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50화 (250/257)

제250화

“죽어라. 이 개자식들아!”

“어디를 기어올라 와!”

레스터 왕국군의 병사들은 공화국군의 야습을 잘 막아냈다.

애당초, 야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적들이었기 때문에 낮에 싸우는 것보다 오히려 더 유리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레스터 왕국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단, 아무리 유리한 전투라고 해도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날이 밝고 성벽 아래에 전황을 확인한 페일런 공작은 이를 갈았다.

“당했다.”

성벽 아래 보이는 것은 죽어서 쓰러져 있는 공화국군 병사들의 시체였다.

단, 낮에 벌어진 전투에 비하면 시체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이게 뭘 뜻하는지는 뻔했다.

어제 공화국군의 야습에 동원된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요란하게 횃불을 밝히며 왔기에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병력 규모는 많아야 5,000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5,000의 병력을 상대로 레스터 왕국은 하룻밤을 꼬박 싸웠다.

완전히 놀아난 것이다.

“릭, 토미.”

“예. 스승님.”

“지금 당장 병력을 두 개 조로 나눠라. 그리고 한 조는 조금이라도 좋으니 휴식을 취하게 해라.”

“하지만 스승님. 지금부터 공화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쉬게 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피로가….”

“와아아아아아!!”

“공격! 전군 공격하라!”

“공화주의 만세!”

페일런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화국군이 함성을 지르며 빼곡하게 몰려왔다.

뿌득….

페일런 공작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어서 해라! 오전…. 아니 단 두 시간이라도 좋으니 휴식을 취하게 한 후에 지금 병사들과 교대시켜라!”

“옛!”

보급이 충분한 레스터 왕국의 수도였지만 아무리 잘 먹인다고 해도 피로가 쌓인 병사는 싸울 수 없다.

남은 병사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어라!”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우아아아아아!!”

아비규환.

확실히 어제보다 더 처절한 지옥도가 성벽 위에 그려졌다.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이 줄기도 줄었고 무엇보다 하룻밤을 꼬박 싸우면서 쌓인 피로가 전투를 힘들게 한 것이다.

공화국군 병사들은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더 거칠게 달려들었다.

엘리제가 만든 비약의 효과가 서서히 이성을 잠식해 가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광기에 젖어서 성벽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릭! 기사 열 명을 데리고 남쪽 벽으로 가라는 명령이다!”

“빌어먹을 여기도 급해!”

“남쪽 벽에 고스트가 올라온다고 한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돼!”

“…빌어먹을, 테리.”

“예. 선배.”

“여기는 맡긴다. 제이슨, 알버트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 빡센 새끼들 상대해야 되니까 긴장해라!”

이 상황에서 고스트의 출격은 방심할 수 없다.

릭은 이를 악물고 남쪽의 성벽으로 가며 생각했다.

‘설마 재수 없게 제이크 같은 놈이 온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릭이 남쪽의 성벽 위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확실히 검은색 해골 투구를 쓴 무리가 성벽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 해골 새끼들이 어디를 기어들어 와!”

릭의 성난 외침과 함께 거칠게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공격에 고스트 대원 두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크억….”

“큭….”

두 명을 처리한 릭은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쳤다.

“내가 밀턴 포레스트 대공의 기사 릭 스토리다. 이 새끼들아!”

릭은 용맹하게 싸웠고 릭의 활약에 힘입어서 그 뒤를 따라온 기사들 역시 분투했다.

그리고 공화국의 정예 고스트는 그런 릭과 북북 기사들의 맹공에 버티지 못하고 점점 쓰러져 갔다.

그리고 릭은 생각했다.

‘이상하다. 이 새끼들 왜 이렇게 약하지?’

고스트가 얼마나 강한지는 릭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비약을 복용한 상태라면 대원 하나하나가 익스퍼트급의 실력이었고 각 조의 조장들은 릭이나 토미에 필적,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이었다.

예전에 고스트 조장과 싸워서 패배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적도 있었으니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릭의 앞에 있는 고스트들은 너무 약했다.

익스퍼트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소드 유저 중상급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 설마….”

릭이 불안하게 있는 그때….

“북쪽 성벽이 뚫렸습니다!”

“뭐? 왜!?”

“그게…. 한 무리의 강한 적들이 쳐들어 와서 난리를 치고 있는데 현지의 기사단이 감당을 못 하고 있습니다.”

“…젠장, 지크프리트 이 개자식!”

릭은 그제야 자신이 낚였다는 것을 알았다.

