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플로리안 공작. 왜 그런 짓을….’
베이커 고담 후작은 홀로 막사에 들어와서 고뇌에 빠졌다.
그는 안트라스를 암살한 것이 플로리안 공작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막연한 추측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맹인의 경지이지만 마스터의 수준에 이른 초인이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다른 능력이 크게 발달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비록 생각 그 자체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상대방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대략적으로 공감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안트라스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자신의 혈육을 잃은 것처럼 크게 비통해 했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이들도 슬픔과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단, 딱 한 명.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만큼은 예외였다.
그에게서는 은은한 기쁨과 안도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이었다.
고담 후작은 바로 감이 왔다.
안트라스를 죽인 게 누구인지 말이다.
애당초, 철통같이 방비되어 있는 제국군의 진형에 남몰래 들어와서 안트라스를 암살했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전쟁터라는 곳은 평소보다 경비가 더 삼엄해서 오히려 암살을 하기가 어려운 장소다.
그런데 군의 최고 중요 인물이 이렇게 암살당하다니….
다른 기사들의 안목을 숨기고 행동할 수 있었다면 암살자의 경지는 최소한 마스터 수준일 것이다.
지금 제국군의 진형에 있는 마스터는 세 명.
세바스티안 공작이 안트라스를 죽였을 리는 없다.
그리고 고담 후작 스스로도 아니다.
당연히 범인은 한 명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모든 정황이 범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정하려고 해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말이다.
문제는….
‘이걸 밝히는 것이 제국군에 도움이 될까?’
그럴 리가 없다.
세바스티안 공작의 지금 상태를 봐서는 진범이 플로리안 공작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아니, 결투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바로 사생결단을 낼 법도 하다.
그렇게 되면 승패와 상관없이 제국군은 끝장이다.
슈바이커 공작을 잃고 루카스 플로리안을 잃고, 안트라스 마저 없는데 여기서 그 두 사람이 싸운다?
‘안 돼. 이건 밝혀서는 안 될 진실이다.’
결국 고담 후작은 이 사실을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연 이게 옳은 결정인지….’
고담 후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도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이 전쟁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제국이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제시해 오는 게 아니라?”
전령의 보고를 들으며 밀턴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예. 공화국과 우리 레스터 왕국의 국경을 공격하며 전쟁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특히 세바스티안 공작이 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전황은?”
“제롬 경이 막고 있습니다. 아직 적에게 넘어간 중요한 요새나 성은 없습니다.”
“알겠다. 추가 사항이 있으면 계속 보고하도록.”
“옛!”
전령을 돌려보내고 밀턴은 세비안 백작을 보고 말했다.
“자네 예상이 마지막에 좀 틀어졌군.”
“예. 뜻밖이군요.”
세비안 백작은 반드시 제국이 강화를 제시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공화국의 바론 대장과 상잔을 해서 주요 전력을 잃은 제국은 이 전쟁을 무리하게 지속해서는 안 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입장에서 이건 정복 전쟁이다.
자국의 운명을 걸고 반드시 끝까지 버텨야 하는 입장과는 다르다.
정복 전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는 것이 목적.
완전한 정벌로 적국을 소멸시키고 합병한다.
라는 것은 최대치의 결과이지만 현실은 항상 그렇게 좋은 결과만 나오지 않는다.
적국에게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해도 정복 전쟁 자체에 무리가 왔다 싶으면 발을 빼는 것이 현명하다.
지금 제국은 공화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다.
구 발랑스 왕국과 구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를 완전히 정복했고 공화국의 영토를 3분의 1 이하로 줄였다.
비록 여기서 전쟁을 멈춘다고 해도 레스터 왕국과 강화를 하고 정치적인 교섭을 하면 충분할 정도로 이득을 본 상태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세비안 백작도 그걸 알았기에 루카스 플로리안을 굳이 사로잡은 것이다.
강화를 하는 회담의 자리에서 레스터 왕국에 하나라도 더 유리한 카드를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설마 제국이 강화를 그만두고 오히려 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설 줄은 몰랐다.
“솔직히 정말로 의외입니다. 안트라스라는 남자가 이 정도의 대국을 읽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세비안 백작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제국이 하고 있는 건 자충수, 아니 자멸에 가까운 악수입니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닌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군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안트라스의 죽음이라는 변수는 예상하지 못한 세비안 백작이었기에 지금 제국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지.”
“그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세비안 백작은 좀 더 기다린다는 신중론을 채용했다
제국 내부의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에 이런 판단밖에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안트라스가 죽었다고?!”
지크프리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
“예. 제국군의 안에 심어둔 밀정이 확실한 정보라고 했습니다.”
공화주의라는 사상은 세상 어디에나 퍼져 있다.
그 덕분에 지크프리트는 제국군의 안에서도 내부적인 협력자를 심어 둘 수 있었다.
그것이 안트라스의 죽음이라는 호재를 밀턴보다 먼저 안다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기회가 왔군.”
지크프리트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트라스의 죽음으로 인해서 폭주하고 있는 제국.
아직 그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레스터 왕국.
지금이야말로 준비해 뒀던 칼을 뽑아야 할 순간이다.
“데이비드.”
“부르셨습니까? 대총통 각하?”
“계획은 완성되었나?”
“예. 이것이 증거입니다.”
데이비드는 한 장의 서류를 지크프리트에게 내밀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지크프리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동안 지크프리트라고 해서 그냥 숨죽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언제 올지 모를 반격의 기회를 위해서 제국의 심장에 꽂을 수 있는 칼날을 갈아 두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칼을 뽑아야 할 때였다.
“제이크.”
“예. 대총통 각하!”
“지금 즉시 전군을 움직였다. 목적지는 제국의 수도. 황제의 목을 친다!”
“옛!”
