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흐읍!”
생명력을 아낄 것 없이 모조리 검에 쏟아부은 그는 강맹한 오러를 뿌리며 카텔 후작에게 돌격했다.
“죽어라. 망국의 찌거기!”
카텔 후작은 그런 6조의 조장을 보며 조용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리고 다음 순간…·.
스팟!
그의 몸이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동시에 번뜩이는 한 줄기의 섬광은 정확하게 6조 조장의 목을 관통했다.
“크….”
고스트 6조의 조장은 천천히 쓰러져갔다.
그런 그에게 카텔 후작이 말을 이었다.
“레스터 왕국의 라이언 카텔이다.”
“크으윽….”
“오늘 이 순간부터 말이지.”
그리고 고스트 6조의 조장이 털썩 쓰러지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라이언 카텔 후작 만세!!”
“레스터 왕국 만세!!”
카텔 후작의 대활약으로 성벽 위에 공화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자 레스터 왕국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맥카시 대장이 전사, 함께 올라간 고스트 6조와 7조도 전멸했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지크프리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맥카시 대장을 죽인 건 누구냐?”
“예. 그…. 라이언 카텔이라고 합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의….”
“알고 있다.”
지크프리트는 더 말할 것 없다는 듯이 전령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에 빠졌다.
‘레스터 왕국에서 말하는 철가면의 기사, 정체를 대강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라이언 카텔이었군. 하지만 그가 맥카시를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이었나? 아니야. 둘이 싸우면 십중팔구는 서로 죽일 텐데….’
라이언 카텔 후작이 맥카시를 죽이는 것은 잘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후에 고스트 두 개 조를 몰아붙일 정도로 기력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크프리트가 아무리 명석하다고 해도 레이라 여왕이 클라우디아를 이용해서 맥카시 후작에게 한칼 먹인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안트라스가 살아서 자초지종을 알았다면 전쟁 중에 차도살인(借刀殺人)의 모략을 펼친 레이라 여왕에게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사정을 모르는 지크프리트의 입장에서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 안에 숨겨진 실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그동안 레스터 왕국에 당한 것이 워낙 많았기 때문일까?
지크프리트의 사고는 저절로 신중한 쪽으로 흘러갔다.
지크프리트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참모진에게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의 동향은 감시하고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지금 위치는?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최대한 서둘러서 귀환 중이긴 하지만 대군을 이끌고 오기 때문에 15일은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흘 안에는 온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군.”
“…예?”
“밀턴 포레스트를 얕보지 마라.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종종 저지르는 인물이다.”
“아. 예….”
참모들을 수긍시킨 지크프리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성을 함락시키고 밀턴 포레스트의 가족을 잡기만 한다면 밀턴이 도착해도 우위에 점할 수 있다.
오히려 서둘러서 밀턴의 가족을 놓치게 되거나 자결이라도 하게 만들면 큰 문제다.
‘분노에 이성을 잃고 덤비는 놈을 상대할 만큼의 여력이 지금 나에게는 없어.’
대륙의 판도는 이미 레스터 왕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힘을 크게 소모한 지크프리트에게는 무조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는 신중하게 계산에 계산을 거듭했다.
“일주일.”
“예?”
“그 안에 수도를 무너트리고 우리들의 목적을 이룬다.”
지크프리트는 오늘 안에 성벽을 무너트리는 무리한 계책보다는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살려서 확실하게 일을 성공시키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맥카시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이상 적에게 자신이 모르는 전력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이라 여왕이 시도한 계책이 뜻하지 않게 지크프리트를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것이다.
덕분에 지크프리트의 공세는 조금이지만 늦춰졌다.
그러나 그만큼 지크프리트가 조금이라도 승률이 높은 필승의 책략을 선택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막아라! 절대 넘어오게 하지 마라!”
“화살을 성벽 아래에 집중해라. 눈 감아 쏴도 맞는다!”
“우오오오! 다 죽어라! 공화국 개새끼들아!!”
레스터 왕국군의 사기는 상당히 높았다.
라이언 카텔 후작이 레스터 왕국에 귀순했다는 정보는 고위층 일부밖에 모르는 정보였다.
하지만 이게 공개됨으로 인해서 아군의 사기에 이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라이언 카텔 후작은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성벽 위를 무인지경으로 누비며 활약했다.
덕분에 첫날에는 공화국의 거친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해가 저물며 공화국의 공세가 늦춰지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크게 함성을 질렀다.
“공화국이 후퇴한다!”
“와아아아! 우리의 승리다!”
“레스터 왕국 만세!”
엄밀히 말하면 후퇴하는 게 아니라 잠시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걸 말해서 초치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투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민병들은 자신들의 승리에 한껏 도취되었다.
레이라 여왕은 첫날의 전투가 끝나자 페일런 공작에게 말했다.
“성벽의 상태 점검을 비롯해서 군사적인 부분은 공작에게 일임하겠소. 그대의 명이 나의 명이니 만약 항명하는 자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려도 좋소.”
“감사합니다. 전하.”
사실 페일런 공작에게 항명할 정도로 간이 크게 부은 인간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왕의 권위를 실어주는 레이라였다.
그렇게 전선의 처리를 맡긴 후에 그녀는 호위 기사들을 거느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부상병이 치료받고 있는 후방이었다.
“저…. 전하!”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전하를 뵙습…. 큭.”
부상병들은 크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레이라 여왕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하며 말했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소. 모두 그대로 있으시오.”
그리고 여왕은 병사들을 하나하나 위문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워준 덕분에 오늘을 지킬 수 있었소. 레스터 왕가의 대표이자 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전…. 전하.”
