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높은 빌딩의 꼭대기에 달린 대형 스크린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삼삼오오 모여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화면 속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집채만 한 괴물이 허공을 날아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 여고 교복을 입은 무리에서 비명이 터졌다. 두려움보다는 설렘에 찬 음성이었다.
“와, 미쳤다, 진짜.”
“무빙 지린다.”
하지만 낯부끄러운 감상을 연신 내뱉는 것은 모르는 여학생들만이 아니었다.
“봤냐? 그건 내 잔상이다, 애송이.”
크리처가 저를 날려 버린 남자를 끌고 가기 위해 두꺼운 꼬리를 휘두른 순간을 보고, 동준이 그 장면을 흉내 내며 상체를 어설프게 움직였다.
“제발 그딴 건 너네 집 화장실에서나 해, 씨발.”
옆에 있던 민태가 쪽팔림을 견딜 수 없었는지 흐느끼며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다행히도 화면이 돌아가서 더 이상 남자를 잡지 않게 됐다.
“다른 에스퍼들도 투입됐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조용히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던 재영이 상황을 중계했다.
“공주님 뒤로 빠져서 가이딩 받으시네.”
간질간질한 별칭은 다른 누구도 아닌, 괴물을 손도 안 대고 날려 보낸 남자의 것이었다. 뜻은 절대 달콤할 수 없었지만.
에스퍼 그리고 가이드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대중 매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백여 년 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그들의 존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정도로 취급됐다.
그러나 1982년.
세계 곳곳에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하고 죽였다. 그 괴물은 폭력적이고 잔혹했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무기’로 해치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시간 내에 모두 처치하지 못하자 활약한 것은 특별한 능력을 숨기고 군인, 경찰 등으로 위장하고 있던 에스퍼들이었다. 그렇게 당당히 능력을 드러내게 된 에스퍼들은 지금 영웅이라 불렸다.
그리고 지금 스크린에 떠오른 남자는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이자 세계적인 급의 능력자인 진사헌.
“저기서 저러고 계시면 확실히 집에는 안 계시겠다, 그치.”
공주님이라는 별칭을 지닌 사헌은 사실 재영의 친구 해운의 형이었다. 놀러 갔다가 그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긴장하고 있던 동준이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하는 영화 캐릭터라도 보듯 반짝이는 눈으로 스크린을 쳐다보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왜? 아까는 사인이라도 받을 기세더니?”
해운이 낄낄거리면서 겁먹은 동준을 비웃었다. 하지만 제 형이 불편한 존재라는 건 동생인 그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나 배고파.”
여태 스크린에 눈을 박고 있던 주제에 재영이 해운의 팔을 잡고 징징거렸다. 대형 스크린에서 사헌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였다.
“그러니까 가까운데 들어가서 아무거나 처먹자고.”
해운이 재영의 둥그런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안 돼.”
빨갛게 익은 이마를 감싼 재영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네 집 뚝배기로 끓여야 맛있단 말이야.”
그 짭짤하면서 매콤한 맛이 떠올라 재영은 군침을 삼켰다.
“별…….”
해운이 한심하다는 듯 재영을 쏘아봤다. 하지만 재영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멜론 사다 놨다고 꼭 먹으라고 문자 하셨어.”
재영은 대단한 의무라도 진 것처럼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그가 언급한 ‘어머니’는 다름 아닌 해운의 엄마였다.
“우리 엄마가 왜 그런 문자를 너한테만 하는데?”
해운이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러자 재영이 몰라서 묻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너는 이렇게 징그럽고, 나는 귀여우니까.”
반박하고 싶지만, 해운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막내인데도 재영은 4남매의 늦둥이 막내인 걸 티 내려는 듯 살갑고, 애교가 넘쳤다. 해운이 여덟 살 무렵에 재영이네가 옆집으로 이사 온 후부터 해운의 엄마가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두 자식 대신 아들 삼고 싶어 할 정도였다.
“야, 오늘은 뭐 걸래?”
“장소 제공하는데 나는 빼 주는 거 없냐?”
“응, 안 돼~”
“아, 치사한 새끼들! 그럼 그냥 피방 가서 하든가!”
“야. 라면은 있지?”
친구들과 재영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자리를 떠났다. 성인이 된 지 벌써 삼 개월이 지났는데 대화 내용은 고등학교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 *
해운의 집으로 오는 내내 티격태격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던 일행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야! 없다며!’
마침 물 컵을 들고 현관 앞을 지나치는 사헌과 마주친 친구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 댔다. 하지만 해운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혀, 형이 웬일이야?”
애초에 사헌은 에스퍼가 된 후로 정부에서 제공한 숙소로, 후에는 아파트를 얻어 나가 살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집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형. 오셨어요?”
굳어 있던 친구 중 재영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사헌이 한쪽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빠르네? 난 또 나 먼저 하라고 눈치 주는 줄 알았지.”
“헉.”
사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공주님, 공포의 주둥아리였다. 싸늘한 미소에 찬물을 갑자기 들이켠 것처럼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그럴 리가요.”
재영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대꾸했다. 태연한 척 대답하지만, 심장은 벌렁대고 있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야, 찹쌀떡.”
헉.
인사를 하고 조용히 사라지려던 무리가 동시에 헛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부르심을 받은 당사자는 그야말로 싫은 얼굴로 멈춰 섰다.
“이리 와 봐.”
사헌은 재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해운아, 다녀와.”
재영은 현실을 외면해 보려 했다.
“너 부르잖아.”
동생인 해운조차도 제 형을 꺼리는 것은 마찬가지라 질색을 하며 재영을 밀었다.
“내가 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던 사헌은 당장에 다가올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직접 움직이면 더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배신자들!’
재영은 울먹울먹한 눈으로 제 등을 밀친 친구들을 노려봤다.
“니들은 가 보고.”
“알겠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형님!”
사헌으로부터 자유를 명받은 친구들은 허리를 꾸벅거리고는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따라와.”
툭 내뱉은 사헌이 먼저 등을 돌려서 방으로 향했다. 재영은 다리를 질질 끌며 그의 뒤를 따랐다. 무거운 추가 묶인 것처럼 발이 무거웠다.
방으로 들어간 사헌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앉아.”
사헌이 재영에게 앉으라며 툭툭 친 곳은 제 허벅지 위였다. 재영은 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헌이 혀를 찼다.
“네가 오면 안는 걸로 끝내고, 내가 가면 혀 넣는다.”
노골적인 언사에 놀란 재영은 누가 엿듣기라도 했을까 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이어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방문을 닫고 사헌의 다리 위로 뛰어들었다.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박력 있는 행동이었는데 S급 에스퍼인 사헌의 몸뚱이는 밀리지도 않았다. 재영이 사헌의 목을 끌어안자 곧 입술이 맞물렸다.
“아, 안고만 있겠다고…….”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재영이 배신을 당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사헌을 쳐다봤다.
“혀는 안 넣었잖아.”
사헌은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그는 충만한 상태였다.
“아까 보니까 가이딩 받으시던데…….”
재영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헌의 시선을 피해 갈색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사헌의 못된 마음에 불씨를 붙였다.
“그게 싫으면 네가 붙어 다니든가.”
사헌은 재영이 질투라도 해서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비아냥댔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재영은 분홍빛 입술을 오물거릴 뿐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충실히 하라고.”
사헌이 봐주겠다는 듯 짓궂게 손가락으로 재영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네가 내 가이드잖아.”
그 말에 재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헌의 입술로 다가갔다. 그는 대한민국 유일 S급 에스퍼 공주님 진사헌의 숨겨진 가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