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성한 자식들이 독립해 나가고, 부부와 막내만 사는 집이 모처럼 복작거렸다. 재영은 마주 앉은 사헌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움찔거렸다.
해운은 어디로 튀었는지 저쪽 식구 셋, 이쪽 식구 셋. 짝 지은 것처럼 마주 앉은 그림이 참 그랬다. 무엇보다 바빠서 제 집에도 잘 안 간다는 사헌이 왜 냉큼 와 저를 노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드드득-
그때 식탁 모서리에 뒤집어 놓은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재영은 반가운 마음에 스마트폰을 덥석 들었다. 아침부터 부재중 수십 건을 남겨놓은 번호라 성가셨는데, 지금은 산소 호흡기처럼 고마웠다.
“김재영! 식사 자리에서는 핸드폰 만지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곧바로 돌아보는 엄마의 눈빛이 살벌했다. 양가 부모님이 서로 안부를 묻느라 저는 안중에도 없을 줄 알고 방심하던 차였다.
“아니, 자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스팸 처리하려고 그랬어요.”
움찔한 재영은 전화를 핑계로 자리를 뜨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빠르게 스팸 처리를 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우리 해운이도 밥상머리에서 카톡하느라 정신이 없어. 손가락이 아프지도 않은가 봐.”
재영을 예뻐하는 도화가 제 아들 욕을 하면서까지 그의 편을 들었다. 재영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도화를 바라봤다.
“그런데 언니는 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갖고 뭘 이렇게까지 해.”
도화가 일부러 더 유난스럽게 말하며 숙희의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재영은 자리만 아니었으면 고마운 도화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 당연한 게 어디 쉽니?”
도화의 의도는 확실히 먹혔다. 숙희는 오랜만에 보는 사헌이 키도 훤칠하고, 턱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우며 코도 오뚝하니 산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며 쓸데없이 세세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정말 고맙다, 사헌아. 힘쓰고 와서 배고프지? 어서 먹어.”
“그래. 우리 자기가 너 먹인다고 오랜만에 솜씨 좀 부렸다.”
마침내 끝난 칭찬 행렬에 재영의 아빠, 창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차리느라 평소의 저녁 시간을 훌쩍 넘어선 탓에 많이 굶주린 것 같았다.
“네, 잘 먹겠습니다.”
마침내 식사가 시작됐다. 재영은 괜히 사헌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숙인 채 가까이 있는 음식만 집어 먹었다. 그러다가 입을 오물거리는 걸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맛이 이상해?”
숙희가 그럴 리 없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재영이 먹은 시금치 나물을 집어 우물거렸다.
“아니이. 너무 맛있어서요.”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물을 씹던 숙희가 어이없다는 듯 재영을 노려봤다.
“우리 엄마 음식 솜씨가 그새 이렇게 좋아졌나? 하고 감탄하는 중이었지.”
“얘는. 한 번씩 이렇게 실없이 군다니까.”
아들의 칭찬에 민망해진 숙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내뱉었다. 부끄럽기는 해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재영이는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해? 얼굴도 우리 집 사내놈들하고 다르게 곱고……, 아, 남자애한테 이런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인가?”
부럽다는 듯 재영의 칭찬을 늘어놓던 도화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저는 예쁘게 봐주시는 거 좋아요. 앞으로도 예뻐해 주세요.”
그에 재영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쁘게 봐주시면 저에겐 득이지 실이 될 일은 없었다.
“언니는 어떻게 이런 아들 낳았어요?”
“내가 뭐한 게 있나. 예쁘게 봐주니까 예쁜 거고, 그것도 다 지 복이지.”
자식 칭찬에 내심 뿌듯한지 숙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엄마가 기분이 좋다는데 재영이 좋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웃으며 고개를 바로 하다가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사헌의 입꼬리가 위로 비죽 올라가 있던 것이다. 마치 소동물의 재롱에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듯한 눈빛이었다. 재영은 갑자기 등골을 훑는 소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재영이가 딸이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우리 사헌이랑 딱 네 살 차이니까.”
그때 도화의 입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라서 다행이다.’
재영은 겨우 지옥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안도했다.
“요새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 지들이 좋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
형제의 아버지, 석우는 쓸데없이 열려 있었다. 재영은 불안한 눈으로 사헌을 힐끔거렸다. 그라고 사내놈과 엮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으니까. 사실 그게 뭐든 진사헌이 좋아하는 게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찾아보면 크리처 정도일까.’
크리처와 사헌이 함께 있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재영은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오묘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사헌과 눈이 마주쳤다.
“뭐, 딱히 반대는 안 하지.”
믿었던 아빠 창현마저 두 사람의 연애를 부추기는 듯한 말을 하자 재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게 다 에스퍼와 가이드 탓이다. 재영은 평소에는 감사하던 능력자들에게 적개심을 불태웠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스킨십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로 보여지면서 동성 커플에 대한 나쁜 인식도 빠르게 사그라졌다.
“이 녀석도 제 동생이랑은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글쎄…….”
도화가 말을 멈춰 기대감을 심었다. 재영은 당장 식사를 그만두고 제 방으로 올라가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게 뭐든 저에게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닐 게 뻔했다.
“뭔데? 무슨 일이 있었어?”
“물속에서 재영이를 이렇게, 이렇게 안아서 나왔더라는 거야.”
“어머, 어머!”
설렘 가득한 엄마들의 목소리에 재영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힘 빠져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나와 쪽을 당하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을 걸 그랬다.
재영의 마음이야 어떻든 네 사람의 목소리만 오고 가는 식사 자리는 큰 문제 없이 이어졌다.
“애도 아니고, 뭐 해요.”
그런데 목소리를 죽인 숙희가 창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창현이 허리를 숙이고 심각한 얼굴로 식탁 아래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니, 뭐가 있는 것 같아서요. 자꾸 내 다리를 툭툭 치더라니까.”
“김재영. 너…….”
창현의 말을 들은 숙희가 묵묵히 밥을 먹던 재영을 노려봤다. 의심 가득한 눈빛에 재영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저 아니에요.”
사실 재영은 어릴 적부터 종종 길가에 떠도는 동물들을 데려오곤 했다. 하지만 털 알레르기가 있는 창현 때문에 집에서는 키울 수 없었고, 그때마다 숙희가 수소문해 좋은 입양처를 찾아주는 수고를 들여야만 했다.
