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29화 (229/257)

제229화

이건 외도(外道)다.

좀 전에 3대3으로 어우러져 싸우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서로 암묵적으로 1대1 승부를 수락했고, 주변인들도 그것을 방관함으로 허락을 했다.

밀턴을 향한 충성심이 가득한 제롬조차 밀턴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도 끼어들지 못했다.

주군의 명예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제국 쪽에서 끼어들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것도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 말이다.

제국을 넘어 전 대륙에 검을 잡는 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기사 중의 기사.

그런 그가 명예를 더럽히고 결투에 끼어든 것이다.

그나마 밀턴의 목을 노리지 않고 공격한 것은 일말의 양심이었을까?

제롬은 말없이 밀턴에게 다가와서 그의 상태를 살피고 부축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과 슈바이커 공작을 매섭게 노려봤다.

“…….”

“…….”

둘은 차마 한마디 사과도 하지 못했다.

명예를 중요하게 가르쳤던 스승과, 그 가르침을 소중하게 지켜왔던 제자.

이 둘이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제롬이 밀턴을 챙겨서 돌아갈 때 까지 그 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전쟁의 실리를 우선시해서 제롬을 공격하기에는 자신들의 수치심이 너무 컸다.

결국 그렇게 밀턴이 돌아간 후에 슈바이커 공작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돌아가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그렇게 제국 측의 마스터들도 조용하게 물러났다.

“과연, 그래서 돌아왔다는 건가?”

“미안하게 되었네.”

“후우우….”

진지로 돌아온 세바스티안 공작에게 대강의 설명을 들은 안트라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인들이란 남대륙이나 여기나 다를 게 없군.’

안트라스는 남대륙에서도 이런 경우를 종종 겪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무인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긍지를 우선해서 군령을 거스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안트라스에게 돌아와서 사죄하며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다.

골치 아픈 것은 그럴 때마다 그저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었다.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무인의 명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군령을 거스르게 되었을 때 엄벌을 내리면 당장의 군기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무장들에게 인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상적으로는 군율을 우선시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현실상으로는 무장들의 신뢰를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전쟁터에서 책사가 아무리 작전을 잘 짜봐야 그걸 직접 수행하는 것은 무장들이다.

그런 무장의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책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손에 쥐고 있는 칼날이 무뎌진다는 것과 같았다.

골치 아프게도 명령보다 명예를 우선시하는 무인들 대부분은 꼭 필요하고 유능한 무인들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때나 지금이나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안트라스는 속으로 애를 삭히며 겉으로는 너그럽게 말했다.

“좋게 생각하면 레스터 왕국은 주 전력이 반감되었네. 그 트라이크라는 궁수는 꽤 골치 아팠는데 자네 말에 따르면 한동안은 활동하지 못하겠군.”

안트라스의 말에 세바스티안은 조금 안색이 편해졌다.

“내가 보기에 오러를 한계치까지 소진했네. 살지 죽을지도 모르겠고, 설령 산다고 해도 몇 년간은 몸을 추슬러야겠지.”

“포레스트 대공의 상태는 어떤가? 자네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지 않은가?”

친우의 명예와 관련된 부분이라서 물어보는 안트라스의 말은 퍽 조심스러웠다.

“…모르겠네. 너무 급하게 손을 써서.”

‘그리고 죽일 생각으로 독하게 손을 쓰지도 못했지.’

뒤에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지만 안트라스는 아마 밀턴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자네의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어. 최소한 며칠은 쉬어야 하지 않겠나?”

“아마 그럴 걸세.”

“좋아. 그럼 내일 승부를 보겠네.”

“…….”

안트라스의 말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불명예스럽게 입힌 부상 때문에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이 골수 기사는 말이다.

안트라스는 그런 친우의 심정을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무리 아끼는 친우라고 해도 안트라스가 이 전쟁의 책사로 있는 이상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친우의 명예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중요했다.

