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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37화 (237/257)

제237화

“전쟁이 어려워지는군.”

길버트 테레 앤드루스 황제.

그는 전선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접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승승장구할 때만 해도 이 전쟁에 대한 국내의 여론은 좋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상황이 변했다.

슈바이커 공작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전황이 나빠지자 귀족들 사이에서 전쟁 반대론을 꺼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황제에게 대놓고 직설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서서히 전쟁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로서는 곤혹스런 일이다.

이 전쟁은 황제가 전면적으로 주장하고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그 말은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 역시 황제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길 때야 좋았지만 지금 같은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황제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고독하되 절대적이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귀족들은 황제의 권위를 나눠 갖기 위해서 손을 뻗는 법이다.

그것이 권력의 법칙이었다.

‘여기서 멈추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안트라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황제는 지금 이 전쟁에 심각한 불안 요소를 느꼈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전쟁을 계속하며 지금의 국경을 유지하는 형태로 전쟁을 마무리 지어 보겠다고 보고를 올렸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의욕만 믿고 희망을 걸어 보기에는 나날이 들려오는 전황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종장?”

“부르셨습니까? 폐하.”

“전쟁에 지원할 수 있는 예비 물자는 얼마나 여분이 있는가?”

“제국 내부의 여유분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석 달 정도 더 지원하면 바닥이 날 듯합니다.”

“흐음….”

황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석 달이라….’

과연 그 안에 전쟁이 끝날까?

아마 무리가 아닐까 싶다.

물론 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비축분이 떨어진다고 해도 당장 제국이 굶어 죽는 건 아니다.

제국은 거대하고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다.

50만 단위의 병력을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평소 걷는 것 이상의 세금을 걷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제국에게는 자국의 백성보다 먼저 쥐어짤 수 있는 우선적인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후국이다.

자국의 백성을 쥐어짜기 이전에 타국의 백성을 먼저 쥐어짜는 것이 제국의 방식이었다.

글로스터 왕국.

헤리퍼드 왕국.

스트라빈 왕국.

지금은 없어져버린 발랑스 왕국까지 포함해서 주변의 제후국들을 쥐어짜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제국의 방식이었다.

“미리 준비는 해 두는 것이 좋겠지.”

황제는 전쟁의 지속 유무와 별개로 물자의 비축분을 늘려 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칙서를 써서 주변의 제후국들에게 물자와 군사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몇 달 후.

제국의 국경 지대에 한 무리의 군이 나타났다.

“정지! 거기 멈춰라!”

국경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책임자가 외쳤다.

“나는 제국의 국경 수비군 소속 파토 자작이다. 귀하의 소속과 목적을 밝혀라.”

“글로스터 왕국의 세티우스 후작이오. 귀국의 요청에 따라서 물자와 병사를 이끌고 왔소.”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왕국의 후작이라고 해도 파토 자작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자작이라고 해도 제국의 귀족인 자신이 보기에 왕국의 후작 따위는 잘 쳐줘봐야 동급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의 칙서가 확실하군.”

그는 칙서장을 확인하고 나서 통과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글로스터 왕국군이 국경의 요새에 무사히 진입하자 파토 자작이 말했다.

“그런데 많이도 끌고 왔군. 총 병력이 얼마인 것이오?”

“7만을 이끌고 왔소.”

“호오…. 황제 폐하께서도 귀국의 성의에 기뻐할 것이오.”

“그랬으면 좋겠군.”

“그거야 물론…. 윽!”

말을 하던 파토 자작은 갑자기 자신의 목에 닿은 차가운 검날의 감촉에 깜짝 놀랐다.

그에게 검을 겨눈 것은 글로스터 왕국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세티우스 후작이었다.

“바로 이런 뜻이다. 오만한 제국의 귀족이여.”

그리고 세티우스 후작의 검이 파토 자작의 목을 꿰뚫었다.

“크…. 크르륵….”

목에서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파토 자작은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신호로 글로스터 왕국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제국군을 공격하며 요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치욕과 오욕의 세월은 끝났다. 오만한 제국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자!”

“우오오오오오오!!”

글로스터 왕국의 정예 병력 7만.

그것은 지원 병력이 아니라 제국을 향한 반격의 군세였다.

글로스터 왕국은 시작이었다.

스트라빈 왕국군 6만.

헤리퍼드 왕국군 8만.

제국의 원군을 요청 받은 제후국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모집해서 제국에 반역한 것이다.

그것도 황제의 칙서장을 이용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들의 명분은 모두 같았다.

[그동안 제국은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며 아국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황제의 어리석은 야욕을 충족하기 위한 대륙 정벌의 전쟁에 투입된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백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취를 당했다.]

[아이들은 굶주림에 죽어갔으며 가장을 잃은 백성들은 비통함에 눈물을 흘려갔다.]

[이에 우리는 제국의 억압에 맞서 당당하게 일어날 것을 선포한다. 제국의 황제여. 그대의 오만함이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결국 제국의 무리한 요구를 더 이상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한 삼국이 동시에 제국을 공격한 것이다.

사실 제후국들의 명분은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제국은 제후국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참아왔던 제후국이 동시에 이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원군으로 생각하고 있던 제국으로서는 병력을 모으는 것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병력이 국경을 넘어오는 것도 그대로 방조했다.