“이제 막 데려오지 않는다니까요. 보세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창현에 이어 숙희까지 무언가 제 다리를 스치는 걸 느꼈다고 주장했다.
“너 진짜 아니야?”
“진짜, 진짜로 아니에요.”
계속되는 의심에 재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빠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그는 차라리 그것의 정체가 동물이었으면 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이거.”
“진짜 귀신이라도 나온 거 아니야?”
어른들이 웃음과 짜증이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재영은 하얗게 질려 꼼짝도 못했다.
‘귀신일 리가 없어. 귀신은 안 돼.’
사람 무서운 줄은 잘 모르는 재영은 사실, 귀신이라면 아무리 귀여운 동물이어도 무서워하는 겁쟁이였다.
재영은 대화를 나누느라 식사를 끝내지 못한 어른들을 기다리느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때 무언가 툭, 재영의 발끝을 건드렸다.
재영은 숨도 못 쉴 만큼 놀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고 일러 주려는 듯 다시 한번 다리를 툭툭 쳤다.
‘진짜 있어.’
재영의 숨이 울 것처럼 거칠어졌다.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다리를 건드리는 존재는 더 과감해졌다.
처음에는 새가 쪼는 것처럼 짧고 가볍게 툭툭 건드리더니 점점 더 넓은 면적으로 재영의 다리를 훑어 내렸다.
그것은 재영의 안쪽 무릎을 슬슬 문질렀다. 이번에는 바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재영은 바들바들 떨면서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살짝만 틀면 식탁 아래, 제 무릎이 보일 것 같았다. 영화에서 이럴 때 왜 꼭 확인해서 사달을 만드느냐고 생각했는데, 직접 당하고 보니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재영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직접 보는 건 두려웠다. 재영은 우선 손을 뻗어 그것을 탁 붙잡았다. 귀신이라기에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안심한 재영이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귀신을 본 것보다 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돼.”
홀린 듯 말을 뱉은 재영은 다시 식탁 아래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기를 반복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헌이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범인은 작은 동물이 아니었고, 귀신도 물론 아니었다. 사헌의 발이었다.
‘형이 왜……?’
차라리 귀신인 게 나을 뻔했다. 재영은 차마 소리 내어 묻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사헌을 쳐다봤다.
* * *
식사가 끝나자 부모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2차에 갈 준비를 했다.
“재영이, 진짜 같이 안 가도 되겠어?”
도화가 걱정되고 아쉬운 눈으로 재영에게 물었다. 함께 있는 아들 사헌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시선도 주지 않았다.
“네. 네 분이서 오붓한 데이트 하세요.”
재영은 사헌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웃어 보였다. 데이트라는 말에 부끄러워하던 엄마들은 즐거운 목소리로 대화하며 멀어졌다.
재영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아직도 우두커니 서 있는 사헌이 보였다.
“그, 그럼 형도 조심히 가세요.”
재영은 현관문 밖에 사헌을 두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쾅!
소음으로 신고가 들어와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재영은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확인하고 제 방으로 뛰다시피 갔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혀, 형이 어, 어떻게 ……!”
현관문 밖에 두고 온 사헌이 재영의 방 한가운데 서 있던 것이다. 기겁하는 재영을 본 사헌이 심기가 상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아니, 무, 문으로 들어오셔야…….”
재영은 무의식적으로 사헌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방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사헌이 식사 중에 왜 발로 제 다리를 더듬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재영은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사헌은 그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앉아.”
사헌이 툭 내뱉은 말에 재영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툭툭 두드린 것이 자신의 허벅지였기 때문이다.
재영이 꼼짝도 하지 않자 그를 바라보는 사헌의 눈빛이 점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건 어디가 잘못돼서지?”
사헌이 더 기다리기 싫었는지 재영의 팔을 억세게 쥐고 당겼다. 재영은 정확히 사헌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갑자기 당겨진 터라 쓰러질 것 같은 마음에 바닥을 짚으려 팔을 뻗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손이 놓인 곳은 사헌의 가슴팍이었다.
“일단 가이딩부터 하고 제대로 매칭 테스트하러 가자.”
“네?”
재영은 사헌이 못마땅해하는 되묻기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가이딩해 본 적 있나?”
“네?”
또 물음표를 내뱉자 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헌에게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아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는 제가 그 말을 잘못 이해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 아니요. 저는 일반인…….”
재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사헌이 모를 수도 있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헌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질 검사부터 해야겠군.”
사헌은 재영이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일단 손.”
할 말은 다 끝냈다고 생각했는지 사헌이 재영에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사헌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계곡 물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헌이 재영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재영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뭐, 뭐 하시는…….”
어린애나 반려동물에게나 할 법한 애정 표현에 재영은 질겁했다. 귀여움을 받는 것에 익숙한 재영이지만, 상대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진사헌이다. 재영은 충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봤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겨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헌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뽀뽀를 이어갔다.
“그만, 그만이요.”
재영은 말로 그치지 않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얼굴을 뒤로 뺐다. 목표를 빼앗긴 사헌의 입술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내가 괜히 얌전히 앉아 밥을 먹은 줄 알아?”
대가가 재영에게 뽀뽀하는 일이었다는 거다. 재영은 더 이해할 수 없어졌다. 사헌이 왜 성가신 일에 동참하면서까지 제게 뽀뽀를 하려고 했을까.
“왜, 진짜 왜 그러신 건데요?”
혼란스러워하는 재영을 가만히 보던 사헌이 갑자기 스마트폰을 빼 들고 어딘가에 전화했다.
“나야. 당장 내 김재영네로 와.”
사헌은 재영에게 그랬듯 제 용건만 뱉고 바로 끊었다.
‘누군데 우리 집도 알아?’
저도 모르는 새 제 정보가 줄줄 새고 있다는 생각에 재영이 덜덜 떨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그런 재영을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사헌이 입을 뗐다.
“네?”
“한 번만 더 전화 씹으면 묶어서 끌고 다닐 줄 알아.”
“네?”
살벌한 경고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헌이 제게 왜 전화를 했는지는 차치하고, 그가 화를 낼 만큼 그에게 연락이 온 적도…….
기억을 더듬던 재영은 짧은 탄사를 뱉으며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혹시 이게 형 번호예요?”
사헌이 당당히 스팸 목록에 자리하고 있는 제 번호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차단을 해?”
