉쳐서 줄 끝에 묶었다.

‘일명 좀비 낚시.’

재영은 숨을 고르며 뭉치를 던질 준비를 했다. 좀비가 다니는 길 앞에 휙 던지고 눈을 들어 좀비들을 살폈다. 천을 뭉쳐 만든 공은 바닥으로 던져도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영은 줄을 길게 당겼다가 옆으로 흔들었다가를 반복하며 좀비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좀비가 발밑을 아예 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재영은 과감하게 그것으로 좀비의 발을 건드려 봤다. 좀비가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반응할까.’

재영은 심장을 부여잡고 지켜봤다. 좀비가 자극을 찾아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이 안 보이는 거야!’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재영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소리만 조심하면 나갈 수 있다. 희망이 생기자 없던 힘도 솟아났다.

좀비는 소리가 나거나, 신체를 건드리는 자극만 없으면 대체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영은 눈동자를 굴려 입구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모색했다.

대충 동선을 짠 재영은 먼저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었다. 그리고 빠지지 않게 패딩 주머니 안에 쑤셔 넣고, 주변에서 던질 만한 것들을 주워 모았다.

테이블 아래 떨어진 동전, 꼬리가 말린 병뚜껑. 단단해 보이는 양주병은 혹시 몰라 주둥이를 잡고 거꾸로 들었다.

바스락-.

발을 떼자마자 위기다. 패딩이 얼마나 시끄러운 존재인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재영은 헛숨을 삼키고 양주병을 고쳐 들었다.

쩍, 쩌억.

다행히 발소리에 묻힌 것 같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제의 패딩을 벗으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재영의 패딩 주머니에서 신발 한 짝과 같이 들어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헉……!’

재영은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 좀비들이 약 떨어진 시곗바늘처럼 제자리에 탁 멈춰 섰다. 그리고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재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텅 빈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더, 던질 거…….’

재영은 눈을 들어 앞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입술을 깨문 재영은 갈급하게 주머니 깊숙이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빨리, 빨리……, 뭐든, 제발……!’

그리고 드디어 손끝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화색이 돈 재영은 손을 오므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은 바(Bar) 안쪽에서 주운 동전이었다.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빼 멀리 있는 벽 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깡!

날 선 소리를 낸 동전이 좀비들의 시선을 앗아갔다. 벽에 부딪혀 떨어진 동전은 바닥을 뒹구르르 구르다가 테이블 다리에 부딪히고 쓰러졌다. 재영은 동전을 따라 벽에서 테이블로, 바쁘게 옮겨 다니는 좀비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영은 단체로 이동하는 발소리를 방패 삼아 잰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반을 건넜지만, 다시 문제가 생겼다.

모든 좀비가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퉁, 퉁, 퉁.

길잃은 좀비 하나가 테이블에 배를 부딪쳐 뒤로 튕겼다가 다시 걸어와 부딪치기를 반복했다. 가로로 길게 방어를 하는 셈이었다. 옆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쓰러진 테이블이 길을 막고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영의 눈에 틈이 보였다. 테이블 아래였다. 좀비가 테이블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틈을 노려야 한다. 재영은 일단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지금이야!’

패딩에서 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바닥을 기었다. 엉금엉금 기는 그의 손 옆으로 까맣게 뭉개진 발가락이 보였다.

‘벌써……!’

재영은 최대한 테이블 다리 쪽으로 몸을 붙여 좀비를 피했다. 좀비가 몸을 부딪치며 테이블이 살짝 기울어졌다. 다행히 재영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아닌 듯했다. 깊이 숨을 내쉰 재영은 얼른 기어서 테이블 아래를 빠져나왔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테이블이 기어이 옆으로 넘어졌다.

-으어어어!

작지 않은 소리에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테이블 위로 쌓이고, 쌓였다. 저들끼리 부딪치고는 성을 내기도 했다. 재영은 몸을 이리저리 젖히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마터면 내가 저 꼴이 될 뻔했어.’

재영은 다리와 이별한 처참한 꼴의 테이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후로도 재영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입구를 향해 갔다. 아까의 테이블 쪽으로 좀비들이 몰려간 덕에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이제 다 왔어.’

입구까지 단 세 걸음을 남겨 둔 재영은 몇 번일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입구 바로 앞에 좀비 세 마리가 뭉쳐 있어 이대로 가기는 어려웠다.

‘쉽게는 안 보내 준다, 이거지.’

재영은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굳히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움직이느라 이미 한 시간은 족히 넘긴 것 같았다. 재영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땀은 또 얼마나 흐르고,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닦았는지 이마가 따끔거렸다.

‘조금만 가면 돼.’

숨을 고른 재영은 몸을 살짝 틀어서 벽 쪽으로 붙었다. 등을 바짝 대고 옆으로 걸으면 얽혀있는 좀비를 피해 입구로 빠져나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무리를 이탈했다. 그것은 양팔을 앞으로 내밀고 재영의 앞을 스쳐갔다. 재영은 숨을 멈추고 좀비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좀비가 몸을 휙 돌렸다. 재영의 등 뒤로는 벽이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새까만 팔이 코앞까지 닥쳤다.

‘닿는다……!’

재영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주저앉았다. 운이 좋으면 테이블 아래 있을 때처럼 좀비의 발이 제게 닿지 않을 거라고, 제발 그래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흐윽, 흐.

재영의 숨이 엷게 떨렸다. 스스로의 귀에 들리는 숨소리가 너무 컸다. 조용히 해야 하는데. 좀비들은 소리에 반응하는데. 머리가 말하는데 몸은 도저히 듣지를 않았다. 그렇게 살 떨리는 고요 속에서 재영은 지쳐 가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재영.”

그때,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윤이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 이곳이 던전인 걸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떠올린 그 목소리였다.

‘형……!’

반가움에 재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다른 크리처는 아니겠지?’

듣고 싶은 목소리를 흉내 내는 크리처면 어떡하지. 치열한 고민 속에 재영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계속 감고 있어도 되고.”

이어지는 말은 재영이 눈을 뜰 수밖에 없게 했다. 퉁명한 말투가 분명 사헌이다. 이런 재수 없는 말투까지 크리처가 흉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재영은 눈을 번쩍 뜨고 앞에 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사헌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재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나 같은 게 또 있으면 감당은 할 수 있고?”

사헌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아니요. 절대요.”

재영은 사헌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명확한 거부 반응에 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크리, 크리처는요?”

적지 않은 시간, 사헌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재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사헌이 말없이 등 뒤를 쳐다봤다. 재영은 그를 따라 사헌의 몸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좀비들이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쳐 쿵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진짜다. 진짜 괜찮아졌다. 이번에는 안도감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조금만 쉬고 있어.”

재영의 팔에서 벗어나게 된 사헌이 몸을 일으켰다. 곧 바다에서 굵은 물줄기가 솟아 입구를 통과했다. 물줄기는 사헌의 손짓을 따라 좀비 같은 것들을 쓸어서 바다로 돌아갔다.

재영이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 순간, 사헌의 몸이 휘청였다.

“형!”

놀란 재영은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사헌의 겨드랑이 밑으로 몸을 넣어서 지탱했다. 바닥까지 처박아 버릴 것 같은 무게감에 신음을 삼켰다. 다리가 꺾일 것 같았다. 재영은 팔을 뻗어 사헌의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예상한 통증은 없었다.

“괜찮아.”

단단한 팔이 재영의 등에 감겼다. 눈을 뜨자 언제 휘청거렸냐는 듯 사헌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무리한 거 아니에요?”

재영은 사헌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세히 볼 수 있게 제 쪽으로 각도를 틀었다. 사헌의 눈 밑에 까맣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긴 해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어도 사헌 또한 인간이다. 재영은 제가 두려운 것만 생각했지 사헌이 힘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사헌의 몸에서 날뛰는 기운이 재영을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자신이 이럴진대 사헌은 어떨까. 재영의 얼굴은 울 듯이 일그러졌다. 텔레비전에서 본, 폭주하는 에스퍼의 얼굴이 사헌의 것으로 변했다.

“거기서 바로 온 거예요? 혹시 던전 안에 있는데 내가 부른 거예요?”

재영은 못내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바닥에 볼을 부빈 사헌이 숨통이 트인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던전인 건 알지?”

사헌이 눈을 감은 채 입을 뗐다. 그게 자신의 말에 대한 답이 아닌 것 같아서 재영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일주일이 지났어.”

사헌이 천천히 눈을 뜨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너희들이 여행을 떠나고 일주일이 지났다고.”

재영은 그제야 그가 제 말에 답을 해 준 거라는 걸 알아챘다. 여행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면 그전에 캐나다로 떠난 사헌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상상치도 못한 말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엄마는……, 가족들은 걱정 안 해요?”

재영은 당황해서 마구 말을 내뱉었다. 사헌이 그런 재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네가 남 걱정할 때야?”

“저는 이제 안전하고, 내가 안전하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부모님은…….”

재영은 사헌에게 두 뺨이 꽉 잡혔다. 횡설수설하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센터 차원에서 움직였어. 내가 왔고. 그런데 부모님이 너 안전한 걸 모를 것 같아?”

그 말에 안도한 재영은 토하듯 숨을 뱉었다. 그리고 사헌의 퀭한 눈에 정신이 들었다.

“형! 우선 가이딩부터 해요.”

“그럴 시간 없어.”

말짱해진 재영을 확인한 사헌이 몸을 돌리려고 했다.

“센터가 움직이기는 했지만, 지금 여기 있는 건 나랑 안재효뿐이야.”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센터의 절차는 너무 복잡했다. 바깥에서 등급을 재고, 진입할 수 있는 팀을 추리고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 왔는데 정작 자신이 그 상황에 부닥치고 보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시간 없으니까요.”

재영은 당장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사헌을 붙잡았다. 뿌리치려고 하면 한 손가락으로도 가능할 텐데 사헌은 그러지 않았다. 재영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벽에 기대서게 했다. 그리고 사헌의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밀어 넣은 후, 팔을 뻗어 사헌의 뒤통수를 감싸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래서.”

바닥을 긁는 목소리에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 그렇게 심각했냐는 듯 사헌의 얼굴에는 흥미롭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재영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떻게 해 줄 건데?”

사헌이 속삭이듯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영은 긴장감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지금까지 가이딩은 사헌이 주도해 왔다. 그나마 최근에는 제 기운을 사헌의 몸 안에 넣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연습을 시작했으나, 그 또한 사헌의 요구가 있어서였다. 온전히 제가 먼저 원해서는 처음이다.

재영은 사헌의 뒤통수를 눌렀다. 사헌이 허리를 구부려 가까이 닿을 수 있게 도왔다. 다만 그뿐이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재영은 오기가 치솟았다.

‘나도 할 수 있어.’

