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성벽을 탈환 당할 뻔한 위기를 겪은 레스터 왕국이었지만 결국에는 버텨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지크프리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왕성을 공격했다.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 태반이 민병이라는 것과 그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다는 점을 노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에 또 공격을 서둘렀다.
그 전투는 낮은 물론이고 해가 저물고 난 후의 밤에도 멈추지 않았다.
어제처럼 잠시 텀을 두고 반격하는 것도 아니고, 해가 저물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야간 공격조가 공성을 시작했다.
“기사단은 성벽 위의 경계에 주력하라. 병사들을 휴식조와 전투조를 나눠서 운용한다!”
페일런 공작은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병사들을 나눠서 절반은 쉬게 하고 절반만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오늘의 야습은 어제보다 확실하게 더 사나웠다.
“우오오오오오!!”
“낙원을 위해서!!!”
공화국의 병사들은 어제보다 훨씬 더 광신적으로 성벽에 달라붙었다.
슬슬 엘리제가 투입한 약 기운이 제대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핏발이 서서 팔다리가 떨어져도 전진 또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장창병! 성벽 위로 병사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다 덤벼. 이 새끼들아!”
“릭! 저 새끼가 또 무모하게…. 여기는 맡긴다!”
“토미 선배. 여기도 이미 한계…. 빌어먹을!”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그들의 피로는 이미 한계를 넘었다.
그런 병사들을 커버하기 위해서 기사들은 훨씬 더 가혹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릭과 토미는 짧은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기사단을 이끌고 성벽 위를 누비면서 계속해서 공화국의 병사들을 몰아냈다.
나중에는 오러를 뽑아낼 힘도 없어서 그냥 철제 장검을 휘둘렀고 장검의 날이 빠지고 벨 수 없게 되자 적의 무기를 쥐고 다시 싸우기를 반복했다.
지옥도(地獄道)의 광경이 이럴까?
이제는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 역시 광기에 젖어서 그저 적을 죽이고 또 죽일 뿐이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시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어제와 달리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컨디션이 멀쩡하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전쟁을 제정신으로 하는 놈은 진짜 미친놈이라고 하지만….
지금 레스터 왕국군의 병사들은 이제 피로가 극에 달해서 광기조차 터트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무기를 손에 쥔 채로 피로로 쓰러진 병사들도 나왔다.
전쟁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이 순간 누워서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위험해. 이건 정말로….’
레이라 여왕은 직접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지만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정신력에 의존해서 사기를 끌어올린다고 해결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병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한 것을 말이다.
‘어떻게 하지? 무슨 수를 써야….’
레이라 여왕이 곤란한 상황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
“전하!”
레이라 여왕에게 부리나케 달려온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소피아?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레이라가 성벽 위에서 병사들과 함께 있는 동안 소피아는 후방에서 병사들의 가족을 다독이며 민심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다급하게 달려오는데 뒤편을 보니 남자들이 무언가를 한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전하! 지금 즉시 성벽에 이걸 설치해 주세요. 어서요.”
“그게 뭐길래?”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소피아의 눈은 진지했다.
레이라 여왕은 소피아가 가져온 것을 눈으로 살펴봤다.
그건 꽤 굵은 철사였다.
그런데 그냥 굵은 철사가 아니라 철사의 중간중간에 가시같이 날카로운 날붙이를 감아서 붙여 놓은 물건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치하라는 거지?”
“오래 안 걸려요. 이봐요. 빨리 서둘러요.”
소피아는 자신이 데리고 온 장정들에게 시켜서 철사 무더기를 성벽 위에 설치하게 했다.
“크아아아아!”
당연히 광전사로 변한 공화국의 병사들이 그걸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지만 소피아의 지시에 기사들이 보조로 붙어서 성벽 위의 적을 처리해주자 장정들이 서둘러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이다! 빨리.”
“서둘러!”
설치라고 해도 별로 복잡한 과정은 필요 없었다.
촤르르르륵! 쿵! 쿵! 쿵!
그저 성벽의 위에 펼치고 고정하기 위해서 굵은 못질을 군데군데 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설치된 후의 광경을 보고 레이라 여왕은 크게 놀랐다.
“이…. 이건?”
성벽 위에 가시로 무장한 철사 덤불이 생겼다.
