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데이비드를 죽였다고 해서 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전하, 어서 내성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소.”
레이라 여왕은 페일런 공작과 카텔 후작의 보호를 받으며 내성으로 이동했다.
사실 내성에서 농성을 한다고 해도 오래 버틸 수 있을 리는 없다.
내성 벽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군사 시설이 아니라 경비 시설에 가까운 개념이다.
왕궁에 불측한 침입자가 들어올 수 없도록 경계를 하기 위해서 지어놓은 것이지 전쟁에서 적을 막아내기 위해서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했다.
밀턴이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저기 여왕이 있다!”
“잡아라!”
공화국 병사들은 레이라와 왕가의 가족들을 발견하고 사로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 꺼져라!”
“앞을 가로 막는 놈들은 모두 죽는다!”
페일런 공작과 카텔 후작이 호위하고 있는 이상 일반 병사들 따위는 방해가 되지 못했다.
막아서는 적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리며 내성까지 도달한 일행은 그대로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스트 정예 대원을 이끌고 있는 제이크였다.
‘주군의 예상대로 여기로 왔군.’
제이크는 성벽이 무너지자 지크프리트의 지시를 받고 바로 내성의 입구만을 노리고 달려왔다.
외부로 도주할 것이 아니라면 내성에 틀어박혀서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앞질러 온 것이다.
내성의 성문을 가로막고 있는 제이크를 봤을 때 카텔 후작과 페일런 공작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직후….
“흡!”
“받아랏!”
둘은 동시에 제이크를 향해서 돌격했다.
콰아앙!
마스터 두 명의 공격을 받았지만 제이크는 그걸 거뜬하게 받아냈다.
거대한 투핸디 소드로 둘의 공격을 동시에 막고는….
“흡!”
한 번 힘을 주며 검을 휘둘러서 두 사람을 동시에 뿌리쳐 버린 것이다.
“무의미한 발버둥이라도 치겠다 이건가?”
페일런 공작의 경우 팔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도, 마스터 두 명을 상대하는 제이크는 여유가 충분했다.
바론 대장이 죽은 지금 공화국의 최강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이크였다.
솔직히 페일런 공작의 팔이 멀쩡하다고 해도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제이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제이크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페일런 공작은 이 순간 머리를 굴리며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토미! 릭!”
“예. 스승님.”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둘은 가세하기 위해서 스승의 뒤에 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의 실력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페일런 공작이 내린 지시는 다른 것이었다.
“나와 카텔 후작이 막는 사이에 왕족분들을 피신시켜라.”
그 말에 릭과 토미는 순간 어디로?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디로 피신해도 저 괴물이 있는 여기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전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모시겠습니다.”
릭과 토미는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레이라 여왕과 그 가족을 피신시켰다.
“보낼 것 같으냐?!”
제이크는 크게 일갈하며 레이라 여왕을 직접 노렸다.
어차피 여기서 어디로 도망간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레이라 여왕을 놓칠 생각도 없으니 단숨에 달려들었다.
‘다리 하나 정도를 잘라 두면 충분…. 음!’
콰아앙!
레이라 여왕에게 달려가려던 제이크는 옆에서 날아든 일격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공화국의 애송아.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느냐?”
그를 가로막은 것은 페일런 공작이 날린 혼신의 일격이었다.
“이 늙은이가….”
제이크는 살기를 품었다.
이미 레이라 여왕은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몸을 빼고 있다.
당장 사로잡으려고 하니 페일런 공작과 카텔 후작이 결사의 각오를 하고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 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무시하고 피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고스트 2조! 3조! 여왕을 쫓아라.”
결국 제이크는 부하들에게 여왕의 추적을 맡기고 자신은 이 둘을 처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스트도 호락호락 여기를 통과할 수는 없었다.
“북부 기사단의 의지를 보여주마!”
“와라! 공화국의 개새끼들아!”
릭과 토미가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이탈한 대신 페일런 공작이 직접 키운 북부 기사단은 남았다.
그들이 고스트 중에서도 정예인 고스트 2조와 3조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끌 수는 있었다.
제이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의 두 사람에게 말했다.
“추잡하게 물고 늘어지는군.”
“멋대로 지껄여라.”
페일런 공작은 한 팔로 검을 잡고 제이크를 노려봤다.
카텔 후작과 함께였지만 솔직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옆에 있는 카텔 후작을 흘깃 바라보고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카텔.”
