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엘리제는 양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지금부터 엘리제가 사용하는 마법은 그녀가 평생에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대마법이다.
사용하기 위한 조건 자체가 까다로운데 우선은 대량의 인신 공양이 필요하다.
최소 1만, 안정적으로 사용하려면 3만은 필요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것도 아니다.
제물은 제물 나름의 준비가 필요한 법.
지금 공화국의 병사들이 복용한 광전사 시약의 효과는 그들의 영혼 자체를 순수한 광기로 내몰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선함을 모두 버리고 오직 살육 본능에만 치중되어 있는 광전사.
그들이 죽으면서 남은 원혼이 바로 적합한 제물이었다.
이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엘리제는 꾸준하게 그들의 영혼을 수집해 왔다.
차곡차곡 모아서 이 마법의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문을 다 외운 엘리제는 양손을 위로 펼치고 크게 외쳤다.
“축복받지 못한 이들의 왕이여! 야만의 군주시여! 바라오니 내려와 굽어살피소서!”
그녀가 그렇게 외친 순간….
“엇…. 어? 저건 뭐지?”
“저기…. 뭐가 나온다!”
레스터 왕국군의 병사들과 공화국군의 병사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인간의 의지가 사라진 광전사들 조차 두려움에 벌벌 떨며 머리를 감싸 쥐고 엎드렸다.
오히려 그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지금 엘리제가 소환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말이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 바로 앞에 소환된 그것은 10미터가 넘을 듯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악마였다.
손에는 화염의 채찍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은 인간이 형태를 인지할 수 없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엘리제에게 말했다.
[제물을 받았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엘리제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의 앞에 있는 적을 멸해 주소서.”
그것은 레스터 왕국군의 성벽을 바라보고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인간들의 전쟁에 나를 불러냈는가? 조디악의 12좌 일각에 앉아 있는 나 발록을?]
그 말을 들은 공화국의 장교진들은 깜짝 놀랐다.
“발…. 발록?”
“신화 속에 그 악마?”
“어찌 이런….”
그들은 경악했고 모두 동시에 지크프리트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신들이 따르는 대총통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지고 비정해질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따르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는 공화국의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고 믿고 따른 것이다.
하지만….
‘발록이라니? 악마라니?’
‘진정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단 말인가?’
이건 아니다.
악마에게 의지해서 얻어낸 승리를 어찌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악마와의 거래 자체가….
[제물을 받은 만큼은 도와주겠다.]
그때 발록이 불쾌하다는 듯이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발록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화염의 채찍을 높게 들어 올렸다.
“뭐지?”
“저것은 도대체…. 아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직 발록의 정체를 모르는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크게 웅성거렸다.
그리고 발록이 채찍을 내려치는 그 순간….
“전하!!”
페일런 공작은 크게 소리치며 레이라 여왕을 잡아당겨서 몸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어마어마한 굉음과 보는 사람의 시각을 마비시켜 버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터졌다.
단 일격.
발록이 자신의 채찍을 단 한 번 내리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드러난 결과는 놀라웠다.
레스터 왕국군의 성의 정면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두꺼운 성문도 견고한 성벽도 모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철저한 파괴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파괴력.
그것을 행사한 발록은 엘리제를 향해서 불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대가는 치러졌다.]
“잠시만…. 고작 일격만으로…. 크윽….”
엘리제는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항변할 생각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발록이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조차 쉬기 힘들어졌다.
‘이게…. 조디악의 일각….’
“커억…. 꺼… 어어억….”
이대로 압박감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엘리제를 향해서 발록이 한마디를 남겼다.
[분수를 알아라.]
그리고 그 거대한 악마는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광전사로 죽은 인간의 원혼을 수만이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단 일격 이상의 대가를 치르지 못했다.
발록이라는 거대한 존재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전쟁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 존재 자체가 세계의 구성에 관련되어 있는 신화적인 존재.
애당초 인간의 전쟁이라는 판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반칙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반칙을 저지른 지크프리트는….
“지금이다! 전군 공격하라!”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대…. 대총통 각하. 지금….”
참모 한 명이 방금 전의 일에 관해서 해명을 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그를 강렬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명령에 불복할 셈인가?”
“…….”
“지금은 승리만을 생각하라.”
“큭…. 전군! 진군하라!”
