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릭, 스승님에게 허락을 받았다.”
토미는 즉시 릭에게 달려가서 외쳤다.
“좋아. 그럼 해보자고.”
릭은 신나게 웃으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거 들고 따라와. 서둘러!”
“옛!”
병사들은 커다란 술통을 등에 업고 달리고 있었다.
“운제가 온다!”
“준비해라! 사다리가 걸쳐지는 순간 원진으로 입구를 포위하고 대응하라!”
북부 기사단의 기사단원이 큰 목소리로 외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화국의 마스터가 올라오면 모두 죽겠지.’
운제가 골치 아픈 것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너무 쉽게 성벽 위로 올려보낸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마스터가 올라온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목숨으로 시간을 끌며 아군의 마스터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다.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때….
“샌슨, 거기 좀 비켜!”
“무슨…. 릭 선배?”
페일런 공작의 밑에서 같이 훈련받은 북부 기사단이기에 릭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투석기 좀 빌린다.”
“예? 예. 그거야 상관없지만….”
“서둘러!”
릭은 성벽 위에 준비된 투석기에 병사들이 가지고 온 운제를 조준했다.
그리고….
“쏴라!”
신호와 함께 커다란 술통이 운제에 부딪혔다.
퍽! 콰직!
술통은 운제에 부딪히며 깨졌고, 그러면서 검은색의 액체를 흘렸다.
“불화살!”
릭이 크게 외쳤고 운제에 불화살을 조준했다.
“화공? 선배, 저렇게 커다란 물건에 불화살을 쏴도 그리 쉽게 불타지는….”
화르르르륵!
“엇?!”
말을 하던 북부 기사단은 깜짝 놀랐다.
릭이 쏜 화살이 운제에 맞자 불길이 확 타오른 것이다.
“좋았어.”
릭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운제에 탑승해 있던 공화국의 병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불…. 불이다!”
“어서 꺼!”
“제길, 물을 잔뜩 먹여 놨는데 어떻게….”
“이거…. 안 꺼져! 이 불은…. 크아아악!”
운제는 금방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릭이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이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운제와 그 운제에서 패닉에 빠진 공화국 병사들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선배, 뭘 한 겁니까?”
“주군이 알려 줬거든. 어차피 운제는 목제니까 화공으로 대응하는 게 정석이라고 말이야.”
“아니 그거야 알죠. 하지만 불화살 한 발에 그렇게 쉽게 타오를 리가 없잖아요? 물도 잔뜩 먹였을 테고, 또 병사들이 알아서 끄기도 할 텐데….”
“에잇, 나도 몰라. 시간 없다고. 그냥 주군이 알려주신 이 기름이 좀 특이한 거야.”
“예?”
“예전에 땅 파다가 나온 건데 주군이 석유라고 부른 물건이야. 듣기로는 동물의 뼈가 액체화…. 제길, 지금 이거 설명할 때가 아니지. 석유 두 통 놔둔다. 운제가 또 오면 대응해. 알았지.”
“예? 예. 알겠습니다.”
“엄중하게 관리해! 그거 한 번 불이 붙으면 꺼지지도 않는다!”
“옛!”
그리고 릭은 다른 곳으로 가서 똑같이 석유를 이용해서 운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밀턴이 석유를 발견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국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검은 물이 지면에서 나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가서 보니 원유가 콸콸 솟아나고 있는 지면을 발견한 것이다.
현대의 지구라면 노다지가 따로 없었지만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석유를 정제하고 이용하는 지식도 기술도 없으니 그냥 원유를 가능한 만큼 채취해서 혹시 모르니 보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릭과 토미를 비록한 최측근에게만 말해 두었다.
혹시 모르니 화공이 필요하면 이걸 사용할 것.
그리고 불이 붙으면 정말 꺼지지 않는 물건이니 엄중하게 다룰 것, 이라고 말이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라서 원정 중에는 가져가지 않고 왕궁의 지하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릭과 토미가 그걸 써먹기 위해서 어제 꺼내둔 것이다.
“크아아아아!”
“불이…. 불이 안 꺼져!”
“아아아아악!!”