“어찌 그런….”
“황송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병사들은 진심으로 황송해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일국의 군주가 자신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머리를 숙였다.
과연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누가 믿을까?
레이라 여왕의 카리스마와 처세술이 어우러진 결과이기 했지만, 병사들은 완벽하게 넘어왔다.
그녀는 병사들을 보고 말했다.
“적들의 공세는 며칠간 더 이어질 것이오. 힘겨운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그대들의 목숨도 위험해지겠지.”
“…….”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각오한 일이기도 했지만 역시 죽음을 입에 담으니 더 가까이 체감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병사들에게 레이라 여왕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티면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이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를 구하기 위해서 나의 남편이 포레스트 대공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소.”
“오오오….”
“대공 전하께서….”
밀턴의 이름은 확실히 레스터 왕국에서 신뢰도가 높았다.
그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적을 많이 물리칠 필요도 없소. 성 밖으로 나가서 무모하게 싸우지 않아도 좋소. 보급이 충분한 우리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그저 지키기만 하면 될 뿐. 그렇게 한다면 공화국의 배신자들은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그때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지켜주기 바라오.”
“옛! 반드시 지켜 내겠습니다!”
레이라 여왕의 옆에 있던 한 소년병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그러고 나서 정작 자신이 눈치 없이 나섰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대의 이름은?”
오히려 레이라 여왕은 화사하게 웃으며 그 소년병의 이름을 물었다.
“아…. 케빈입니다.”
“케빈, 그대를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 여왕은 가볍게 소년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소년병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제 이름은 잭슨입니다.”
“저는 다니엘입니다.”
“제 이름은….”
레이라 여왕의 위문으로 인해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막사는 순식간에 수도 안에서 가장 생기가 넘쳐나는 장소로 변해 버렸다.
부상병을 위문한 후에도 레이라 여왕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다독였다.
병사들에 대한 지시는 페일런 공작에게 일임했지만, 수도를 지키는 수성전에서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사기도 중요했다.
레이라 여왕은 그 부분을 자신이 세심하게 챙겼다.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만들기 위해서 모여 있는 아낙들이 있다는 곳에 가서는 자신이 직접 팔을 걷고 빵의 반죽을 돕기도 했다.
“전하, 어찌 이런 일을….”
“괜찮습니다. 지금은 저도 그대들과 같은 전쟁터에 남편을 보낸 한 명의 여인일 뿐입니다.”
“전하….”
여인들은 진하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는 엘리자베스까지 와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작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엄마…. 마마 여기 있어요.”
“그래. 고맙구나.”
그 두 모녀의 미담은 순식간에 성안에 가득 퍼져갔고 레스터 왕국의 수도는 그야말로 한마음이 되어서 공화국의 공세를 막아내고자 똘똘 뭉쳤다.
관민일체(官民一體)의 왕도.
이렇게 되면 어지간한 군략으로는 성을 넘기가 어려워진다.
어지간한 군략으로는 말이다.
다음날.
“전군! 진격하라!”
지크프리트의 호령에 따라 공화국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와아아아아!!”
“공화국 만세!”
“지크프리트 대총통 각하 만세!”
전날의 실패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센 기세로 뛰어오는 공화국군 병사들을 보며 레이라 여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그건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예전에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소. 지크프리트가 특수한 약물을 사용해서 일반 병사들을 광전사로 만든 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런 짓을….”
“그때 남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병사들이 약간 난폭해지는 정도였지만 끝에 도달했을 때는 몸에 창칼이 박혀도 신경 쓰지 않고 돌격할 정도였다고 하더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일런 공작은 레이라 여왕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적을 다시 분석했다.
‘그 약물의 효과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강해진다면, 지금 최대한 많은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쏴라!”
결국, 하는 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페일런 공작의 지시에 따라서 병사들이 화살을 날렸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각자 장비하고 있는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았지만 쏟아지는 화살 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중간중간에 쓰러지는 자들이 나왔다.
하지만….
“공격! 공격하라!”
“미래의 낙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
“우오오오오오오오!!!”
공화국의 병사들은 말 그대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또 넘으며 전진해 왔다.
금방 성벽 아래까지 도달한 그들은 갈고리와 사다리를 사용해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오게 하지 마라!”
“장창병은 적을 견제하라! 할버드를 든 병사는 갈고리를 끊어라!”
북부 기사단과 중앙 기사단이 열심히 병사들을 지휘하며 대응했다.
처절한….
피차간에 무수한 생명을 소모하는 처절한 공성전이 펼쳐진 것이다.
“전황은?”
“예. 병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서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지크프리트는 성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참모들의 보고를 받았다.
그의 시선은 성벽 위에 있는 레이라 여왕의 깃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성벽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되, 포위망을 절대 무너트리지 마라. 밀턴 포레스트의 가족을 놓치면 모든 것이 허사다.”
“옛!”
그런 지크프리트에게 제이크가 말했다.
“대총통 각하. 저와 고스트가 돌입하게 해 주십시오. 아직 운제가 몇 대 남아 있습니다.”
제이크는 자신이 직접 앞장서서 성벽을 공략하는 게 희생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놈들의 대응을 봤을 때 지금 상황에서 운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지금 적의 빈틈을 만들고 있다. 너와 고스트는 기다려라.”
“예. 알겠습니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제이크는 순순히 물러났다.
오랫동안 주군으로 모셔왔기에 알고 있다.
이럴 때의 지크프리트는 반드시 뭔가 성과를 낸다.
머릿속으로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고, 그 와중에 현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해서 작전의 성공률을 조금씩 높여간다.
그게 지크프리트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