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모두가 지금의 위기를 의식했다.
그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먼저 나선 것은 제롬이었다.
“주군, 제게 2만의 병력만 주시면 적을 막아 보겠습니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병력이 분할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롬이 용감하게 나서서 자신이 최소한의 병력으로 적을 막겠다고 했다.
“안 돼. 너무 위험하다.”
2만으로 5만을 막는 것도 위험하지만 만약 거기에 제국군의 추가 병력이 약간만 그쪽으로 이동한다면 제롬은 사지에 고립되어 버린다.
“아무리 미끼라고 해도 5만의 병력은 본국에 위협이 됩니다. 이대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안 돼. 차라리 본국의 수비를 믿고 우리가 적에게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게 낫다.”
밀턴의 주장에 제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제국과 전력으로 격돌하면 공화국만 좋은 일을 시킬 뿐입니다. 그건 주군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밀턴과 제롬의 의견이 서로 부딪히고 있을 때.
란돌 세비안이 말했다.
“테이커 후작. 적들이 우리나라의 본국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소?”
“정보에 의하면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로 보입니다.”
“우리 쪽의 이동 거리까지 포함하면 하루 정도는 여유가 있군요.”
세비안 백작은 밀턴에게 말했다.
“주군, 저에게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을 달라고?”
“반드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묘수를 생각해 내겠습니다.”
“…시간이 없는 건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밀턴은 세비안 백작의 청을 허락했다.
만약 실패하면 어쩔 것인가? 같은 질문은 없었다.
그저 밀턴은 세비안 백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담담하게 한마디를 더할 뿐이었다.
“너를 믿겠다.”
그 짧은 한마디가 세비안 백작에게는 가슴 깊숙하게 울렸다.
“예. 주군.”
그리고 세비안 백작은 바로 자신의 막사에 처박혀서 전략 지도를 놓고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란돌 세비안.
그는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레스터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전략가인 트라우스 후작의 제자로 들어갔고 빠르게 스승을 뛰어넘으면서 스스로의 천재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레스터 왕국의 내전에서 뼈아픈 패전을 겪기는 했지만 그건 멍청한 1왕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성격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자각을 했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은 여전했다.
그런 확신을 깨 준 것은 지크프리트였다.
전쟁에서 서로 부딪힘으로 인해서 실력의 차이를 실감하는 것은 기사들만이 아니다.
책사들 역시 실전에서 우열의 차이를 실감한다.
세비안 백작에게 있어 지크프리트는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벽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리트인크 공성전에서는 지크프리트의 전략에 당해서 주군인 밀턴이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밀턴은 그 잘못을 묻지 않았지만 세비안 백작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실책이었다.
그 후에도 도박에 가까운 묘수와 밀턴의 과감성으로 인해서 지크프리트를 이기기는 했지만 세비안 백작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크프리트보다 하수라는 것을 말이다.
2차 이념 대립 전쟁 때 밀턴은 원정을 나가면서 세비안 백작에게 국내의 안정과 방어를 부탁했다.
그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안심했다.
‘지크프리트에게 내 지략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 밖의 기행을 종종 저지르는 주군 쪽이 더 상성이 좋다.’
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밀턴과 지크프리트가 일진일퇴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깨달았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세비안은 밀턴 포레스트의 책사다.
그에게 지혜를 짜내 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스스로 겁을 먹고 적과의 싸움을 피한 꼴이라니?
‘내가 왜 그랬지?’
전쟁이 두려워서?
아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아니다.
지크프리트가 두려워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던 분야에서 더 나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체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야. 그래서 주군의 명을 받았을 때 얌전하게 수용했던 것이야.’
장고 끝에 자신의 본심을 깨달은 순간 세비안 백작은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얼마나 비겁한가?
이 얼마나 치졸한가?
이 얼마나 한심한가?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서 감히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 따라온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밀턴에게는 자신의 지혜가 간절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여기서 뭔가 해내지 않으면 나는 무용한 인간일 뿐이다.’
세비안 백작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핏발이 서 있는 눈으로 전략 지도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다음 날.
세비안 백작은 훌쩍 초췌해진 모습으로 밀턴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밀턴에게 말했다.
“한 가지 길을 찾았습니다.”
심력을 얼마나 소모했는지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도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의 눈은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세비안 백작을 보고 밀턴이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채용하도록 하지.”
아직 작전의 설명조차 듣지 않았다.
하지만 밀턴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란돌 세비안이 각성했습니다.]
[대군사 LV.9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특성 반전의 묘수를 각성했습니다.]
이 메시지를 확인한 밀턴은 바로 세비안 백작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란돌 세비안]
대군사 LV.9
무력 - 13 통솔 - 90
지력 - 100 정치 - 88
충성 - 100
특성 - 반전의 묘수, 전장의 현자, 육감, 냉철, 언변.
반전의 묘수 LV.2 : 열세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작전을 만들어낸다. 성공한다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아군을 구할 수 있다.
전장의 현자 LV.6 : 전쟁터를 넓게 보는 전략과 전투에 활용되는 책략이 모두 달인의 경지에 이르며 적의 계획을 간파할 확률이 높다.
육감 LV.9(MAX) : 자신이 지휘하는 군에 위급한 상황이 닥치는 것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냉철 LV.9(MAX) : 유혹이나 매수 등에 저항력이 높으며 죽음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초연할 수 있다.
