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평온한 주말의 어느 날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제 방에서 혼자 보내던 재영은 모처럼 해운의 무릎을 베고 뒹굴거렸다. 민태는 배를 뒤집어 까고 누워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누가 너희를 보고 수험생이라고 하겠냐?”
같은 처지의 동준이 팝콘을 품에 안고 주방에서 나오면서 혀를 찼다.
“그러는 너도 여기 있네.”
참지 못하는 해운이 동준을 보고 비아냥거렸다.
“나는 그래도 알림 받고 온 거거든.”
동준은 재방송으로도 볼 수 있는 레이드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려고 도서관을 뛰쳐나온 것이었다.
“김재영 너는 웬일이냐?”
동준이 재영의 머리 옆에 팝콘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수능을 포기한 것처럼 노닥거리기 일쑤인 세 사람과 달리 재영은 수험생이 되면서부터 계획표에 맞춰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머리 좀 식히고 싶어서.”
뜨끔한 재영은 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재영이 공부보다 레이드 중계를 우선하게 된 건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였다. 친구들은 아직 재영이 가이드라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애들한테도 말해야 하는데…….’
어릴 적부터 함께 해 온 친구들끼리는 비밀이 없었는데 자신이 가이드라는 걸 말하려니 입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아니, 말한다고 해도 믿어 주기나 할지 모르겠다.
“근데 내 공부 방해하는 건 니들 아니냐?”
멍하니 광고를 보던 해운이 문득 불만을 토로했다.
“그걸 우리 탓을?”
민태가 익살스럽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니들이 공부는 각자 하면서 놀 때는 꼭 우리 집으로 오잖아.”
해운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확실히 재영 자신도 집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집중력이 깨지곤 했다. 하지만 여기는 제 집이 아니고, 당하는 사람도 제가 아니지 않나.
“우리끼리 놀 테니까 올라가서 공부해. 누가 뭐래?”
뻔뻔한 대응에 해운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 씨, 니들이 시끄럽게 하는데 내가……!”
“야, 야! 시작한다.”
동준의 외침에 해운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해운이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던전은 산 중턱에 있었다. 덕분에 버섯을 주우러 간 사람이 발견하기까지 인명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측정 등급은 B입니다.
센터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등급 측정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던전 등급이 낮아서인지 사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들어가는 팀이 B급과 C급으로 구성된 에스퍼이고, 센터 소속의 에스퍼들은 던전 숙련도가 높기 때문이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던전을 독식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던전 입구에서부터 놀, 오크 등 친숙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체가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것 말고는 어렵지 않았다. 지겨워서 졸음이 올 정도였다.
-보스존이다.
하지만 던전에서 가장 강한 크리처가 나오는 구간에서는 달랐다. 재영은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헐. 저거 드래곤 아님?”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커다란 새둥지 안에서 주둥이를 벌려 불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분명 드래곤이었다. A급 에스퍼의 검기도 반짝이는 비늘에는 흐린 기스 하나밖에 내지 못했다.
“저거 해치울 수 있는 거 맞겠지?”
민태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사실 지금 팀에서는 A급보다 B급에 기대할 만한 인재가 있어. 마력 운용에도 뛰어나고, 전술도 뛰어나서 제 2의 땅개라고 불릴 정도라니까.”
에스퍼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 빼고 모르는 게 없는 동준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민태를 안정시켰다.
그의 말대로 B급 에스퍼가 나서자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는 비늘이 아니라 틈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큰 위험은 철갑옷도 순식간에 녹여 버린 불꽃이었는데, 드래곤이라고 쉴 새 없이 불을 뿜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스퍼는 드래곤이 불을 뿜어내는 방향과 시간, 다시 뿜을 수 있는 간격을 체크하고 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확인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와씨, 저 에스퍼 이름이 뭐라고? 나 오늘부터 팬한다.”
“B급 문서하 에스퍼야. 톡으로 팬카페 주소 링크 보내 놨으니까 확인해 봐.”
“오, 좋아. 땡큐땡큐.”
재영은 곧장 폰을 확인하는 민태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추진력이 남다른 녀석들다웠다. 인재를 보는 재영의 눈은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뛰어난 에스퍼가 많아지면 형도 부담을 덜겠네.’
사헌의 가이드로서 그의 상태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하나뿐인 S급 에스퍼에게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던전의 빛이 꺼지고 에스퍼들은 당당히 출구로 나왔다. 파란선 밖에서 그들의 귀환만을 기다리던 기자와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거긴 너무……워.
하지만 에스퍼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A급 에스퍼의 손짓에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던 에스퍼들이 뒤로 물러났다.
“뭐야?”
“아직 안 끝남?”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녀석들도 고개를 들고 화면을 확인했다.
“무슨 일 생긴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재영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 해산……!
-센터 연락했어?
가만 보니 에스퍼들은 간격을 두고 한명의 에스퍼를 둘러싸고 있었다. 던전에서 활약상이 가장 눈에 띄었던 B급 문서하 에스퍼였다.
“뭐야. 우리 누님이 왜 저기 있냐.”
어느새 문서하를 누님으로 칭하게 된 민태가 텔레비전에 바짝 당겨 앉았다.
“야. TV 가까이서 보지 말랬지.”
인상을 찌푸린 해운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을 때, 문서하 에스퍼가 갑자기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뭐지. 안에 좀비 있었나?”
괴성을 지르며 비트는 모습이 영화 속 좀비로 변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해운이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화면이 뚝 끊겼다. 까만 화면에는 돌발 상황에 어리둥절해하고 놀란 아이들의 얼굴만 비쳤다.
“뭐지? 짹짹이도 지금 난리야. 무슨 일 터진 거 아니냐고.”
“짐 싸? 우리 피난 가는 거야?”
겁 많은 민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손에는 스마트폰만 꽉 쥐어져 있었다.