“내일 동이 트면 제국에서 먼저 공격할 걸세. 자네와 베이커 고담 후작이 좌익과 우익을 맡아 주게.”

“어쩔 생각인가?”

“배수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려 줘야지. 포위 섬멸전일세.”

배수진이라는 것은 원래 퇴로를 차단해서 병사들의 이탈을 막고 전의를 고양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이 반드시 전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면에 있는 적을 상대하는 것과 사방에서 포위된 상태에서 등 뒤의 퇴로가 차단당하는 것.

어차피 비슷한 상황이지만 병사들이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포위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병사들은 크게 동요하는 법이다.

‘레스터 왕국의 책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큰 실수를 했어. 왜 배수진이 양날의 칼인지 알게 해 주겠다.’

“트라이크의 상태는 어떤가?”

쓰러졌던 밀턴이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부하의 상태였다.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밀턴의 몸을 살피고 있던 비앙카였다.

“괜찮데이. 다행이 전 생명력을 다 소모한 건 아니드라. 한동안 쉬면 멀쩡해질 끼다.”

“하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밀턴은 막사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살폈다.

‘틀림없이 슈바이커 공작을 잡은 줄 알았는데…. 뭐가 문제였지?’

밀턴의 마지막 기억은 자신의 일격에 부서지는 슈바이커 공작의 검이 부서지는 장면.

딱 거기까지였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자신의 모든 기력과 정신력을 쏟아 붓고 거기에 운까지 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솔직히 또 하라고 하면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제롬이 하는 말을 들으니 니가 다 이겼는데 누가 끼어들었다 카드라.”

“누가 끼어들었다고? 누가?”

“흐음…. 들었는데 까먹었다.”

그러자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 플로리안 공작일 거야.”

“그러고 보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데이.”

전혀 틀린 대답을 하는 비앙카였다.

밀턴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쯧, 처음부터 공적을 노골적으로 바라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소인배일 줄이야. 더럽고 치졸한 인간이군.”

“살다 보면 진상들이 제법 있드라.”

졸지에 억울해져 버린 플로리안 공작이었다.

“잠깐, 그럼 지금 전황은?”

“니가 쓰러진 후로 지금 소강상태다. 양군은 그냥 대치 상태데이.”

그 말에 밀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

밀턴에게 중요한 것은 첫날을 버텨내는 것이었다.

“세비안을 불러 줘.”

“내가 니 시다바리가? 딴 아 시키라!”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며 막사를 나갔다.

그리고 밀턴은 머쓱한 표정으로 시종을 불러서 세비안 백작을 불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주군.”

“멀쩡하네. 그보다 세비안, 작전은 어떻게 되어 가나.”

“주군께서 몸소 하루를 벌어 주셨습니다. 병사들의 희생 없이 말이죠.”

“…….”

“이 정도로 최상의 결과를 내놓으셨는데 제가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지요. 이미 작전은 진행 중입니다.”

세비안 백작의 말에 밀턴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온전히 자네를 믿고 맡기겠네.”

“최선을…. 아니, 반드시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최선의 과정이 아니라 최고의 결과를 약속하는 세비안 백작이었다.

그건 그냥 허세가 아니었다.

다음날.

안트라스는 야밤에 어둠을 틈타서 군의 배치를 바꿨다.

본진에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과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을 남기고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과 베이커 고담 후작에게 좌익과 우익을 맡겨서 넓게 펼쳤다.

날이 밝았을 무렵 완벽한 포위망을 구성하고 레스터 왕국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안트라스는 세비안 백작의 마술을 경험하게 된다.

“은의 현자님. 적의 진형에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뭐라고?”

“목책 가까이 접근해도, 활을 쏘고 도발을 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설마?”

안트라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 즉시 적의 진형을 확인하라.”

“옛!”

그리고 레스터 왕국군의 진형에 들어간 제국군의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들어간 진형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깃발과 밤새 타다 만 횃불은 남아 있었지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서 보고하라! 적이 사라졌다!”

