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엘리자베스
평화(平和).
참 좋은 말이다.
아마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 평화는 거저 얻을 수 없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하고, 그 흐른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3차 이념 대립 전쟁이 끝난 후에 레스터 왕국의 최대 숙제는 바로 이 평화의 유지를 위한 국가 관리였다.
그러기 위해서 레이라 여황제와 밀턴 포레스트 대공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둘이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다.
다음 세대가 이 둘의 위업을 이어가야 했고, 그러기 위한 준비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황녀님.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아, 거기 두고 가요.”
나이는 대략 20세 정도.
화사한 금발과 백옥 같은 피부.
완벽한 이목구비와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꼭 끼는 여인.
현재 대륙에서 두 번째로 존귀한 여성이며 언젠가 가장 존귀한 여성이 될 예정인 여인.
엘리자베스 폰 레스터의 모습이었다.
곧 20세가 되고 성인식을 치를 예정인 그녀는 이미 레스터 제국의 국정을 논할 때 제외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관여 중이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인해서 심리적 압박감을 받을 만도 하련만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10대 초반부터 이미 국정에 관심을 보이고 부모의 협력을 받아서 소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국정에 관여를 했다.
그리고 제국의 다음 황제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금 그녀는 당장 제국을 이어받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이미 레스터 제국의 국정의 절반 정도는 그녀의 손을 타고 있었다.
“흐으음…. 해양 무역의 흑자 수지 성장률이 줄었네. 로빈을 더 닦달해 볼까?”
서류를 살피며 바다 위에 누군가가 오싹해할 것 같은 대사를 하고 있는 그녀는 이미 훌륭한 군주였다.
“황녀님, 식사 시간입니다.”
시녀가 다가와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눈도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샌드위치, 햄 뺀 걸로 가져와줘. 커피는 진하게 타고.”
식사 시간도 아까워서 대부분의 식사를 집무실에서 샌드위치로 때우는 그녀였다.
세상 사람들은 대제국의 황녀가 얼마나 호화롭고 화려한 생활을 할까? 라는 상상을 하겠지만 실제 그녀의 생활은 화려함보다는 바쁜 일정과 과중한 업무로 점철되어 있었다.
거기다 본인의 성실한 성격까지 더해지니 좀처럼 휴식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배려해서일까?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예를 들어서….
“큰언니, 식사 가져왔어요.”
지금 자기 몸보다 큰 쟁반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어린 소녀가 바로 그렇다.
“어머? 사르비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온 소녀를 맞이했다.
검은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포동포동한 볼과 아기자기한 팔다리의 소유자인 이 소녀는 사르비아 포레스트.
밀턴 포레스트와 바이올렛 대공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이 작은 소녀는 부모뿐만 아니라 오빠와 언니의 사랑까지 한 몸에 듬뿍 받고 있었다.
“비아가 큰 언니 드리려고 샌드위치 만들었어요. 언니 같이 먹어요.”
“어머? 그랬니? 어쩜 이렇게 착할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막내 동생을 번쩍 들어서 뺨에 부비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사랑을 퍼부었다.
“언니 간지러워요….”
“언니는 사르비아가 너무 사랑스러워요. 어쩌죠? 어쩌면 좋죠?”
“꺄하하하하….”
왕족의 혈족치고는 사이가 엄청나게 좋은 자매의 모습이었다.
“뭐, 일단 한숨 돌릴까?”
엘리자베스는 막내 동생의 귀여움에 항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티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막내 동생이 가져온 샌드위치를 커피와 함께 먹었다.
“큰 언니, 맛있어요?”
“응. 정말 정말 맛있어요.”
“얼마나 맛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우리 예쁜 사르비아가 언니를 위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요.”
“헤헤헤헤….”
예쁜 큰언니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어린 사르비아 대공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행복에 젖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허락도 없이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황녀를 향해서 태연하게 하대를 하며 말했다.
“또 집무실에서 식사 중이었구나.”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동생을 옆에 앉혀두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큰어머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자신의 친딸과 천진하게 웃으며 안겨오는 의붓딸.
알겠지만 지금 여기에 들어온 여인은 레스터 왕국을 제국으로 발돋움 시킨 입지적인 인물.
레이라 폰 레스터 황제인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이미 40대의 나이였지만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은 그녀의 미모는 여전했다.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있으면 누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알겠는가?
잘해봐야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자매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모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몸에 베여 있는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난세에 레스터 왕국의 왕위에 올라서 국정을 다스리던 시절의 그녀는 전신에 칼날같이 예리한 분위기의 위압감을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에는 그때의 예리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대신 자애로움과 따스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르비아를 품에 안아서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엄마들 말은 잘 듣고 있니?”
“예!”
“야채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우우우우웅….”
야채 얘기가 나오자 괜히 시선을 돌리는 사르비아였다.
레이라는 그런 사르비아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채를 많이 안 먹으면 언니나 엄마들처럼 예뻐질 수 없단다?”
“정말요?”
“그럼.”
“우우우웅…. 싫은데….”
여섯 살짜리 소녀가 장래 얻을 수 있는 미모와 현재의 미각을 저울에 달아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이라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오늘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겠니?”
“…유감스럽게도 짐작이 가네요.”
엘리자베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애써 시선을 피했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거니?”
“아무래도 좀…. 아직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더 미루기도 곤란하구나.”
“으으음….”
엘리자베스는 막내 동생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민에 빠졌다.
고민의 스케일은 좀 다를지 몰라도 곤혹스러운 건 똑같은 모양이다.