“던전은 분명히 소멸했어. 다들 봤잖아.”
차분하게 말하지만, 해운의 눈동자도 혼란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줘 봐.”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던 동준이 해운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조정했다. 구경꾼들 중에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이 있던 모양이다. 영상 속에서 난데없이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문서하 에스퍼의 주변 땅이 푹푹 파였다.
“저게 뭐야?”
“진짜 뭐 감염이라도 된 거 아니야?”
“아파 보이는데 왜 아무도 조치를 안 해?”
걱정스러운 말을 들은 것처럼 카메라가 에스퍼 가까이로 움직였다. 정작 그는 걱정보다 조회 수에 눈이 먼 것 같았지만.
-위험해요!
가까이 다가가려는 남자를 에스퍼가 저지했다. 그 순간 네크라인 밑에서부터 올라온 검붉은 핏줄이 기어이 서하의 눈동자까지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저거 어떻게 해!
이내 구경하는 사람 중 하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워낙 높이 떠올라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등 뒤에 투명한 튜브가 있는 것처럼 통통 튕기면서 안전하게 내려앉았다.
“어? 공주님이다!”
동준이 제일 먼저 사헌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화면 속 사헌이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봤다. 재영은 눈을 홉떴다. 꼭 사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곧 화면이 고장 난 기계처럼 치직거리더니 완전히 꺼져 버렸다.
곧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인기 예능의 재방송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여전히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몰라 넋을 놓았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재영은 당황하는 민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민태가 애꿎은 리모컨을 두드리는 바람에 채널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마.”
“우리 누님 왜 저러는 거냐고!”
해운에게 리모컨을 빼앗긴 민태가 거의 울부짖으며 동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포, 폭주야, 폭주라고.”
‘에스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동준이 목이 졸린 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폭주?”
“폭주가 뭔데?”
아는 이가 적지만 엄연히 가이드인 재영이 일반인 동준에게 되물었다. 그에 뻐기는 듯한 표정을 지은 동준이 놓으라며 민태의 손을 퍽퍽 쳤다.
“에스퍼가 한도 이상의 힘을 써서 무리가 온 거야.”
재영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에스퍼에게 한도 이상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영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평범한 사람도 연달아 힘을 쓰면 기운이 빠지는데, 에스퍼라고 다를까. 차이라면 보조 배터리라고 비하되기도 하는 ‘가이드’의 존재다.
“가이딩 받으면 괜찮아지는 거지?”
재영은 반쯤 그럴 거라고 확신하며 물었다.
꺼지기 직전의 휴대폰도 충전기를 꽂아 두면 금세 게이지가 채워지지 않나.
“글쎄.”
하지만 동준의 대꾸는 다소 싱거웠다.
“글쎄라니?”
그렇다면 가이드는 진짜 필요한 순간에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재영은 동준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따지듯 물었다. 민태가 동준의 멱살을 잡을 때와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나도 잘 몰라!”
“잘 모르는데 왜 그렇게 말해?”
동준이 너무 억울하고 한편으로는 재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폭주한 에스퍼가 옛날에도 있기는 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보도가 안 됐어.”
보도가 안 됐다는 건 이후의 활동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폭주 에스퍼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리라 받아들인 동준이 가이딩도 소용없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너 옛날 기사까지 찾아보냐?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민태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동준에게 맞는 말을 했다. 처맞는 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물주먹에 민태가 악악 소리 지르며 몸을 말았다.
“폭주한 에스퍼의 최후는 두 가지야.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내내 조용하던 해운이 그 소란 속에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커다란 망치가 되어 재영의 뒤통수를 때렸다.
* * *
사헌은 언제나 그랬듯 문 대신 창문을 통해 재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 자꾸 만나는 걸 알면 부모님들에 의해 어떤 핑크빛 소문이 만들어질지 모르니 재영도 오히려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폭주하는 에스퍼의 영상 마지막에 그를 봐서일까. 거대한 몸을 쭈그려 창문으로 들어오는 사헌의 얼굴이 다른 때보다 한층 피곤해 보였다.
“뭐야, 그 똥 씹은 표정은.”
창문을 닫고 돌아온 사헌이 재영의 얼굴을 보고 찝찝하다는 듯 그에게서 거리를 뒀다.
“걱정하는 표정 몰라요?”
재영은 입술을 내밀고 투덜댔다.
“무슨 걱정? 또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앉아.”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손가락으로 재영의 이마를 튕겼다.
‘진짜 쓸데없이 걱정했네.’
재영은 쓰라린 이마를 문지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형제 때문에 언젠가 이마가 코만큼 솟을지도 모른다.
“우선 기운을 느끼는 것부터 하자.”
침대 끝에 앉은 재영의 옆에 걸터앉은 사헌이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꼭 그래야 해요? 형이 알아서 잘하잖아요.”
재영은 말꼬리를 늘이며 어리광을 피웠다. 지금껏 가이딩은 사헌이 재영에게 흘러나오는 것을 주워 먹거나 직접 뽑아 먹는 방식이었다. 재영이 직접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재영은 가만히 앉아 손만 내주면 되는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건 효율적이지도 못하고, 너한테 무리를 줄 수도 있어.”
사헌은 단호했다.
“무리요?”
재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후로 며칠에 한 번은 꼭 가이딩을 하고 있지만, 뭔가 하긴 하는 건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헌이 다녀간 후에 몸에 힘이 없다거나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정식으로 가이드로 활동할 것도 아니고. 제가 가이딩한다면 형뿐인데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그 순간, 사헌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재영은 뭔가 실수한 기분이 들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채 알아내기도 전에 사헌의 눈빛이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에스퍼를 믿지 마. 그게 설령 나라고 해도. 언제나 주도권은 네가 쥐고 있어야 돼.”
