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굴렸다.
운명 따위가 돕지 않아도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크프리트의 방식이었다.
‘마차를 미끼로 하는 양동. 그렇다면 진짜 레이라 여왕은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이 상황에서 이렇게 책략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속임수를 쓸 줄은 몰랐다.
포위망이 견고하니 샅샅이 찾으면 언젠가는 찾겠지만 지금 당장 레이라 여왕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릭의 입을 여는 게 가장 빨랐다.
“이놈을 살려라. 그리고 입만 멀쩡하면 되니 반드시 왕족의 소재를….”
“주군!”
그 순간 제이크가 지크프리트의 옆에 끼어들어서 날아오는 무언가를 막았다.
콰아아앙!
날아와서 지크프리트를 공격한 것은 한 줄기의 섬광.
그 섬광의 실체는 평범해 보이는 화살이었다.
“이건…?”
전 대륙에서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밀턴 포레스트의 측근 부하 중의 한 명인 트라이크 로우.
그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대공 전하시다!”
“밀턴 포레스트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사방에서 울리는 레스터 왕국군의 함성과 함께 지축이 진동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레스터 왕국의 전신.
밀턴 포레스트 대공의 귀환을 알리는 함성이었다.
“빌어먹을? 벌써 왔단 말인가? 어떻게?”
지크프리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이틀은 더 있어야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예상한 것이었는데 설마 그보다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
그러자 그 밑에 밟혀 있는 릭이 말했다.
“크크크…. 넌 X 된 거야.”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지크프리트였지만 지금 릭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열을 만들어라! 즉각 대응한다!”
그는 소리치며 제이크와 고스트를 거느리고 군을 정비했다.
“쿨럭…. 듣고 있냐? 토미?”
릭은 서서히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자기 곁에 쓰러져 있는 친구를 불렀다.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토미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래도 릭은 말했다.
“네 덕분이야. 덕분에… 주군의… 가족을 지켰어. 그러니…. 쿨럭….”
릭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뱉어내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동생 삼는 건… 봐…준다. …·또 친구 하자고….”
그리고 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군, 이미 성문이 뚫려 있습니다.”
“제길….”
밀턴은 이를 악물었다.
육로와 해로를 병행해 가며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 속도로 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문이 뚫린 것이다.
“방해되는 것은 모두 뚫고 지나간다! 돌격하라!”
직접 선두에서 달리는 밀턴의 뒤를 따라 남부 기사단이 따랐다.
그리고 제롬, 바이올렛, 트라이크에 최근에 합류한 고담 후작까지….
레스터 왕국의 최정예들이 모인 것이다.
그중에서 시력이 좋은 트라이크가 말했다.
“주군, 지크프리트가 보입니다.”
“위치는?”
“지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트라이크는 말을 달리며 활에 오러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투쾅!
그가 활을 쏘자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쯧, 막았군.”
트라이크가 혀를 차며 말하자 밀턴이 말했다.
“실패냐?”
“예. 제이크도 같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밀턴은 이를 갈며 말했다.
“가자, 레너드!”
밀턴이 채찍질을 하자 애마인 레너드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질주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밀턴은 아직 지크프리트가 대열을 정돈하기 전에 적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꺼져!”
콰쾅!
밀턴이 휘두른 일격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공화국 병사들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밀턴의 뒤를 따라 도착한 기사단이 연이어서 공화국군을 몰아붙였다.
“다 쓸어버려!”
“침략자를 용서하지 마라!”
성을 무너트리고 내부 공격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 화근일까?
공화국은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적도 피로로 지쳤을 줄 알았던 지크프리트는 일방적으로 아군이 당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고스트는 전원 비약을 복용하라!”
지크프리트는 승부를 걸기로 했다.
“진형은 일점 돌파 선두는 내가 직접 맡는다. 똑바로 따라와라!”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검 끝을 밀턴에게 겨누며 외쳤다.
“돌격!”
“우와아아아아!!!”
“지크프리트 대총통 각하 만세!”
군의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는 지금 지크프리트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
그것은 정예 대 정예의 전투였다.
그리고 목표는….
‘이걸로 놈의 목을 친다!’
당연히 밀턴 포레스트였다.
“지크프리트….”
자신을 향해서 돌격해 오는 지크프리트를 보고 밀턴도 마주 달렸다.
“죽여주마.”
자신이 없는 사이 가족을 노린 지크프리트의 행동은 밀턴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죽인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처음부터 서로 목숨을 노렸던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 밀턴은 증오심에 가까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밀턴 포레스트!”
“지크프리트!”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고 서로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밀턴 포레스트 34세.
지크프리트 37세.