재영은 목표물인 사헌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입술은 버석버석하게 말라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었다. 그가 그만큼 피곤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재영은 이끌리듯 발끝을 들었다. 그리고 사헌의 입술에 가만히 제 입술을 눌렀다. 그의 체향이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숨결 때문에 맞닿은 입술이 간지러워 입술을 달싹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이 닿았다. 재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가쁜 호흡, 단단한 피부, 사헌의 배 속 깊숙이에 똬리를 튼 사나운 기운. 그것은 금방이라도 부피를 키워 사헌을 터뜨리려는 것처럼 팽창과 수축을 크게 반복했다. 재영은 사헌의 입술을 열고, 목구멍을 따라 제 기운을 훅 밀어 넣었다.

“읏.”

재영은 기운을 넓게 퍼뜨려 그것을 감싸 안듯이 했다. 하지만 흥분에 날뛰는 힘을 진정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떠미는 힘에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아!”

그때 재영의 입에서 단말마 비명이 터졌다. 사헌이 그의 입술을 깨문 것이다. 입술을 떼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해 주는 걸 기다렸다가는 하루가 다 가겠어.”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맞는 말이라 반박은 할 수 없었다. 한 시가 급한 것도 맞고. 고개를 끄덕이자 물컹한 살덩이가 입술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더 빠르게 가빠진 호흡에 머릿속이 흐려졌다.

“흡……, 아.”

숨이 차서 고개를 틀면 재영을 괴롭히던 입술은 그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사헌이 잠시의 텀을 두고 다시 재영의 입술을 찾았다.

* * *

사헌의 예상과 달리 센터의 조치는 발 빨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진사헌의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구출된 순서대로 조사를 받았다. 가이딩으로 시간을 보낸 재영은 세 번째였고, 마지막이 동준이었다. 네 사람 중 중요도가 높은 것도 그였다.

‘라윤’은 사람을 잡아먹고 그 껍데기를 쓰는 능력을 지닌 크리처라고 했다. 전이 받은 기억으로 그 사람의 흉내를 낸다고.

“먼지를 떼어 주려고 했는데 피부가 벗겨졌어요.”

동준이 반쯤 울면서 말했다. 그는 호감을 갖고 있던 라윤이 사람이 아니라는 혼란스러움과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을 위험으로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영은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동준의 어깨를 감싸 끌고 나가려고 했다. 그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나 꾸벅거리고 있었다. 재영은 이 일에 휘말린 것이 차라리 자신들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동준이 아니라도 누군가 크리처의 최면에 속아 던전에 발을 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사헌처럼 대단한 에스퍼와 연이 닿은 사람이 있을 확률은? 물론 아무런 희생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 맞다!”

재영의 손에 순순히 끌려가던 동준이 돌연 멈춰 섰다.

“라윤이가……아니, 그, 크리처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을 했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동준이 재영을 힐끔거렸다. 재영은 갑자기 제게 향하는 관심에 놀라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그,게…… 제 껍데기를 먹으면 재영이 곁에 있기가 더 편해질 거라고요.”

동준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하마터면 크리처에게 잡혀 시신까지 농락당할 뻔했다. 그리고 제 몸을 가진 크리처가 재영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하필 김재영 군이죠? 연락을 주고받은 건 고동준 군이라면서…….”

“크리처한테도 눈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직원들이 의문을 표하자 민태가 해맑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던 센터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동준을 힐끔거렸다. 그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야. 차라리 주먹으로 패.”

해운이 민태를 힐난했다.

“응? 왜? 무슨 일 있어?”

민태가 휘둥그레 뜨인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답을 구했다. 사람들은 그저 동준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 * *

“형이랑 계약할게요.”

갑자기 꺼낸 말에도 사헌은 되묻지 않았다. 바로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정확히 세 번 접은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

“진짜 들고 다녔네요?”

“내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빈말을 할까.”

사헌이 그렇게 대꾸하며 재영을 의자에 앉히고 펜을 쥐여 줬다.

<을은 갑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갑은 을이 원할 때마다 원하는 방식으로 가이딩을 해 준다.>

눈으로 계약서를 훑어보던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스치듯 본 조건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 경보를 울린 것이다.

“형, 여기 숙식을 제공한다는 건…….”

“내 가이드인데 나랑 같이 살아야지.”

재영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조항을 확인하고, 사헌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예상했던 일인데도 사헌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사헌만 편하고, 사헌에게만 유리한 조건이었다.

아직도 재영은 이 계약이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폭주하는 사헌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갑질이라도 제대로 해야지.’

입술을 깨물고 머릿속을 정리하던 재영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우선 수정할 사안부터 체크할게요.”

“수정?”

사헌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게서 위협적인 기운이 풍겨 나왔다. 재영은 불안하게 떨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검은 글자에 시선을 박았다.

“가이드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제재받지 않는다는 거 아시죠?”

재영의 말에 사헌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에스퍼에게만 능력이 발현되는 가이드와 외부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에스퍼는 취급이 달랐다.

의무로 받아야 하는 검사에서 에스퍼로 나오면 그때부터 국가에 등록되어 행적이 기록된다.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취직에도 지장이 생겨 생계를 유지하려면 에스퍼로 활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랑 개인 계약하자는 거 아니야.”

“아니요. 원하지 않으면 굳이 가이드로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재영의 반격에 사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계약하겠다며. 너 나 가지고 놀아?”

사헌이 사납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말끝에 이를 가는 소리도 들렸다. 재영은 겁먹지 않은 척하려고 사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제대로 ‘갑’ 대우를 해 달라는 말이에요.”

그러자 사헌이 곧장 이해되지 않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어쨌든 제 말을 무시하지 않는 것 같아서 재영은 씩, 웃으며 다시 종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갑이니까 가이딩 방식은 제가 정할게요.”

재영은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알기 전에는 사헌이 제게 뽀뽀하거나 만지작거리는 것이 가이딩을 받는 거라는 건 몰랐다. 늦둥이 막내로 위의 남매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라다 보니 그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워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탓이다. 하지만 그게 애정 표현이 아니라 단순히 가이딩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꺼려졌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사헌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재영은 작게 숨을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전에 레이드 영상 보니까 대부분 손만 잡고 가이딩하는 것 같던데요.”

재영의 어깨와 맞닿아 있는 사헌의 어깨가 움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거나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재영이 하는 말을 전부 들어 보겠다는 태도였다.

“치료는 당연히 환자가 아플 때 해야 하는 거니까 때는 형이 원하는 때로 하구요.”

“환자?”

재영의 표현에 사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몸 안의 마력이 소진되어 힘이 없는 것도 아프다면 아픈 것 아닌가. 재영은 흔들림 없이 말간 얼굴로 사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다야?”

제게 꼭 맞는 가이드라는 사실이 사헌을 너그럽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재영은 처음보다는 마음 편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숙식 제공에서요.”

“그건 양보 못 해. 던전이 시간 골라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새벽, 아침 가리지 않을 텐데,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드나들면 민폐 아닌가?”

이번에는 사헌도 단호했다. 의외로 상식적인 말에 재영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대학 생활의 로망이 있는 재영도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부모님은 아직도 소중한 막내아들의 창문으로 외간 남자가 드나든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럼 가이딩 단계는 어디까지 허락할 건데?”

불만 어린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일단 넘어가겠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뽀뽀까지는 이미 해 버렸으니까…….”

재영은 수줍은 듯 눈을 깔고 웅얼거렸다. 제 가이드라는 생각에 너그러워져서 그런가. 사헌은 그런 재영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제 동생에게는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뽀뽀 아니고 키스.”

사헌이 아주 당당하게 재영의 오류를 수정했다. 이미 저지른 건 몇 번을 해도 상관없다는 주의인 모양인데 전진은 못 해도 후퇴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시에 사헌은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끝까지 해 버리는 건데.

“근데 형하고 계약하면 저도 협회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성가시게 뭐 하러. 그냥 개인 계약으로 할 거야.”

“에이, 그럼 군대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영이 좋다 말았다는 듯 툴툴댔다.

“계약서로 활동 증명만 되면 안 가도 돼.”

“댕이득!”

대충 합의가 끝났다고 생각한 재영은 프린팅된 글씨 위에 선을 직직 긋고 이야기를 나눈 사항을 적어 넣었다.

“애들이 알면 엄청나게 놀려 대겠네요.”

펜을 내려놓은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당장 그를 놀린 사람이 코앞에 있기라도 한 양, 사헌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풍겼다.

“감히 누구 페어를 놀려.”

재영은 사납게 말하는 사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은 단순히 가이드로 발현한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가 제 빽이 된 것이다.

“이대로 수정해 주세요.”

그 말에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재영이 대답만 하면 바로 사인하게 할 생각으로 계약서를 들고 다니던 사헌이다. 재영에게 생각할 틈을 주는 게 달가울 리 없다.

“계약서 고쳐 왔는데 생각 바뀌었다는 말하기만 해.”

“당연하죠.”

재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누구 앞에서 밑장을 뺀단 말인가.

“근데 넌 배짱이 좋은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붉어진 재영의 뺨을 엄지로 문지르던 사헌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 하얗고,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하게 생긴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저를 어려워하면서 꺼리지는 않고, 무서워하면서도 다가와 말 걸기는 주저하지 않았다.

볼펜을 꽉 움켜쥔 재영이 서러움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또 갑자기 심한 말을 하세요.”

그러자 그를 압박하듯 뒤에 서 있던 사헌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재영의 귀 바로 옆까지 얼굴을 가져갔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재영은 공포의 주둥이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돌아봤다. 사헌이 재영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기울여서 눈이 마주쳤다.

“아니, 잘했지. 적어도 거절은 안 했으니까.”

사헌의 눈동자가 이질적인 빛으로 번뜩였다. 순간 팔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에 재영은 몸을 움츠렸다. 끝내 거절했으면 어쩌려고 했던 걸까.

“내가 너 가둬서 묶어 놓고 가이딩만 받을 수도 있잖아.”

제 말에 겁먹은 재영을 본 사헌이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렸다. 더없이 음흉하고 비열한 표정이었다.

“형…….”

재영은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사헌을 불렀다. 사헌이 언급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취향이셨…….”

재영이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은 기어이 사헌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웃음일지라도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말을 뱉은 재영이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을 노려보던 사헌이 팔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덮인 목덜미가 잘게 떨렸다. 그대로 재영의 얼굴을 제 쪽으로 당긴 사헌이 통통한 아랫입술을 덥석 물었다.

재영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사헌은 코앞에 있는 동그란 눈동자가 경악으로 차오르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힉……!”

사헌은 정신을 차린 재영에게 밀려나기 전에 잘근잘근 씹던 아랫입술을 혀로 한 번 핥고 떨어졌다.

“가, 가이딩 필요 없으시잖……!”

재영이 겁도 없이 사헌의 얼굴에 손가락질하며 기겁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해진 탓에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사헌은 아마도 제 것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재영의 입술을 엄지로 훔쳤다.

“너 사막을 걷다가 오아시스를 만나면 어떨 것 같아?”

숙이고 있던 상체를 세운 사헌이 뜬금없이 말을 던졌다. 재영의 얼굴이 어려운 문제라도 만난 것처럼 구겨졌다.

“딱 한 모금만 마셔도 목을 적실 수 있으니까 그것만 마실까?”

