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대단하군.”
전장에서 꽤 떨어진 장소에서 제국군과 공화국군의 격돌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제롬 테이커와 비앙카 코넬리우스.
충분히 떨어진 장소에서 비앙카는 마법을 이용해서 전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제롬에게는 행운, 아니 차라리 기연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무인 두 명의 전투를 놓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하니…. 인간이 아스트랄화 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데이. 이론상 가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비앙카 역시 크게 감탄한 듯했다.
슈바이커 공작과 바론 대장의 결투는 이 둘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둘은 이제 신화의 영역에 도달해 버렸다.
지금 이 땅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현실 문제는 전쟁의 결과였다.
“제국이 이기긴 이겼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데이.”
비앙카의 말에 제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기다 슈바이커 공작과 바론 대장 역시 사라졌습니다. 세비안 백작이 바라는 결과 중에서 최상의 결과가 나왔군요.”
“그렇지. 그놈아도 꽤 괴물이데이.”
비앙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국과 공화국의 충돌.
이 상황 자체가 세비안 백작의 계획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배수진으로 진을 치고 제국과 승부를 겨룬 후에 미리 상류에 대기시켜 뒀던 선박을 이용해서 강을 건너서 후퇴.
여기까지는 안트라스가 읽은 대로다.
하지만 세비안 백작은 여기서 한 수를 더 나갔다.
세비안 백작은 강을 건넌 군을 제롬에게 이끌게 하면서 일부러 그 흔적을 남겨서 제국군의 행동을 북쪽으로 유인했다.
레스터 왕국군과 공화국군의 합류라는 결과는 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말은 반드시 그쪽으로 군을 움직일 것이라는 보장과 같았다.
실제 안트라스는 그렇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세비안 백작의 뜻대로 공화국과 제국군이 격돌했다.
레스터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양쪽 모두 적이다.
공화국과 임시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고 해도 군사 행동을 같이할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공화국과 제국을 충돌시켜서 양족의 힘을 동시에 깎아낸다.
라는 것이 세비안 백작의 계획이었다.
비록 지크프리트가 이끄는 본대는 아니지만 공화국의 최강자인 바론 대장이 이끄는 10만이라면 제국에게 호락호락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이 전투에서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순수한 병력 피해만 해도 15만이 넘었고, 무엇보다 제국의 최강자인 슈바이커 공작을 잃었다.
거기다 공화국의 바론 대장까지 말이다.
이것은 크다.
세비안 백작의 전략 한 수로 레스터 왕국은 삼국의 경쟁 구도에서 커다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제 현실적으로 대륙의 최강자는 제롬 아니면 지크프리트의 휘하에 있는 제이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레스터 왕국에서 거느리고 있는 마스터의 숫자는 공식 비공식을 합쳐서 다섯 명.
마스터의 숫자에서도 이제 다른 세력보다 크게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쐐기 역시 추가되었다.
“테이커 후작님. 대공 전하에게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가져와라.”
제롬이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무슨 내용이고?”
“적을 포착하고 전투에 들어갔다는 내용입니다.”
“그래? 거기까지 다 성공한 기가?”
“예. 이제 우리도 주군에게 합류하면 될 듯합니다.”
제롬은 웃으며 편지를 접었다.
‘결국 다 성공했구나.’
제롬이 제국군을 유인하는 동안 밀턴은 병력 10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남하했다.
레스터 왕국의 본토를 노리고 있는 별동대인 루카스 플로리안을 막기 위해서였다.
안트라스는 레스터 왕국군이 북쪽으로 향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빠르게 이동했지만 사실 이때 레스터 왕국군은 나눠졌다.
제롬이 15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며 그 흔적으로 제국을 유인했고….
밀턴은 10만을 이끌고 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물론 흔적은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수진의 후퇴 시에 수송용으로 이용했던 대형 선박을 그대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강을 타고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밀턴은 루카스 플로리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배가 넘는 적을 봤을 때 루카스 플로리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 젊은 호랑이는 패배를 몰랐고, 당연히 후퇴라는 단어도 떠올리지 못했다.
“전군 진격하라!”
“우오오오오!!”
자신이 가장 먼저 앞장서서 돌격하는 루카스 플로리안은 용맹무쌍하게 보였다.