젊은 두 영웅이 마지막으로 격돌한 이 시기를 두고 훗날의 역사가들은 영웅의 시대의 마지막 전쟁이라고 말한다.
전 대륙의 젊은 남성 인구를 절반 이하로 떨어트렸다고 평가받는 3차 이념 대립 전쟁을 마지막으로 대륙은 오랫동안 전쟁을 멈췄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단, 300년 후에 총화기가 발명되고 냉병기의 시대가 사라지며 전쟁이라는 것의 형태가 크게 바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전장에서 직접 마주하며 무력과 지력을 겨루는 전장은 이것이 마지막 대전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두 영웅에 관해서 역사의 평가는 무척 다양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기반 없이 시대를 질주한 지크프리트가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자신의 자질보다 주변을 잘 기용하는 밀턴 포레스트가 더 현명한 군주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누가 더 뛰어난 영웅이었을까?
과연 누가 시대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을까?
평가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답이 있다.
누가 정의인가?
답은 뻔하다.
역사 속에서 정의는 항상 승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쿨럭….”
지크프리트는 뱃속이 화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해냈다.
200여 합의 격돌 끝에 밀턴의 장검이 지크프리트의 복부를 관통한 것이다.
전투로 이미 기력을 소진한 지크프리트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밀턴.
두 사람의 사이에는 오러의 절대치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그게 장기전으로 가자 이런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중간에 지크프리트를 엄호하려고 했던 제이크와 고스트 역시 제롬을 비롯한 레스터 왕국의 기사들에게 가로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밀턴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검을 뽑아서 뒤로 물러나서 지크프리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글쎄…. 왜일까?”
밀턴은 대답하지 못했다.
뭔지 모르게 지금 지크프리트를 보고 있으니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상도 성격도 성장 환경도 완전히 다른 인간임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지크프리트를 보니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 역시 저렇게 됐을지 모르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시대의 패권을 두고 서로 사력을 다해서 싸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차이는 승자냐? 패자냐? 이 한 가지뿐.
그래서일까?
숙적의 패배를 보면서도 밀턴은 마음껏 환희에 젖어 있을 수 없었다.
“주군!!!”
그리고 밀턴이 방심하고 있을 때 제이크가 크게 소리치며 밀턴에게 달려들었다.
“큭….”
콰아앙!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밀턴은 그 공격을 막아냈다.
사실 제이크의 실력에 비하면 공격이 약간 가벼운 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우…. 후우….”
지크프리트에게 달려오기 위해서 무리를 한 대가일까?
제이크의 한쪽 팔은 떨어져 있었고 몸의 여기저기에도 적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제롬이 한 박자 늦게 밀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거의 호각으로 싸우며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크프리트가 중상을 입는 것을 본 순간 제이크가 발악을 하며 달려들어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아니, 됐다.”
밀턴은 그런 제롬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 제롬이 막지 못했다면 아무도 못 막는 것이다.
“주군, 일단 피하겠습니다.”
제이크는 지크프리트를 어깨에 메고 빠르게 말에 올라탔다.
“놓치지 마라!”
제롬은 직접 쫓으며 기사단에게 포위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를 막지 마라!”
제이크는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검을 휘둘렀다.
그가 보이는 파괴적인 돌파는 레스터 왕국의 정예인 북부 기사단을 돌파하고 정예 병력 2만을 뚫었다.
제롬과 밀턴은 그런 제이크를 쫓으려고 했지만….
“막아라!”
“대총통 각하를 살려야 한다!”
“지크프리트 만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고스트들이 발목을 잡아서 추격에 따라나서지를 못했다.
지크프리트가 직접 조련하고 키운 최정예 고스트.
공화국의 전설로 기록되는 그 최강의 부대는 그렇게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제이크…인가?”
“주군? 정신이 드십니까?”
달리는 말 위에서 지크프리트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그래…. 여기는 어디….”
“지금 포위망을 다 떨쳐 냈습니다. 이대로 모시겠습니다.”
“하…. 하하…. 그 와중에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쿨럭….”
“주군, 그만 말씀하십시오. 치료가 시급합니다.”
“그래…. 너와 내가 있다면…. 다시 할 수 있…어. 원래… 우리는…. 둘이서….”
“물론입니다. 우리 둘만 있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우리는 아직… 패자가 아니….야….”
“그렇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
“주군…. 주군!”
“…….”
지크프리트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제이크가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대답 없는 지크프리트의 시신을 부여잡고 제이크는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고스트의 대장이자 바론 대장 사후에 공화국 최강자로 평가 받던 제이크.
지크프리트의 충성스런 오른팔인 그의 모습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150년 후에 누군가가 지크프리트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무덤을 만든 사람이 제이크가 아닐까? 하고 추정할 뿐이었다.