덕분에 국경이 고스란히 뚫렸고 삼국의 군대는 제국 내부를 거칠게 날뛰며 휘저었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콰앙!

“건방진 것들! 감히 해 보겠다 이건가?!”

길버트 황제는 옥좌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거칠게 소리쳤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그의 눈에서는 분노가 가득했다.

삼국의 왕들을 사로잡으면 능히 찢어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런 황제에게 나이가 지긋한 귀족이 간언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지금은 삼국을 억누르기보다는 달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달래라고? 내 명령을 기만하고 제국의 국토를 침범한 자들을 달래라? 지금 제정신인가?”

황제의 호통에 그는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폐하. 지금 제국의 전력 대부분은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제국의 저력을 얕보지 말라!”

황제는 그렇게 소리친 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지금 당장 제국의 모든 귀족들에게 동원령을 내려라. 각 가문의 가주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황도로 모이라. 가주가 올 수 없다면 가문의 후계자가 대신 와야 할 것이다. 이는 짐의 칙령이다. 따르지 않는 자는 엄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자기 할 말을 하고 대전을 나가 버렸다.

뒤에 남은 귀족들은 이 상황에서 자신들끼리 웅성거렸다.

“전국에 동원령이라니? 지금 폐하께서는 현실을 모르고 계신 것이오?”

“그게 무슨 망발이오?”

“이미 삼국의 군세가 국경을 넘어왔소. 그런데 병사를 이끌고 수도로 모이라니? 지방의 영주들이 순순히 따를 리가 없소.”

“그럼 폐하의 의견 말고 다른 의견이 있소?”

“삼국을 도닥여야 한다는 말이오. 그들이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간이 부은 게지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제국에 칼을 겨누다니?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지금 피는 우리 제국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가장 많이 흘리고 있소! 어찌 그걸 모르시오!?”

“닥치지 못할까? 이 패배주의자! 지금 제국의 위엄과 폐하의 칙명에 거역하는 것이냐?”

“패배주의? 현실을 모르고 제국을 파탄으로 몰고 있는 것은 네놈들이 아닌가? 이 황제의 개들아!”

“네놈이 감히?!”

대전의 귀족들 사이에는 고성이 오갔고 몇몇 귀족들은 장갑을 집어 던지며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동안 황제의 권위에 눌려 지내던 귀족파들이 이 전쟁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황제를 옹호하고 이 전쟁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거기에 맞섰다.

이렇게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의견이 대립하면 정치판은 항상 개판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크프리트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청야 전술을 펴고 레스터 왕국에 가서 동맹을 맺으면서 데이비드를 시켜 제국의 배후에서 물자를 지원하고 있는 제후국들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사실 제국을 향한 부담은 제후국들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전쟁 물자 지원뿐만 아니라 전시가 아닐 때도 항상 조공을 바쳐야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가지지 않은 것은 제국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위상이었다.

감히 맞서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 억울해도 참은 것이다.

그랬던 상황이 변했다.

제국은 여전히 강력하기는 했지만 그 위상이 예전만 하지는 못했다.

발랑스 왕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공화국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을 때부터 제국의 위상에는 조금씩 금이 갔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지크프리트는 데이비드를 풀어 로비를 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데이비드에게 가장 적합한 임무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제후국의 개입으로 인해서 제국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밑바닥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해주던 제후국들이 오히려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서 제국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대로 제국은 즉시 군사를 모으려고 했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제국의 영토를 침범한 제후국들은 수도로 진격해서 황제의 목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제국의 영토 자체를 약탈하고 유린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제국에게 당한 것을 되갚기라도 할 것처럼 철저하게 말이다.

사실 이것 역시 지크프리트가 손을 쓴 것이다.

제후국이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제국과의 전쟁을 해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황제의 명령대로 제국이 백성들에게 징집령을 내리고 군사를 총 동원한다면 얼마나 많은 병력이 모일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지크프리트는 제후국에게 황도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제국의 저변을 휘저으라고 말했다.

제국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게 제국의 정세를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실제 제후국은 그 지시에 철저하게 따랐다.

제국의 변방 영지를 습격해서 철저하게 빼앗고 유린하며 모든 것을 불태웠다.

훗날 역사가들은 말한다.

[당시 제국의 휘하에 있던 3국은 제국에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광기에 가까운 복수심으로 제국을 불태웠으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쥐새끼 한 마리 남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황제가 내린 칙령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제국의 힘을 모아서 대응하려면 지방 영주들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그 지방 영주들이 협조하고 싶어도 협조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영지의 병사들을 이끌고 중앙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다?

황제를 향해서 맹신적인 충성심이라도 없는 이상 이런 무모한 명령에 따를 수는 없었다.

지방의 봉토 영주들에게 있어서 영지는 재산이며 기반이며, 가문 그 자체였다.

결국 제국의 전역에 명령을 내렸지만 모인 군사는 10만도 되지 않았다.

황제는 크게 진노했지만 지방의 영주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참전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행색만 냈다.

자신의 영지는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몇몇 영주들은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서 황제의 압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지금 제국의 위기는 모두 황제가 자초한 것이다. 더 이상 무능한 황제를 따를 수는 없으니, 우리 동부 연합은 따로 살길을 찾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뭉쳐서 대항하는 영주들이 나타났다.

상황이 이쯤 되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제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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