하지만, 전쟁의 경험치로 봤을 때는….
“아직 어리군.”
밀턴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세비안 백작에게 말했다
“군의 운용을 맡기겠네.”
“예. 주군.”
“좋아. 남부 기사단 출진!”
“오오오오오오!!!”
밀턴은 직접 남부 기사단을 이끌고 출진하며 루카스 플로리안을 맞이했다.
“죽어라!”
“아아악!”
“이 빌어먹을…. 커억….”
양군이 격돌하고 전투의 양상은 빠르게 레스터 왕국군 쪽으로 기울었다.
숫자에서도 두 배에 달하는 차이가 났지만 수적 차이 이상으로 질적인 차이가 너무 컸다.
루카스 플로리안은 마스터인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서 무모한 중앙 돌파를 시도했는데….
사실 이것부터가 심각한 판단 미스였다.
중앙 돌파라는 선택은 성공했을 때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일단 실패하면 어정쩡하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고립될 뿐이다.
루카스 플로리안은 자신의 무력을 믿었기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벌써 지쳤나?”
눈앞에 있는 상대는 루카스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는 밀턴이었다.
밀턴이 자신을 막고 남부 기사단이 자신의 직속 기사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중앙 돌파가 조금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큭…. 밀턴 포레스트!”
루카스 플로리안은 악에 받쳐서 밀턴에게 덤벼들었지만 밀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루카스 플로리안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아직 어려. 재능은 있지만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하군.’
밀턴의 능력으로 봤을 때 루카스 플로리안의 무력은 94이다.
밀턴의 현재 무력이 93이니 조금 더 처진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턴은 조금도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무력과 별개로 전투의 경험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익스퍼트 시절부터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에 뛰어들어 전쟁에 단련된 밀턴이다.
거기에 비해서 루카스 플로리안은 제국의 안에서 평화롭게 지내며 그저 자신의 검술 수양에 힘을 쏟았을 뿐이다.
재능은 밀턴보다 더 높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다.
세바스티안 공작 같은 연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베이커 고담 후작 같은 심안의 특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슈바이커 공작 같은 괴물과는 비교할 것도 없었다.
밀턴은 이대로 수백 합이 넘도록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밀턴이 루카스 플로리안을 상대로 버티기만 하면 이 전투는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적의 우익을 완전히 무너트린다. 뒤처지지 말고 따라와라.”
“옛!”
투구로 얼굴을 가린 정체불명의 마스터와….
“간다! 뒤처지는 새끼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옛! 대공비 마마!”
오랜만에 광기를 터트리며 물 만난 것처럼 날뛰는 바이올렛.
이 두 명이 좌우의 날개를 펼치며 플로리안이 이끄는 5만 병력을 무너트려 가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밀턴은 느긋해 졌고 루카스 플로리안은 초조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아군이 위기로 몰렸지만 루카스 플로리안은 끝까지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다.
속으로는 여기서 자신이 밀턴의 목을 치기만 하면 결국 다 뒤집을 수 있다.
라는 명분을 가지고 매달렸지만 사실은 자신과 나이도 비슷한 밀턴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아집이 더 컸다.
결국 후퇴할 때조차 놓치고 좌익과 우익을 완전히 정리한 바이올렛과 철 투구의 기사까지 합류했다.
“루카스 플로리안!!”
“얌전히 항복을 권하오.”
“안 그럼 뒤져!”
“…부디 얌전히 항복을….”
마스터 세 명에게 둘러싸인 루카스 플로리안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웃기지 마라!”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어차피 뻔한 결과였다.
자신이 슈바이커 공작도 아니고 어떻게 마스터 세 명을 상대로 이기겠는가?
결국 루카스 플로리안은 그대로 사로잡혔고 그가 이끄는 군세도 괴멸되었다.
“큭…. 죽여라!”
전투가 끝나고 강철 족쇄로 팔다리가 모두 구속당한 루카스 플로리안은 이를 악물고 밀턴에게 말했다.
“죽고 사는 건 이제 네 소관이 아니다. 패배자는 패배자답게 닥치고 있어.”
“네놈이 감히…. 커억!”
퍼억!
“감히? 누구한테 감히 같은 말을 지껄여?!”
