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공화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플로리안 공작의 군대는 나날이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제 병사들의 식량은 고사하고 지휘관급이 먹을 것도 제대로 조달하기 힘들 정도였다.
최악의 여건 속에서 참모들은 후퇴를 권했지만 플로리안 공작은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제국이 무너진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마지막까지 승리를 외치며 싸우는 플로리안 공작의 모습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적과 무리한 전투를 하다가 따라오지 못하는 병사들과 떨어져서 포위망 안에 고립되어 버렸다.
공화국은 그를 포위망 안에 가두더니 물량 공세를 시작했다.
“그물망 안에 대어가 걸렸다. 놓치지 마라!”
“와아아아아아!”
“죽어라. 플로리안 공작!”
포위망 안에 갇힌 플로리안 공작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어디 와 봐라. 이 공화국의 광신도들아!”
그리고 그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항복이라는 선택지는 머릿속에 스치지도 않았다.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검을 휘둘렀고 오러를 다 소진할 때까지 미친 듯이 싸웠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결국 한계는 다가왔다.
열 시간 가까이 날뛰던 플로리안 공작이 탈진하자 이름 모를 공화국 병사의 창날이 그의 허리에 박혔다.
푸욱!
“쿡…·.”
그리고 이어서 다시 몇 개의 창이 그의 몸에 틀어박혔고….
퍽퍽퍽….
“크…. 크르르륵….”
결국 플로리안 공작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점점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공화국의 병사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들려왔다.
‘내가…. 잘못했을 리가 없어. 나는 제국을 위해서….’
마지막 가는 길까지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건 그의 인생 전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차마 양보 못 하는 마지막 고집이었을까?
훗날 역사에는 최후의 전투에서 홀로 날뛰며 1,000명이 넘는 공화국의 병사들을 죽인 것이 플로리안 공작의 마지막 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플로리안 공작이 공화국군을 막는 동안 세바스티안 공작은 우선 제후국의 군대부터 먼저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세바스티안 공작의 입장에서는 제후국이 가장 괘씸했다.
공화국이나 레스터 왕국은 어차피 적이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새삼 분노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그늘에서 그 특혜를 누려왔던 제후국들의 배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제후국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었겠지만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만큼 세바스티안 공작은 성인이 아니었다.
“내가 핵터 세바스티안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전군을 이끌고 공격할 때마다 제후국들은 맞서는 것보다 빠른 후퇴를 선택했다.
덕분에 제후국이 일시적으로 멀리 물러났고 변방의 영지들은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금 즉시 영지의 식량과 인력을 징발한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지방의 영주들에게 당당하게 물자를 요구했다.
“공…. 공작님.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식량을 전부 징발하시면 저희 영지민들은 굶어 죽습니다.”
영주가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은 엄한 눈을 하고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째서 칙령을 거역했는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습니다. 적들이 바로 지척에 도달했는데 영지의 병사들과 물자를 수도로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황제 폐하의 칙령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 그것은….”
“자네의 목이 붙어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일세.”
“…….”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모든 물자를 징수하겠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그 영지의 물자를 강제 징집했다.
병사들은 영지민들의 집을 철저하게 수색해서 숨겨진 식량을 모두 징발하고 싸울 수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강제적으로 끌고 왔다.
영지민들은 눈물로 호소하며 자비를 구했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의 명령은 단호했다.
“반항하면 그게 누구든 제국의 적이다. 즉시 처분해도 좋다.”
그의 명령에 따라 실제 반항적인 백성들 몇 명은 현장에서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세바스티안 공작의 군에게 구함을 받은 영지민들은 적국이 아니라 자신들의 군대인 제국의 군대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분노와 증오가 서린 백성들의 눈을 보며 세바스티안 공작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제국 자체가 끝난다.
지금은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백성들이여. 나를 저주하고 증오해 주시오.’
그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전쟁을 수행했다.
제후국에서는 세바스티안 공작을 막을 수 있는 기사도 지략가도 없었기에 그는 조금씩 제후국의 군대를 제국의 영토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승패와 별개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지고 있었다.
최후까지 분전을 선택한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
자국의 백성들을 쥐어짜며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세바스티안 공작.
이 둘에 비해서 베이커 고담 후작은 아직 전투를 제대로 벌이지도 못했다.
황제에게 레스터 왕국의 공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사실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이 전투 승산이 있을까?’
베이커 고담 후작이 마스터라고 해 봤자 그게 레스터 왕국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레스터 왕국에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다섯 명의 마스터가 있었다.
군사력으로 비교해도 감히 어쩔 도리가 없다.
밀턴 포레스트가 이끌고 온 20만의 대군에 비해서 자신이 이끌고 있는 군사는 고작 5만이었다.
심지어 보급 상황조차 안 좋아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이라면 안트라스가 관 뚜껑을 열고 돌아온다고 해도 뒤집을 수가 없었다.