그러니까 틈만 나면 계속 시도 때도 없이 하겠다는 뜻이다. 평소에도 사헌이 남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이 굴던 것이 떠올랐다.

“하나 더 추가해요.”

재영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떼자 사헌이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뭔데?”

“제가 준비될 때까지 가이드라는 사실은 숨기기로 해요.”

“그래.”

긴장한 것치곤 사헌의 대답이 흔쾌했다. 재영은 의외라는 듯 놀란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계약을 종용했던 만큼 사헌이 당장 자신을 끼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영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숨기면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그럼 계약서 고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재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콕 박혀서 쉬고 싶기도 하고, 사헌의 행동력을 봤을 때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사헌이 다소 급하게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재영은 잠시 침대에 몸을 누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뒤로도 한참 제 조건에 크나큰 허점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 *

커다란 굉음이 도시를 울렸다. 빌딩 상단에 있는 스크린에서 중계되는 영상에서 나는 소리였다.

재영의 눈은 화면 곳곳을 바쁘게 훑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오늘 출동한다던 사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리처의 꼬리에 얻어맞아 쓰러진 그의 팀원, 땅개가 있으니 화면 밖 어딘가에 사헌도 있기는 할 터였다.

땅개는 거대한 발에 깔리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머리맡에 나타난 재효가 그의 팔을 잡고 사라졌다.

“아, 형님이시네.”

그리고 영웅처럼 화면을 가득 메운 것은 사헌이었다. 재영은 사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헌이 손을 들어 올리자 집채만 한 괴물이 허공을 날아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크리처는 끈질기게도 긴꼬리를 움직여 사헌을 휘감으려고 했다.

“아……!”

재영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크리처의 시선이 사헌에게 향한 직후부터 심장이 꽉 조여 왔다.

“와, 미쳤다, 진짜.”

“무빙 지린다.”

모든 공격을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피해 낸 사헌이 크리처의 꼬리를 발판 삼아 하늘 높이 떠올랐다.

“봤냐? 그건 내 잔상이다, 애송이.”

동준이 들뜬 얼굴로 비틀거리며 사헌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척했다. 그제야 재영은 멈추었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제발 그딴 건 너네 집 화장실에서나 해, 씨발.”

민태가 쪽팔림을 견딜 수 없었는지 흐느끼며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동준은 평소에는 아주 점잖고 생각도 깊은 친구인데, 처돌이 모드로 돌아가면 감당할 수 없는 주접이 됐다. 그나마 곧 카메라가 다른 팀원들을 비추면서 쇼도 끝이 났다.

“다른 에스퍼들도 투입됐네.”

조용히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던 재영이 상황을 중계했다. 크리처 앞에 서있는 것이 사헌만이 아니게 되자 완전히 마음이 놓인 것이다.

“저기서 저러고 계시면 확실히 집에는 안 계시겠다, 그치.”

대학 입학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뽕팸은 마치 오늘만 사는 사람들처럼 매일을 놀면서 지내고 있었다. 모임 장소는 늘 그렇듯 해운의 집.

“그래서 언제 갈 건데? 나 배고파.”

스크린에서 사헌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재영은 해운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그러니까 가까운데 들어가서 아무거나 처먹자고.”

해운이 재영의 둥그런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안 돼.”

빨갛게 익은 이마를 감싼 재영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 집 뚝배기로 끓여야 맛있단 말이야.”

그 짭짤하면서 매콤한 맛이 떠올라 재영은 군침을 삼켰다.

“별…….”

해운이 한심하다는 듯 재영을 쏘아봤다. 하지만 재영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멜론 사다 놨다고 꼭 먹으라고 문자 하셨어.”

재영은 대단한 의무라도 진 것처럼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그가 언급한 ‘어머니’는 다름 아닌 해운의 엄마였다.

“우리 엄마가 왜 그런 문자를 너한테만 하는데?”

해운이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러자 재영이 몰라서 묻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너는 이렇게 징그럽고, 나는 귀여우니까.”

재영은 안 그래도 아들들과 달리 애교가 많아 해운의 엄마가 귀여워하던 아이였다. 해운을 괜히 입맛만 다셨다.

“야, 오늘은 뭐 걸래?”

“장소 제공하는데 나는 빼 주는 거 없냐?”

“응, 안 돼~”

“아, 치사한 새끼들! 그럼 그냥 피방 가서 하든가!”

“야. 라면은 있지?”

네 사람은 그렇게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곧 그리워질 동네를 향해 갔다.

* * *

해운의 집으로 오는 내내 티격태격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던 일행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야! 없다며!’

마침 물 컵을 들고 현관 앞을 지나치는 사헌과 마주친 친구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 댔다. 하지만 해운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혀, 형이 웬일이야?”

그도 그럴 게 사헌은 에스퍼가 되고 독립한 후에 본가로 온 적은 거의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형님.”

굳어 있던 친구 중 재영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둘만 있을 때는 편하기만 한데 친구들의 감정에 동요된 탓일까. 아니면 그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나타나서일까. 사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인사가 빠르네? 난 또 나 먼저 하라고 눈치 주는 줄 알았지.”

사헌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싸늘한 미소에 재영은 찬물을 갑자기 들이켠 것처럼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그럴 리가요.”

재영은 평소처럼 웃으려고 애썼다.

‘왜 화가 나셨지?’

재영이 페어 가이드로 현장에 함께 출동하지 않는 건 이미 협의가 된 사항이었다. 그 후로 벌써 몇 번이고 사헌은 혼자 현장에 출동했고. 그러니까 동행과 관련된 일로 화가 난 건 아닐 터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야, 찹쌀떡.”

헉.

인사를 하고 조용히 사라지려던 무리가 동시에 헛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리고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영만이 재앙을 맞닥뜨린 듯 하얗게 질렸다. 어쩌면 막 현장에서 돌아온 사헌의 목적이 가이드인 그인 게 당연했다.

“이리 와 봐.”

사헌은 재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해운아, 다녀와.”

재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운의 등을 떠밀었다. 사헌이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덥석 따라가기에는 겁이 났다. 둘만 있을 때 사헌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고삐가 없었다.

‘여기는 내 방도 아니고, 애들도 있는데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어.’

재영은 침을 꿀떡 삼키면서 사헌의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던 사헌이 당장에 다가올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직접 움직이면 더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재영은 냉큼 사헌의 옆에 붙어섰다.

“니들은 가 보고.”

“알겠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형님!”

사헌으로부터 자유를 명받은 친구들은 허리를 꾸벅거리고는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따라와.”

툭 내뱉은 사헌이 먼저 등을 돌려서 방으로 향했다. 재영은 다리를 질질 끌며 그의 뒤를 따랐다. 무거운 추가 묶인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방으로 들어와 곧장 입술이 맞물렸다. 습한 공기가 벌어진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재영은 이제 입술만 닿아도 제 에스퍼의 기운이 얼마나 엉켜 있는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혀가 아릴 정도가 되어서야 사헌이 입술을 뗐다. 재영은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사헌의 몸을 살폈다.

“도대체 가이딩을 어떻게 했길래…….”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사헌이 가이딩을 받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그런데 사헌의 상태는 심각했다. 탐색을 마치고 입술을 뗀 재영은 속상한 티를 내며 툴툴거렸다.

“내 가이드가 여기 있는데 무슨 가이딩을 받아.”

사헌이 나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조곤조곤 재영을 찔렀다.

“괜찮다고 했으면서…….”

미안함에 불퉁하게 튀어나온 재영의 입술은 사헌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느라 또 바빴다.

“너 만나기 전에는 항상 이 상태였으니까 더 나빠지고 말고 할 게 없지.”

담담하게 내뱉는 말이 재영의 얼굴을 고통으로 일그러뜨렸다. 그에 가학적이기도 한 희열이 사헌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그러니까 어서.”

사헌이 재영의 손을 끌어다가 제 옷 속으로 넣으며 재촉했다.

재영은 손끝에 들끓는 듯한 체온이 닿자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몸 안에 얽힌 기운을 풀어내기 위해 사헌의 상체 여기저기를 더듬어 댔다. 키스만 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빠른 속도로 기운이 풀려 갔다.

가이딩 방식이 바뀐 건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부터였다. 처음 사헌이 이런 방식을 제안했을 때는 기겁했다. 하지만 막상 하고 보니 더 쉽고 빠를 뿐 아니라, 제 능력에도 부담이 덜 갔다.

재영은 엉덩이를 당기는 힘에 끌려 사헌의 품에 바투 안겼다. 그리고 고개를 비틀어 맞물린 입술 틈에 제 기운을 불어넣었다. 사헌에게로 건너간 힘은 거칠게 들썩이는 에너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

빠르게 가라앉는 고통에 사헌이 목을 울리며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재영은 제 기운과 닮은 손길로 날카로운 사헌의 턱선을 쓰다듬었다. 손바닥 아래 단단한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으, 응……, 물지 마세요.”

평온해진 사헌이 이로 아프지 않게 입술을 깨물자 재영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반항 어린 손짓에 사헌의 미간에 금이 갔다.

“입술 부으면 다 티 나잖아요.”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하고는 재영이 수줍게 속삭였다. 홍조가 떠오른 뺨이 깨물고 싶을 정도로 구미를 당겼다.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사헌은 기꺼이 이를 물렸다. 그리고 이 대신 입술 틈으로 재영의 입술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재영이 이번에도 합! 소리를 내며 머리를 뒤로 뺐다.

“이것도 좀…….”

재영이 사나워진 눈을 힐끗거리며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려 숨겼다.

“속상해하던 귀여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재영의 턱을 쥔 사헌이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니, 형은 너무 과하니까…….”

미안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던 재영이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얼굴을 환히 밝혔다.

“제가 할게요!”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외침에 사헌의 얼굴은 대번 불만스러워졌다.

“네가 하는 건 감질나.”

무신경하게 툭 내뱉은 말에 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로라도 못하지 않는다고 달래 줄 것이지.

“아니, 가이딩하는데 감질날 게 뭐 있어요!”

서운함에 밀려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재영이 사헌에게 허락한 가이딩은 키스까지만이었다. 사헌이 뭐가 문제냐는 듯한 눈으로 멀뚱멀뚱 재영을 쳐다봤다.

“그렇게 만지는데 서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사실 재영도 가이딩을 하면 느낌이 오기는 했다. 알면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싫으면 여기까지만 하고 가시든가요.”

사헌이 느껴야 할 몫의 수치심까지 전부 껴안아야 하는 게 영 억울했다. 입을 삐죽거린 재영은 그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다.

인상을 찌푸린 사헌이 재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재영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물었다.

“네 맘대로 해.”

사헌이 결국 재영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손을 허리로 내리고 깍지를 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형은 혀도 움직이면 안 돼요.”

이겼다는 생각에 재영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재영은 곧장 두 손으로 사헌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붙였다.

