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안트라스가 남대륙에서 활동하며 무려 20년 동안이나 제나라와 맞서 싸웠던 하나라의 젊은 국왕 제이한.
하나라의 국력은 제나라의 반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안트라스가 그 나라를 무너트리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0년이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7국의 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무장이자 백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나라의 국왕 제이한 때문이었다.
남대륙 최강자를 꼽을 때 항상 이름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위와 항상 선두에 서서 싸우는 그 용맹함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호왕(虎王)이라는 호전적인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상식을 넘어선 무위를 소지한 호왕이 스스로 선두에 설 때면 안트라스의 계략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때 안트라스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상식을 초월한 무위의 소유자가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앞장섰을 때는 전략적인 계산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훗날 그 호왕 제이한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안트라스는 자신의 부친이자 제나라 최강의 무장인 이명 대장군과 함께해서 간신히 호왕을 물리쳤다.
아니, 그건 물리쳤다고 하기도 애매한 일이다.
그 최후의 일전에서 제이한과 부친인 이명 대장군은….
“아니, 지금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안트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과거의 숙적이 떠올라서 그만 상념에 잡혀 버렸지만 지금은 눈앞에 현실에 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뚜… 뚫린다!”
제국의 지휘관들의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어코 바론은 제국의 포위망을 힘으로 뚫어 버리고 나왔다.
그때 그를 따르는 기마 전력은 100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위대한 공화국의 영웅 바론!”
“대륙의 최강자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바론!”
그 순간 공화국의 사기는 하늘에 닿을 듯이 솟구쳤고 반대로 제국의 병사들은 압도되었다.
그게 바론이라는 한 명의 무위 때문인지 아니면 공화국군의 광적인 사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 공화국군은 두 배가 넘는 숫자의 제국군을 압도하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상식을 넘어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트라스는 이 상식 밖의 현실을 다시 현실로 돌리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베이커 고담 후작.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
안트라스는 즉시 슈바이커 공작을 제외한 세 명의 마스터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저자의 목을 가져 오시오. 저자의 목을 치면 공화국군은 알아서 자멸할 것이오.”
세 명의 마스터에게 한 명을 협공하라는 명령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명령은 따르지 않겠지만….
“알겠소.”
세 명은 두말하지 않고 말에 올라서 바론을 향해서 달려갔다.
저 남자가 상대로 일대일로 부딪히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알았다.
명예롭지 못한 것은 알지만 이건 레스터 왕국 때와는 다르다.
일기토가 아니라 전쟁 중인 상황에서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세 명의 마스터는 달려갔다.
단….
“…….”
이 명령에서 제외된 슈바이커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안트라스가 자신도 나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명령이 없자 스스로 말에 오르며 말했다.
“나도 가도록 하지.”
그러자 안트라스가 다급하게 말렸다.
“잠시 기다리시오. 슈바이커 공작!”
“왜?!”
신경질적으로 물어보는 슈바이커 공작의 안광에 안트라스는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슈바이커 공작에게 말했다.
“공화국군의 맹공에 아군의 보병 전열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귀공이 가셔서 적의 공세를 늦춰 주시면 아군의 사기도 올라가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오.”
안트라스의 말에 슈바이커 공작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당신 입으로 바론이라는 자의 목을 치면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
“그런데 왜 나를 뺀다는 말이오? 애당초 당신은 약속했소. 저 남자를 내 앞에 세워 준다고!”
“그래. 그랬지요.”
안트라스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전쟁에 나오기 싫어하는 슈바이커 공작을 꿰어내기 위해서 그가 제시했던 것은 공화국의 바론이었다.
스스로의 무위 향상을 위해서 틀어 박혀 있던 슈바이커 공작이었지만 혼자서 하는 수련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강한 상대가 필요했고 이 대륙에서 슈바이커 공작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공화국의 바론은 훌륭한 미끼였다.
하지만 그때 안트라스는 몰랐다.
설마 공화국의 바론이라는 인물이 저 정도의 괴물인줄은 말이다.
