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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235화 (235/257)

제235화

‘설마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패배를 맞보게 될 줄이야.’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수진을 이용한 후퇴 작전.

그와 동시에 진행한 양동 작전은 유인책과 별동대의 섬멸을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완전히 당했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남대륙의 난세에서도 나를 이 정도로 농락한 책사는 없었는데. 내가 늙은 걸까? 아니면….’

“포레스트 대공의 휘하에 그만큼 훌륭한 인재가 있다는 걸까?”

안트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느 쪽이든 천운은 포레스트 대공에게 있는 것 같군.”

안트라스는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이번 전투에서 레스터 왕국이 얼마나 커다란 우위를 차지했는지 말이다.

공화국을 거의 괴멸시키고 레스터 왕국에게 외교적 족쇄를 달았던 전쟁 초반에 이 대륙의 패권은 틀림없이 제국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대대적인 청야 전술 때문에 시간을 끌어 버렸고, 그 시간의 틈새를 타고 공화국은 레스터 왕국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제국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지만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군사 작전을 별개로 수행한다는 것은 이 동맹이 서로 믿지 못하는 관계라는 증거. 먼저 상대적으로 만만한 레스터 왕국부터 처리한다.’

그렇게 생각한 안트라스는 제국의 전군을 집중시켜서 레스터 왕국을 노렸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벌인 전투였고 그래서 여유를 두고 진행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가 안트라스의 실수였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뭉개놨어야 했는데….’

친우와 제국 최강자의 명예를 위해서 약간의 틈을 준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이제 힘의 균형추는 레스터 왕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운이 따르고, 인재가 따르고, 그리고 시대의 흐름조차 레스터 왕국을 따르고 있다.

‘이 전쟁, 더 이상 수행해 봐야 제국에 독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안트라스는 인정하고 말았다.

이 원정은 사실상 실패다.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레스터 왕국을 압박하며 천천히 제국에게 대륙 통일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이 자신의 인생 최후의 공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화국의 세력을 크게 꺾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안트라스는 펜과 종이를 가져와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서류를 모두 작성한 후에 안트라스는 세바스티안 공작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이것을 포레스트 대공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네.”

“이건…. 강화 조약서?”

“보다시피 그렇네.”

“안트라스…. 이건 너무….”

“어쩔 수 없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제국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길이야.”

그리고 안트라스는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지금 제국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리고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제국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으음….”

“지금 시대의 흐름은 제국의 편이 아니야. 여기에 거스르면 좋지 않아. 지금은 흐름에 따라 순응하며 숨을 죽이는 것이 좋네.”

“폐하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네.”

“황제 폐하께서 실책을 물으신다면 내 목으로 대신 사죄를 하겠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게 옳은 길이야.”

“…….”

“다행이도 이 원정의 대외적인 목적인 공확국의 토벌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뤄졌네. 우리는 레스터 왕국과 강화를 하며 동시에 공화국을 견제해야 하네. 레스터 왕국의 강화 조건으로 구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를 요구한다면 중앙부…. 아니 여차하면 전부 건네줘도 좋아. 오히려 그 편이 좋겠군.”

“그게 더 좋다고?”

“제국이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할 필요 없이 레스터 왕국이 공화국을 온전히 마주하도록 해야지. 그리고 제국은 다시 힘을 모으면 되네.”

“…….”

“제국은 아직 대륙의 남부 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네.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은 대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 국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지만 제국은 사정이 달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국은 힘을 축적할 수 있네.”

“그거야….”

“비록 지금은 시운이 따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만, 힘을 모으며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제국에게 기회가 올 것일세. 그것이 폐하의 다음 세대가 될지. 아니면 그 다음 세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폐하께서 대륙의 정복을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자신의 세대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네. 그걸 위해서라면 내 늙은 목 정도는 기꺼이 바침세.”

안트라스의 계획은 이번 세대의 물러남과 동시에 피해의 최소화.

그리고 100년 후의 미래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계획을 들은 세바스티안 공작은 크게 감탄했다.

‘이 친구가 현자가 아니면 누가 현자란 말인가?’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자네 전에 나하고의 우정을 뭐라고 했던가? 문경…. 기고?”

“문경지교(刎頸之交)라고 하지. 그게 왜…. 자네 설마?”

“자네 목 하나만 바쳐서는 폐하께 면이 서지 않지. 나도 같이 바치겠네.”

“자네는 나와 달리 필요한 인물일세. 그런데 어찌….”

“뭐 어떤가? 어차피 강화를 한다면 우리 세대에 전쟁은 없을 것 아닌가? 내가 100년 후에도 제국에 있을 것도 아닌데?”

“아니야. 틀려. 자네는 마스터야. 존재 자체만으로도 억제력이 되네. 그러니….”

“그만두게. 자네보다 지혜는 부족할지 몰라도 고집은 더한 늙은이가 나야.”

“세바스티안….”

“함께 가세나. 쓸쓸하게 혼자 보내서야 내 면이 아니지.”

그렇게 세바스티안 공작은 안트라스의 계획에 동조하기로 했다.

비록 이것으로 인해서 황제의 진노를 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지만 기꺼이 하겠다고 결정했다.