사헌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재영은 그 기에 눌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사헌이 제 티셔츠 밑단을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멀뚱히 끔뻑이던 눈에 울룩불룩한 근육이 선명하게 박혔다.
“자, 잠깐! 뭐하는 거예요!”
재영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이편이 연습하기 좋아.”
유난스러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사헌이 재영의 손목을 잡고 제 가슴팍에 손을 올리게 했다. 손바닥 아래 피부가 제 것과는 달리 너무 단단했다. 그게 너무 어색해서 재영은 손가락을 자꾸 꼼지락거렸다.
‘이거 머리라도 부딪치면 그대로 기억상실 루트 탈 거 같은데.’
“집중이 안 되면 눈을 감아.”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사헌이 차가운 눈빛으로 다그쳤다. 재영은 움찔하고 눈을 감았다.
“머리 비우고 숨도 죽여.”
‘숨을 죽이면 제가 죽는데요.’
재영은 속으로 궁싯거리면서도 그의 말에 따르려고 애썼다.
“바람 같은 게 느껴져?”
“아니요.”
사헌과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표현이다. 재영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 비슷한 거라도 느껴 보려고 집중했지만, 방 안은 모든 문이 꽉 닫혀 있었다. 느껴지는 건 손바닥 아래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사헌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된댔는데…….”
이어지는 침묵 사이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형도 잘 모르는 거죠.”
번쩍 눈을 뜬 재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사헌을 바라봤다.
“눈 뜨라고 안 했다.”
분명 재영의 말에 찔린 것 같았는데, 다그치는 얼굴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법 사나운 기세였는데도 재영은 그가 무섭지 않았다.
‘역시 잘 모르시네.’
태어날 때부터 완벽함을 자랑했을 것 같은 사헌에게서 빈틈을 엿본 기분이었다. 가이드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재영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누군가에게 배워 온 게 분명했다.
“느껴질 때까지 그대로 있어. 하다 보면 되겠지.”
“네.”
재영은 처음보다 더 집중했다. 사헌이 저를 위해 공부해 왔으니, 저도 그만한 노력은 해야 마땅하다. 마음가짐이 문제였는지 마침내 무언가 피부에 닿는 게 느껴졌다. 사헌의 말대로 바람 같기도 하고, 물줄기 같기도 했다.
“아…….”
재영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렀다.
“잘하네.”
그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사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놀란 재영이 눈을 번쩍 떴다.
“아직 멀었어. 눈 감아.”
제가 들은 목소리는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재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내가 네 기운을 삼킬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 같은 것이 빠르게 몸을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상관없었는데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 기운을 쫓아 봐.”
재영은 입술을 깨물며 바람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아예 찾지도 못할 때도 왕왕 있고, 겨우 찾았다 싶어도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사헌은 가이딩을 멈추고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 이게 뭐예요?”
그 끝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었다. 재영에게는 형체가 불분명한 어둠이 그렇게 느껴졌다. 굵은 몸통에서 촉수처럼 뻗은 검은 기운이 금방이라도 재영을 잡아챌 것처럼 사납게 일렁였다.
“봤구나.”
사헌의 눈동자가 희열로 빛났다. 뜨이려는 눈 위를 사헌이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걸 어르고 달래서 매끈한 구로 만드는 거야.”
“그게 가능해요?”
재영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사이에 시험 삼아 검은 기운을 톡 건드렸다가 튕겨 나갔다. 착각인지 짜릿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그게 가이딩이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다는 ‘공주님’답지 않았다. 재영은 눈을 떠서 재촉하는 대신 촉수와 싸움을 벌였다.
“점점 커지면서 속을 갉아먹지.”
마침내 사헌이 무거운 입을 뗐다.
“그러다가 몸이 차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잡아먹히는 거야.”
담담한 말끝에 재영은 낮에 해운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죽임당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에스퍼가 폭주하는 건 폭탄이 터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피해가 그 자신한테만 미치는 게 아니라는 소리지.’
‘그,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폭주도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능력을 쓰다가 일어나는 일인데.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는 것 아닌가. 충격으로 재영은 눈꺼풀까지 떨렸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
해운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제 형에게도 올 수 있는 미래이니 완전히 남 일이라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근데 어떻게? 설마 같은 에스퍼가…….’
민태와의 다툼을 끝낸 동준이 관심을 보였다. 생각지 못한 사항에 재영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해운을 쳐다봤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에스퍼뿐이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해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스퍼는 발현과 동시에 목 뒤에 폭탄을 심어. 그리고 폭주가 오면…….’
그때 해운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말이 올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형도 보여요?”
“뭐가?”
재영의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가 제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형도 이걸 느끼느냐구요.”
재영은 사헌의 심장 위에 얹은 손바닥을 꾹 눌렀다.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는 그것을 칭하는 말투에는 안 좋은 감정이 잔뜩 묻어났다.
사헌이 제 심장께를 누르고 있는 하얀 손을 빤히 쳐다봤다.
“내 몸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체 모를 수가 있냐는 듯한 표정이다. 사헌의 몸에 깃든 기운인데도 무섭게 느껴지는데 그도 그럴까. 재영은 망설임 가득한 눈으로 입만 붙였다 뗐다 반복했다. 사헌이 아프다거나 무섭다고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묘한 침묵이 계속되자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이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결론을 내린 건지 재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달리기를 했는데 심장이 너무 뛰어서 가죽을 뚫고 나올까 봐 두렵기까지 한 느낌, 알아?”
재영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사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헌이 눈동자만 굴려 그런 재영의 얼굴을 훑어봤다.
“얇고 날카로운 바늘이 몸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은 고통은?”
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말만 들었는데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된 것이다.
‘폭주가 아닌데도 그런 느낌이 든다고?’
