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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49화 (249/257)

제249화

막는다고 막기는 막았지만 결국 공화국의 병사들이 성벽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기가 높다고 해도 성벽 위에 올라가 있는 병사들 중에 상당수는 민병이었는데 그들은 전투에 익숙하지 못했다.

“죽어라!”

공화국군 병사 한 명이 험악하게 달려들며 어린 소년병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너나 죽어.”

누군가가 공화국군 병사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대로 성벽 아래로 집어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공화국군 병사의 비명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소년병을 구해준 기사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기사단에게 외쳤다.

“전부 집어 던져 버려!!”

“옛!”

그 기사는 북부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릭 스토리였다.

그는 어느새 익스퍼트 중급의 강자가 되었고 기사단을 이끌고 성벽 위를 돌아다니며 적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때 릭과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 공화국군을 정리하고 있던 토미가 다가와서 말했다.

“릭, 서쪽은 정리 끝났나?”

“거의 다 돼가. 동쪽은?”

“그럼 서둘러 남쪽으로 가라! 나는 북쪽으로 간다.”

“젠장! 남쪽은 한 시간 전에 다 정리했었는데….”

“불평은 공화국군 새끼들한테 해!”

그리고 토미는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을 인솔하며 성벽 위에 올라온 공화국군을 베어 넘겼다.

수성을 하는 입장에서는 성벽 위에 적을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베스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공화국군을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 외성벽은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기는 했지만, 성벽 자체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보수 공사를 하려고 했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지반이 무르다고 판정이 나서 불가능했다.

그 대신 성벽을 두껍게 보수했고 성벽 위에는 통상의 성벽보다 두 배는 더 많은 병사들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페일런 공작은 성벽 위에 적들이 올라온다는 가정을 하고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최대한 결사적인 공격을 지시했지만 일단 적들이 성벽 위에 올라오면 뒤로 빠져서 미리 대기 중인 방패병들 뒤에 숨으라고 했다.

그리고 북부 기사단과 중앙 기사단이 출격해서 성벽 위에 올라온 공화국군을 일소하는 형식의 전투였다.

릭과 토미는 페일런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 역할을 맡아서 바쁘게 싸우고 있었다.

“페일런 공작님. 역시 저도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카텔 후작은 자신도 한 손 거드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페일런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아니야. 기다리게.”

“기사들의 피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벽 위에 적들이 너무 많이 올라왔습니다.”

“기사단을 추가로 파견하지 하지만 자네와 나는 여기 있어야 해.”

“…이유가 뭡니까?”

“체스판은 킹을 잃으면 끝이니까.”

“…….”

카텔 후작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레이라 여왕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

“놈들이 여기를 노린다고 생각합니까?”

“안 그럴 이유가 뭔가?”

“으음….”

페일런 공작은 성벽 위의 상황을 살피며 말했다.

“기사들이 힘겨운 역할을 맡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전력이 부족해서 애먹고 있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네. 어찌 됐든 우세를 점하고 있는 거야. 이유가 뭔가?”

“공화국이 전력을 아끼고 있기 때문이군요.”

“그래. 지크프리트와 제이크 본인은 고사하고 고스트라는 해골바가지 놈들도 안 올라오고 있어.”

“우리가 자리를 비우면 지크프리트가 여기를 바로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애매한 대답을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페일런 공작에게 카텔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카텔, 자네는 지크프리트의 속을 읽을 수 있나?”

“예? 아니요. 저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우리나라에서 지크프리트와 전략 전술로 맞설 수 있는 건 대공 전하와 세비안 백작 정도겠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니야.”

“…….”

담담하게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페일런 공작의 태도는 비굴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일세. 애당초 놈의 전략을 읽을 수 없으니 철저하게 정공법으로 일관하며 가장 중요한 킹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겠네.”

“그럼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글쎄….”

“…….”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지.”

페일런 공작의 흔들림 없는 말과 눈빛을 보고 카텔 후작은 레스터 왕국의 저력을 엿본 듯했다.

‘스트라부스 왕국 시절에 우리가 이렇게 겸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으면….’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속이 쓰릴 뿐이지만 역시 안 할 수가 없는 생각이었다.

“크하아아….”

“살아 있냐 릭?”

“몰라. 아마도…?”

릭과 토미는 반나절 내내 성벽 위에서 공화국군을 상대했다.

지금은 잠깐 교대를 위해서 다른 기사단에게 전투를 맡기고 본인들은 후방으로 빠져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부터 들이켜고 이어서 빵과 햄 덩어리를 급하게 쑤셔 넣었다.

“30분간 휴식, 그 후에는 바로 재 출진이다.”

토미의 지휘에 기사들은 쓰러져 누웠다.

여전히 성벽 위에서는 아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쉬어야 했다.

소모한 체력을 조금이라도 되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은 듯이 쓰러진 부하들 사이에서 릭이 토미에게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 중에 고스트 놈들 봤어?”

“아니, 아직 안 올라온 모양이다.”

“그렇지.”

“…….”

둘은 불안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밀턴을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며 지크프리트를 상대로도 여러 번 전쟁을 치러본 릭과 토미였다.

그러니 지크프리트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지금은 병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소모 역시 뭔가를 노리는 포석일 확률이 높았다.

“아…. 젠장,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네. 그 새끼 뭘 노리는 거야?”

릭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탄하자 토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돌대가리로 간파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놈이면 진작 주군한테 목이 날아갔겠지.”

“그래. 내 돌대가리…. 내가 왜 돌대가리야?!”

“네가 돌대가리라는 건 너희 어머니가 공식 인증해 준 사실이잖아?”