언변 LV.8 : 대화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 혹은 굴복시킬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상대에게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도달했구나. 세비안.’
밀턴은 가슴이 뭉클했다.
드디어 세비안 백작의 지력이 100에 도달했다.
지크프리트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조차 100에 도달했던 것은 통솔과 정치 분야였지 지력은 99였다.
비록 1의 차이이기는 하지만 이 순간 세비안 백작은 지력 면에서 지크프리트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밀턴이 믿지 않겠는가?
밀턴은 세비안 백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말했다.
“나에게 승리를 안겨주게. 나의 군사여.”
그 한마디에 세비안 백작은 모든 것을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레스터 왕국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15만의 군대는 남아서 제국군을 상대로 대치하고, 10만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레스터 왕국의 본토를 노리고 있던 루카스 플로리안의 5만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동했다.
이 정보는 바로 안트라스의 귀에 들어갔다.
“양군의 지휘관은 누구라고 알려져 있나?”
“그게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다고?”
“예. 양쪽 모두에 밀턴 포레스트를 상징하는 대공기가 달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교란시키기 위한 위장책인 듯합니다.”
“…….”
전령의 보고를 듣고 안트라스는 자신의 부채를 선선히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지휘관의 존재를 숨긴다는 말은 내 계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레스터 왕국 쪽에도 뛰어난 책사가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안트라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 작전은 적에게 의도를 읽힌다고 해도 크게 영향이 없었다.
알든 모르든 간에 루카스 플로리안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막으려면 레스터 왕국군은 군사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제국군은 그중의 한쪽에 전력을 집중시켜서 공격하면 레스터 왕국의 전력을 절반 이하로 깎아 버릴 수 있다.
“공화국군의 움직임은 아직 변화 없나?”
“옛. 바론이 이끌고 있는 10만과 지크프리트가 이끌고 있는 20만의 병력이 대치 중입니다.”
“그래. 역시 완전한 동맹은 아니었군.”
레스터 왕국이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제국이 패권을 쥐는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으니 억지로 끼어든 것이다.
정식으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끼어든 것은 레스터 왕국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국면이었다.
‘결국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 간에 군사적인 연계는 없어. 적어도 아직은 말이야.’
공화국과 레스터 왕국이 본격적으로 힘을 모으기 시작하면 감당하기가 힘들어진다.
안트라스는 그 전에 레스터 왕국을 이 전쟁에서 퇴장시킬 생각이었다.
“지금 즉시 전군에 지시를 내리도록. 작전을 개시한다. 표적은 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15만의 레스터 왕국군 본대다.”
“옛!”
안트라스의 지시에 따라서 제국군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공화국과의 전선을 물리고 레스터 왕국의 본대를 전력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안트라스는 추가적으로 한 가지 조치를 더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외딴 막사에 홀로 찾아갔다.
그가 막사 안에 들어가자 거기에는 한 명의 남자가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정중앙에 검을 세우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 남자는 그 상태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안트라스가 그에게 말했다.
“수련 중에 방해를 해서 죄송하오. 슈바이커 공작.”
그렇다.
이 남자야말로 제국의 최강자.
공화국의 바론 대장과 함께 대륙의 최강자로 거론되는 남자 중에 한 명인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인 것이다.
“말하시오.”
그는 여전히 자세를 유지하고 안트라스에게 말했다.
“다음 전투에 힘을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서야 할 정도의 강적이 나오는 것이오?”
“아마도 밀턴 포레스트, 혹은 제롬 테이커를 상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밀턴과 제롬은 이미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강자들이었다.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전쟁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니 그 평가는 이미 제국의 젊은 마스터인 루카스 플로리안을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도 충분할 것이오.”
슈바이커 공작은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안트라스가 아무리 이 군대의 작전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크리스챤 슈바이커 공작이 바로 그렇다.
그는 사실 황제의 명령이라고 해도 자신이 내키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그런 하극상이 허용될 정도의 실력과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다행이도 안트라스는 권위로 따르지 않는 인물에게 억지로 권위를 내세우는 우행은 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다른 방법을 썼다.
“나도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늙으니 걱정만 늘어서 말이오. 어째 이번 전투에는 그대의 힘이 필요할 듯하오.”
“…….”
슈바이커 공작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안트라스의 말에는 차마 침묵할 수 없었다.
“그대의 스승인 세바스티안의 친구로서 부탁하겠소. 부디 늙은이의 노파심이려니 생각하고 따라 주지 않겠소?”
슈바이커 공작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무위 향상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
부와 권력, 명예 따위에는 초탈해져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세바스티안 공작이라는 이름 앞에서만큼은 초연할 수 없었다.
과거 몰락 귀족의 아들이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가르침을 베풀어준 스승이며 은인이다.
이 전쟁에 참여한 것도 반쯤은 스승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반은 안트라스가 제시한 한 가지 조건 때문이고 말이다.
“…·그 조건은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이오?”
“물론이오. 단, 그러기 위해서는 레스터 왕국을 먼저 처리해야 할 듯하오. 최대한 신속하게 말이오.”
“알겠소. 다음 전장에는 출진하도록 하겠소.”
그렇게 슈바이커 공작의 출진 동의를 얻어낸 안트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오.”
슈바이커 공작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요하게 자신의 세계에 집중했다.
그런 슈바이커 공작의 모습을 보며 안트라스는 생각했다.
‘역시…. 저 남자 멀지 않았어.’
안트라스는 이 전쟁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