바로 직전에 흉포한 기운을 본 터라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장을 쥐락펴락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올 만큼 끔찍한 소리들을 내뱉으면서 사헌의 눈빛은 반짝였다. 짐짓 즐거워 보이는 것이 제 이야기를 듣는 재영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폭주가 아닌데도 그 정도라고요?”
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폭주하면 대체 얼마나 사나워지는 거야?’
재영은 기겁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린 얼굴을 보며 사헌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겁먹는 걸 보고 좋아하는 거야?’
그렇다면 엄청난 악취미다. 재영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만약 널 만나지 못했다면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사헌이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끔찍한 가정을 내뱉었다. 재영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가이드 없이 잘 버텼다면서요.”
재영은 홀로 태연한 사헌이 얄미워 씩씩대며 말했다.
“약물과 기계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약과 기계가 가이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었다면 사헌이 재영을 연구소까지 모셔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영은 아까 영상에서 본 폭주 에스퍼의 모습에 사헌을 겹쳐 봤다.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사헌을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제 가이딩은 괜찮아요?”
좋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는 것에 신물이 난 재영이 묻자 사헌이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봤다.
“……모자라지는 않아요?”
재영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기계와 약물처럼 제 가이드가 부족하다면, 사헌이 지금도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98퍼센트에 달하는 매칭률이 울겠지.”
자세를 바로 한 사헌이 재영의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작정하고 겁을 주려고 말을 꺼낸 주제에 달래는 투였다.
“97.6이에요.”
울상을 지은 재영이 사헌의 말을 정정했다. 사헌이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재영은 사헌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면서 화제를 돌릴 만한 소재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피도 뽑아가지 않았어요?”
마침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재영은 반가움에 사헌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서 물었다.
“아, 그건 등급 확인하려고 한 거야.”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킨 사헌이 부담스럽다는 듯 재영의 이마를 밀었다. 그의 말에 재영은 에스퍼처럼 가이드도 등급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사헌이 제 피를 뽑아간 남자에게 결과를 자신의 폰으로 보내 두라고 했던 것도 함께 기억났다.
“결과 나왔어요?”
사헌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알려 주시지. 저는 무슨 등급이래요?”
재영은 섭섭한 티를 내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눈을 반짝였다. 물론 늦어도 한참 늦은 발현이고, 가이드에 대한 꿈이 있던 것도 아니라서 별 기대는 없었다. 그냥 가이드라니까 등급이 뭔지도 궁금했다.
“흠.”
손바닥에 턱을 괸 사헌이 재영을 바라보며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말할까, 말까. 언제 어떻게 말해야 원하는 반응이 나올까. 재영은 사헌의 얼굴에서 60초를 좋아하는 어느 진행자의 얼굴을 봤다.
“S급.”
마침내 재영을 감질나게 하던 입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재영은 실망했다.
“형 등급 말고요.”
사헌이 재차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폰을 뒤적였다. 재영은 눈앞까지 들이밀어진 화면을 눈에 담았다. 사헌이 누군가와 나눈 메시지가 보였다.
-G(guide), S급
밑으로도 메시지가 길게 이어졌지만, 재영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헌이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문자까지 조작하면서 저를 놀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가, 가이드는 S급이 흔한 거죠?”
갑자기 엄청난 부담감이 재영을 덮쳤다. 재영은 양손으로 사헌의 옷자락을 쥐고 매달렸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알기로는 네가 최초야.”
현실감 없는 말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재영은 입을 떡 벌린 채 사헌의 품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직은 제가 가이드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최초의 S급이라니. 정체가 알려진다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런데 왜 결과가 온 걸 말해 주지 않았어요?”
재영은 사헌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웅얼거리며 그를 원망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목 뒤를 주무르는 그의 손길에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등급이 중요한가? 어차피 너는 나만 상대할 텐데.”
사헌의 당당한 독점권 발언에 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등급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헌의 태도가 제대로 도움이 됐다. 재영은 제 침대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헌을 겁도 없이 밀어냈다.
“저 잠깐 누워야 할 것 같아요.”
침대를 비워 낸 재영은 베개를 베고 똑바로 누워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감는 그를 보고 사헌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자라.”
작게 고개를 흔든 사헌이 옆으로 치워진 이불을 끌어다가 재영의 머리끝까지 덮어 줬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 발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사헌이 침대 곁을 떠나기 전에 이불 밖으로 팔을 내밀어 그의 손을 턱, 붙잡았다. 사헌이 고개만 틀어 잡힌 곳을 내려다봤다.
“가이딩, 더 해야 하잖아요.”
팔을 내미는 반동에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재영은 이불 위로 눈을 빼꼼히 내밀고 사헌을 응시했다.
“평소에도 이만큼만 했어. 충분해.”
사헌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낸 말에 재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가이딩을 어떻게, 얼마나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사헌에게 몸을 맡기고만 있었기에 몰랐다.
“왜요? 고통스럽다면서…….”
“너를 만나기 전에도 이 정도였어. 익숙해.”
태연한 말에 찌푸려진 재영의 얼굴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 고통이 익숙하다는 게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저 S급이라면서요.”
제 등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사헌과의 매칭률도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잘 모르지만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이 가이딩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재영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사헌을 올려다봤다.
“아픈 게 없어질 때까지 해요.”
“내가 아픈 게 싫어?”
그렇게 묻는 사헌의 눈은 재영을 천연기념물을 보는 듯 하고 있었다.
“저는 형 걱정하면 안 돼요?”
재영은 울컥해서 말을 내뱉었다. 언제나 앞장서서 던전에 입장하는 에스퍼 진사헌은 든든했다. 중계 영상을 예능처럼 소비할 수 있는 것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존재 덕일 것이다. 그런 사헌이 던전을 닫기 위해 매일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걸 재영은 처음 알았다.
“아니, 해.”
