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밀턴의 말에 고담 후작은 순간 울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결투할 때 몇 대 패 놓을걸.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밀턴의 말은 그의 속을 벅벅 긁었다.
그리고 밀턴은 자기 잔에 와인을 더 따르며 말했다.
“명예든, 실리든, 그렇게 둘 다 챙기려고 하니까 애마하게 실패하는 거야. 실제로 자네는 이제 와서 명예롭게 죽을 방법도 없잖아?”
“대공 전하께서 빼앗으셨죠.”
“고맙게도 말이지.”
“…….”
이제는 그냥 팔 한 개 정도는 잘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담 후작의 불편한 심기를 알고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게. 자네가 항복을 함으로 지금 자네가 이끌고 온 5만 명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쳐. 하지만 그걸로 끝인가?”
“…….”
“우리는 제국의 영토를 침략… 침공… 공격? 음, 뭐라 말해도 좋게 말하긴 어렵군.”
술이 조금 들어가서일까?
하는 말이 조금 지나칠 정도로 솔직해진 밀턴이었다.
사실 의식적으로 이렇게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눈앞의 상대에게는 어설픈 거짓말로 설득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심안 LV.9(MAX) : 시력이 없어도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 타인의 목소리나 행동에서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도 있다.
심안의 능력으로 사람의 속내를 어느 정도나 파악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남자에게는 위선적인 변설이나 거짓을 섞은 농락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베이커 고담 후작을 원한다면 한가운데에 직구를 던져야 했다.
그래서 밀턴은 독대의 자리에서 일부러 술을 마시며 의식적으로 마음의 브레이크를 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정답이기도 했다.
밀턴은 조금 풀어진 눈을 하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영토를 빼앗고자 계속 공격을 할 걸세. 그때마다 우리와 맞서는 지방 영주들이 나올 테고 그들은 처참하게 희생당하겠지.”
“대공 전하께서 자비를 보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비를 보인다고 다 항복하면, 이 세상은 성인(聖人)들이 자애와 지혜로 지배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현실이 그런가?”
“…….”
당연히 그렇지 않다.
밀턴이 자비를 보여서 항복을 권해도 맞서 싸우는 이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의미하게 대지에 피를 흘리는 것은 아무런 죄 없는 병사들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아들일진대 말이다.
“후우….”
고담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제게 무엇을 시키려는 겁니까?”
“우리 군의 선봉.”
“…….”
“그리고 자네가 앞장서서 우리 군의 진격로에 있는 영주들을 설득해 주게.”
“잔인하시군요.”
고담 후작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지금 밀턴은 네가 앞장서서 제국을 넘기는 것에 협조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 결투에서 순사(殉死)하려던 고담 후작에게 그것은 진정 잔인한 요청이었다.
고담 후작은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기 전에….
털썩.
밀턴이 먼저 무릎을 꿇고 손에 바닥을 대고 머리를 숙였다.
“부탁하네. 고담 후작.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
“…….”
고담 후작은 순간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심신의 수양이 깊은 고담 후작이었지만 지금 밀턴의 행동에는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그만큼 밀턴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다.
밀턴 포레스트.
이제는 대륙 최강국일지도 모를 레스터 왕국의 군주.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대륙의 역사에 그 이름을 뚜렷하게 남긴 시대의 영웅.
그런 밀턴 포레스트 대공이 지금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다.
자신은 고작해야 저물어가는 제국의 기사일 뿐인데 말이다.
“대…공 전하. 지금 이 무슨…. 일어나십시오.”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고담 후작은 서둘러 밀턴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밀턴은 그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먼저 말하게.”
“…이해가 안 갑니다. 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신은 왕족입니다. 왕족의 명예를 생각하십시오. 항복한 장수에게 무릎을 꿇다니? 수치스럽지도 않습니까?!”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지 고담 후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밀턴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와 같은 이유일세.”
“…….”
“우리 레스터 왕국이든, 앤드루스 제국이든, 무고한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내 명예 따위를 감히 아끼겠나?”
“아….”
순간 고담 후작은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을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자신을 추슬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밀턴 포레스트의 말대로 자신은 생각이 너무 어중간했던 것이다.
병사들을 살리고 자신은 명예를 지키며 죽겠다?
이 얼마나 어중간하고 애매한 생각인가?
그런 얕은 수작이 읽힌 것도 당연했다.
거기에 비해 눈앞에 있는 젊은 군주를 보라.
그는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패장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아군의 병사뿐만 아니라 적국인 앤드루스 제국의 병사들을 위해서 말이다.
‘달라. 이 남자…. 아니 이분은 나와는 그릇이 다른 분이다.’
감히 비교하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철저한 격의 차이를 느꼈다.
감히 밀턴을 내려다보는 것이 죄스러워진 고담 후작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철저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포레스트 대공 전하.”
“…….”
“대공 전하의 청…. 아니,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그 말은 진심인가?”
“예. 저 베이커 고담. 지금 이 순간부터 밀턴 포레스트 대공 전하를 주군으로 섬기며, 이 몸이 쓰러질 때까지 모든 능력을 다해 헌신할 것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불멸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대의 결심에 감사한다.”
밀턴은 기쁘게 웃으며 고담 후작의 손을 잡았다.
이로서 제국의 베이커 고담 후작이 밀턴의 휘하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때의 선택으로 인해서 고담 후작에 대한 두 가지 평가를 내놓는다.
하나는 대세를 빠르게 파악하고 가장 적은 피가 흐르는 길을 선택해서 수백만 명의 인명을 구한 위인.
그리고 또 하나는 명예를 저버리고 자기 몸을 보전하기 위해서 나라를 판 매국노.
