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영은 마지막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수능을 앞둔 고 3 신분이라 주어진 기간은 짧았지만, 그래서 더 즐겁게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청영고 3학년 1반은 마지막 단체 여행을 결정했다.
“그럼 바다하고 계곡 중에 어디로 할까?”
반장이 피곤한 얼굴로 다른 친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긴 테이블 주위로 둘러앉은 인원은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반장의 도움 요청에 응한 겉절이 셋. 야자를 하는 반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쓰지 않는 동아리방을 빌렸다.
“하나씩 골라서 최종 여행지 투표해.”
겉절이 셋 중 하나가 된 재영이 메모지에 낙서하며 대충 대꾸했다.
“다 귀찮다고 알아서 정하라던데.”
반장이 누구보다 귀찮은 얼굴로 칠판을 툭툭 두드렸다. 반장과 비슷한 심정인 재영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재영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로지 나서기를 좋아하는 친구 민태 때문이었다.
“그럼 그냥 계곡으로 하자.”
재영은 책상에 뺨을 대고 누워 웅얼댔다. 간밤에 떨어진 랭크를 복구한다고 무한 매칭을 돌리느라 잠을 설친 탓에 정신이 반쯤 잠들어 있었다.
“그래. 괜히 바다에 갔다가 우리 찹쌀떡, 뽀얀 살결 타면 안 되지.”
민태가 재영의 등을 덮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재영은 강아지나 아기에게나 붙을 만한 별명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남자애들 틈에서 유난히 새하얀 피부 탓에 붙은 별명이었다.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별명을 붙인 사람이 무시무시한 존재라 불평 한번 못했다.
“근처에 물놀이 할 만한 계곡이 있나?”
“당일치기하게?”
“그럼 제대로 놀지도 못할걸.”
“일박하면 서른 명이 묵을 방은 있고?”
하나가 말을 꺼내면 다른 하나가 그에 반박하고, 또 그 의견에 토를 달고. 의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회의였다.
“계곡이면……, 나 부모님 친구분이 계곡 근처에서 펜션 하시는데 마당에 방갈로도 몇 개 있대. 밖에 따로 있으니까 밤에 시끄럽게 해도 상관없고,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손을 든 반장이 제법 괜찮은 의견을 냈다.
“먼저 여쭤봐서 확인해 봐. 다 정해 놨는데 방이 없으면 큰일이니까.”
진전이 없는 회의에 지쳐 가던 재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된다고 하면 방값하고 씻는 거, 먹는 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입실, 퇴실 시간까지 다 물어봐.”
재영의 말에 이어 부반장이 다다다 말을 뱉어 내자 반장의 눈동자에서는 점점 초점이 사라졌다. 재영은 부반장이 말한 사항들을 쪽지에 적어 반장의 손에 쥐여 줬다.
“그럼 연락하고 올게.”
임무가 주어지자 반장이 스마트폰을 들고 조용히 통화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갔다.
“우리는 된다고 생각하고 장 볼 거 정리해 보자. 가자마자 밥하면 배고플 테니까 점심은 사 먹고, 저녁이랑 아침만 생각하면 되겠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재영이 본격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한 번 물꼬를 트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저녁은 바비큐지!”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재영은 크게 ‘저녁 : 바비큐’라고 적어 뒀다. 그러자 부반장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취사가 안 되면 치킨이라도 시켜 먹자.”
“고기면 다 좋아!”
재영은 하는 것도 없이 마냥 신이 난 민태를 눈으로 흘겼다.
“굽는 건 꼭 네가 해라.”
“그럼, 그럼. 굽는 게 또 내 전문이지.”
민태가 당연하다는 듯 호탕하게 내뱉었다. 재영은 슬핏 웃으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앱을 열고 검색해서 평균적인 숙소비와 식비를 계산했다.
“아침은 라면이지?”
여행 다음 날 아침은 당연히 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민태가 들떠서 말했다. 재영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침에는 뭐 해 먹기도 불편하고, 이 정도 대인원을 받아줄 만한 식당을 찾는 것도 일일 테니까.
“아침부터? 설마 술 마시려는 건 아니겠지?”
부반장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같이 놀 때는 즐겁지만 숨 막힐 정도로 규칙에 철저한 녀석이다. 재영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럴 예산도 없어.”
부반장이 끝까지 경고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민태가 억울하다고 입술을 삐죽였다.
“예산도 없다잖아.”
“그럼 메뉴는 그렇다 치고, 뭐 사야 되지?”
재영은 부반장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볼펜 끝으로 노트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고기랑 라면, 즉석 밥도 몇 개 사야 하고, 상추랑 깻잎…….”
“종이컵이랑 음료수도 사야지.”
먹을 것에 진심일 나이답게 여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나머지 하나까지 열심히 입을 열었다. 그에 따라 적는 재영의 손도 바빠졌다.
쾅!
“얘들아! 된대!”
때마침 통화하러 나갔던 반장이 문을 끝까지 열고 들어왔다. 제일 큰 문제를 해결해서인지 그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은 완전히 사라졌다.
‘드디어 회의 끝나겠네.’
재영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아마 반장의 머릿속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 * *
마침내 그날이 왔다. 한창 자라나야 할 나이인 만큼 도착하자마자 근처 식당에서 삼계탕을 먹고 계곡으로 향했다.
“어때, 완벽하지?”
반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말대로 한적하고, 물은 많은 계곡이었다.
“근데 여기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동준이 인적이 드문 주변을 둘러보고는 합리적인 의심을 내놓았다.
“아니,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에 물이 없었거든. 그래서 사람들 발길이 끊겼다는데.”
“그래? 올해 갑자기 비가 많이 오기라도 했나?”
동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아무렴 재미있게 놀 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계곡은 계단식으로 층층이 나뉘어 있었는데, 바로 아래층에도 평평한 바위 위에 텐트를 친 가족들이 수박을 먹고 있었다.
“그럼, 여기에 텐트 치고 돗자리도 깔자.”
빨리 놀고 싶은 만큼 행동도 재빨랐다. 능숙한 몇 명이 달라붙자 텐트 설치도 금방이었다. 텐트 앞에 깐 돗자리를 제일 먼저 차지한 건 부반장이다.
“너는 안 놀 거야?”
“나는 계곡에서 책 읽는 게 좋더라.”
재영이 묻자 부반장이 손에 든 책을 들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니 ASMR을 따로 켤 필요도 없어 책을 읽기엔 완벽한 환경이다. 놀러 와서까지 글자를 본다는 건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짐은 다들 텐트에 넣어 놔.”