악에 받쳐서 밀턴에게 묶인 채 달려들려고 하던 루카스 플로리안은 바이올렛의 무릎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바이올렛은 그대로 루카스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발광해 봐라. 그때는 사지를 자르고 양 눈을 뽑고 혀를 잘라서….”
“…….”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협박을 접하며 루카스 플로리안은 안색이 파래졌다.
비유가 굉장히 리얼한 것이 정말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해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뭐지 이 여자는?’
곱게 공작가의 도련님으로 자란 루카스의 입장에서 바이올렛은 살면서 처음 보는 미지의 생명체였다.
“…너…는 누구냐?”
그런 루카스의 질문에 바이올렛은 당당하게 말했다.
“레스터 왕국의 제 2대공비 바이올렛 포레스트다!”
순간 루카스는 외쳤다.
“거짓말!! 세상에 이런 대공비가 어디 있…. 커억!”
말을 하던 루카스는 결국 한 대 더 맞았다.
“이게 아주 죽자고 환장을 했네. 오냐, 오늘 날 한번 잡고….”
바이올렛이 본격적으로 광기를 터트리려고 하는 그때….
“바이올렛.”
“예. 여보~.”
밀턴이 한마디를 하자 바로 태세가 변하는 바이올렛이었다.
“부르셨어요?”
그녀는 루카스의 멱살을 풀고 밀턴에게 쪼르륵 달려가서 수줍게 미소 지었다.
밀턴은 그런 바이올렛을 품에 안고 달래 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문은 내가 할게. 당신은 이제 가서 쉬어도 돼.”
“예.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리고 그녀는 수줍게 미소 짓고 물러났다.
그리고 밀턴은 뻘쭘한 표정으로 루카스 플로리안을 보며 말했다.
“내 아내가 좀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
“그러니 입조심하는 게 좋아. 평화로운 포로 생활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렇게 하지.”
이 말은 듣는 게 좋을 듯했다.
루카스 플로리안이 사로잡혔고 별동대가 괴멸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트라스는 깨달았다.
“당했구나.”
그제야 그는 자신이 유인책에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가뜩이나 바론 대장이 이끄는 공화국군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어서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이 상황이 적이 유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더욱더 곤란해졌다.
“안트라스! 이게 어찌된 일이오! 당신 계책대로 행동했는데 왜 내 아들이 사로잡혔단 말이오?!”
플로리안 공작은 자신의 아들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알자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진정하게 플로리안 공작. 전쟁터에서 승패는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저 이방인의 계책에 따라서 지금 제국이 위기에 처했단 말이오?!”
“안트라스가 있었기에 공화국을 여기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일세! 그걸 모른단 말인가?”
“아주 잘나셨군. 세바스티안 공작. 제자가 병신같이 뒈졌는데도 냉정하기 짝이 없어.”
“지금 뭐라고 했지?”
세바스티안 공작의 눈에 불길이 일어났다.
“그만들 두시오!”
둘이 격돌하려고 하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끼어든 것은 베이커 고담 후작이었다.
평소 온화한 성격인 그답지 않게 지금은 진심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말이다.
그런 고담 후작의 진심 어린 분노에 두 공작은 적지 않게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우리끼리 책임을 물으며 분열해 봐야 적을 이롭게 할 뿐이오. 모두 냉정해집시다.”
고담 후작의 옳은 말에 두 사람은 뭐라 대꾸하지 않고 일단 기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고담 후작은 안트라스를 바라보고 말했다.
“은의 현자시여. 지금의 결과는 둘째치고 그대의 현명한 지혜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소. 부디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선택지를 제시해 주기 바라오.”
고담 후작의 이 발언은 사실상 안트라스에게 만회의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었다.
안트라스의 입장에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굴러온 돌과 같은 자신의 입장에서 권위를 내세워서 플로리안 공작을 억누르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세바스티안 공작 역시 안트라스의 친우였기에 결국 편들기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입장에 있으며 내부적으로 인망이 높은 베이커 고담 후작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안트라스는 아슬아슬하게 지휘권을 유지 할 수 있다.
“잠시 생각을 좀 해보겠소. 하루만 시간을 주시기 바라오.”
“알겠소.”
그리고 안트라스는 회의실을 떠나서 자신의 막사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