“쳇…. 그게 언제 적 얘기야.”

릭은 어린 시절 꽤 높은 나무 위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떨어지는 과정에서 바위에 머리를 찍기까지 했는데 그때 웃긴 것은 바위는 금이 갔고 어린 릭의 머리는 혹만 나고 말았다.

그때 릭의 어머니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제 아들을 돌대가리로 만들어 주셔서….]

그때 이후로 릭의 어린 시절 별명은 모친 공식 인정 돌대가리가 되었던 것이다.

“쿡… 쿡쿡….”

“젠장, 웃지 마. 인마.”

릭은 웃고 있는 토미를 보고 역정을 냈다.

그리고 토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용케 여기까지 왔어. 그냥 평민 출신인 우리가 지금은 일국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기사라니.”

“이게 다 형님 때문이다. 인마 나한테 고마워해.”

“그래. 고마워.”

“…뭐야? 너 뭐 잘못 먹었냐?”

토미가 너무 순순하게 고맙다고 말하자 릭이 오히려 당황했다.

하지만 토미는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이다. 어린 시절 기사가 되겠다고 막무가내로 영주성에 쳐들어가서 드러누웠던 또라이가 내 친구였기에 나도 여기까지 온 거지.”

“아니…. 그때는 그 뭐랄까?”

지금도 그렇지만 소년 시절의 릭은 꽤 충동적이었다.

[나는 학자가 될 거야.]

[나는 사냥꾼이 될 거야.]

[나는 대상인이 될 거야.]

[나는 해적왕이…·.]

등등의 결심을 종종 하고 그때마다 과묵한 친구인 토미를 끌어들였다.

뭐,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학자는 공부가 재미없어서 포기하고, 사냥꾼은 멧돼지한테 죽을 뻔해서 포기했고, 상인은 숫자가 어려워서 포기했다.

그리고 해적왕 어쩌고는 시도도 하기 전에 엄마한테 맞아 죽을 뻔해서 포기했다.

하지만 기사만큼은 달랐다.

정말 되고 싶었는지 결심하자마자 간도 크게 영주 성에 찾아가서 기사 시켜 달라고 드러누워 징징거렸다.

토미도 얼떨결에 친구 따라 같이 드러누워야 했고 말이다.

그러다 샌슨이 당시 소영주였던 밀턴의 검술 상대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종자로 거둬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냥 평민 소년이었던 이 둘이 지금은 기사로서 국가의 위기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토미는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만족스럽게도 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굳이 여한이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친구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 정도?

그러니 토미는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말했다.

“고맙다. 릭, 이 말은 꼭 해야 했…. 윽!”

말을 하던 토미는 갑자기 릭이 헤드 락을 걸어서 말을 멈췄다.

“닭살 돋게 할래? 이 자식은 가끔 분위기를 잡아서 탈이야.”

“이 새끼야. 모처럼 진지하게…. 됐다. 그냥 뒤져!”

다시 자연스럽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이었다.

“와아아아!!

“이겼다!”

둘째 날도 공화국의 공격을 버텨낸 레스터 왕국군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공화국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두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병사들을 충분히 쉬게 하라. 그리고 각 성벽의 책임자는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페일런 공작의 명령에 따라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어? 저기 공화국군 아니야?”

“뭐라고? 그놈들 설마….”

“젠장 보고해!”

레스터 왕국군이 막 한숨 돌리려고 하는 시기에 공화국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횃불을 가득 준비하고 몰려오는 그 모습에 지휘관들은 서둘러서 군사를 독려하며 다시 전투 준비를 했다.

“적습! 적의 공격이다!”

“전원 정해진 위치로 가서 준비하라!”

야간 공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야간에 성을 공격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원래 야간 전투는 낮에 하는 전투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올라가지만 그중에서도 야간 공성전은 특히 더 어려운 전투였다.

야간에 공성을 해봤자 성을 함락시키기는 어렵고 무의미하게 병사들만 잃은 뿐이다.

이건 전술에 관해서 약간만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데 전쟁의 귀재라고 할 수 있는 지크프리트가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성벽 위에 횃불을 있는 대로 밝혀라! 성벽위의 시계를 확보하고 전령은 두 배로 늘려라! 빈틈이 생기면 즉시 기사단이 달려갈 수 있게 하라!”

페일런 공작은 즉시 지시를 내려서 적의 공격에 대응했다.

“야간 공습이라….”

“지크프리트가 하는 일이니만큼 무슨 속셈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페일런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카텔 후작에게 말했다.

“카텔 후작.”

“말씀하시죠.”

“혹시 모르니 그대는 기사단을 거느리고 성문에 대기해 주시오.”

“성문을 지키란 말씀이십니까?”

레스터 왕국의 외성벽 성문은 철두철미하게 대비해놨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불안한지 페일런 공작은 카텔 후작을 보내기로 했다.

“야간을 틈타서 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오. 그러니 그대는 가장 중요한 성벽을 반드시 지켜 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카텔 후작은 대답한 후에 성문 앞에 가서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공성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성문이 뚫리는 것.

방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만전을 기울이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대총통 각하. 적들이 생각보다 야간 공성에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공화국의 참모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한 차례 전투에서 물러나서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의 긴장감을 빼 놓은 다음에 쳐들어간 야간 공습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자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아쉬울 것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포위망의 구성에 주력하고, 야간 공격조를 계속 투입하라.”

“예. 알겠습니다.”

“이만 쉬겠다.”

그리고 지크프리트 본인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통 자신이 맡은 전장은 두 눈으로 지켜보며 지시를 내리는 지크프리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야간 공격은 성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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