반장의 지시에 아이들이 각자 챙겨 온 짐을 가져왔다. 큰 짐들은 오늘 밤 묵을 방갈로에 가져다 놨지만, 물놀이 후에 몸을 닦을 수건 같이 소소한 것들이나 귀중품은 전부 가지고 나온 차였다.
“우리 단체로 저기 서서 체조라도 할래?”
민태가 눈을 반짝이며 위쪽의 주차장을 가리켰다. 관종 쿨이 돌았고만. 재영은 피식 웃으며 제자리에서 적당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나마 민태의 말을 듣는 척해 주는 건 재영뿐이었다.
“야, 물 졸라 차가워.”
“형아가 좀 따뜻하게 해 줘?”
먼저 물속에 발을 넣은 해운이 몸을 떨자 동준이 장난스레 허리춤을 잡았다. 아이들이 질색하며 그를 노려봤다.
“돌아 버린 짓할 거면 돈 주고 해라.”
반장이 이를 악물고 손을 내밀었다. 결론은 아무도 민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잇, 나쁜 자식들!”
아무도 어울려 주지 않자 관심이 고파 돌아 버린 민태가 물 위로 벌렁 누웠다. 그리고 떼쓰는 아이처럼 팔, 다리를 마구 저어 댔다. 세게 얻어맞은 수면이 물방울을 튕겨 냈다.
“응, 물에 빠진 생쥐 어서 오고~”
민태의 발작 시점을 잘 아는 해운은 일찌감치 바위 위로 대피했다. 그리고 홀로 물을 뒤집어쓴 민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아악! 지 형하고 똑같이 생긴 노오오옴!”
“저게 선 넘네?”
민태의 외침에 해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추켜세우는 형인데, 해운은 닮았다고만 하면 정색을 해 댔다.
“근데 솔직히 기분 나빠도 형님이 나쁜 거 아니냐?”
재영은 해운에게 다 들릴 만한 목소리로 동준에게 속닥거렸다.
“이응. 여기 계셨으면 서민태 뒈졌을 듯.”
동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재영은 씩씩거리는 해운을 보고 웃으면서 민태를 향해 손짓했다.
“얼른 나와. 밥 먹고 바로 격하게 움직이는 거 아니야.”
“네, 엄마~”
재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자마자 민태가 생글거리며 일어났다.
“어어?”
그런데 재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민태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 돌연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대신 투명한 기포가 그가 있던 자리를 채웠다.
“야, 관종! 장난치지 마. 물 허벅지까지밖에 안 오더만.”
위험한 장난을 좋아하지 않는 동준이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하지만 민태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뽀글뽀글 올라오던 공기 방울마저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곡은 바닥이 고르지 않아서 수심도 제멋대로였다. 당장 서 있던 곳이 허벅지 높이여도 그 앞은 발끝으로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이기도 했다.
“서민태!”
불안은 빠르게 번졌다. 아이들이 물 주변으로 모여들어 민태의 이름을 불렀다. 민태처럼 진작 물속에 들어가 있던 애들이 그가 서 있다가 사라진 자리로 움직였다.
“들어가지 마! 계곡이나 강가는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 있을 수 있으니까…….”
해운이 팔을 뻗으며 움직이려는 친구들을 말렸다. 다급한 만류에 민태가 빠진 곳을 확인하려던 친구들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네, 거기 119죠?”
재영은 동준이 신고하는 걸 확인하고, 손에 물을 묻혀 몸을 적셨다.
“뭐야, 무슨 일이야!”
혼자 돗자리에 앉아 있던 부반장까지 이쪽으로 뛰어와 물었다. 바로 위층과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무슨 일이 생겼나, 기웃거릴 정도의 소란이었다.
“민태가 물에 들어갔는데 안 나와서…….”
반장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신이 데려온 곳에서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봐 패닉에 빠진 모양이다.
“정신 차려.”
재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반장의 뺨을 아프지 않게 톡톡 두드렸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119에는 동준이가 연락했으니까, 너는 애들 전부 물 밖으로 빼서 인원 점검해 놓고 있어.”
“어, 어……고마, 너, 너는 왜……?”
반장은 티셔츠를 벗는 재영을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서민태 찾아봐야지.”
재영은 빠르게 대답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 중에 가장 운동 신경이 좋은 재영은 다행히 수영도 꽤 하는 편이었다. 온몸을 적신 재영은 민태가 사라진 그곳으로 잠수를 시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김재영까지 잘못되면…….”
해운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반장! 내 스마트폰 좀 줘!”
해운은 안달이 난 얼굴로 소리쳤다. 동준이 걱정과 기대가 범벅된 눈으로 해운을 돌아봤다. 사헌에게 연락하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왁!”
“으아악!”
등 뒤에서 들리는 굉음에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를 쳤다.
“놀랐지, 놀랐지?”
“어? 민태…….”
장난스러운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홀딱 젖은 민태가 있었다.
반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민태와 재영이 들어간 물속을 번갈아 봤다.
“뭐야? 그 멍청한 표정은…….”
민태가 놀란 반장을 놀리듯 말을 뱉었다. 얼이 빠진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동준이었다.
“네가 나이가 몇인데 이런 장난을 쳐!”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동준이 큰소리로 다그쳤다.
“김재영! 재영아!”
그 뒤에서 해운이 재영이 들어간 물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다급함과 초조함이 느껴졌다. 당장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동준이 붙들었다.
“그러다가 너까지 빠지면 어쩌려고!”
동준의 목소리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만으로는 저도 당장 뛰어들고 싶어 재영이 사라진 자리를 계속 힐끗거렸다.
“김재영! 씨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재영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반 친구들도 애타게 재영을 불러 대기 시작했다. 연이은 소란에 주변에서 놀던 사람들의 관심도 쏠렸다.
“야……, 너네 왜 그래?”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민태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질문을 던지고 주변을 둘러봤다. 재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을 열려는 찰나,
“어, 재영이가 너 구하러…….”
민태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반장이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재영을 집어삼킨 계곡을 넋 놓고 바라봤다. 들어간 지가 언제인데 재영은 아직도 머리꼭지 하나 안 보였다. 차라리 재영이 민태처럼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였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다.
“뭐? 그, 그럼 당장 구해야…….”
장난기 가득하던 민태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대를 마중 나간 동준 대신 해운이 그를 붙들었다.
“진짜 큰일 나기 전에 가만히 있어. 신고는 했으니까….”
해운은 초조한 듯 이로 입술을 물어뜯다가 번뜩 떠오른 것이 있어 뒤를 돌았다.
“부반장! 내 폰 좀!”