온종일 지겹게 오던 전화가 사헌의 전화였다니. 재영은 궁금증이 풀려 속이 시원해져 웃었다가 싸늘한 목소리에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모르는 번호니까…….”
“당장 저장해.”
한결 누그러진 사헌의 목소리에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아무 때나 화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던전 밖에서 능력 쓰는 거 제한되는 거 몰라?”
‘진사헌 형’이라는 정감 없는 이름으로 저장하던 재영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사헌의 품에 안겨 들고 말았다. 아까부터 더 붙지 못해 안달하던 사헌은 기꺼운 표정으로 재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내가 오는 걸 아는 줄 알았어요.”
하얗게 질린 재영을 발견한 재효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 귀신도 아니고, 사헌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헌의 가슴에 볼을 비볐다.
스킨십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재효가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재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헌이 앉아 있던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가 훅 높아지는 바람에 놀란 재영은 사헌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사헌이 단단한 팔로 재영의 엉덩이 아래를 받쳤다.
“케이 연구소로 가.”
“거긴 또 왜?”
재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 재효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TV에서 본 모습이나 아까 잠시나마 봤던 걸 떠올려 보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협회는 번거롭고, 시끄러우니까.”
아무래도 케이의 연구소는 협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훨씬 쉽고,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장소인 모양이다. 바른 이미지의 재효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불법일 것이 뻔하고.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재영은 반쯤 확신하며 물었다. 가이딩, 매칭 테스트, 체질 검사. 집착하듯 제게 연락하던 사헌.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사헌이 줄 수 있는 정보를 이미 다 준 셈이었다.
“제가 가이드라고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게 아니야.”
둘의 대화를 들은 재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사헌이 왜 갑자기 멀쩡한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괴롭혔는지 이해했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움직여. 한시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명령 같은 말에 두 사람 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순간이동 능력을 처음 당해 본 재영은 감탄했다. 갑자기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어 눈을 한 번 깜빡했을 뿐인데, 공간이 달라져 있었다.
둘러본 공간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게 연구소라기보다는 마약 공장처럼 음침하고 허름하다. 왜 하필 마약 공장이냐면 긴 책상이 여러 개 늘어서 있고, 그 위에 액체가 담긴 비커들이 끓고 있는 모습이 영화에서 보던 것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 이상한 곳은 아니죠?”
눈으로만 둘러보는 것을 끝낸 재영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목이 탔다. 그의 목에서 꼴딱 침 넘어가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렸다.
“글쎄.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사헌의 대꾸에 재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헌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재효마저 말없이 웃기만 하는 게 재영을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 그냥 돌…….”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헌의 가슴팍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헌은 그의 공포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지만 재영의 정신력이 흔들린 덕에 재영에게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그를 흠뻑 적셨다. 사헌은 기꺼운 마음으로, 청량한 기운을 모조리 싹싹 긁어 제 안으로 받아들였다.
“뭐야, 그 원숭이는. 새로운 종류의 크리처라도 발견된 건가?”
그때 낯선 목소리가 잔뜩 긴장한 재영의 귀를 찔렀다. 화들짝 놀란 재영은 다시 사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헌이 재영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옷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데일 것처럼 뜨거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게 꼭 안심하라고 달래 주는 느낌이었다.
‘그래. S급 에스퍼가 같이 있잖아.’
재영은 사헌의 어깨에 턱을 얹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낯선 사람들 틈에 있으니 차라리 무서운 사헌에게 기대게 됐다. 그는 사헌이 그저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는 걸 몰랐다.
“그게 아니라 새로 나온 보조배터리?”
그 기이한 꼴을 보던 남자가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헛소리 그만해.”
사헌이 날카롭게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그와 다르게 제게는 다정한 손길에 안정을 되찾은 재영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한눈에도 피곤해 보이는 남자가 통이 큰 반바지와 늘어진 티를 입고 있었다. 남자의 행색 역시 이 연구소의 모습처럼 평범한 연구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까칠하긴. 왜 왔는데?”
재영의 눈에는 사헌 보다 처음 보는 남자가 더 까칠하고 예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 볼 일은 이 녀석.”
“안녕하세요. 사헌이 형 친구 동생, 아니, 동생 친구 김재영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두 다리로 똑바로 선 재영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였다. 남자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졸린 눈으로 재영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에스퍼야? 실험체로 기부할 거면 거절은 안 할 테지만.”
남자가 물건값을 재는 것처럼 차가운 눈으로 재영을 훑었다. 재효가 남자의 언행에 인상을 찌푸리며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면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재영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실 재영은 역시 사헌의 친구답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소개 못 하는 거니까 이해해.”
하지만 상냥한 남자인 재효는 그냥 넘기지 못했다. 데려온 사헌도, 남자도 하지 않은 소개를 대신했다.
재영은 재효를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사회성 떨어지는 파트너와 그의 친구 덕분에 재효만 이쪽저쪽으로 고생이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제 좌우명이에요.”
재영은 안심하라는 듯 재효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재효가 더 없을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촉촉한 눈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이 녀석 체질 검사하고, 매칭 테스트.”
사헌이 재효와 속닥거리고 있는 재영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매칭 테스트? 누구하고?”
남자가 사헌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당연히 나지.”
사헌은 재영의 상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보조배터리가 아니라 후보였군.”
사헌의 반응에 남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재영은 일단 자신은 배터리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제 인사조차 무시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검사 결과 나오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텐데 기다리게?”
남자가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놈들을 빨리 제 공간에서 치우고 싶은 것 같았다.
“바로 매칭 테스트 진행할 거야.”
사헌의 말에 남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확신하고 있군. 그런데 왜 검사까지 한다는 거야?”
남자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 투덜댔다. 그리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남자가 손등으로 마구 비비는 바람에 흰자위가 빨갛게 충혈됐다. 그 탓에 완전히 피곤해 보여서 괜히 재영이 미안해졌다.
“네가 가이드와 일반인을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남자는 성가신 투를 감추지 않았다. 재영은 작게 감탄하며 그를 바라봤다. 싫은 사람이지만, 사헌을 상대로 멋대로 군다는 게 조금은 대단하게 느껴졌다.
* * *
S급 정도 되면 테스트가 없어도 가이드를 알아보는 게 가능한가. 그러면 그냥 S급 데려다 두고 가이드인지 아닌지 골라내라고 하는 게 검사 결과보다 빠르지 않을까.