사방에서 인간의 비명과 함께 불에 타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저런 게 있었던가?”
지크프리트는 사방에서 타오르는 운제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통총 각하. 운제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계속 번지고 있어서 병사들의 진입이 어렵습니다.”
“지금은 일단 물러나고 불길이 사그라지면 다시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변 참모들은 일시적으로 물러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정작 지크프리트 본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확실히 밀턴 포레스트가 없으니 다르긴 다르군. 어설퍼.”
그런 지크프리트를 보고 참모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아군의 병사들이 불에 타서 죽고 있는데도 어째서 지크프리트는 미소를 짓고 있을까?
지크프리트는 그런 참모들의 의문을 바로 행동으로 풀어 주었다.
“오늘 안에 성벽을 무너트린다. 제이크!”
“예. 대총통 각하.”
“맥카시 대장에게 고스트 6조와 7조를 맡겨라. 성벽을 넘는다.”
“예. 알겠습니다.”
제이크는 즉시 행동에 따랐고 참모들 중의 한 명은 다급하게 말했다.
“총통 각하. 불길이 너무 거셉니다. 운제도 거의 불타오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맥카시 대장이라고 해도 무리일 것입니다.”
“운제를 이용한다면 그렇겠지.”
“예?”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적들은 화공을 쓴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성벽으로 향하는 맥카시 일행을 가리켰다.
맥카시 대장.
한때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맥카시 오브라이언 공작이었지만 지금은 공화국의 맥카시 대장이 된 그는 고스트 두 개 조를 이끌고 성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하며 그는 왜 지크프리트가 자신에게 운제를 쓰지 않고 성벽으로 향하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과연…. 이놈들 지금 우리를 보지 못하고 있군.’
석유를 이용해서 대규모 화공을 펼친 건 운제를 파괴하는 것에는 유용했지만 역효과도 있었다.
대규모 화공으로 인해서 발생한 연기 때문에 시계가 나빠진 것이다.
맥카시 대장이 고스트 두 개 조를 거느리고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음에도 적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맥카시 대장님. 곧 성벽 아래에 도착합니다.”
“갈고리를 꺼내라.”
“옛!”
성벽 아래에 도착한 고스트 6조는 갈고리를 꺼내서 그대로 힘껏 위에 던졌다.
카카칵!
성벽 위에 단단하게 갈고리가 걸리자 맥카시가 바로 명령을 내렸다.
“올라간다. 7조는 밑에서 대기, 활로 엄호하며 아군이 다 올라가면 따라서 올라와라.”
“옛!”
빠르게 지시를 내린 맥카시는 자신도 직접 갈고리를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적이 올라온다!”
“갈고리를 잘라! 못 올라오게 떨어트…. 커억!”
성벽 위에서 갈고리를 잘라 버리려던 레스터 왕국의 병사들은 밑에서 올라온 화살에 맞고 쓰러져 버렸다.
몇몇 병사들이 바싹 숙이고 접근해서 갈고리를 끊으려고 했지만, 철사를 섞어서 꼬아 놓은 밧줄은 좀처럼 잘리지가 않았다.
“제길, 도끼 가져와 도끼! 칼로는 무리야.”
“지금 가져가고…. 큭! 올라온다.”
“창으로 찔러!”
성벽 위의 병사들은 갈고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을 창으로 찔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턱!
상대가 안 좋았다.
맥카시는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을 찌르려는 장창병의 창을 잡았다.
그러고는….
“꽉 잡아라!”
그 한마디를 한 후에 창을 있는 힘껏 당기며 그 힘을 이용해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크억!”
“아악!‘
성벽 위로 솟구쳐 오르며 번뜩이는 두 번의 섬광.
그것으로 갈고리의 밧줄에 칼질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내가 맥카시다! 레이라 폰 레스터는 목을 내놔라!”
마스터가 성벽 위에 올라와 버렸다는 것이다.
공성전에 있어서 마스터가 성벽 위에 올라온다는 것은 댐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다.
서둘러 막지 않으면 그 구멍을 통해서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실제 맥카시가 날뛰는 곳을 통해서 고스트 6조가 올라왔다.