“어, 어? 이거 맞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해운이 텐트 쪽으로 내달렸다. 부반장은 한데 모아 둔 스마트폰 중에서 해운의 폰을 바로 골라냈다. 해운은 차단 목록에서 낯익은 번호를 찾아 해제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감히 누굴 오라 마라야.”
통화 연결음이 시작됨과 동시에 해운의 등 뒤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몸을 돌리자 애타게 찾던 형 사헌과 그의 파트너가 보였다.
“혀, 형! 형님! 재, 이! 으, 응이가 물에 빠지…….”
저쪽에서 아연한 얼굴로 물만 들여다보던 민태가 어떻게 알았는지 곧장 달려와 사헌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문제는 울음 섞인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거였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제발요.”
사헌이 서늘한 눈으로 일대를 느릿하게 훑었다.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는 사헌이라도 20년 가까이 같은 동네에 산, 동생 친구들의 얼굴은 알았다. 그는 익숙한 얼굴 중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찹쌀떡?”
그것도 무려 사헌이 직접 별명을 지어 줄 정도로는 관심이 있던 이다. 민태와 해운이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거렸다.
“예, 예! 제발 살려 주세요. 우리 재영이 죽어요.”
민태가 흐느끼면서 사헌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그 탓에 움직임이 여의치 않자 사헌이 눈을 깔아 노려봤다.
“손 치워.”
“예, 예!”
손을 뗀 민태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가 재영을 구해 주지도 않고 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여기요! 여기예요!”
굳어 버린 민태 대신 반장이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받치며 재영이 들어간 쪽을 가리켰다. 사헌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뗐다.
풍덩!
물이 사방으로 튀며 사헌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데 곧바로 그의 머리가 수면 위로 쑥 올라왔다.
“혀, 형님! 우리 재영이는…….”
“찾았어?”
아이들이 옅은 기대와 불안이 섞인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안재효!”
하지만 사헌은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곧장 제 파트너인 안재효 에스퍼를 불렀다.
“어, 어? 협회에 연락할까?”
재효는 사헌의 파트너답게 눈치가 빨랐다. 사헌의 부름에 바로 용건을 알아챈 것이다.
“왜, 왜? 형도 안 돼? 못해?”
재효와는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해운이 불안한 얼굴로 재영이 빠진 물과 사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물속으로 돌아가려던 사헌이 입을 뗐다.
“너는 주변 사람들 전부 물에서 나가게 해. 던전이야.”
해운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아무리 던전이 아무 때, 아무 곳에서 발생한다지만, 그게 자신들의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뭐? 그럼 김재영은……!”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재영은 계곡이 아니라 던전 안으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얗게 질린 해운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초리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다른 놈들까지 휘말리게 둘 거면 안 말리고.”
사헌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건조하게 내뱉었다.
“무슨……, 아, 어, 알았어.”
그래도 덕분에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실들에 아득해진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야! 다 물에서 빠져! 거기도! 얼른 나가요!”
해운이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저쪽에 소리쳤다. 차가운 인상의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평소의 배는 험악해 보였다.
“던전이에요! 다 나와!”
웅성거리며 사건을 관망하던 주변 사람들도 그제야 허겁지겁 짐을 챙겼다. 해운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계곡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제발 무사히만 나와라.”
던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해운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재영이 사라진 곳이 물속이니 던전이라 더 위험할 수도, 던전이라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술렁이는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흙탕물이 가라앉은 계곡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 * *
‘어디 있어, 서민태!’
더운 공기로 가득 찬 볼이 터질 것처럼 둥글게 부풀었다. 흐린 시야에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빨리 나와, 제발…….’
어디 가려질 덩치도 아닌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계곡의 물이 너무 깊었다. 무슨 바다도 아닌데, 바닥도 안 보인단 말인가. 이런 곳에서 민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컥!’
실수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이 밀려들었다. 황급히 입을 다물자 콧방울이 뽀글뽀글 올라갔다. 하지만 재영은 머리를 더 아래로 내렸다. 밉다, 밉다 해도 제 형제나 다름없는 녀석이다.
‘조금만 더…….’
이대로 더 있으면 자신까지 위험해질 줄 알면서도 밑으로 내려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도 발차기를 해서 허벅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민태 괜찮을까?’
저와는 달리 잠수도 잘 못하는 녀석이다. 내내 감지 못한 탓에 눈이 시큰거렸다. 그런데 잠시라도 눈을 감았다가 민태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깜빡거릴 수도 없었다.
그때, 까만 것이 재영의 눈앞을 스쳤다.
‘찾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재영이 눈을 반짝였다. 흐물거리는 모양이 머리카락이 분명했다. 재영은 온 힘을 다해 발을 찼다. 그의 몸이 더 깊은 곳으로 밀려갔다.
‘근데 서민태가 원래 이렇게 수영을 잘했던가?’
저는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데 앞서 가는 민태가 너무 빨라서 겨우겨우 발끝만 보고 쫓는 신세였다.
‘저게 진짜 서민태가 맞긴 해?’
재영은 눈앞이 가물가물해져서야 의문을 가졌다. 민태의 머리카락은 흐물거릴 정도로 길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뼛속까지 파고든 차가움이 느껴졌다. 재영은 쫓아가는 것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러자 앞서 가던 것도 뭔가 느낀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안 그래도 하얀 재영의 피부에 핏기가 싹 가셨다.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면 안 된다.
바짝 조여진 심장이 경고했다. 공포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물속에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럼, 사람 아닌 것처럼 생겼는데 수영하고 있으면?’
저건 사람도, 귀신도 아니다.
크리처다.
‘그렇다면 여긴 던전……!’
괴물들의 탄생지이자 생활 구역인 ‘던전’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곳곳에서 생겨났다. 언제,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의 집, 무덤, 지하철, 숲……, 가릴 것 없이 하루아침에 몬스터의 발아래 짓밟히곤 했다. 던전 발생에 휘말려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버틸 수 있었던 거구나.’
재영은 넘치는 숨으로 당장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입술을 옴짝거렸다. 던전의 공간과 시간은 뒤틀려 있다. 현실의 한 시간이 던전의 5분일 수 있고, 현실의 1분이 던전에서는 하루일 수 있다.
‘그럼 민태도 무사할 수 있어.’
아무래도 이곳 던전의 시간은 현실보다 느리게 가는 듯했다. 그러니 민태도 평소보다는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안도감에 재영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래도 물속에 던전이 생겼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당황스러워하던 재영은 곧 이해했다. 하긴. 무슨 일에나 처음이 있는 법이다. 하필 거기에 휘말린 것이 자신이란 것이 절망일 뿐.
‘설마 민태도 저것한테 잡힌 건 아니겠지?’