사헌에게 키스를 배운 탓인지 재영도 입술을 오물거리며 씹어 대는 게 습관이었다. 사헌은 혀로 그 입술을 슬쩍슬쩍 훔치며 어린아이 뽀뽀 같은 키스를 만끽했다. 이런 느긋함도 꽤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재영은 몸이 점점 앞으로 쏠리고 있는 걸 느꼈다. 워낙 느리게 진행된 일이라 몰랐는데 사헌의 등이 반 넘게 침대에 닿아 있었다.

“힘들어서 그래.”

재영의 의심 어린 시선을 본 사헌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리고는 완전히 침대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재영은 눈을 거두고 다시 입술을 붙였다. 스크린 속에서 본 사헌이 그 직후 집 안에 있었으니 현장에서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곧장 왔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점점 몸이 나른하게 풀려 갔다. 재영은 똑바로 누운 사헌의 몸에 기댄 채 그를 계속 어루만졌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렸다. 혀끼리 마찰하는 소리까지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그때 미끈한 혀가 얼른 일어나라는 듯 재영의 혀를 감싸 당겼다. 잠에서 깬 것처럼 재영은 입 안을 침범한 혀를 익숙하게 맞이했다. 졸지 않았다고 증명하려는 것처럼.

다 알고 있다는 듯 사헌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재영은 민망해서 자세를 고치려고 몸을 달싹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어, 그……, 이제 그만 할까요?”

재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사헌의 눈이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그 눈도 눈인데, 허리 아래가 너무 불편했다.

“조금 더 해야 하지 않겠어?”

사헌이 속삭이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흣! 아, 잠깐…….”

묵직한 감촉에 재영은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재영은 입에서 야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바로 옆방에 애들도 있잖아요.”

거절의 이유를 들은 사헌이 몸을 떼고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섰다. 사헌도 그를 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알았으니까 입 벌려.”

사헌이 봐줄 것처럼 말하며 엄지로 재영의 입술을 문질렀다. 반항할 생각도 없는 입술이 가볍게 벌어졌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사헌이 드러난 이를 톡톡 두드렸다.

재영은 순순히 침입을 허락했다.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가락이 혀를 꾹꾹 누르며 자극했다. 소름 돋는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니, 왜 손가락을……. 이것도 키스 맞나? 그냥 손가락이니까 괜찮나? 이거 조금 이상하지 않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헌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머금고 있던 타액이 감당할 수 없게 차올랐다. 재영은 입에 고인 것을 꼴딱 삼켰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손가락을 앙 깨물었다.

‘이 정도는 덤벼도 괜찮나?’

재영은 숨까지 죽인 채 사헌의 눈치를 살폈다.

“흥 돋울 줄도 알고 다 컸네.”

사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걱정과 달리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른 오해를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슬슬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제 얼굴도 너무 화끈해서 더 있기가 힘들었다. 재영은 이만하면 됐겠지, 싶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해운이 방으로 가볼…….”

하지만 재영은 침대 밖으로 한 걸음도 딛지 못했다. 억센 힘에 끌려간 재영은 사헌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아직 모자라다고 했잖아.”

사헌이 재영의 뒤통수를 감싸 제 입술 쪽으로 숙이게 했다. 틈 없이 닿은 몸이 너무 신경 쓰였다.

“읏.”

입술이 닿자 사헌이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머리를 세워 파고든 혀가 재영의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숨이 막혀 밀어내려고 하면 사헌이 먼저 눈치채고 입술을 잠시 뗐다가 각도를 틀어 더 깊이 들어왔다. 곤란함은 금방 잊혔다.

“흐, 아…….”

혀를 뺀 사헌이 재영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핥았다. 오랜 키스에 숨이 달린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재영은 헐떡거리며 사헌의 목에 매달려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열을 품은 손이 허리를 더듬고 아래로 내려갔다. 사헌이 커다란 손으로 한쪽 엉덩이를 잡고 제 쪽으로 당기는데도 재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하체가 바짝 붙어서 울퉁불퉁 단단한 복근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빛이 번쩍번쩍하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서 몸을 비틀었다.

부지런한 사헌의 손은 위아래로 재영을 훑느라 바빴다. 음흉한 손길을 따라 몸 안의 열기가 한없이 부풀었다.

“하…….”

사헌의 목덜미를 감싼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재영은 미끄러지는 손에 힘을 줘서 더 꼭 붙어 있었다. 멀어지는 혀를 재영의 것이 따라가다가 허공에서 얽혔다. 마주 비벼지는 혀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재영은 서로를 잇는 가느다란 실선에 넋을 놓았다가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열기가 서로 닮아 있었다.

“김재영.”

사헌의 목소리는 막 자다 깬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사헌이 느릿하게 재영의 목덜미를 주물렀다. 떨리는 숨결이 점차 가까워졌다.

“하아, 형. 이상해요.”

재영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만큼 깊은 키스를 하면 몸이 달아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랐다.

“그건 네가 가이드고 내가 에스퍼라서 그래. 우리는 매칭률도 높으니까.”

길게 숨을 내쉰 사헌이 재영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가이드를 할 때마다 이런 걸 느끼는 거예요?”

아무에게나 흥분한다면 그건 짐승 아닌가?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가이드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거부감이 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네가 S급이니까 쉽지 않을 거야.”

사헌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가이드는 아래 등급의 에스퍼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는다고. 그의 의도대로 재영의 걱정은 씻은 듯 사라졌다. 지금까지 등급은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조절이 가능하다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형이랑은…….”

재영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말을 끊었다.

사헌과는 같은 S급이라서 그런 건가?

“매칭률.”

대한민국에 사헌과 같은 S급 에스퍼는 존재하지 않고, 그만한 매칭률도 흔치 않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헌이 아니면 이렇게 정신 줄 놓고 흔들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이다.

“다행이네요.”

완전히 안도한 재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헌이 오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는 괜찮고?”

의미심장한 물음에 어깨가 움찔했다. 잠시 고민하던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과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처음 한 상대라 그런가?’

그게 아니면 사헌이 제게 어떤 음흉한 속내를 갖고 있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 대답이 기꺼웠는지 사헌이 재영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어차피 네가 다른 에스퍼랑 가이딩 할 일은 없어.”

재영은 더없이 다행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고개를 들자 다시 입술이 닿았다.

그때 사헌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띠며 문을 노려봤다. 재영은 그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람 발 하나 들어올 정도로만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놀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시발, 내가 지금 뭘…….”

해운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팔을 들어 눈을 비볐다. 문이 밀리면서 사헌의 위에 올라탄 재영의 모습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충격이 너무 커서 해운과 재영, 둘 다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감히 누구 방문을 열어. 안 나가?”

셋 중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사헌이었다. 그의 날 선 목소리에 재영은 잠에서 깬 것처럼 어깨를 튕겼다.

“그게, 해운아…….”

재영은 해운을 향해 가만있어 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사헌의 다리에 걸렸다. 사헌이 휘청거리는 재영의 허리를 잡아서 넘어지지 않게 했다. 의도치 않게 그의 품에 폭 안겨든 모양새였다.

“아, 고맙습니다.”

“대박, 대박. 미친, 대박.”

그 모습을 본 해운이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뜨인 두 눈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해운을 보고 재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저히 말을 한다고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일반인한테 능력 쓰면 안 되는 거죠?”

재영은 사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잠깐 기절시켜 놓고 정신 차리면 네가 잘못 봤다거나 꿈을 꿨냐는 식으로 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능력 안 쓰고도 저 녀석쯤은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사헌이 손을 풀었다. 아무래도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그냥 기절 좀 시키자는 건데, 제 친동생을 없애 버린다는 말을 아주 가볍고 태연하게 내뱉고 있었다.

“아니, 저건 사람이라서 처치하면 안 돼요.”

재영은 바로 사헌의 허리를 껴안고 살인을 말렸다.

“어, 엄마! 엄마! 야, 멍청이들아!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해운이 은혜도 모르고 소리치며 복도를 내달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해운이 애타게 찾는 엄마, 도화는 재영의 엄마와 찜질방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사헌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며 안정을 되찾았다.

“바보 같은 놈들아! 나와 보라고!”

아래층에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해운이 바로 옆방에 들어가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운드 플레이가 중요한 게임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 욕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해운이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곁에는 민태와 동준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지, 진짜네.”

“시발, 미친 김재영. 보통 놈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재영은 여태 사헌의 허리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재영은 참담한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그냥 없애 달라고 할까.’

“쟤네까지 한 번에 묻어 줄까? 그럼 어디 소문은 못 낼 텐데…….”

사헌이 재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줬다. 제 친구들을 해치워야 할 크리처와 동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에 재영은 오금이 저렸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신체 강화된 에스퍼가 아니라 그냥 일반인 진사헌이었어도 그럴 수 있다는 건 이미 재영이 중학교 때 뼈저리게 느꼈다.

재영은 그때 친구들과 호기심을 못 이겨 담배를 피우다가 사헌에게 걸려서 죽을 듯이 처맞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부모님께 걸리는 게 나았을 거라는 게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친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괜히 형님 손 버리고, 시간 버리고. 그럴 필요 있나요?”

재영은 비굴하게 웃으며 설설 기었다. 불안감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느라고 그 안에 쥔 사헌의 옷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내 일에 방해가 되면 그럴 필요가 있는 게 되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 친구들이 움찔했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게 다름 아닌 진사헌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몸의 기억은 평생 간다. 먼지 털리게 맞은 몸뚱이가 덜덜 떨렸다.

“입 함부로 놀리면 인생 재미없게 될 줄 알아.”

사헌이 건달 같은 말로 아이들을 위협했다. 문제는 절대 농담이나 허세로는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봤지? 진짜지? 내 눈에만 보이는 거 아니지?”

유일하게 해운만이 흥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현실도피를 하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친구들의 반응에 확신을 얻은 해운이 이번에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어. 여보세요. 엄마?”

해운이 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한 재영의 몸이 튕겨 나갔다. 휴대폰을 뺏으려고 발돋움까지 했지만, 키도 더 큰 해운이 팔을 쭉 늘이자 닿지 않았다.

“진사헌이 집에 왔거든?”

수화기 너머에서 형이라고 똑바로 안 하냐, 어쩌냐 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 인간이 그냥 올 리가 없잖아.”

그러자 도화가 또 형한테 그 인간이 뭐냐, 어쩌냐 하고 다그치는 것이 들렸다. 모자(母子)가 각자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엄마! 저예요, 재영이!”

재영은 목을 쭉 빼며 큰소리로 끼어들었다.

-어머, 재영이구나. 멜론은 맛있게 먹었고?

재영에게 대꾸하는 도화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재영은 그제야 원래 목적이었던 멜론을 아직 먹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아지…….”

“엄마! 김재영이랑 진사헌이랑……! 아니, 이건 말로 못 해! 그런 불경한 말을 어떻게 하냐고.”

수화기 너머로 그럼 닥치고 재영이나 바꾸라는 말이 들렸다. 재영은 전화를 내놓으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아니, 김재영이랑 진사헌이랑 침대에서 뒹굴었다니까!”

해운이 내뱉은 말에 재영은 손을 뻗은 그대로 충격으로 굳어 버렸다.