“저야 이미 망국의 기사 출신이죠. 거두어준 레스터 왕국에 은혜를 다 하고 기사로서 죽을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페일런 공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은 영광을 위해서 살아왔던가?
아니다.
일국의 공작으로까지 오른 자신이지만 영광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살면서 바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금 만나러 가겠습니다. 아이린.’
그리운 얼굴을 잠시 회상한 페일런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간다! 애송이!”
“네놈도 저승길 동반자로 데려가 주마!”
페일런 공작과 카텔 후작이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제이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눈에서 살기를 폭사하며 검을 휘둘렀다.
“죽여주마.”
콰쾅!!
션 페일런 공작.
라이언 카텔 후작.
두 명의 마스터가 인생 최후의 강적에게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이 마차를 사용하자!”
토미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마차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왕도를 탈출한다! 모두 마차를 호위하라!”
탈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야. 무모해! 이렇게 눈에 띄는 마차를 타고 어떻게 탈출해!”
릭은 토미를 만류하려 했지만 토미의 의지는 단호했다.
“어차피 내성까지 적에게 넘어갔으면 위험한 건 똑같아.”
“그건….”
“나한테 생각이 있어!”
토미의 외침에 릭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좋아. 어디 해보자.”
“저기다! 저 마차를 잡아라!”
“레스터 왕국의 왕족이 저 마차에 타고 있다!”
“잡아라! 절대 놓치지 마라!”
사방에서 외치는 고함 소리에 공화국의 병사들이 몰렸다.
그 병사들을 릭과 토미는 정신없이 베어 넘겼다.
그들을 따르는 근위 기사단도 마차를 호위하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성벽 앞까지 도착한 그들의 앞에 직접 나타난 것은 지크프리트였다.
그가 고스트 1조를 거느리고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릭이 이를 갈았고 토미는 서둘러 다른 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놓칠 것 같은가?”
지크프리트가 손을 들어 신호를 주자 사방에서 고스트와 공화국 병사들이 나타났다.
고스트 1조뿐만 아니라 남은 고스트 대원 전원이 여기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진! 마차를 보호하라!”
토미는 즉시 지시를 내렸고 기사들은 마차를 둘러싸고 보호 진형을 갖췄다.
그런 토미에게 지크프리트가 말했다.
“너는 기억에 있는 남자군. 틀림없이 밀턴 포레스트의 최고 측근인 토미 크로이였지.”
그리고 릭에게도 시선을 주고 말했다.
“저쪽은 릭 스토리고 말이야.”
“알아보니 아주 영광이다. 이 새끼야!”
릭은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지크프리트에게 당차게 대답했다.
지크프리트는 도발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같은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네놈 발바닥을 핥느니 죽고 말지.”
“동감이다.”
릭과 토미의 대답에 지크프리트는 손을 들어서 신호를 내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왕족의 신변은 보호하라. 가능한 사로잡아야 한다!”
“옛!”
그리고 공화국의 최고 전력인 고스트 1조가 릭과 토미 일행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 순간 릭이 토미는 품 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크윽….”
“으읏….”
그러자 둘의 전신에 오러가 폭주하듯이 솟구쳤다.
순간적이긴 하지만 익스퍼트 중급인 이 둘이 최상급에 필적하는 힘을 뽑아내고 있는 것이다.
‘제길…. 이거 생각보다 더….’
토미는 격통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이 둘이 복용한 비약은 고스트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대부분은 비앙카에게 연구를 위해서 넘겼지만 자신들도 한 개씩은 가지고 있었다.
비앙카에게 듣기는 들었다.
이 비약은 적응 훈련을 하지 않은 자라면 약 기운을 조절하지 못해서 반드시 죽는다고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렇게 혹시나 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토미에게 릭이 말했다.
“크크… 내기할까? 먼저 죽는 놈은 나중에 죽는 놈한테 형이라고 하기 어때?”
“미친놈. 이 상황에서?”
“쫄리냐? 쫄리면….”
“제길… 좋다. 하자! 해!”
“크하하하하하하!”
죽음의 공포를 눈앞에 두고도 릭은 유쾌하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이런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서 저런 장난질을 걸어주는 친구의 배려가 토미는 고마웠다.
‘네놈과 함께라면 저승길도 나쁘지는 않지.’
그리고 릭과 토미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맞이했다.
“…실력 이상의 재주를 피우는군.”