민태가 허우적거리지도 못하고 바로 사라졌던 걸 떠올려 보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이 설칠 게 아니라 당장 뭍으로 나가서 에스퍼 협회에 신고해야 한다. 재영의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였다.
‘이제 어떡하지?’
우선 눈앞의 크리처에게 들키지 않고 멀리 달아날 수 있어야 한다. 재영은 꾹 다문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은 아직 긴 머리카락을 등 뒤로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떠 있었다. 짙은 색 머리카락이 물결을 따라 이쪽저쪽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안도는 잠시였다. 크리처가 무언가 느낀 듯 재영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울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빛이 도는 피부가 살짝살짝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소름 끼치게 짙은 붉은색이었다. 재영은 눈을 홉뜬 채 발장구치는 것도 까먹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입이 저도 모르게 헤 벌어졌다. 들어갈 구석을 찾은 물이 입속으로 밀려들었다.
‘컥……!’
코, 귀, 눈 모든 구멍에 차가운 물이 쑤시고 들어왔다. 크리처가 괴로워하는 재영을 보면서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였다. 보랏빛 입술이 귀 바로 아래까지 찢어졌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입안에는 크고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빨 사이사이에 뭔지 모를 검붉은 덩어리들이 엉겨 있었다. 괴담이나 무서운 만화에 묘사되는 귀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재영은 뭍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장구를 쳤다. 진작 한계를 느낀 팔다리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제발. 힘내라, 김재영.’
재영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갈퀴가 달린 크리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단숨에 그를 따라잡은 괴물이 놀리는 것처럼 재영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끼익, 끽, 끽-
아니, 분명 놀리고 있었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재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누가 잡혀 줄 줄 알고.’
재영은 잘 보이지도 않는 수면을 향해 헤엄을 치고, 또 쳤다. 따라잡히지는 않을까, 뒤를 돌아본 재영은 움찔했다. 그새 놀리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그를 바라보는 크리처의 눈동자에 무료한 빛이 떠올랐다.
크리처가 손을 쭉 펴자 날카로운 손톱이 뻗어 나왔다. 크리처는 세모꼴의 동공을 길게 늘이고 재영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죽는다.
끝이라는 걸 예감한 재영의 얼굴에 절망이 번졌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재영은 고개를 들고 겨우 뜬 눈으로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했다.
또 다른 크리처일까, 아니면 저를 구하러 온 사람일까.
‘모 아니면 도야.’
망설이던 재영은 그림자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그래도 위에 있는 게 저를 구하러 온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 그림자의 형상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곧 재영의 손에 무언가 닿았다. 사람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음에 몸을 움찔하자 손가락 틈새를 메워 꽉 움켜쥐었다.
‘사람이야!’
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손가락을 확인한 재영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희열로 정수리까지 짜릿했다.
곧 잡힌 팔이 위로 쭉 당겨졌다. 재영은 한순간에 그림자와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재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얼굴은 사람이라고 하기에 문제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흠칫한 순간, 현실감 없는 얼굴이 훅 다가와 재영의 입술을 덮쳤다.
‘이게 무슨……’
꿈이라기에는 너무 선명한 감각에 재영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동그란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로 일렁이는 사헌의 눈동자가 가득 찼다.
‘미, 친……?’
재영은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공호흡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점막에 스치는 말랑한 감촉이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그를 두드려 깨웠다.
“으, 으읍…….”
처음 겪는 혼란에 재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안 그래도 숨이 막히는데 남은 것마저 사헌이 혀로 샅샅이 핥아서 가져갔다.
결국 재영은 살기 위해 사헌의 가슴을 밀었다. 하지만 어느새 사헌이 재영의 허리에 팔을 감싸 끌어안은 상태였다. 그게 아니라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재영이 최상급 에스퍼인 그를 힘으로 밀어낼 수는 없었을 테지만.
밀어내는 손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 재영을 바라보는 사헌의 눈동자에 찬기가 어렸다. 하지만 재영은 필사적이었다.
‘물에 빠져 죽는 게 아니라 숨 막혀서 죽겠어!’
정신이 아른아른해진 재영은 주먹을 쥐고 사헌의 가슴께를 마구 두드렸다.
사헌에게 일반인의 주먹쯤이야 모기와 맞먹을 정도로 성가신 감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키스에 몰두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됐다.
“키스 처음 해?”
마침내 재영의 입술을 놓아준 사헌이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그에게 짜증을 냈다. 인공호흡이라고 주문을 걸던 재영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이거 인공호흡…….”
“누가 인공호흡 하면서 혀를 써.”
사헌이 재영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처음부터 목적이 그냥 키스였던 것이다. 재영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저, 저한테 왜 이러세요.”
재영은 울먹이며 항의했다. 첫키스를 얼렁뚱땅 당해 버린 것도 억울한데, 먼저 덮친 상대가 숨 못 쉰다고 혼까지 내니 서러웠다.
“네가 내 거니까.”
‘내 거’라는 주체가 재영 본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믿었을 정도로 단호하고, 당당한 대꾸였다.
“네? 언제부터요? 아니, 왜요?”
재영은 따지듯 물었다. 사헌이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재영을 훑고 있었다. 손으로는 재영의 얼굴, 목덜미, 팔 등을 만지작거렸다. 재영은 굳은 얼굴로 움찔거렸다. 추행 같은데 상대가 진사헌이라서 추행 같지가 않았다.
“저는 우리 엄마 거예요.”
단호한 주장에 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떻게 숨 쉴 수 있는 거예요? 형이 능력 쓰신 거예요?”
사헌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막 입을 떼려고 할 때, 재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영은 언제 울상을 했냐는 듯 말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주변을 투명한 막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아쿠아리움에 온 것 같았다.
“어차피 말해도 모를 텐데, 일단 나가지.”
“네? 아, 네.”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려하자 재영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헌은 미묘한 얼굴로 재영을 스쳐봤다.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물렁하다고 해야 할지. 기가 막히다는 듯 재영을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은 하나로 뭉쳐져 물살을 갈랐다. 작은 송사리며, 떠다니는 나뭇가지 등이 빠르게 옆을 스쳤다. 사헌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는 데도 재영은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몸이 덜덜 떨리며 사헌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옷이 당겨지는 느낌에 눈을 내린 사헌이 힘이 들어가 새하얗게 질린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김재영!”
재영은 곧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냥 감자마자 떴다고 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내려갈 때는 한참 걸렸던 거 같은데…….’
재영은 속으로 역시 능력자는 능력자다, 생각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해. 내가 다시는 그런 장난 안 할게.”
제일 먼저 달려온 민태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달려와 재영을 껴안으려고 했다.
