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주의 게임-228화 (228/257)

제228화

“바이올렛.”

“예. 여…. 대공 전하.”

밀턴의 물음에 바이올렛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밀턴은 바이올렛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트라이크를 데리고 빨리 후퇴해. 비앙카에게 보이면 아직 살릴 수 있을지 몰라.”

“예? 하지만 당신은….”

“시키는 대로 해! 명령이야.”

“예. 알았어요.”

아무리 부부지간이라고 해도 전쟁터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밀턴의 명령에 바이올렛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밀턴은 말에서 내려 슈바이커 공작과 마주했다.

“내가 상대요.”

“좋지.”

밀턴이 슈바이커 공작과 마주하자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잠깐, 나와 승부하자. 포레스트 대공.”

밀턴 포레스트라는 공적을 빼앗기기 싫었던 플로리안 공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플로리안 공작. 그만두시오.”

베이커 고담 후작이 그런 플로리안 공작을 막았다.

“무슨 뜻이오? 내가 충분히…. 읏.”

말을 하던 플로리안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자신이 등 뒤에서 차갑게 와닿아 있는 슈바이커 공작의 시선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딱히 압박을 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슈바이커 공작의 시선은 감히 네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라는 뜻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다.

베이커 고담 후작은 눈이 안 보이는 대신 이런 분위기를 가장 민감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했다.

어느새 다른 마스터들은 모두 전투를 중지하고 있었다.

슈바이커 공작의 압도적인 무위에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밀턴과 슈바이커 공작의 일대일 구도가 갖춰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인데…. 어쩔 도리가 없군.’

밀턴은 슈바이커 공작의 앞에서 자세를 잡고 말했다.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크리스챤 슈바이커.”

자기소개가 끝난 직후.

밀턴은 검을 양손으로 잡고 높게 위로 들었다.

“주군! 위험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제롬이 다급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슈바이커 공작은 반대로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정신인가?”

“달리 수도 없으니까요.”

“허허허….”

슈바이커 공작은 허허롭게 웃으며 밀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밀턴과 같은 자세를 잡았다.

“받아주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은 자세를 잡고 대치했다.

“위험해. 슈바이커 공작을 상대로 저런 승부라니?”

제롬은 초조한 표정을 하고 밀턴을 바라봤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머리 위로 높게 올린 자세.

즉, 내려치기를 하려는 자세였다.

이 자세에서 다른 공격이 나올 수는 없다.

억지로 다른 공격을 하려고 하면 늦다. 그러니 무조건 최단거리로 가장 강력한 공격인 내려치기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일격의 승부.

먼저 베는 사람이 이긴다.

동시에 벤다면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쳐내는 쪽이 이긴다.

마스터의 일격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생각한다면 패자는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밀턴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이런 승부로 상대를 유도한 것이다.

제대로 된 검술 승부를 한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제롬과 바이올렛을 여유롭게 격퇴한 시점에서 이미 검술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 기술이 끼어들 요지를 최대한 배제하고 순수하게 기력 승부로 상대를 유인한 것이다.

물론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허사다.

하지만 그건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대륙의 최강자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슈바이커 공작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리고 지금.

밀턴은 조심스럽게 간격을 좁혔다.

슈바이커 공작은 원거리에서 오러를 날리는 기술이 있었지만 밀턴의 수준에 맞춰서 사용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러니 밀턴은 신중하게 간격을 좁히면서 자신과 상대의 공격 거리를 가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슈바이커 공작 역시 거리를 가늠하며 간격을 좁혔다.

“흥, 어림없는 일이지.”

플로리안 공작은 밀턴의 행동을 보며 비웃었다.

그가 보기에 밀턴은 승산이 없었다.

플로리안 공작 정도의 수준이 되면 두 사람의 간격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슈바이커 공작의 공격 거리가 밀턴보다 훨씬 길었다.

신체 조건을 봐도 명확했고 보법의 숙련도와 검속을 비교해 봐도 슈바이커 공작이 훨씬 더 빨랐다.

결국 밀턴이 이기려면 슈바이커 공작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공격을 해야 했고, 그것도 1보 전진을 하며 공격을 해야 간신히 먼저 닿을 정도였다.

이건 불가능했다.

대륙 최강자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을 상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건 정면으로 검술 승부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승산이 없는 행위였다.

‘제길, 저 멍청한 놈. 어차피 떨어질 목이라면 내 검에 떨어질 것이지.’

플로리안 공작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스터들이 비슷한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간격을 좁히던 두 사람이 마침내 공격 거리에 닿았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슈바이커 공작이었다.

그의 검은 파문을 그리지 않고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고요하게 내려갔다.

완벽한 절도와 군더더기 없는 검격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그리고 밀턴의 검은 그보다 아주 조금 늦게 출발했다.

‘좋아!’

‘슈바이커 공작이 빠르다.’

제국의 마스터들은 그 짧은 순간 승리를 확신했다.

밀턴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승기가 있다면 그건 슈바이커 공작보다 먼저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슈바이커 공작이 먼저 선수를 친 이상 이제 밀턴에게는 실낱같은 승산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밀턴과 슈바이커 공작의 검이 서로 부딪히며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힘 대 힘의 승부?’

