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세바스티안 공작님. 황도에서 귀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말인가?”
“최대한 빠르게 철군하라는 명령입니다.”
“큭….”
세바스티안 공작은 눈을 질끈 감고 침음을 내뱉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제후국의 반란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역시 심장이 철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전선을 물릴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크프리트가 지휘하는 공화국군은 끈질기게 제국군에 달라붙어서 압박하고 있었고, 레스터 왕국 역시 국경에 군을 배치하고 노골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무작정 군을 물린다고 적들이 그냥 놔줄까?
전쟁 중에 가장 큰 피해는 후퇴 중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지금 전선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세바스티안 공작은 어떻게든 제국의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기 바랐다.
하지만 결국 황제는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내부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세바스티안 공작이 이끌고 있는 원정군뿐이었다.
비록 그 결과로 이번 전쟁에서 얻었던 공화국의 영토를 다시 포기하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군. 황도로 돌아간다.”
“옛!”
명령을 내린 세바스티안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지….’
***
“대총통 각하. 제국이 전선을 물리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크프리트는 전령의 보고를 받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계획대로군.”
그리고 그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 말이었다.
그 명령에 회의에 참석한 장교들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드디어 반격이군요.”
“대총통 각하의 말씀대로 결국 이 때가 왔습니다.”
“감히 공화국의 영토를 침범한 제국군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공화국의 지휘관들 역시 굉장히 많이 참았다.
초반에 안트라스의 전략에 밀려서 공화국의 영토를 절반 이상 포기하고 후퇴했고, 최근의 전투에서는 공화국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바론 대장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지크프리트는 장교들을 다독였다.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그렇게만 하면 반드시 언젠가는 승리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그 약속이 이제야 실현된 것이다.
“추격은 어디까지입니까?”
“지금이라면 전쟁 발생 전의 국토를 전부 회수할 수도 있습니다.”
장교들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잃은 것이 많다.”
“…….”
“승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스스로 국토를 불태우고 파괴함으로 인해서 많은 공화주의 인민들이 굶주리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대들은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감자 하나 먹이지 못했지만 공화국의 군사들을 위해서 한 줌밖에 없는 마지막 식량을 바친 어머니들의 헌신을….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자기 주머니 속의 감자를 내미는 어린아이를….”
“큭….”
“개자식들….”
장교들의 입에서 비통함의 눈물이 흘렀다.
지금 지크프리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실제 벌어진 일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지크프리트가 조작해서 만들어내고 공화국 전체에 퍼트린 미담이었다.
전황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 감성적으로 아군을 자극하고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들어낸 조작극의 사례들이었다.
물론 사기였지만, 사기라는 것이 들통나지만 않으면 그 효과는 탁월했다.
지크프리트 본인도 격앙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국은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추격의 목표는 황도. 최종적으로 황제의 목을 친다!”
“옛! 대총통 각하!”
공화국의 지휘관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크게 외쳤다.
그렇게 공화국의 본격적인 총공세와 역사에 남을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지크프리트 이 자식 뒤로 수작을 부렸구나.”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던 밀턴이 상황을 파악한 것은 공화국의 총공세가 시작되고 나서였다.
어째서 제국이 자신들에게 강화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리고 지금 밀턴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빠졌다.
“어찌해야 하나….”
밀턴의 고민은 하나였다.
이 판에 발을 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하는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화국이 전면 후퇴 중인 제국을 일방적으로 물리치고 있다.
이미 전쟁 초기에 잃어버린 영토를 다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남하하고 있는 공화국의 행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제국의 깃발을 내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겠지. 정말이지 야망에 미친놈들이 하는 짓은 공감이 안 돼.’
밀턴은 짜증이 치밀었다.
지크프리트는 명백하게 제국을 끝장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제국의 상황과 지크프리트가 보유하고 있는 전력을 두고 봤을 때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밀턴은 이제 이 상황에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파악해야 했다.
“지크프리트 놈의 수완이라면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의 절반 이상은 공화국에 편입시키겠지.”
제국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지크프리트 혼자서 독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제국 내부에 일어난 영주들의 연합체가 독립국을 선언할 테고, 지크프리트의 꼬임에 넘어간 제후국들도 어느 정도 자기 몫을 챙길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영토의 반, 아니 3분의 1만 챙긴다고 해도 공화국에는 엄청난 이득이다.
지크프리트의 능력이라면 그 영토를 이용해서 금방 공화국을 다시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막대한 군사력으로 나하고 한판하려고 할 테지. 아 진짜….’
생각만 해도 혈관이 끊어질 것처럼 혈압이 솟구치는 밀턴이었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흥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사전 작업을 공화국에서는 이미 하고 있었다.
밀턴이 접한 정보에 따르면 공화국은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면서 제국민들에게 두 가지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죽음 아니면 노예.