“더러운 게 어딜 손대.”
찰싹.
이내 차진 소리와 함께 민태의 손이 내쳐졌다. 사헌에게 얻어맞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싼 민태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저를 내친 이를 쳐다봤다. 황당해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아프기도 더럽게 아팠다.
“민간인 통제 하나 제대로 못 합니까?”
사헌이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S급 에스퍼의 기에 눌린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그만…….”
“잠깐만요! 저기 제 친구예요! 친구라니까……!
재영은 직원에 의해 푸른 선 뒤쪽까지 끌려간 민태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민태와 다른 두 녀석 그리고 재영이 서로에게 가족 같은 친구 사이라는 걸 사헌도 알면서 너무한다 싶었다.
“뭐.”
저를 보려고 아래로 내리깐 사헌의 눈동자가 서늘해서 재영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에스퍼, 구급대원, 거기에 소식 듣고 나타난 구경꾼들까지. 한적하던 계곡이 어느새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일단 담요라도 좀 두르자. 감기 걸리겠어.”
재효가 담요를 가지고 가자 사헌이 재영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품에 기대게 했다. 마치 제 것이라고 과시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라 재효가 오묘한 표정으로 사헌을 바라봤다.
‘원래 구조할 땐 늘 이러나?’
재영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몸에 힘을 쭉 빼고 기댔다. 반항하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진 것이 좋았다. 재영은 꾸물거리며 사헌의 품에 더 깊이 들어가 얼굴을 묻었다.
“저쪽 텐트에라도 가서 쉬게 하는 게 좋겠어.”
재효가 가리킨 텐트는 행사 때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천막이었다. 협회는 거기에 본부를 차려놨다.
“환자분! 잠시만요!”
사헌에게 할 일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던 구급대원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차마 사헌을 불러 세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단 응급조치부터 하겠습니다.”
구급대원이 재영을 끌어안고 있는 사헌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내고 있는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동생이라 걱정했나.’
머리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는데 재영의 마음의 추는 진사헌이 그럴 리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찹쌀떡.”
“네, 네?”
속으로 사헌의 흉 아닌 흉을 보고 있던 재영은 그의 부름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손발 움직여 봐.”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재영은 사헌의 말에 토를 다는 대신 시키는 대로 했다. 어차피 하게 될 것, 괜한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다.
“아.”
“아?”
“말도 제대로 알아듣고 멀쩡한 것 같은데.”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은 재영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헌이 이제 됐지 않냐는 듯 구급대원을 바라봤다.
‘걱정을……하는 거겠지.’
재영은 찝찝한 마음에 손발을 몇 번 더 쥐었다 펴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제대로 검사를 해 봐야 합니다.”
다행히 구급대원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재영은 사헌의 옷자락을 쭉쭉 당겼다.
“형. 내려 주세요.”
사헌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재영의 뒤에 우두커니 서서 감시하듯 구급대원을 지켜봤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후유증이 있을 수 있거든요.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사 끝나면 구급차타고 병원으로 이동하실 게요.”
“네, 네.”
재영은 사헌의 차가운 눈초리에 떨면서도 꼼꼼한 검사를 마친 구급대원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신생아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상냥한 구급대원의 안내에도 사헌은 불퉁했다. 물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재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힘든 건 알겠지만, 잠시 이야기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구급대원이 텐트를 나가자 다음엔 협회 직원이 다가왔다. 사헌의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제 곧 진입할 텐데 진사헌 에스퍼는 안 가십니까?”
협회 직원이 신경 쓰이는지 사헌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말이 질문이지 사실 쫓아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 뜻을 모릴 리 없는 사헌 주변의 공기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미취학 아동들도 아니고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까?”
까칠한 대응에도 직원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협회는 별 시시콜콜한 일에도 사헌을 불러 댔다. 이목을 집중시키고, 협회의 공로를 돋보이게 하려면 그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안하무인으로 구는 진사헌의 성격상 지금껏 시키는 대로 전부 따라 준 것이 신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구조해 온 사람의 사정 청취를 지켜보는 것도 진사헌답지 않지 않나. 누구길래, 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헌이 동생 친구라더라고요. 걱정돼서 그런가 봐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편할 테니까…….”
협회 직원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자 재효가 사헌을 대신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진사헌이 다른 사람을 걱정하다니. 말을 하는 본인도 혼란스러운 표정이고, 듣는 사람도 의심이 가득했다. 그 대상이 된 재영은 말할 것도 없다.
“근데 그 크리처는 어떻게 됐어요?”
분위기를 살피던 재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꼼짝없이 잡혀서 찢기겠구나, 하던 때에 사헌이 나타나 손을 내밀었던 것이라 그 공포가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네가 뒤집어쓴 게 뭐라고 생각해?”
사헌의 말에 재영은 스스로를 살폈다.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탓에 재영의 눈앞이 어른거렸다. 재영은 눈을 끔뻑거렸다.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것이 톡 떨어져 볼을 타고 흘렀다.
“꼭 피눈물 흘리는 것 같네.”
재영을 바라보던 사헌이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영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에 묻은 물기를 훔쳤다.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새하얀 손가락은 금세 축축하게 물들었다.
“이, 이거 설마…….”
분홍빛 물이 묻은 손가락을 본 재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크리처 피.”
사헌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헌아, 잠깐…….”
재영의 상태를 걱정한 재효가 서둘러 그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재영은 멍하니 머릿속으로 상황을 되새겼다. 재영이 무지막지한 첫키스를 당하는 동안 사헌은 그의 등 뒤로 크리처를 갈가리 찢어 놓고 있던 것이다.
“아아…….”
“뭐야. 너무 추워서 바보가 됐나?”
사헌은 충격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재영에게 막말을 내뱉었다.
“뭐, 그러면 더 편하긴 하겠네.”
그러더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재영을 보면서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게 무슨…….”
“내가 필요한 건 네 몸이라서.”
“네?”
이어지는 사헌의 말에 협회 텐트 안이 술렁거렸다. 노린 것이라면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충격 발언에 재영은 크리처의 피를 뒤집어쓴 것조차 잊어버렸다.
싸한 공기가 텐트 안을 가득 채웠다. 협회 직원이 앳된 재영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성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족’같은 동생이라더니 진짜 많이 아끼는 모양이네.”
재효가 네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사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 형님……. 발음이 좀 그런데요…….’
재영은 복잡한 눈빛으로 재효를 쳐다봤다. 던전 중계 영상으로 볼 때는 점잖은 사람이 어쩌다 사헌과 엮였나 했는데 다 그럴 만한 거였다.
“그, 그러고 보니 크리처는 어땠어? 아는 종류야?”