“대총통 각하. 고스트가 성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잘된 것 같군.”

지크프리트는 상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간 공성을 미끼로 적을 피로하게 해서 빈틈을 만든다.

그리고 맹공격 속에서 방어가 가장 취약한 쪽으로 고스트를 보낸다.

단, 정식 대원이 아니라 하급 장교들에게 고스트의 복장을 입혀서 보낸 것이다.

이미 고스트의 전력은 숨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지크프리트와 함께 수많은 전쟁을 거친 공화국의 최정예로 이름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숨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서 유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스트의 복장을 입힌 무리를 미끼로 보내고 반대편에 진짜 고스트 두 개 조를 파견했다.

그 결과 지금 성벽 위에 올라간 고스트가 거점을 만들고 그곳으로 공화국의 병사들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

지크프리트는 제이크에게 추가 지시를 내려라.

“성문이 열리면 바로 돌입한다. 준비하라.”

“예!”

지금의 공격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확신을 가지고 준비한 필살의 한 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을 충분히 흔들었기 때문인지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이걸로 끝낼 수 있다면 충분하다.’

지크프리트는 날카로운 안광으로 성벽 위를 관찰했다.

“크악!”

“컥…. 빌어먹…을….”

북벽의 방어를 맡고 있는 레스터 왕국의 기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진짜 고스트의 실력은 이들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내려가는 계단을 뚫어라!”

“성문을 열면 끝이다.”

고스트는 내려가는 계단을 뚫기 위해서 거칠게 공격했다.

하지만 그 계단의 입구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사 한 명이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계단의 입구에서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나서 적이 동시에 합공할 수 없도록 지형적인 유리함을 만들며 영리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바로 토미였다.

“여기는 통행금지다. 해골들아.”

“이 애송이가!”

고스트 대원 한 명이 눈에 불꽃을 튀기며 토미에게 덤볐다.

캉! 카아앙!

“큭….”

토미는 적의 거친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지형을 이용해서 영리하게 싸우고 있기는 했지만 토미의 상태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투구는 깨지고 갑옷도 성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몇 명이나 되는 고스트를 상대하다 보니 체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전신에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당장 죽어도 좋으니 쓰러져 쉬고 싶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하지만….

촤아악!

“커아아악!”

토미는 이를 악물고 자기 앞에 있는 고스트 대원 한 명의 발목을 베어 버렸다.

계단의 고저 차이를 이용해서 방어가 어려운 하단을 노린 것이다.

떠어엉!

그리고 방패로 놈을 후려쳐 계단 밑으로 떨어트린 후에 말했다.

“자, 다음으로 죽고 싶은 놈은 누구냐?!”

본능을 뛰어넘는 의무감으로 몸을 추스르며 토미는 버텨냈다.

벌써 이런 식으로 다섯 명의 고스트를 보내 버렸다.

‘버티자. 고스트 놈들은 비약의 효과에 사용 제한이 있어. 그러니 약간만 더 버티면….’

“비켜라!”

토미가 머릿속으로 상황 계산을 하고 있을 때 고스트 대원들 사이에서 한 명이 거칠게 외치며 튀어나왔다.

그리고….

콰아앙!

“크윽….”

강력한 일격에 토미는 부딪히자 말자 목구멍에서 핏물이 왈칵 올라오는 듯했다.

“네놈은 이름은?”

“고스트 4조의 조장이다.”

“거물이 납셨군.”

‘사람 곤란하게 말이야.’

토미는 이를 악물었다.

고스트는 상위 조로 가면 갈수록 강력한 놈들이다.

당연히 4조의 조장쯤 되면 보통 실력이 아닐 것이다.

아마 비약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놈이….

“시간을 끌게 놔둘 수는 없지.”

토미의 눈앞에서 비약을 마셔 버렸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거 치사하지 않나?”

“마음대로 지껄여라!”

그리고 4조의 조장은 익스퍼트 최상급의 힘을 뿜어내며 토미를 거칠게 공격해 갔다.

쾅! 콰아앙! 콰직!!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공격에 토미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쓰러지면 안 돼. 쓰러지면….’

1분, 아니 1초라도 좋으니 자신이 이 계단을 오래 지켜야 아군에게 희망이 생긴다.

방어 일변도로 버티는 것도 어려웠지만 토미는 인생 최대치의 집중력을 쏟아부으며 적의 공세를 버텼다.

하지만, 정신력을 총동원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실력 차라는 것이다.

