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44화 (244/257)

제244화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비추는 정오.

레이라는 왕궁의 광장에 수도의 시민들을 모았다.

왕실의 행사가 있을 때나 동원되는 중앙 광장에 시민들이 가득 들어찼을 때 레이라는 자신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등장했다.

온몸을 휘감고 있는 망토와 왕가의 홀을 손에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아이를 낳았지만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빛나는 그녀의 미모는 존재만으로도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하께서는 아직 피난 가지 않으신 건가?”

“우리를 불러 모은 이유는 뭐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이 민중에게 희망이 될 수는 없었다.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군중들은 무기력한 눈을 하고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분위기가 무서운지 엄마인 레이라의 손을 꼭 잡고 칭얼거리듯이 불렀다.

그러자 레이라는 엘리자베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잘 지켜보렴.”

“…….”

그 순간 엘리자베스는 엄마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엄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해주던 엄마가 아니었다.

어린애는 어른 같은 논리적인 사고는 부족할지 몰라도 분위기를 읽는 능력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본능적으로 엄마가 평소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린 엘리자베스에게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엄마 레이라가 아니라 레스터 왕국의 군주인 레이라 여왕은 말이다.

“왕국의 백성들이여. 들으라.”

위엄이 담겼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은 음성.

레이라의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모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가 한마디를 하자 웅성거리던 군중들이 동시에 말을 멈추고 그녀를 주목했다.

레이라는 한 호흡 쉬어서 자신에게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공화국의 지크프리트가 군사를 이끌고 우리들의 땅을 침범했다. 그 규모는 대략 8만으로 추정된다.”

레이라는 쓸데없는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거짓을 입에 담았다가 군중들 속에 섞인 공화국의 세작들에게 지적을 당하게 되면 오히려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 군의 방위 전력은 4만. 왕국의 수호신인 페일런 공작이 함께하고 있기는 하지만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나쁜 상황을 인정했다.

시민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불안감이 번졌다.

“역시 도망가야 해.”

“여왕 전하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신 거야.”

사람들의 불안감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레이라 여왕이 말했다.

“허나 후퇴는 없다.”

레이라는 단호하게 후퇴가 없다는 사실을 단언했다.

그리고 왕국의 시민들이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다. 우리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 지금 수도를 잃는다 함은 공화국에게 부활의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또다시 전쟁의 시대를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레이라의 말에 시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레이라 여왕의 옆에 있는 엘리자베스에게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다.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이 순간 민중들에게 엘리자베스는 다음 세대를 연상하게 하는 상징과 같았다.

“이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짐의 남편인 포레스트 대공은 군사를 이끌고 제국의 원정길에 올랐다. 짐뿐만이 아니다. 그대들 역시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들 역시 나의 남편과 함께 제국에서 싸우고 있다. 오직 이 혼란의 난세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대의에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레이라 여왕의 말에 몇몇 여인들이 눈물을 울컥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이들이 공감대를 느낀 것이다.

“우리가 수도를 포기하게 되면 그들의 피로서 바친 업적이, 우리들의 다음 세대의 평화가 사라진다. 그걸 막기 위한 수단은 딱 하나.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것이다!”

레이라 여왕의 말에 군중들은 자신들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누구나 작고 연약하고, 이기적이다.

정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해도 누구나 가슴속에 자신의 정의를 품고 있는 법이다.

군주라 함은 가장 강한 인간이 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현명한 인간이 하는 것도 아니다.

군주의 진정한 역할은 모두를 앞에서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레이라의 연설은 지금 이들의 가슴속에 있는 정의감을 하나씩 일깨우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이들의 뜻이 헛되게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화의 시대를 물려주지 않고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레이라는 우리들의 목숨을 바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대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생각하자 그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위험해. 저 여자…. 남편인 포레스트 대공 못지않게 위험한 여자야.’

그리고 그는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군중들 속에 숨어 있는 공화국의 세작이 크게 외쳤다.

“이기적인 소리 하지 마시오!”

열광적으로 끓어오를 것 같던 대중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말해 놓고 가장 먼저 죽는 건 우리 같은 천것들 아니오!”

“맞다. 결국 상황이 불리해지면 왕족이나 귀족들은 모두 도망가 버릴 뿐이야.”

“실제 당신 아버지도 예전에 그랬잖아?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못 할 리가…. 큭!”

“이 새끼가 여왕 전하에게 감히!”

“내가 틀린 말 했냐?!”

세작들은 군중들과 충돌하면서도 끝까지 자신들이 할 말을 다했다.

덕분에 분위기는 다시 혼란스러워지려고 했지만 레이라가 당당하게 말했다.

“짐은 도망가지 않는다. 최후까지 그대들과 함께 이 땅을 지킬 것이다.”

“그런 말뿐….”

크게 소리치던 세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레이라가 자신의 몸을 감고 있던 커다란 망토를 벗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녀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얇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허리에 검을 뽑아서 민중을 향해서 크게 외쳤다.

“짐은 레스터 왕가의 후예이자 전신(戰神) 밀턴 포레스트 대공의 아내이다. 절대 공화국의 침략자들에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외침에는 위엄과 함께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거짓일 리가 없다.

저건 진심이다.

누가 들어도 그렇게 느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진실로 가득했다.