어쨌든 재효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헌의 언모럴한 발언에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다급히 쏟아지는 질문에도 사헌은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하느라 못 봤는데.”
하지만 사헌이 입을 열자 재효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됐다. 사헌의 것까지 두 사람 몫의 수치심을 떠안은 재영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흠, 크리처, 네가 죽인 거 아니었어?”
그래도 재효는 사헌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재영의 창백한 얼굴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보고 못 들은 척 애썼다.
“그런 건 눈 감고도 하지.”
넌 못해?
사헌의 눈빛이 말하는 바가 분명했다. 전투는 주특기가 아닌 재효가 어색하게 웃었다.
“눈 안 감고 있었으면서…….”
어느새 충격에서 벗어난 재영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문제는 텐트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신체 능력이 강화된 에스퍼라는 것이다.
재영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이 움찔했다. 사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미있다는 듯 재영을 바라봤다.
“저기……, 저는 봤거든요.”
재영은 호기심을 담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애써 태연한 얼굴로 팔을 들었다.
“그, 그럼 여기에 그려 주시겠습니까?”
드디어 묘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협회 직원이 화색이 되어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재영은 조금 망설였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은 대충 뭉개도 되고요.”
달래듯 상냥한 말투에 용기가 생긴 재영은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주변의 시선이 전부 그의 손가락을 향해 있었다.
“눈동자가 붉은색이었어요. 피……같은.”
재영은 한차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 물속에 처박힌 것처럼 온몸의 피가 식었다.
“입은 귀 바로 아래까지 찢어지고, 이빨이 아주 날카로웠어요. 그리고 사이에 고깃덩어리 같은 게 끼어 있었는데…….”
재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코앞에서 본 크리처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대체 뭘 잡아먹은 걸까. 물고기, 물고기겠지?’
하지만 끔찍한 생각은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으려고 했다. 재영은 머리를 흔들고, 그림을 이어갔다.
“손가락하고 발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가 있었어요.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저를 공격하려고 할 때 손톱이 갑자기 길게 변했어요.”
재영은 손끝을 뾰족뾰족하게 그려 넣었다. 단풍잎처럼 생긴 손가락을 본 재효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를 가렸다.
“정말, 귀엽……아니, 끔찍하게 생겼네요.”
재효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재영을 훑었다. 외모는 뭐든 잘할 것 같은 모범생처럼 말끔했는데 그림 실력은 유치원생과 비등했다. 그 와중에 볼펜의 네 가지 색깔을 야무지게 사용한 것이 귀여웠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재효는 사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저 아래는 다 물이야?”
재효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사헌이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어야 하고, 물리적인 전투 능력도 뛰어나야겠네.”
재효는 사헌의 무성의한 태도가 익숙한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을 이었다. 재영은 과연, 이런 사람이니 공주님의 파트너지 싶었다.
“아, 마력 측정기 보여 주세요.”
심란한 얼굴로 재영의 그림을 살피던 직원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사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헌이 주머니를 뒤적여 무전기처럼 투박한 모양의 기계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재영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사헌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사헌이 옆구리에 느껴지는 온기에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다. 동그란 머리통이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재영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 품 안쪽으로 당겼다. 재영은 들여다보기가 더 편해진 것만 느낄 뿐,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했다. 둘이 찰싹 붙은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조차도.
“던전 입구에서 마력을 측정해서 급을 정하는 거예요.”
설명해 주는 건 마력 측정기를 든 사헌이 아니라 재효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와.”
재영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일반 국민들이 아는 것은 던전마다 급이 있고, 그 급에 맞는 에스퍼들이 출동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거 정확한 거예요?”
재영은 혹시나 제 물음이 실례가 될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묻지 않기에는 치미는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대체로.”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재영의 반응에 재효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라도 생길 오류에 대비해서 급이 높은 에스퍼가 두, 셋쯤 더 들어가요.”
재영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몇 급이에요?”
화면에 나타난 건 다섯 자리 이상의 숫자였다. 재효가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어 수치를 확인했다.
“B급이네.”
급을 나누는 기준을 외우고 있는지 재효가 곧장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B급이면 A급 이상의 에스퍼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 고개를 든 재영은 사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말을 하면서도 재효의 손이 분주하다 싶더니, 출동 준비를 하는 거였다. 사헌의 파트너이니 그가 동행하는 게 당연했다. 재영은 자신이 빠져야 할 때라는 걸 알아챘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재영의 말에 재효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이랑 피시방이라도 가서 놀아요.”
이후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리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동안 마음이 조금 정리돼서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영은 사헌과 재효에게 차례로 허리를 꾸벅이고, 그 다음으로 텐트 안에 있는 협회 사람들에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헌이 한 손으로 재영의 뒷덜미를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재영은 억지로 고개가 들린 채로 사헌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널 구한 건 나야.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어.”
협회 직원들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사헌의 말 한마디로 한 거 없이 인사만 받으려고 한 꼴이 됐다.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하는 인사까지 막을 필요가 있나. 지금껏 에스퍼가 펼친 구조 행위에 대한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전부 직원들의 역할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재영의 감사가 당연했다.
“예, 뭐, 저희가 한 게 있나요.”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영은 그냥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니다. 재영은 빠르게 텐트를 벗어났다.
저벅저벅.
그런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재영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를 살짝 돌아봤다. 사헌이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따라오실 셈이지?’
재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다리가 더 길고, 신체 능력도 강화된 사헌이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물속이라서 숨 쉬기도 힘들 텐데 크리처랑 싸우려면 고생하시겠어요.”
마침내 나란히 걷게 되자 재영은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말을 꺼냈다.
“고작 B급은 아무것도 아니야.”
심드렁한 대꾸에 재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고작 B급 괴물한테 찢겨 죽을까 봐 벌벌 떨던 사람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재영의 옆얼굴에 사헌의 시선이 꽂혔다.
“걱정돼?”
부담스러울 정도로 쳐다보더니 내뱉는 말이 그거였다.
“네?”
재영은 황당함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걱정되냐고.”
사헌이 재영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재차 말했다.
“고작 B급이라면서요.”
사헌의 무신경한 말에 마음이 상했던 재영은 입술을 툭 내밀고 툴툴거렸다. 나 토라졌으니까 사과해라, 하는 태도가 저도 모르게 묻어났다.
“그래서 걱정 안 한다고?”
하지만 사헌은 그런 재영을 귀여워하는 사람들과 달랐다. 위협적으로 미간을 좁히며 으르렁거렸다.
“해, 해요, 걱정.”
억지로 들은 대답에도 만족스러운지 사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재영에게는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불길한 미소였다.