* * *

재영의 부모님과 사헌의 부모님이 모였다. 재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무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선 오해가 있어요.”

“오해는 무슨! 존나, 내가 너 이씨, 입술……!”

사실 해운의 말이 맞는 게, 그가 목격하기 전에 두 사람이 침대를 뒹굴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재영은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와. 저거 봐, 저거! 반박도 못 하잖아요!”

해운이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현장을 들켰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문을 열기 전까지 사헌이 못 느꼈다는 게 말이 되나?

재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사헌을 쳐다봤다. 그는 재영과 달리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수상했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애를 데리고, 응?”

사헌의 아빠 석우가 그를 혼내는데, 눈높이가 낮아서인지 사헌의 표정이 심드렁해서인지 그다지 혼나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성인이고 사귀는 사이인데 별문제 없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재영의 엄마 숙희의 트인 사상에 두 사람이 침대를 뒹굴었다는 건 금세 아무 일도 아닌 게 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귀는 게 아닌데.’

재영은 안절부절못하며 끼어들 타이밍을 노렸다.

“형이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결국 재영은 사헌의 옆구리에 붙어 그에게 속닥거렸다.

“너 가이드인 거 비밀로 하라며.”

이 상황이 사헌에게는 즐거운 모양이다. 재영은 가이드라는 걸 비밀로 하자는 말에 사헌이 왜 순순히 따랐는지 이해했다. 배신감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돈인 건가?”

“어머. 결혼은 너무 이르지 않나요? 안사돈.”

재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어른들의 대화를 주시했다. 키스하는 걸 들켰을 뿐인데. 어디까지 갈지 몰라 두려워졌다.

“아니, 형이랑 저는 그렇게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설마 너희 원나잇이니 뭐니 그런 건 아니겠지?”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하자 숙희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사귀는 사이에 하는 건 괜찮아도 사귀지 않으면서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냥 이제 막 알아 가는 사이다, 이런 거겠지. 연예인들이 항상 그렇잖아.”

재영의 아빠인 창현이 숙희를 달랬다. 그러면서 얼른 똑바로 말하라는 듯 재영에게 눈짓했다. 사귄다고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혼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

재영은 뭐라고 말해 보라는 듯 간절한 눈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하지만 사헌은 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외로운 싸움이다. 결국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똑바로 들어 주세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재영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사실은 제가 가이드예요.”

신혼집이며, 결혼식은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나누던 어른들이 조용해졌다. 이제 좀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어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가이드 일을 하면서 사귀게 됐다는 거구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숙희가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된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재영의 얼굴은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

재영이 사헌의 가이드라는 게 양쪽 집에 다 알려진 후로 사헌은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집을 네 대학 근처로 옮기지.”

재영은 펜 끝을 입술에 대고 눈썹을 모았다. 사실 그의 로망은 별거 없었다. 하고 싶은 만큼 게임을 하고 잠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은 음식은 시간 가리지 않고 시켜 먹을 수 있는 삶. 재영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바라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그러니까 사헌과 함께 사는 거라고 해도 자취를 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긴 했다.

“방은 따로 쓰는 거죠?”

“네가 그게 편하다면.”

사헌의 대꾸에 재영은 의아해졌다.

“그 말은 형은 같이 쓰는 게 더 좋다는 거예요?”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와 가이드는 근처에만 있어도 가이딩이 가능하니까.”

재영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벙 찐 얼굴로 사헌을 쳐다봤다.

“그럼 왜 뽀뽀를…….”

사헌이 저나 스킨십을 좋아해서 그랬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를 알아 온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사헌이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더 효율적이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따로 만들어 주세요. 잘 때는 형 방으로 갈게요.”

재영은 아까보다 굳건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같은 남자이고, 다른 의도는 없는데도 괜히 볼이 홧홧해졌다. 사헌이 그런 재영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사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영부영 둘의 모습을 들킨 탓에 결국 사헌과 동거를 시작하게 됐다. 재영은 이게 맞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 * *

폭풍 같던 일주일이 지났다. 옆에 둔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왔다. 재영은 소파 팔걸이에 올려뒀던 폰을 확인했다.

[민둥] 그럼 너 군대 안 가?

[민둥] (대충 부럽다는 이야기)

재영의 발치에 엎드려 있는 민태가 보낸 톡이었다. 재영은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의 이모티콘을 덜렁 보냈다.

[나] 나 사헌 형이랑 전담 계약했어

계속 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민태가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는 두 사람 때문에 궁금해진 나머지 둘도 까톡을 확인했다. 숫자는 다 사라졌는데 말이 없었다.

[해또] X를 눌러 joy를 표하세요...

[엄마] x

[민둥] x

말 한마디 없이 숙연한 분위기였다. 재영은 괜히 욱했다.

“그래도 나 돈 엄청 많이 벌어!”

“응, 시발, 하나도 안 부럽죠~”

재영의 발버둥은 해운의 칼 같은 말에 곧장 차단됐다.

“야! 무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S급 에스퍼의 가이드야! 그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자리인 줄 알아?”

아까는 X를 눌러 조의를 표했던 주제에 동준이 침까지 튀겨 가며 재영의 편을 들었다. 그에 재영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네가 할래?”

스무 살이 넘어 발현되는 특이한 경우가 그렇게 자주 있을 리 없지만, 재영은 할 수만 있다면 동준에게 제 위치를 넘기고 싶었다. 사헌은 동준의 말대로 온 세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대단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의 가이드라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선 넘네?”

동준이 대번에 정색하며 내뱉었다. 식혜 맛 변하듯 금방 변해 버린 태도에 재영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튼 팬이라면서 사헌과 가까워지는 일은 꺼리는 이상한 녀석이었다.

해운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재영을 보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라면 먹을래?”

“라면은 못 참지이.”

한숨을 푹 내쉰 재영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계약은 했고, 사헌은 의외로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친구들이 놀리지 않으니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난 다이어트 중이니까 너네 먹을 것만 끓여.”

민태가 뒤에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찬장을 열어젖힌 재영은 한 사람당 한 봉지 반으로 계산해서 여섯 봉지를 꺼내 싱크대에 올려 뒀다.

* * *

새해가 오기 전, 재영의 집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당장 입을 겨울옷 정도만 챙긴 재영은 문밖의 풍경에 고개를 내저었다.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돌아서 사 온 새 이불 한 세트, 어디 외국에서 건너왔다는 그릇 한 세트. 그리고 한 쪽에는 엄마가 챙겨 준 반찬.

“사헌이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애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재영의 엄마, 숙희가 그와 닮은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 녀석 돈도 많은데 뭘. 괜히 우리 재영이 고생시키지 말고 사람 쓰라고 해.”

해운의 어머니, 도화가 숙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모습이 사이좋아 보였다.

“그래도 침대 하나는 해 가야 언니 마음도 편하지 않겠어?”

이번에는 민태의 어머니였다.

“그런가?”

“그 정도면 부담도 안 되고 좋지!”

머뭇거리는 도화의 태도에 숙희가 반갑게 대꾸했다.

“아휴. 그래도 밥 하나는 할 줄 아니까 다행인데…….”

“밥할 줄 알면 됐지. 요즘 반찬 가게 음식 잘하는 데 얼마나 많은데.”

마지막으로 동준의 어머니까지 말을 보탰다. 그냥 자취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엄마 친구들까지 거실에 모여 앉아 짐 싸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엄마. 나 시집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재영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네 분의 엄마를 훑어보며 말했다.

“사헌이가 새 사람 들인다고 집부터 새로 했더라고요.”

“어머.”

“혼자 살던 집은 아무래도 그렇겠지.”

재영이 뭐라든 엄마들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입을 가리고 수줍게 호호 웃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재영은 어쨌든 어머니들이 즐거우면 됐다고 생각하며 쌓인 짐 옆에 제 캐리어를 가져다 뒀다.

어머니들이 모인 김에 다 같이 사우나라도 해야겠다고 나간 뒤에는 친구들이 몰려왔다.

“너희는 일찌감치 와서 짐 싸는 것 좀 도와주지. 갈 때 다 되니까 오냐?”

재영이 콧등을 찡그리며 타박했다. 사실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짐 싸는 게 힘들었다기보다는 항상 붙어 다니던 친구들과 이제는 자주 만나지 못할 것이 서운해서 하는 말이니까.

“널 위해 이 형님들이 선물을 준비했다.”

재영이 서운해하든 말든 친구들은 저들이 준비해 온 것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너네 이제 성인이야.”

내용물을 확인한 재영이 한심하다는 듯 친구들을 쳐다봤다. 안에 든 건 아X언맨 가면이었다.

“심지어 가면뿐이야? 수트는?”

이왕이면 완벽하게 갖춰 입고 싶은 재영이 삥을 뜯듯이 빈손을 내밀었다.

“아니, 야. 생각해서 준비해 주니까 어이없네?”

그러자 해운이 짜증난다는 듯 손을 뻗었다. 가면을 뺏으려는 게 분명해서 재영은 날름 손을 뒤로 물렸다.

재영은 상자에서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걸었다. 고무줄로 뒤통수까지 고정하는 타입이라 오래 끼고 있다고 귀가 아플 일도 없고, 쉽게 빠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야. 훨씬 보기 좋다.”

눈과 입만 드러난 재영을 본 해운이 낄낄거리며 깝죽댔다. 재영은 잠자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이거 가지고 놀 나이는 아니지 않아?”

재영은 가면을 벗어 들고 흔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동준이 손가락으로 재영의 동그란 이마를 튕겼다.

“너 유명해지기 싫다면서.”

그러니까 영화처럼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고 다니라는 말이다. 그제야 친구들의 깊은 뜻을 이해한 재영이 멍한 표정으로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에스퍼의 던전 공략을 하나의 오락으로 소비하게 됐다. 자연히 영상에 등장하는 에스퍼나 가이드도 연예인처럼 명성을 얻고, 누군가에게 우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인기가 많은 건 국내 최고인 진사헌이다.

그리고 사헌은 18살 발현 이후로 전담 가이드 한 번 없었다. 콧대 높은 A급 가이드들이 손을 내밀어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A급이면 못해도 매칭률이 4-50퍼센트는 나올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런 사헌의 전담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영의 신상 명세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려고 할 게 뻔했다. 재영은 그 관심이 부담스럽고, 피곤했다.

“어차피 집은 프라이빗한 곳일 테고, 현장에서만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친구들이 준 선물이니 버릴 수는 없고 대충 침대 맡에 걸어 둬야겠다, 생각하던 재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이걸 쓰고 다니라고?”

뜻은 알겠는데, 선뜻 그러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존나 관종이라고 유명해질 듯.”

해운이 처음부터 제 의견은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해운! 네가 아X언맨으로 하자며!”

동준이 어이없다는 듯 해운을 손가락질했다. 역시 그놈이 그놈이었다.

“그냥 모자 뒤집어쓰고 마스크나 쓰고 다니려고 했는데…….”