재영은 멍하니 서서 그런 실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관심 있어야 할 제 일이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가이드라니…….’
반쯤 사헌의 말을 믿게 된 재영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본인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니까.”
마침 사헌이 재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에게 대답했다. 여상스러운 말투였지만, 재영은 괜히 찔려서 움찔했다.
“몇 살이지?”
남자가 사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재영의 얼굴을 훑었다. 재영은 허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부정적인 감정에는 예민한 터라 제 존재를 껄끄러워하는 남자가 신경 쓰였다.
“해 넘어가면 스물.”
“그럼 못 믿을 만도 하네.”
사헌의 대답을 들은 남자가 재영의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국민은 만 16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체질 검사를 받아야 했다. 통계적으로 그 이후에는 발현할 확률이 거의 없었다. 재영과 친구들은 그 검사에서 에스퍼를 뜻하는 E형이나 가이드의 G가 아닌 C형 일반인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직접 확인시켜 주려고 왔잖아.”
“진사헌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거 보면 쓸 만한가 보네?”
남자가 의외라는 듯 재영을 보며 눈을 번뜩였다. 뼈와 살까지 전부 해체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라 재영은 정수리가 오싹했다.
이 정도면 남자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사헌이 굳어 있는 재영의 팔을 끌었다. 그대로 몇 걸음 걸어가 커다란 의자 앞에 세웠다.
“앉아.”
재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헌을 올려다봤다. 앉으라는 말을 귀가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엉덩이는 이미 의자에 붙어 있었다. 사헌이 잠깐도 기다리기 싫은 사람처럼 어깨를 눌러온 탓이었다.
사헌은 그 와중에도 등까지 똑바로 붙이고 앉은 재영을 확인하고 저도 옆의 의자에 앉았다.
“손.”
재영은 친절하지 않은 말에 알아서 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게 답답했는지 남자가 조금 거칠게 재영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재영의 눈가가 움찔했다. 손가락 끝이 따끔했다.
시선을 돌리자 새하얀 손가락 끝에 피가 몽글몽글하게 맺혀 있는 게 보였다. 목적을 달성한 남자가 던지듯 재영의 손을 놓았다.
“보통 따끔합니다, 하지 않아요?”
재영은 다른 손으로 다친 손가락을 쥐고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한다고 안 아픈 건 아닌데.”
남자는 차갑게 내뱉고는 재영의 피를 담은 유리 시험관의 뚜껑을 닫고 흔들었다.
“이제 양쪽 팔걸이에 팔 올리고.”
남자의 명령 같은 말에 재영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닌데 남자의 예의 없는 태도를 감내해야 하나 싶은 회의감이 일었다.
“조금 성가셔지기는 하겠지만, 원하면 말만 해.”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재영은 흠칫했다. 사헌이 못내 무감한 얼굴을 하고는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남자를 싫어하는 제 속을 읽어 낸 것 같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남자를 보는 사헌의 눈은 싸늘했다. 허물없는 모습에 친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다시는 볼 일 없을 테니까 조금 참아 볼게요.”
남자가 싫기는 해도 사헌에게 무슨 짓을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다. 재영은 화를 참으려는 것처럼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사헌이 픽 웃으며 머리 위를 툭툭 쓰다듬었다.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길이었지만, 어쩐지 잘 참았다고 칭찬하는 것 같아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주변을 휙휙 돌아본 재영은 이내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어느 쪽 팔걸이가 내 것인가.’
영화관 의자처럼 나란히 놓인 의자는 팔걸이도 양 끝에 하나씩, 그리고 가운데 하나였다. 고민하는 재영과 달리 사헌이 망설임 없이 가운데 팔걸이에 팔을 올렸다.
재영은 편하게 바깥쪽 팔걸이나 쓰자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왼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사헌이 재영의 손에 깍지를 껴 잡은 것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
편히 있으라는 말이 배려가 아니라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재영은 순순히 일으키던 상체를 편히 늘어뜨렸다.
곧 남자가 다가와 수없이 많은 전선이 연결된 헬멧을 재영의 머리 위에 씌웠다.
‘이거 미용실에서 본 것 같은데…….’
재영은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눈만 들어 머리 위를 힐끔거렸다. 제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상상이 됐다. 앞에 거울이 없는 것이 다행이다.
이게 제대로 된 방법이 맞기는 한지 재효가 버벅거림 없이 사헌의 머리에 똑같은 헬멧을 씌웠다. 돌아본 사헌의 모습이 저와 달리 SF 영화 속 배우 같아서 재영은 우울해졌다.
“이거 괜찮은 거예요?”
재영이 겁먹은 표정으로 사헌에게 물었다. 그와 맞대고 있는 손바닥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사헌의 대꾸에 재영의 불안은 한결 깊어졌다. 게다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 피시 화면을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이상 있어요?”
재영은 이번에는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무슨 건강 검진 같은 건 줄 알아?”
남자가 그런 재영에게 신경질을 냈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단단히 밉보인 것 같다. 재영은 저도 사헌에게 안겨 끌려온 터라 억울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또 볼 일 없는 사람이니까.
“대체 왜 말을 못 해?”
재효가 답답하다는 듯 남자의 옆으로 가서 들여다봤다. 언제나 다정하고 세심한 재효였기에 재영은 이번에는 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도 말이 없었다.
재영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저……안재효 에스퍼님?”
그리고 자기 말에 제대로 대답해 줄 것 같은 유일한 한 사람을 조심스레 불렀다. 재효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들었다.
“97.6 퍼센트…….”
재효가 사헌과 재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높은 수치를 읊었다. 듣기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숫자였다. 그게 매칭률을 의미한다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 없다.
“혹시 최고가 10000 퍼센트라거나……?”
재영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 떨떠름한 반응에 수치를 듣자마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헌의 입가가 마뜩찮게 움찔거렸다.
“정말 더 볼 것도 없었네.”
“애초에 저 녀석이 붙들고 있는 것만 봐도 정확하지.”
재효와 남자는 태블릿 PC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주고받았다.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재영은 갑자기 뒤바뀐 자신의 체질을 실감할 수 없었다. 사헌이 멍하니 앉아 있는 재영의 머리에서 헬멧을 벗겼다.
“일어나.”