“헉…. 헉…. 제길….”
엘리제는 달리고 또 달렸다.
사실 엘리제는 밀턴 포레스트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몸을 뺐다.
밀턴 포레스트는 무섭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진짜 무서웠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헉… 헉…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며 마침내 발을 멈췄다.
그런데….
“어디 가노?”
순간 엘리제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딱딱하게 굳은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비…. 비앙카….”
“말 까네? 뒤질라고?”
“아…. 아아….”
엘리제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비앙카는 천천히 엘리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눈물 나게 보고 싶었데이. 동생아.”
“으…. 으으….”
엘리제는 두 발로 서지도 못하고 뒤로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가려 했다.
항상 당차고 그 지크프리트에게도 도도한 태도를 유지했던 엘리제였지만 비앙카는 다르다.
이 두 사람은 피를 나는 혈육이며 같은 시기에 마녀의 일족에 거둬져서 마도를 사사 받았다.
그리고 마법사에게 있어서 격이 높은 마법사라는 것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서열을 뜻한다.
검이나 지식과는 달리 격이 다르면 절대 넘볼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는 세계가 마법사의 세계였다.
한마디로 엘리제는 비앙카에게 절대 못 이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제는 도망가고 또 도망갔었다.
만나기만 하면 자신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망갔었다.
그런데 기어코 이렇게 만나 버렸다.
“보자…. 네 죄목이 참 많데이.”
비앙카는 자기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서 말했다.
“금서로 지정된 마법서를 열람해서 멋대로 가져갔고, 그걸 막으려는 스승을 독살, 인체 실험에다가 최근에는 간도 크게 악마 소환까지…. 심지어 그게 발록? 간이 아주 팅팅탱탱 부었구만.”
“그…. 그건….”
“죽는 건 당연히 확신이고….”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혈육으로서 하나만 물어보자.”
그리고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와 그랬노?”
“크윽….”
왜 그랬냐는 비앙카의 말에 엘리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왜…? 왜라고? 나야말로 묻지. 왜 내가 아니지?”
“…….”
“너는 후계자에 관심도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울타리의 늙은이들은 나를 버려두고 너를 후계자로 택했어? 내가 왜!? 왜 내가 마녀의 울타리에서 장이 되면 안 되는 건데? 왜?!!”
절규하는 엘리제를 보고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
대답 없는 엘리제를 보고 비앙카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녀의 울타리다. 마‘녀(女)’의 울타리. 그런데 네가 어찌 되노? 이 머스마야!”
“크으…·.”
“누나 심정도 좀 알아라! 내는 관심도 없고 니가 해도 된다 캤는데 장로들이 절대 안 된다 카는 걸 우짜노?”
“나…. 나도 할 수….”
“못 한다 안 카나! 좀 납득 좀 해라!”
그렇게 윽박지르자 악에 받힌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왜? 뭐가 부족해서?!”
“부족한 게 아니라 한 개 더 달려가 안 되는 기다! 이 노무 새끼야!”
그리고 비앙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엘리제? 이 노무 새끼가 이름도 여자로 바꿔 가지고! 네는 엘리제가 아니라 엘리엇이다.”
그리고 비앙카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내가 니 이 지랄 하는 것 때문에 식겁해서 막을라고 거의 20년 동안 이 중앙 대륙에서 이 고생 하고 있다.”
“…….”
“암만 동생이라도 니는 봐줄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후우….”
비앙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마 죽자.”
“웃…. 웃기지… 커억….”
뭐라 반박 하려던 엘리제, 아니 엘리엇은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크…. 크으으으….”
“내는 마녀의 울타리의 장 비앙카 코넬리우스. 그 권한으로 마녀의 권속인 엘리엇 코넬리우스에게 죄를 묻노니….”
“끄…. 끄아아아아아….”
엘리엇은 이제 전신이 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괴롭게 요동쳤다.
지금 비앙카가 사용하고 있는 건 같은 계열의 마법사들 중에 하위 권속에게 내리는 형벌의 권능이었다.
강하고 약하고도 상관없고 반항 유무도 상관없다.
그저 절대적인 상위 존재로서 자신보다 하위 서열에 있는 자를 심판할 뿐.
“그대 영원의 잠 속에서 침묵하리라.”
그리고 비앙카의 말이 끝났을 때 엘리제는 바싹 마른 미라가 되어 쓰러졌다.
“하아…. 이제야 끝났네.”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년 후.
“으으으…. 이러다 또 과로사 하는거 아니야?”