‘미친놈!’

밀턴의 공격은 슈바이커 공작의 몸을 노린 게 아니라 그가 휘둘러진 검에 맞춰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더 미친 짓이었다.

파괴력 승부로 들어가면 밀턴과 슈바이커 공작의 차이는 더 확연하다.

그런데 검과 검의 충돌을 일부러 노렸다니?

이건 미친 짓이다.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아!!”

검을 부딪친 순간 밀턴은 온 힘을 다해서 오러를 한 점에 집중했다.

물론 슈바이커 공작 역시 힘 대결에 들어가서 오러를 집중했다.

하지만….

쩍…. 쩌적….

“웃?”

슈바이커 공작의 입에서 낭패한 기색이 드러났다.

자신의 검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그제야 그는 밀턴의 노림수를 알았다.

이전에 슈바이커 공작을 뒤로 밀려나게 했던 트라이크의 일격.

그때 이미 검에는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밀턴이 노렸던 것은 그 한 점이었다.

트라이크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그 작은 실금을 노리고 모든 정신과 기술을 집중시킨 것이다.

쩍…. 쩌저적….

“ㅤㅋㅡㅅ….”

점점 갈라져 가는 검을 보며 슈바이커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위험하다.

여기서 자신이 오러를 더 집중시키면 자신의 검이 파괴되는 것을 더 부추길 뿐이다.

이미 검은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대륙 최강자라고 해도 검이 부러지면 수가 없다.

“끝이다. 슈바이커 공작!”

밀턴은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서 힘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콰창!

쇠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슈바이커 공작의 검이 깨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이어지는 거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제국의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전투를 지켜봤다.

안트라스 역시 망루의 의자 위에서 벌떡 일어나서 눈을 부릅뜨고 흙먼지가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슈바이커 공작이 전사하면 안 돼.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일기토로 전쟁이 시작될 때 이미 눈살을 찌푸렸던 안트라스였다.

이길 수 있는 책략을 수십 가지나 준비해 왔지만 무인들의 호승심을 고려하지 못했다.

여기서 일기토를 물리려고 하면 병사들의 사기에 손실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일기토에 나선 제국의 무인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다른 건 몰라도 슈바이커 공작의 무위를 믿었기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레스터 왕국의 무인들이 이 정도로 끈질길 줄은 몰랐다.

결국 승부의 행방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니 이제는 슈바이커 공작의 위기까지 몰린 것이다.

‘제발 살아만 있기를….’

안트라스는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며 흙먼지 너머를 응시했다.

이윽고 흙먼지가 걷혔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와아아아아아!!”

“제국 만세!!”

“슈바이커 공작 각하 만세!”

쓰러져 있는 밀턴과 그 앞에 부러진 검을 잡고 있는 슈바이커 공작이었다.

“좋아!”

안트라스는 자신의 고령을 잊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상황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결과는 최상의 것이 나왔다.

일기토에서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를 제압했다.

이대로 목을 쳐도 좋고, 쓰러진 밀턴을 사로잡아서 포로로 잡으면 최선을 넘어 극상의 결과였다.

‘레스터 왕국을 압박해서 공화국을 공격시키고 전후 처리에 관해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겠군.’

사실상 이 일기토로 앤드루스 제국의 대륙 정복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제롬이 쓰러진 밀턴에게 다가가더니 그런 밀턴을 부축해서 자신의 진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슈바이커 공작은 그런 제롬의 행동을 보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안트라스는 노여움에 고성을 질렀다.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어째서 밀턴 포레스트를 놔준단 말인가?

“슈바이커 공작! 뭐 하는 것이오. 적을 사로잡으시오! 세바스티안! 즉시 포레스트 대공을 사로잡게 어서!”

안트라스가 크게 고함을 질렀지만 둘은 행동하지 않았다.

슈바이커 공작은 자신의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표정을 지었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허망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대체 왜…·?”

안트라스는 도저히 저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쉰 세바스티안 공작이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네. 크리스챤.”

스승의 사과에 슈바이커 공작은 씁쓸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못나서 스승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이 둘이 죄인처럼 행동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조금 전의 상황.

밀턴이 슈바이커 공작의 검을 부러뜨리는 그 순간.

슈바이커 공작은 순간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의 검을 부수는 기세 그대로 밀턴의 검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왔기 때문이다.

‘방심은 금물. 알고 있었는데….’

슈바이커 공작은 좋은 교훈을 가슴에 품고 저승길에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콰아아앙!

밀턴의 공격이 닿기 직전 다른 공격이 밀턴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바로 세바스티안 공작의 공격이었다.

그는 슈바이커 공작의 검에 금이 가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가 검이 부러지는 순간 참지 못하고 끼어든 것이다.

그 결과 밀턴은 쓰러졌고 슈바이커 공작은 살았다.

하지만….

“스승님?”

“…….”

살아난 슈바이커 공작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끼어든 세바스티안 공작 역시 죄책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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