재영은 고개를 들어 사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듯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헌이 독립할 때까지 십 년이 넘도록 같은 동네에서 가깝게 살아온 재영도 저렇게 진한 미소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절대로 놓아줄 리 없다.
그런 오싹한 예감이 들었다.
“등급은 아직 안 나왔어.”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 같은 사헌의 모습에 남자가 다급히 말을 붙였다.
“알아. 체질 검사 결과는 내 번호로 보내.”
사헌이 굳어 있는 재영의 팔을 잡고 재효에게 눈짓했다. 재영은 그에게 잡힌 채로 뒤를 힐끔거렸다. 불쾌한 사람과 더 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기는 하지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안재효.”
“어, 어.”
사헌의 채근에 급히 다가온 재효가 사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곧 재영의 눈앞이 어지럽게 어그러졌다.
* * *
에스퍼와 가이드는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정부 소속인 협회와 기업 소속인 길드, 그리고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 하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협회에 소속되어 있다. TV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레이드 영상도 전부 정부 측에서 제공하는 거였다.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사헌은 의외로 협회 소속 에스퍼였다. 가장 먼저 제의를 한 것이 협회고, 적당한 길드를 찾기 귀찮아서였을 거라는 게 동생인 해운의 추측이었다.
재영은 순간이동의 후유증을 털어 내기 위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재효가 능력으로 그들을 데려다 놓은 곳은 다시 재영의 방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닫힌 문 안쪽에 다시 둘만 남게 됐다.
“어……안재효 에스퍼는요?”
심리적 안정을 위해 그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방 안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앉아.”
들려오는 목소리로 사헌을 발견한 재영은 움찔했다. 그는 마치 제 방처럼 자연스럽게 재영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재영은 당장이라도 다가가려고 떼었던 발을 다시 붙였다. 아까 저 말대로 했다가 애처럼 안기고, 뽀뽀를 받았지 않은가.
이제는 사헌이 자신을 다리 위에 앉히는 둥 소름 끼치는 행동을 왜 하는지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동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이딩하려는 거 아니니까 앉아.”
역시 사헌에게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재영은 그의 말에 안도하며 의자에 앉았다. 부족한 게 없는 사헌이 저를 속여서까지 스킨십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재영이 의자에 앉자 사헌은 재영의 뒤에서 그를 안는 것처럼 섰다. 그리고 웬 A4용지를 재영의 눈앞에 내려놓고, 그의 손에 펜을 들려줬다.
재영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끔뻑였다. 종이에는 크고 굵은 글씨로 <페어 계약서>라고 쓰여 있었다.
“갑은 너, 내가 을.”
종이의 글자들이 재영의 눈에 제대로 읽히기도 전에 사헌이 내뱉었다. 그 말에 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사헌이 을이라니. 안 어울렸다.
“사인해.”
사헌이 재영의 손을 끌어다가 종이의 하단에 가져다 놨다.
“아, 네!”
사헌의 재촉에 재영은 그대로 상체를 숙이고 사인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종이에 박힌 펜촉에서 흘러나온 검은 잉크가 옆으로 조금씩 번졌다.
“네?”
사인 직전까지 갔던 재영은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사헌을 돌아봤다. 사헌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자 사인란이 있었다. 그걸 발견한 순간, 재영은 들고 있던 펜을 내던졌다. 하마터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곳에 묶일 뻔했다.
재영의 돌발 행동에도 사헌은 당황하지 않았다. 연필꽂이에서 다른 펜을 빼서 그의 손에 쥐여 줬을 뿐이다.
재영은 아까와는 달리 차분한 태도로 펜을 내려놓았다. 사헌이 뭐 하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저 사인 안 할 거예요.”
재영은 최대한 담담하게 내뱉었다. 그러면서 실수로라도 사헌과 눈이 마주칠까 봐 책상 모서리를 노려봤다.
“뭐?”
낮게 깔린 목소리에 재영은 작게 몸을 떨었다. 사헌이 별다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손이 닿아 있는 목덜미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에스퍼랑 다르게 가이드는 굳이 활동하지 않아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사헌이 흠칫 놀란 눈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일반인으로 살아온 재영이 가이드에 대해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재영은 수업 시간에 가이드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았던 자신이 대견했다.
잠시 침묵하던 사헌이 재영에게서 떨어져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동시에 바퀴 달린 의자의 등받이를 밀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재영의 몸이 빙글 돌아서 사헌과 마주 보게 됐다.
사헌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재영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마침내 체념한 재영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할게.”
사헌이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이어지는 말은 재영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정도라 오히려 긴장한 어깨에 힘이 빠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영조차 97.6이 대단히 높은 매칭률이라는 건 알았다. 사헌이 안달이 날 만도 하다.
“저 아니어도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요.”
하지만 재영이 그려온 미래에 누군가의 가이드가 되는 건 없었다. 주변에 가이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이드가 된 제 모습을 그리려고 해도 온통 새까맸다.
확고한 거절 의사를 보이는 재영을 사헌이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나는 가이드가 없어.”
“네?”
“아니, 거의 6년째라고 해야겠지.”
재영의 입이 충격으로 크게 벌어졌다. 6년이면 사헌이 각성한 것으로 알려진 18살부터다. 그는 최연소, 최고 등급으로 발현한 후, 훈련을 받긴 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현장에 내보내졌다. S급이기에 당연히 더 높은 던전으로 출동했고, 그때마다 큰 힘을 소모했다.
‘그런데 전담 가이드가 없다고?’
일반인은 능력자들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들이 가져다준 평화에 안주할 뿐이다. 재영도 평범한 일반인이라 에스퍼와 가이드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에스퍼에게는 가이드가 있어야 하고, 가이드가 없으면 온전한 에스퍼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마음에 떠오른 의문이 재영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헌이 제게 주어진 능력을 펑펑 쓴다는 건 중계되는 레이드 영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약물. 또는 기계.”
사헌이 싫은 얼굴을 하고 내뱉었다. 그래도 영 방법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람한테는 왜, 왜 가이딩을 안 받았어요?”
재영은 거의 따지듯 물었다. 한국에 있는 가이드 대부분은 협회에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중 사헌과 맞는 가이드가 하나도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무나 내 속을 들여다보게 두기는 싫으니까.”
재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가이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이딩하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자 사헌이 재영을 귀엽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픽 웃었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의사 같은 존재야.”
“그럼 가이딩이 내시경 같은 건가?”