와락 소리치는 재영을 멍하니 보던 사헌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쁘지 않네.”
사헌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가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꽤 만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그에 재영의 눈이 뾰족해졌다.
“걱정하기 싫으면 얼른 ‘가이드’가 돼.”
사헌이 그런 재영을 보며 약 올리듯 말했다. 그냥 체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가이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뜻이다.
“나는 네가 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이어지는 말에 재영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얌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헌이라니. 그게 더 무서웠다. 재영은 미끄러진 이불을 다시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얇은 천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저절로 창문이 닫혔다.
“말도 안 돼!”
눈을 감고 있던 재영은 갑자기 소리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S급이라니. 그것도 최초. 아니, 최초면 유일하다는 거 아니야?”
누군가에게 말하듯 옆을 보며 울분을 토해 내는 게 누가 보면 딱 침대에 도로 눕힐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재영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세계 최초는 아니겠지?”
재영은 서둘러 인터넷 앱을 켜서 S급 가이드를 검색했다. 외국의 S급 가이드 이름이 몇 개 떠올랐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없잖아.”
재영의 마음은 호떡 뒤집히듯 바뀌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소문 퍼지는 건 눈 깜짝할 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가 가이드라는 걸 아는 건 자신과 사헌, 그의 파트너 에스퍼인 재효, 그리고 연구소의 남자뿐이었다. 아무리 파트너라고 해도 사헌이 재효에게 나중에 알게 된 재영의 등급을 친절히 말해 주거나 문자를 보여 줬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사람, 입은 무겁나?”
남는 건 직접 결과를 낸 연구소의 남자뿐이다.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곳이 어디였는지도 모르는 재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에스퍼도 조심해야 해.”
형의 회사에 갔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보안 요원이 가이드라는 걸 알아챈 게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인식도 못 하는 힘이 넘치니 알아챌 수밖에 없던 거다.
“근데 뭐, 이왕이면 최고인 게 좋긴 하지.”
재영은 생각을 정리했다.
“덕분에 형하고 가이딩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도로 침대에 눕는 재영의 표정은 고민 하나 없는 것처럼 맑았다.
* * *
하지만 재영의 마음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자꾸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다.
재영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일 뒤쪽에 앉아 있어서 교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선생님은 등을 지고 칠판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계셨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걸 따라 적었다. 나머지는 졸거나 민태처럼 낙서를 하기도 했다.
‘소문이 난 건 아닌 것 같고.’
그랬다면 몰래 폰을 하는 녀석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에스퍼랑 접촉이라도 했나?’
누군가 또 우연히 신체가 닿아 제가 가이드라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재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내가 소문내는 게 낫겠다.”
“뭔 소문을 내? 너 연예인이랑 비밀 연애라도 해?”
갑자기 들려오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재영은 제자리에서 튀어 오를 만큼 놀랐다.
옆자리에 앉은 해운이 영 수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흘겼다. 제 형처럼 에스퍼인 것도 아닌데 귀도 참 밝았다.
“고등학생이 무슨 연애야.”
“고딩이 수도승이냐?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핀잔하는 말투에 해운이 반박했다.
“네, 다음 모태 솔로~”
“나는 자발적 솔로라니까? 게임할 시간도 없는데 무슨…….”
재영은 해운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 됐어. 튀어 갈 준비나 해.”
점심시간이 코앞까지 닥쳐 있었다. 학생에게 제일 중요한 건 공부도, 여자도 아니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맛있는 메뉴였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재영은 힐끗 눈을 들어 선생님의 눈치를 보고 샤프, 지우개 등을 주섬주섬 필통에 넣었다. 그리고 한 발을 책상 밖으로 뻗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종이 울렸다. 졸고 있던 아이들까지 하나같이 복도를 향해 튀어 나갔다. 선생님이 끝났다고 말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교실을 뛰쳐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뜀박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냐, 저거?”
해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성난 목소리를 냈다. 앞쪽 복도가 웅성거리는 애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2반 통해서 가자.”
재영은 해운의 팔을 끌고 2반의 뒷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여든 애들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서 우뚝 멈춰서 버렸다.
“왜……, 형?”
멈춰 버린 재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해운이 그 사람을 불렀다. 사헌이었다. 먼저 그를 발견한 재영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었다.
애들한테 연예인처럼 둘러싸인 사헌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 틈에 있어서인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헌은 그 어느 때보다 어른처럼 보였다.
“뭐지? 우리 학교에 던전이라도 나타났나?”
이어 사헌을 본 동준이 눈가를 찌푸리며 빠르게 폰을 연타했다. 제 주변에서 에스퍼와 관련해 일이 생겼는데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분해 보였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평화로운데…….”
해운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재영의 심장은 점점 더 무섭게 쿵쾅거렸다. 뜨거운 시선 때문에 발가벗은 채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헌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통에 그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도 따라 움직인 것이다.
“해운아!”
그때 민태가 큰소리로 해운을 부르며 손을 방방 흔들었다.
“쟤는 저기서 뭐해?”
민태 덕에 새로운 관심사가 된 해운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속닥거렸다. 분명 같이 급식소를 향해 뛰고 있었는데, 어느새 빽빽하게 둘러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는지.
“관종의 힘을 무시하지 말자.”
재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공주님 오늘 일정 없는데? 우리 학교 근처는 물론이고, 오늘 우리나라 어디에도 던전은 없어.”
벌써 일정을 다 살펴봤는지 동준이 더 이상하다는 얼굴로 주절거렸다. 재영은 뜨끔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사헌이 이곳에 올 이유가 저 말고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 학교는 사헌이 에스퍼가 되기 전까지 다니던 곳이기도 했다.
“모교니까 선생님이라도 뵈러 오신 게 아닐까?”
“차라리 동생 보러 왔다고 하면 믿겠다.”