재영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유치해서 쓰기는 꺼려지지만, 저를 위한 마음만은 분명히 전해졌다. 은근히 사려 깊은 친구들의 선물에 감동해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감성이 풍부한 민태는 벌써 눈 밑이 벌게져 훌쩍거리고 있었다.

“아직 감동하기엔 이른데…….”

동준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안 어울리게 왜 말을 가려?”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준의 등 뒤를 기웃거렸다. 살집이 붙은 그의 몸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큰 박스가 있었다.

“흠, 그게……너 가이딩할 줄은 아냐?”

동준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영은 그게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지. 벌써 형하고 가이딩도 했는데.”

재영은 약간 우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친구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해, 했다고? 벌써?”

“안, 크흠, 안 아파?”

저들이 더 괴로운 듯 찡그린 얼굴로 묻는 말에 재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일반인들은 가이드나 에스퍼가 아니면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매체에서 보여 주는 것 말고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에스퍼-가이드 연구소의 연구원을 이모로 둔 동준은 보다 정보를 갖기 쉽겠지만, 가이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친구들도 쥐뿔도 모를 터.

“안 아파. 어려운 것도 없고. 난 형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돼.”

어차피 둘 사이에 약속된 것은 키스뿐이다. 가끔 그 이상으로 서로의 몸을 만지기는 하는데 아직 잘 참고 있었다. 요즘도 재영이 주도권을 잡는 연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연습’ 정도에 그쳤다.

재영의 말을 들은 친구들이 기겁하며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한 것 같지?”

“미성년자 딱지 뗀 지 얼마 안 됐잖아.”

“진사헌이 그걸 따질 거 같냐?”

진짜 뭘 모르는 건 재영뿐인데 그걸 그만 몰랐다.

“뭐야, 대체.”

벌써부터 따돌려지는 느낌에 재영은 서러워졌다. 일그러지는 눈동자를 본 민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큼. 우리가 진정으로 남자, ……야, 남자 맞냐?”

말을 해 주는가 싶더니 또 저들끼리 눈을 마주하며 소곤댔다. 문제는 재영에게도 다 들리는 크기라는 거다.

“……달렸으니까 남자는 남자지.”

“주변에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렵네.”

재영은 불퉁한 얼굴로 친구들을 노려봤다. 따가운 시선에 움찔한 친구들이 다시 그를 돌아봤다.

“흠흠, 그래. 아무튼, 그래서 선물이다.”

그리고 동준이 대표로 어색하게 말하며 등 뒤에 숨겼다고 숨겨 둔 라면 박스를 재영에게로 밀었다. 토라져 샐쭉해져 있던 재영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야아.”

재영은 훌쩍거리며 친구들을 끌어안으려고 양팔을 벌렸다.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에 얌전히 안겨 주는 건 피하기 귀찮아서 가만히 서 있는 해운뿐이었다.

“근데 나도 몇 개 나눠 줘라.”

얌전히 안긴 해운이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줬다 뺏는 것도 아니고. 재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흘겨봤다. 그런데 나머지 둘도 은근히 기대감 어린 얼굴로 박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나눠 쓰자, 나눠 써.”

재영은 어이없어서 피식 웃으면서 박스 뚜껑을 열었다. 열었는데 크기와 색이 다른 상자가 질서도 없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상자 속 물건을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야, 이거 설마……그거야?”

얼굴이 홧홧해서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재영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들었다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방황했다.

“이, 이제 성인이잖아. 건강한 서, 성생활을 해야지.”

동준이 입 밖으로 내는 것도 부끄럽다는 듯 팔을 긁어 댔다.

“근데 이게 우리한테 맞을까?”

민태가 뜯지도 않은 콘돔을 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맞겠냐?”

해운이 민태를 힐난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아닌데…….”

재영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알지.”

해운이 왜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말하며 재영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내 선물이라며?”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는데 맞는 말이고. 그래도 가만히 있기는 좀 그래서 버럭 외쳤다.

“공주님이 쓰셔야 네 모, 몸에 조, 좋은 거니까 샀지!”

에스퍼 진사헌의 팬인 동준이 외쳤다. 재영이 알아들은 거라고는 아무튼 사헌이 써야 하는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형은 이 정도야?”

해운이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멍청한 소리를 하네….”

해운이 가늠하듯 허공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대꾸했다.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가 허공에 그린 것은 ‘이 정도’보다 훨씬 크고 대단했다. 그걸 본 나머지도 전부 부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니까?”

해운의 손끝을 따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재영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가를 찡그렸다.

“너 형님이랑 가이딩해 봤다며!”

재영과 동준은 서로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댔다.

“가이딩이랑 콘……이 무슨 상관…….”

소리치던 재영의 말끝이 흐려졌다. 매체에서 볼 수 있는 가이딩 모습은 기껏해야 포옹 정도다. 하지만 어쨌든 가이딩은 스킨십으로 이루어지고, 만약에 그 이상이 있다면…….

“설마…….”

짜증이 스며든 얼굴에 의아함이 물들고, 그 위에 수치가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아연함이 뒤덮었다. 그러니까 키스 다음 단계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사헌과 자신의 야릇한 장면이 떠올랐다.

“미친, 가이딩이 그것만 있는 줄 아냐!”

재영은 눈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물론 자신은 거기까지는 상상도 못 해 봤지만.

“그리고 우리는 둘 다 남자야!”

그런 방법이 있더라도 사헌과 자신은 같은 남자이니 써먹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재영의 외침을 들은 친구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남자끼리도 할 수 있어.”

해운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여자랑도 해 보지 못한 걸 남자랑 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재영의 얼굴이 지나치게 어려 보였다. 이렇게까지 순진한 건 대체 누구 탓인가.

“너 어쩌려고 그러냐, 진짜.”

해운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싸맸다. 세상에 C까지가 전부인 줄 아는 애한테 Z를 가르치려니 막막했다.

“혀, 형이 손만 잡고 자도 된 댔거든?”

재영이 반박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착잡한 얼굴로 재영을 바라보던 친구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걸 믿냐?”

해운이 아기는 학이 물어다 준다는 말을 믿는 아이를 보듯이 재영을 바라봤다.

“아니, 남자끼리도 할 수 있다 쳐. 그런데 상대는 다른 사람 아니고 진사헌이야. 말이 되냐?”

재영은 그 나름대로 근거를 내밀며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말이 왜 안 돼? 형이 자기 되고, 자기가 여보 되고 그런 거 아니냐?”

“그러고 보니까 형님이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찹쌀떡뿐이고, 형님을 형이라고 하는 것도 찹쌀떡뿐이잖아.”

“처음부터 운명 아니냐고.”

이때다 싶었는지 전부 사헌과 재영을 엮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김재영이랑 진사헌?”

잘만 장단을 맞추더니 이내 해운이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리고 왜 당연히 형이 쓰는 건데? 내가 쓸 수도 있잖아!”

재영의 외침에 친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와, 용감한 거 보소.”

“우리 아들이 장군감이었다니.”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어떻게 들으나 놀리는 투였다.

“난 우리 엄마 아들임.”

재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아무튼 가이딩이 전부 거기까지 가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갈 수도 있지. 형님이 S급인 이상,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필요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못 받은 거 전부 보충하려면 가능성 높지 않음?”

하지만 둘 사이에는 재영이 원하는 방식으로 가이딩을 하겠다는 계약서가 존재했다. 사헌은 계약서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이지만. 재영은 한숨을 훅 내쉬어서 놀란 속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고맙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재영은 콘돔을 종류별로 꺼내 친구들에게 나눠 주고 박스를 여몄다. 한 주먹 가득 쥔 해운이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아예 캐리어 옆으로 밀어 놨다.

“근데 너네 이거 유통기한 있는 거 알지?”

재영은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콘돔을 톡톡 두드렸다.

“대학 가면 여친 생긴 댔거든?”

민태가 따지듯 말했다. 커다란 두 눈에는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재영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런데 짐은 어떻게 옮겨? 아버지께서 데려다 주신대?”

“짐 많으니까 거들어 줄게.”

“형님은 집에 안 계신 것 맞지?”

물음표는 마구 날려 놓고 대답할 틈은 주지 않아서, 재영은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어야 했다.

“내가 재효 형한테 확인했어. 오후에 일정 있대.”

재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는 해운을 미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스마트폰이 잘게 진동했다.

“진짜 같이 옮겨 줄 거야?”

스마트폰을 손에 쥔 재영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당연하지!”

“우리 뽕팸 의리 아니면 시체 아니냐!”

재영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친구들이 그의 음흉한 눈빛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차, 현관 앞에 있대.”

재영은 찝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친구들에게 짐 하나씩을 할당해 줬다. 그리고 아이들은 대문을 나가자마자 흠칫 굳었다.

재영의 집 대문 앞에 세워진 푸른색 SUV는 새 차처럼 반짝거렸다.

“……너희 아빠 차 바꾸셨냐?”

해운이 의심의 눈초리로 차를 훑으며 물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해운이네와는 오래, 가까이 알고 지내다 보니 과장해서 서로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였다. 당연히 매일 보던 차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는 것이다.

“나, 나는 엄마가 부르셔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역시 사헌의 팬인 동준이 제일 먼저 그의 차를 알아보고 몸을 뺐다. 재영은 얼른 동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어머니들 다 같이 사우나 가셨잖아. 아마 저녁때 돼야 오실걸.”

재영이 매끄럽게 웃으며 동준의 개수작을 차단했다.

“트렁크 왜 안 열어 주시지?”

눈치 없는 민태만 짐을 들고 트렁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운전석 쪽 문이 열렸다. 한 명 빼고 모두가 예상했던 그 남자, 진사헌이 보닛을 돌아 재영의 앞에 섰다.

“이것들은 뭐야?”

“헉!”

사헌은 기겁하는 재영의 친구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키가 크니까 목을 좀 낮출 만도 한데 고개는 빳빳이 세운 채 눈만 내려 쳐다봤다. 내리깔린 눈매가 더 매섭게 느껴졌다.

“애들이 짐 옮기는 거 도와 준대요.”

친구들이 홀로 밝은 재영을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짐?”

미간을 좁힌 사헌이 바리바리 들고 있는 짐들을 눈으로 훑었다.

“몸만 오라니까 뭐가 이렇게 많아.”

사헌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하자 순간 민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상자째로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내용물이 미끄러졌다.

“헙!”

재영은 바닥에 떨어진 콘돔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선물해 준 친구들에게 말은 고맙다고 했지만, 사헌과 쓸 생각은 없었기에 그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쳐다보던 사헌이 고개를 들었다. 당황스러워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말랑말랑하게 생긴 게 응큼한 구석이 있었네?”

사헌이 즐거워하는 투로 내뱉었다. 재영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사람은 따로 있어도 챙긴 건 자신이라서 재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른 입술만 적셨다.

“나랑 살면서 여자 데려올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재영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번뜩였다.

감히 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

그런 느낌이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 눈빛을 보고도 너랑 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꼭 필요할 때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필요 없어.”

재영이 어물어물 변명하자 사헌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곧장 나온 대답이 너무 분명해서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 거면 그냥 해야 하니까.”

