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완전히 당했어.’
안트라스는 고뇌에 빠졌다.
처음부터 적의 의도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배수진은 후퇴를 포기하고 결사 항전을 목적으로 한다.
라는 책사의 상식에 휘말려서 적의 행동 중에 후퇴라는 선택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적을 완전히 놓쳐 버렸다.
병력을 이 일대에 집중시켰는데 말이다.
닭 쫓던 개의 입장이 된 안트라스는 상황을 분석하고 적의 목적을 빠르게 예측했다.
‘내가 지금 레스터 왕국의 입장이라면….’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적을 놓치면 안 되오.”
안트라스의 말에 다른 자들도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제국은 레스터 왕국을 목표로 잡고 전력을 집중시켰다.
공화국의 역공을 당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말이다.
그런데 레스터 왕국을 놓치게 되면 온전히 피해만 입고 실패한 것이 된다.
제국군은 거대하다.
거대한 만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소모되는 물자도 보통이 아니다.
여기서 레스터 왕국을 놓치면 물자만 낭비한 것이 되고, 무엇보다 레스터 왕국의 본진이 어디로 사라져서 무엇을 할지 모른다.
‘남쪽으로 갔느냐? 북쪽으로 갔느냐? 그게 문제군.’
강을 건넌 후에 레스터 왕국군의 움직임이 어디로 향했는지에 따라서 제국군도 군의 향방을 정해야 한다.
만약 레스터 왕국이 남쪽으로 갔다면 그 목표는 별동대를 이끌고 레스터 왕국의 본토를 노리고 있는 플로리안 경일 것이다.
플로리안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레스터 왕국의 본군과 마주하면 이길 가능성이 만무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가도 문제다.
북쪽에는 공화국군이 있다.
즉, 레스터 왕국의 본군이 공화국군과 합류해서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진짜 문제다.
가뜩이나 공화국의 바론 대장에게 당한 역공 때문에 제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레스터 왕국을 서둘러 처리하려 한 것도 공화국과 힘을 합치기 전에 각개 격파를 하기 위해서다.
레스터 왕국이 끼어든 서전에 입은 피해와 이번 전투에서 소모한 물자 등을 계산했을 때.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이 연합을 하면 정면 승부로도 제국이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다행이 공화국은 아직 전선을 넓게 유지하고 있어. 힘을 집중하고 있는 레스터 왕국을 먼저 처리하면 아직 늦지는 않았다.’
안트라스는 초조한 심정으로 전령이 가져올 정보를 기다렸다.
이미 소수의 정찰대가 급하게 뗏목을 만들어서 강 건너편의 흔적을 조사하기로 했다.
레스터 왕국이 북쪽으로 갔느냐? 남쪽으로 갔느냐?
그 결과에 따라서 제국군의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정찰병이 정보를 가지고 왔다.
“레스터 왕국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 정보를 얻자마자 안트라스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좋다. 지금 즉시….”
말을 하던 안트라스는 갑자기 언행을 멈췄다.
“왜 그러는가 안트라스?”
“…….”
세바스티안 공작이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지만 안트라스는 대답 없이 장고에 들어갔다.
‘이만큼 공을 들인 후퇴 작전을 벌인 책사가 순순히 흔적을 남겨둘까?’
만약 자신이라면 흔적을 최대한 지우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면 흔적을 일부러 남겨서 적을 유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찰대에게 특급의 전서구와 준마를 내주고 당장 적의 후미를 추적하라고 전하라!”
“예? 옛!”
“적의 후미를 발견하면 그 위치를 보고하라. 서둘러라!”
“옛! 알겠습니다.”
전령이 급하게 밖으로 나가자 안트라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안트라스에게 플로리안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당장 추격해야 하는 것 아니오?”
“아직 적의 행방을 정확하게 모릅니다.”
“남쪽으로 간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소? 놈들을 내버려 두면 별동대를 이끌고 있는 내 아들이 고립되어서 위험하오!”
플로리안 공작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거기에 안트라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심정인지는 아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요. 군의 진군로를 잘못 잡으면 진짜 돌이킬 수가 없소.”
정찰대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올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려는 안트라스였다.
하지만 가문의 후계자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은 플로리안 공작은 그걸 기다릴 수 없었다.
“집어치우시오. 내가 직할의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겠소!”
그리고 플로리안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앞을 세바스티안 공작이 가로 막으며 말했다.
“앉게. 플로리안 공작.”
“비키시오.”
“그럴 수는 없네. 앉아.”
“…….”
플로리안 공작의 눈에 불똥이 튀겼다.
그는 즉시 검을 뽑아서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겨누려 했다.
하지만….
그런 플로리안 공작의 팔을 베이커 고담 후작이 잡으며 말했다.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걸 놓지….”
말을 하던 플로리안 공작은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고담 후작이 슬쩍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기도 없었고 경고의 한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큭….”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인 것처럼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플로리안 공작을 바라보며 안트라스가 말했다.
“불안한 것은 이해하오. 하지만 이 전쟁을 맡은 자로서 지금 내가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플로리안 경의 안위가 아니라 이 전쟁의 승패요.”
“…….”
“부디 이해를 바라오.”