“패배가 눈에 뻔히 보이는 전쟁을 억지로 수행해야 한다는 건가?”
고담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같은 기사들이야 전쟁에서 죽는 것도 영광이라 치지만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그런 영광을 강요할 수 있을까?
고담 후작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플로리안 공작이나 세바스티안 공작보다는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레스터 왕국의 군대와 접선하기까지 하루 거리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측근들을 모두 모았다.
고담 후작가의 기사들과 최측근 가신들을 은밀하게 불러 모은 다음 그는 말했다.
“고담 후작가의 현 가주로서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좌중을 한 번씩 비춘 후에 말을 이었다.
“그대들은 나의 선택을 믿고 따를 수 있는가?”
그 말에 가장 먼저 고담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외쳤다.
“후작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던 저희는 끝까지 믿고 따르겠습니다.”
“새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후작님을 따르겠습니다.”
기사단장을 필두로 기사들이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고담 후작가의 최측근인 회계관이 말했다.
“후작님,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말은 중요한 선택을 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제 판단이 맞습니까?”
회계관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고담 후작이 밀턴에게 맞서는 것보다 항복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을 말이다.
고담 후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아마 그대가 짐작하고 있으면서 말로 하지 못하고 있는 선택지일 것이다.”
“그 선택을 하신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회계관의 말에 고담 후작은 잠시 말을 멈추고 스스로의 생각을 잘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작게는 고담 후작가를 위해서, 그리고 크게는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서이다.”
“…….”
“시대의 흐름이 변했다. 대세를 거스르며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항전해 봐야 더 많은 피가 흐를 뿐이다.”
고담 후작의 뜻을 전해 들은 회계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작님의 선택에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없다면 저희 역시 함께하겠습니다.”
“현 고담 후작가의 가주로서, 나를 믿고 따라준 그대들의 충성과 헌신에 감사한다.”
고담 후작은 그렇게 자신의 가신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
다음 날.
밀턴은 전령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누가 찾아왔다고?”
“고담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가신 몇 명만을 거느린 채로 홀로 찾아왔습니다.”
“…….”
밀턴이 잠시 침묵하자 옆에 있던 세비안 백작이 말했다.
“아무래도 일이 잘 풀릴 듯합니다.”
“이건…. 그건가?”
“예. 그럴 겁니다.”
밀턴은 싱긋 웃으며 전령에게 말했다.
“즉시 만나도록 하지.”
“예. 준비하겠습니다.”
전령은 고담 후작을 안내했고 밀턴은 그를 보자마자 일어서서 맞이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소. 고담 후작.”
밀턴의 환대에 고담 후작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답하며 말했다.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레스트 대공 전하.”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그렇게 말하며 밀턴은 고담 후작과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래. 나를 찾아온 용건은 무엇이오? 대강 짐작은 가오만 그대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군.”
밀턴이 바로 본론을 꺼내자 고담 후작은 담담하게 말했다.
“항복을 하려고 왔습니다.”
“흐음…. 역시 그런가?”
“예.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거절한다면?”
“전쟁을 해야겠지요.”
“전쟁이라…. 지금 나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을 선택한다는 말을 잘도 하는군.”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죠.”
“…….”
“제가 작정하고 물어뜯으면 대공 전하를 꽤나 아프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담 후작의 강경한 말에 밀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밀턴은 손을 들어서 시종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하며 말했다.
“일단 조건이라는 것을 들어 보지.”
“제가 제시하는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하나. 제국의 백성들을 상대로 무고한 약탈과 살인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공화국과 제후국들의 군대는 철저할 정도로 제국을 약탈하고 파괴하고 있다.
양쪽 모두 맺힌 게 많았기 때문에 제국의 인간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에 죄책감이 없었다.
“가능하면 들어주겠네. 하지만 영주들이 반격을 해 온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게.”
밀턴이 허락하자 고담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번째로 지금 제국을 유린하고 있는 공화국과 삼국의 침략을 저지해 주십시오. 그들은 제국에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좀 어려운 요구군.”
“…….”
고담 후작은 침묵했고 밀턴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우리 왕국군이 점령한 영토에 한해서라면 들어주겠네. 하지만 제국 전토를 내가 감싸줄 수 없는 것은 이해해 주게.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담 후작은 시종이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저의 결투 신청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밀턴의 뒤편에 있는 제롬과 바이올렛이 살기를 무럭무럭 뿜어냈다.
항복을 신청하고 이제 와서 결투를 신청하다니? 이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밀턴은 손을 슥 들어서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고담 후작이 말했다.
“굳이 대공 전하께서 받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기에 있는 테이커 후작이 상대라고 해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흐음….”
밀턴은 팔짱을 끼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생각했다.
‘제롬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봤을 텐데? 그런데 일부러 제롬과 결투를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