“찍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사헌이 재영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동그란 눈이 스마트폰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나는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이걸로 정수리를 찍거나 하라는 건 아니겠지.’
재영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동자와 함께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사진이요?”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한 재영이 반색하며 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틀렸는지 사헌이 미간을 좁혔다.
“그걸 어디다 써.”
그렇다고 해도 사헌의 대꾸는 차갑고, 단호했다. 답을 찾지 못한 재영이 눈꼬리를 내렸다. 저쪽에서는 준비를 끝낸 에스퍼들이 사헌을 부르고 있었다.
“그,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은 재영만 쳐다보고 있고, 상관도 없는 재영이 눈치를 봤다. 사헌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번호 찍으라고.”
“그건 어디다 쓰시려고요.”
아까 전, 사헌의 말에 조금 상처를 받은 재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웅얼거렸다. 사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귀엽게 구네.”
절대 귀여워하는 게 아니다.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재영이 그런 감정을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얌전히 귀여움을 받기에는 사헌의 눈빛이 너무 살벌했다. 재영은 잠자코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전화하면 받아.”
사형수의 심정으로 번호를 찍고 돌려주자 사헌이 또다시 심장 떨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왜요?”
반항기 어린 물음에 사헌이 가늘게 뜬 눈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가라앉은 눈동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궁금하면 받아야지.”
사헌이 재영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재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플 거라는 예상과 달리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촉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거 설마…….’
재영의 눈이 확 떠졌다. 사헌이 충격으로 굳어진 재영을 보며 조소했다.
“앞으로 감사 인사는 몸으로 하고.”
재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분명 사헌의 입술이다. 조금 전 느낀 것이라 잊을 수도 없는 온기였다. 재영이 주지도 않은 인사를 알아서 받아 간 것이다. 재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사헌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김재영! 괜찮아?”
“너 크리처 봤어?”
“진사헌 에스퍼 사인은 받았어?”
재영이 협회 텐트에서 멀어지자 반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재영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헌의 스킨십을 잊어 낼 수 있었다.
“야. 안 그래도 고생한 애 그만 괴롭혀.”
해운은 몰려드는 친구들을 밀어내고 재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민태와 동준마저 경호원처럼 재영을 싸고돌자 반 아이들은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 * *
그렇게 반 아이들과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계곡에서 헤어졌다. 그곳에서 바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까지 받은 후 재영이 간 곳은 제 집이 아니라 해운의 집이었다.
남의 집에서 샤워하고 뚝배기에 끓인 라면까지 하나 뚝딱 해치운 뒤. 재영은 해운의 무릎을 베고 누워 TV에서 보여 주는 레이드를 감상했다. 이것저것 하느라 시간을 보낸 만큼 실시간 방송은 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금방 재방송이 했다.
“근데 방송국도 대단하긴 하다. 물속까지 따라가냐.”
민태가 공기 방울 속에 들어 있는 카메라맨을 보고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던전에 동행하는 카메라맨도 급은 낮지만, 에스퍼라는 말을 들었다.
“저거 방울, 사헌이 형 능력이다? 나도 아까 당해 봤어.”
재영은 어린아이처럼 제가 겪은 것을 자랑했다. 일반인이 에스퍼의 힘을 경험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의 진사헌이라면 일기에 적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됐다.
“물에 빠져서 구해진 게 자랑이라고, 으이그!”
하지만 상대는 십 년이 넘게 알아 온 불알친구들이었다. 해운이 한심하다는 듯 재영의 이마에 꿀밤을 박아 넣었다.
“아, 엄마 흉내 내는 건 선 넘었지!”
재영은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소리 하나도 안 들리잖아! 조용히 좀 해!”
‘에스퍼를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인 동준이 재영의 입에 복숭아를 밀어 넣으면서 소리쳤다.
“네 목소리가 더 크거든.”
재영과 달리 입이 자유로운 해운이 빈정대듯 말했고, 거기에 동준이 또 왁왁거렸다. 남자는 나이가 몇이든 애라더니 스물을 코앞에 두고도 이러고 있다. 고개를 내저은 재영은 이 다툼이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소파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카메라가 던전 내부를 느리게 쭉 훑었다. 재영이 닿지 못한 더 깊은 물 속, 동굴 형태의 던전 곳곳에는 날카로운 암석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화면 밖에서 누군가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감독이 에스퍼가 가리킨 곳에 카메라를 대고 확대했다. 삐죽삐죽 솟은 암석 사이사이 평평한 바위 위에 재영이 본 크리처가 있었다.
“저거야. 내가 민태인 줄 알고 따라간 거.”
재영이 입안에 든 복숭아를 오물거리며 TV 화면을 손가락질했다. 레이드를 보는 건지 마는 건지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너 안과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해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재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머리 길이는 물론이고, 덩치부터가 민태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근데 너 괜찮아?”
양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와 칼을 내려놓은 동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뭐가?”
“하마터면 크리처한테 죽을 뻔했잖아. 트라우마 같은 거 없냐고.”
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시야도 흐린 차가운 물 속. 그리고 나타난 누군가의 그림자. 입술에 느껴진 따뜻한 체온……. 거기까지 떠올린 재영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으, 내 첫키스…….’
다시.
잔잔하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길쭉한 손가락. 입술을 덮는 부드러운…….
‘망했어!’
재영은 속으로 절규했다. 첫 던전의 기억은 누군가와 입맞춤으로 온통 뒤덮여 버렸다. 이게 바로 충격 요법이라는 건가.
동준이 물은 건 사헌과의 ‘사고’가 아니다. 재영은 눈을 부릅뜨고 화면 속 크리처를 노려봤다. 카메라에 잡힌 크리처를 보고도 특별히 무서워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괜찮은 듯?”
한참이 지나서야 나온 대답에 동준이 재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다고 말하는 재영의 얼굴이 울상이었기 때문이다. 재영은 그 손을 뿌리치는 대신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사람처럼 생긴 물고기니까 저거 인어라고 이름 붙이려나?”
가족 같은 친구의 속이 어떻든, 크리처를 바라보던 해운이 태연하게 내뱉었다.
“으, 완전 환상 깨지네.”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 인간형 크리처는 사헌에 의해 던져져 암석에 몸이 꿰뚫렸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으악! 저거 19금 붙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재영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앞을 가렸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해운이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하는 통에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졌다.
“야. 새로운 괴물 나왔다.”
동준이 이것 좀 보라며 소파에 얽혀 있는 두 사람을 툭툭 쳤다. 화면에는 문어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긴 다리를 휘둘렀다. 한 에스퍼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위에 처박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헌이 서 있던 곳이었다.