검을 불끈 쥐고 레이라 여왕이 크게 외쳤다.

“왕국의 백성들이여! 싸워라!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평화는 손에 넣을 수 없다!”

그 순간 그녀의 위엄은 정보 조작을 위해서 감언(甘言)이나 지껄이는 세작들 따위가 어찌 흠을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저도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여왕 전하 만세!”

“레스터 왕국 만세!!”

시민들의 가슴속에 불안감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투쟁심이 가득 찼다.

그들의 투쟁심을 일으킨 것은 이 싸움에서 이어지는 미래의 희망을 보여준 레이라 여왕의 왕도 그 자체였다.

“엄마, 굉장해.”

그리고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광경은 이 작은 소녀의 가슴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되었고, 소녀의 인생에 커다란 지표가 되었다.

8만 대 4만이라는 병력 규모가 크게 변했다.

레이라 여왕의 연설로 인해서 민중이 크게 일어났고 덕분에 민병이 대량으로 응모했다.

다행이도 레스터 왕국의 수도에는 병장기가 충분했기 때문에 즉시 6만의 시민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모든 전투가 그렇지만 수성전에서 병력의 숫자는 크게 도움이 되는 법이다.

민병을 무장시켜서 성벽 위에 올려두고 활을 쏘는 것을 급하게 가르치기만 해도 유용한 전력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불안 요소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마스터의 숫자였다.

“페일런 공작, 공화국의 마스터 중에 그대가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나요?”

“설령 슈바이커 공작이나 바론 대장이 무덤에서 살아난다 할지라도 반드시 막아 보이겠습니다.”

페일런 공작의 대답은 충성스럽고 믿음직했지만 지금 레이라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객관적인 전력 평가를 알아둬야 하기 때문이에요. 냉정하게 말해 주세요.”

그 말에 페일런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지크프리트나 맥카시 오브라이언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이크는….”

“어렵나요?”

“우리 레스터 왕국에서는 테이커 후작이 오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과연…. 그렇군요.”

레이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스터의 숫자 차이도 3대2인데 여기서 상대편에 감당할 수 없는 강자까지 한 명 있는 상황이다.

“공화국군은 지금 어디까지 왔죠?”

“두 시간 전에 게오르만 성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마….”

“오늘 새벽, 아니면 내일 아침에는 수도에 도착하겠군요.”

드디어 공화국군이 지척까지 도착한 것이다.

‘주변에 원군을 보내서 마스터를 먼저 보내달라고 할 여유도 없구나. 그렇다면….’

레이라 여왕은 생각 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생각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찾아내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이럴 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기어코 찾아낸다.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다녀오십시오.”

어디에 무슨 용무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레이라 여왕을 모셔온 페일런 공작은 그저 그녀를 믿을 뿐이었다.

레이라 여왕은 아무런 호위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도착한 곳은 왕실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지하 감옥이었다.

간수는 레이라 여왕을 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오셨습니까? 전하.”

“죄인은 살아 있나?”

“예. 말씀하신대로 살려두고 있습니다.”

“잠시 보겠다.”

“예. 그럼….”

간수는 감옥의 문을 열었고 레이라는 감옥 안에 들어가서 죄인을 보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

“…레이…라.”

레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죄인에게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살면서 믿을 건 외모뿐인 게 너였는데 이제는 그것도 볼품없어졌군.”

“…….”

“기분은 어때? 클라우디아 바모스.”

레이라가 찾아온 죄인은 클라우디아였다.

지크프리트나 엘리제에 비하면 클라우디아는 악당으로 분류한다 쳐도 꽤 피라미다.

한때 레스터 왕국의 왕자와 결혼해서 왕위 경쟁 구도에서 악녀 짓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역시 피라미일 뿐이다.

단, 그녀가 지은 죄의 경중과 별개로 레이라에게 있어서는 인생에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라에게 있어 클라우디아는 어머니와 친오빠를 죽인 원수였다.

자신도 죽을 뻔했지만 페일런 공작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후에 다시 재기하고 밀턴과 함께 왕위를 되찾기도 했지만 클라우디아를 향한 복수심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건 이미 감성적인 복수욕을 충족하느냐 못 하느냐를 넘어서 그녀의 인생에 짊어지고 있는 의무였다.

그래서 지크프리트와 일대일로 회담을 해서 클라우디아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레이라가 그녀에게 내린 벌은 한가지였다.

굶주림.

레이라는 클라우디아에게 죄를 자백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고 용서할 생각은 더욱더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생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문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고문은 수명을 단축시킨다.

레이라는 그녀가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 받기를 원했다.

가능하면 평생에 걸쳐서 말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내린 형벌은 최소한의 식량만을 제공하는 감금형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의 식량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이었다.

덕분에 클라우디아는 항상 지옥 같은 공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자살의 위험성이 있는 도구도 모두 처리한 밀실 속에서 그녀는 점점 말라비틀어져 갔다.

사실 레이라는 이대로 클라우디아가 죽을 때까지 방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찾아온 것은 그녀에게 나름의 쓸모가 생겼기 때문이다.

“돌려서 말하는 건 피차 싫어하는 성격이지. 너한테 기회를 주기 위해서 찾아왔어.”

레이라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클라우디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회?”

“그래. 살 수 있는 기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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