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이 전쟁에 투입된 제국군의 전력은 무려 50만이다.
단일 국가로 이 정도 숫자를 동원 할 수 있다는 것은 제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50만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전장에 투입하기는 너무 많은 숫자다.
지형에 따라서 나뉘겠지만 아무리 넓은 평야전이라고 해도 보통 20만을 넘어가면 군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덩치가 커지는 만큼 명령이 전달되는 시간도 길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안트라스는 미리 대기 중이던 15만의 병력에 5만을 더해서 20만의 병력으로 레스터 왕국군의 15만을 본대를 공격하려 했다.
이 15만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제국의 마스터 4인이며 현장의 전략 전술을 지시하는 것은 안트라스 본인이다.
‘이 본대에 밀턴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레스터 왕국군을 물리쳐 버리는 것뿐.’
안트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군대를 진격시켰다.
“은의 현자님. 적의 진형이 보입니다.”
“음….”
안트라스는 미리 준비된 높은 망루의 의자에 앉아서 적진을 바라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배수진이라니? 진심으로 해보겠다 이건가?’
적의 진형은 목책을 빼곡하게 세워놓고, 그 뒤편에는 장창병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진형의 뒤편에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의 너비나 유속 등으로 봤을 때 사람이 건널 수 있는 강이 아니었다.
그 강을 뒤에 두고 진을 친다는 것은 병사들의 퇴로를 차단해서 끝까지 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 후퇴 없이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의도였다.
“어쩌면, 밀턴 포레스트는 여기는 없을지도 모르겠군. 결사 항전의 진형에 일국의 군주가 몸을 담고 있을 리는 없지.”
어쨌든 안트라스로서는 적을 섬멸할 뿐이었다.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려…. 음?”
안트라스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왜냐하면 적진에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크게 외쳤기 때문이다.
“나는 밀턴 포레스트다.”
그 외침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밀턴 포레스트?”
“레스터 왕국의 대공이잖아?”
“역시 여기에 밀턴 포레스트가 있는 건가?”
제국군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그것은 두려움보다는 공적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전쟁터에서 거물의 목보다 더 귀중한 보물은 없다.
만약 자신들이 밀턴의 목이라도 치게 된다면 출세를 넘어서 인생이 바뀐다.
그런 이들의 앞에서 밀턴이 검을 높게 외치고 말했다.
“제국의 적장에게 고한다! 지금 당장 전군을 이끌고 돌아가라. 무익한 전쟁에 죄 없는 병사들의 피를 흐르게 하지 마라!”
밀턴의 외침에 제국군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포레스트 대공!”
외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바스티안 공작이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 밀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레스터 왕국이야말로 이 전쟁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방관자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에 끼어들어서 감히 제국을 공격하다니? 감히 제국의 심기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세바스티안 공작의 일갈에 안트라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받아줘서 좋을 게 없는데….”
목적은 모르겠지만 밀턴 포레스트가 직접 선두에 나와서 제국을 도발했다는 것은 그 도발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곤란하게도 세바스티안 공작이 그 말을 받아 버렸다.
그리고 안트라스의 예상대로 밀턴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바스티안 공작의 말을 받았다.
“그대야말로 허튼소리 하지 마라. 제국이 공화국을 공격하고 점령한 후에는 우리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이미 입수한 지 오래다.”
거짓말이다.
제국의 다음 목표가 레스터 왕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의 분석에 따른 가설이지 그런 첩보 자체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어차피 옳고 그른 것보다는 현재의 명분을 앞장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 밀턴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륙의 통일이라는 망상을 꿈꾸며 무고한 피를 흘리는 그대들의 야욕은 실로 추악하고 사악하다. 그대들의 야욕에 피를 흘리는 병사 한 명 한 명이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아들일지어다. 그들의 피로 이룬 정복을 영광으로 꾸미는 자신들의 위선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밀턴의 도발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크게 노하며 외쳤다.
“간악한 언변으로 감히 제국을 희롱하는가? 지금 당장 네놈의 목을 쳐 주겠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직접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섰다.
이른바 일기토가 시작된 것이다.
‘좋아. 일단 걸렸다.’
단기로 앞에 나오는 세바스티안 공작을 보며 밀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비안 백작은 밀턴에게 말했었다.
[주군, 딱 하루, 아니 반나절입니다. 반나절만 제국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제국을 수렁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즉, 세비안 백작의 계략을 위해서는 밀턴이 제국군을 상대로 반나절은 버텨내야 하다는 것이다.
그냥 그런 제국군도 아니고 제국군의 최정예를 상대로 말이다.
무모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해야 했다.
애당초 제국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이길 수 있을 만큼 쉬운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밀턴은 이 전쟁을 최대한 시간을 끄는 방향으로 잡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신을 미끼로 한 일기토인 것이다.
‘핵터 세바스티안 공작이라…. 과연 어느 정도 실력일지?’
밀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세 치 혀가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믿어야 했다.
제국의 수호신.
세바스티안 공작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런 말을 떠 올린다.
실력과 별개로 세바스티안 공작이라고 하면 제국에서는 그 상징성이 각별한 인물이다.
그는 한평생을 제국에 헌신해 왔다. 그에게 제국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친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제국이 적에게 모독을 당했다.
어찌 참으랴?
참아야 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밀턴 포레스트!”