둘 중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지만 역사에서는 그에게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담 후작이 밀턴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인해서 생긴 변화였다.
레스터 왕국은 가장 늦게 끼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이나 3국 연합보다 훨씬 더 빠른 진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담 후작을 설득시켜서 선봉에 세운 효과는 탁월했다.
그가 앞장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지방 영주들 대부분은 전의를 잃었다.
거기다 밀턴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고담 후작은 스스로 제국의 영주들을 설득했고, 그 설득에 대부분의 영주들은 항복했다.
밀턴은 항복한 영주들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들의 권리를 모두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전군에 군령을 내렸다.
[점령지의 백성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겠다. 그들의 땅 한 뼘, 밀 한 톨도 감히 넘보지 말라.]
밀턴이 내린 군령치고는 꽤 위압적인 내용이었다.
원래 밀턴의 명령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생각하면 이렇게 고압적으로 나갈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밀턴이 점령지의 안정에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레스터 왕국군에게 항복한 영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오히려 사정이 나쁜 영지의 경우 밀턴이 본국에 연락해서 식량과 물자를 지원해 주기까지 했다.
고담 후작의 인덕과 설득, 그리고 밀턴의 현실적인 대처까지 어우러지자 점령지의 영주와 백성들은 순순히 레스터 왕국에 협조했다.
그리고 이런 정보가 들리자 레스터 왕국이 진격하는 진격로 주변의 영지들 역시 앞을 다퉈서 항복해 왔다.
사실, 이들로서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국이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뻔히 보였고, 그런 상황에서 3국 연합이나 공화국군은 무도한 학살을 저지르며 점령지를 파괴하고 있다.
오로지 레스터 왕국만이 유화 정책을 펼치며 이들의 권리와 생활을 지켜주고 있었다.
제국의 영주들이라고 해도 살기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반항하는 영주들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밀턴은 이들을 일단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제국의 수도에 먼저 도달하는 것이다.’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최단거리의 영지가 반항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면 밀턴은 대부분 무시해 버렸다.
어쨌든 지크프리트보다 먼저 수도에 도착하는 것이 현재 밀턴의 목적이었다.
“폐하. 레스터 왕국군이 황도의 앞에 도착했습니다.”
“…….”
길버트 황제는 참담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말했다.
“공격하려는 기색은 없나?”
“예. 그저….”
“그저 뭔가?”
“폐하와의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훗, 이미 다 기울었다 이건가?”
길버트 황제는 피식 웃어버렸다.
사실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세대에서 시대의 흐름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말이다.
제국의 시대는 이제 끝이다.
공화국을 억누르지 못했고, 시대의 풍운아라고 불리는 밀턴 포레스트는 시대의 패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앤드루스 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스스로 자문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죄 없는 피가 흐르는 것은 막아야겠지.”
이제 야망은 접어야 할 때가 되었다. 남은 것은 이 제국의 황제로서 제국을 위해 최선의 패배를 선택하는 것뿐.
“레스터 왕국의 사신을 들라 해라. 접견의 장소를 정해야겠다.”
“예. 폐하.”
그리고 잠시 후에 레스터 왕국의 사신이 황제의 앞에 나타났다.
그를 본 순간 황제는 쓰게 웃어버렸다.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 고담 후작.”
“…송구합니다. 폐하.”
고담 후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길버트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실을 지키는 근위 기사들은 그런 고담 후작을 보고 눈에 불똥을 튀겼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담 후작은 배신자이고 매국노이니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고담 후작은 그런 분위기를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선택한 이상 감수해야 할 증오와 원망이다.’
밀턴을 따르기로 시작한 순간 부타 각오했던 부분이다.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릴 고담 후작은 아니었다.
“폐하, 포레스트 대공 전하께서는 직접 만나서 회담을 하고자 합니다. 그 장소로는 황도의 시민들이 모두 지켜볼 수 있는 영광의 광장으로 정했으며, 군사의 경계는 레스터 왕국에서 담당하겠다 합니다.”
“이런 배신자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황실의 기사와 시종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고담 후작이 한 말의 뜻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양쪽이 가지는 회담이라고 하면 결국 제국의 항복 선언이 될 것이다.
그 항복 선언을 제국의 백성들이 지켜볼 수 있게 만든 광장에서 황제가 하라는 것이었고, 또 제국의 광장에서 군사 경계를 레스터 왕국에서 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황도의 외성벽 문을 열고 레스터 왕국군을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목적을 과정으로 변화시켜서 돌려 요구하기는 했지만 이건 당장 전면 항복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치욕적이군.”
길버트 황제의 짧은 한마디에 고담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제국을 위해서 현명한 선택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닥쳐라. 이 매국노!”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입으로 지껄이는 것이냐?!”
“폐하. 지금 당장 명령해 주십시오. 저 배신자의 목을 쳐 버리겠습니다!”
대전의 모든 이들이 분노했고 황실의 근위 기사단장은 고담 후작을 공격하기 직전까지 분노했다.
사실 그가 덤빈다고 해 봐야 맨손인 고담 후작도 감당할 수 없겠지만 승패를 떠나서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여기서 분노 때문에 일을 그르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모두 조용히 하라.”
“…….”
황제는 담담한 어조로 대전을 진정 시킨 후에 고담 후작에게 말했다.
“내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레스터 왕국은 어찌 할 것인가?”
“…….”
고담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뻔했다.
회담을 거절하면 당장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황제를 사로잡으려 할 것이다.
황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과연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까?
그리고 피해를 감수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아니다.
결국 황제가 회담을 거부하면 무의미한 피가 황도를 적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