그리고 그 위로 공화국의 광전사들이 넘어오려고 하다가 크게 곤혹을 치르는 모습도 보였다.
“크아아아! 카아아아!”
팔다리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광전사들이었지만 철사에 얽혀서 행동이 제한 당하자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사가 창으로 광전사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크아아아악!”
일반 병사들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기사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광전사의 진격을 병사의 선에서 막아낸 것이다.
“소피아 이건 도대체…?”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레이라 여왕에게 소피아가 말했다.
“예전에 개발했던 거예요.”
지금 소피아가 가져온 것은 지구에서 말하는 가시철조망이다.
꽤 오래전에 소피아는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밀턴에게 양떼의 울타리로 만들면 어떠냐고 제시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밀턴은 상당히 놀랐다.
전생의 지식에 있던 것이었지만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던 것이라서 밀턴이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소피아가 자력으로 개발한 것이다.
지구에서는 이 아이디어 하나로 떼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피아도 비범한 사람이었다.
단, 이 세계에서 철의 가치는 지구보다 훨씬 높았다.
무기나 갑옷 등에 들어가야 할 철도 부족한 마당에 양떼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 철을 동원하는 것은 예산의 낭비였다.
결국 그 제안은 기각되었고 소피아가 대량으로 만들었던 가시철조망은 악성 재고품 취급받으며 대공가의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소피아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 이걸 성벽 위에 두르며 아군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피아! 양은 충분해?”
“예. 성벽을 다 두르고도 남아요.”
“좋아. 페일런 공작, 지금….”
“당장 대공비 전하가 가져온 물건을 성벽 위에 설치하라! 북부 기사단은 전력으로 장인들을 원호하라!”
레이라 여왕의 말을 끊으면서 페일런 공작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말이었다.
“이리로 오시오.”
“머리 바싹 숙이고!”
기사들은 철조망 설치 장인들을 귀한 몸처럼 호위하며 성벽을 타고 이동했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빠르게 가시철조망이 설치되었고, 그 성과는 소피아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크워어어어!”
“크아아아아아!”
지금 공화국의 병사들은 거의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철조망에 망설이거나 혹은 뭔가 수라도 쓸 것이다.
가시철조망은 두꺼운 담요 한 장만 덮어도 통과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하지만 광전사들은 눈앞에 뭐가 있던 망설이지 않았고 팔다리에 가시가 파고들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철조망에 휘감겨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병사들의 창에 몸이 관통당하는 것이다.
푹! 푹푹!
“죽어라. 이 새끼들아!”
“울타리가 안 떨어지게 조심해!”
“으하하하하! 이 새끼들 이제 다 죽었다!”
종종 있는 일이다.
사소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 말이다.
소피아의 발명품으로 인해서 전투의 양상은 레스터 왕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대총통 각하.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일단 병사들을 뒤로 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벽 위에 적이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병사들이 전진을 못 하고 있습니다.”
참모들의 의견에 지크프리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불가.”
“대총통 각하!”
“이 전투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전투인 동시에 시간의 제약이 걸려 있는 전투다.”
지크프리트 결연한 어조로 참모들에게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가 오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공격의 고삐를 늦출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피해가 너무 큽니다. 그냥 피해만 큰 것이 아니라 성과조차 미비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대총통 각하! 하다못해 병사들에게 이상한 약물을 지급하는 것이라도 멈춰 주십시오.”
“…….”
참모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하는 간언은 좌중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모두 알고 있지 않소. 대총통 각하께서 병사들을 마약에 가까운 약물로 중독시켜 전쟁에 투입시키고 있다는 것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도 적당히 해 두시오!”
그 참모의 말에 다른 참모들은 시선을 피했고 지크프리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비난하는 건가?”
“대총통 각하가 비난을 받는다면 그건 역사의 평가 속에서일 것입니다. 저희는 이미 대총통 각하를 따르기를 결정한 몸. 어찌 따로 분류하겠습니까?”
당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 죄업은 우리에게도 짊어져야 할 업이라는 말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그 말을 꺼냈지?”
“이 전쟁을 보조하는 참모로서 제시하는 순수한 간언입니다. 지나친 용맹이 독이 되어서 눈앞에 보이는 함정도 제대로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의 상황을 살펴 주십시오.”
“그렇군. 자네 말은 일리가 있어.”