“뭐 하는가? 진군! 진군이다!”
“멈추지 마라! 명령에 복종하라!”
공화국의 장교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군을 진격시켰다.
그렇게 공화국의 병사들은 무너진 레스터 왕국의 성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후퇴하라! 내성으로 후퇴하라!”
레이라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페일런 공작의 다급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공작…. 이게 무슨….”
“정신이 드셨습니까? 전하.”
“어찌 된 건가?”
“성벽이 무너지고 공화국의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공작! 그대 몸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
레이라 여왕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페일런 공작의 한쪽 팔이 사라져 있었다.
발록의 그 일격.
그것이 휘둘러진 순간 페일런 공작은 다급하게 레이라 여왕을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가까스로 그녀를 공격 범위 밖으로 보냈지만 자신의 팔 한쪽이 걸리고 말았다.
“전하! 지금은 피하셔야 합니다. 우선은 내성으로 들어가셔서 대공 전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농성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알겠소.”
페일런 공작의 말에 레이라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따랐다.
지금의 상황에서 그녀가 남아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녀가 사로잡히면 병사들의 사기가 더 떨어질 뿐이다.
“후퇴! 후퇴하라!”
“내성 안으로 후퇴하라!”
여기저기서 성벽 안의 내성으로 후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쫓아라! 저기 레스터 왕국의 여왕이 있다!”
“잡아라!”
“절대 놓치지 마라!”
공화국의 병사들은 성벽 안에 진입해서 레이라를 뒤쫓았다.
“막아라!”
근위 기사단은 그런 공화국의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레이라를 내성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내성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소피아와 합류했다.
“소피아. 아이들은?”
“모두 무사해요.”
소피아는 뒤편에 있는 엘리제와 월리엄을 보여주었다.
레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케 아이들을 챙겼군.”
“예. 파테 백작이 도와줬어요.”
“백작이?”
“예.”
그리고 소피아의 뒤편에서 파테 백작이 나왔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레이라 여왕에게 말했다.
“전하, 내성으로 가셔서는 퇴로가 완전히 막혀 버립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어서 후퇴해야 합니다.”
“지금 후퇴하는 건 불가능….”
“이미 퇴로를 확보해 놨습니다. 페일런 공작님. 공작님과 기사단이 공화국군을 막아 주신다면 제가 왕가의 식솔들을 인도하겠습니다.”
파테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의 손목을 잡아끌려 했다.
그런데….
“아니, 내성으로 들어가서 농성하겠다. 후퇴는 없다.”
“전하. 이 와중에 고집을 부리실 생각이십니까? 한시라도 빨리 후퇴를 하셔야 합니다.”
“…….”
레이라는 침묵했다.
말은 바른말이라고….
여기서 후퇴를 할 수 있다면 내성에서 농성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긴 하다.
무사히 후퇴할 수 있다면 말이다.
‘느낌이 안 좋아.’
레이라는 파테 백작을 보고 생각하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뒤편에 있는 이들은 경의 부하들인가?”
“예. 그렇습니다.”
“귀족가의 사병들은 모두 징집령이 내려졌을 텐데?”
“…….”
순간 파테 백작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이 와중에 그걸 질책할 줄은 몰랐다.
“왜 자네를 따르는 사병들이 있는 거지? 대답하게 파테 백작.”
“…그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꼭 후퇴시켜야 했나?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나?”
“…….”
대답 못하는 파테 백작에게 레이라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자네 정체를 밝히게.”
그러자 파테 백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짜증나는 년이군. 포레스트 그 새끼도 그렇고 부부가 아주 쌍으로 짜증 덩어리 같은 것들이야.”
“이놈이 감히?!”
“무험하다!”
레이라의 호위를 맡고 있는 근위 기사단이 일갈하며 파테 백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카캉!
그들이 휘두른 검은 파테 백작의 사병이라고 밝혀진 자들에 의해서 막혔다.
명색이 왕실 근위 기사단들이 휘두른 공격이었는데 일개 사병들이 거뜬하게 막아낸 것이다.
그러자 파테 백작이 말했다.
“이왕이면 순순히 따라갈 것을 꼭 거칠게 나오게 하는군.”
“네놈 공화국의 간자냐?!”
페일런 공작의 외침에 파테 백작은 자기 얼굴 가죽을 벗겨 버렸다.