이거다, 싶어 내뱉은 말에 곧바로 동준이 그게 말이나 되냐고 핀잔을 줬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누구든 말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윗사람 중에 진사헌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건 그가 에스퍼가 되기 전부터 그랬다.
“진해운.”
마침내 사헌의 입이 열렸다. 재영은 의외의 호출에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그는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경험하게 됐다. 사헌을 둘러싸고 있던 애들이 전부 뒤로 물러서며 길을 터준 것이다.
“헐. 진짜였나 봐.”
동준이 큰 사건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해운과 10년 넘게 친구로 지냈지만, 사헌이 먼저 알은척하거나 하는 건 처음이었다.
“뭐, 왜.”
어쩔 수 없이 사헌의 앞까지 걸어간 해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해운이 재영의 옷자락을 잡고 끌고 간 탓에 재영 또한 사헌의 근처까지 가게 됐다.
뭔가가 손등을 툭툭 하고 건드렸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허리들 틈으로 뻗어온 팔이 보였다. 굵은 혈관이 도드라진 아주 낯익은 손이 재영을 건드리고 있었다.
재영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동생 친구들의 얼굴을 훑은 사헌의 시선이 재영에게 닿아서는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공부 적당히 하고, PC방 가서 게임도 하고 그래. 친구들이랑.”
착각이 아니다. 사헌의 눈은 재영을 향해 있었다.
‘티내지 마세요, 제발.’
사헌을 향해 눈을 부릅뜬 재영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헌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재영이 재차 고개를 흔들자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형, 네 동생 고3인 거 잊었냐? 무슨 게임이야.”
“너야말로 어제 새벽까지 게임하느라 잠 안 잔 거 잊은 것 같은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깜짝 놀라는 바람에 해운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사헌이 발현한 직후부터 센터 가까운 곳으로 나가 살고 있던 터라 동생의 생활을 알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거 나 때문이야.’
재영은 미안함에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괜히 해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 사헌은 해운과 함께 게임을 하는 재영을 뒤에서 안고 있었다.
“너 나 감시하냐? 미친. 할 일 없으면 여자를 사귀어.”
해운이 질색했다.
“내 연애를 걱정할 주제던가, 네가.”
사헌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검은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서 해운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형제라고 해도 형인 사헌은 좋은 유전자만 고르고 골라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혼자 잘난 인간이다.
동생 해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훈남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키도 평균보다 크지만, 평균을 크게 웃도는 사헌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공부하지도 않는데 성적이 좋을 리도 없고, 운동은 적당히 즐길 정도로만 할 줄 알았다. 반박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는지라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말았다.
재영은 괜히 동창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는 해운을 토닥여줬다.
***
수능을 코앞에 둔 재영이 숨을 쉴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일요일이 유일했다. 사헌이 재영에게 가이딩을 요구하는 것도 그때뿐이었다.
그래도 재영은 가이딩에 빠르게 능숙해졌다. 처음 몇 번은 기운을 쫓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는데, 이제 스스로 사헌의 몸속에 넣는 것까지 가능했다. 아마도 재영이 S급인 덕일 것이다.
그날도 재영은 사헌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들쭉날쭉한 사헌의 힘을 동그랗게 가다듬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후는 단순한 반복 작업이기 때문에 재영은 다른 생각에 빠지기 일쑤였다. 갑자기 학교로 찾아온 사헌의 이상 행동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담 너머로 가려지지 않는 사헌의 얼굴을 발견한 해운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처음 하루를 제외하고 사헌은 해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이후 사헌이 멀찍이서 일행을 쳐다보다가 모습을 감추고, 또다시 어느 순간 눈에 띄는 것을 반복했다.
사헌은 학교에 나타나서 놀라게 하지 말라는 재영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지만, 하필 그게 더 기이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재영은 귓가에 내리꽂히는 낮은 목소리에 어깨를 들썩이며 생각에서 벗어났다. 사헌이 재영의 손목을 잡아 제게서 떼어 놓고 있었다. 그가 정해 둔 가이딩 허용치를 끝낸 모양이다.
“형. 설마…….”
재영은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말을 멈췄다. 미행? 계속 따라다니지는 않으니까 이건 좀 아니고. 그럼 스토킹? 하지만 사헌이 쓸데없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이유가 없지 않나.
“너 감시하는 거야.”
“아! 감시……!”
재영은 드디어 답을 알아낸 것이 기뻐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네? 감시요?”
그런데 뒤늦게 그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재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헌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목표지.”
‘나한테 접근하는 사람?’
사헌의 표현에 재영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청영고등학교 학생, 교직원을 포함해서 에스퍼는 모두 다섯. 거기서 2km도 떨어지지 않은 중심고등학교는 열둘, 가온여자고등학교에도 여섯. 더 말해 줘?”
재영의 오해를 알아챈 것처럼 사헌이 말을 덧붙였다. 재영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있는 에스퍼를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계속 오겠다고요?”
재영은 질겁하며 물었다.
“네가 내 거라는 도장이 찍히지 않는 이상 당연하지.”
사헌이 뻔뻔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형. 연애할 때 좀 집착하는 스타일이죠?”
재영은 언젠가 사헌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이런 비유가 사헌에게 맞나 싶었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이런 것뿐이었다. 고작 가이드인 제게도 이럴진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죽할까.
“모르지.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의외의 대답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과장해서 남녀노소, 국적 상관없이 최대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진사헌이 모태 솔로라니. 말이 안 되는 듯싶으면서도 어쩐지 이해가 갔다.
“아무튼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널 가질 수 없어.”
사헌이 재영의 머릿속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아무도 눈치 못 채는 것 같으니까.”
재영은 더 반박할 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사헌이 손을 뻗어 재영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리고 제 어깨에 기대도록 꾹 눌렀다. 재영은 편한 자세를 찾아 그의 품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 끊어 낼 수 없는 올가미에 단단히 매인 기분이었다.