안트라스와 세바스티안 공작이 중대한 결심을 했다.

공명심을 버리고 그저 제국을 위해서 오욕을 뒤집어쓰는 결심을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자신의 인생 전부에 쌓아 올린 명예와 능력을 희생하는 일이었지만 둘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강화? 강화를 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공작님.”

“미친 늙은이 같으니….”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은 이를 갈았다.

최근 플로리안 공작은 안트라스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자신의 사람을 은밀하게 안트라스 주변에 심었다.

오랫동안 무가로 이름을 날려 온 플로리안 공작가에서 기사 몇 명을 포섭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안트라스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플로리안 공작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강화라고? 하…. 하하…. 우리 제국이 레스터 왕국에 먼저 강화를 제의 한다고? 그게 제국에 얼마나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오는지 모르는 건가?”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은 당장이라도 안트라스의 막사에 달려가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런다고 안트라스가 자신의 계획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군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안트라스였기에 명분이 부족했고, 힘으로 압력을 넣어 보려고 해도 세바스티안 공작이 막을 것이 뻔했다.

‘고담 후작을 내 편으로 만들면…. 아니야. 그 친구는 중립을 벗어날 성격이 아니지.’

이럴 때는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면 든든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아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 버렸다.

그것도 모두 안트라스의 실책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플로리안 공작은 더 크게 분노했다.

‘애당초, 그런 이방인에게 군의 통수권을 맡기는 것이 잘못된 것이야.’

플로리안 공작은 생각했다.

지금 안트라스는 틀렸다.

지금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제국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이 생길 것이다.

라고 말이다.

원래 사람이 생각이 깊어지면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그렇게 고찰해서 내린 결론이 항상 옳은 경우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제국을 외부인의 손에 맡길 수는 없어.”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은 안트라스의 존재를 제국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처리를… 해야겠어. 제국을 위해서.”

뭔가를 결심한 도미닉 플로리안의 공작에 싸늘한 살기가 맴돌았다.

다음 날.

세바스티안 공작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 그것이….”

“당장 말하지 못하겠나?!”

세바스티안 공작은 자신에게 보고를 하는 전령에게 엄청난 살기를 들이부었다.

“흡….”

전령은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면서도 살고 싶다는 일념에 같은 보고를 다시 올렸다.

“간…. 간밤에…. 은의 현자님이…. 암살자에게 당…하셨다고…. 합…. 끄윽… 니다.”

간신히 보고를 마치고 전령은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한 걸음에 안트라스가 있는 막사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기사들이 이미 막을 치고 있었고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과 베이커 고담 후작도 있었다.

“세바스티안 공작 각하. 지금 안에는….”

“비켜라.”

세바스티안 공작의 앞을 가로막으려던 기사들은 세바스티안 공작의 살기에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들을 지나쳐서 막사 안에 들어간 세바스티안 공작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앞에는 심장에 칼이 박힌 상태로 절명해 있는 안트라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세바스티안 공작의 눈에 핏발이 섰고 온몸에서는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살기가 흘러 넘쳤다.

누가 이 남자를 기사의 거울이자 표상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 세바스티안 공작은 피에 굶주린 짐승과 같은 거칠고 야만적인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누구냐?”

그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겁에 질려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말하지 못하겠느냐!!?”

쩌렁쩌렁한 외침과 동시에 세바스티안 공작이 검을 뽑았다.

기사들은 그런 세바스티안 공작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몇 명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세바스티안 공작은 정말로 가까스로 이성을 잡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지금 당장 검을 휘둘러 피를 볼 것 같았다.

다행이도 그런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진정 하십시오. 공작님.”

베이커 고담 후작은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금 이게 진정할 일인가?”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은의 현자님을 암살한 것은 아마 공화국 아니면 레스터 왕국군일 겁니다.”

그 둘이 아니면 누가 안트라스를 암살한다는 말인가?

“경비를 서던 기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지난밤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무능한 것들….”

세바스티안 공작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는 안트라스의 곁에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친우의 체온을 느끼며 세바스티안 공작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안트라스…. 미안하네. 자네를 죽음은 모두 나 때문일세.”

안온하게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자 했던 친우를 전쟁터로 끌고 온 것은 자신이다.

제국을 위해서 그의 능력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그의 우정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 얻은 소중한 친구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는 안트라스의 심장에 박혀 있는 검을 잡았다.

“공작님. 시신에 훼손을 하면….”

고담 후작이 말리려고 했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은 이미 검을 뽑았다.

검을 뽑은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와서 세바스티안 공작의 몸에 튀었다.

그리고 그 검을 손에 쥐고 세바스티안 공작이 외쳤다.

“나 핵터 세바스티안.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나의 친우의 심장에 이 칼날을 박은 원수의 심장에 반드시 이것을 돌려줄 것이다! 그것을 가로막는 이가 있다면 그 누구라고 해도 용서치 않으리라!”

한 맺힌 세바스티안 공작의 맹세를 들으며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허리를 숙였다.

그의 맹세에 담긴 결의를 인정하는 일종의 예의였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해서 세바스티안 공작의 머릿속에서 안트라스가 제시했던 강화 계획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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