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45화 (245/257)

제245화

“…….”

클라우디아는 공복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로 이런 제의를 하는 걸까?

외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절 알 길이 없는 클라우디아로서는 레이라의 속내를 전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하고 있는 제의도 그녀에게 더 큰 절망을 안겨주기 위한 함정이 아닐지 의심스러웠다.

‘저 독한 년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용서할 리가 없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클라우디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라의 제의가 의심스러웠다.

다만 문제는….

“빨리 대답해.”

“큭….”

아무리 의심스럽다고 해도 지금 레이라의 제의를 거부하기에는 클라우디아의 상황이 너무나 나빴다.

솔직히 그녀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감지덕지하며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클라우디아가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자 레이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가장 잘하는 짓을 해야겠지.”

그리고 레이라는 전쟁에 앞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를 하루 거리에 두고 지크프리트는 특급 기밀의 전서구를 받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실패군.”

전서구를 구기면서 이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지크프리트에게 제이크가 말했다.

“여왕이 탈출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탈출하도록 최대한 유도를 했지만 수성을 선택하기로 했다고 하는군.”

“아쉽군요.”

“11조와 12조를 불러들일까요?”

“아니, 혹시 모르니 일단 대기시켜 두도록.”

지크프리트는 빠르게 진격을 하면서 레이라 여왕이 수도를 떠나 피신할 경우에 대비해서 손을 써 두었다.

고스트 11조와 12조.

원래 고스트는 열 개 조가 끝이었지만 데이비드의 요청에 따라 암살과 정보 수집에 능숙한 두 개 조를 더 만들었다.

그게 11조와 12조였다.

전쟁터보다는 공화국 내부의 민심 조작이나 정치적 반대 요소를 처리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지크프리트의 숨겨진 칼날이었다.

이 두 개의 조를 먼저 선행시켜서 레이라 여왕이 피신할 수 있는 길목에 대기시켜 두었다.

만약 레이라 여왕이 왕가의 가족을 이끌고 후퇴했다면 미리 심어둔 세작으로 목적지를 알아내서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 밀턴의 가족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수도 공략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밀턴 포레스트의 약점은 가족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군주라면 자신의 식솔이라고 해도 나라의 명운 앞에서는 외면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밀턴은 다르다.

이전에 레스터 왕국의 수도에 갔을 때 그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지크프리트는 확신했다.

밀턴 포레스트는 결코 가족보다 나라를 우선시할 수 있는 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 약점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여러 가지로 활용했을 텐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쉬울 뿐이었다.

어쨌든 지난 일은 생각해도 소용없다.

“정면 공격으로 레스터 왕국의 수도를 무너트린다. 전군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라.”

“옛!”

이제는 힘으로 마지막 기회를 움켜잡을 뿐이다.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8만의 공화국군이 레스터 왕국의 수도 외성벽에 도착했다.

“저게 공화국군인가?”

“지크프리트가 어디 있는 거지?”

“젠장, 여기서 보일 리가 없잖아?”

“왜 안 보여. 저기 저 화려한 깃발 아래에 있는 것 아니야?”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자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은 불안감에 웅성거렸다.

아무리 각오를 다졌다고 해도 막상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수성의 지휘권을 쥐고 있는 페일런 공작은 민병들의 사이사이에 북부 기사단을 포함시켜 두었다.

하지만 이걸로 민병들의 사기를 완전히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페일런 공작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북부 기사단이 민병들을 상대로 독전대 비슷한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라는 남자는 항상 적의 약점을 잘 찌르는 남자였다.

“민병들을 흔들어 봐야겠군.”

그렇게 말한 지크프리트는 병사로 성을 둘러싸게 한 후에 자신은 홀로 성벽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인은 공화국의 대총통 지크프리트다!”

커다란 목소리로 성벽 위의 모든 병사들이 들릴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저게 지크프리트?”

“공화국의 대총통인가?”

“그 대공 전하와 무수한 전쟁을 치렀다는….”

성벽 위의 백성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레스터 왕국의 국민들은 밀턴을 영웅으로 여기고 그가 지크프리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영웅 밀턴 포레스트에 대한 선망이 강하기 때문에 라이벌 구도에 있는 지크프리트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밀턴과 무수한 전쟁에서 부딪히고도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가?

지크프리트는 자신의 존재감을 단번에 과시한 후에 성벽 위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병사도 아닌 그대들이 스스로 무기를 쥐고 성벽 위에 올라 맞서겠다는 각오는 대단하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말을 강하게 끊었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들의 순수한 각오와 선의는 지배자의 권력 구조를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지크프리트는 성벽 위를 향해서 계속 외쳤다.

“그대들이 피를 흘려 싸우고 성벽을 지킨다고 해도 결국 변하는 것은 없다. 여전히 그대들의 머리 위에는 귀족이 있고, 그 위에는 왕족이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암울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그대들이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

지크프리트는 양손을 넓게 펼치고 당당하게 외쳤다.

“지금 즉시 성벽을 열고 항복하라! 우리 공화국은 진정한 민중의 편이다. 그대들의 목숨을 보장하고 나가서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할 것이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병사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당장 목숨을 보장하겠다는 말은 전쟁의 스트레스로 압박을 받고 있던 병사들에게 상당히 강렬한 유혹이었다.