신분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제에 제국의 국민들을 노예로 잡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부하면 모두 죽음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모두 말이다.
그래서 제국의 영토에서는 처절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반항이 격렬한 영지의 경우 영지민 전원을 건물에 가둬서 산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게 뭘 뜻하는지는 뻔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이나 발랑스 왕국 정벌 때와 달리 제국민을 포용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공화주의라는 사상을 백성들에게 납득시키는 시간조차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국민을 완전히 죽여 버린 땅에는 공화국의 백성을 파견하면 그만이고, 항복한 제국민은 철저하게 노예로 떨어트려 노동력만을 착취한다.
그렇게 하면 제국민들을 공화국에 융화시키는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없다.
최대한 빠르게 제국의 영토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만 쏙쏙 빨아들이는 것이다.
대외적인 명분으로는 그동안 공화국의 인민들이 겪은 고난과 역경에 대한 복수라고 하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철저한 효율주의다 이거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이야.”
이런 놈하고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만나야 한다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면 짜증을 넘어 허탈감이 먼저 들 정도였다.
결국 밀턴이 내린 결론은 이 판을 그냥 방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크프리트가 제국의 영토를 침범해서 공화국을 살찌우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
차라리 자신이 이 판에 발을 담그고 공화국의 몫만큼 제국을 먹어 치워야 했다.
“지크프리트 놈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대륙의 패권을 잡아야겠어.”
다행이 지금 레스터 왕국의 전력을 역대 최고의 전성기다.
패색이 짙은 제국이나 대규모 청야 전술로 국력을 소진한 공화국과 달리 레스터 왕국만큼은 전쟁의 발발 전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국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심을 굳힌 밀턴은 즉시 세비안 백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공 전하.”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게. 우리도 움직인다고.”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세비안 백작은 대강 짐작을 하면서도 가슴을 떨며 물었다.
그런 그에게 밀턴이 말했다.
“제국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우리가 대륙의 패권을 잡는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강고한 왕국을 만들 것이다.”
세비안 백작은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물러나는 세비안 백작을 보며 밀턴은 결심했다.
‘이걸로 이 난세를 끝낸다.’
레스터 왕국의 제국 공격.
이것은 제국에게 있어서 결정타였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이끌고 온 원정군은 공화국의 맹공격을 받으며 후퇴하느라 남은 전력이 1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상태도 좋지 않았다.
수도의 중앙에서 최대한 모은 병력까지 더해봤자 20만이었다.
보통 20만의 군사는 국면을 바꾸기에 충분한 숫자다.
다만, 지금의 상황에서 20만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우선 지크프리트가 이끌고 남하한 공화국 군사들이 총 15만이었고, 레스터 왕국에서 내려온 병력이 20만이다.
그리고 제국의 내부를 휘젓고 있는 제후국들의 군사도 20만이 넘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였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금의 제국은 20만의 군세를 유지할 수 있는 보급 물자가 없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황도에 도착한 세바스티안 공작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나쁜 제국의 상황에 망연자실했다.
제국에 보유한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세바스티안 공작이 가까스로 살려서 이끌고 온 10만의 원정군은 멀건 수프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나빴던 것이다.
제국의 수도는 항상 제국 전역에서 올라오는 물자가 가득했지만 제후국들이 제국의 영토를 완전히 휘저어 버리자 물자 부족이 빠르게 드러났다.
수도의 인구는 많은데 물자의 수송이 동결되자 비축되어 있는 물자가 빠르게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대의 보급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수도의 시민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쓰러져 있었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이미 제국의 명운이 다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가라앉는 배라고 해도 중간에 내린다는 선택은 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결국 제국의 수호신이었으니….
세바스티안 공작은 군을 이끌고 다시 출진했다.
베이커 고담 후작과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 역시 각각 군을 이끌고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출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무쌍한 마스터가 이끄는 군이라고 해도 보급이 갖춰지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제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군 나를 따르라!”
플로리안 공작은 가장 먼저 공화국과 격돌했다.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제국이 망가진 모습은 어쩌면 자신이 안트라스를 죽여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안트라스를 죽인 것은 제국을 위해서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이기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갈등, 번민, 죄책감, 불안감….
플로리안 공작에게 이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승리뿐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이 다시 영광스런 모습을 되찾기만 한다면 자신이 저지른 일도 결국 잘못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내몰린 플로리안 공작은 정말 미친 듯이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용맹하게 싸운다고 해도 승산은 뻔한 것이었다.
공화국에서는 지크프리트나 제이크가 나설 것도 없이 철저한 지연 전술로 플로리안 공작을 상대했다.
보급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면 승부를 피한 것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을 끌자 플로리안 공작이 이끌고 있던 군대는 자멸하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탈영을 시작했고, 병력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거기다 간간히 이어지는 공화국의 기습에도 힘이 빠진 병사들은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했고,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공화국의 창칼이 아니라 배고픔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