“……네?”

사헌이 덧붙인 말에 재영은 얼이 빠져서 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건 똑같이 입을 떡 벌리고 사헌만 쳐다보는 친구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근데 주고 가자고 해 봐야 쓸 만한 놈도 없어 보이네.”

홀로 여유로운 사헌이 주변 사람을 위아래로 훑고는 내뱉었다. 화는 나는데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기만 했다. 사헌은 태연히 그 시선들을 지나쳐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가져가도 쓸 일 없잖아요. 네? 형!”

재영은 콘돔 상자가 제일 먼저 실렸다는 걸 깨닫고 사헌의 팔에 매달렸다. 사헌은 그 무게 따위 느껴지지도 않는지 가볍게 그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알아서 짐을 실은 후, 민태가 뒷좌석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이 문을 누르고 있었다. 팔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사헌의 표정 없는 얼굴이 보였다.

“아무 데나 낄 생각 말고 너네 할 일이나 해.”

사헌이 멍하니 굳어선 민태의 손을 손수 차에서 떼어 냈다. 친구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시동이 걸려 출발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재영이 어디 팔려 가는 것처럼 창문에 딱 달라붙어 울멍울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재영이……, 괜찮겠지?”

민태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코를 훌쩍였다.

“에스퍼한테 가이드는 특별하다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해운의 얼굴도 개운하지는 않았다. 자기 영역에 침범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헌이 제 집까지 들였으니 일단은 특별 취급받는 건 확실한 것 같으니 다행이다.

“우울하니까 피시방 가서 배틀 운동장이나 하자.”

“이 새끼 또 버스 탈 각 잡네.”

“버스? 낭떠러지로 가는 버스임?”

재영이 빠진 친구들은 곧 평소처럼 투닥거리며 피시방을 향해 갔다.

* * *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릴 때, 재영은 입술이 얼얼해서 손으로 매만졌다. 오는 내내 혼자 떠든 탓이었다. 말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적응이 안 됐다. 그러면 그냥 조용히 오면 될 일인데 침묵을 견디려니 숨이 막혔다.

“어? 저기 카트 있어요!”

재영은 사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폴짝 뛰어가 짐을 옮기는 카트를 끌고 왔다.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두면 된대요.”

집에서 나와 사는 게 그렇게 좋은지 하얀 뺨에서는 붉은 홍조가 가실 줄을 몰랐다. 이깟 짐이야 혼자서 얼마든지 들고 갈 수 있지만, 사헌은 그냥 재영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제 다 실었나?”

재영은 혹시 빠진 게 없는지 카트와 트렁크를 번갈아 살폈다. 그런데 머리에 깊게 각인된 그게 없었다.

“어? 그건 왜…….”

재영이 아연한 얼굴로 사헌을 보며 물었다. 그가 찾던 문제의 라면 박스가 사헌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이다.

“내 선물 같아서.”

사헌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짧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공동 현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울상이 된 재영은 그의 등을 향해 팔을 뻗었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거둬들였다.

“비밀번호 외워 둬.”

“아, 네!”

얼 띠게 대답한 재영은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헌이 누르는 비밀번호를 따라 적었다. 그러는 사이, 문이 아슬아슬한 간격만 남기고 닫혀 버렸다.

“어…….”

재영은 황망한 얼굴로 유리문 너머의 등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한 뒤쪽을 돌아봤다. 뒤는 흐린 전등과 블랙박스의 빛만 반짝이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낯선 장소라서일까. 괜히 뼛속까지 시리는 기분이 들었다.

“형! 문 열어주세요.”

재영은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똑똑 두드렸다. 앞만 보고 가던 사헌이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그가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는 걸 확인했다. 사헌이 재영에게로 다가왔다.

“누르고 와.”

하지만 코앞까지 다가와서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사헌과 비밀번호 패널을 번갈아 봤다. 절대 도와주지 않을 눈치다.

“후우…….”

결국 재영은 손가락을 들었다. 기억이 있는 무렵부터 쭉 주택에 살아와서 공동 현관이 낯설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기울여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형! 열렸어요!”

재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사헌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사헌이 눈을 내려 제 팔에 매달려 폴짝거리고 있는 재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아…….”

뜨거운 시선에 정신을 차린 재영이 움찔하고 손을 놓았다.

“카트, 두고 왔는데.”

사헌이 재영의 어깨 너머, 바깥을 눈짓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헌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짐이 가득 실린 카트는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것이다.

“아…….”

멍하게 탄식을 흘리는 재영을 보고 사헌이 늘 그렇듯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만지는 건 집에서 얼마든지 하게 해 주지.”

“네? 만져요?”

팔 한 번 잡았을 뿐인데 꼭 몸을 더듬거리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게 했다. 재영은 기겁했다.

“아니, 형! 말이 이상한데…….”

재영의 부름을 가볍게 무시한 사헌은 가장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가서 섰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지듯 조용히 열렸다. 또 놓치기라도 할까 봐 빠르게 따라 들어간 재영이 패드를 눈으로 훑었다.

“우리는 몇 층…….”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누를 수 있는 층 버튼이 하나밖에 없었다.

“형. 이거 우리가 타도 되는 거 맞아요?”

재영은 데룩데룩 눈동자를 굴려 엘리베이터 안을 살폈다. 흔히 엘리베이터 내부 구석에는 CCTV가 있는데 그것조차 없었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는 ‘01041223’이야.”

사헌은 설명도 없이 비밀번호를 내뱉었다. 엘리베이터 비밀번호를 누르는 걸 못 봐서 있는 줄도 몰랐다. 재영은 얼른 공동 현관 비밀번호 옆에 비밀번호를 써 넣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뒷자리가 제 생일하고 똑같아요! 신기하다.”

재영은 사헌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네 생일 맞아.”

“네?”

“비밀번호 못 외운다고 징징거릴까 봐 쉬운 걸로 설정했어.”

원래 이렇게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나. 처음 알게 된 모습에 남몰래 감동한 재영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일을 어떻게 알고요?”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건 없어.”

당연하다는 듯한 대꾸에 재영은 몸을 떨었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인데 사헌이 해서인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 그럼 앞자리는요?”

“내 생일.”

서로의 생일을 늘어놓은 숫자를 비밀번호로 해 두는 건 민태가 언젠가 여자친구를 사귀면 해 보고 싶다던 그것이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짓을 여자친구도 아니고, 사헌과 하게 되다니. 제 인생, 이래도 되나 싶어 머리가 아찔했다. 사헌의 태도를 보면 별것도 아닌데 혼자 오버하나 싶기도 하고.

재영의 기분이 어떻든 엘리베이터는 매끄럽게 움직여 그들을 꼭대기 층까지 데려다 놓았다. 엘리베이터 오른쪽으로 길지 않은 복도 끝에 넓은 현관문이 있었다. 현관 잠금 장치에 지문 인식까지 끝내고 나니 재영은 조금 지쳐 있었다.

“우와!”

하지만 거실에 발을 들인 순간, 피곤이 싹 가셨다. 전면이 전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탁 트인 전망이었다. 꼭 외부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하늘이 훤히 보이고, 바깥으로는 푸른 강과 굽이쳐 가는 차들이 보였다.

“고소공포증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내놓은 감상에 사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없잖아.”

모르는 게 없다고 했으니 확신하는 거겠지만, 어쩐지 없어야 한다고 협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바, 반대쪽은 뭐가 보여요?”

재영은 매섭게 번뜩이는 사헌의 시선을 피해 반대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면과는 달리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이 있었다.

“나가 봐도 돼요?”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머리 위로 쫑긋거리는 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네 집이야. 일일이 묻지 마.”

사헌이 성가신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재영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미쳤다, 진짜.”

테라스에 풀장과 선베드, 한쪽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바비큐 기계가 있었다. 난간을 따라서 작은 텃밭도 있었다. 선베드를 구석으로 치우고 그 자리에 작은 텐트를 치면 캠핑 분위기 비슷한 것도 날 것 같았다.

“애들한테 자랑해도 돼요?”

재영은 사진을 찍어서 단톡방에 올릴 생각으로 신이 났다.

“나 없을 땐 아무 때나 데려와도 돼. 침실에만 들이지 마.”

사헌의 말에 재영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하게 구겨졌다.

“그냥 사진만 찍으려던 거였는데…….”

침실이란 게 별것도 아닌데 사헌의 입에서 나오니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친구들의 과감한 선물이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신경을 갉작이고 있던 터였다.

“다 봤으면 침실 보러 가.”

때마침 건네진 사헌의 제안에 재영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터질 것 같을까.”

그리고 혼잣말처럼 내깔린 목소리로 말하며 달아오른 재영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것이 감촉만큼은 딱 막 쪄낸 떡 같았다.

“벼, 별로 신경 쓰실 일은…….”

“그건 내가 판단해.”

사헌이 재영의 말을 단호히 끊어 내고 그 얼굴을 집요하게 살폈다. 날카로운 눈빛이 속내를 그대로 파헤칠 것 같았다.

“부, 끄러운데……. 말 안 하면 안 돼요?”

재영이 고개를 살짝 숙인 탓에 동그란 정수리가 훤히 보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지켜보던 사헌이 입꼬리를 당겼다.

“왜? 침실에서 나랑 뒹구는 상상이라도 했나?”

재영은 노골적인 말에 충격을 받아서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할 수도 없었다.

“키스는 기겁하더니 그건 괜찮은 모양이지?”

사헌이 뺨을 매만지던 손가락으로 재영의 입술을 문질렀다. 만지면 묻어나올 것 같은 짙은 색인데 실제로 묻는 건 투명한 타액뿐이었다.

마주친 재영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그의 입술을 문지르는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삐, 삐, 삐-

그때, 날카로운 기계음이 묘하게 붕 뜬 분위기를 파고들었다. 사헌의 손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재영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짐은 나중에 정리해야겠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던 사헌이 툭 내뱉었다.

“어, 추, 출동이에요?”

“그래.”

재영은 허둥지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가방을 뒤져 친구들이 선물해 준 아X언맨 마스크를 꺼냈다.

“그건 왜?”

사헌이 마스크를 든 재영을 이상한 것 보듯 쳐다봤다. 재영은 쓰게 웃었다. 그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라서 항의의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쓰고 가려고요.”

재영은 마스크를 일단 뒤통수에 씌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외출할 때마다 쓸 수는 없으니 집에서 나갈 땐 맨 얼굴로 갔다가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나 쓸 셈이었다.

“그걸 쓰고 나가겠다고?”

질색하는 사헌을 보고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를 안 이후로 이렇게 큰 표정 변화는 처음 본 것이었다.

“왜? 영웅 놀이가 하고 싶어?”

비소를 머금은 사헌이 빈정거렸다. 그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어벤X스 흉내를 내는 꼬맹이가 되어 버렸다.

“그냥 얼굴 가릴 게 필요할 뿐이에요.”

재영은 역시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싶어서 침울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자신도 아X언맨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긴. 네가 서민태도 아니고.”

