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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42화 (242/257)

제242화

“후우우우…. 회담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네. 단, 레스터 왕국의 포레스트 대공에게 두 가지 조건을 반드시 들어줄 것을 전하게.”

“말씀 하십시오.”

“하나, 앤드루스의 명맥은 이어가게 해줄 것. 둘, 지금 당장 제국의 국내를 어지럽히는 공화국군과 3국 연합의 침공을 막아줄 것.”

황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나는 항복하겠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고담 후작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담 후작은 돌아가서 황제의 뜻을 전했고 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 덩치의 국가를 무리하게 멸망시켜 봐야 혼란을 초래할 뿐. 당연히 명맥은 유지하게 해줄 것이오. 그리고 황제가 항복한다면 3국 연합과 공화국군을 회담의 테이블로 불러서 휴전 협정을 체결할 것이니, 두 가지 조건 모두 문제없소.”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그렇게 밀턴이 모든 조건을 허락했고, 황제와의 회담 자리가 마련되었다.

레스터 왕국군은 황도 안에 들어가서 영광의 광장에 회담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황도의 모든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밀턴과 길버트 황제가 만났다.

“그대가 포레스트 대공이군. 생각보다 젊어.”

“당신도 거대한 제국의 황제치고는 젊지.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밀턴의 말에 길버트 황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다르지. 자네는 영웅이고, 나는… 그저 몰락한 황제일 뿐일세.”

“…….”

“이제는 곧 황제조차 아니게 되겠지.”

그리고 길버트 황제는 밀턴에게 다가가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큭….”

“폐하. 어찌….”

“아니됩니다. 폐하! 폐하!”

제국의 황제가 타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앤드루스 제국의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일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국의 충신들은 참담한 심정에 눈물을 흘리며 분해했다.

하지만 황제는 담담하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완수했다.

“나, 길버트 테레 앤드루스 황제는, 현 앤드루스 제국의 황제로서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대공에게 항복하오.”

“받아들이겠소. 제국의 마지막 황제여.”

밀턴은 그렇게 말한 후에 황제의 머리에 있는 관을 거두었다.

앤드루스 제국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레스터 왕국 만세!”

“포레스트 대공 전하 만세!”

제국의 심장에서 레스터 왕국군의 승리의 함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밀턴은 황제, 아니 이제는 국왕이 된 길버트 왕과의 약속을 지켰다.

앤드루스 제국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니라 왕국으로 격하되었지만 그 나라의 명맥은 지켜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밀턴은 우선 공화국과 3국 연합에 빠르게 사신을 보냈다.

- 지금 이 순간을 기해서 앤드루스 왕국은 우리 레스터 왕국에 항복하여 보호국이 되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앤드루스 왕국의 국내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국에 대한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군사적으로 대응할 것을 밝힌다.

귀국은 즉시 침략 행위를 멈추고 황도로 대표자를 보내서 회담의 자리에 응하라.

만약 이를 무시하고 전쟁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 서신을 공화국과 3국 연합에 모두 보냈다.

그러자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공화국과 3국 연합은 당장에 전쟁 활동을 중지하고 본국에 상황을 알렸다.

제국은 이제 무섭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대륙의 패권을 잡고 신흥 최강국으로 부상하려 하고 있는 레스터 왕국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공화국군과 달리 3국 연합은 국력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결국 그들은 회담의 자리에 응하기로 했다.

밀턴은 그들에게 막연한 위협만 가한 게 아니라 충분한 당근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회담에 응한다면 그들이 점령한 앤드루스 왕국의 영토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어차피 앤드루스 왕국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힘을 빼놔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제후국들이 점령한 영토의 일정 부분을 어느 정도 떼어주며 앤드루스 왕국을 왕국에 어울리는 덩치로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앤드루스 왕국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이 전쟁의 패배자이고, 패배자에게는 자신의 것을 주장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3국 연합을 진정시킨 밀턴은 구황도, 이제는 앤드루스 왕국의 수도에 머물며 3국 연합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공 전하.”

“후우우…. 이런 건 원래 레이라가 더 잘하는데 말이야.”

밀턴은 바쁜 일정 속에서 세비안 백작과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었다.

“황도, 아니 수도와 점령지의 민심에 문제는 없나?”

“예. 기본적으로 병사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고, 본국에서 물자를 동원해서 지원 정책까지 하고 있기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그렇다 치고, 귀족들은?”

“아직은 좀 반항적인 기색이 강합니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무슨 모의를 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차라리 자살을 하는 이들은 있습니다만….”

“정복자는 모두 악당이라더니…. 나도 어쩔 수 없군.”

밀턴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국의 귀족이나 기사들 중에 상당수가 앤드루스 제국의 몰락을 비관하며 자살하거나 하야하고 떠나갔다.

개중에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에 대한 비 판과 침략자인 밀턴 포레스트에 대한 원망을 유서로 남기고 자살한 이도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밀턴은 침략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공 전하께서 그들의 죽음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저 앤드루스 왕국의 수많은 백성들을 살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셔야죠.”

“아네. 내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밀턴은 차의 맛이 더 쓰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차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공화국의 반응은?”

“아직 답이 없습니다.”

“지크프리트 그놈이 야망만 접어주면 이제 내 세대에서 할 일은 끝인데 말이야.”