“용기를 내어라! 지배자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라!”

확실히 말해서….

지크프리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단신으로 나와서 세 치 혀로 민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변설에 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쌓아 올린 업적과 언행 전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만, 이 세상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지크프리트 한 명만은 아니다.

“수치도 모르는 위선자가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성벽 위에서 갑옷을 입고 검을 차고 있는 레이라 여왕이 일갈했다.

“…….”

그러자 지크프리트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보고로 듣기는 했지만 정말이었다.

완전 무장을 하고 민중을 선동했고, 지금은 성벽 위에 스스로 서 있기도 했다.

레이라 여왕은 지크프리트를 향해서 손가락을 뻗고 말했다.

“공화국이 제국에 의해서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 누구더냐?! 내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원군을 보내 달라고 빌었던 것이 누구더냐?!”

레이라 여왕의 말에 성벽 위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공화국군마저 흔들렸다.

“뭐라고 하는 거지?”

“대총통 각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해?”

“그럴 리가…. 없어.”

공화국의 병사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느낀 지크프리트는 이를 악물었다.

‘저 망할 년이….’

레이라는 진실 속에 과장에 가까운 약간의 거짓을 심어서 말하고 있었다.

이런 말은 신빙성이 높아서 효과가 높은 법이다.

레이라 여왕은 계속해서 지크프리트에게 말했다.

“구국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답이 배신의 칼날이더냐?! 수치를 알아라. 이 짐승 같은 것!”

레이라 여왕의 말은 마스터의 칼날 보다 더 날카롭고 치명적이었다.

지크프리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외쳤다.

“거짓 선동으로 민중을 어지럽히지 마라! 레이라 폰 레스터! 그대야말로 우리 공화국이 오랜 시간 동안 무찌르기 위한 지배자의 악 그 자체….”

“말이 많구나.”

지크프리트의 말을 끊은 레이라 여왕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고 말을 이었다.

“진실 되지 못한 자들은 항상 그러한 법이지.”

지크프리트는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요물하고 언쟁을 벌이면 안 돼.’

언쟁으로는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를 않았다.

“타협의 여지가 없군. 레이라 폰 레스터! 그대의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어디 해 봐라.”

레이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크프리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군!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

“공화국 만세!”

“지크프리트 대총통 만세!”

포위망을 완성한 공화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퍽! 퍼퍽!

화살이 날아와서 레이라 여왕의 앞에 있는 방패에 틀어박혔다.

“전하, 성벽 위는 위험합니다. 우선 내려가셔야 합니다.”

호위 기사가 성벽에서 내려갈 것을 권했지만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가 성벽 위에 있음으로 인해서 병사들의 사기에 끼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그건…. 하오나….”

“그만, 그대들을 믿겠다. 나는 나의 역할을 할 테니, 그대들은 그대들의 역할에 충실하라.”

레이라의 단호한 명령에 호위 기사들도 각오를 다지고 말했다.

“반드시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호위 기사단장이 말했다

“전 기사는 카이트 실드를 들고 여왕 전하의 사방을 경계하라. 방어막은 3중으로 만든다.”

“옛!”

레이라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있는 지금 이곳으로 공화국의 병사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올 것은 분명했다.

‘올 테면 와라!’

‘반드시 지켜낸다.’

호위 기사들은 전의를 다지고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들의 시체를 넘기 전에는 레이라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운제인가? 저걸 만든 대공 전하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지는군.”

페일런 공작은 공화국군이 밀고 들어오는 운제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밀턴이 고안하고 만들어낸 공성 병기였는데 그 효용성이 인정받아서 이제는 대륙에서 흔하게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된 무기였다.

‘성벽이 가지는 높이를 무효화시키기 때문에 꽤 곤란하단 말이지.’

페일런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북부 기사단에 지시를 내렸다.

“운제가 사다리를 걸치는 곳에 기사단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라! 공화국의 마스터가 돌입할 수 있으니 그때는 방어에 주력하며 버티고 즉시 위치를 보고하라!”

적이 운제를 동원한 이상 성벽 위에 적의 병사가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라는 가정하에 최선의 대응 지시를 내린 페일런 공작이었다.

그런데 그때….

“스승님. 잠시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토미, 무슨 일이냐?”

페일런 공작에게 말을 건 것은 북부 기사단 소속의 토미였다.

원래 밀턴의 직속 기사인 토미였지만 지금은 릭과 함께 북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밀턴이 원정을 향해서 출발할 때 둘 다 전염병으로 독한 폐렴을 앓았기 때문에 수도에 남았던 것이다.

그런 토미가 페일런 공작에게 말했다.

“적이 운제를 무력화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뭐라고?”

“주군에게 예전에 들었습니다. 운제의 약점과 대응 방법을…. 혹시 몰라서 릭과 함께 병사들을 동원해서 미리 준비를 해 놨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예. 무슨 방법이냐 하면….”

“해라!”

“…예?”

“느긋하게 설명 같은 것들을 시간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즉시 해 버려라!”

“예!”

페일런 공작은 토미가 허튼소리를 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귀재이자 운제를 직접 고안한 밀턴 포레스트가 말한 운제의 대응법이라면 무조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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