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결국 밀턴은 지크프리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크프리트를 믿어서가 아니라 상황적으로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밍과 공격 거점은 지크프리트와 미리 맞춰두었다.
제국이 진격을 시작하고 그 진격이 8부를 넘었을 때쯤에 밀턴은 군사를 일으켰다.
그 물량은 무려 25만.
밀턴이 대공직에 오르고 나서 처음으로 레스터 왕국이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것이다.
밀턴은 직접 이 군사를 이끌고 제국군을 공격했다.
단, 공격 거점은 공화국의 선두가 아니라 후방에 따라가고 있던 후속 병력이었다.
이 후속 병력은 전방에 전진 중인 병력에 보급 물자를 전달하는 보급선이었다.
밀턴은 빠르게 몰아쳐서 이런 보급 부대를 다섯 개 이상 격파했다.
이때 제국군이 입은 병력 피해만 해도 총 5만이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서쪽 전선의 보급선이 완벽하게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크프리트는 공화국군 10만을 일으켜서 서쪽 전선의 제국군을 공격했다.
레스터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은 시점에서 공화국군 역시 제국군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전에는 레스터 왕국과의 국경의 경계를 해야 했기에 동원할 수 없었던 병력까지 모두 동원한 것이다.
거기다 이 10만 병력을 이끄는 인물도 중요했다.
지크프리트는 다른 전선을 지휘해야 했기에 나갈 수 없었다.
제이크와 맥카시 역시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지크프리트의 지시를 받아서 제국군을 견제해야 했다.
그 대신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선 인물은 공화군의 최강자 바론 대장이었다.
지크프리트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공화국에서 부동의 최강자라고 불리던 그가 10만을 이끌고 출진한 것이다.
바론 대장은 압도적인 무위로 앞장서서 제국군을 휘저었고 그가 이끄는 10만 병력은 제국군의 서부 전선을 일방적으로 유린했다.
밀턴에 의해 보급선이 끊어진 상태에서 공화국 최강자의 맹공.
안트라스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제국군의 서쪽 전선은 걸레처럼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안트라스는 부랴부랴 전략 회의를 소집했다.
“지금 즉시 서쪽의 전선 사령관들에게 후퇴를 명하라! 그리고 고담 후작!”
“부르셨소.”
고담 후작이 대답하자 안트라스는 계속해서 호명했다.
“플로리안 공작!”
“여기 있소.”
“세바스티안 공작!”
“여기 있네.”
세 명의 마스터를 호출한 안트라스는 즉시 전략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 분은 병력 10만을 이끌고 서부 전선에서 범람하고 있는 적을 막아 주시오. 더 이상 적들의 기세가 오르면 힘들어지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 명의 마스터에게 10만의 병력을 배치한 후에 안트라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한 명을 호출했다.
“루카스 플로리안 경!”
“부르셨습니까?”
“병력 5만을 맡기겠소.”
이 전쟁을 수행하고 처음으로 단독으로 병력을 맡긴다는 말을 들었다.
루카스는 희미한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무슨 임무를 하면 되겠습니까?”
“밀턴 포레스트의 목을 가져 오시오.”
심지어 임무까지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루카스는 밀턴이나 지크프리트에게 내심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지만 그 둘은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신은 제국의 안에서 별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죽어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둘 중에 한 명의 목을 직접 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의욕에 차 있는 루카스에게 안트라스가 말했다.
“밀턴 포레스트의 목을 치기 위한 작전을 주겠소.”
“감사합니다.”
“경이라면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겠소.”
루카스 플로리안은 전에 없을 정도로 최대한의 공경을 담아서 안트라스에게 말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은의 현자님.”
그리고 루카스는 안트라스에게 작전을 전달 받고 가장 먼저 출진했다.
그런 루카스를 보고 도미닉 플로리안 공작이 안트라스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부족한 내 아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긴 것 아닌가 하오.”
의욕을 보이는 아들의 뒷모습에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 염려가 되었던 플로리안 공작이다.
그런 플로리안 공작에게 안트라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라면 충분히 맡은 역할을 다할 것이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믿겠소.”
안트라스의 장담에 플로리안 공작은 우선 아들을 믿기로 했다.
단, 그는 이때 안트라스의 말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제국군이 대응을 하기 시작하자 당연히 밀턴의 귀에도 들어왔다.
“주군,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하게 보고해봐.”
밀턴은 전략 지도를 펼치고 제롬에게 상세 보고를 명령했다.
“예. 우선….”
제롬은 전략 지도의 말을 움직이면서 정찰대가 가져온 정보를 설명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밀턴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국은 서쪽 전선을 버리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아쉽군. 어떻게든 살리려고 매달렸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밀턴은 아쉽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제국군이 서쪽 전선을 되살리기 위해서 공격해 왔다면 제국군을 최대한 유인해서 공화국군과 함께 합공해서 막대한 타격을 준다.
라는 계획을 준비해 놨었다.
하지만 제국군이 과감하게 서쪽의 전선을 포기해 버렸다.
제국은 마스터 세 명이 이끌고 있는 10만의 병력으로 레스터 왕국군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선을 펼쳤다.
이건 서부 지역을 되찾는다기보다는 레스터 왕국군의 침범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것은 고담 후작, 플로리안 공작, 세바스티안 공작이라고 합니다.”