‘슈바이커 공작만 해도 석년의 아버님에게 필적하는 수준이거늘….’
솔직히 바론이라는 인물은 다소 과소평가했었다.
지크프리트가 등장하기 전에 공화국의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다.
강하다고 해도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보니 바론도 괴물이었다.
그것도 슈바이커 공작에게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의 괴물.
안트라스는 알고 있었다.
지금 슈바이커 공작과 바론이 부딪혔을 때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말이다.
‘아직 지크프리트와 포레스트 대공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안 돼.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결심을 굳힌 안트라스가 말했다.
“약속은 지킬 것이오. 하지만 나는 책사로서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의무가 있소.”
“그렇다면….”
“그대가 전방으로 나가서 공화국의 병사들을 물리쳐주고 균형을 잡는 동안 아군의 마스터 세 명이 바론의 발목을 잡을 것이오. 그사이 돌아온다면 약속대로 그대를 바론 대장과 자웅을 겨룰 수 있소.”
안트라스의 말에 슈바이커 공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오는 사이 바론의 목이 날아간다면 어쩔 거요?”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바요.’
“그렇다면 바론이라는 인물은 애당초 귀공께서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겠소?”
속과 겉이 전혀 다른 대답을 하는 안트라스였다.
하지만 말 자체는 설득력이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전선을 되살려 놓고 와야겠군.”
슈바이커 공작은 그렇게 말한 후에 빠르게 말에 올라타서 최전방으로 달렸다.
그런 슈바이커 공작의 등을 보며 안트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책임을 나에게 묻는다면 그때는 대가를 치르겠소. 하지만 지금 그대와 바론을 싸우게 할 수는 없소.’
안트라스가 지금 예상하고 있는 결과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슈바이커 공작이 전방의 보병 전선의 균형을 맞춰주기 전에 세 명의 마스터가 바론의 목을 치는 것.
아니면 두 번째로 슈바이커 공작이 합류하기 전에 세 명의 마스터가 바론에게 심각한 부상이라도 입혀 두는 것.
이 두 가지가 안트라스가 노리는 노림수였다.
하지만 세 번째의 경우도 있었다.
슈바이커 공작이 전방의 보병 전열을 너무 빠르게 되살리고, 그동안 세 명의 마스터가 바론을 상대로 별 부상을 입히지 못해서 두 명의 괴물이 최상의 상태로 서로 부딪힌다면….
‘그때는 정말 많은 게 꼬여 버릴 가능성이 크다.’
안트라스는 제발 세 번째 경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흐음….”
포위망을 돌파하고 적의 본진으로 돌진하던 바론은 앞에서 세 명의 마스터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세 명의 마스터 역시 바론의 앞에서 말을 멈추고 검을 세우며 기사의 절도에 맞춰서 말했다.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오.”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이다.”
“베이커 고담 후작이오.”
세 명의 소개를 듣고 바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군.”
“…·뭐가 말이요?”
“너희들 중에 슈바이커 공작은 없다는 게 말이지.”
그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공화국의 최강자라고 해도 슈바이커 공작은 두렵다는 말이오?”
적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강자에게 제자가 인정받은 것이 어지간히 기쁜 세바스티안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바론의 말은 세바스티안 공작뿐만 아니라 다른 두 명의 마스터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가 너희들 같은 피라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말이다.”
제국의 마스터들은 순간 자신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리고….
“기대를 많이 하고 왔는데 실망할 뻔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했을 때는….
“죽여주마!”
“건방진!”
“…….”
세 명의 마스터 모두가 생애 최대의 격노를 일으켰다.
“너희들로는 무리다.”
그런 세 명의 마스터를 상대로 바론은 담담하게 말하며 그들에게 맞섰다.
그래도 3대1은 너무 한 것 아닌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바론과 맞서는 세 명의 마스터는 내심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세바스티안 공작이 바론의 일격에 날아가며 바로 사라졌다.
“커억….”
단 일격.
핵터 세바스티안은 날아가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이….’
마스터 간의 오러라고 해도 파괴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지나쳤다.