재영은 제가 말하고도 긴가민가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사헌이 그게 맞다고 주억거리자 막힌 속이 뚫린 듯 시원해졌다.
이내 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드가 아니어도 방법이 있다. 그걸로도 버티기 힘들어지면 다른 가이드에게 받으면 그만이다.
“저는 가이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재영은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 결단을 미루지 않았다.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는 게 단지 사헌의 기호 때문이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이 원치 않은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사헌이 단호하게 내뱉는 재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재영은 잔뜩 긴장해서 눈치를 살폈다.
사헌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재영의 눈은 끈질기게 사헌을 쫓았다. 그를 시야에서 놓치면 제게 큰 위험이 닥칠 것만 같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
사헌이 뒤로 물러나면서 재영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도 사라졌다. 재영은 얼이 나간 눈빛으로 사헌의 등을 바라봤다.
겁을 줘서라도 계약을 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재영은 머릿속에 박힌 사헌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배려는 있는 것 같다고.
사헌이 빠져나간 창문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재영은 터덜터덜 창문가로 다가갔다.
“문으로 다니시라니까…….”
재영은 흐릿한 가로등 아래 사헌의 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인데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 * *
마침 시험이 끝나 일찍 끝난 날이었다. 재영은 일찍이 독립한 큰형의 연락을 받았다. 집에 당장 필요한 서류를 두고 왔으니 가져다주라는 거였다.
회사 근처로 자립한 형 재현은 지난주 엄마의 생신은 잊지 않았는지 집에 와 식사를 하고 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더니 일거리를 들고 왔다가 깜빡 두고 간 모양이다.
“수고하십니다! 영업팀 김재현 팀장님 만나러 왔는데요.”
재영은 리셉션을 지키는 경비원 아저씨께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고 용건을 말했다. 형의 직책을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우쭐해졌다. 그 나이에 그만한 직책에 오른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김 팀장님 동생이구만. 멀리서 봐도 닮았네.”
재영의 얼굴을 본 경비원이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형인 재현을 그냥 회사 직원으로 여기는 게 아닌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네, 김재영이라고 합니다. 저희 형 잘 부탁드려요.”
“내가 겨우 경비나 하고 있는데 뭐 부탁할 게 있나.”
경비원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재영의 말에 기분은 썩 좋아지신 것 같았다.
“저기 끝에 엘리베이터 타고 5층 휴게소에서 기다리면 돼요.”
경비원은 자리를 떠날 수는 없는지 그 자리에서 서서 몸을 쭉 빼고 한층 상냥해진 목소리로 재영을 안내했다. 재영이 경비원이 일러 준 엘리베이터로 갔을 때는 문이 막 닫히려고 하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재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재영은 뛰다시피 가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팔을 뻗었다. 평소라면 천천히 걸어가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겠지만, 다급하다는 형의 말이 걸렸다. 다행히도 문이 닫히려나 싶더니 다시 훅 열렸다.
“헉, 헉, 감사……하악, 합니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열림 버튼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재영은 고마움을 담아 생글생글 웃었다. 버튼에서 손을 뗀 남자가 살피듯 재영의 얼굴을 훑어봤다. 무언가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재영은 손등으로 땀을 훔치며 엘리베이터 벽을 힐끗거렸다. 남자가 여전히 저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는 키도 크고, 근육 돼지라고 부를 만큼 몸집도 커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재영은 괜히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올라가는 숫자만 쳐다봤다.
“학생 같은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런데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재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그리고 빠르게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돼지 꼬리 같은 줄이 달린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있는 걸 봐서는 그냥 회사원이 아니라 보안 요원 같았다. 아무래도 회사의 보안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보니 그의 얼굴이 낯설어서 그렇게 들여다본 모양이다. 재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저 심부름 왔어요.”
재영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들고 있는 봉투를 들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재영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까의 이상한 기분이 지워지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재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남자를 등지고 섰다. 어쩐지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띵.
숨이 막히다고 생각할 즈음, 엘리베이터가 미끄러지듯 열렸다. 바로 앞이 휴게실인지 형이 나와 있다가 재영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형! 여기.”
재영은 바쁘다는 형에게 서류부터 내밀었다.
“고생했다. 맛있는 거 사 먹어.”
재현은 두둑한 돈 봉투로 재영의 수고를 치하했다. 재영은 복잡한 마음에 손에 쥔 봉투를 주물럭거렸다. 안 그래도 사고 싶은 무기 스킨이 있던 터라 용돈이 반갑기는 한데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너무 많은데. 이거 주고 형 일주일은 굶는 거 아니야?”
“네 형 잘 벌어.”
재현이 까불지 말라는 듯 말하며 돈 봉투를 빼앗아 재영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걸로 친구들이랑 기분 전환도 좀 하고.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귀여운 막내가 수험생이라는 걸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닌 재영은 찔려서 어색하게 웃었다.
“조심히 가!”
바쁘다는 말은 사실인지 재현은 엉덩이에 불붙은 것처럼 멀어졌다.
“나도 집에 가야지.”
혼자 남겨진 재영은 바로 엘리베이터에 타려다가 발을 멈췄다. 땀 때문에 얼굴이며 목이며 끈적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대로 지하철을 타면 불쾌한 냄새를 풍길 것이 분명했다.
“화장실 들렀다 가야겠다.”
재영은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찝찝함을 털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문을 열다가 안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꾸벅 허리를 굽혔다가 편 재영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아까 보안 요원분 맞죠?”
재영의 얼굴을 본 남자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재영은 그에게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살짝 옆으로 피했다.
그런데 남자가 손을 뻗어 재영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먼저 지나가셔도…….”
재영은 억센 힘에 화장실 안쪽으로 끌려갔다. 남자가 칸과 칸 사이의 벽에 재영을 밀어붙였다. 아까의 멍한 남자가 맞는지 굶주린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재영은 남자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남자의 몸이 어찌나 단단한지 밀려나기는커녕 흔들리지도 않았다.
“금방 끝낼 테니까 얌전히 있어.”
남자가 사납게 들끓는 목소리로 재영을 위협했다. 탐욕스러운 눈빛에 재영은 소름이 끼쳤다. 재영을 꼼짝도 못 하게 짓누른 남자가 그의 목덜미로 고개를 묻었다.
아니, 묻으려고 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의 인영이 재영의 앞에서 사라졌다.