세바스티안 공작의 거친 고성과 함께 그의 일격이 밀턴을 노렸다.
콰아앙!
마스터와 마스터의 격돌은 언제나 강력한 충격을 동반한다.
“크윽….”
“으음….”
서로 검을 교환한 두 사람은 충격의 여파를 상쇄하기 위해서 서로 떨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에 관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하수다.’
‘나보다 상수야.’
첫 번째 생각을 한 것이 세바스티안 공작이었고, 두 번째 생각을 한 것이 밀턴이었다.
즉, 순수하게 실력만 비교하면 밀턴보다 세바스티안 공작이 조금 더 우위인 것이다.
‘역시 그냥 나이만 먹은 게 아니군. 능력치만 봐도 나보다 위니까.’
밀턴은 세바스티안 공작이 달려올 때 이미 그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핵터 세바스티안]
기사 LV.9
무력 - 94 통솔 - 90
지력 - 65 정치 - 50
충성 - 00
특성 - 단결, 돌파, 안목, 지도
단결 LV.4 : 위기 상황에도 부하들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할 수 있다. 매복이나 야습 같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다.
돌파 LV.7 :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진형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레벨이 높을수록 더 강한 돌파력을 발휘한다.
안목 LV.8 : 자신이 특기인 분야에 한정해서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알아볼 수 있다.
지도 LV.9(MAX) : 제자를 육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제자의 재능이 뛰어나다면 자신을 뛰어넘는 인물로 육성할 수 있다.
특성에 관해서는 두려울 만한 능력이 없었다.
제자를 육성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게 전쟁에서 경계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무력 자체가 밀턴보다 높았다.
지금 밀턴의 무력이 93이니 아주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의 무력이 높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력 이상의 문제는….
“제국을 모독한 대가를 치러라. 포레스트 대공!”
살기가 등등한 세바스티안 공작의 기세였다.
그가 휘두르는 일격 일격에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냥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모독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그의 검에 실려 있었다.
서로 검을 마주하고 있는 밀턴은 그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젠장, 노인네가 힘도 좋아.’
일격을 교환할 때마다 손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밀턴은 이를 갈았다.
이대로 가면 시간을 끄는 건 고사하고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우우우….”
밀턴은 간격을 벌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흐름을 바꾸자. 이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결투가 아니야.’
그리고 밀턴은 전투 방식을 바꿨다.
“함성을 질러라. 제군들이여!”
“우오오오오오!”
“세바스티안 공작 만세!”
“제국이여 영원하라!”
일방적으로 밀턴을 공격하는 세바스티안 공작의 모습에 제국의 병사들은 사기가 치솟았다.
그야말로 일방적.
잘 모르는 병사들이 봐도 확연할 정도로 세바스티안 공작이 밀턴 포레스트를 압도하고 있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밀턴 포레스트는 뒤로 밀려났고 세바스티안 공작은 그런 밀턴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잘 모르는 문외한과 달리 고수의 안목에도 과연 그렇게 보일까?
“너무 서두르고 계시는군.”
슈바이커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스승의 실책을 입에 담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세바스티안 공작은 너무 힘을 쓰고 있다.
일격 일격에 혼신의 힘을 담아서 휘두르고 있기에 파괴력은 강맹해 보였지만 그 파괴력이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힘의 낭비일 뿐이었다.
원래 세바스티안 공작의 검은 정중할 정도로 완벽한 절도와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정통파 검이었다.
절대 지금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무식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세바스티안 공작과 달리 상대인 밀턴 포레스트는 그저 버티기로만 일관하고 있다.
수비에 치중하는 검술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 밀턴의 검술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길 마음 자체가 없고 그저 버티기만 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뭘 노리고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슈바이커 공작은 자신이 나서서 가세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국의 최강자가 나서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겠소.”
그런 슈바이커 공작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베이커 후작?”
그는 심안의 마스터 고담 베이커 후작이었다.
다른 사람의 변화에 민감한 그는 누구보다 먼저 슈바이커 공작이 가세하려는 의도를 읽었다.
“제국의 마스터 두 명이 합공을 했다고 하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으음….”
그건 맞는 말이다.
제국의 명예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인 세바스티안 공작의 명예에도 흠이 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자니 적의 의도가 거슬린다.
슈바이커 공작이 어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행동을 먼저 저질러 버렸다.
“포레스트 대공! 나와 승부하라!”
크게 소리치며 뛰쳐나간 남자는 바로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이었다.
“이런 미친….”
밀턴은 세바스티안 공작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난입한 플로리안 공작을 보고 신음했다.
그리고 세바스티안 공작 역시 못마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밀턴에게 떨어져서 플로리안 공작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플로리안 공작!”
“그대로는 승부가 길어질 뿐이오. 비키시오.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하겠소.”
플로리안 공작이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에 세바스티안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도 공명심을 버리지 못하는 건가?’
플로리안 공작이 왜 무리한 이유를 대면서 난입하는지 세바스티안 공작은 알 수 있었다.
원래 플로리안 공작가라고 하면 제국 최고의 기사 가문이다.
가문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했고, 적어도 3세대 중에 한 명 이상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명가의 가주로 취임한 플로리안 공작은 젊어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루카스 플로리안마저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었다.
부자가 나란히 마스터의 경지에 이름으로 인해서 플로리안 공작 가문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안 공작 가문은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자리를 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