상처 입고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의 진격.
그것은 공화국의 화려한 반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의 위대한 영웅. 바론 대장의 한을 갚을 것이다. 나와 함께 일어나라 공화국의 형제들이여!”
지크프리트는 대대적으로 선포를 하며 공화국의 전군을 움직였다.
바론의 죽음은 공화국 전체로 봤을 때는 악재였지만 지크프리트 개인에게 봤을 때는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바론의 죽음으로 인해서 공화국 안에서 지크프리트가 유일하게 절대적인 살아 있는 카리스마가 되었다.
그동안 공화국의 군사, 정치, 법령 등을 모두 장악한 지크프리트였지만 바론 대장이라는 인물은 예외였다.
정밀한 기계 장치에 끼어 있는 모래알 하나처럼 바론의 존재는 지크프리트에게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차라리 적대적이라면 어떻게든 쳐내기라고 하겠는데 ‘나 건드리지 마라.’는 식으로 거리를 멀리하고 상대도 하지 않으니 먼저 손을 쓰기도 애매했다.
그랬던 바론 대장이 이번에 제국의 슈바이커 공작과 함께 죽었다.
사실 죽은 게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받으며 위대한 영웅 두 사람이 신의 옥좌로 올라갔다.
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믿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실제로 있다면 그 신은 나보다 더 무능한 존재일 것이다. 전지전능의 권능을 가지고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 것이 그 증거다.’
라는 것이 평소 지크프리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신의 옥좌니 어쩌니 하는 것은 믿지 않았지만 바론 대장이 슈바이커 공작과 함께 공멸했다는 현실만큼은 받아들였다.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결과였다.
혼자 죽은 게 아니라 제국의 골칫거리였던 슈바이커 공작을 데려갔다.
지크프리트에게 있어서도 슈바이커 공작이라는 존재는 눈엣가시였는데 그걸 뽑아 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기쁜 면은 바론 대장이 이제 죽었다는 것이다.
원래 정치가는 살아 있는 영웅보다는 죽어버린 영웅의 시체를 좋아하는 법이다.
훨씬 더 이용하기 쉽고, 절대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 보물.
그것이 영웅의 시체다.
지크프리트는 바론 대장의 원수라는 대의명분을 손에 쥐고 공화국 전체에 군사 동원력을 내렸다.
위대한 영웅의 복수를 하자.
라는 공감대로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죽어서 정말 다행이야. 바론 대장.’
바론 대장이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진심 어린 감사를 죽고 나서야 하는 지크프리트였다.
어쨌든, 지크프리트는 무시무시한 군세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
물론 제국군은 이것을 방관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공화국의 광신도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주어라!”
“오오오오오오!”
세바스티안 공작은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모든 전장에서 앞장서며 공화국과 격렬하게 싸웠다.
아끼던 제자와 존경하던 친우를 잃은 그는 이제 가릴 것이 없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고담 후작과 플로리안 공작 역시 전선에서 맹활약하며 공화국에 맞섰다.
덕분에 공화국의 전면 공세에 맞서서 제국은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금씩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안트라스가 없는 제국군은 지크프리트의 전략에 따라가지를 못했다.
레스터 왕국국의 개입으로 인해서 입은 피해.
바론 대장이 이끄는 공화국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
그리고 청야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늘어진 보급선.
이만큼의 악조건을 가지고 전투를 계속하기에는 제국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지크프리트는 잔혹하다 느낄 정도로 제국군의 전략적 약점을 찔러왔다.
“세바스티안 공작님. 리온 백작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공화국의 제이크가 이끄는 군대에 전사하시고 이끌고 있던 2만 군대도 전멸했습니다.”
“크윽….”
“세바스티안 공작님. 지크프리트가 별동대를 이끌고 보급 부대를 기습했다고 합니다.”
“어디냐? 놈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 것이냐?”
“카트롤 성을 지난 길목에서 나타났습니다.”
“거기는 얼마 전에 전투에서 공화국을 물리친 곳이 아닌가?”
“예. 아무래도 공성에 실패하고 후퇴하는 척하며 후방으로 돌아가서 보급 부대를 공격한 듯합니다.”
“빌어먹을….”
전략 지도를 내려다보는 세바스티안 공작은 이를 갈았다.
공화국은 전면 공세를 하는 듯했지만 전체적인 전선을 소모적으로 두들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며 지크프트나 제이크가 정예 병력을 이끌고 요소요소에서 제국의 급소를 찌르고 있었다.
‘이건 마치 전쟁 초반에 우리 제국이 공화국에 했던 작전이 아닌가?’
당한 만큼 갚아준다는 것일까?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서 이제는 제국이 공화국에게 똑같은 패턴으로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전황을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전략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작전 참모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작님. 아무래도 전선을 뒤로 좀 물려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전선을 물린다고?”
“예. 지금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을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공화국뿐만 아니라 레스터 왕국 역시 우리 군의 보급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으음….”
전선을 물린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전선을 물린다는 것은 기껏 억눌러 놓은 공화국을 다시 풀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이 전쟁으로 소모된 물자와 인명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일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으로서는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우선은 좀 더 버텨보자.’
세바스티안 공작은 전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군에 방어를 굳히고 지크프리트나 제이크의 동향에 주의하라 명하라. 그리고 본국에 전령을 보내서 추가 지원을 요청하라. 보급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옛!”
세바스티안 공작은 묘수를 쓰기 보다는 우선 문제점을 해결하는 쪽으로 지시를 내렸다.
사실 그의 능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일단 버텨 본다. 제국의 저력은 그렇게 가볍지 않을 터이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이 전쟁으로 제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 소모된다고 해도 지금의 전선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제국의 생산량과 인구 등을 고려하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지크프리트가 진짜 노리고 있는 한 수는 제국의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