검을 마주한 순간 손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가 날아간 것은 그 충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쯤은 스스로 날아간 것이기도 했다.
안 그러면 틀림없이 첫 일격에 검을 떨어트렸을 것이다.
“세바스티안 공작님?!”
고담 후작이 세바스티안 공작을 걱정하며 외쳤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크윽….”
콰아앙!
세바스티안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론의 일격이 고담 후작에게 떨어졌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일격에 고담 후작은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푸히히힝!”
일격을 막는 순간 고담 후작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가 네 개 모두 부러져 버렸다.
하지만 고담 후작은 어떻게든 버텨냈고, 그렇게 검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 반대편에서 플로리안 공작이 끼어들었다.
“빈틈!”
그의 찌르기가 군더더기 없는 섬광을 그리며 바론의 목을 노렸다.
바론이 검으로 고담 후작을 억누르고 있는 중이니 방어는 불가능하리라.
‘잡았다.’
빈틈을 노리고 뻗은 회심의 일격에 플로리안 공작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콰아앙!
플로리안 공작의 찌르기가 옆으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바론이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휘둘러 플로리안 공작의 찌르기를 튕겨내 버린 것이다.
“말도 안…. 읏!?”
경악한 플로리안 공작은 놀랄 사이도 없이 바론이 손을 뻗어서 자신의 흉갑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는 것에 당황했다.
그리고….
“흡!”
콰아앙!
“크악!”
바론은 그대로 플로리안 공작을 고담 후작에게 패대기쳐 버렸다.
마치 멱살을 잡아서 사람을 집어 던지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이다.
플로리안 공작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 아니 이르기 전에도 이런 공격은 당한 적이 없었다.
플로리안 공작과 고담 후작이 그렇게 말에서 떨어지자 바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은 풀 수 있겠군.”
그렇게 말하며 그 역시 말에서 내렸다.
뚜둑, 뚝….
그리고 목과 어깨를 푸는 그의 모습에서 세 명의 마스터는 자신들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이건….’
‘상상 이상의 괴물이군.’
‘빌어먹을….’
말에 내린 바론은 본격적으로 세 명의 마스터를 몰아붙였다.
쾅! 콰아앙! 콰직!
“크으….”
“커억….”
그의 공격은 거칠고 파괴적이었고 무엇보다 실전적이었다.
이 세 명은 가끔이기는 하지만 크리스챤 슈바이커라는 절대 강자를 상대로 대련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즉, 강자를 상대로 맞서는 방법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바론과 어느 정도 맞서 보고 자신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바이커 공작과 바론 대장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크리스챤 슈바이커는 정통파 기사인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가르침을 받고 여러 강자들과 결투를 하며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른바 정통파 기사로서 정점에 오른 인물이 슈바이커 공작이다.
거기에 비해서 바론 대장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는 철저하게 전쟁터에서 성장했다.
공화국의 병사로서 스트라부스 왕국이라는 군사 강국과의 전쟁에 내던져진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정정당당한 일대일의 기사 대전 같은 건 거의 해보지도 못했다.
상대가 다수일 때도 있었고 아군과 떨어져서 혼자 고립된 적도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열 번, 아니 백 번은 더 죽을 것 같은 사선을 넘어왔다.
오작 자신의 재능과 실력만으로 말이다.
그런 성장 배경 때문일까?
바론의 검술… 아니 전투술이라고 불러 마땅한 이 방식은 실전적인 걸 넘어서 야만적이기까지 했다.
발로 상대의 중심을 차거나 어깨로 상대를 미는 숄더 차지 같은 것은 기사들도 한다.
하지만 방금처럼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후려갈긴다거나….
“커억….”
투구가 날아간 상대방의 안면에 박치기를 한다거나….
“크악!”
쓰러진 상대방을 공이라도 차듯이 뻥 차버리는 경우는 없다.
“쿨럭….”
세 명의 마스터는 전신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바론의 검의 움직임에 정신을 집중해서 어찌어찌 치명타는 피하고 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날아오는 주먹질이나 발길질은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바론을 상대하는 세 명은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