그러자 거기에 드러나는 얼굴은….
“공화국의 데이비드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군.”
“이놈….”
데이비드가 파테 백작으로 위장한 간자였던 것이다.
사실 데이비드는 고스트 11조와 12조를 거느리고 진작 왕성 안에 잠입해 있었다.
그리고 간자로 활동하며 왕가의 식솔들을 사로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지크프리트가 수도를 공격하면 그때 자신이 레이라 여왕의 퇴로를 파악하고 직접 사로잡거나 지크프리트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이라 여왕이 항전을 주장하며 성벽 안에 남았기 때문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에도 무수하게 납치의 기회를 노렸지만 도저히 기회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빨판이 붙은 것처럼 페일런 공작이 레이라 여왕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만 엿보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마지막 찬스로 퇴로를 확보해서 레이라와 왕가의 가족을 통째로 납치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감히….”
페일런 공작은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마스터였다.
그러나….
“움직이지 마라!”
데이비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스트 대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느새 그들은 엘리자베스와 월리엄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움직이면 어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이놈….”
페일런 공작은 핏발이 선 눈으로 데이비드를 노려봤다.
“얌전히 여왕이 따른다면 왕족의 목숨을 보전하겠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믿을 수 없다!”
페일런 공작의 말에 데이비드는 속으로 그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 어쩔까? 이대로 계속 대치해 볼 텐가? 이 상황에서 시간이 흐른다면 누가 이득일까?”
“큭….”
이미 성문이 무너지고 공화국의 병사들이 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서둘러 내성으로 후퇴해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은 자신들에게 불리했다.
페일런 공작은 레이라 여왕을 바라봤다.
여기서 독하게 그녀가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한다면 그는 따를 것이다.
하지만….
“…….”
그녀는 이제까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오빠를 잃고 자신에게 의탁했을 무렵에도 저렇게까지 약한 표정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무리 레이라 여왕이라고 해도 어머니로서의 감정은 매몰차게 버릴 수 없었다.
“후후후후… 선택해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자식이 눈앞에서 죽는 꼴을 보겠나?”
“…….”
“미리 말해 두겠는데? 인질은 둘이다. 하나 정도는 죽여도 상관없….”
“아악!”
데이비드의 말을 자르며 중간에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터졌다.
“지금이다! 공주님과 소공자님을 확보하라!”
“카텔 후작!”
페일런 공작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카텔 후작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리고….
“이 개새끼들! 감히 인질을 잡아!”
“죽여 버린다.”
릭과 토미 역시 살아 있었다.
성문의 안쪽에 배치한 병력 대부분이 발록의 공격에 날아가서 이들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그 순간 성문 앞에 바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병력 배치를 점검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빠져 있었다.
덕분에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그리고 다급하게 아군에 합류하려고 하다가 데이비드의 인질극을 발견하고 은밀하게 기습한 것이다.
“공격하라!”
인질을 되찾자 페일런 공작은 근위 기사단에게 명령했고 그들은 맹렬하게 고스트를 공격했다.
“죽어라!”
“으아아아앗!”
데이비드를 따라서 파견된 고스트는 11조와 12조다.
이들은 잠입과 민심 교란 같은 세작 행동에 특화된 자들이다.
그래서 고스트 중에서는 가장 무력이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일반 기사들보다는 강했지만 왕국에서 고르고 고른 근위 기사단과 비교하면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약을 복용하고 최선을 다해서 맞섰지만 결국은 무리였다.
“제길.”
데이비드는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몸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네놈만큼은 안 놓친다.”
데이비드의 앞을 페일런 공작이 가로막았다.
그는 한 손에 검을 쥐고 데이비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는 과거 레이라의 어머니인 아이린 왕비를 지키지 못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이었는데 지켜 주지 못했고,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다.
그 대신 그녀가 남긴 딸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지켜 주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데 그런 레이라의 가족을 지키지 못할 뻔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제길, 지랄하지 마! 이 늙은….”
스팟!
데이비드가 악에 받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페일런 공작의 일격이 놈의 목을 쳐 버렸다.
데이비드.
지크프리트의 숨겨진 측근 중에 한 명으로 엘리제와 더불어서 가장 더럽고 음습한 역할만 수행했던 인물이다.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 페일런 공작은 놈의 머리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