* * *
서둘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라던 수능 날이었다. 민태가 해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야, 해운아.”
그곳에는 여지없이 사헌이 있었다.
“아, 진짜. 무슨 시험 보는 날까지 찾아와.”
해운이 투덜대면서 잰걸음으로 사헌에게 다가갔다. 상기된 볼을 보니 형이 찾아오는 게 마냥 싫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형님!”
“오셨어요?”
“먹어.”
재영까지 제 앞으로 온 것을 확인한 사헌이 던지듯 건넸다. 아니, 살포시 품에 안겨줬다. 물론 재영을 제외하고는 던진 게 맞았다. 아이들은 그가 준 것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사헌이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할까 봐 온몸을 던져 받아 냈다.
“이, 이게 뭡니까, 형님?”
동준이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사헌에게 물었다. 크리처나 폭탄이 아닐까. 고3인 제 동생을 끌고 수능 전날까지 놀러 다녔다고 단도리라도 치려는 게 아닐까. 온갖 나쁜 상상이 친구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야. 초콜릿 모양 크리처도 있냐?”
민태도 동준과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친구들이 불안한 얼굴로 속닥거리는 사이, 재영은 제 것과 친구들의 것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까지 보고된 바로는 없어.”
“그냥 초콜릿이니까 줄 때 처먹어.”
포장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재영을 보던 사헌이 짜증스럽게 윽박질렀다.
“네, 넵!”
아이들은 군대라도 온 것처럼 박력 있게 대답하면서 초콜릿을 한입에, 말 그대로 처넣었다. 재영도 주섬주섬 포장을 벗겼다.
“어? 찹쌀떡!”
순식간에 초콜릿을 녹여 먹은 민태가 옆을 보며 크게 외쳤다.
민태의 말에 찹쌀떡 상자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아이들이 사헌에게 받은 것은 전부 초콜릿인데, 유일하게 재영만 찹쌀떡이었다. 누가 봐도 명확한 편애다.
“나도 찹쌀떡 좋아하는데…….”
민태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초콜릿 껍질과 재영의 찹쌀떡을 번갈아 봤다. 재영과 함께 있으면 부모님에게서부터 항상 차별을 받는 해운만이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예쁘게 굴지 그랬냐.”
재영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찹쌀떡을 베어 물었다. 괜히 민태가 불쌍하다고 제가 받은 걸 넘겨줬다가는 그가 사헌에게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공주님을 상대로 감히 그런 농담을 하다니…….”
재영의 너스레에 오히려 동준이 헛숨을 삼키며 기겁했다. ‘공주님’이라고 말한 제가 더 위험할 거라는 생각은 없나. 재영은 눈을 끔뻑였다.
“예쁘게 군 건 잘 아네.”
사헌이 입술을 비틀며 재영의 말에 긍정했다. 동준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은 것처럼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민태도 재영의 것을 뺏어 먹을 생각을 버렸다.
“감사합니다.”
재영은 정당한 제 몫이라고 생각해서 밝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물론 예쁘게 굴었다는 말은 가이딩을 지칭하는 게 분명해서 민망하지도 않았다.
“꼭꼭 씹어 먹어. 괜히 나 때문에 시험 망쳤다고 하지 말고.”
사헌이 손을 뻗어 재영의 입술에 묻은 하얀 가루를 털어 냈다. 재영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옆에서 친구들이 기절할 것처럼 그 광경을 보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시발, 나는 초콜릿이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체해서 시험지도 구경 못 할 뻔.”
민태가 재영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신체가 강화된 에스퍼의 귀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근데 형도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유난히 즐거워 보이는 사헌의 얼굴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아니고.”
순순한 대답에 재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헌이 별일 없다고 말할 줄 알았던 것이다.
“곧 있을 것 같아서.”
사헌이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리게 말을 끝냈다. 덕분에 위험한 호기심이 떠오른 재영의 시선은 말하는 내내 그에게 붙잡혀 있었다. 대체 뭘까. 그를 즐겁게 만든 일이.
“시험 끝나고 보자.”
그 후에 사헌은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 해운을 쳐다보는 눈빛이 목도리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 다음에 보자는 말조차 형식적이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 주시네.’
재영은 웃는 게 친구들의 눈에 보이기라도 할까 봐 목도리 안에 입술을 묻었다. 보들보들한 실이 볼을 간질였다.
“아씨, 뭘 또 봐. 진짜 왜 저러지? 미친 거 아니야?”
해운이 아무것도 모르고 볼을 붉히며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재영과 사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비밀스러운 눈빛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딱 아는 만큼 답을 적고 수험장을 나온 덕에 재영의 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런 그의 앞에 기다린 것처럼 사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아니겠지.’
재영은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며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S급 에스퍼 진사헌을 필요로 하는 건 던전 발생 현장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사람이 새벽 같이 나와 찹쌀떡을 건네주고, 또 끝날 때까지 기다려 납치하듯 차에 태운다고?
“다른 애들은 바로 집으로 가서 쉰다던데.”
재영은 안전띠를 당기며 말을 꺼냈다. 물론 사헌은 궁금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너는 내 집에 가서 쉬어.”
의외로 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 지금 형 집에 가요?”
이번에는 대꾸 없이 시동만 걸었다. 재영은 가슴 위에 있는 안전띠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해운이도 형 집에 안 가 봤다던데.”
재영은 사헌의 옆얼굴을 힐끗거리며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정확히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걔가 내 집엘 왜 와.”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형을 좋아하는 해운이 들으면 서운해할 정도로 서늘한 태도다. 재영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원래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대 해운에게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낯선 동네로 들어섰다. 계속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재영의 눈에 유명한 프랜차이즈 편의점이 보였다.