“허억, 헉…….”
재영은 온몸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지자 둑이 터진 것처럼 숨이 터져 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내 거에 침을 발라.”
서늘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재영은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그의 눈동자에 사헌이 가득 들어찼다.
“형…….”
재영은 안도하는 눈빛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평소 무서워하던 사람이 제 편이라고 여겨지면 그만큼 듬직할 수가 없다. 어이없게도 재영은 지금 사헌이 ‘내 편’이라고 느껴졌다.
“이제 알겠지?”
사헌이 그런 재영을 보며 거 보란 듯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재영은 눈을 끔벅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헌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 보호자가 없는 가이드가 처할 수 있는 현실이야.”
사헌의 미소가 눈에 시리게 박혔다. 재영은 시선을 돌려 저를 덮치려던 남자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바닥에 찌그러지듯 붙어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 아무리 진사, 진사헌 에스퍼라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가로채기라고요!”
남자가 겁도 없이 씩씩대며 사헌에게 소리쳤다.
“가로채기? 김재영이 네 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사헌이 우습다는 듯 말하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몸을 비비고 있는 남자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다시 소리쳤다.
“등록된 가이드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먼저 발견했으니 차례를, 차례를 지키세요!”
남자는 재영이 무슨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칭했다. 덕분에 놀라서 굳어 있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갔다. 저 남자는 에스퍼다. 자신이 가이드라서, 가이드라는 걸 알아채서 가이딩을 하려고 했던 거다. 온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간 것 같았다.
“뺏어 보든가.”
사헌이 보란 듯이 재영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뺏기는커녕 제 몸 하나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남자는 짐승처럼 괴성만 질러 댔다.
“어떻게 해 줄까.”
사헌이 재영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속삭이듯 말했다. 흥미로 반짝이는 눈은 홀로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귓가에 내려앉은 사헌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재영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장이 간질거릴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재영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한 짓만큼만, 벌 받게 해 주세요.”
말을 내뱉자마자 사헌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영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야. 성추행 사건 관련해서 돌아 버린 형사 연락해 줘. 피해자 진술은 서면으로 할 거야. 네가 써.”
일방적인 명령조의 말에 재영은 사헌의 통화 상대에게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사헌의 떠넘기기를 몰래 응원했다.
금방 사람이 와서 현장을 정리했다. 재영은 누군가가 쥐여 준 음료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형은 어떻게 여기 있어요?”
사헌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재영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재영이 압박하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곧 얌전히 태블릿을 내밀었다. 하지만 표정은 영 좋지 못했는데 이후의 일이 성가셔질까 봐 지레 꺼리는 느낌이었다.
재영은 사헌을 수상하다는 듯 힐끔거리며 태블릿을 살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어딘가의 지도였다. 그중 어떤 건물에서 빨간 점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거 저예요?”
재영은 반쯤 확신을 갖고 물었다. 사헌이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이렇게 찾아왔잖아.”
재영이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자 사헌이 변명처럼 내뱉었다. 그조차도 당당해서 허탈감이 일었다.
“……어디에 있어요?”
재영의 목소리에는 의욕이 빠져 있었다. 사헌이 팔을 뻗어 재영이 메고 있는 가방을 뒤졌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언제, 어느 때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었다.
“거기에 심었다고요?”
사헌이 말없이 재영의 스마트폰 껍데기를 벗겼다. 몰랐는데 그 안쪽에 작은 위치 추적기가 들어 있었다.
“이건 언제 달았어요?”
“네 방에 갔을 때.”
“대체 어느 틈에…….”
내내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재영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초능력이 이런데 쓰라고 생긴 건 아닐 텐데. 어플로 깔려 있었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아날로그라 아무것도 몰랐다.
“어차피 알게 된 김에 확실히 하자.”
사헌이 마침 잘됐다는 듯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당장 계약하자고 안 할 테니까 이거 가지고 다녀.”
“이게 뭔데요?”
어차피 거절해 봐야 멋대로 할 사람이니까. 재영은 뭔지 알아나 두자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번에도 사헌은 대꾸 없이 재영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근육으로 들어찬 팔이 재영의 목을 감쌌다. 위협을 느낀 재영이 몸을 움츠렸다.
“호출기야. 위험할 때 세게 누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든 내가 갈 수 있어.”
사헌이 떨어지고 나서야 재영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심플한 반지가 달린 목걸이였다.
‘이거 달고 다니면 여자친구 안 생기는 거 아니야?’
재영은 찝찝한 눈으로 목걸이의 장식을 내려다봤다. 한창때의 청년답게 제일 먼저 드는 걱정이었다. 물론 목숨이 이성보다 중요했다.
“……대가는요?”
이미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헌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당연히 가이딩이지.”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답이지만, 그렇다고 쉬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계약서만 안 썼다 뿐이지. 사헌의 가이드가 되는 거나 다를 바 없지 않나.
“정식 계약한 건 아니니까 단계는 1단계만.”
재영의 불만과 이어지는 거절을 사헌도 예상한 듯 빠르게 덧붙였다.
“가이딩에 단계가 있어요?”
자못 순진한 질문에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딩하면서 가이드에 대해서도 알려 줘야겠네.”
“그러면 형한테 너무 손해 아니에요?”
아는 건 힘이 된다. 가이드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될수록 재영은 제게 유리한 상황을 많이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반대로 재영이 아는 게 없을수록 사헌이 멋대로 휘두르기는 좋을 텐데.
“단순히 충전기가 필요한 거면 기계로도 충분해.”
사헌이 불쾌하다는 얼굴로 툭 내뱉었다. 덕분에 재영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알겠어요. 그럼 우선은 그런 걸로 해요.”
“생각 바뀌면 언제든 말해. 계약서는 가지고 다니니까.”
“계약서를 들고 다닌다고요?”
재영이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계약서 가지러 간 사이에 네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당연하지.”
사헌은 재영의 생각보다 치밀하고 음흉했다. 재영은 앞으로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사헌의 눈이 하릴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 앞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갔지만, 그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어지간히도 일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사헌의 속에서는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미국 협회의 요청으로 S급 던전을 닫고 온 참이다. 미국의 S급 에스퍼가 둘이나 붙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사헌이 쉬엄쉬엄 할 수준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 기계로 1차 가이딩을 받고 왔지만 뱃속에 끓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사헌은 가만히 앉아 재영을 기다리면서 몸속에서 분탕치는 기운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방해받기 시작했다. 웬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무작정 끌고 가다가 속도를 이기지 못한 여자가 넘어지면서 소란이 일었는데, 하필 그게 사헌의 앞이었다.