콰아아앙!

“커억….”

결국 토미는 연속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걸로 끝이다.”

쓰러진 토미를 향해서 상대의 칼날이 가차 없이 떨어졌다.

‘제길….’

토미는 순간 자신의 최후가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아앙!

토미의 정수리를 쪼개야 했을 상대의 칼날은 누군가에게 막혔다.

토미의 앞에 갑자기 뛰어들어서 그 상대의 공격을 막은 사람은….

“스승님?”

페일런 공작이었다.

토미는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보다 페일런 공작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더 의문이었다.

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페일런 공작은 스스로 레이라 여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크프리트가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레이라 여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런 그가 여기에 나타나다니?

“토미, 괜찮으냐?”

페일런 공작은 상대를 한 차례 밀어낸 후에 토미의 상태를 물었다.

“예. 하지만 스승님. 여왕 전하는 어찌하고….”

“못 말릴 분이시지.”

페일런 공작의 자조 어린 말소리와 동시에 토미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전…. 전하!”

“전하께서 어찌 여기에….”

성벽 위의 격전지에 레이라 여왕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화살이 빗발치는 아비규환 속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명령했다.

“근위 기사단은 내 앞에 있는 적을 격멸하라.”

“옛!”

그녀의 명령에 따라 레스터 왕국의 4대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근위 기사단이 앞으로 나서서 고스트를 몰아붙였다.

‘다행이 잘된 것 같군.’

레이라 여왕은 적을 압도하는 아군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성벽 위가 위험에 처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그녀는 즉각 페일런 공작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설사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이라 여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것만큼은 왕명이라고 해도 따르지 않겠다고 하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래서 레이라 여왕은 방법을 바꿨다.

페일런 공작이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그를 이끌고 이동하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페일런 공작과 함께 왕실의 근위 기사단이 위기에 처한 성벽 위에 아군으로 합류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얻는 효과는 기사단이라는 전력이 더해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여왕 전하께서 몸소 오셨다!”

“공화국을 몰아내자!”

“레스터 왕국 만세!”

레이라 여왕이 몸소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자 지쳐 있던 병사들이 다시 한번 전의를 고양시켰다.

“위는 대강 정리가 되어가는군. 이제 여기도 마저 정리해 볼까?”

페일런 공작은 차분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큭…. 얕보지 마라!”

고스트 4조의 조장은 악에 받쳐서 페일런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그건 내 선택이지.”

반면 페일런 공작은 느긋하게 말하며 그를 맞서 갈 뿐이었다.

비약을 복용해서 일시적으로 경지를 끌어올렸다고 하지만 순수하게 자기 실력으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페일런 공작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10합을 견디지 못하고 고스트 4조의 조장은 심장에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지금이다! 성벽 위에 공화국 놈들을 모조리 집어 던져라!”

“와아아아아아아!!”

다 무너질 뻔했던 레스터 왕국의 수도가 가까스로 다시 일어났다.

“이걸 버틴단 말이지.”

지크프리트는 4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스트를 미끼로 써서 양동 작전으로 완벽하게 빈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책략을 미리 읽고 대비한 기색도 없었기에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실패군.”

지크프리트는 성벽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책략으로 인해서 피로가 극에 달했을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

누가 과연 병사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인정 안 할 수가 없군. 레이라 폰 레스터.”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새삼 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남편의 품에 안겨서 순종하고 아이만 낳아주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저 여자 스스로가 이 난세의 국가에서 일국을 평정하고 다스릴 기량이 있는 여걸이었다.

“가능하면 이번 책략으로 쓰러트리고 싶었는데….”

지크프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리제를 불러와라.”

“옛.”

전령이 엘리제를 불러오자 지크프리트가 다짜고짜 말했다.

“준비는 되어 있나?”

“예. 3분의 1 정도는요.”

“3일 안으로 마칠 수 있겠나?”

“그건 대총통 각하께서 해 주시기 나름이죠. 아닌가요?”

“…….”

지크프리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어쩔 수 없군.”

뭔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3일 안에 모든 준비가 완료될 것이다. 그때 작전을 준비하도록.”

“명령대로 따르죠. 그리고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말했었죠? 만약 그 여자가 나타난다면 저는 두말할 것 없이 도망갈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지크프리트에게 확약을 받은 엘리제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그럼 분부대로….”

그녀가 물러나고 지크프리트는 성벽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어코 나를 악마로 만드는군.”

지크프리트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 탓이다. 레이라 폰 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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