지크프리트는 대답한 후에 성벽 위를 바라봤다.
공화국의 병사들이 성벽 위의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광전사는 악수다.
차라리 일반 병사들에게 좀 더 준비를 시켜서 올려 보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퇴는 없다. 지금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이대로 적을 공격하라.”
“대총통 각하!”
“그만.”
지크프리트는 단호하게 참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네의 걱정과 충고는 일리가 있어. 그러니 죄를 묻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좌중의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의 희생은 승리를 위한 포석이다. 나를 믿어라.”
“진정이십니까?”
“앞으로 하루나 이틀이면 우리에게 승기가 온다.”
그 말에 목숨을 걸고 충고를 했던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총통 각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고맙다.”
“모든 것은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
이 승리 끝에 공화주의자들이 바라는 진정한 평등과 영원한 낙원을 바라며 그들은 지크프리트를 믿었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처음으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미 늦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승리뿐.’
“성벽 위의 전투에서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좋아.”
페일런 공작은 보고를 받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피아가 가져온 가시철조망은 공화국의 광전사들에게 상성상 굉장히 잘 먹히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꼼짝 못 하고 있는 적을 창으로 찔러 버리기만 하면 되니 이제 성벽 위의 전투에서 기사들의 활약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였다.
“기사단의 3분의 1을 성문 앞에 대기시켜라. 성문이 뚫렸을 경우를 상정해서 방어막을 3중…. 아니 5중으로 만들어라.”
“옛!”
페일런 공작의 지시를 듣고 옆에서 레이라 여왕이 말했다.
“성문의 방비에 너무 치중하는 것 아니오?”
“성벽 위의 방어가 이대로 안정된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문을 뚫기 위해서 움직일 것입니다.”
“왕도의 성문은 충분히 튼튼하다 생각하는데?”
“예. 성문을 3중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결과가 있을 수 있사오니 대비를 더 할까 합니다.”
이미 라이언 카텔 후작이 성문 앞에 대기 중이었다.
거기다 기사 전력을 더 추가한다는 것은 공화국에게 바늘구멍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겠다는 페일런 공작의 의지였다.
“전쟁에 관해서는 모두 일임했는데 내가 잔소리만 많았군. 경을 믿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레이라 여왕의 신뢰를 받은 페일런 공작은 수성에 집중했다.
‘지킬 수 있다. 이대로 가면 대공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 충분히 버틸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전황이 너무 유리하게 흘러가자 역시 승리를 확신하게 되는 페일런 공작이었다.
이틀이 더 지났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는 공화국의 맹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중간에 제이크가 남은 운제를 끌고 고스트를 태워서 성벽을 넘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릭이 석유를 사용해서 운제를 모두 태워 버렸다.
그리고 페일런 공작의 예상대로 파성추를 이용해서 공화국이 성문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았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 성문은 목제에 철판을 몇 겹으로 덧붙인 특제였다.
중간에 지크프리트 본인이 직접 나서서 오러 블레이드를 후려쳐 보기도 했지만 약간의 손상이 있었을 뿐 버텨냈다.
오히려 지크프리트가 성문까지 도착하자 화살과 투석기가 퍼부어서 지크프리트를 직접 노렸다.
그야말로 철벽같은 방어력을 보이는 레스터 왕국의 수도였다.
수도에 비축된 물자가 풍부하기 때문에 고사할 걱정도 없었고, 이대로 가면 밀턴 포레스트가 오기 전까지 충분히 버틸 듯했다.
그러나….
“준비가 끝났습니다.”
엘리제가 지크프리트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인가?”
“예. 이제 충분해요. 언제든지 사용 할 수 있습니다.”
“…….”
기다리고 있던 엘리제의 보고를 받고 지크프리트는 기쁘다기보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지크프리트라고 해도 지금부터 사용할 방법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순간 지크프리트는 얼마 전에 자신을 향해서 당차게 자기주장을 했던 참모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크프리트를 비난할 자가 있다면 그건 역사의 판단뿐이라고 했다.
“역사는 나를 악마로 기록하겠군.”
“어머? 이제 와서 그게 망설여지나요?”
“나도 사람이니 말이야.”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성벽을 보고 엘리제를 향해서 말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해 버려라.”
“예. 그럼 분부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