사헌이 짧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알려지기 싫다면서. 굳이 현장까지 따라오지 않아도 돼.”

시원스레 내뱉은 사헌이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처럼 등을 돌렸다.

“그래도…….”

재영은 사헌의 옷자락을 쥐고 머뭇거렸다. 계약까지 했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다.

“그럼 오늘은 대충 마스크만 쓸게요!”

삐, 삐, 삐삐-

그 순간에도 기계음은 다급하다고 소리 냈다. 재영은 말간 눈을 반짝이며 사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사헌은 손을 재영의 머리 위로 올라와 후드를 벗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사헌이 신경질적으로 기계의 단추를 누르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재영은 바쁜 그를 더 잡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시무룩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대신 다녀오면 안 놔줄 거니까 씻고 기다려.”

이어지는 말에 재영은 숨을 삼켰다. 사헌은 마음에 없는 말은 안 할뿐더러,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참아야 할 말도 있는 대로 뱉어 내서 주변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요즘 가깝게 두고 보니 오해하게끔 만드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저기가 네 방. 공부방으로나 써. 옷은 드레스룸에.”

재영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사헌은 재영에게 대충 알아서 구경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테라스 난간을 훌쩍 넘어갔다.

“여기 24층……!”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영은 황급히 달려가 난간에 매달렸다. 아래에서 쿵,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들이 들려왔다.

“저분들 심장 괜찮을지 모르겠네.”

재영은 머쓱한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24층에서 뛰어내린 사헌이 아니라, 그걸 보고 놀랐을 일반인들을 걱정해야 하는 거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은 재영은 거실 TV로 던전 공략 생중계를 켜 놓고 부지런히 짐을 정리했다.

달그락.

재영은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짐 정리를 한 후에 소파에 누워 잠깐 쉰다는 게 아예 잠이 든 모양이다.

대체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주변이 깜깜했다. 그러던 중 주방 쪽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누가 왔나?”

멍하니 생각하다가 바쁜 사헌을 대신해 집안일을 해 주는 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가서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데…….’

무거운 머리가 자꾸만 베개로 돌아가려고 했다.

‘몇 시지?’

재영은 아직 덜 깬 몸을 흔들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밝은 빛이 반쯤 감긴 눈을 찔렀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9시.

대충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때가 오후 5시였으니까 네 시간은 족히 잔 셈이다.

“아, 망했네…….”

목이 잠겨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집에 온 사람에게 인사부터 하려고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뭔가 발에 치였다. 재영은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바닥에 무언가 있었다.

“뭐지?”

재영은 발에 걸린 것을 들어 올렸다. 사헌의 디바이스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센터에서 중요한 연락은 다 이쪽으로 올 텐데. 재영은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주변을 살폈다. 이런 걸 바닥에 내던지고 다니다니. 사헌은 센터 일에 성실한 듯 은근히 성실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사헌의 디바이스가 여기 있다면 주방에 불을 켠 사람도 그일 수 있다.

“형! 오신 거예요?”

재영은 사헌을 찾기 위해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일어났으면 식당으로 와.”

역시나 불이 켜진 주방 안쪽에서 사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형?”

뻥 뚫린 주방 입구에서 재영은 걸음을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주방에 있는 사헌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재영은 떨리는 눈동자로 사헌이 두르고 있는 앞치마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시나 어떤 자국이라거나 피 같은 게 묻어 있지 않을까 싶은 걱정에서였다.

“얼른 먹고 가이딩해.”

하지만 사헌은 제대로 대꾸해 주지 않았다. 재영의 앞에 낮은 볼을 내려놓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서 한층 더 당당하게 가이딩을 요구했다. 돈을 받는 이상 재영도 그전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

“저 라면 하나만 후딱 끓여 먹고요!”

재영은 굶주린 배를 안고 식탁을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미간을 좁힌 사헌이 그의 어깨를 잡고 의자에 앉게 했다.

“먹으라고 했잖아.”

그제야 재영은 제 앞에 놓인 볼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 이게 뭐예요?”

대충 봐도 싱싱해 보이는 채소 위로 고깃덩어리 몇 개가 있고, 그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같은 색의 덩어리가 있었다.

“생긴 건 라코타 치즈 샐러드 같은데…….”

재영은 확신이 가지 않아서 답을 구하는 눈으로 사헌을 올려다봤다.

“맞아.”

짧은 대답에 재영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니까 라면보다는 샐러드 쪽이 속에 덜 부담스러울 것 같고 좋았다.

“이거 누가 해 주신 거예요?”

“왜?”

“인사라도 드리고 먹으려구요.”

사헌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재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인사해.”

그리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아, 뒤에 계세요?”

재영은 사헌의 턱 끝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사헌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어, 설마……, 이거 형이 하셨어요?”

크게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헌의 모습이 들어찼다.

“우, 우와.”

짧은 탄성조차 더듬는 모습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왜? 먹기 싫어?”

사헌이 재영 앞의 식탁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먹기 싫다고 하면 손으로 주워서 입 안에 몰아넣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아뇨!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요!”

재영은 애교가 묻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포크로 치즈와 샐러드를 섞기 시작했다. 쉽게 입으로 옮겨지지 않는 건 사헌이 손에 물을 묻히는 모습이 영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형이 해 주시는 거예요?”

재영은 아무런 속셈이 없다는 눈으로 웃으며 사헌을 떠보았다. 계속 그가 해 주는 걸 먹었다가는 단단히 탈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밑반찬은 아주머니 오셔서 해 주실 거야.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메모해 놔.”

사헌이 못마땅한 눈으로 재영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청소는 매일 사람이 와서 할 거고. 네 눈에 띌 일은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말 나온 김에 한꺼번에 알려 주겠다는 듯 사헌이 말을 이었다.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매일이요? 보통 일주일에 두, 세 번 오지 않나요?”

“쓰레기통 속에 살아도 괜찮으면 그렇게 하고.”

사헌이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소파에서 일어나자마자 발에 치인 디바이스가 떠올랐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죠?”

“발사믹 괜찮지?”

재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사헌이 그의 샐러드 위로 빙빙 돌렸다. 재영은 짙은 갈색 소스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형이 하는 거예요? 왜요?”

계속되는 물음에 아무리 사헌이라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소스를 식탁에 내려놓고 가만한 시선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아니, 이모님 오신다면서요.”

재영은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남이 해 주는 걸 잘 못 먹어.”

쯧, 혀를 찬 사헌이 대꾸했다.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다롭게 생겨서 그건 그럴 것 같다.

“그럼 잘 먹을게요.”

마침내 먹겠다는 대답을 들은 사헌이 같은 그릇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도 먹을 거라는 생각에 재영은 안심이 됐다. 닭 가슴살 한 조각에 치즈를 발라 샐러드 몇 장까지 콕콕 찍어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어요!”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던 재영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치즈는 그냥 산 거야.”

사헌이 호들갑 떨 필요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소스는 만드신 거예요?”

하지만 재영은 그 속에서 숨은 진실을 찾아냈다. 과연 사헌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진짜 요리 좀 할 줄 아시나 봐.’

재영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닭 가슴살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닭 가슴살도 엄청 부드러워요.”

사헌이 한입 먹을 때마다 말을 내뱉는 재영을 성가시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것도 그냥 남이 양념해서 파는 거 산 거야.”

“맛있는 거 고르는 것도 대단한 거잖아요.”

성가신 투가 역력한 말에도 재영은 한껏 들떠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재영의 포크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거 비율 맞추기도 어렵잖아요. 치즈가 너무 들어가면 짜고, 닭가슴살이 너무 들어가면 퍽퍽하고.”

이후로도 재영은 한 번 먹을 때마다 찬사를 흘렸다. 사헌이 그런 재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냥 신경 끄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저도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사헌의 입가에는 느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스킨, 로션을 바르면서 방에서 나와 거실을 가로지른 재영은 다른 방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잘 준비하고 침실로 와.’

평소에는 잘 때 같이 누워 가이딩하는 것으로 말을 맞췄지만, 막상 사헌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니 심장이 떨렸다.

“거기서 밤 샐래?”

닫힌 문 너머에서 사헌이 비소 어린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재영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헌과 나눈 계약서를 떠올리자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재영은 다시 한번 주춤했다. 침대에는 일찌감치 잘 준비를 마친 사헌이 있었다. 있기는 한데…….

“왜, 왜 다 벗고 있어요?”

근육이 꽉꽉 들어찬 사헌의 상체가 훤히 드러나 있던 것이다. 복근부터 하체는 이불로 덮여 있지만, 천이 얇아서인지 한곳이 너무 도드라졌다. 재영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다잡았다.

“원래 벗고 자는 게 습관이라.”

침대 헤드에 느른하게 기대 누운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당황해서 얼굴까지 벌게진 재영과는 비교해 너무 침착했다.

“잊은 건 아니지? 가이딩은 접촉면이 넓을수록 효과가 뛰어나다는 거.”

차마 침대로 다가가지 못하는 재영을 보며 사헌이 말을 건넸다. 이건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심히 동요하는 재영을 힐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뽀, 뽀뽀하면 되잖아요. 뽀뽀할게요.”

재영은 웬만하면 사헌과 스킨십은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계획을 바로 고쳤다.

“난 그냥 잘 건데.”

평소에는 먼저 입술을 비비지 못해 안달하던 사헌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재영의 반응이 마냥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자꾸 곤란하게 하면 혼자 가서 잘 거예요.”

울컥한 재영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며 눈을 치켜떴다.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사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팬티만 입는 거로 하자.”

더는 양보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재영은 그제야 안심한 듯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사람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헌의 옆에 누워 등을 붙이고 똑바로 누웠다.

재영은 얼굴 옆면이 따끔거려 눈동자를 굴렸다.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운 사헌이 지긋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단추는 풀었으면 좋겠는데.”

재영은 헛숨을 삼켰다. 사헌이 그의 앞으로 쭉 팔을 뻗은 것이다. 거리를 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바로 닿았다. 재영은 제 가슴 위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턱을 당겨 아래를 보았다.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형, 손…….”

사헌이 말해 보라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천 위로 재영의 상체를 더듬었다. 직접 닿은 게 아닌데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점차 재영의 호흡이 가빠졌다.

“안고만 잘게.”

사헌이 재차 말했다. 허락을 구하듯 재영을 바라보던 그가 맨 위의 단추를 하나 톡, 풀었다. 재영은 그 손을 떼 놓지 못한 채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말리는 움직임이 없자 사헌의 손은 더 과감해졌다. 다 뜯어 낼 것처럼 빠르게 단추를 풀고 파자마를 양쪽으로 벌렸다. 훤히 드러난 가슴팍에 재영이 움찔했다. 차가운 공기에 갑자기 노출돼서인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자 사헌의 손바닥이 맨살에 닿았다. 그의 체온은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뱃속이 간질거렸다. 재영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재영의 상체를 오르내리던 손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설마 하는 마음에 눈을 떴다.

사헌이 재영의 상체에 손을 얹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허탈감이 재영을 감쌌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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