“옛!”

제국군의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트라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다시 한번 보고하라! 그게 정말이냐!?”

“틀림없습니다. 적은 진지를 버리고 간밤에 후퇴하였습니다.”

“어떻게? 적은 배수진을 쳤고, 우리는 간밤에 포위망을 구성했다. 그런데 어찌 후퇴했단 말이냐?”

“그것이 잘….”

안트라스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말했다.

“지금 즉시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안내하라.”

“옛!”

그리고 안트라스는 적의 진형에 직접 들어갔다.

보고대로 텅텅 비어 있는 진형을 보고 안트라스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마법? 아니야 환영 마법의 대가인 숲의 마녀들이라고 해도 이런 건 무리야.”

안트라스는 고심에 빠졌다.

지금 그는 적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다.

항상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비해야 하는 책사의 입장에서 적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25만에 달하는 대군이 하룻밤에 후퇴하는 것은 무리다.

뒤편에 강의 유속과 넓이를 봤을 때 건너는 것은 절대 무리다.

강의 넓이는 좁은 곳도 300미터에 달했고 수심도 깊었다.

‘수상전을 치러도 될 정도의 강이야. 이걸 25만의 대군이 건너는 것은 무리…. 수상전?’

안트라스의 머릿속에 뭔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럴 수가. 그런 수가…. 아니, 하지만….”

안트라스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서둘러 본진으로 돌아갔다.

“지금 즉시 지도를 가져와라.”

“예. 알겠습니다.”

시종이 전략 지도를 가져오자 안트라스는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대륙의 전도를 가져와라! 어서!”

“예? 예. 알겠습니다.”

전령은 다급하게 지도를 바꿔왔다.

전투가 발생하는 지역의 지형을 상세하게 그려 놓은 전략 지도가 아니라 대륙의 전체적인 지도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지도를 확인한 안트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이랬던 건가?”

지도를 확인한 안트라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무슨 일인가? 안트라스?”

“당했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적이 간밤에 후퇴했네. 야밤에 배를 타고 말일세.”

“배? 배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를 보게. 우리가 있는 곳이 여기고 우리 앞에 있는 강…. 테른 강이군. 이 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레스터 왕국의 북부 지역이 나오네. 하류로 내려가면 바다가 나오지.”

“설마 자네?”

“처음 이 자리에 배수진을 쳤을 때부터 레스터 왕국은 이걸 노렸던 걸세. 배수진을 치고 퇴로가 없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강의 상류나 하류에 미리 선박을 준비해 놨을 걸세. 25만이라는 대군을 수송하기에 충분한 함선들을 말일세.”

“그런 대범한 수를…·?”

“생각도 못 했네. 내가 이 대륙의 지리에 어두워서 그만….”

안트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 보면 레스터 왕국은 해양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나라다.

이미 대륙의 서쪽 해안선을 평정하다시피 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워터포트 왕국까지 무역을 할 정도로 항해술이 발전했다.

배를 수배해서 이동시키라고 명령만 내린다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플로리안 공작이 끼어들었다.

“잠깐, 아무리 배에 많은 인원을 싣는다고 해도 무려 25만이오. 25만. 설마 그 숫자를 모두 수송할 수 있다는 말이오? 하루 만에?”

테른 강이 넓다고 해도 그 정도의 물량을 통째로 수송했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안트라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수송 거리가 강의 건너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오.”

“강의 건너편? 아아….”

그렇다.

아무리 많은 배를 수배했다고 해도 25만을 하룻밤에 수송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강의 건너편으로 아군을 실어서 나르는 것이라면?

대형 선박 열 개만 동원해도 하룻밤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 레스터 왕국은 간밤에 로빈이 이끌고 있는 대형 선박들을 동원해서 병사들을 강의 건너편으로 수송했다.

선체와 돛을 모두 검게 칠한 배를 통해서 병사들을 전부 강의 건너편으로 수송시키는 것에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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