지크프리트는 눈앞에 있는 릭과 토미를 보고 착잡하게 말했다.
적응 훈련도 하지 않고 비약을 먹은 둘은 생명력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 오러의 파괴력은 더 강맹했다.
그들은 그 넘치는 힘을 아끼지 않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크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격통도 혼이 불타 버릴 것 같은 분노도 모두 투지로 바꿔서 싸우는 그 둘의 모습은 실로 처절했다.
고스트 1조들도 함부로 접근했다가 폭주하는 일격에 맞을 것 같아서 쉽게 승부를 걸 수 없었다.
이미 이 둘의 발밑에는 고스트 상위 서열의 멤버들이 여러 명 쓰러져 있었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 일변도로 휘두르는 둘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물론 그냥 당한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토미는 한쪽 눈과 오른쪽 손목이 날아갔고 릭은 허리에 깊숙한 상처를 입고 오른쪽 팔은 어깨까지 잘려졌다.
하지만 둘의 전의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몸속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쏟아 버리기 전에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이 싸우고 또 싸웠다.
결국….
“안 되겠군.”
지켜보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나섰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한 그가 나서서 먼저 릭에게 일격을 휘둘렀다.
“그만 쉬어라.”
“크아아아아아아!!!”
릭은 지크프리트의 공격에 남은 한쪽 팔도 떨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성을 지르며 지크프리트에게 돌진했다.
그저 육탄 돌격일 뿐이었고 기세도 절도도 없었지만….
“훌륭하다.”
감히 비웃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릭의 모습은 처절하며 숭고했다.
스팟!
지크프리트의 일격이 릭의 가슴을 목을 가르려는 그 순간….
“커억….”
릭보다 먼저 그 검을 맞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토미였다.
그는 직전에 릭의 앞을 가로막아서 그 일격을 목으로 때웠다.
“토미!!!”
눈앞에서 서서히 쓰러지는 친우를 보며 릭은 울부짖었다.
자신의 몸에 칼날이 박히고 팔이 떨어질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릭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토미는 쓰러지는 와중에 릭을 보며 말했다.
“크… 끄으…. 너 같은 동생은…. 필요 없어서…. 말이야….”
“야 이….”
말을 잊지 못하는 릭을 보며 토미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릭의 가슴팍을 차서 쓰러트려서 제압한 후에 부하들에게 말했다.
“마차를 열고 왕족을 확보하라!”
이미 근위 기사들도 모두 정리되었다.
릭과 토미가 쓰러진 지금 더 이상 마차를 보호할 이는 없다.
그런데….
“대총통 각하. 마차가 비었습니다.”
“뭐라고!?”
지크프리트는 깜짝 놀랐다.
‘설마….’
“큭…. 크하하하하….”
지크프리트가 설마 하는 사이 그의 발밑에 쓰러져 있던 릭이 폭소를 터트렸다.
“병신 같은 놈…. 천재 좋아하네? 시골 기사의 잔꾀에 속은 기분이 어떻….”
푸욱.
도발하는 릭의 한쪽 눈이 지크프리트의 검에 꿰뚫렸다.
“마차가 미끼였나? 진짜 왕족은 어디 있지?”
“엿이나 먹…. 큭….”
푸욱!
다시 한번 지크프리트의 눈이 릭의 남은 한쪽 눈을 파냈다.
“크으으으….”
“장난칠 시간이 없다. 말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곱게 죽고 싶다면 말해라.”
“레이라 여왕 전하는….”
“…….”
“참 예쁘단 말이야. 우리 주군한테 아깝다고 생각…. 크억!”
지크프리트는 릭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짓밟아 버렸다.
“이 피라미가….”
“그…. 피라미…. 한테…. 크아아아아….”
내장이 산채로 뭉개지는 고통 속에서도 릭은 지크프리트를 조롱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총통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때 제이크가 지크프리트에게 합류했다.
“제이크. 여왕은 발견했나?”
“예. 하지만 놓쳤습니다. 이 둘이 방해를 해서….”
제이크는 페일런 공작과 카텔 후작의 목을 보여주며 말했다.
“살아 있었던 건가? 그래서 놓쳤던 거군.”
“죄송합니다.”
지크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엘리제에게 신화 속의 대악마를 소환하게 하는 악수까지 저지르며 일을 펼쳤는데 뭔가 자꾸 삐걱거리면서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고 있다.
마치 운명이 자신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소리. 어차피 운명 따위가 내 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