“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헌을 찾아 카메라가 어지럽게 돌았다. 마침내 카메라맨이 허공에 있는 사헌을 찾아냈다. 문어가 휘두른 다리에 맞아 날아오는 에스퍼를 피해 가뿐하게 떠오른 사헌이 두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한 채 점점 그 사이를 좁혔다. 팽팽한 풍선처럼 생긴 문어의 대가리가 세로로 눌렸다.
사헌에 의해 양 볼이 눌린 문어는 입을 쭉 내밀고 애교를 떠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사헌이 손을 풀자 문어의 머리가 다시 팽팽해졌다.
“크리처를 가지고 노시네.”
“좀 불쌍한 것 같다.”
하지만 사헌의 문어 학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문어의 머리는 풍선처럼 점점 커졌다. 위험한 건 아닌가 싶을 때, 동그란 머리가 펑 터졌다.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살점에 에스퍼들이 질색하며 바위 뒤로 숨었다. 사헌만 제자리에 고고하게 서 있었는데, 그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 방울이 방어막 역할을 톡톡히 해 줬기 때문이다.
“와, 이번에도 형님이 캐리하네.”
인간 진사헌은 무서워하지만, 에스퍼 진사헌은 존경하는 동준이 불끈 쥔 주먹을 위로 쳐올렸다. 항상 대단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서인가. 유난히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동그리, 아.”
화면에서 고개를 돌린 재영은 복숭아를 깎고 있는 동준을 불러 입을 벌렸다. 그는 투박한 손 모양과 달리 과일을 깎는 솜씨가 야무졌다.
“저걸로 타코야키하면 엄청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지.”
입 안 가득 복숭아를 문 재영이 바닥에서 꿈틀대는 문어 다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넌 저 괴물이 먹고 싶냐? 상상만 해도 토 나온다.”
해운이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왜? 문어랑 똑같이 생겼잖아.”
재영은 오히려 그런 해운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저 괴물이 문어와 다른 점은 하얀 몸통에 알록달록한 점이 박혀 있다는 것과 짙은 보라색 물을 뿜어낸다는 것이다. 문어가 뱉은 물을 맞은 에스퍼들의 피부가 절절 끓는 것을 보면 산성도 띠고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먹고 싶으면 형님한테 한 조각만 가져다 달라고 해 봐. 그 정도로도 네 배 하나는 충분히 부르겠다.”
민태가 뭔가 기대하는 눈으로 떠보듯 말했다. 그의 말에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해운이 제자리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다리를 베고 있던 재영은 허공에 던져져 소파에 머리를 찧었다.
“맞다. 너 진짜 진사헌이랑 사귐?”
재영이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싸매든 말든. 해운은 흥분해서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무섭게 해?”
재영은 웅크리고 아픈 부위를 문지르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동그란 눈동자에 서러움이 가득했다.
“맞아, 너 대체 언제 형님하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아니라고!”
“대단하다, 진짜…….”
사헌의 팬인 주제에 동준은 입으로는 대단하다고 하면서 눈으로는 경악하고 있었다. 그 반응에 재영은 왠지 자신이 인간 이하의 무언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존경한다, 찹쌀떡!”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재영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도 아니면 형님이 널 왜 이렇게, 이렇게 소중하게 안고 나오시겠냐?”
민태가 팔을 내밀자 동준이 넙죽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분명 물속에서 건져질 때 저런 식으로 안겨 있기는 했다.
“아니라고, 진짜.”
재영도 사헌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를 보는 사헌의 눈빛이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풀 뜯어 먹는 토끼를 보는 사자의 눈빛? 그게 뭐든 저에게 좋은 건 아닐 게 분명했다.
“어쩐지 저 녀석만 별명으로 부른다 했더니. 사실 애칭이었던 거임.”
재영이 친구들의 눈에 가득한 장난기를 읽지 못할 리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재영을 놀리는 일이었다. 알면서도 울컥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형님 레이드 끝나면 가이딩 받으셔야 할 텐데, 괜찮겠냐?”
민태가 반응을 기대하는 얼굴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를 갈던 재영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님이 가이딩 받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바로 몇 시간 뒤의 일을 알지 못하는 자의 억울한 중얼거림이었다.
* * *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집으로 간 재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엄마의 타박이었다.
“재영이 너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했어야지!”
애정 어린 등짝 스매쉬는 덤이다. 따끔따끔한 접촉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재영은 엄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 걱정하실까 봐 그랬지.”
재영은 말꼬리를 늘이며 엄마, 숙희의 등에 볼을 비볐다.
“그래도 사헌이한테 너 구해 준 거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니야.”
“그것도 그렇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밥 주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옳다. 재영은 순종적인 눈빛으로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이라도 보낼까요? 뭐하지? 형님이 치킨 같은 걸 드시려나?”
재영은 또래 친구들이 좋아하는 기프티콘 목록을 하나, 둘 머릿속으로 주워섬겼다.
“네 목숨값을 치킨으로 대신한다고?”
숙희가 몸을 앞으로 빼 재영을 떼어 냈다. 노려보는 눈초리가 따가웠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재영은 재빠르게 납작 엎드렸다. 이럴 때는 어떤 애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지난 역사로 뼈저리게 배웠다.
“필요한 거 적어 줄 테니까 당장 가서 사와.”
엄마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진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당장이요?”
“준비할 시간도 부족해. 네가 바로 말했으면 진작 준비했을 텐데.”
재영은 갑작스러운 진행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하는 동안에도 숙희의 손이 바쁘게 재영이 사와야 할 재료를 써 내려갔다.
“그럼 내일 해도 되잖아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괜히 엄마를 고생스럽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이면 괜찮은 식당을 예약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건 더 제대로 해야 하는 거야!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하지만 엄마는 양보하지 않았다. 재영을 다그치는 눈빛에는 무조건 당신의 손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사헌이 형 바빠서 안 올 수도 있는데…….”
사헌은 제 본가에도 부모님의 생신 때만 들르는 비싼 몸이었다. 그것도 딱 저녁 식사까지만 함께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고 했다. 엄마가 정성껏 준비한 것이 괜한 짓이 될까, 재영은 입술을 삐죽이며 메모지를 챙겨 들었다.
“응, 자기예요.”
등 뒤로 살가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말투가 들렸다. 아빠에게도 심부름시킬 것이 있는 모양이다.
“오는 길에 노량진에 들러서 회 좀 떠와요.”
퇴근길에는 노량진이 없을 텐데.
재영은 신발에 발을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아니, 옆집하고 먹을 거니까 귀한 걸로. 오늘 글쎄…….”
닫힌 문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