그리고 뒤이어 7조가 올라오고 있으며 뒤에 공화국 병사들 역시 올라오려 대기를 하고 있다.
성벽 위에 적들이 거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페일런 공작님. 공화국의 맥카시가 성벽 위에 올라왔습니다.”
“큭…. 내가 간다!”
운제를 다 부쉈는데도 기어코 공화국의 마스터가 성벽 위에 올라와 버리고 말았다.
페일런 공작은 이 사태를 막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공작, 전선의 전체적인 지휘에 집중해 주시오.”
옆에 있던 레이라 여왕이 페일런 공작을 말렸다.
“전하. 제가 가지 않고는….”
“이미 그가 갔습니다.”
“그라면…. 아!”
“맥카시 오브라이언의 목은 그의 것입니다.”
레이라 여왕의 말에 페일런 공작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표정을 지었다.
‘인연의 상대이니…. 하지만.’
“그 혼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라 여왕은 담담하게 대꾸했고 페일런 공작은 순간 깨달았다.
“뭔가 수를 써 두셨습니까?”
“명예로운 공작이 알아야 할 일은 아닙니다.”
레이라 여왕의 말에 페일런 공작은 담담하게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페일런 공작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인 레이라 여왕이 마냥 깨끗하게 이상적인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를 따르고 있는 페일런 공작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은 레이라 여왕이 이런 식으로 장담을 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어울리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전하를 믿자.’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하나다.
“화염의 연기를 틈타서 적이 올라오고 있다. 성벽 위의 방어에 철저히 하라. 성벽 바로 아래에 화살을 집중시켜라!”
페일런 공작은 현장을 지휘하며 다른 곳에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했다.
“레이라 여왕은 어디 있느냐! 레이라!!!”
맥카시는 성벽 위에 어느 정도 거점을 만들자 미친 듯이 돌진하면서 레이라를 찾았다.
전쟁터에서 적국의 수뇌를 노리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지금 맥카시의 모습에는 전쟁의 승리를 떠나서 사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왜냐하면…·.
[미안하게 되었네. 맥카시 대장. 자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라우디아가 레스터 왕국에 납치되어 버렸네.]
지크프리트는 클라우디아를 레이라 여왕에게 넘겨준 후에 맥카시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맥카시는 지크프리트가 클라우디아를 넘겨줬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 클라우디아는 지크프리트의 친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된 정보였지만 그는 그걸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클라우디아에게 완전히 홀려 있는 그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고, 그렇기에 지크프리트의 말도 믿은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아직 아내인 클라우디아가 살아 있다면 레이라 폰 레스터를 사로잡아서 구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두 꺼져라!”
레이라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날뛰는 맥카시는 그 중간에 있는 적들을 박살 내며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여보!”
미친 짐승처럼 날뛰고 있던 맥카시의 귀에 똑똑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여성.
잊을 수 없는 여성.
꿈에서도 그리며 봤던 여성.
클라우디아가 성벽 아래에서 꽁꽁 묶인 채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클라우디아!”
그는 그대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머릿속에 왜 그녀가 저기에 있는지를 판단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다른 건 몰라도 클라우디아를 향한 맥카시의 사랑만큼은 진심이고, 또한 맹목적이었다.
“맥카시 대장님! 단독 행동은 위험합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뒤편에서 고스트 6조의 조원들이 크게 외치며 그를 말렸지만 맥카시는 무조건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비켜라!!”
그의 앞길에 있는 병사들로서는 재난이 따로 없었다.
그의 거친 돌진에 의해서 피보라가 일어나고 시신이 쌓였다.
그렇게 그가 성벽 아래에 묶여 있는 클라우디아에게 막 도착했을 때.
“지금이다!”
“쏴라!”
신호와 함께 사방에서 그를 향한 화살이 쏟아졌다.
“건방진 것들!”
맥카시는 눈에 불을 켜고 검을 휘둘렀다.
클라우디아를 미끼로 자신을 유인하고 거기에 파 놓은 함정.
확실히 이건 알아도 피할 수 없는 함정이었다.
하지만….
“우습게 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