전쟁의 신이자 레스터 제국의 위대한 영웅 밀턴 포레스트는 서류 더미 속에서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그 전쟁 이후 레스터 왕국은 대륙의 패권을 잡고 제국으로 이름을 높였다.
앤드루스 왕국은 이미 힘을 잃었고 지크프리트가 사라진 공화국 역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몇몇 군벌들이 제2의 지크프리트가 되기 위해서 밀턴에게 도전하려 했지만, 그들은 공화국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었다.
결국 공화국이 다섯 개로 갈라져 버렸고 밀턴은 그중에 세 개의 공화국을 인정하며 자신들에게 친화적인 제후국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을 이용해서 나머지 공화국 두 개를 견제하면 직접 싸우지 않아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일국의 군주로서 착실하게 서류 임무에 매진했다.
내정을 레이라가 전담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전후 처리나 제후국과의 외교 문제, 그리고 기사단의 양성과 병력 유지 문제 등등….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다.
전쟁의 책사였던 세비안 백작, 아니 이제 세비안 공작이 된 그는 이제 전장이 아니라 책상에서 밀턴을 보좌했다.
그리고 또 다른 오른팔인 제롬 테이커 공작은 기사단의 양성과 단련에 힘쓰기 위해서 기사 아카데미의 최고 책임자로 취임했다.
이제 전장에 나설 일이 없으니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것이다.
“잠시 쉬시겠습니까?”
“으음…. 그러지.”
세비안 공작의 말에 밀턴은 집무실에서 일어나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
대공가의 저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서 밀턴이 직접 만들고 묘비를 새겨준 무덤 두 개.
- 릭 스토리
- 토미 크로이
왕가의 은인이자 구국의 영웅이며 충직한 기사이자 그리운 벗들이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밀턴을 따라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 전쟁을 수행한 공적과 더불어 마지막 위기에 왕가의 가족을 지켜낸 두 사람이다.
이 둘의 무덤을 대공저에 만들겠다고 했을 때 감히 반대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의 명예는 포레스트 대공가가 이어지는 한 끊어지지 않고 전승될 것이다.
그리고 카텔 후작의 무덤은 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구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지에 마련했고 페일런 공작의 무덤은 대외적으로는 그의 가문 영묘에 마련되었지만 실제 묘는 아이린 왕비의 곁에 마련되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결국은 시간이 약인가?’
밀턴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바마마.”
간드러지는 애교 섞인 목소리에 밀턴은 순간 움찔했다.
“어…. 아아…. 베스 왔니?”
“예. 아바마마의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스랍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왔니?”
“예.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꼭 사주실 거죠? 네?”
엘리자베스는 밀턴에게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런 딸에게 밀턴은 순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뭘 원하는데?”
“그게 말이죠. 조오오금 비싼데?”
“너는 항상 그런 걸 원하지.”
“후후후….”
그렇게 말한 엘리자베스는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말했다.
“워터포트 왕국까지 가는 대형 선박 항해 무역 허가증이 필요해요.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재단에 공화국 내 구호 활동을 허락해 주시고, 북부 지역의 석탄 광산 개발권도 허락해 주세요.”
“그걸 왜? 아니, 아니다. 묻지 않은….”
“좋은 질문이에요. 아바마마.”
‘젠장, 내가 왜 물었을까?’
밀턴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 설명하기 위한 자료까지 준비했는지 신이 나서 설명했다.
“먼저 무역 규모를 늘려서 제 개인 자금을 늘리려고요. 그걸 가지고 북부 지역의 석탄을 구입해서 공화국에 석탄을 연료로 하는 신형 난로의 공급과 판로를 안정적으로 키울 생각이에요.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경제 규모를 키우는 동시에 자금의….”
“그만 그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세 시간은 족히 떠들 것이다.
자기 딸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밀턴은 서둘러 딸을 말렸다.
“에이…. 아직 다섯 시간은 더 설명할 수 있는데.”
아쉬워하는 딸에게 밀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딸아. 부디 다른 네 또래 여자애들처럼 드레스나 마차, 아니면 보석 같은걸 바라면 안 되니?”
“그런 건 내가 안 원해도 여기저기서 못 바쳐 안달이에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그런 건 제가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고히 해서 훌륭한 군주가 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저는 빨리 어마마마나 아바마마처럼 훌륭한 군주가 되어서 두 분을 은퇴시켜 버리고 싶어요.”
“…….”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기 설계가 확실한 딸내미가 착잡한 밀턴이었다.
그런 밀턴에게 엘리자베스는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빠아아…. 사 주세요. 네? 응? 네에에….”
이것이 훗날 레스터 제국을 전성기로 이끌어 올린 엘리자베스 폰 레스터 여황제의 모습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