안트라스의 말에 플로리안 공작은 침음을 내며 자리에 앉았다.
무력적인 상황을 봐도, 명분을 봐도 자신이 돌출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기다리시오. 성급하게 굴어서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이게 최선이오.”
안트라스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도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조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인 것은 적이 철군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길어야 반나절 안에는 적의 후미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움직여도 늦지는 않아.’
다만, 바꿔 말하면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은의 현자님.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적의 후미를 발견했는가?”
“옛. 적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방향을 틀어서 서쪽으로 우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쪽?”
안트라스는 즉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레스터 왕국군의 진군 방향을 살피더니….
“역시. 서쪽의 대로를 타고 북상해서 바론이 이끌고 있는 공화국군과 합류할 생각인가?”
서쪽에 있는 대로를 타고 쭉 북상하면 공화국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 전에 막는다! 전군에 지시를 내려라! 목표는 북쪽. 레스터 왕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바론이 이끌고 있는 공화국군 10만을 섬멸한다!”
“옛!”
안트라스의 호령에 즉시 제국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트라스는 슈바이커 공작을 보며 말했다.
“공작. 약속했던 대가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소.”
그런 안트라스의 말에 다른 이들은 영문이 모를 표정을 했지만 슈바이커 공작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감사하오.”
제국군의 진격은 빨랐다.
레스터 왕국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바론이 이끌고 있는 공화국군을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이도 레스터 왕국군이 선택한 서쪽의 대로는 우회로다.
테른 강을 옆에 끼고 북쪽으로 그대로 진격하면 제국군이 먼저 바론 대장이 이끌고 있는 군과 조우할 수 있었다.
‘공화국군 10만. 그리고 바론이라는 인물의 무게감을 생각하면 군사를 총동원할 가치는 충분하다.’
이런 안트라스의 생각에 제국군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제국군은 마침내 당도하게 되었다.
공화국 최강자가 이끌고 있는 10만의 정예 병력과 말이다.
“대장님. 제국군이 전선에 나타났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부관의 목소리는 마치 오늘 아침은 날씨가 맑은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받고 있는 남자 역시 평온하다 못해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병력 규모는?”
“현재 20만으로 추정되고 후속에서 따라오는 병력까지 계산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들의 두 배인가? 알았다. 가서 준비하도록.”
‘옛! 대장님.’
절도는 있었지만 위급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보고를 마치고 부관은 물러났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에 감돌고 있는 날카로움은 맹수의 야성이 깃들어 있었고, 완벽하게 단련된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이 남자가 바로 공화국의 최강자 바론 대장인 것이다.
공화국의 총통들조차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았던 지크프리트였지만 이 남자만큼은 차마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공화국의 최강자.
보통 기사들은 앤드루스 제국의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을 대륙 최강자로 꼽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그때마다 이의를 제기했다.
바론이라는 이름 하나로 말이다.
공화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왕국에서도 바론이라는 이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 스트라부스 왕국을 상대로 그가 보여준 전과가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에서 활동하지 않는 슈바이커 공작보다 전쟁이라는 실전에서 단련된 바론 대장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바론이 이끌고 있는 이 10만의 병력은 자신들의 대장에 대해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군 안에서 유일하게 대총통인 지크프리트보다 바론을 더 신뢰하는 병력이었다.
제국군 20만?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
그딴 게 뭐 어쨌다는 건가?
자신들의 앞에서 바론 대장이 등을 보여주고만 있다면 상대가 신이나 악마라고 해도 기꺼이 덤빌 사람들이 모인 병력이었다.
바론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장교 일동들이 절도 있게 외쳤다.
“오셨습니까? 대장님.”
“적은?”
“앞에 있습니다.”
“좋군.”
바론이 손을 뻗자 부관이 수통을 건네주었다.
그 수통을 열자 속에서 확 올라오는 것은 싸구려 위스키의 독한 향기였다.
바론은 그것을 물처럼 벌컥 벌컥 마시더니 부관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나머지는 끝나고 마시지.”
“옛. 대장님.”
“전군을 준비시켜라. 손님을 맞이한다.”
“옛. 대장님.”
“은의 현자님. 공화국군이 움직입니다.”
망루 위에서 공화국군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안트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응이 빠르군.”
병력을 이끌고 있는 바론만이 주의 대상이 아니었다.
병력이 저렇게 기민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병력 자체가 정예라는 말이다.
“보병 앞으로! 저속으로 전진한다.”
안트라스는 혹시나 또 일기토 같은 일이 벌어져서 계산이 틀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서둘러 병력을 전진시켰다.
쿵! 쿵! 쿵!
제국의 보병들은 말 그대로 지축을 울리는 발구름 소리를 내며 전진했다.
그 뒤를 궁수대가 따라왔고 그 사이에 간간히 발리스타 같은 대형 병기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기사단과 기마 병력은 후방으로 빠져서 언제든지 아군을 우회해서 튀어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딱히, 묘수를 쓴 것이 아니라 가장 전형적인 병력 포진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병력 포진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어설픈 기책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제국군 정도의 병력 규모에 질의 향상이 갖춰지면 말이다.
‘과연 어떻게 나오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