딱히 곤란할 것이 없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이 유능한 황녀님을 곤란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제국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네가 정당한 반려를 가져야 한다. 그게 우선이야.”
바로 결혼 문제였다.
“후우우…. 그냥 독신으로 살면 안 될까요?”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족으로 태어나 황족이 된 지금 그녀는 제국을 다스리는 차세대 군주가 되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 있었다.
결혼(結婚).
사실 보통 귀족이나 왕족들이 10대에 약혼을 하고 18세쯤에 결혼을 하는 게 일반적인 지금 제국의 황녀인 그녀가 약혼자 하나 없이 20세의 생일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말이다.
덕분에 곤란한 것은 레이라 황제였다.
제국을 이어받기 전에 그녀가 결혼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제국의 황제의 남편이 된다는 것인데….
이게 지위가 참 미묘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은 가부장적인 면이 강해서 결혼하게 되면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개념이 강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레이라 여왕과 밀턴의 경우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했지만 실은 꽤 다르다.
밀턴과 레이라의 경우 시작부터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고 동등한 권력을 지니고 있되 서로의 영역이 철저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포레스트 대공가가 군사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레스터 왕가가 국가의 내정을 담당하는 형태로 권력을 나누고 서로 터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난세였고 외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킨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에 분열의 여지가 적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남편에게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제 레스터 제국의 군사력은 포레스트 대공가의 관할이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이 누가 되든 간에 밀턴의 경우처럼 국권을 나눠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능하면 황제가 되기 전에 남편감을 정하고 그 남편에게 정확한 선을 그어놔야 한다.
자신의 위치와 권한과 의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말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결혼, 아니 하다못해 약혼이라도 서둘러야 하는데….
‘도대체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레이라 여황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레스터 제국 내부뿐만 아니라 대륙의 전토에서 국혼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모두 거절했다.
외모, 혈통, 능력 등등….
모자람 하나 없는 남자들이 그녀만 바라보고 애타게 사랑을 갈구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무덤덤했다.
이러다 보니 레이라 여황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남편인 밀턴에게도 상담을 해 봤지만….
[딸이라는 건 아빠하고 한평생 같이 사는 거 아니었어?]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라는 존재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대 제국의 황제인 레이라 폰 레스터.
그녀라고 해도 자식 문제만큼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엘리자베스 폰 레스터.”
“그러지 마요. 어머니….”
레이라가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의 풀 네임을 부르자 엘리자베스는 일단 표정부터 구겼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럴 때는 보통 자신에게 싫은 일을 강요할 때였다.
“이번에 다가오는 신년회를 성대하게 열 것이다. 국내의 귀족이나 북부의 의원들뿐만 아니라 타국의 왕족들도 모두 초대할 것이다.”
“그래서요?”
“너는 그중에서 너의 배필을 찾으렴.”
“말도 안 돼요.”
“이건 명령이란다.”
“횡포겠죠?!”
“그래서?”
“…….”
비록 모녀라고 해도 계급이 깡패라 더 이상 엘리자베스에게 할 말은 없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자기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상대.
그게 바로 엄마였다.
“너무해요.”
엘리자베스가 한 번 따져 물었지만 레이라 여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
“그럼 그렇게 알렴.”
그리고 레이라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티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절망했다
“아아…. 죽겠다.”
“언니야 힘내.”
전후 사정을 다 이해 못했지만 어린 사르비아는 언니의 머리를 쓰담쓰담 하며 그런 언니를 위로해 주었다.
신년회.
약속대로 레이라 여황은 전 대륙에 초청장을 날렸다.
국내의 권력자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왕족들.
특히 젊은 남자들을 중점적으로 초대장을 보냈다.
대외적으로는 신년회였지만 명목상으로는 엘리자베스의 남편을 정하기 위한 대규모 사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못 정하면 복불복으로 아무나 붙여 버릴 테다.’
레이라 여황은 이런 생각을 하며 연회장에 등장했다.
“여황 폐하를 뵙습니다.”
“부디 만세를 누리소서.”
그녀는 주변의 인사에 화사한 미소로 화답하며 대응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녀는 아직 오지 않았나?”
“예.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포기를 모르는군. 지금 당장….”
당장 엘리자베스를 데려오라고 명령하려던 레이라 여황에게 황실의 시녀가 다가왔다.
“폐…. 폐하. 저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냐?”
“엘리자베스 황녀께서 그….”
“베스가 뭘 어쨌다는 건가?”
레이라의 물음에 시녀는 차마 말로 못하겠는지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내밀었다.
레이라 여황이 그 편지를 읽어보니….
- 친애하고 존경하는 어마마마에게….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며, 어마마마의 치세 아래 나라는 평화롭고도 활기찬….
(중략)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년회에 제가 꼭 참석해야 한다는 명령이나 조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공사가 다망하신 어마마마를 대신하여 북부 지역의 민심을 살피기 위하여 시찰을 다녀올 생각입니다.
북부가 끝나면 전 국토를 모두 돌아볼 생각이니 대략 1~2년은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부디 심려치 말아 주십시오.
그럼 이만.
엘리자베스 폰 레스터 올림.
PS. 남편감은 내키면 여기서 찾아갈게요. 그러니 좀 봐주세요.
우직….
레이라 황녀는 편지와 표정을 동시에 구겨 버렸다.
“이년이….”
그리고 결국 대제국의 여황제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나오고 말았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부모를 걱정시키는 존재.
그게 바로 자식이었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