제국이 몰락한 지금 공화국은 레스터 왕국의 마지막 적수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밀턴이 먼저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길버트 황제를 사로잡음으로 인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앤드루스 왕국을 안정화시키며 이전에 제후국이었던 3국 연합까지 조율하게 되면 레스터 왕국은 사실상 제국이었다.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의 전력이 대등하다고 해도 남부의 앤드루스 왕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공화국을 압박할 수 있다면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의 전력 차이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화국은 야망을 접어야 한다.

‘아마 내 후대까지는 냉전 시대 비슷한 체제 경쟁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규모 전쟁은 이제 좀 자제할 수 있겠지.’

밀턴은 드디어 이 시대의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크프리트라고 해도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수를 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레스터 왕국의 동부 국경 지대.

원래 공화국과의 전쟁을 염려해서 튼튼하게 방비를 해놨던 요새였지만 지금은 그 요새를 지키는 병력이 조금 줄어 있었다.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공화국과 군사 동맹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도 조금씩 군기가 풀어져 있었다.

“하아아암…. 졸려 죽겠네.”

“좀 참아. 교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알아. 그보다 끝나고 어때? 새벽까지 여는 술집 뚫었는데 말이야.”

“그래? 그럼 끝나고 같이 가….”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 누구?”

푸욱!

“커억….”

보초를 서던 병사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물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복부를 파고드는 칼날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을 처리한 인물들은 암살자나 입을 것 같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몸놀림을 보면 보통 암살자보다 훨씬 뛰어나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지크프리트가 가장 아끼는 전력인 고스트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성벽 위에 보초들을 은밀하게 처리한 후에 서둘러 성문의 개폐 장치를 장악하고 성문을 열었다.

그러자 공화국군의 병사들이 어둠을 틈타서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크악!”

“이놈들 휴전 협정 중에 감히…. 커억….”

“아아아악!”

레스터 왕국의 요새 병력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싸우려고 했지만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무엇보다 너무 완벽한 기습이었기에 대응할 길이 없었다.

고스트는 성문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성문 밖으로 전령 한 명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가기 전에 고스트 정예 대원들은 성 하나를 완벽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제이크가 이 상황을 지크프리트에게 보고했다.

“대총통 각하. 성을 완벽하게 장악했습니다.”

“포로는?”

“명령하신 대로 없습니다.”

“엘리제?”

“불렀나요?”

“전서구가 날아간 기색은?”

“다섯 마리가 날았지만 제 마법으로 모두 저지했어요.”

“좋아. 이대로 은밀하게 이동해서 다음 성으로 향한다.”

지크프리트는 그렇게 성 하나를 소리 소문 없이 함락한 후에 군을 이동 시켰다.

“후속 군대는 시간을 두고 따라오게 하도록.”

“옛”

제이크와 엘리제, 그리고 고스트 정예 부대가 포함된 2만 병력.

지크프리트는 그 부대를 이끌고 행동하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밀턴의 예상과 다르게 지크프리트는 아직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밀턴이 제국의 수도를 함락하고 황제를 사로잡으려는 시점에서 지크프리트는 이미 레스터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밀턴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을 생각을 하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휴전 조약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역사에는 악역으로 남겠지만….

‘야망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악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낫다.’

라고 생각하며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 세상 누구도 지크프리트의 은밀한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레스터 왕국의 수도.

레이라 여왕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남편님은 나를 무슨 돈 만들어내는 여신쯤으로 여기는 건가?”

밀턴이 보낸 물자 요청에 관한 서류를 보며 레이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게 모두 필요한 지원이라는 것은 알았다.

제국을 점령하고 그 점령지의 민심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원이 필수였다.

거기다 전쟁으로 소모되는 기본적인 물자 지원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엄청난 금액이 소모되었다.

레스터 왕국이 해양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왕가의 예산을 이 이상 소모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군. 국내의 귀족들에게 채권을 발행해서 자금을 모집해야겠어.’

전쟁 채권이라는 것은 도박이 짙었지만 이기고 있는 전쟁의 채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국내의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 수 있겠다고 생각한 레이라 여왕은 바로 서류를 작성해 갔다.

그런데 그때….

“여왕 전하. 소피아 대공비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 밖에서 들려온 시종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들어오도록.”

“예.”

그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소피아가 들어왔다.

“레스터 왕국의 군주를 뵙습니다.”

“가족끼리 그런 예는 됐어요. 그보다 무슨 일이죠? 또 애들이 말썽인가요?”

엘리자베스와 월리엄은 현재 일곱 살, 다섯 살이 되었다.

아빠가 전쟁 중인데도 무럭무럭 자란 아이들은 지금 한창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말 안 들을 시기였다.

이제는 요물 포스를 뿜어내는 레이라의 말 말고는 제대로 들어 먹지도 않아서 소피아도 꽤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소피아가 가져온 소식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서 보고하러 왔습니다.”

“이상한 점?”

“예. 제가 개인적으로 주문한 건축 자재의 업자들이 연락이 두절되었어요.”

“설마 대금만 먹고 도망갔다는 거야? 그거 굉장히 간이 비대한걸?”

천하의 포레스트 대공가에게 사기를 쳐 먹을 배짱이라면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레이라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럴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리고, 한 명만 두절된 게 아니고 꽤 여러 명이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어요. 분명 답신을 주기로 한 시간이 지났는데….”

“…….”

레이라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여러 명의 거래 대상들이 동시에 연락이 끊어졌다고?”

“예. 동부 지방의 목재를 조달하는 자들만 동시에요.”

“알았어. 한번 조사해 볼게.”

레이라는 소피아에게 그렇게 말한 후에 가장 빠른 전서구를 보내서 동부 지방의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나쁜 예감은 정말 잘 맞는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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