“쟁쟁한 이름들이군.”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바라봤다.
‘공격 못 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밀턴은 제국군의 방어선과 부딪히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밀턴에게 제롬이 말했다.
“주군, 우리가 공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롬도 밀턴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제국군은 갑작스런 레스터 왕국의 공격으로 인해서 상당한 타격은 입은 상태다.
여기서 기세를 살려서 적을 공격한다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다만 밀턴이 망설이는 것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할까?”
“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제롬에게 밀턴이 말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너무 열심히 싸우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아아….”
제롬은 이해가 갔다.
이 전쟁의 상황은 꽤 복잡했다.
제국의 공격에 공화국이 무너지려고 하자 레스터 왕국은 일단 끼어들었다.
공화국이 무너진 후에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쥐게 된다면 도저히 감당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국과 군사 동맹을 맺었고 이렇게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너무 많은 전력을 도모하는 것은 생각을 해 봐야 할 일이지.”
제롬은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 상황이 다르다.
레스터 왕국의 입장에서는 제국도 공화국도 모두 위험한 상대일 뿐이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지. 그리고 공화국에 서신을 보내서 제국을 압박하게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롬이 돌아가려고 할 때 막사 안으로 트라이크가 들어왔다.
“전령이 새로운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보고 하도록.”
“적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5만의 병력이 우리 군의 남쪽으로 우회하고 있습니다.”
“5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숫자였다.
“자세한 이동 경로는?”
밀턴의 질문에 트라이크는 전략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발견된 곳은 여기고, 그 후에 보고가 들어온 위치는 여기입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 본토를 노리는 건가?”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5만의 병력이 이동하는 곳은 지금 밀턴이 이끌고 있는 본대의 남쪽이었다.
그 방향을 크게 우회해서 돌아서 이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동하면 레스터 왕국의 남부 지역 본토에 닿을 것이다.
“군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은?”
“루카스 플로리안이라고 합니다.”
“플로리안 공작가의 도련님이군.”
밀턴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제국군의 병력 상황은 전쟁 초기에 비하면 많이 변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공화국을 압박했던 전쟁 초기와 달리 지금은 물량에서 큰 우위가 없었다.
레스터 왕국과 공화국이 서로 군사 동맹을 체결함으로 인해서 두 나라는 제국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 병력 규모는 레스터 왕국이 25만, 공화국의 병력이 30만이다.
거기다 레스터 왕국이 기습적으로 끼어들어서 제국군의 서쪽 일대를 박살내 버림으로 인해서 제국군에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금 제국군은 병력적으로 오히려 열세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5만의 병력을 따로 움직이다니?
심지어 이끌고 있는 지휘관은 마스터인 루카스 플로리안.
‘이건 무시할 수가 없군.’
밀턴은 즉각 대응기로 했다.
“내가 직접 대응한다. 남부 기사단과 10만의 병력을 준비하라.”
“예. 주군.”
밀턴의 지시를 받아서 제롬이 즉시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주군.”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세비안 백작이 밀턴을 만류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병력 규모가 크다 보니 자체 점검에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그건 괜찮네. 그보다 말리는 이유는 뭔가?”
밀턴의 물음에 세비안 백작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 5만의 병력은 유인책입니다. 걸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유인책이라고?”
“예. 주군께서는 방금 제국군 5만을 잡아내기 위해서 10만의 병력을 이동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지.”
“우리 군의 전력이 양분된다면 제국군은 각개격파를 시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에 대응해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는 10만의 대군은 언제든지 우리 군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10만이 고작이지. 공화국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군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화국에 대한 대응을 포기한다면 어떨까요?”
“아….”
순간 밀턴은 탄성을 질렀다.
착각하고 있었다.
제국군의 입장에서 지금의 전선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아니었다.
지금 삼국이 부딪히고 있는 전선은 공화국의 영토.
구 스트라부스 왕국의 영토다.
원래 제국군의 영토도 아니었을 뿐 더러 공화국이 후퇴 과정에서 기반 시설을 다 파괴했기 때문에 영토로서의 가치도 낮았다.
이걸 굳이 지켜야 할까?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 군이 양분되는 순간 제국군은 전 병력을 집중시켜서 우리 왕국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 공격 방향이 주군이 되실 수도 있고, 우리 군의 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로서는 피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렇군.”
밀턴은 순순히 세비안 백작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사실 어떻게 안 받아들이겠는가?
그는 밀턴이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책사였다.
비록 지크프리트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인재였다.
“하지만 세비안, 자네 말을 따라 함정이라고 쳐도 이 5만의 병력을 묵인할 수는 없지 않나?”
이대로 방치해서 적이 본국을 공격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성가신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건 대응을 해야 했다.
세비안 백작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이걸 무시하면 아마 적은 우리나라의 본국을 공격해서 후방을 교란시킬 겁니다.”
“본국이 공격당하면 보급선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세비안 백작은 전략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생각했다.
‘묘수다. 이쪽에서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안 받을 수가 없는 수를 던졌어. 이게 지크프리트조차 압도한 남자의 지략인가?’
세비안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유인책을 받아들이면 아군의 병력이 분열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후방의 본국이 위험해 진다.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