“시발, 안 일어나?”
“너무, 너무 빨라서……, 조금만 천천히…….”
여자는 흐느끼면서 남자에게 사정했다. 허공을 누비던 사헌의 눈동자가 정확히 남자를 향했다.
“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어? 시발, 이런다고 내가 봐줄 줄 알았냐?”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제발.”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멈춰서 그들을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그치. 네가 잘못했지. 근데 저번에도 그랬잖아. 왜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냐고.”
여자의 사과로 남자의 화가 좀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가 쭈그려 앉아 여자의 눈을 마주했다.
“야. 나 아니면 너 같은 여자 누가 만나 줄 거 같아?”
여자는 움찔거리면서도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헌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요리도 못하고, 애교도 없어서는. 그나마 봐줄 건 성적뿐인데 그걸로라도 도움을 줘야지, 어?”
“하, 하지만 그건 불법 행위고…….”
겁에 질린 여자는 남자 몰래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은 많았지만, 다들 힐끗거리며 지나가거나 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을 뿐 다가가 남자를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헌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안 해? 안 한다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딱딱하고 두꺼운 표지는 모서리마저 날카로웠다.
남자가 온 힘을 담아 던진 책은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여자에게 날아갔다. 처참한 미래를 직감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와도 진작에 왔어야 할 고통이 오지 않자 여자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한손으로 날아오던 책을 잡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뭐야, 넌!”
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쳐다봤다.
“너도 이년이랑 붙어먹었냐? 하여튼, 시발, 실실 웃을 때부터 알아봤어. 아주 온 세상 남자는 다 꼬실 것처럼…….”
“아스팔트에 붙은 껌처럼 생긴 게 시끄럽네.”
“무, 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파급력이 엄청났다. 흥분해서 어깨를 들썩대던 남자가 움찔 굳어서는 꼼짝도 못했다.
“지, 진사헌……!”
남자가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렸던 사헌은 책을 든 팔을 뒤로 뺐다. 그리고 남자가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집어던졌다. 지레 겁먹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대낮에 사람 죽이려고 하기에 대단한 배짱이다 싶었는데.”
사헌은 픽 웃었다. 빠르게 날아간 책은 깃털처럼 살포시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책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질 때까지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못생겼으면 착하기라도 해야지. 너 같은 걸 누가 주워 갈지 모르겠다. 네 입에서 시궁창 냄새나니까 함부로 열지 말고.”
사헌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들어 올렸다. 전날 비가 온 탓에 질척거리는 흙이 책에 잔뜩 묻어 있었다. 찝찝한 얼굴로 바라보던 사헌은 그대로 남자의 품에 던지듯 안겼다.
“공부라도 열심히 해. 사람이 잘난 거 하나는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당부하는 척 남자를 디스한 사헌은 무심한 눈으로 여자를 스쳤다. 다시 벤치로 돌아가려던 사헌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소란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상하게 그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사헌이 갑자기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지척에 모습을 드러낸 유명 인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사헌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막 캠퍼스 투어를 끝낸 재영의 앞이었다. 사헌은 한 발 떨어진 곳에 서서 재영이 제 존재를 알아챌 때까지 응시만 하고 있었다.
“형?”
마침내 재영도 사헌을 발견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헌의 모습은 한눈에도 수상해 보였다. 재영은 그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과학대 건물 뒤로 데려갔다.
“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사헌은 말없이 재영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쳐다봤다.
“아…….”
재영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의 스마트폰 케이스 안에는 사헌이 몰래 심어 둔 위치 추적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재영은 찝찝한 눈으로 제 폰을 쳐다봤다.
가이드가 필요할 때마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돼서 편하기는 한데.
고민하던 재영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스마트폰을 뒤집었다.
“그나저나 지금 학교가 난리래요. 어떤 에스퍼가 진상 참교육했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재영이 말꼬리를 흐렸다.
“혹시 어떤 에스퍼가 형이에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사헌이 이곳에 있는 줄 몰라서 짐작도 못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는 캠퍼스에 에스퍼가 둘이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대답 없는 사헌을 바라보던 재영은 서둘러 뉴스 어플을 켰다.
“우와. 형 벌써 실시간 1위예요!”
앱을 열자마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사헌의 이름이 보였다. 재영은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동영상도 있네.”
재영은 얼른 재생 버튼을 누르고 음량을 높였다. 대체 사헌이 무슨 짓을 했기에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난리가 난 건지 궁금했다.
“손.”
사헌이 재영을 기다리다 지쳐서 빈손을 내밀었다. 가만 두고 보려니 당사자를 앞에 두고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 갈 기세다. 따지고 보면 동영상에 찍힐 일이 생긴 것도 재영에게 가이딩을 받으려다가 일어난 일이다. 그게 아니면 사헌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을 테니.
“아, 맞다.”
재영은 던지듯 사헌에게 제 손을 내어 주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사헌은 벤치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가이딩을 즐겼다.
“와. 이런 노답 쓰레기는 왜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지?”
너무 많아서인지 일일이 화제가 되지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사헌이 아니었다면 이 일이 기사화되는 일도 없었을 거였다.
“딱 봐도 이 여자분이 훨씬 아까운데…….”
재영은 재생이 끝난 화면을 끄면서 안타깝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형 아는 분이에요?”
“아니.”
사헌이 재영의 물음에 눈을 떴다.
“그런데 왜 도와주셨어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게 재영 자신이라면 당연히 여자분을 도왔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진사헌이었지 않나. 정부 산하인 센터에 소속되어 있으니 준공무원 신분이지만, 진사헌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표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으니까.”
믿지 못할 행보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어 놓고 사헌은 무감했다. 그에게서 답을 듣고도 재영은 납득하지 못했다.
“너 날 얼마나 나쁜 놈으로 보는 건데?”
그런 재영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사헌이 울컥 말을 내뱉었다. 재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살짝 몸을 틀어 사헌에게 다가갔다.
“형. 오늘은 포옹도 할까요?”
뻣뻣하기 그지없는 애교로 대답을 때울 셈이었다. 재영에게 을일 수밖에 없는 사헌은 얌전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