“형! 잠깐 저쪽에 차 세워 주세요.”
재영은 곧장 팔을 들어 편의점 옆의 도롯가를 가리켰다. 다행히 사헌이 별말 없이 차를 세워 줬다.
“금방 다녀올게요!”
재영은 차에서 뛰어내려 바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그리고는 평소와는 달리 점원의 얼굴은 본체만체하고 곧장 진열대를 살폈다.
“뭘 사가야 하지?”
재영은 정작 늘어진 상품들 앞에서 망설였다. 마트가 아니라 편의점이라 집들이용으로 뭔가를 사가기에는 애매했던 것이다.
고민하던 재영은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음료수 냉장고로 향했다. 바로 옆에서 알록달록한 맥주 캔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술을 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형이 술을 즐기는지도 모르겠고.’
재영은 입맛을 다시며 맥주 캔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처음 생각대로 여러 종류의 음료수를 바구니에 담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헌은 재영의 손에 들린 비닐을 무관심한 눈으로 힐끗 보기만 했다.
곧 도착한 사헌의 집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신식 오피스텔이었다.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바로 보이는 문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현관 앞에 슬리퍼가 딱 두 켤레 놓여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를 위해 준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잊고 있던 비닐 소리가 들렸다.
“형, 여기요.”
사헌이 제 앞에 내밀어진 재영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별거 아닌데, 진짜 별거 아니에요. 편의점에서는 살 게 없어서……. 그래도 형 집에 처음으로 오는 거니까.”
사헌이 바로 받지 않자 재영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갈 때도 항상 하는 일인데 이상하게 민망했다. 받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뚫어져라 보고만 있는 사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게 아닌가?’
불안이 커져가는 참에 마침내 사헌이 몸을 움직였다.
“그래, 잘 마실게.”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헌이 보인 최고의 반응에 가슴이 벅찼다. 재영은 말갛게 웃었다.
“들어와.”
“저 손부터 씻을게요.”
그러자 사헌이 턱 끝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뒤를 슬쩍 돌아보자 그는 재영이 사 온 음료수를 봉지에서 하나하나 꺼내서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재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재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이딩이었다. 대체 왜 계약을 안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 들 만큼 열심이다.
“수능 잘 봤냐고 안 물어보세요?”
사헌의 품에서 편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재영이 문득 떠올라 입을 열었다.
“네 인생인데 네가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사헌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어찌 보면 냉정하게도 들릴 법한 말이다.
“찹쌀떡까지 들고 와서 응원해 주셨으니까 그 정도 지분은 있으시잖아요.”
재영은 괜히 서운함이 들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표정이 궁금했는지 사헌이 그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 내가 너에 대한 지분을 갖고 있단 말이지?”
사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듣더라도 알 정도로 기분 좋은 음성이었다. 재영은 이채가 감도는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큰 실수를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시험장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시선을 피하고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였다. 재영은 속으로 스스로의 말주변을 탓했다.
“지하철에서 누구를 만날 줄 알고. 비비적거리다가 네가 가이드인 거 알고 빨아 먹으면 어쩔 거야, 응?”
“저 연습 많이 했잖아요. 이제 주도권 쥘 수 있어요.”
재영은 주먹까지 불끈 쥐면서 의지를 보였다. 사헌이 재영을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리고 곧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기운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재영은 사헌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뭘 할 수 있다고?”
사헌이 이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게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잡아당기는 게 어디 있어요.”
재영은 억울하고, 또 서러워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사헌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에스퍼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어. 굶주린 짐승에게 사람의 말이 통할 것 같아?”
재영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만큼 에스퍼에 대해 경고하는 사헌의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그놈들은 널 억누르고 전부 훔쳐 가려 할 거야. 네가 아파하든, 숨이 넘어가든 상관없을 거라고.”
이를 악문 것처럼 강하게 내뱉던 사헌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내가 널 지키는 거야.”
사헌이 손끝으로 재영의 손가락 사이를 은근하게 문질렀다. 묘한 열기가 피어나 손바닥까지 간질였다. 하얀 피부 위로 붉은 기가 떠올랐다.
“근데 형이 자꾸 절 쫓아다니면 비밀이 안 되잖아요.”
재영은 기어들어 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 냈다. 사헌이 학교에 나타날 때마다 재영의 학교 앞은 그를 보러온 팬들로 북적였다. 거기에 길을 가던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모여들었다가 난리가 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헌이 연예인들처럼 제 모습을 감추려는 사소한 노력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누군가에게 목격된 순간 그곳을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시도도 없었다. 별거 없는 고등학교에 자꾸 목격설이 뜨는 바람에 사헌의 팬을 중심으로 다양한 추측성 루머들이 만들어졌다.
“벌써 너를 알아채고 주변을 서성이는 놈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계속 모습을 드러내서 내가 먼저 찜한 거라고 알려 줘야지.”
“그런 스토커는 형 하나뿐이라니까요.”
“스토커?”
사헌이 짧은 웃음 끝에 되물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영은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실수라는 거짓말은 내뱉고 싶지 않았다. 대신 사헌을 달래기 위해 그의 품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은근슬쩍 기어오르지.”
사헌이 움켜쥐기라도 할 것처럼 재영의 목덜미를 쓸었다. 이번에는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뽀뽀할까요?”
슬그머니 고개를 든 재영은 사헌을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사헌이 A급 이상의 던전에 출동할 때만 해 주는 대출혈 서비스였다.
“이제 아주 갖고 노네.”
재미있다는 듯 사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영은 그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사헌이 눈을 내려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계약할 때까지는 계속 따라다닐 줄 알아.”
왠지 아까보다 더 집착적으로 변한 것 같은 말에 재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냥 도장 한 번 찍어 줘 버릴까.
그런 생각들이 간헐적으로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